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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군과 대구 참사랑의 27번째만남 창덕궁탐방기
제2부, 조선 왕들의 흔적을 찾아서.....
어디로: 창덕궁
탐방일: 2019년10월27일
누구와: 대구참사랑산악회와 서울독립군
몇 번째: 스물일곱 번째 만남
탐방시간: 2시간(15:00~17:00)
탐방코스:돈화문-천연기념물향나무-연경당-청심정-옥류천-취규정-존덕정과 관람정-애련지와 애련정-의두합-영화당과 규장각-관물헌-낙선재-희정당-대조전과 흥복헌-선정전과 빈청-인정전-진선문과 금천교-금호문
창덕궁(昌德宮)
이름만 들어도 가슴 설레는 곳입니다.
옛날 왕들은 후원에서 어떻게 시간을 보냈을까?
그리고 왕들의 흔적은 어떻게 남아 있을까?
이런 점들이 궁금해 이번 만남은 산행과 고궁 탐방을 공유하기로 했지요.
2시간여 창덕궁을 돌아보기는 했지만 사실 주마간산 식으로 돌아본 것이고 제대로 돌아보면 4시간은 걸려야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각각의 성향이 다르기는 하지만 한 가지를 꼽는 다면 무엇이 떠오릅니까?
성봉현님은 단연 인정전 앞 품계석이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는 텔레비전에서 자주 사극을 접하면서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그러지 않다는 점이 크게 작용한 것 같습니다.
자세히 이야기 한다면 품계석은 신하들의 무질서함을 바로 잡고자 정조왕 때 만들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극에서는 시대와 상관없이 품계석이 등장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대중이 이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그냥 넘어 간다는 것인데 영화나 연속극에서 정조 이전에 나오는 장면에서 품계석 옆에서 왕에게 읍하며 "아니 되옵니다." 하는 장면은 모두 사실과 다른 사기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600여 년 전 조선시대로 들어가 봅니다.
1.오늘은 당상관 이상의 대우를 받는 날, 돈화문(敦化門)
돈화문은 창덕궁의 남문이며 정문입니다.
태종임금이 1405년에 창덕궁을 짓기 시작했으며 6년이 지나 돈화문을 세우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창덕궁 보다 먼저 지은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은 3칸으로 지어졌는데 실수를 가장한 본심인지 정말 실수를 했는지 돈화문은 5칸으로 지어졌습니다.
옛날에는 황제국인 중국에서만 5칸의 문을 만들 수 있었고 그 외 속국들은 3칸의 문을 만들었다고 하네요.
사건이 이쯤되자 해결책을 강구하게 되었으니 급한 김에 양쪽 끝 칸을 2층 누각으로 오르는 계단으로 만들어 위기를 모면했다고 합니다.
현재의 돈화문 5칸 중 양쪽 끝 칸은 2층으로 오르는 계단, 나머지 3칸 중 가운데는 왕만 지날 수 있는 곳이고, 밖에서 볼 때 우측은 들어가는 문 좌측은 나오는 문입니다.
이문은로 다니는 사람들은 아무나 지나는 것이 아니고 신분이 높은 사람들만 지날 수 있는데 종3품 이상만 정문으로 지날 수 있습니다. 종3품이라면 당상관으로 대감이라는 칭호를 받을 수 있는데 지금으로 보면 3급 공무원 그러니까 국장이 되겠네요.
그럼 당상관 밑의 직위를 가진 사람들은 궁궐 출입이 안 되나?,
아니지요.
신분이 낮은 사람들은 작은 문으로 출입을 했는데 관람을 마치고 나온 문, 그러니까 금호문이 됩니다.
현시대에는 창덕궁 정문으로 출입하자너요, 모두 당상관 이상의 대접을 받고 있는 셈입니다.
2.창덕궁의 역사를 느낄 수 있는 천연기념물 제472호 회화나무
돈화문을 들어선 넓은 공간에 있는데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아주 오래된 회화나무를 볼 수 있는데 이 회화나무가 천연기념물 제472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한 나무를 특정한 것이 아니고 8나무를 합쳐서 천연기념물로 지정한 것인데 아마도 이중 2나무 정도는 죽었을 것이므로 죽으면 죽은 나무만 천연기념물에서 빠지고 나머지는 그대로 천연기념물로 지속됩니다.
돈화문 광장에서 우측으로 가며 내전을 보는 게 맞지만 우리일행은 거꾸로 관람합니다.
직진으로 가면 궐내각사가 있습니다.
오래 전 모두 불타 없어진 것을 2005년경 다시 복원한 건물 들입니다.
궐내각사 중 금천 좌측으로는 규장각, 검서청, 그리고 봉모당, 책고 등 4동의 건물이 있어요.
규장각은 정조가 처음 후원에 세웠는데 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겼는데 규장각은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기관으로 도서열람이나 서고로, 공부를 하던 곳입니다.
규장각 옆에는 검서청이라는 기관이 있습니다.
검서청은 규장에 비치할 책을 가리는 업무를 관장하는데 궁궐서적으로 합당치 않는 책, 그러니까 풀레이보이 책, 연애소설 등은 이곳에서 불합격으로 처리하여 규장각에 비치할 수 없었을 것이고, 산에 관련한 당시에는 없었지만월간 산, 사람과 산, 등은 걍 합격이 되었을 것 같네요.
규장각 뒤로는 봉모당이 있는데 봉모당은 후원 규장각에 보관했던 선대왕들의 봉안 등을 보관하던 곳인데 후원 규장각을 이곳으로 옮기며 함께 지은 건물이지요.
봉모당 뒤로 건물 하나가 있는데 책고(冊庫)로 규장각에 비치하는 책을 보관하던 곳이지요.
3.콘파스가 남긴 상흔이 남아 있는 천연기념물 제194호 향나무
궐내각사 규장각과 봉모당 사이에 큰 향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이 향나무가 천연기념물 제194호인 향나무입니다.
단체로 찍은 사진을 보면 향나무 상부가 없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첨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고 2010년9월1일 태풍 곤파스가 지나며 강풍에 의해 향나무 상부가 훼손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천연기념물이라 훼손된 부분을 바로 잘라내지 못한 채 5일 정도 방치해 두었는데 이유는 문화재위원들이 와서 직접 보고 의견서를 써야 했기 때문이었지요.
오래전 훼손되기 이전 사진을 참고로 붙이면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는데 채택되지 않았지요.
함께 올린 사진은 훼손되기 이전에 찍은 사진으로 비교해 보면 됩니다.
4.금천의 비밀, 보이는 금천 아래로 물이 흐르는 진짜 금천이 있다.
궁궐은 어느 곳이던지 천을 끼고 있습니다.
궁궐 안에 있는 천은 궁궐의 외부공간과 내부공간을 구분하며 경계나 규율도 삼엄하지요.
궁궐의 외부공간과 내부공간을 구분하는 천을 금천이라 부르는데 다른 궁궐은 금천(禁川)이라 불렀으니 누구라도 함부로 천을 건널 수 없다는 뜻인 반면 창창덕궁의 천은 금천(錦川)으로 비단결이 곱고 부드러운 천이라고 했습니다.
금천을 보면 물이 말라 있고 바닥과 축대를 보면 대리석으로 잘되어 있는데 이는 원래 금천의 모습이 아니며 1995~2005년 궐내각사를 복원하며 수리한 것이며 더 놀라운 건 우리가 보는 금천 아래 조선시대의 금천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현재 금천은 이중 구조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아치형 다리를 건너며 금천을 건넙니다.
다리를 건너 약50~60m 지나면 길이 Y자 형태로 갈라지는데 이곳 좌측에는 작은 문이 있는데 문의 이름은 요금문이라고 하는데 요금문이 문 값을 하는 것 같아요.
문값?
숙종시대에 대단한 쌈박질이 있었자너요, 얼마나 쌈박질이 심했으면 중전이 짤리는 일이 일어났겠어요.
눈치 챘지요.
바로 희빈장씨와 인현왕후의 시기와 다툼으로 대단했을 것 같아요.
우리는 역사에서 또 영화나 연속극에서 희빈장씨는 요염하고 악착같아서, 인현왕후 정숙하고 할말을 다 안해서 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당시 일을 누가 알겠습니까? 아마도 인현왕후가 무지 못 생겼을지요......
둘이 싸워 이긴 쪽이 희빈장씨가 되다보니 인현왕후는 폐서인이 되어 이곳 요금문으로 쫓겨났다고 하네요.
인현왕후가 쫓겨나간 문, 오래 세인들에게 기억될 만한 문이 되니 값을 톡톡히 한다고 봐야지요.
Y자형 3거리에서 우측으로 오릅니다.
50m정도 올라 좌측 숲속에 명물이 하나 있지요.
천년을 살아가는 느티나무가 있지요.
원래 고목은 거의 죽었고 북쪽으로 조금 살아있는 껍질이 생명을 이어가며 천년의 끈을 놓지 않고 조선의 역사를 묵묵히 지켜보고 현세 복잡하고 쌈박질, 그리고 아수라같은 세상을 지켜보고 있네요.
다시 길을 따라 50여m올라 고개 위에 도착하니 이제부터 창덕궁 후원에 들어선 것입니다.
창덕궁 후원은 이름도 다양합니다.
대중에게 제일 많이 알려져 있는 비원, 후원, 북원, 금원, 상림, ...
고갯마루에서 계단을 따라 내려섭니다.
계단을 내려서니 궁궐인데 단청이 되어 있지 않은 집이 나오네요.
궁안에 무슨 사가?
궁궐 짓기 이전부터 있던 양반 집인가?
아니지요,
궁궐 속에 사가는 맞지만 궁궐이 생기기 이전부터 있던 집은 아니지요.
5.궁(宮)안에 양반집을 지어 아버지에게 선물하다, 연경당(演慶堂)
연경당(演慶堂)입니다.
연경당의 뜻은 "경사가 널리 퍼진다"는 뜻입니다.
연경당은 손조의 아들 효명세자가 순조에게 궁궐안에 사대부집을 지어 선물했다고 하는데 말이 선물이지 지 돈이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지가 벽돌 한 장 쌓은 것도 아니고 말로 집을 짓고 아버지에게 효도했다고 하니 미담은 조선이 망하고 대한제국에서 대한민국이 된 지금까지 남아 있습니다.
옥류천을 돌아 나올 때 다시 효명세자 이야기를 하도록 하고요, 대문인 장락문을 지나면 다시 문이 좌, 우로 나오지요.
좌측은 안채로 수인문이 있고, 우측은 바깥채로 장양문이 있는데 장양문으로 들어섭니다.
장양문으로 들어서면 사랑채가 나오고 넓은 마당이 나오는데 마당에는 의자가 놓여 있군요.
무슨 의자????
2010년인가부터 시작한 달빛기행이라는 행사를 하고 있지요.
문화재보호재단이 관광공사와 함께 하는 행사로 우리문화재를 널리 알린다는 뜻에서 시작했는데 첨에는 3일 동안 했는데 이제는 6개월 이상하나봅니다.
그러니까 궁궐 야간개장인데 일일이 설명하긴 그렇고 조명과 곳곳의 행사가 보기 좋은데 그만큼 비싸지요, 얼마냐고? 3만원입니다.
연경당은 달빛기행 마지막 공연이 있는 곳입니다.
연경당은 양반집의 구조를 본 따서 지었다고 하는데 안채에서 바깥채로 이어지는 여러 개의 미닫이문을 열어 놓으면 한눈에 바깥채까지 볼 수 있는데 안채는 여자들의 공간이라고 볼 수 있고 바깥채는 남자들의 공간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기둥마다 주련이 달려 있는데 주련은 기둥에 목판에 5언 또는 7언 절규로 시를 적어 걸어 놓는 것인데 대부분 시문은 고서나 중국의 문헌에 등장하는 구절이 대부분입니다.
바깥채 우측에 별개의 집이 있는데 이곳은 사랑채입니다.
선향재라고 하는데 이곳은 손님을 맞아 담소를 나누는 공간이면서 독서를 하거나 책을 보관하는 서고로 이용됩니다.
선향재의 특이한 점은 서향으로 지어 햇볕이 드는데 다른 곳에는 없는 차양막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그것도 도르래를 이용해서 차양을 접거나 펴기도 하는 현대식이라는 점이지요.
선향재 뒤에는 농수정이라는 정자가 있는데 시간이 없어 안내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역방향으로 구경을 하게 되니 연경당을 나와 취규정길로 들어섭니다. 냉천을 지나 야트막한 오르막을 오르면 출입금지 팻말이 있는 곳 금줄이 매여 있군요.
들어가지 말라고 하는데 이곳은 꼭 가서 설명할 이야기가 있으니 들어가 볼까요?
6.비가 온 후 달구경을 하던 곳, 청심정(淸心亭)
아~ 작은 정자가 하나 있네요.
근데 정자치고는 보잘 것 없군요,
현판도 없고 앞 뒤 모두 숲으로 둘러싸여 조망도 없는데 무슨 정자????
그럴 거 같으면 지가 왜 가지 말라고 하는 델 들어가자고 했을까요.
정자 이름은 첨심정(淸心亭),
직역하면 마음이 맑아지는 정자네요, 여기만 오면 마음이 상쾌해지나 봅니다.
이 정자는 달빛구경을 하는 곳입니다,
그것도 아무 때나 달빛구경을 하는 것이 아니고 비가 온 후 갠 뒤 달빛구경을 하는 곳인데 하늘을 바라보며 달구경하는 것이 아니고 빙옥지 호수에 비친 달을 보는 거지요.
빙옥지(氷玉池)가 뭐고 어디 있는데요.
정자 앞에 작은 석지(石池)가 있는데 이곳이 빙옥지입니다.
석지 동편에 작은 거북석상이 있는데 거북 등에 氷玉池(빙옥지)라고 쓴 글씨가 있는데 이 글씨는 숙종의 어필입니다.
뒤 비가 온 후 맑게 갠 하늘에 달이 뜨면 이곳 정자에 나와 빙옥지에 가득 담긴 물 위로 비친 달을 보며 달구경을 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달구경하는데 여자가 있었겠네요?
당근이지요.
누구???
이 정자는 숙종이 만들었지요.
이 청심정을 짓기 전 이곳에는 천수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다고 하는데 숙종이 천수정을 헐고 그 자리에 정자를 세우고 이름을 첨심정이라 하고 달구경을 한다고 여자들을 델구 납셨다는 거지요.
뭐 감잡히는 거라두.........
숙종이라면 인현왕후와, 아니면 희빈장씨? 그렇지만 장희빈은 아니겠지 모?
땡 틀렸습니다.
장희빈이 정답일 겁니다.
이 정자는 1688년 지었는데 이때 숙종은 희빈장씨한데 미쳐있을 때 거던요, 추측 건데 이곳에 희빈장씨를 델구와서 노는 거 보고 눈알이 뒤집힌 인현왕후가 장희빈 싸대기를 때리지 않았을까? 그러자 장희빈이 숙종에게 꼬아 바쳤겠지요. 질투는 칠거지악 중 하나로 칠거지악을 들어 1689년 인현왕후는 폐서인이 되어 요금문으로 나가게 되지 않았을까?
아 그렇군요.
비갠 하늘 밝은 달이 뜨면 이곳 빙옥지에 물을 가득 채우고 장희빈과 함께 상림에 나와 달구경을 하는 거지요.
이 풍경을 청심제월(淸心霽月)이라고 하는데요, 청심제월은 상림10경 중 하나지요.
이만하면 왜 들어가지 말라는 곳을 들어왔는지 알겠지요.
눈을 살며시 감고 숙종과 희빈장씨가 술을 마시며 달구경하는 모습을 상상해보세요,.................
다시 취규정길로 들어서서 5분가니 넓은 길이 나오고 우측에는 정자가 있네요.
차수근회장은 팔, 달, 허리, 무릎, 머리까지 아프다고 하니 정자에서 독서나 하고 있고..... 나머지는 좌측 비탈진 길로 갑니다.
옥류천(玉流川)!
구슬 같은 물이 흐르는 천이라~~~~
조선시대에는 대감이라고 불리는 지체 높은 사람들도 이곳을 가보고 싶어 했지만 한 번도 와보지 못하고 죽은 대감만 해도 수백트럭은 될 것입니다.
그만큼 옥류천은 왕들만 와서 풍류를 즐기는 곳이었던 곳으로 대감이라고 해서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고 왕의 부름을 받은 사람만이 어쩌다 한, 두 번 들어가 볼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왕이 뜨면 당연히 여자도 붙는 것인지라 중전 또는 후궁들이 배석했을 것입니다.
옥류천에는 정자가 5이 있습니다.
소요정, 태극정, 청의정을 상림3정이라 부르고 그 외 취한정과 농산정이 있지요.
조선과 대한제국을 통 털어 27명의 왕이 있었는데 태조와 정종은 창덕궁을 짓기 이전의 왕이었으므로 창덕궁을 짓고 이후 25명의 왕이 창덕궁에서 정사를 펼쳤는데 옥류천과 연관지어 생각할 수 있는 왕은 인조와 숙종 그리고 정조를 꼽을 수 있는데 그 외 22명의 왕의 기록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네요.
옥류천은 인조가 조성했으며 소요암에 어필도 남겼고, 숙종도 보지는 못했지만 장희빈과 후궁 그리고 궁녀들과 무척이나 이곳에서 놀았다고 생각하면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소요암에 오언절규의 시를 남긴 것이 숙종이었으니까요, 바위에 시를 남길 정도라면 가죽 신발을 수십개는 옥류천 때문이 거덜났을 겁니다.
옥류천으로 가 볼까요~~~
7.옥류천에 오심을 반기는 취한정(翠寒亭)
내리막길을 내려서면 날렵한 정자가 나오는데 취한정이라는 현판이 달려 있군요.
취한정(翠寒亭)
숙종임금 이전부터 독서와 휴식공간으로 사용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취한이란 푸른 소나무와 찬 개울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옛날에는 이곳에 소나무 숲이 울창하여 여름에도 한기가 감돌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 정자는 왕이 소요암 뒤에 있는 어정의 약수를 마신 후 잠시 쉬었다 가는 공간으로도 이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자세히 보지 않았겠지만 취한정은 본래 문이 달려 있던 정자로 문 장식을 부착했던 자국이 나타나 있는데 언제 훼손되었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8.옥류천의 꽃, 소요암과 옥류폭포.
옥류천의 핵심 단연 소요암입니다.
취한정을 지나 갈림길에서 좌측으로 들어서면 소요정이 있고 소요정 왼편으로 소요암이라는 바위가 있으며 소요암 앞에는 경주 포석정과 같은 바위를 파서 물골을 낸 부분을 볼 수 있으며 물골을 지나 물은 아래로 떨어지게 되는데 이곳은 옥류폭포입니다.
소요암에는 숙종의 오언절규 시가 음각되어 있고, 아래는 옥류천을 조성한 인조의 어필인 玉流川이라는 3글짜가 음각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소요암 못에서 물골을 따라 흐른 물은 아래 폭포로 떨어집니다.
왕들은 궁궐에 폭포가 없었으니 2m도 되지 않는 바위를 깎아 폭포를 만들고 이 폭포를 보며 시상을 떠올리고 시를 읊으며 술을 마셨겠지요. 우리는 설악산만 가면 100~300여m되는 폭포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보고 또 보지만 말입니다.
분명 소요암에서 술을 마시며 흥겨워했을 겁니다.
소요암에 음각된 숙종이 지은 시를 알아보지요.
비류삼천척(飛流三百尺)이니 날아 흐르는 물이 삼백척이요
요락구천래(遙落九天來)라 아득히 떨어지는 물은 구천에서 내리네
간시백홍기(看時白虹起)이니 볼 때 흰 무지개 일고
번성만학뢰(翻成萬壑雷)라 골짜기마다 우레 소리 가득 하네
해설이 필요하겠네요.
비류삼천척->폭포로 떨어지는 물이 300척이라, 1.6m정도 되는 폭포를 삼백척이라했으니 1척이 30cm, 300척은 9000cm, 100cm는 1m, 300척은 90m라는 얘기네요. 과장법이 너무 심한 것 같네요.
요락구천래->1.6m밖에 안 되는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소리가 아득하게 들리는 게 구천에서 들리는 것 같다고?
간시백홍기->처다 보니 흰 무지가가 일고
번성만학뢰->1.6m밖에 안 되는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소리가 골짜기에 울려 퍼지는데 마치 천둥치는 소리 같다는 이야기
소요암에서는 유상곡수연을 빼 놓을 수가 없지요.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
정조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대신들을 이곳으로 자주 초대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소요암 물골에 술잔을 띄우고 술잔이 자기에게 올 때까지 시를 지어 올리는 게임인데 술잔이 올 때까지 시를 짓지 못하면 벌주를 내리며 풍류를 즐겼다고 하는데 이것이 유상곡수연이지요.
기록에 의하면 「1793년 봄, 정조임금이 신하들과 그 자제를 후원으로 부르고 승지나 사관을 지냈던 사람들을 초청하여 후원의 여러 경치를 구경케 하고 옥류천에 이르러 술과 음식을 베풀었으며 신료들로 하여금 소요암 암반의 굽이쳐 흐르는 곡수에 술잔을 띄우고 그 술잔이 자기 앞을 지나기 전에 시를 짓고 잔을 들어 마시게 하였는데 저녁이 돼서야 끝이 났다.」고 합니다.
이 때 정조와 신하들이 유상곡수연을 하며 지은 시는 고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9.소요암과 옥류폭포를 굽이보고 있는 정자, 상림3정의 소요정(逍遙亭)
소요암 옆에는 소요정이 있습니다.
소요정의 본래 이름은 탄서정이라 했지요.
1636년 인조가 옥류천을 조성하며 정자를 세우고 탄서정이라 했는데 약250년이 지난 정조 때 이름을 소요정이라 바꿉니다.
그러면서 바꾼 이유를 마음과 땅이 서로 잘 만남 때문이라고 하며 부연하여 설명했는데 부연설명은 생략합니다.
많은 왕들은 옥류천에 와서 소요암 앞에 있는 이 정자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을 것같군요, 주변에 숲이 우거지고 꽃이 만발한 때 곁에 사랑스런 여자를 동반하고 술 한 잔기울이던가 조용히 독서를 한다던가. 이보다 더 좋은 그림이 있을까? 싶습니다.
소요정을 지나 북쪽에 의젓한 정자가 있군요 명찰을 태극정이라고 달고 있네요.
그러고 보니 이 정자가 소요정과 청의정과 함께 상림3정이군요.
네, 맞습니다.
10.운영정이 인조에 의해 다시 태어난 상림3정의 태극정(太極亭)
태극정이란
우주 만물의 근원이 되는 실체 또는 하늘과 땅이 분리되기 이전의 세상 만물의 원시 상태 등으로 설명하며 인조임금은 태극정이라 이름 지었는데 인조임금이 헐고 그 자리에 정자를 짓고 태극정이라 한 것이지요.
운영정의 모습은 어떠했는지? 구름이 비친 풍경을 감상하는 정자....
인조가 이렇게 선왕이 지은 정자를 헐고 다시 지을 때 운영정을 세웠던 선왕이 살아 보았다면 어떤 느낌이 들까?
????
태극정에서 우리 다 함께 옥류천을 온 기념으로 기념사진 찍자구요~~~
거시기, 뭐시냐? 차수근회장이 빠져서 쬐끔 아쉽기는 하지만,
살짝 웃어요, 그 사이 찰칵..........
태극정 옆에는
어라~ 이게 모지?
정자는 초가에, 앞에는 작은 논이 있고, 논 옆에는 볏단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고..........
이게 몹니까?
이야기가 재밉지요.
11.왕이 백성과 하나가 되다, 상림3정의 청의정(淸猗亭)
조선시대는 농업을 중시 여기던 시대지요.
농사는 천민들이 주로 지었는데 백성들의 어려움을 왕이 직접 체험으로 고생스러움을 알고 고생하는 백성들과 함께한다는 의미에서 매년 모내기와 벼베기 행사를 직접 했다는 것이지요.
지금도 매년 5월 하순에 이곳에서 농촌진흥청과 현대건설이 문화재청과 공동으로 청의정모내기행사와 가을이 되면 봄에 심은 벼를 수확하는 벼베기 행사를 치르고 있지요.
구미가 당기는 건 모내기 행사를 하는 날 타임을 잘 맞춰 후원을 오면 이곳에서 막걸리와 빈대떡을 직접해서 관람객들에게 대접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글구 현대건설에서 서산 간척지에서 농사지은 쌀을 1kg씩 나누어 주기도 하지요.
관심 있으면 내년 5월을 기억하고 있어요~~~
옥류3정을 보았으니 그만 가자고요....
가는 길에 이야기 거리가 하나 더 남아 있네요.
12.헤경궁 홍씨의 여운이 남아 있는 농산정(籠山亭)
나오는 길가 허름한 건물이 있는데 부엌도 딸려 있고 이건 모야?
옥류천 지킴이 살림집인가?
아니지요.
이건 살림집이 아니고 정자입니다.
정자? 무슨.....
명찰은 왜 안 달고 있는 거지요?
명찰이 없어도 이름을 알 수 있지요, 이름은 농산정이라고 하는데 이곳은 사도세자의 부인이자 정조의 엄마, 이정도면 누군지 알지요????
아~ 혜경궁 홍씨군요.
그러합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가 광주땅 배봉산 자락, 그러니까 지금은 휘경동이 되네요, 배봉산 자락에 묻혀있는 것을 수원에 장사하고 지금은 융릉이라고 부르지만 당시 현릉원으로 이름하였지요.
정조는 수원 아버지 묘인 현릉원 전배를 마치고 수원 화성에서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환갑잔치를 베풀었는데 어차의 긴 행렬이 지지대고개를 넘어 수원을 다녀왔다고 합니다.
이때 수고를 한 많은 사람들이 고마워 혜경궁 홍씨는 당시 수고한 많은 사람들을 옥류천으로 초대해서 회식을 베풀었다고 하는데 바로 이곳 옥류천으로 초대했다고 하는 것은 최고로 대우를 한 겁니다.
옥류천을 오며 존덕정 일대 구경도 하고 신비스럽게 여기던 옥류천 구경도 시킨 후 농산정에서 회식을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부엌이 딸려 있나 봅니다.
이야기 나온 김에 사도세자 이야기를 하나만 더 하고 가지요.
기록에 의하면 사도세자는 광주 배봉산 자락에 묻혀 있었는데 정조가 왕이 되며 수원 지금의 융릉 자리로 이장한 것입니다.
초장지인 배봉산 자락은 어디쯤일까?
늘 궁금했었는데 제 나름으로 풍수지리상으로 전농동 로터리에서 중곡동으로 넘어가는 곳 왼편쪽일 것이라 생각했었지요.
그런데 우연히 자료를 하나 얻게 되었는데 1960년대인지? 오래전 조선일보기사에 초장지에 대한 기사가 나왔는데 제기동 위생병원, 지금은 삼육대학교 대학병원이 되겠네요.
위생병원 확장을 위해 산을 밀고 있었는데 돌퀘가 나왔다는 겁니다. 돌퀘를 열어보니 이곳이 사도세장의 초장자라는 메모가 나온 거라는 겁니다.
이런 횡재가.........
위생병원으로 달려가 청소부, 경비, 식당일 하는 분 닥치는 대로 사도세자의 초장지를 물어보았지만 알 수가 없었지요.
누군가 귀뜸해서 총무부장을 만나게 되었는데 총무부장님도 제가 입수한 정보는 알고 있었는데 그 외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는데 총무부장님은 지금 주차장일 것이라는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네요.
“왜 주차장이라고 생각하느냐?” 물으니 이곳 원주민들이 주차장 일대를 제각골이라고 불렀다고 했다는 것인데 오래전에 세자의 제각이 있었다는 추측에서였는데 공감가는 말씀이었습니다.
이런 c~발
이런 건 문화재청에서 알아보러 다녀야지, 왜 내가 이러는지 몰라(어 이건 나훈아가 부른 노래 가사인데..........)
하나가 더 있네요.
조선을 망국으로 이끈 무능덩어리 왕 순조도 이곳 농산정에 기록을 남겼습니다.
순조는 이곳에서 시험을 치르도록 명했는데, 무슨 셤???
지금이나 옛날이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권력자들이 판치고 있자너요?
가끔 뉴스에 권력형 일자리, 그러니까 압력을 넣어서 취직하는 거 그런 거지요.
예전에도 이런 게 난무했는데 순조 때니 김조순 일가들의 부정이 하늘을 찌를 때였는데 얼마나 골치 아팠으면 순조는 압력으로 궁궐에 취직한 사람들을 이곳 농산정으로 불러 모아 진짜 실력이 있는지 셤을 치렀다고 하는 기록이 있지요.
결과는 잘 모르겠는데 뻔하지 않을까요, 김조순 등 안동권씨가 걍 넘어가라는 사람은 빵점을 맞았어도 안 짤렸을 것이고 정적과 견제세력인 풍양조씨가 취직시킨 사람들은 깡그리 정리 했을 것 같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며 비탈진 길을 올라 취규정으로 올라섭니다.
정자가 하나 있는데 명찰이 있네요.
13.교육을 지칭한다는 별자리 규성을 보다. 취규정(聚奎亭)
취규정은 옥류천에서 올라와 존덕정으로 내려가기 전 우측에 있는 정자로 대구 참사랑 차수근회장이 팔, 다리, 허리, 머리가 아프다며 옥류천을 생략하고 이곳에서 도를 닦고 있지요.
우리가 올라서자 마치 귀찮다는 얼굴로 느긋하게 정자에서 내려설 채비를 하네요.
이 정자는 인조 때인 1647년 지은 정자로 휴식과 독서 공간으로 이용되었던 곳이지요.
취규란 "별들이 규성으로 모여든다."는 의미로 규성은 하늘에 있는 28개 별자리 중 하나로 문장을 주관하는 별자리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규성으로 별들이 모여든다는 것은 인재가 세상에 나와서 천하가 태평하고 도덕과 학문이 높아짐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하니 공부하고, 책 읽는 정자라는 이야기가 되겠네요.
취규정을 지나 우측 샛길로 내려서니 그럴 듯한 풍경이 펼쳐집니다.
정자도 보이고 못도 위아래로 있고, 옆에는 작은 건물도 있고 보기가 갠찬은데요.
여기가 어디지요?
14.인조의 셈세함과 정조의 왕권강화가 담긴 정자, 존덕정(尊德亭)
존덕정은 관람지 위에 작은 연못 옆에 1644년 인조임금 때 지은 정자로 처음에는 육각형으로 지었다고 해서
육면정으로 불렸으나 나중에 존덕정으로 바뀌게 되지요.
존덕정은 정6각형으로 건물의 반 정도가 존덕지 물위에 떠 있는 형태이며 다른 곳에서 보기 드문 겹으로 지어진 정자이며 천장에는 용 두 마리가 여의주를 물고 있는 그림이 있는데 한 마리는 청룡이고 또 다른 한 마리는 황용으로 격이 높은 정자임을 나타내지요.
2010년 한쪽으로 기우는 현상이 나타나 존덕정을 완전 해체 후 복원하는 수리를 하기도 했지요.
정자 안, 북쪽 창방에는 정조임금이 왕권강화를 위해 지은 「만천명월주인옹자서(萬川明月主人翁自序)」라는 일종의 경고판이 부착되어 있는데 정조임금이 왕권강화를 위해 창덕궁의 건물과 정자에 「만천명월....」을 모두 달았다하는데 이곳 존덕정과 서향각 2곳에만 남아 있으며 내용을 요약하면 「만개의 개울이 달빛을 받아 만개의 달이 개울가에 저마다 빛나고 있지만 하늘에 있는 달은 오직 하나이다.」라는 내용으로 정조임금을 달에 비유하고 달빛이 만개의 개울을 골고루 비치듯이 만백성을 보살피겠다는 애정과 도전은 결코 용서 할 수 없다는 아주 무서운 경고라고 할 수 있지요.
현재 만천명월주인옹자서 편액은 2개가 남아 있으니 보물로 지정은 되지 않았지만 보물급 그 이상의 가치가 있는 문화재입니다.
2010년 해체공사 당시 아무것도 모르는 인부들이 이 편액을 잡목더미에 방치한 것을 따끔히 혼내주고 비닐로 싸서 훼손되지 않도록 소중하게 보관한 적이 있습니다.
공무원들이 이런 문화재에 좀 더 신경을 써야 하는데......................
15.조선의 마지막 정자, 관람정(觀纜亭)과 승재정(勝在亭)
관람정과 승재정은 창덕궁 후원에 있는 정자 중 맨 나중에 지은 정자로 볼 수 있습니다.
동궐도에 나오지 않는 정자이며 관람정은 특이하게 부채꼴 형태의 특이한 모양을 갖추고 있는 일본 형태의 정자입니다.
관람정의 관람(觀纜)은 사물을 구경한다는 관람(觀覽)이 아니고 닻줄을 바라본다, 라는 듯으로 여기서는 뱃놀이를 구경한다는 의미로 해석되는데 닺줄이 나오는 것을 보면 줄을 매고 줄을 당기며 뱃놀이를 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네요.
관람정은 우리나라 궁궐의 유일한 부채꼴 형태의 정자로 긴 다리 두 개를 물에 담그고 있으며 여섯 개의 둥근 기둥이 지붕을 받치고 있어 멋을 더하고 있으며 가을 단풍이 들 때 연못과 정자와 단풍의 어우러진 풍경은 궁내 최고의 경치와 운치를 자아냅니다.
잡목이 우거져 제 모습이 잘 나타나지 않은 승재정은 관람정과 마주보고 있는 높은 위치에 있는데 정자에서 뱃놀이하는 풍경을 감상하는 정자로 보면 되겠네요.
건축 연대도 관람정과 같으며 일제강점기 또는 순종 때 지은 것으로 알려집니다.
관람정이 다리를 담그고 있는 연못.
관람지입니다.
혹자는 우리나라 지도를 닮았다고 해서 반도지라고도 부르는데 반도라는 말은 일본 넘들이 지들이 섬나라이므로 우리나라는 반은 섬인 나라라고 해서 반도라고 부른 거니까 반도지라는 말을 쓰지 않고 관람지라고 부릅니다.
16.천연기념물 제471호 뽕나무
전자에도 거론한바와 같이 창덕궁에는 천연기념물이 넷이 있는데 회화나무와 향나무를 보았고 이번에 보는 천연기념물은 뽕나무이지요.
나머지 하나는 400여년 된 다래나무인데 관람로가 아닌 곳에 있어 볼 수가 없어 사진만 올리네요. 천연기념물 넷 중 향나무, 다래나무가 먼저 지정되고 회화나무와 뽕나무는 2006년에 지정되었지요.
<창덕궁 천연기념물 4점 중 회화나무, 향나무, 뽕나무
3점은 보았는데 다래나무는 비탐방로에 있어 보지 못해 사진만 보너스로 올립니다.>
궁궐에 왜 뽕나무를 심었을까? 의구심이 갈 겁니다.
그러나 기록에 의하면 조선시대에 궁의 후원에 뽕나무를 심어 가꾸며 일반인들에게 양잠을 권장하였는데 실록에 의하면 태종 9년으로 궁원에 뽕나무를 심도록 명한 것이 공식적인 최초의 기록이며 세종5년인1423년에는 창덕궁에 1천주, 경복궁에3600주를 심었다는 기록과 누에를 키웠다는 기록이 있다고 하네요.
화학섬유가 대대적으로 보급되기 이전에는 섬유는 목화로 면을 얻고, 누에고치에서 명주를 얻었지요. 나라에서 잠업을 장려하여 많은 명주를 확보할 수 있었는데 장려책의 하나로 궁궐에서 왕비가 누에를 키웠는데 이는 백성들에게 전시효과를 거두기 위함이었지요,
잠시 후 보게 될 규장각 남쪽에 서향각 건물이 있는데 서향각에서 왕비가 누에를 쳤으며 기둥에는 ‘어친잠실‘이라는 현판을 달아 놓았는데 지금까지 기둥에 보존되고 있습니다.
17.숙종과 희빈장씨가 사랑을 나누던 애련지(愛蓮池)와 애련정(愛蓮亭)
애련(愛蓮)이란 "연꽃을 사랑한다"는 뜻으로 애련지는 기록에 의하면 숙종임금이 조선건국 300년이 되는 해인 1692에 연못 가운데 섬을 만들고 정자를 지어 애련정이라 이름지었다고 나옵니다.
그러나 현재의 연못에는 가운데 섬이 없고 정자는 애련지 북측에 세워져 있으며 4개의 기둥 중 2개의 기둥을 연못에 담그고 있어 연못위에 떠 있는 느낌을 줍니다.
숙종임금은 재위시절 여러 측면에서 업적을 많이 남기기도 했지만 우리가 연속극에서 여러 차례 보아왔던 대로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치열한 시기와 암투의 중심에 있는 왕이었지요.
그러다 희빈 장씨는 1688년에 조선의 20대 임금인 경종을 낳자 인현왕후는 1689년4월 폐서인이 되어 요금문을 통해 궁에서 쫓겨나게 되지요.
중전이었던 인현왕후가 쫓겨나고 18개월 동안 중전의 자리가 비어 있다가 장희빈은 1690년10월 국모 자리인 중전에 오르게 됩니다.
중전의 자리가 비어 있는 동안과 장희빈이 중전이 된 후 숙종과 장희빈은 이곳 정자에 와서 수없이 많은 날을 풍류를 즐기며 놀기도 했을 것이고 뱃놀이도 했을 것으로 생각되네요.
그럼 장희빈은 죽을 때까지 중전의 자리에 있었나요?
아니지요.
숙종이 누굽니까. 바람둥이 아닐까요?
몇 년 데리고 살다보니 실증이 났는지 왕의 얼굴에 생채기를 냈다는 이유로 중전에서 다시 희빈으로 강등되었는데 생채기를 냈는지 실증이 났는지는 알 수 없고 기록이 그러네요.
장희빈이 중전자리에 있었던 기간은?, 네 3년6개월이었습니다.
18.왕의 불로장생을 기원한다, 불로문(不老門)
금마문과 애련지 사이에 있는 통 돌을 디귿(ㄷ)자형으로 깎아 만든 문이지요.
통 돌로 문을 만들고 불로문(不老門)이라고 음각했는데 문 이름에서 나타나듯이 임금님의 불로장생을 기원했음을 알 수 있지요.
불로문을 통과하면오래 산다고 하니까 관람객들은 불로문을 2번, 3번 들락거리기도 하는데 오래살고 싶은 욕망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19.정조의 기를 받으며 공부하던 곳, 의두합(倚斗閤)
규장각 너머 애련지에서 규장각 방향으로 보면 소박하게 보이는 집과 15.평되는 작은 건물이 보이는데 이곳을 의두합이라 부르는데 의두합은 기오헌과 1.5평되는 운경거를 합쳐서 부르는 이름이지요.
의두합은 순조의 아들인 효명세자가 지은 집으로 학문을 연구하던 곳, 즉 공부하던 곳인데 효명세자는 할아버지였던 정조를 본받아 대리청정을 하면서 안동김씨 세력을 견제하며 떨어진 왕권을 회복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대리청정 3년만에 별안간 등창으로 치료를 받다가 죽었는데 정조임금 역시 등창으로 치료를 받다 죽었다는 점과 왕권을 강화하는데 힘썼다는 공통점이 있는데 효명세자가 임금이 되면 안동김씨의 쇄락이 두려워 독살했다는 의견도 나옵니다.
암튼 효명세자는 왕이 되지 못하고 죽었으나 그의 아들인 헌종이 왕위에 오르면 익종으로 추존되었다가 나중에 문조로 묘호를 바꿉니다.
헌종이 후사 없이 일찍 죽자 고종을 양자로 들여 왕이 되게 만들었으니 효명세자는 친아들과 양아들 그러니까 2명의 왕을 배출한 셈이고요 효명세자의 부인 신정왕후( 조대비)로 대원군 이하응과 모의하며 고종을 왕으로 만들게 되지요.
20.영조가 정조에게 왕 교육을 시키던 곳, 영화당(暎花堂)과 춘당대
낙선재에서 후원입구로 들어서 조금 비탈진 길을 따라 내려서면 넓은 마당이 있고 마당 서북 방향으로 제법 멋이 풍기는 전각이 있는데 영화당이라는 편액을 달고 있습니다.
영화당(映花堂)
영화당은 언제 누가 왜 지었는지 기록이 없지요, 다만 광해왕 때 수리한 기록이 있다고 하니 광해왕 이전에 지었다는 것만 알고 있습니다.
영조는 탕평을 위해 아들을 창경궁에서 뒤지에 가두어 죽이고 불쌍했는지 사도라는 묘호를 내렸는데 영조는 세자가 죽자 사도세자의 아들을 세손으로 정하고 어릴 때부터 이곳 영화당에서 왕이 될 수 있는 기질을 가질 수 있도록 공부시켰으니 영조의 세손이 정조입니다.
영화당의 편액은 영조가 1745년에 쓴 어필입니다.
영화당 앞에는 창경궁과 경계를 담으로 쌓았지만 옛날에는 담이 없었고 춘당대라 하는 넓은 공간이 있어 이곳에서 임금이 친림하여 과거에 준하는 시험을 치르기도 하였는데 이를 춘당대시라고 하였고 춘당대시에서 급제를 하면 과거시험의 마지막 관문을 통과한 것과 같은 대우를 받아 전국에서 많은 선비들이 대시에 참여하느라 새벽부터 장사진을 치기도 했답니다.
이렇게 대시에 참석하여 시험을 치르는 모습이 아름다워 상림10경에 넣었으니 영화시사(映花試士)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춘향전에서 이몽룡이 과거에 급제하였는데 바로 이곳 춘당대에서 치른 춘당대시에 합격한 것이었고 이때 시제가 「춘당춘색고금동」이라 해서 『춘당의 색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 같다.」 였다고 합니다.
영화당은 주간 관람객에게도 인기가 있는 지역이지만 달빛기행 때도 후원으로 들어서서 첫 번째 행사를 하는 곳이지요.
넓은 춘당대 마당에 관람객이 모인 자리에서 영화당 월대에서는 보통 퉁소 연주를 했었는데 오래전 유명했던 이생강님이 여러 차례 출연하시어 퉁소실력을 뽐내고는 하셨는데 지금은 어느 분이 출연하는지 알 수가 없네요.
21.규장각 아래 부용지(芙蓉池)와 부용정(芙蓉亭)
부용(芙蓉)이란 활짝 핀 연꽃을 말합니다.
부용지는 장방형의 연못으로 가운데 섬 모양으로 옛날 사람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4각이라고 생각했던 천원지방의 형태로 조성되었으며 남쪽편에 있는 정자 부용정은 “丁”자와 “亞”자가 묘하게 결합된 건물로 기둥 2개는 물에 담그고 있어 멀리서 보면 연못가에 피어 있는 한송이의 연꽃을 연상시킬 만큼 아름다운 정경을 연출하며 운치를 더해줍니다.
궁궐 후원의 10가지 아름다운 풍경을 상림10경이라 불렀는데 10경중 어수범주(魚水泛舟)라 하여 규장각 정문인 어수문 앞에서 뱃놀이 하는 풍경과 규장각 서쪽 정자인 희우정에서 연꽃을 내려다보는 풍경으로 희우상련(喜雨相蓮)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부용지 동남쪽 모퉁이에 연못 호안을 쌓아 올린 장대석이 땅위에 있는데 그 장대석에 돋음으로 물고기를 새겨 넣었습니다.
이는 선비들의 학문 연구기관인 규장각이 있고 춘당대가 옆에 있으므로 선비들이 노력해서 과거에 급제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등용문설화에서 잉어가 용으로 탈바꿈하는 것에 비유한 것입니다.
22.샘을 찾아 비를 세우다, 사정기 비각(四井記碑閣)
부용지 서쪽에 작은 정자각이 있는데 이것이 사정기비가 있는 사정기비각인데 본래 이름은 술성각이라 합니다.
사정기비각은 4개의 우물(샘)을 기념하기 위한 비석으로 세조임금 때 왕자들에게 샘을 찾도록 명을 하였는데 4개의 샘을 찾았고 공사 후 임금이 가장 좋은 우물을 마니(摩尼) 2번째 우물을 파려, 다음은 유리(琉璃) 다음을 옥정(玉井)이라고 이름 지었다네요.
그 후 병란을 겪으면서 우물2개는 없어지고 나머지2개의 우물은 못 쓰게 되어 숙종임금께서 2개의 우물을 수리하고 그 이유를 비각에 새겨 세우게 하였으니 이것이 사정기비각이지요.
이후 일제 강점기를 겪으면서 땅속에 묻혔던 것을 2009년에 4개중 2개를 발견하였는데 큰 우물은 세조임금 당시 만들어진 것이고 작은 우물은 숙종임금 시절 보수하여 사용하던 것으로 2010년 10월 28일 복원공사를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23.정조가 인재를 양성하기위한 집념, 규장각
주합루와 규장각은 정조임금 원년인 1776년 2층 누각으로 지어 1층은 왕실도서관인 규장각을 2층은 주합루라하여 열람실과 협의를 하는 공간으로 활용되었는데 주합이란 "동서고금의 장서를 통하여 향기로운 만남을 이룬다"라는 의미입니다.
정조임금은 1776년 경덕궁(지금의 덕수궁)에서 즉위한지 3개월 후 규장각을 짓도록 명하였고 3개월 뒤인 9월 규장각을 완성하지요.
규장각에는 「비선생물입(非先生勿入), 견래객불기(見來客不起)」이라는 현판이 있었는데 이는 「선생이 아니면 들어오지 말고, 손님이 오는 것을 보더라도 일어서지 말라」는 뜻으로 공부하는 곳에 아무나 들오지 말며 지체가 높은 사람이 들어오더라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말라고 왕의 명을 내린 거지요.
규장각에 보관된 서책은 청나라에서 구입한 1만여권의 고금동서집성을 포함하여 약 8만여권에 달했는데 현재 약3만여권의 서울대규장각에, 서책은 왕실 규장각에 옮겨 비치하고 있다고 하네요.
부용지에서 규장각으로 오르는 문을 어수문이라고 하는데 어수문은 수어지교(水漁之交)로 임금과 신하의 관계를 물 없이 살수 없는 물고기에 비유한 것으로 임금과 산하는 하나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세히 살피면 어수문이 있고 양옆으로 작은 문이 있는데, 이 문은 뭘까?
멋을 가미하기 위한 폼인가?
아니지요.
가운데 어수문은 왕만 지날 수 있고 신하들은 우측 작은 문으로 허리를 굽히고 들어가애 했지요, 나올 때는 좌측으로 또 허리를 굽히고 나와야 했고...........
24.순종이 태어난 곳 관물헌(觀物軒)
후원을 구경하고 다른 사람들이 입장하는 곳으로 나옵니다.
매표소를 막 지나면 좌측은 창경궁으로 들어가는 함양문이 있고 우측에는 성정각 안에 남북 으로 건물이 하나 보이는데 관물헌입니다.
성정각이 보수 중으로 출입이 금지되어 있으니 밖에서 보고 설명하지요.
이곳 관물헌은 명성황후가 순종을 낳은 곳이며, 정조왕이 이곳에서 집무를 보기도 했으며 갑신정변 때는 김옥균이 주도한 갑신정변 때는 고종이 여기서 머물렀으며 이곳을 임시 편전으로 이용했던 곳이지요.
거운데 처마아래 집희라는 현판이 달려 있었는데 고종이 15살 때 쓴 어필이었는데 고궁박물관으로 옮게 보관하고 지금은 없어졌습니다.
25.중희당의 잔재, 삼삼와, 칠분서, 승화루
매표소 앞 넓은 공터가 있는데 조선시대에는 중희당이라는 전각이 있던 자리지요.
중희당은 왕자들의 공부하는 전당이었는데 공터 남쪽을 보면 육각형의 작은 건물과 일자형 건물이 이어진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중희당에서 왕자들이 공부를 하다가 지루하거나 휴식을 취하는 곳이 승화루로 중희당에서 승화루를 가기 위해 일자형 작은 건물인 칠분서를 지나고 육각형 아담한 건물 삼삼와를 지나 낙선재 화계 옆이 있는 승화루로 가고는 했습니다.
승화루는 터만 남아 있는 중희당의 부속건물로 2층으로 지은 누각으로 아래층은 의신합이라는 이름도 가지고 있는데 건립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정조임금 때 중희당을 지으며 함께 지은 것으로 추정하며 세자의 휴식공간이나 책 등을 보관했던 곳이지요.
또 다른 이야기는 일제 강점기 때는 경찰이 이곳에 주둔하고 있어 창덕궁내 경찰서로 사용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26.덕혜옹주, 헌종의 사랑이야기, 순정효황후의 애환이 서린 낙선재(樂善齋)
낙선재는 경술국치이후 순종은 이곳으로 거처를 옮겨 생활했고 1963년 일본에서 돌아온 영친왕이 1970년 이곳에서 생을 마감했는가하면 이후 영친왕과 부인 이방자여사도 이곳에서 거주하다 1989년에 생을 마감했으며 고종의 막내딸인 덕혜옹주는 일본에서 들어와 이곳에서 살다가 1989년에 생을 마감했습니다.
시간이 충분 했으면 직접보고 하나하나 설명했을 텐데 넘 시간이 없어서...........
간단하게 설명하지요
.
덕혜옹주의 이야기
낙선재하면 떠 올리는 건 덕혜옹주 입니다.
권비영의 소설 "덕혜옹주"가 베스트셀러에 오르며 세인들은 고종의 딸 덕혜옹주가 한 많은 삶을 살다가 마지막 숨을 거둔 곳이 낙선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덕혜옹주는 고종이 환갑에 이른 1912년 덕수궁에서 후궁 양귀인에게서 얻은 조선의 마지막 왕녀입니다.
1925년 12세의 나이에 동경유학이라는 빌미로 일본으로 끌려가 17세가 되던 해 어머니가 돌아가자 충격에 정신병을 얻었으며 20세가 되던 해 대마도주의 아들과 강제 결혼을 하고 이후 우울증과 실어증으로 시달리다 1962년 환국하여 낙선재에서 생활하다 1989년 생을 마감하게 되지요.
소설에 나오는 것처럼 일본에서 생활하던 덕혜옹주가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그리워하던 곳으로 4월 초순이 되면 창덕궁 낙선재 매화밭에는 흰 꽃이 만발한다고 회상하던 곳입니다.
헌종과 순화궁의 이야기
헌종임금은 첫째 부인을 잃고 두번째 부인인 명헌왕후를 간택할 때의 일로 중전간택은 내명부의 일로 임금이 직접 후보들을 보는 예는 없었다 하는데 헌종임금은 내명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후보들을 보았는데 헌종임금이 맘에 두었던 경빈김씨는 간택되지 않고 명헌왕후가 간택되자 합방을 거부하며 경빈김씨를 고집하여 결국 후궁으로 들이게 되었다는 겁니다.
보통 후궁은 정략적이거나 궁녀중에 임금의 눈에 들어 후궁으로 들이는 게 전례였으나 경빈김씨는 선을 보고 후궁으로 들어온 분으로 유일하다고 하며 헌종임금은 궁궐안에 낙선재라는 사저를 짓고 경빈김씨인 순화궁은 낙선재 옆 석복헌에 거주하도록 한 후 매일 사랑을 나누었던 궁궐의 사적 공간이지요.
그러니 헌종이 종사를 제대로 돌보겠습니까? 아니면 허구한 날 여자에 미쳐 있으니 오래 살 수 있나 결국 헌종은 23세에 후사 없이 일찍 죽지요.
조선의 마지막 왕비 윤비의 이야기
순종황후의 부인인 순정효황후는 1910년 대조전 흥복헌에서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려 일본의 강압으로 합방체결을 할 때 옥새를 치마폭에 감추고 내전을 빠져 나오는가 하면 1950년 한국전쟁 때는 인민군들이 낙선재로 들이 닥치자 "이곳은 나라의 어머니가 사는 곳이다"라며 크게 호통을 쳐 내 쫒은 적이 있다고 합니다.
해방이 되고 나서 이승만 정권에게 궁궐을 빼앗기고 성북동에서 셋방살이를 하며 어렵게 살아갔다고 합니다.
창덕궁은 내가 살던 공간이고 내가 주인인데 주인이 내집을 들어갈 수 없는 법이 어디 있느냐?며 오랜 동안 이승만 정권과 싸워 결국 정부가 인정하여 낙선재로 들어 올 수 있었으며 시동생인 영친왕 내외와 올케인 덕혜옹주를 불러들이는 계기를 마련했으며 1966년 낙선재 석복헌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영친왕과 이방자 이야기
영친왕은 고종의 3남이자 순종의 동생으로 1920년 강제로 일본으로 끌려가 황제의 딸인 이방자와 정략결혼을 하였지요.
광복이후에도 귀국하지 못하다가 1963년년 12월 부인 이방자와 우리나라로 들어오지만 그때는 이미 말도 못하고 기억상실 상태로 7년동안 치료를 받다가 1970년 낙선재에서 생을 마감했으며 이방자여사도 석복헌에서 살다가 1989년 덕혜옹주와 같은 해 이곳에서 생을 마감합니다.
27.경복궁 강령전을 헐어서 지은 희정당(熙政堂)
희정당은 1985년1월8일 보물 제815호로 지정된 전각으로 희정(熙政)이란 "화평하고 모든 일이 잘 다스려지는 즐거운 정치"를 말합니다.
인정전이 창덕궁의 최고의 편전이지만 희정당은 왕이 가장 많이 머물고 정사도 하던 곳으로 본래 건물의 이름은 숭문당이었으나 연산왕 2년인 1496년에 희정당으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낙선재 방향에서 보면 비가림이 있는 튀어나온 부속건물이 있는데 이것은 고종이 차를 수입하며 비를 맞지 않고 차를 탈 수 있도록 나중에 덧대어 지은 부속물이지요.
글구 희정당의 합각을 보면 뭔가 특별합니다.
동쪽에는 강(康), 서쪽에는 녕(寧)을 통풍구로 새겨 달았는데 강녕은 경복궁의 강령전을 뜻함인데 1917년 원인모를 화재(일본인들의 방화로 추정)로 불타 없어지자 빨리 복구한다는 명분으로 경복궁의 강녕전을 헐어다 지으므로 창덕궁과 경복궁 양쪽의 건물이 모두 훼손 되었는데 희정당 뿐이 아니고 대조전, 함원전, 경훈각 등 4개의 건물을 경복궁을 헐어다 지었는데 일제 강점기였으므로 일본넘들의 술수라고 봄이 맞다는 생각입니다.
우리가 갔을 당시 문이 닫혀 내부를 볼 수 없었는데 내부에는 명성황후가 쓰던 가구, 의자, 진열장 등이 전시되어 있는데 주로 이태리, 프랑스에서 수입한 물건들입니다.
그리고 내부에는 “금강산 만물 초승경도" 와 "총석정 절경도" 라는 벽화가 그려져 있는데 이 그림은 영친왕의 스승인 해강 김규진(海岡 金圭鎭) 의 대작으로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금강산을 3번을 다녀왔다는 설도 있으며 보물2호인 서울 종로의 보신각 종각의 편액인 「普信閣」송광사나 건봉사 등 유명한 사찰의 편액도 많이 썼는데 알고 보면 친일파입니다.
28.왕손은 다다익선 대조전(大造殿)
대조전은 1985년1월8일 보물 제816호로 지정된 전각으로 왕과 왕비의 침실이 있는 곳으로 왕비가 거처하는 내전 중 가장 으뜸가는 건물로 중궁전이라도 부릅니다.
전각의 이름이 대조전이네요.
뭘 크게 만들라는 얘긴가요.
왕비의 침실과 왕의 침실이 있는 곳이고 왕비가 생활하는 곳이니 왕손을 많이 만들라는 얘기지요.
이 건물에서는 성종, 인조, 효종, 철종, 순종이 승하했고, 순조의 세자 효명세자가 태어난 곳이기도 합니다.
희정당과 같이 1917년 원인 모를 대화재가 발생하여 불에 탄 것을 1920년에 경복궁의 교태전을 헐고 그 부재로 이곳에 옮겨지었는데 협각의 기둥 하나와 서까래 10개를 시멘트로 지었는데 1920년 일본 넘들은 방화선으로 시멘트를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조전 앞 월대에서는 왕비가 친정, 가족들을 불러 찬치를 하기도 했으며 현판 大 造殿은 순조의 어필이라고 합니다.
거실에는 백학도와 봉황도, 2점의 벽화가 있으며 비공개 장소에는 명성황후가 이태리, 프랑스에서 수입한 욕조와 현대식 수도꼭지를 단 세면대, 조선시대 전기 시설물과 전구 등이 있습니다.
29.조선의 마지막 대전회의가 열린 곳, 흥복헌(興福軒)
흥복이란 ‘복을 불러일으킨다.’는 뜻으로 황제의 아들이나 형제 그리고 조정대신들을 접견하는 장소입니다.
이곳에서는 복을 불러 일으켜야할 장소에서 복은커녕 잊지 못할 사건이 벌어졌는데 조선의 마지막 어전회의입니다.
일본이 강제로 회의를 열었고 매국노 이완용을 비롯한 대신들이 참석했겠지요.
회의 내용은 대한제국이 원해서 일본에 합방을 한다는 내용인데 순종의 부인인 순정효황후는 1910년 대조전 흥복헌에서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릴 때 옥새를 치마폭에 감추고 내전을 빠져 나오다 사촌오빠에게 걸려 강제로 빼앗겼다고 하며 이 옥새로 한일합방문서에 찍으므로 대한제국은 사라지게 되었다네요.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렸던 흥복헌 내부에는 고종이 사용했던 이발기구와 이발의자가 덩그러니 놓여 있습니다.
30.왕의 집무실 청기와의 선정전(宣政展)과 대기실 빈청(賓廳)
선정전은 1985년1월8일 보물 제814호로 지정된 조선시대 왕이 집무를 보던 곳으로 선정이란"청치와 교육을 널리 펼친다"라는 뜻으로 임금의 공식적인 집무실로 이곳에서 임금과 정치를 논하는 신하는 3품 벼슬인 당상관 이상이었습니다.
선정전의 지붕을 보면 청기와가 입혀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 청기와는 선정전을 지을 때부터 청기와를 입힌 게 아니고 광해왕 때 일반기와로 지어진 선정전을 청기와로 바꾸게 된 것인데 그 시초는 연산왕으로 연산왕은 “사찰에도 청기와를 입힌 곳이 있는데 왕의 집무실은 어찌 일반기와란 말인가?”라고 하며 청기와로 바꾸라고 지시하여 청기와로 공사를 하던 중 인조반정으로 물거품이 되었고 이후 광해군 때 청기와에 대한 기록이 나옵니다.
선정전과 멀리서 마주보고 있는 작은 건물이 있지요.
빈청이라고 하는데 빈청의 본래 이름은 비궁청입니다.
고종시대에는 고종이 차를 사가지고 이곳에 차를 보관했다고 해서 어차고라고도 불린 적이 있지요.
빈청은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과 비변사 그리고 당상관 이상의 고위 관료들이 정기적으로 회의를 하거나 국가에 긴급한 일이 생기면 대책을 논의하고 왕에게 알현해 방안을 지시하던 곳입니다.
일설에 의하면 빈청의 온돌방사건이 있지요.
나무가 귀하던 시절 대감들은 집에 가면 추위에 떠니까 집으로 가지 않고 뜨끈뜨근한 빈청에서 회의를 한다는 명분이나 왕에게 의견을 제시한다는 명분으로 빈청에 모여 왕에게 "아니 되옵니다."만 읊어대니 왕의 고초가 말이 아니었다고 하네요.
어떻게 하면 대감들이 빈청에 머물지 않고 빨리 퇴궐할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기똥찬 생각을 하게 되었으니 온돌을 띁어내고 마루로 바꾸었다는 것입니다.
이후 대감들은 일찍 퇴궐을 했다고 하네요.
그런데 2010년 비어있던 빈청을 문화재보호재단에서 카페를 차려 영업을 하고 있는데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를 훼손한다고 민원도 제기되고 텔레비전에서도 수 차례 얻어맞았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지금도 커피장사를 하고 있습니다.
31.조선의 대사가 열리던 곳 창덕궁의 심장 인정전(仁政展)
인정전(仁政展)
인정전은 1985년 국보225호로 지정된 문화재로 조선시대 국가의 중요한 의식을 치르던 곳입니다.
왕의 집무실은 선정전이기는 하나 인정전에서는 아주 큰 행사로 왕이 등극을 하는 행사, 왕세자나 세자빈을 선포하는 행사, 국가의 큰 행사, 그리고 외국 사신을 접견하는 행사, 신하들이 임금에게 새해 인사를 드릴 때에도 왕이 인정전으로 나아가 신하들의 축하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영화나 연속극에서는 이곳에서 늘 상 회의를 하는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는 그러하지 않았습니다.
인정전 용마루에는 이씨를 상징하는 다섯 개의 오야(재래종 자두) 꽃문양이 있는데 혹자는 이 꽃이 사꾸라(벚꽃)이라고 하며 일제강점기 때 넣었다고 하는데 잘 못 알고 있는 것이지요.
인정전을 오르는 계단에는 2중 답도가 있으며 답도에는 왕을 상징하는 봉황 2마리가 새겨져 있는데 봉황은 중국에서부터 전해지는 상상의 새로 용과 학이 연애하여 낳았다고 전합니다.
인정전 넓은 월대에는 중앙에는 삼도가 삼도 좌우로 풍계석이 있으며 바닥은 잘 만들어진 4각의 돌로 깔려있지요,
바닥돌은 박석이라고 부르는데 본래 박석은 매끄럽지 않고 울퉁불퉁하며 쉽게 설명하면 구들장과 같이 얇은 돌인데 조선시대 문헌에 박석이 나오는 곳은 황해도지방과 강화도 2곳이라고 하여 강화도 박석이 나오는 곳을 찾아 종묘와 경복궁을 복원하고 창덕궁을 복원하려하자 강화도 사람들이 반대해서 더 이상 박석을 캐지 못해 창덕궁은 대리석으로 잘 다듬어 박석을 깔았지만 박석의 형태는 제멋대로 생겼지 일정하게 생기지 않았지요.
중앙 삼도 좌우로 품계속이 있는데 좌측은 무관, 우측은 문관이 도열하는데 품계석의 등장은 1782년 정조 6년 때로 왕권 강화와 임금과 신하, 신하와 신하의 상하관계 등 위계질서를 잡기위해 만들었다고 하네요.
군대에서 계급장을 달지 않는 유격장에 가면 일등병은 한명도 없고 모두 병장에 제대 6개월 남겨 놓았다고 뻥치는 것과 유사하게 대감들이 1급이나 되는 양 까불었는데 정조가 품계석을 만든 이후 계급이 드러나므로 겸손해지고 질서도 잡혔다고 합니다.
텔레비전에서 자주 사극이 나오는데 신하는 품계석 옆에 도열해 있고 왕이 뭔가를 지시하는 장면을 흔히 볼 수 있는데 정조이전의 시대라면 모드 거짓으로 시청자를 모독하는 행위이며 정조시대 이후는 정답이 됩니다.
상월대 에는 큰 함지박 같은 용기가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 용기는 드므라고 부르는데 드므에는 항상 물을 채워 놓는데 용도는 소방용기지요,
불이나면 이 물로 불을 끄라는 것이 아니고, 옛날 사람들은 불은 화마가 몰래 와서 불을 지른다고 생각했는데 화마가 불을 지르러 왔다가 드므를 보면 물에 비친 자기의 험상궂은 얼굴을 보고 놀라서 도망친다고 생각했지요.
인정전의 문은 인정문이라고 부르며 보물 제813호로 지정되었고 용마루 오얏문양은 3개가 있습니다.
33.억울한 사람들은 오시오, 진선문(進善門)
진선(進善)이란 "임금님께 바른 말을 올리다"라는 뜻으로 돈화문을 들어서 광장을 지나 금천교를 건너 정전 마당으로 출입하는 문으로 진선문을 지나면 삼도가 있는데 가운데 높은 길은 임금님이 다니는 길이며 양 옆은 신하들이 다니는 길입니다.
숙장문과 마주보고 있는데 기록에 의하면 진선문에는 태종과 영조 때 북을 설치하여 억울한 일이 있는 백성들이 와서 북을 치면 왕이 직접 해결해준다는 신문고 혹은 등문고가 있었다고 합니다.
일설에 의하면 신문고를 치면 얼울한 일을 해결할 수 있으므로 일반백성들은 세도있는 양반에게 허구한 날 억울한 일을 당하게 되니 제법 인가가 있었나 봅니다.
하나 둘 신문고를 울리기 시작하자 서민들의 억울한 일이 해결되어 좋기는 하지만 명색이 양반 또는 대감들이 줄 초상이 나게 되는 일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일이 이쯤 커지자 세도가나 대감들이 이를 막기위해 수문장을 매수하여 북을 치러 가는 백성들을 잡아 패대기 시작하니 매에 장사 없다고 북은 있으나마나한 전시품으로 전락하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지금은 진선문이 1층으로 되어 있지만 초기에는 2층으로 지어졌고 신문고는 2층 누각에 있었으니 2층으로 올라가려다 모두 잡히고 매만 맞고 돌아가고는 했을 겁니다.
34, 금천을 가로 지른 보물의 다리 금천교
조선시대에는 풍수지리에 의한 배산임수에 의한 주택이나 건물을 지었으며 궁궐도 예외가 아니어서 위와 같은 풍수지리적인 입장을 고려하여 왕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의미로 명당수를 흐르게 하여 어구를 진입공간에 두었습니다.
이곳을 흐르는 물은 궁궐의 안과 밖을 구별하는 경계역할을 하기도 했는데 이 천을 금천(禁川)이라 불렀으며 금천을 건너기 위한 돌다리를 놓았는데 창덕궁은 “비단처럼 아름다운 물이 흐른다“하여 이를 금천교(錦川橋)라불렀습니다.
참고로 경복궁->영제교, 창경궁->옥천교, 덕수궁->금천교(禁川橋), 경희궁->금천교(禁川橋)라고 불렀습니다.
금천교는 홍예교로 만들어 졌고 측면에는 귀면 조각이 있으며 그 아래는 석상 조각이 있는데 남쪽에는 해치모양의 석상이 있지요.
2012년 보물 제1762호로 지정된 금천교를 막 지나면 우측에는 느티나무가 있는데 느티나무 가지는 연리지가 있어 젊은이들이 기념사진을 찍는 포토존이었는데 들어가지 못하게 금줄을 쳐 놓았네요.
연리지 느티나무를 지나면 좌측으로는 들어왔던 돈화문이 있는데 나가는 문은 마주보이는 작은 문 금호문이네요.
금호문을 나서면 창덕궁 관람은 엔딩입니다.
첫댓글 대구산악회와도 친분이 있으시군요.....
아직 창덕궁은 미답사지역이라서...
감사합니다..ㅎ
대구 참사랑산악회와 교류하고 있습니다.
벌써 13년이나 되었네요.
봄철에는 대구 아우들의 안내로 서울사람들이 가고자 하는 곳을 함께 산행하고
가을철에는 대구 아우들이 서울근교 산행을 위해 올라옵니다.
이번에는 의왕 모락산 산행하고 오후에 창덕궁 탐방하는 것으로 진행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