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들이 인식하지 못한 사이, 남성의 정자들은 외부환경으로부터 공격받고 있다. 최근 덴마크 코펜하겐대학 병원의 닐스 스카케벡 교수가 발표한 연구에 따르면, 일상용품과 음식 속 환경호르몬이 남성의 정자세포를 파괴시켜 약골로 만들고 있다는 것. 특히 치약 속의 환경호르몬이 정자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 입증돼 화제다. 음식이나 일상용품이 인간의 정자 기능에 미치는 연관성을 직접 입증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1992년, 스카케벡 교수는 ‘브리티시 메디컬 저널’에 ‘남성의 정자 수가 날로 줄어든다’는 도발적 내용을 발표해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남성들의 정자 수가 50년 만에 45% 감소했고 DNA가 파괴된 기형 정자들이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스카케벡 교수는 북미,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등 21개 국가에서 1938년 이후 태어난 1만5000명의 남자를 대상으로 정자의 수와 질을 연구한 61개의 문헌을 수집하여 검토했다. 그 결과 정자 수가 1940년에는 정액 1mL당 평균 1억1300만마리였으나 50년이 지난 1990년에는 6600만마리로 45% 줄어들었음을 알아냈다. 또 1회에 사출되는 정액의 양이 평균 3.4mL에서 2.75mL로 현격한 감소를 보였다. 더 큰 문제는 젊은층의 감소현상이 뚜렷하다는 것이었다. 이는 결국 ‘씨가 마른다’는 경고였다.
/일러스트 이철원
학계는 이런 경고에 냉소적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남성의 정자 수가 감소하고 있다는 특이현상은 후속 연구에서도 줄지어 관찰됐다. 스카케벡에 비판적이었던 프랑스의 자크 아우거팀은 한결 더 심각한 결과를 얻었다. 연구팀은 1945년에 태어나서 30세가 된 남자와 1962년생으로 30세가 된 남자의 정자 수를 비교했는데, 1975년에 30세인 남자의 정자는 정액 1mL당 평균 1억200만개였으나 1992년에 30세인 남자는 평균 5100만개밖에 되지 않아 17년 사이에 50% 감소된 것으로 나타났다. 평균 정자 수가 약 20년 만에 반토막 났다는 결론은 남자의 정자 수가 줄어들고 있음을 입증한 셈이다.
인간의 정자 수가 줄어드는 것은 남성의 생식능력에 빨간불이 켜졌음을 웅변해 준다. 정자 수가 정액 1mL당 2000만마리 이하로 떨어지면 대부분의 남자는 불임이 된다. 이들의 자료에 따르면 1세기 안에 남자가 생식능력을 상실하게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원인은 수수께끼로 남아 있었다. 스트레스와 흡연과 같은 환경적 요인이 남성 불임을 부추기는 것으로 짐작되고 있을 따름이었다. 환경적 요인 때문임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 스카케벡 교수가 ‘내분비계 교란물질’을 측정해 그 원인을 밝힌 것이다.
스카케벡 교수팀은 조사 대상이었던 화학물질 중 3분의 1가량은 정자에 직접적으로 나쁜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밝혔다. 치약이나 샴푸에 사용되는 살균제 트리클로산(Triclosan), 일부 자외선차단제에 사용되는 자외선 흡수제 4-MBC(4-methylbenzylidene camphor), 매니큐어나 접착제에 포함된 가소제 프탈산 디부틸(di-n-butyl phthalate·DnBP)의 환경호르몬이 그것이다.
트리클로산은 약 40년 동안 활용된 항균제로, 많은 종류의 세균을 없앨 수 있어 치약이나 샴푸 등에 쓰인다. 세균을 없애는 것으로 알려진 트리클로산이 오히려 인체의 내분비기능 장애를 일으킨다고 교수팀은 분석했다. 미국 식약청(FDA) 또한 이 연구 결과를 인정했다.
환경호르몬은 생물의 몸에서 정상적으로 나오는 호르몬이 아니다. 체내에 들어와 인체의 호르몬과 유사하게 작용함으로써 내분비계를 교란시켜 호르몬의 양을 변화시키는 일종의 화학물질이다. 다시 말해 우리 몸속에서 천연 호르몬을 흉내 내 호르몬의 균형을 깨거나 역할에 변형을 일으킨다. 호르몬에 작용하는 물질이라는 의미에서 ‘환경성 내분비계 교란물질’이라고도 부른다.
트리클로산 등의 환경호르몬은 에스트로겐 분비를 과도하게 만든다. 정상적인 경우 남성의 고환에서 분비된 남성호르몬 테스토스테론은 뇌의 특정 부위로 들어가 에스트로겐으로 바뀐다.
에스트로겐은 여성호르몬이지만 남성에게도 존재한다. 에스트로겐이 없으면 남성은 남성적 특징을 띠지 못한다. 하지만 에스트로겐의 양이 지나치게 많아지면 상대적으로 남성호르몬인 안드로겐의 양이 적어져 오히려 탈남성화되는 문제가 발생한다. 정자 수 감소, 미성숙 고환, 음경 기형 등이 그 예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정자들은 난자를 찾기 위해 호르몬 신호를 쫓아간다. 환경호르몬은 이 신호를 막는 역할을 한다. 여성 난소의 황체에서 분비돼 생식주기에 영향을 주는 여성호르몬 ‘프로게스테론’과 생리 활성물질인 ‘프로스타글란딘’의 호르몬 신호까지 약화시켜 불임을 유발하는 것이다. 여성은 기본적으로 남성보다 천연 에스트로겐을 더 많이 분비한다. 그렇기 때문에 에스트로겐 양이 조금만 더 많아져도 건강에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호르몬은 밀리그램(mg·1mg=0.001g)으로 측정한다. 매우 소량이지만 그 양이 조금만 많거나 적어도 우리 몸은 바로 혼란에 빠진다.
스카케벡 교수의 ‘환경성 내분비계 교란물질’ 측정 연구는 국제 학술지인 ‘EMBO(유럽분자생물학기구)’ 저널에 발표됐다. 그는 이번의 조사가 확실히 우려할 만한 것이라고 말한다. 일부 내분비계 교란물질의 위험성이 이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더 위험한 것으로 생각된다는 것. 어쩌면 우리는 집안에 독소공장을 만들어 놓은 셈인지 모른다.
물론 추가적인 임상실험을 통해 정확한 데이터를 산출해야 하지만, 적어도 해당 결과를 보면 환경호르몬이 현대사회에서 임신·출산율이 감소되고 있는 주요 원인 중 하나라는 강력한 근거가 될 것이라는 게 스카케벡 교수의 설명이다.
환경호르몬은 안타깝게도 우리 주변 어디에나 존재한다. 씻고 닦고 먹고 숨 쉬는 모든 것에 도사리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조금이라도 환경호르몬으로부터 벗어나 환경 친화적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려면 일회용 컵이나 스티로폼 등을 가급적 사용하지 말고, 세제나 치약 등의 사용을 줄일 수밖에 없다.
이젠 난임 해결을 위해 건강한 정자에 주목해야만 한다. 지금 당신의 정자 수와 정액의 양은 당신 아버지와 할아버지보다 적을지도 모른다. 설령 스카케벡 교수의 자료에 오차가 있다손치더라도 어쩌면 남성 정자의 종말은 시간문제에 불과할는지 모른다.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