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숙 님이 보내드리는 편지>
1차 항암치료 (2000/12/19 12:23) -못 먹고 몸 시달리니 사람은 녹초가 되고 -
수술 받고 26일 째 되는 날, 12월 13일 첫 항암치료를 받았습니다. 수술 할 때부터 모 든 주위 사람들의 관심이 항암치료를 극복하는 문제였습니다. 힘들다는 것을 모두 들어서겠죠. 13일 드디어 종양내과 의사선생님 면담. 모두 7차례 항암치료 받자는 말씀이었습니다. 더 될 수도 있다는 여운도 남기며. 그런데 약은 공포의 빨간색입니다. 주사실에 가니 다른 환자분들 모두 빨간색은 힘든데 하며 잘 이기라는 격려였습니다. 기도하며 1시간 동안 주사를 맞고 전주를 내려왔습니다. 왕복 10시간의 힘든 여정이라 13일 저녁은 피곤에 지쳐 잠에 빠졌습니다.
14일 아침 친지들과 지인들이 전화를 해 옵니다. 아! 괜찮다. 나는 잘 이기는 체질인가 보다 하고 감사하며 점심 맛있게 먹었습니다. 전쟁은 그 후부터 입니다. 갑자기 온 몸이 노곤하며 뼈 까지 아픈 것 같고, 감기 몸살인가 했는데 먹는 것 다 토하고 음식 냄새며, 음식 먹은 사람 옆에도 오지 못하게 하고 먹으면 토하고, 못 먹고 몸 시달리니 사람은 녹초가 되고 완전 불지옥입니다. 몽롱하게 아픈 것은 기분 나쁘며 못 참겠습니다. 3일째 되는 날 남편은 영양제라도 맞자며 병원에 가자고 하며 서울대병원에 전화하더니 허락했다고 가자고 난리고 저는 일어날 기운도 없고 견디겠다고 떼쓰고 온 집이 난리였습니다.
3일간 불지옥을 헤매다 온 후는 배고픈데 식욕은 없고 일어설 기운도 없습니다. 먹어보니 그래도 누룽지 조금씩 먹고 누룽지 숭늉 해놓고 시원하게 마시니 그것은 좀 괜찮은 것 같습니다. 사과와 감은 받는데 나중엔 속이 안 좋고 합니다. 총각김치 같은 시원한 것 당기고, 전주식 콩나물, 김치국밥 같은 얼큰한 것 먹으니 입맛이 조금 돌아옵니다. 지금부터 체력 싸움 인 것 같습니다. 그래야 다음 항암제(간절히 포기하고 싶지만) 맞으니까요. 식이요법 하는 것 콩과 현미 잡곡밥은 정말 씹히지 않아 못 먹고 있고요. 당분간 입맛 돌아올 것 체력 향상 될 것 먹기로 했습니다. 암 진단 후 고기는 안 먹었는데 소꼬리 고아 밥은 느글거려 못 말아 먹고 간식으로 국물 마시는 것도 좋은 것 같습니다. 6일 차인 오늘 점심도 얼큰한 것 해 달라고 친정어머니께 주문했습니다. 항암 치료 극복한 사람 위대해 보입니다.
탈모 (2000/12/28 14:00) -다시 나지도 않는 가슴도 잘라냈는데 다시 나는 머리에 미련은-
1차 항암치료 후 긴 불지옥 같은 터널을 빠져나온 뒤 산을 오르며 체력을 길러오는 하루하루였다. 주사 투여 후 며칠간 누워 있으니 더 기운이 없어져, 가운 없는 몸으로 집 앞 산 밑을 갔다 오니 기운이 나고 밥맛이 생겨 계속 집 앞 산 중간까지 올랐다. 그러면서 머리는 언제 빠질까 하는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더 이상의 행운(탈모가 안돼는)같은 것은 이미 포기했으니- 2주간 아무 소식이 없었는데 13일 투약 후 정확히 2주째인 26일 저녁 머리를 감는데 계속 머리가 빠지는 것이었다. 빗질을 하니 한 줌이 빗에 묻어 나와 빗질을 중단했다. 목욕탕 속에서 울어야 하나 망설이다 수건으로 둘러싸고 나와 친정엄마와 남편에게 “야! 드디어 빠진다.”하고 소리질렀다. 언니에게 전화해 “나 머리빠지기 시작했어.”하고 보고 하니, 엄마는 이야기 거리도 많다며 방으로 들어가신다.
다음날 아침, 머리카락과의 전쟁이다. 신문지 펴놓고 빠진 머리 주워 담았다. 가발은 물론 진작 준비했다. 그러나 집에선 모자 써야지. 산에 갈 때도 모자가 편하니 하고, 오후 오랜만에 시내에 가 모자 2개를 사고 가발 집에 들러 이번엔 커트 가발을 샀다. 가발 집에도 내 머리카락 천지다. 집에 오는 길 집 앞 미장원에 들어갔다. 아무래도 안되겠다 빠진 머리 줍는 것도 어느 정도지. 머리를 빡빡 밀어달라고 하였다. 미용실 주인이 괜찮겠냐고 한다. 가슴도 없앴는데 머리쯤이야 하였다. 이건 다시 나니 괜찮아요. 하고 밀고 모자를 쓰고 집에 왔다.
머리 밀었다는 말에 친정어머니는 충격인가 말이 없다. 저녁 회식 후 늦는다는 남편이 머리 빠지는 모습 보고가 식사만 하고 왔단다. 바보 같이 끝가지 남아 놀고오지 하고 머리 밀었다고 하니 보자고 한다. 안됀다. 이 좋은 모습 관람에 공짜가 어디 있냐 만원 내라 하고 보여줬다. 한참 말이 없다 잘했단다. 어차피 빠질 때마다 신경 쓰일텐데 하며. 그래 잘했다. 다시 나지도 않는 가슴도 잘라냈는데 다시 나는 머리에 미련은 뭐하게 두나. 아이 시원하다. 암 진단 전부터 머리카락 때문에 집이 난리였는데 이젠 그럴 일없어 개운하다. 탈모된 동지들, 더 예쁘게 머리카락 생기길 바란다.
가족 (2001/01/14 14:04) -그들이 흘린 눈물만큼 질기고 모질게 일어서야지-
암 판정 받고 가족 때문에 괴로워 많이 울었다. 두 아이 때문에 울고 남편 보고 울고. 불쌍하고 안쓰럽고 또한 나 때문에 고통 받을 생각에 울고. 겨드랑이 멍울에서도 전이성 암세포가 나왔다는 이동석 선생님의 전화 받은 날, 울다 지친 나와 두 아이를 불러 놓고 남편은 이제 더 이상 울지 말고 우리 가족이 이 시련을 극복하고 남들에게도 밝은 모습을 주며 살아가자고 그럼 이길 거라고 하며 마지막으로 우리 넷은 실컷 울고 눈물 뚝 다짐. 치료하다 보니 한편으론 가족 때문에 희망을 가지게 된다. 이건 완전한 나만의 착각인가 모르겠지만 나 없는 가족은 생각 할 수 없을 것 같다. 남편, 글쎄 차라리 좋은 사람 만나 잘 산다면 더 바랄 것 없지만 쳐다볼수록 그럴 것 같지 않다. 모든 조건을 생각해도. 두 아이 이제 엄마 손길 없어도 살아가는데 지장은 없을 나이 하지만 난 두 아이 살아가는 모습 지켜 봐야 되고 힘들 때 그들의 휴식처가 되어주어야 한다. 거실의 대형 가족사진(부득부득 우겨 어울리지 않게 크게 찍은)을 보면 살아야해 하는 생각이 치민다. 목욕하다 내 몰골 보며, 항암치료 후 영혼까지 메말라 버릴 것 같은 고통 중에서도 가족사진을 멍하니 쳐다보면 그래 이겨야지 하는 생각이다.
딸의 암 수술 후 15년 간, 살림에서 손뗀 친정 엄마 오셔서 살림 해 주고 좋다는 것 다해주고 '내 뼈를 갈아서라도 너만 살릴 수만 있다면 그것도 해 주겠다'고 하시며 집까지 어설프면 식구들 바깥으로 돈다며 칠순이 넘은 엄마가 동동거리시는 모습에 내가 효도해 드려야 하는데 하며 괴롭기도 하고, 엄마 때문에 살아서 내가 효도 해야지 한다. 수술실에 나를 보내고 서울대병원 외과 55병동 휴게실에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렇게 슬프게 울었다던 언니, 직장 때문에 바쁜 남편 대신 병원 데리고 다니고 날마다 전화해 체크하는 오빠와 남동생은 뭣을 해줄 줄 몰라 술 먹고 울고, 시부모님 눈물, 시댁 식구 눈물 난 그들이 흘린 눈물만큼 질기고 모질게 일어서야지 하는 마음이다.
병원에 가면 대부분 초기 환자들이다. 항암 주사도 가볍게 맞고 항암 치료도 필요 없는 초기 환자들도 많은데 나는... 나의 무지가 뼈 속까지 사무치는 현장이다. 우울하고 또한 절망적이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나와 식구들 눈에서 눈물 보이게 하진 않아야한다고 생각하며 눈물을 삼킨다. 우리에게도 건강하게 활보할 시간은 주어짐을 믿으며 고통을 이기고 힘들 땐 가족을 생각하자 환우여!
고마움 2001/02/06 18:26 -사소한 일도 감사하고 살아갑시다. 그래야 내 마음이 편하죠.-
안녕하세요? 선생님과 산부인과 의사 선생님의 도움으로 출혈이 멎었습니다. 참으로 세상을 오만하게 살아왔다는 것을 아프고 절실히 깨닫습니다. 깨달음을 얻기 위한 수행인가도 싶습니다. 저희 동내 효자산부인과 의사선생님께서 저의 집으로 전화를 2번이나 주셔서 이동석선생님께서 메일주신 것 인쇄해 갔더니 그 선생님께서도 그 방법으로 하려고 하셨다고 하시더군요. 처음에 자세히 알고 대책을 세워 주시기 위해 별 방법이 없다고 하셨다가 동료 유방암 전문 선생님과 여러 선생님들께 여쭤보셨다는군요. 저 때문에 환자진료가 바쁘신데도 여러 곳에 전화하시고 또 직접 전화주시고 너무 고마웠습니다.
아프고 나니 주위 고마운 분들이 너무 많습니다. 아프기 전엔 차를 직접 운전을 하고 다니다 아픈 후엔 택시를 타고 다니는데 새벽에 택시를 타면 기사님들께서 왜 서울 가냐고 물으면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어떤 분은 택시비도 깎아 주시고, 어떤 기사분은 자기 딸이 서울대 중환자실에 있으니 필요하면 따님 찾으라고 거듭 따님 이름까지 알려주시는 분도 있었습니다. 직장 상사의 직장일 아무 걱정 하지 말라고 하며 격려해 주시고, 주위 모든 분들 자기 일처럼 걱정과 관심주시고, 산에 오르면 산의 맑은 공기가 제 몸속에 있는 나쁜 균들을 다 없애주는 것 같아 눈을 감고 고마워합니다. 때론 강렬한 근심과 걱정도 눈을 감고 고마운 분들을 생각하면 힘이 납니다. 사소한 일도 감사하고 살아갑시다. 그래야 내 마음이 편하죠.
열린 마음 2001/02/11 17:57 -내가 슬퍼하고 짜증내면 식구들은 사막 속에 사는 기분일 것-
처음 유방암 진단을 받았을 땐 어둠 속에 숨고 싶었다. 누구에게 알리고 싶지도 않고, 괜히 부끄럽고, 직장에서도 상사들에게 살짝 말하고 쫓기듯 병가내고. 그러나 세상에 비밀이 어디 있나? 알 사람들 다 알게 되고 심지어 전주오기 전에 근무한 다른 지역에서도 전화가 오고. 이렇게 많은 사람을 내가 알고 있었나할 정도다. 그 후론 생각을 바꿨다. 비밀은 없다. 전화가 오면 스스럼없이 받고, 집으로 찾아오면 웃으며 인사하니, 어떤 분들은 현관을 들어오지 못하고 잘못 알았나하는 표정이다. 오히려 나보다 내가 암에 걸렸다는 것을 안 지인들이 어쩔 줄 몰라 했단다. 전화를 해도 되는 지, 방문을 해도 되는 것인지, 아는 체를 해도 되는지. 자기들끼리 서로 전화해 보니 표정이 밝다고 괜찮으니 가보라고 했단다.
방문 오는 여자분들은 궁금해 하는 것도 많다. 어떻게 발견했냐고 하며 심지어 자기 가슴을 만지며 묻는 사람도 있다. 나는 다 말해준다. 왜? 나처럼 진행되고 난 다음 발견하는 우를 범하지 말고 초기에 발견해 완치를 하기를 바라니까. 그러다 보니 오히려 말이 많아졌다. 그러다 유방암 진단받은 잘 모르는 사람도 연결이 되어 전화가 오면 나는 정말 아는 것도 없이 아는 체를 하며 말해준다. 그걸 본 엄마 '니가 유방암 전도사냐?' 하신다. 그래도 저래도 좋다. 같은 여자로 초기에 잘 잡히는 유방암 빨리 발견하고 건강 지키며 살기 바란다.
수술 후 남편과 언니가 병간호를 해 주는데 남편이 하루는 주치의 선생님이 상처 소독 해 주시는 걸 보고 난 후 내 손을 잡고 걱정이 있단다. 지금 잘 견디고 있는데 퇴원 후 목욕하는 날, 내가 수술 부위를 보고 충격 받을 것이. 퇴원 후 처음 목욕하며 될 수 있으면 상처 부위 안보려고 무지 무지 애쓰다 살짝 보고 정신이 띵했다. 지금도 잘 못보고 그 부분은 잘 씻지도 못하지만. 눈을 감고 생각했다. 목욕 후 소파에 앉았으니 남편이 조심스레 쳐다본다. 나는 당당하게 선언했다. '나는 두 아이의 엄마다. 젖먹이 아이도 아니고 다 큰 아이 엄마로 사는데 가슴이 무슨 필요있냐. 나는 앞으로 여자이기전에 우리 가족 지키면서 사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남편이 잘 생각했단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나는 내 가족을 지키고 싶다. 그러기 위해 마음을 열고 될 수 있으면 밝고 건강한 마음으로 식구들과 살고 싶다. 내가 슬퍼하고 짜증내면 식구들은 사막 속에 사는 기분일 것이다. 이 마음으로 때때로 몰려오는 슬픔도 잊는다.
선생님 제가 푼수인지 이젠 잘 웃고 어울립니다. 죽고 사는 문제는 죽고 싶다고 되는 게 아니고 살고 싶다고 되는 것 아니잖습니까? 누가 더 오래 살런 지는 아무도 모르죠. 그런 면에서 생사 포기했죠. 그저 사는 동안 다른 사람 피곤하게 안해야죠. 저도 기분좋게 살고요.
2월 7일 3차 항암치료 받고 와서 아직 약 기운에서 헤어나지 못하는데요. 1차 항암치료 받을 때부터 친구나 지인들이 밥을 사준다고 하면 항암치료 후 힘든 며칠을 빼곤 그러라고 하며 같이 어울려 식사했습니다. 물론 집에서 잡곡밥에 채식 위주의 밥이 제일이지만 거절 하지 않았습니다. 처음 나가서 어울리고 식사하고 기분도 괜찮고 하니 식구들도 말리지는 안더군요. 1월은 방학중이라 좀 횟수가 많았죠. 저녁 늦게까지 어울리다가도 오고요. 질문하나요. 이게 제 상태에 나쁜 영향을 주진 않겠죠? 제가 너무 조심을 안하는지요. 한편으로는 조금 걱정도 된답니다.
질문두개요. 직장을 다니다 항암치료 후 며칠은 도저히 근무를 못할 것 같고 방사선 치료를 서울에서 해야 해 휴직계를 냈는데요. 나머지 괜찮은 나날을 어떻게 지낼까 하고 생각 중입니다. 물론 산을 1시간 다니기로 했는데요. 나머지는 집에서 누워만 있을 수 없어 그 동안 관심 분야인 그림이나 사진을 좀 배워보고 싶은데 아님 다른 것도요. 무리는 없는지요. 그러다 악화되는 것은 아닌지 궁금합니다. 집에서 누워서 환자처럼 생활해야 하는지요.
지금은 산에도 가고 책도 읽고 가끔 지인들 만나고 하다보니 이렇게 완전 환자로 사는가 하 는 생각이 드네요.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며 그럼 이만
너무나 잘 견디고 잘 이겨내시는 모양을 보니 참 뿌듯하고 존경스럽습니다. 제 책에 이런 내용(148페이지)이 있지요. <암과의 평화협정, 암문화는 분노, 돌진, 싸움, 승리와 같이 면역체계를 지치게하는 용어들을 강조하고 있다. ---- 나는 나의 암과의 관계를 다르게 설정하였다. 나는 --- 암과의 전쟁이 아니라 평화를 선택했다., 암과 전쟁을 치루는 사람과는 달리 나 자신의 깊은 핵심에 금을 냈다. 이곳을 통하여 음악과 시와 사랑과 우정에 대한 깊은 감사가 스며 나왔다.> 이 내용이 문득 생각이 나는군요.
김*숙님 말대로 내가 김용*님 보다 먼저 죽을 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너무 조바심내지마세요. 가족과 이웃들과 열심히 접촉하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삶에 활력을 주는 엔돌핀이 마구 마구 솟아나겠군요. 좋습니다. 새로운 취미를 가지는 것도 좋구요. 이것에 집중하는 동안 암에 대해서도 잠시 잊고 살아 있다는 것도 느끼시게 될 것입니다. 이런 행동들이 암이 다시 찾아오는 것을 막았으면 막았지, 나쁜 영향을 주지는 않습니다. 너무 잘 적응하고 계시니까 오히려 제가 걱정이 되는군요. 이렇게 이겨 낼려고 노력하고 계시고, 극복하실 수 있으리라 확신하고 계시는데, 만일에 (물론 이런 일이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되겠지만요.) 다시 유방암이 찾아왔을 때, 지나간 시절동안의 노력은 무엇이었느냐면서 허탈해하고 절망에 빠지시지나 않을런지 솔직히 염려가 되는군요. 마음속에 이런 틈도 쪼~~~~끔만 남겨놓으세요. (잊고 계셨던 재발의 염려를 상기시켜드린 것은 아니지요?)
무소유 (2001/02/23 17:06) -지금 소유해야 하는 것은 그리고 소유하지 말아야 할 것은 -
암 진단을 받고 며칠 후, 다니던 직장에 병가를 내며 짐을 정리했습니다. 평소에 몰랐는데 짐이 왜 그리 많던지. 틈나는 대로 보려고 갔다놓은 책은 그야말로 짐이 되었습니다. 영어, 컴퓨터, 국문학, 등등. 다시 이 책들을 볼 수있을런지 하며 모두 버렸습니다. 시원하도록 버리고 집으로 오니 집에도 왜 그리 짐이 많은지. 물욕이 많았나 하는 생각들로 모두를 내버리고 싶었습니다. 다음 사람을 위해서도. 기력이 없어 집 정리는 하지 못하고 볼 때마다 버리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아무 것도 가지고 싶지 않았습니다.
평소 언니가 너희 집은 누가 주워가도 않을 것만 많다고 했는데 정말 다 필요없는 것에 욕심을 내었구나 하는 생각들이었습니다. 남편은 기구(컴퓨터 기기, 사진기, 공구 등등)와 책 사는 것들을 좋아하고 저는 책, 음반, 등등 자질구레한 것들을 좋아하여 사다 놓은 것들이 이리 저리 나뒹굴었습니다. 물욕도, 지적 성취욕도 다 필요 없는 것을. 그러다 병원 다니려고 통장을 보니 막상 있어야 할 잔고는 없었습니다. 부부가 경제관념이라곤 1%도 없었으니. 남들 다 주식할 때, “머리 아프게 그런 것은 왜 해?” 할 정도였으니. 은행도 가장 가까우며 편리한 곳 이용하고. 그 부분에 대해서는 서로가 인정을 할 정도였습니다. 식구들이 같이 여행하고, 책보고, 영화보고, 하고 싶은 일 하며 사는 것이 최고라며 생각했는데 현금의 중요성을 실감했습니다. 무소유를 느꼈는데 더 큰 욕심이 새롭게 다가온 걸까요.
치료 받으며 정신적 여유도 생기니 내버렸던 책들에 대한 미련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다시는 어떤 것이든 안사야지 했는데, 생명의 줄 하나만 쳐다보고 살 수는 없었습니다. 암에 관련된 책을 사기 시작하면서 안사야지 하면서도 소비의 절단은 어려웠습니다. 지금 이 순간 소유해야 하는 것은 건강한 생명이겠지요. 그리고 소유하지 말아야 할 것은 절망과 두려움이겠지요. 무소유 -어떤 것에도 (삶조차도) 욕심이 없으면 두려울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무소유 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고.
귓가에 울리는 소리 하나 '저 서른 둘인데요'하며 자신도 유방암 판정을 받았다며 아는 사람 이야기 듣고 전화한, 얼굴도 몰랐던 후배. 책을 주기 위해 본 너무 젊고 키도 크고 어였뻤던 곽선생. 2월 16일 노동영 교수님께 수술받으러 간다고 14일 전화했었는데 오늘쯤 퇴원했겠군요. 부디 마음 굳게 가지고 무념 무상, 아무 생각하지 말고 몸 보존 잘하길. 가시밭 길 건너면 뭔가는 나오겠죠.
독백 (2001/03/05 12:03) -내가 이겨내야 우리 아이들이 희망을 갖고-
2월 28일 4차 항암주사를 맞고 왔다. 이제 빨간약은 고만 맞고 다음부터는 탁솔을 4회 맞자고 하신다. 입원을 해야 보험혜택을 본다고 다음번에 입원 준비해서 오라고 하신다. 예약실에선 그때 가봐야 방이 있을지 안단다. 그럼 방이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한다나. 서울로 갈 때부터 우울했다. 아직 어린 둘째 아이를 기숙사에 넣었는데 28일일 입사일. 대학부터나 떨어져 지낼려고 했는데. 엄마가 데려다주지도 못하는 맘 달래 서울을 갔는데. 처음 7차 맞자던 주사가 1회 더 늘어났다는 것도 그렇고 입원을 해야한다는 것도 그렇고. 의사선생님과는 다르게 입원실이 있어야한다는 접수계 여직원도 그렇고 모든 것이 다 착잡했다. 그런 마음으로 주사를 맞아서 그런지 주사 맞는 순간부터 구토 증상이 있더니 드디어 맞자마자 하고 말았다. 어떻게 내려왔는지도 모르게 집에 왔다. 집에 와 기운 없는 가운데 항암주사 1회 더 추가해야된다고 하니 그러냐 그럼 맞지하는 표정이 나를 슬프게 했다.
그 누구도 이 마음을 모른다. 어서 빨리 항암, 방사선 맞고 환자생활을 끝내고 싶은 맘을. 난 외치고 싶다. 나 치료 다 끝났어요. 정신도 놓고 육체도 놓은 4일 동안 그래 1달 연장될 뿐인데 하고 생각하다가도 1달이나 하는 슬픔 맘으로 오락가락. 언제부터 내가 1달을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보험혜택-나에게도 혜택은 있구나. 사랑의 리퀘스트 프로그램을 식구들과 채널 다툼을 하면서 울면서 보았었다. 너무 안스럽고 불쌍해 전화 다이얼 돌리고 또 돌리고 싶어 울면서 (식구들에게 혼나면서) 보았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프로그램을 볼 수 없다. 그 땐 그 화면이 다른 세계의 화면이어서, 나와 사랑하는 내 주위 사람에게는 일어나지 않을 일이어서. 그런데 나도 일어났다는 것이다. 어떻게 내가 나의 세계 화면을 보겠는가. 이제는 보아도 눈물도 나오지 않는다. 생각지도 않는 일이 '나도'일 수 있다. 그 순간 행운의 여신은 나에게 떠난 것 같다. 그런데 혜택이라니 너무 고마운 일인가?
오늘 항암주사 후 5일. 몸이 조금 살아났다. 남편이 날마다 퇴근해 좀 어때 하면, “나 쥐약 먹은 병아리야” 하며 이리 픽 저리 픽 고꾸라졌는데 오늘 저녁은 달려가 맞을 것 같다. 5일 동안 아무 생각도 없이 멍한 몸과 정신과 지치도록 싸움해 이겼다. 내가 이겼다. 그 힘듬 속에 절망스런 생각이 눈앞을 막으려면 생각한 것. "우리 두 아들이 공부하는 것, 앞으로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야하는 것 보다는 힘들지 않지. 나는 4, 5일만 참으면 되지만. 그래 내가 이겨내야 우리 아이들이 희망을 갖고, 어떤 역경이 와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생기지." 고통의 수렁 속에 허우적거릴 때도 가족이라는 희망의 빛이 나에게 손짓을 해주어 빠져나온다. 아! 갈수록 두려운 주사 맞기. 주사 후의 엄망이 되어버린 몸과 맘. 어떻게 잘 추스려 나아갈지. 모두에겐 괜찮다고 하면서도 두려움을 가진 마음. 탁솔은 기대된다. 어떻게 나에게 다가올련지. 만나고 싶지 않은 너. 그래 4번이야, 4번뿐이 안 남았어. 4일 동안 엄청 허우적거리고 난 후의 나의 독백이다. 기지개 펴고 오늘은 산 아래라도 갔다와야지.
기도 (2001/03/19 14:14) -내 아이들에게 더 이상의 눈물 흘리게 하면 가만있지 않겠다고, 그게 하느님이라도-
식구들이 모두 빠져나간 허전한 자리를 봄볕이 꽉 차게 들어와 달래준다. 햇볕이 이렇게 인간에게 힘이 되어주는 것을 너무 늦게 알았나. 그렇게 기다리던 봄이 이미 와 있었다고 손짓하는 듯하다. 오늘도 이렇게 기쁜 하루 열어주심을 감사한다.
종교를 어릴 적에 가졌다. 그러다 너무 이기적인 종교인으로 살아가는 자신과, 방황에 멀리하다, 아프기 전부터 가고 싶다는 이끌림이 있었으나 막상 다시 발길을 돌리지 못하였는데 암 선고 후 다시 찾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도 다니는 곳에 선뜻 나아가지는 못하고 있다. 왜? 너무 자신이 뻔뻔스러운 것 같아. 몸이 상하니 이제야 찾는 것. 나 자신이 생각해도 얄미운데.
기도를 한다. 기쁜 하루하루 주심을 감사하며. 우리 가정에 평화를 주시라고, 당신이 당신 자녀를 사랑하듯이 나도 내 자녀, 내 남편을 사랑하오니 우리 가정에 은총과 평화주시라고. 물론 나날이 기쁜 날만은 아니다. 이상하게 항암주사 한 번 맞고 올 때 마다 몸의 이상이 한군데씩 생겨난다. 몰랐던 이상이 있다는 말을 들을 땐 우울하다. 내 자신이 왜 그렇게 몸에 관심이 없었는지, 그냥 열심히 살아가면 되는 줄 알았다. 어디가 조금 아프면 이러다 말겠지 하며. 암튼 이상이 발견되는 날은 하루종일 우울과 싸우고 힘들게 헤쳐나온다.
그런 날도 기도를 한다. 아니 협박을 하는 것인지 모른다. 절대 내 식구에게 더 이상의 눈물을 흘리는 일이 없도록 해달라고, 우리 두 아이에게 건강과 바른 마음으로 바르게 살아가도록 해달라고. 이런 날 남편에게 나 지금 기도한게 아니라 협박했어라고 한다. 차마 말은 못하지만 정말 협박하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내 아이들에게 더 이상의 눈물 흘리게 하면 누구든 가만있지 않겠다고 그게 하느님이라도' (못들은 것으로 해주세요. 얼마나 간절하면)
그리고 어릴 적 외할머니가 하시던 기도를 내가 하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란다. 저를 거두어 가시려거든 아침, 또는 저녁 잘 먹고 조용히 거두어 가시라고. 아니 팔순 할머니가 하시던 기도를 내 나이 몇이라고 내가 하고 있다. 아무 때고 상관 않겠다고 다만 제발해 식구들과 본인 더 이상 괴롭히지 말아달라고.
기도를 들어 주실거라 생각하며 하루하루 감사기도를 한다. 기쁨 가득한 하루주심에 넘 감사하며. 감사기도와 협박기도 둘 다 들어 주시겠지. 아님 더 협박할래요 하며.
지금 암과 싸우고 있는 환우들, 오늘 하루 봄볕이 너무 좋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이렇게 햇볕 온몸으로 포옹할 수 있는 하루 주심을 감사(본인이 하고싶은 분께)하며 편안하고 기분 좋은 날 되기를 기도하며, 하루하루 편안하고 기분 좋으면 우린 환자가 아니죠.
잘못된 의료정책 (탁솔) (2001/03/30 18:01)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환자-
드디어 탁솔을 맞으러 가는 날. 나는 아프고 난 뒤 서울대병원이 싫어졌다. 나를 치료해주는 고마운 곳인데 서울대병원만 생각하면 주사약 냄새가 코끝으로 들어와 구토증상이 일어난다. 아이에게 작년 여름방학 때 서울대를 목표로 공부하라고, 같이 서울대 관악캠퍼스를 둘러 보았는데 요즘은 아이 실력도 없거니와 서울대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아침 일찍 입원 준비를 해가지고 엄마와 남편과 인사하고 서울행. 그런데 이게 웬 일인지 한 달전에 입원예약하고 왔는데 입원실이 없어 주사를 못 맞는단다. 며칠 후에 올라오란다. 의사선생님께 주사실에서 맞고 가겠다고 떼를 썼다. 비용과 특이반응 관계로 안된단다. 다시 입원예약실로 올라갔다. 역시 안된단다. 아니 내가 무슨 보약을 맞는 것도 아니고 초진도 아니고 의사선생님과 약속된 날짜에 입원실이 없어 다시 집으로 가야한다니 기운이 없어졌다. 언니와 다시 의사선생님께 가서 돈을 더내더라도 주사실에서 맞겠다고 했다. 병실은 20%, 주사실은 50%를 내야하는데 30%는 내가 받는 스트레스 비용이라 생각하려고 했다. 다시 거절당하고 주사실로 가서 간호사에게 물어보니 맞아도 된다고 해 선생님께 전화해 허락이 떨어졌다. 왕복 차비에 1인 실이나 2인실에서 입원해 (서울대 병원은 6인실은 하늘에 별따기니) 주사 맞으면 별 차이 없다고 간호사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아니 암환자가 맞는 항암제가 입원하여 맞으면 보험혜택이 주어지고 주사실에서 맞으면 보험혜택이 없다니 이건 뭔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것 같다. 의사선생님께 주사맞고 데모하러 가야겠다고 했더니 웃으신다. 남편도 이해가 안된단다. 왜 주사실에서 맞으면 보험혜택이 적다는 것인가 납득이 안간단다.
나는 혜택이고 뭐고 계속해서 이렇게 입원실이 없어 주사가 연기되어 왔다갔다하고, 스트레스 받고 하느니 어서 맞고 내려오고 싶었다. 거금 105만원을 내고 주사실로 갔다. 가자마자 약냄새에 구토하고 (자신의 못남이 한없이 괴로운지고 이렇게 비위가 약해서) 3시간에 걸쳐 맞기 시작했다. 빨간약 맞을 땐 도중에 약냄새에 구토했는데 탁솔은 주사 맞기 시작하며 잠이 들어 수월했다. 맞았다는 기쁨으로 돈 생각도 잊고 편안했는데 내려오면서 생각하니 돈이 아까웠다. 앞으로 3번을 이렇게 고비용으로 맞아야하다니. 집에 오니 식구들은 잘했단다. 돈도 돈이지만 아픈사람 왔다 갔다하고 주사 맞는 것 계속 연기 되는 것 식구 모두에게 신경 쓰이는 일이다고. 저녁에 식구들 모여 잘못된 정책, 비합리적 병원 체계(의사선생님이 지정해 주신 날 입원실을 마련해 줘야하지 않나, 선생님 의견따로, 입원실 내주는 곳 따로)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환자하며 잠이 들었다.
오늘은 탁솔을 맞고 온지 이틀째 어제는 산에 갔다와서 남편에게 전화했다. (빨간약은 생각도 못하지, 맞고 와서 다음 날 산에 가다니 지금쯤 죽을 고생하지) '역시 105만원 들여 맞고 오니 돈값 하느라 몸이 괜찮다고' 남편 왈 '그럼 됐네 105만원 들여 맞고 와 똑같이 아프면 내가 청와대든 병원이든 쫓아가려고 했는데'하며 웃는다. 아, 이 비정상정인 정책을 어디다 호소해야하나. 몸 아픈 것도 괴로운데 보험혜택 생각하며 스트레스 받게 하는 것 어디에 하소연해야 되는지. 비합리적인 것이 환자에게만은 없어야하지 않나. 남편 어깨에 경제적인 짐마저 얹어주는구나. 앞으로 3번을 이렇게 맞아야 되는데.
환자를 대하는 태도 (2001/05/24 18:02)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어울려주는 지인들이-
암이라는 말에 많은 사람들이 걱정과 위로를 해주었다. 그 많은 위로를 받으며 나는 다른 사람이 아팠을 때 어떻게 해 주었지 하고 생각해 보았다. 또한 몸은 나아졌냐는 물음에 주저해진다. 진심으로 몸은 수술전보다 나아지지 않았다. 피로감 등등. 암 환자는 멀쩡한 상태(?)에서 수술 받고 항암치료 해 몸이 지치는데 빨리 낫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몸이 나아졌냐고 묻는다. 아니다라고 하면 마치 곧 죽을 사람처럼 쳐다본다. 직장을 다니다 집에 있으니 긴 하루하루다. 그 때 마다 가끔 전화해주고 식사하자고 하며 불러내 주는 지인들이 너무 고맙다. 그 순간 나를 암환자가 아닌 일상의 생활인임을 느끼게 해준다. 지난 금요일은 후배가 교원단합대회라 학교에 안가고 나를 위해 하루를 투자하기로 했단다. 같이 야외에 나가 점심을 먹고 [인디언 썸머]영화를 보았다. 그 순간 아! 그래 살아야지 하며 희망을 가지게 되고 암임을 잊는다. 그리고 '오늘 나 때문에 피곤했지'하는 애교에 고마워 목이 메였다.
나를 환자로 걱정스럽고 측은하게 보는 눈빛은 싫다. 그냥 나의 피곤함을 배려하면서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어울려주는 지인들이 좋다. 나를 대하는 사람들은 두 부류다. 한 부류는 걱정과 측은함으로 쉽게 이야기도 못하는 사람, 또 한 부류는 너는 치료 끝나면 나을건데 뭐 어때 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대하여 주면서도 걱정해주는 사람들.
환자이기 전에 한 사람의 생활인이다. 환자를 대할 때는 환자의 입장을 생각해 주면서도 일상의 만남이 되도록 해야 하겠다. 환자 앞에서 너무 많은 걱정과 위로를 해주는 것은 환자에게 좋지 않은 것 같다. 불러내 직장 돌아가는 이야기, 농담, 상사 흉, 등등의 이야기를 주고 받을 때 내 에너지는 넘치고 있다. 불편해도 식당도 내 위주로 고르려고 하는 사람들 그러면서도 편안하게 대해주는 모든 지인들께 나는 어떻게 감사해야 하나 생각한다. 이 순간도 환자의 가족이나 주위 환자를 대해야 하는 사람들, 농담도 해주시고 배려는 하면서도 너무 걱정과 측은한 눈빛은 환자를 더 부담이 되니 일상의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세요.
환자가 힘이 조금 허락하면 야외도 데리고 나가보고 영화도 보고 식사도 같이 하고 하면 힘이 생긴답니다. 식이요법을 하면서도 식사하자면 전 나갑니다. 한 끼의 식이 요법보다 어울리고 생활하는 것이 더 좋은 치료 아닐까요. 저는 치료 기간 중에도 영화를 몇 편 보았습니다. 물론 [친구]도 보고. 처음엔 많은 사람 속에 감기라도 걸리지 않나하는 조심스러움에 식구들도 걱정했는데 오히려 활력소가 될 뿐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환자 가족분들 환자의 기분 전환을 위해 영화 한 편 좋죠. 이동석 선생님도 가족들 초청하는 제 유혹에 환자가 라는 생각에 응할 생각도 안 하셨죠? 환자도 여행해도 되고 즐길 권한이 있죠. 살아있는 삶이 무엇인들 못하겠습니까. 또한 고마운 분들께 감사하고 싶은 마음은 환자가 더 많이 가지고 있답니다. 간절하게요.
방사선 치료 (2001/06/24 11:11) -“엄마 괜찮아 치료 잘 받아 나아가고 있어”-
방사선 치료를 시작했다. 벌써 7번을 했다. 항암치료가 끝나고 나니 몸이 날아갈 것 같았다. 동료 직원에게 전화가 왔다. 몸은 좀 어떠냐고 '원래 건강한데 의사선생님 혼자만 건강이 안 좋다고 하네요' 하며 웃었다. 고민도 많고 말도 많았던 방사선 치료를 집 가까운 곳에서 하니 맘이 편했다. 치료 시작 후 머리가 아프고 어지러웠다. 의사 선생님께 말씀드리니 '머리 아프고 어지러운 것은 방사선 치료하고 아무 상관이 없으니 밥이나 잘 먹으셔요' 하신다. 집에 와서 곰곰 생각하니 의사 선생님 말씀이 옳으시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사선 치료에 대한 겁주는 매체와 사람들의 이러쿵 저러쿵의 말들이 방사선 치료대에서 온몸과 마음을 긴장하게했다. 항암 후유증은 치료가 되나, 방사선 후유증은 치료가 안 된다 등의 말을 듣고 첫 날 부터 얼마나 긴장을 했는지 모른다. 실상 방사선 치료는 힘든 것이 하나도 없다. 모든 것은 정신력이다. 의사선생님과 방사선치료 선생님을 믿고 편안하게 받으면 되는 것을 너무 긴장을 했다. 마지막 항암 주사 맞고 얼마나 몸이 홀가분했는가를 생각해도 정신력이었다.
모든 것이 예전같이 좋다. 이 모든 것이 다 주위의 사랑하는 사람들의 덕분이다. 한가지 한 번 크게 따끔한 맛을 본 탓인지 좋다는 말이 조심스러워진다. 치료의 반은 정신력인 것 같다. 지금도 힘든 치료하고 있는 환우들 편안한 마음으로, 잘 될 거라는 마음으로 치료 받길 바란다. 처음 암 판정 후 내가 결심 한 것 하나 가족에게 짜증과 고통스런 표정 안하기였는데 정말 한 번의 짜증과 힘든 내색 없이 가족 모두 웃으며 여유가 있었던 것 같다. 아이들에게도 항상 “엄마 괜찮아 치료 잘 받아 나아가고 있어” 했다. 그래서 어느덧 이렇게 치료의 끝부분에 서서 지나온 길을 생각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것 같다. 좋아졌다는 말은 무섭지만. 왜? 또다시 다른 것이 나를 치고 들어 올까봐. 좀더 신중하고 겸손되게 받아들여야겠지
먹을 것에 관한 고찰 (2001/06/24 11:42) -뭐가 좋다는 소리 좀 안해줬으면 한다.-
암 환자가 되어 보니 먹을 것도 많고 먹지 말아야 할 것도 많았다. 누가 친정어머니께 뭐가 좋다는 말을 하면 친정어머닌 정신이 하나도 없다. 그걸 꼭 먹여야 된다고. 누가 뭐가 좋다는 소리 좀 안해줬으면 한다. 이젠 어머니도 가시고 살림을 슬슬 시작했는데 여자가 아프면 누가 챙겨줄 수도 없어 본인이 챙겨 먹어야한다. 그래서 쉽고 간편하게 영양을 섭취하는 방법을 생각해서 실천해본다. 비싼 것 말고 싸고 쉽게 주위에서 구할 수 있고 누구에게나 좋은 것으로 먹자.
**항암치료시- 물을 많이 먹자. 항암 주사의 독성분도 빼내야하고. 1시간에 1컵 정도로. 빨간색의 주사약을 맞는 사람들은 얼굴색과 손톱색이 까맣게 변하는데 본인은 물을 많이 먹어 별 변화 느끼지 못함. 고 단백을 많이 먹었음 (개구리, 장어, 복어, 그리고 소고기 기름기 적은 곳을 구워 먹음)
***생야채 먹는 방법 (비위가 약한 사람) 양상추, 양배추, 브로컬리 등이 좋다고 하는데 이런 것은 특별 조리법이 없고 생으로 먹어야 좋다는데 즙을 먹자니 비위가 약하고 해서 생각해 낸 방법 -매실 엑기스로 야채 드레싱 하는 법 (소스를 만들려면 번거롭고 마요네즈는 몸에 좋지 않고 해서 만든 법) : 매실 엑기스에 식초 조금과 소금 간을 해서 양상추 양배추 오이 등등을 드레싱해서 먹으면 정말 맛이 좋다. 야채를 씻어 냉장고에 넣어 놨다 먹기 전에 잘게 찢어 버무려 먹으니 간단하고 매실 엑기스만 있으면 하기도 쉽다.
***콩을 많이 먹는 법 콩이 좋다고 하는데 콩물도 질리고, 여름이 되니 콩밥이 도저히 먹어지지 않는다.
1. 쑥, 콩 미숫가루 현미쌀, 현미 찹쌀, 율무, 콩(검정 서리태 콩이 좋음)을 쪄서 말리고 보리는 볶고, 쑥은 삶아 말리고 해서 방앗간에 가서 가루로 해서 먹는데 쑥이 많이 들어가면 약간 쓴맛이 난다. 꿀을 첨가해 먹음.
2. 쑥 송편 쑥이 좋다고 해 쑥 개떡을 해서 아침에 먹었는데 쑥을 삶고, 쌀(멥쌀)을 4시간 불려 방앗간에서 빻아온다. 끓는 물로 익반죽을 해 동그랗게 만들어 그 속에 완두콩 4~5알과 땅콩 2알을 넣어 만들어 냉동실에 보관해서 아침에 조금씩 찜냄비에 넣고 5분간 쪄서 먹으면 씹는 맛도 좋고 땅콩의 고소한 맛도 있어 맛있다. 단 송편은 쪄서 참기름을 바르는데 기름은 좋지 않으니 그냥 먹어도 맛있음.
***녹즙이 싫은 사람 녹즙기는 씻기도 귀찮고 하니 쥬스기에 신선초나 케일을 넣고 야쿠르트(유방암 환자는 변비가 있는 사람이 걸리기 쉬워 야쿠르트를 많이 먹으라고 백남선박사님의 책에 나옴)를 넣어 갈다 토마토를 넣어 갈아 -1분도 안 걸림- 거를 것 없이 마시면 맛있음. 요쿠르트가 달작지근해 설탕 가미 안해도 됨.
$$ 아침 식사로 토마토, 신선초, 야쿠르트 간 것과 쑥 송편 을 먹으면 속이 편해지고 배변 습관이 좋아짐 $$ 쑥--황수관 박사는 쑥 떡을 아침식사 대용으로 하신다고 하는데 쑥은 대장 위장 등 장기능을 좋게하고 몸을 따뜻하게 한다고 함. 쑥은 봄에 뜯어 삶아 냉동고에 넣어 놨다 쓰면 되는데 준비가 안 되신 분은 여름철은 쑥이 하얗게 뜸이 생겨 안 좋은데 움쑥(산속 그늘에서 자란 것)을 잘라서 해도 됨. 조금 준비했다. 가을 쑥이 오히려 여름 쑥보다 좋으니 가을에 많이 해서 냉동실에 넣어놓으면 됨. $$ 현미-시중에서 산 것은 방아 찧은 지 오래되어 묵은 냄새가 나니 방앗간에서 직접 방아 쪄오면 고소하고 맛있음. 4시간 이상 담궈놨다 밥을 함.
$$$$$$$ 암환자의 음식에 관한 본인의 생각- 특별한 식이 요법은 오히려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으니 안하는 것보다 못하다. 주위에 좋다는 것이 너무 많은데 비용도 많이 들고 (본인도 좋다는 것 사다 몇 백이 날아감) 효과도 글쎄다. 유방암은 여자인데, 본인 스스로가 챙겨 먹는 것도 힘들다. 간단하고 쉽게 만들어 먹을 수 있고, 주위에서 쉽게 구하는 것 맛있게 먹는 것이 최고 아닐까? 쑥, 매실엑기스만 한 번 준비하면 몇 달은 편하고 쉽게 먹을 수 있다.
*** 항암 작용으로 본 식품 --- 항암 작용이 큰 순서대로 마늘, 양배추, 감초, 대두, 생각, 당근, 샐러리 파스닙, 차 , 터머릭, 양파, 밀알 , 아마, 현미, 오렌지, 레몬, 그레이프후르츠, 토마토, 가마, 피망, 브로콜리, 콜리플라워, 감귤류, 머스크메론, 배즐 오이 로즈마리, 보리 딸기류, 버석류, 해조류, 멜론, 키위(미국 국립 암 연구소 자료-2000년 11월 초 동아일보 자료) *** 마늘 양배추, 당근 녹차는 식탁위의 항암 보약 마늘-황화합물과 알리신 터핀, 셀레늄, 등의 항암 성분. 하루 익힌 마늘 2-3쪽 이 표준량 양배추-스테롤 인돌 클로로필 아이소타이오사이안산염 베타 카로틴, 루테인 비타민 C 등의 항암 성분 함유, 양배추 가지 당근-베타 카로틴, 클로로필 터빈 스테롤 비타민 C,E와 식이섬유가 듬뿍. 하루 중간크기 1개가 좋음 녹차-카테킨, 에피갈로카테킨갈레이트, 베타 카로틴, 비타민C, 클로로필 식이섬유 등의 항암 성분 특히 떫은 맛을 내는 카테킨은 암세포의 자살을 유도 하루 10잔 이상 복용이 가장 좋음. (미국 국립 암 연구소 자료-2000년 11월 초 동아일보. 원자력병원장 백남선씨 자료 제공) ***산나물의 항암식품 (황성주 생식 제공) $ 취나물, 냉이 씀바귀, 비름, 민들레 80-100% $ 고들빼기, 부추, 솔거리 달래, 60-80% $ 은행, 생강 호두, 토란, 양상추, 파슬리
+++ 위에서 열거한 식품 들은 우리 주위에서 우리가 자주 먹는 식품들이라 구하는데나 경제적으로 별 어려움이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 마늘-얇게 썰어 구워 죽염에 찍어먹는다. $ 당근-쥬서로 먹는 것 보다 당근은 기름에 볶아 먹어야 효과가 크다(지용성). 채로 썰어 볶아 야채쌈에 같이 싸먹으면 질리지도 않고 야채만 싸먹는 것보다 맛이 좋음.
$ 취나물-요즘 들어갔는데. 마트에 가면 머우잎처럼 큰 것이 나오는데 (머우잎인 줄 알았음) 끓는 물에 데쳐 찬물에 담궈놨다 짜서 양념장에 싸먹으면 쌉싸름하면서 맛이 있어 밥맛을 돋구워줍니다. $ 씀바귀- 생으로 쌈싸서 먹으면 맛이 있는데 조금 있으면 질겨져 고들빼기 김치 담그듯 해서 담궈 먹으면 맛이 있음. 지금 담아 먹어도 맛이 있음 $ 민들레-즙으로 내서 냉동실에 넣어뒀다 먹는다는데 본인은 비위가 약해 시도 안 해봄. $$- 식용유는 가능한 한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으며 올리브 오일이 유방암에 좋다고 책에 나와 있으니, 100% 엑스트라 버진 올리브 오일을 사용해서 요리 하면 됨.
현대 의학의 치료가 끝나면 어떻게 할 것인가 막막한데 스스로 몸을 잘 건사하여 생명 연장보다 질 높은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하리라 생각해봅니다. 모두 건강하길 바라며.
우울한 마음 퇴치 (2001/06/24 21:34) -부록으로 주신 기간을 조금 알차게 채워보자.-
날마다 기분 좋은 하루하루, 감사한 하루하루 지내려고 노력하며 그렇게 지내는 편인데 문득 문득 베란다 거실 너머 들어오는 햇빛, 또는 한낮에 혼자 거실에 내리는 비를 보면 우울한 마음이 살며시 다가온다. 그럴땐 1. 가족들을 생각한다. 내가 우울하면 모두가 우울해진다고 생각한다. 2. 음악을 틀고 고개짓으로 리듬을 타본다. 아무 생각을 말고 리듬을 타본다. 춤 출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면 더욱 좋고. 3. 아이들의 사진을 본다. 아이들에게 “엄마가 아파 미안하다.” 혼자말을 하며. 그러다 보면 ‘어머 내가 아파도 힘을 내어 밝고 건강하게 키워야지.’하는 생각을 한다. 4. 외적인 것은 (전절제, 머리 등) 내가 사는 이유에 들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나는 우리 집을 이끌어간다. 나의 외모보다는 나의 밝음과 나의 미소, 유머로 식구들을 기쁘게 하여 죽는 순간까지 빛이 되어야지, 5. 언젠가는 모두가 가는 것이다. 인상을 쓰며 갈 것인가, 통통 탄력있게 살다 갈 것인가 생각해 본다. 누구를 원망하는 마음이 없어야 한다. 내가 죽더라도 참 밝게 살다 갔다는 소리 들어야지, 인상을 쓰다 모두에게 짜증을 유산으로 남길 수는 없다는 생각을 하자. 6. 치료가 끝난 후의 삶은 내 인생의 부록이다 생각하자. 지금까지 산 것도 결코 짧지 않다고 생각해본다. 이만하면 됐네하고 생각하고, 지금부터는 서비스로 주신 기간이다라고 생각하자. 본권이 별거아니고 부족하여 더 알차게 채워보라고 부록으로 주신 기간이다. 부록을 거창하게 채울려고 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본권보다는 더 알차게 채우려고 생각하자. 누구와 관계가 좋지 않았으면 관계 개선하고, 지금까지 내 인생에서 가장 큰 개선점을 한 가지 고쳐보려고 그래서 부록인 인생을 조금 알차게 채워보자. 살아있는 기간이 길다고 행복한 것은 아니다. 단지 훗날 아이들이나 남편 주위 사람들이 그 사람 아파서 또는 건강해서도 짜증과 우울해서 주위사람도 짜증나게 했어 보다는 참 그 사람 아파도 잘 견디어 내었어 하는 게 낫지 않을까. 푸르른 신록처럼, 탱탱하게 살아보자.
빈익빈 부익부(나눔) (2001/07/23 19:25)
이제는 치료도 끝나가고 이 사이트와는 완전히 작별하고 싶은 마음 간절한데 작별하자니 서운합니다. 그래 금방 다시 찾습니다. 제가 병원을 다니다 보니 병원에서 빈익빈 부익부는 더 심했습니다. 가진 자는 보험도 여러 개 들어서 여러군데서 혜택을 보고 없는 자는 살아가는데 급급해서 보험 한 개 들지 못하고. 저는 여권운동을 하고 여자의 특혜를 누리는데, 여성을 해방하는 데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지금도 물론. 환자생활을 하면서 여러 이야기도 듣고 보고 하다보니 여자가 아프다는 것은 참 많은 난관이 있습니다. 남자가 아프면 시댁, 친정 아니 오히려 친정에서 딸 과부 안 만들려고 살리려고 하는데 여자는 시댁 눈치보기 바쁘더라고요. 하여 여자는 불쌍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선생님 목욕 행사 때 참석한 사람들이 모임을 만들었더군요. 하여 제안을 해봅니다. 다행히 저는 살림도 친정어머니께서 해주시고 언니와 남편이 번갈아 병원도 같이 다녀주고 제 직장도 있고해서 남편에게 병원비 걱정 안끼치고 이것은 제가 특혜를 누린 것 같습니다. 살림도 할 수 없이 많이 아프고 해줄 사람도 없는 여자들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런 모임에서 반찬이라도 만들어다 주고 아이들이라도 돌봐주고, 병원비 없는 환자들에게 조금이라도 나눌 수 있으면 합니다. 고통을 겪어본 사람들이 그 고통을 더 잘 알죠. 거창하게 봉사라고 하지 않고 만원권 한 장에서 조금 덜 쓰고 서로 나누었으면 해요. 그 모임이 그런 방향으로 약간의 전환을 하면 저도 다달이 참석은 못해도 적은 회비라도 보내겠습니다. 결코 있다고 나누는 것은 아닌 것 같아요. 없는 사람들이 그 고통을 잘 알기 때문에 우리 한 번 뭉쳐보는 것. 돈이 없어, 가족 걱정에 병을 더 키우고 있는 여자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조금 나누어 보는 것 모두에게 제안합니다.
치료를 끝마치고, 마무리 (2001/08/01 18:06) -지금껏 살아왔던 방식에서 조금만 더 거짓없고 남도 생각하며-
치료가 다 끝났다. 이제 유방암에서 해방되어 병원을 잊고 사는 길이 남은 끝이 아닌, 현대 의학의 치료의 한계가 끝이라는 말이겠지. 다시 암 선고 전의 일상으로 복귀를 준비하는 하루하루다. 그간 걱정스럽게 지켜주었던 고마웠던 분들과 식사도 하고 인사도 하고, 특히 이동석 선생님 도움에 감사드리고 싶지만 멀어서...지난 9개월을 생각하니 참 길고도 짧고 인간의 80평생 겪어야 할 마음고생, 수많은 생각들을 하고 산 것 같다. 앞으로의 생이 불확실하다는 공포감은 드는데 누구의 인생이든지 확실한 것은 아니지 않나 싶다. 단지 더 조심스러울 뿐이겠지. 하여 용기를 가지고 씩씩하게 살아 가려고 한다. 단 지금부터의 인생은 서비스기간, 아님 별책부록같다. 본권이 부실하여 별책부록으로 꾸며보라고. 어떻게 꾸밀 것인가 하루종일 생각해 보았는데 특별하게 정신적인 부담을 갖고 꾸미지는 말자는 결론이다. 지금껏 살아왔던 방식에서 조금만 더 거짓없고 남도 생각하며 사는 길이 최선인 것 같다.
처음 암선고 받고 왜 내가 하다 내가 아닐 이유를 생각해보니 없었다. 오히려 나여서 다행이었다. 두 아들이 아니고 남편이 아니고 가까운 분이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그러면 아마 더 괴로웠겠지. 앞으로 내가 아닐 이유를 한 개라도 만들어보고 싶지만 자신이 없다. 희망사항. 마지막 방사선 치료받고 온 날 남편이 그간 수고 많았다며, 잘 견디어줘서 고맙다고 하였다. 나도 그간 옆에서 힘이 되어줘서 고마웠다고. 역시 가족이 최고다. 이제는 그간의 악몽을 잊고 씩씩하게 두려움 없이 사는 일만 남았다. 모두가 이렇게 치료의 끝 기쁜 날이 오는 법. 치료중인 분들 힘내길 바란다.
세 번째 봄을 맞았습니다. (2003/3/6) -정말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안녕하세요. 정말 오랜만에 띄웁니다. 이 곳 전주는 지금 꽃샘추위가 한창입니다. 봄이 오려다 멈칫 되돌아갔는가보아요. 글쎄 기억하시려나?
덕분에 수술, 치료 다 끝마치고 복직하고 열심히(?) 생활하고 있습니다. 항암과 방사선치료가 끝난 날은 얼마나 기뻤던지 내 생에 가장 기쁜 날로 등록하고 싶었다니까요. 그리고 2년, 가끔은 힘들었던 때와 앞으로의 공포가 떠오르긴 하지만 정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흔쾌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모두가 궁금해 하는 것 같아도 모르는 척 입다물고 생활합니다. 그 고통과 슬펐던 역사를 말로 표현하려면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아예 정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냅니다.
한 가지 아쉬움은 방사선 치료 탓인지 너무 쉽게 오는 피로와 백치의 여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수술과 치료로 기억력과 그전에도 없던 총명기는 다 없어져 식구들이나 지인들에게 나 믿지 말라고 합니다. 그래서 무조건 적고 포스트 잇에 써서 지갑에 붙여가지고 다니며 시장보고 생활하고, 머리 속이 텅 빈 아니 무거운 쇳덩어리가 된 것 같습니다.
처음 1년 동안은 음식도 조심하려고 무지 애썼습니다. 먹는 즐거움마저 강탈당하였지요. 요즘은 무디어져서 아무거나 먹지만 될 수 있으면 적은 양으로 인간이 먹을 수 있는 것은 다 먹으려 합니다. 늘 욕심 없는 마음을 유지하려고 하는데 잘 되지는 않습니다. 이제 아이들도 어느 정도 커서 아이들 때문에 집착했던 삶도 편안해졌습니다.
병원을 갔다오면 의사선생님의 이상 없다는 한 말씀에 앞으로의 6개월은 보장을 받은 것 같아 좋습니다. 아무 때나 생을 마칠 각오와 편안한 마음을 가졌음에도 욕심은 생기는 것은 역시 인간이기에라며 웃습니다. 한 쪽 가슴만 있는 아내가 상처 받지 않게 너무 조심하지도 내색도 않는 남편에게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입니다. 내가 남편이라면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함께 할 보장도 없고, 모든 고통을 안고 있을 아내를 바라보면 편치는 않을 것 같은데 남편도 정말 흐린 기억 속에도 없는 것처럼, 바보 부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언제 또다시 내 생에 뒤통수를 칠지 모를 암세포란 놈을 완전히 잊고 싶은데 어쩔 수 없이 그 놈에 끌려다니는 인생일 수 밖에 없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물론 제 몸 속의 요놈들 다 죽었겠지만. |
첫댓글 너무나 많은걸 동감하구 잘 봤읍니다, 마치 저의 투병을 지켜 보신것처럼 저의 이야기네요~~~~~~!!!조은 정보 참고하며 지낼께요, 늘 ~~ 평온하시기를 바래요~~~~~~~~~!~!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정말 대단하신분이시네요. 앞으로도 더욱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