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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 간 사
반세기만의 수평적 정권교체라는 역사적 의미를 갖는 「국민의 정부」가 출범한지 1년이 지나고 있습니다. 그동안 정부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이라는 국정철학을 바탕으로 초유의 경제위기를 극복하고 민족의 재도약을 이루기 위해 힘써 노력한 결과, 절망과 좌절에서 벗어나 새로운 희망으로 2천년대를 준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난 한 해는 남북관계에 있어서도 적지 않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정부는 확고한 안보를 바탕으로 남북간 교류와 협력을 적극 추진함으로써, 북한의 변화를 지원하고 남북관계를 개선해 나가기 위해 대북 포용정책을 꾸준히 추진해 왔습니다. 그 결과 여러가지 우여곡절이 있기도 했지만, 남북관계가 반세기에 걸친 대결과 갈등의 관계에서 벗어나 화해와 협력의 관계로 전환될 수 있는 기반이 조성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금강산 관광사업이 성사되어 지금 이시간에도 많은 우리국민들이 군사분계선을 넘어 금강산을 관광하고 있습니다. 또한 경제·언론·문화·종교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많은 인사들이 북한을 방문, 민족의 화해와 통일의 길을 닦아 나가고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4자회담에서 분과위원회 구성·운영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는 등 한반도 평화환경의 조성에 있어서도 의미있는 진전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정부는 앞으로도 국민적 합의를 바탕으로 대북 포용정책을 일관성있게 추진해 나갈 것입니다. 특히 이산가족문제의 해결과 남북당국간 대화를 재개하는 데 역점을 둘 것입니다. 또한 남북간의 교류협력도 보다 본격적으로 확대해 나감으로써 화해협력의 남북관계가 정착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이와 함께 정부는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의 증진을 위해 우선 북한의 금창리 지하시설 및 미사일개발문제 등 당면 현안문제들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데 주력하면서, 세계적인 탈냉전 흐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한반도 냉전구조 해체를 위한 포괄적 접근을 구체화하여 추진해 나가겠습니다.
북한이 아직 대남적대노선을 고수하고는 있지만, 대내외적 상황을 종합해 볼 때, 북한의 변화는 필연적이라는 것이 저의 확고한 믿음입니다. 실제로 북한은 여러 측면에서 긍정적인 변화 조짐을 보이고 있습니다. 우리의 당국간 회담재개 노력에 호응하여, 지난 2월 '남북고위급 정치회담'을 제의해 온 것이나,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우리와의 다각적인 교류협력에 호응하고 있는 것이 그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또한 지난 해 헌법개정시 가격,원가 등 시장경제적 요소를 도입하고, 경제관료 등을 해외에 파견하여 자본주의 경제,경영교육을 받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저는 대북 포용정책이 다소 시간이 걸리기는 하겠지만 반드시 좋은 결실을 거둘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번 통일백서는 「국민의 정부」 출범 이래 지난 1년간의 대북정책 추진 목표와 과정, 성과 등을 자세히 수록하였습니다. 대북정책 및 통일문제를 연구하시는 분이나 국민 여러분이 정부의 대북정책과 통일노력을 이해하시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1999년 3월 통일부장관
제1장 남북분단과 통일정책의 변천
제1절 분단사의 전개
1. 분단과 6·25사변
한반도의 분단은 지리적, 정치적 그리고 민족적 분단의 단계를 거치면서 고착화되고 심화되어 왔다. 분단은 제2차 세계대전 종결 후 전후처리과정에서 미국과 소련이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해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남북으로 분할 점령하면서 비롯되었다.
일본이 무조건 항복문서에 서명한 1945년 9월 2일, 맥아더 태평양지구 연합군 최고사령관은 일반명령 제1호를 공포하였는데, 이 명령은 한반도에서 일본군의 항복과 무장해제를 실시하되 38선 이북은 소련군이 담당하고 그 이남은 미군이 담당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로써 한반도는 38선을 경계선으로 하여 그 이북은 소련군이 진주하고, 그 이남은 미군이 진주하게 되었다.
북한지역에 진주한 소련당국은 처음부터 이른바 ‘혁명적 민주기지’의 건설을 목표로 북한지역의 공산화를 추진하였다. 1946년 2월 8일 소련당국은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한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라는 사실상의 정권기관을 수립케 함으로써 남한에 앞서 단독정권적 성격을 갖는 소비에트식의 정치체제를 구축시켰다. 이어 1947년 6월 14일 북한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이름의 공산정권 단독수립 방침을 공식적으로 표명하였다.
북한은 헌법초안의 작성과 함께 공산주의식 통치체제에 따라 ‘북조선노동당’과 ‘북조선인민회의’를 조직·발족하고 1948년 2월 8일에는 조선인민군을 창설하였다. 이후 북한은 1948년 8월 25일 단일후보에 대한 공개 찬반투표를 통해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를 실시하고 9월 8일 김일성을 수상으로 하는 내각을 구성하였으며, 마침내 동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의 수립을 공식적으로 천명하였다.
한편 남한지역에서의 미 군정당국은 1946년 2월 그 자문기관으로 ‘조선민주의원’을 구성한 후 12월에는 이를 ‘과도입법의원’으로 개편하였다. 이에 대하여 남한지역의 좌익세력은 북의 지령에 따라 격렬하게 반대하면서 1946년 10월에 ‘남조선노동당’을 창당하고 군정청의 시책에 대항하는 투쟁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이 무렵 우익의 민족진영 인사들 사이에서는 내부분열이 시작되었는데 소련의 기도를 간파한 이승만 중심의 우익진영이 남한지역의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한 반면, 김구·김규식 등 임정세력은 단정수립에 반대하였다.
미국과 소련은 이미 자신들이 점령한 지역에 대한 기득권을 양보할 수 없다고 대립하고 있었으며, 이를 타개하기 위해 ‘미·소공동위원회’가 두 차례에 걸쳐 소집되었으나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1947년 10월 완전히 결렬되고 말았다.
미국은 당초 한반도문제의 해결방안으로 1945년 12월의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따른 신탁통치안을 제시하였으나, ‘과도입법의원’이 1947년 1월 20일 신탁통치 거부 결의안을 채택하고 ‘미·소공동위원회’가 끝내 결렬되자, 마침내 신탁통치를 단념하고 한국의 독립정부 수립을 지원하기로 방침을 바꾸었다.
이에 따라 한국문제는 UN에 회부되어 1947년 11월 UN 총회에서 「UN 한국임시위원단의 설치와 한국의 총선거 실시에 관한 결의」가 채택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1월 동 위원단 입북을 소련이 거부함으로써 UN 결의에 따른 남북 단일정부 구성은 성사되지 못했다. 이 과정에서 김구와 김규식은 남북협상에 의해 단일정부를 수립하고자 ‘북조선노동당’에 대해 ‘남북정치협상회의’를 제의하고 1948년 4월 평양을 방문했으나,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책략에 이들의 꿈은 무산되었다. 결국 2월의 UN 결의에 따라 ‘선거감시 가능지역’인 남한내에서만 1948년 5월 10일 총선거가 실시되고, 7월 17일 헌법이 공포된 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남과 북에 서로 다른 정부가 들어섬으로써 정치적인 분단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한반도에 두개의 정부가 공식적으로 출범하기 이전부터 북한은 ‘민주기지론’을 내걸고 전 한반도를 무력으로 적화통일하기 위하여 인민군을 창설하는 등 군 강화에 착수하였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38선 전역에 걸쳐 북한군이 일제히 기습공격을 감행함으로써 동족상잔의 비극은 시작되었다. 6·25사변은 UN군과 중공군의 개입으로 국제화되면서, 약 2년 반 동안 막대한 소모전이 계속되었다. 1951년 7월 10일부터 휴전을 위한 협상이 시작되어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됨으로써 일단 정전상태로 들어가게 되었다.
6·25사변은 남북한의 사회경제적 기반을 철저히 파괴하고 전 국토를 폐허로 만들었으며, 남북한을 합쳐 500만 이상의 인명피해를 초래하였다. 또한 300만 이상의 북한주민이 남한으로 내려오게 됨으로써 전쟁 이전의 월남자와 북으로 납치된 사람을 포함하여 1천만명에 이르는 이산가족이 생기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6·25사변은 남북한 주민간에 증오와 갈등을 유발하여 수천년간 이어져 내려온 민족공동체 의식을 파괴하였으며, 상호 불신을 심화시키고, 군비경쟁을 야기함으로써 민족전체의 발전과 번영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해오고 있다.
2. 분단의 심화와 영향
분단과 6·25사변을 거치며 남북한은 철저히 적대적인 관계를 지속하면서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한국은 정부수립과 함께 국민의 자유와 기본권이 보장되고 선거제도에 의해 국민대표들이 정치과정에 참여하는 의회주의와 법치주의, 다원주의를 원리로 하는 자유민주주의를 기본 정치이념으로 채택하였다. 한국은 민주정치 경험의 부족, 북한의 남침위협, 그리고 경제발전을 위한 근대화의 급속한 추진 등으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가 정착되기까지 많은 시행착오를 겪기도 하였으나, 기본적으로는 개방사회를 지향하였으며 자유민주이념을 근간으로 하였다.
북한은 공산주의사회의 건설을 목표로 일당독재체제를 구축하였으며, 노동당이 국가기관과 각종 정치조직을 지도하고 통제하며 사회활동의 전영역에 당의 영향력이 침투되도록 하였다. 또한 북한은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에 입각하여 사회활동의 모든 영역을 엄격히 통제하고 이에 방해가 되는 민족진영 인사들을 제거하였다.
북한은 김일성 유일지배체제를 확립하기 위하여 주체사상을 정립·활용하였으며, 1967년부터는 “주체사상은 모든 정책과 활동의 확고부동한 지침”이라고 선언하였다. 주체사상은 “인민대중이 모든 것의 주인”이라고 하면서도 “수령이 사회정치적 생명체의 뇌수이며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규정함으로써 일인독재체제를 정당화하고 있다. 현재 북한은 김일성·김정일 부자세습을 통해 독재체제를 유지하는 독특한 통치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남북한이 분단되었을 때만 해도 경제적으로는 북한이 남한에 비해 압도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남한의 경우 농업이 주산업이었고 공업분야에는 미미한 경공업시설이 있었을 뿐이었으나, 북한은 중공업이 발달해 있었다.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지하자원과 공업시설 및 발전시설은 북한지역에 편재해 있었다.
한국은 어려운 경제여건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개인의 창의와 기업활동의 자유를 보장하는 시장경제체제를 근간으로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이룩하였다. 6·25사변 후 한국은 자본과 기술이 부족한 상황에서 수출주도 산업화정책을 시행함으로써 빠른 시일내에 선진기술을 수용하고 고도의 경제성장을 달성하였다. 1960년대부터 정부주도의 경제개발계획을 추진한 이래 연평균 10%에 가까운 고도성장을 지속해 온 한국은 1970년대 중반부터 경제력에서 북한을 능가하고 1980년에는 한국의 1인당 GNP가 북한의 두배를 넘어서게 되었다. 1990년대에 들어서도 한국경제는 고도의 경제성장을 지속해 왔으나, 세계무역기구(WTO)의 발족 등 세계화추세에 따른 구조조정 등을 적기에 추진하지 못함으로써 1997년 12월 이후 심각한 경제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러나 「국민의 정부」 출범과 함께 온 국민이 단합하여 여러 분야에서의 개혁을 강도높게 추진하는 등 경제위기 극복에 전력하면서 시장경제와 민주주의가 병행·발전 될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북한은 분단과 동시에 생산수단의 사유를 금지하고 이른바 전인민적 또는 협동적 소유에 의한 생산수단의 공유를 토대로 계획경제를 추구하였다. 생산수단의 사회주의화와 계획경제는 6·25사변 후의 복구사업 및 산업화를 추진하는 초기단계에서는 비교적 효율성을 발휘하였으나, 공업화의 진전과 더불어 시간이 흐를수록 그 역기능이 심화되었다.
북한경제의 또 하나의 특징은 경제건설이 공산독재체제의 완성 및 대남적화통일의 물질적 기초 마련이라는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는 수단으로 인식됨으로써 중공업 우선 정책이 추구되었다는 점이다. 그 결과 기술부문의 전반적인 낙후와 더불어 중·경공업간에 심각한 불균형이 초래되어 산업부문간 연관효과를 살리지 못하게 되었으며, 주민들의 생필품 부족현상이 심화되었다.
특히 1990년대 들어 동구·구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체제의 붕괴에 따라 국제적 협력기반이 상실되고 자연재해가 겹치는 등으로 인해 마이너스 성장을 계속하여 주민의 기본적 욕구도 충족시킬 수 없는 최대의 위기 상황으로 빠져 들었다.
분단이 반세기 이상 지속되면서 남북한은 체제경쟁을 위해 막대한 양의 인적·물적 자원을 투입했으며, 이로 인해 우리민족 전체의 역량은 상당부분 소모될 수밖에 없었다. 군사안보문제의 해결에 남북한은 제각기 최우선 목표를 두어 재정의 막대한 부분을 국방비로 지출하게 되었으며, 국제사회에서도 치열한 외교적 경쟁과 재원 낭비를 감수하게 되었다. 그 밖에도 1천만 이산가족은 이산과 실향의 아픔을 안은 채 살아가고 있으며, 북한주민은 초보적인 인권조차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결국 한반도 분단상태는 남북간의 이질성을 심화시키고, 남북한의 정치·경제·사회 각 분야의 발전을 저해하고 있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북한이 현재의 경제난을 극복하고 민주적 사회로 전환하기 위해서, 한국이 정치·경제·사회 각 분야에서 질적인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서, 그리하여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원리 등 인류의 보편가치가 구현되는 하나의 민족공동체를 이루어가기 위해서는 분단상태의 종식, 즉 통일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결국 통일은 그 어떤 희망이나 당위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우리 앞에 현실적으로 놓여있는 민족적 과제라고 하겠다.
제2절 역대정부의 통일정책 개관
1. 이승만 정부의 통일정책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초대정부로 출범한 이승만 정부는 통일에 관한 기본입장을 천명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대한민국 정부는 헌법 규정에 따라 한반도 전체에 대한 주권을 가진 유일한 합법정부이다.
② 선거가 보류된 북한에서 조속히 민주적 선거를 실시, 북한동포를 위하여 국회에 공석으로 남겨둔 100석의 의석을 채워야 한다.
③ 북한동포들의 자발적 의사가 계속적으로 공산주의자들에 의하여 억압받을 경우에는 대한민국은 무력에 의해서라도 북한에 대한 주권을 회복할 권한이 있다.
이것은 대한민국 정부가 처음으로 북한에 대해 대한민국만이 한반도에서 유일한 합법정부이며, 북한은 UN 결의에 따라 자유선거를 실시하여 대한민국에 합류해야 함을 공식적인 통일방안으로 제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만일 북한이 이를 수락하지 않는다면 통일을 위해서 무력을 포함한 모든 수단을 사용하는 것도 정당화된다는 것이었다.
이승만 정부의 통일정책의 특징은 정부수립 당시의 국제법적, 도덕적 우월성에 기초하여 북한당국을 철저히 부정하는 인식에서 출발하였으며, 방법론적으로는 한반도문제의 국제화, 특히 UN을 통한 해결방법을 모색하고 그 방법으로 북한지역에서의 자유선거 실시를 가장 중요한 수단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그에 따라 북한 당국을 남한 당국과 대등한 지위에 두고 출발하는 모든 논의를 배제하였다.
정전협정에 따라 1954년 6월 한반도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개최된 제네바 정치회담에서 변영태 외무부장관은 14개 통일방안을 제시하였는데, 그 골자는 ‘UN 감시하의 인구비례에 의한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하자는 것이었다. 이후에도 이승만 정부는 UN총회 결의에 따른 통일실현이라는 원칙을 견지하였다.
2. 장면 정부의 통일정책
1960년 4·19혁명 이후 보수·혁신의 많은 정당과 사회단체들이 정치활동에 나서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통일문제에 대한 논의도 활발하게 이루어졌고 다양한 통일방안이 대두되었다.
내각책임제 헌법에 기초하여 출범한 장면 정부는 통일문제에 대한 비등하는 여론을 감안하여 1960년 8월 ‘UN 감시하의 남북 자유총선거’를 통일정책의 기조로 제시하였다.
제2공화국은 집권기간이 1년여에 불과했지만 제1공화국에 비해 통일문제의 논의는 훨씬 활발했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의 통일논의의 상당부분은 분단의 원인과 그 배경이 되고 있는 한반도에서의 국제정치 상황을 냉철하게 파악하지 못한 측면이 있었으며, 북한의 대남 적화전략을 경시한 데에 문제점이 있었다. 이 기간 동안 북한은 우리사회의 혼란을 겨냥하여 다양한 대남공세를 전개하였고, ‘남북연방제’를 처음으로 제시하였다.
3. 박정희 정부의 통일정책
5·16을 계기로 등장한 군사혁명위원회는 6개항의 ‘혁명공약’을 발표하였는데, 그 중 제1항은 “반공을 국시의 제1의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태세를 재정비·강화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제5항에서는 “민족적 숙원인 국토통일을 위하여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배양에 전력을 기울인다”고 선언하였다. 즉 ‘반공태세의 재정비·강화’와 ‘통일을 위한 실력배양’이 통일의 기본방향이었던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4년 1월 10일 연두교서를 통해 정부의 통일방안은 UN을 통한 자유민주주의 원칙에 따른 통일, 실지회복에 의한 국토통일임을 밝히고, 통일을 위한 제반문제에 대비하기 위한 태세를 갖추어 나갈 것임을 강조하였다.
1966년 1월 18일 국회에 보낸 연두교서에서는 “우리가 지향하는 조국근대화야말로 남북통일을 위한 대전제요, 중간목표이다. 통일의 길이 근대화에 있고 근대화의 길이 경제자립에 있는 것이라면 자립은 통일의 첫단계가 된다”고 함으로써 ‘선 건설 후 통일’의 정책방향을 분명히 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한국의 경제력이 북한을 압도적으로 능가하고 또한 민주주의가 정착된 다음에 통일노력이 실효성을 거둘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입장에서 통일에 대한 국민들의 열망에 부응하고 통일문제에 대한 장기적이고 체계적인 방안수립을 위해 1969년 3월 1일 국토통일원이 창설되었다.
1968년 7월 닉슨독트린이 발표되고, 1970년대에 들어 미·중, 일·중의 접촉, 미·소·일·중 4국간 새로운 세력균형이 형성되기 시작하는 등 세계적인 긴장완화와 평화공존의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이러한 국제정세의 변화와 더불어 1960년대 우리 경제력의 발전을 바탕으로 박정희 정부는 대북정책에 적극성을 띠게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0년 8월 15일 제25주년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남북한간 선의의 경쟁을 촉구하는 ‘평화통일구상선언’을 발표하였는데,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긴장상태의 완화없이는 평화적 방법에 의한 통일에의 접근이 불가능하다.
② 북한이 무력에 의한 적화통일이나 폭력혁명에 의한 대한민국 전복 기도를 포기해야 한다.
③ 남북간에 가로놓인 인위적 장벽을 단계적으로 제거해 나갈 용의가 있다.
④ 북한이 유엔의 권위와 권능을 수락한다면 북한의 유엔 참석을 반대하지 않는다.
⑤ 남북한의 어느 체제가 더 잘살 수 있는가 개발과 건설에서 선의의 경쟁을 벌일 것을 제의한다.
이러한 기본정신에 따라 1971년 8월 12일 대한적십자사 총재가 북한적십자회에 1천만 이산가족문제 해결을 위한 남북적십자회담의 개최를 제의하였고, 이 제의를 북한적십자회가 수락함으로써 분단 26년만에 인도적 문제에서부터 남북대화의 통로가 열리게 되었다. 한편 1972년 7월 4일에는 남북 양측의 당국자간 비공개 접촉과 상호방문을 거쳐 분단 이후 최초의 남북한간 합의문서라 할 수 있는 「7·4 남북공동성명」이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발표되었다.
「7·4 남북공동성명」에서 남북한 양측은 ① 통일은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음이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하여야 한다, ② 통일은 서로 상대방을 반대하는 무력행사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실현하여야 한다, ③ 사상과 이념,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하여야 한다는 등 3원칙에 합의하였다.
또한 상호 중상·비방 중지, 군사적 충돌을 방지하기 위한 적극적 조치, 다방면적 교류실시, 직통전화 설치 등 실천조치에 합의하고, 쌍방간의 합의사항을 추진하고 남북사이의 제반문제를 개선·해결하기 위하여 ‘남북조절위원회’를 구성·운영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남북대화 진행과정에서 북측은 「7·4 남북공동성명」의 3원칙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가 하면, 이른바 대화환경의 개선, 군사문제의 우선해결 등을 요구하며 통일전선전략을 노골화하였다. 결국 이같은 북한측의 부당한 주장으로 남북대화는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부는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한반도문제 해결의 기본좌표와 접근방식을 종합적으로 천명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이에 박정희 대통령은 1973년 6월 23일 「평화통일외교정책선언」을 발표하였는데, 그 내용은 ①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모든 노력의 경주, ② 한반도의 평화유지, 남북간의 내정불간섭 및 불침략, ③ 성실과 인내로써 남북대화 계속, ④ 북한의 국제기구에의 참여 불반대, ⑤ 남북한 유엔동시가입 불반대, ⑥ 모든 국가에의 문호개방, ⑦ 평화선린에 기초한 대외정책의 추진 등이다.
이후 박정희 정부는 1974년 1월 18일 「남북상호 불가침협정」 체결 제의, 동년 8월 15일 ‘평화통일 3대 기본원칙’ 천명, 1979년 1월 19일 ‘남북한 당국간 무조건 대화제의’ 등을 통해 한반도의 긴장완화와 남북관계의 정상화를 위한 적극적인 정책의지를 표명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특히 1974년 8월 15일의 ‘평화통일 3대 기본원칙’에서는 ①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하여 상호불가침 협정 체결, ② 남북간에 상호문호개방 및 신뢰회복을 위하여 남북대화, 교류와 협력 추진, ③ 이 바탕위에서 공정한 선거관리와 감시에 의한 남북한 자유총선거 실시 등을 제시하였다.
4. 전두환 정부의 통일정책
1981년 3월 출범한 전두환 정부는 ‘통일되고 독립된 근대적 민족국가의 건설’이라는 통일정책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평화통일 노력은 첫째, 남북한당국 최고책임자 상호방문과 남북한 정상회담의 개최 제의, 둘째, 통일문제와 남북한 관계정상화 문제를 포괄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민족화합 민주통일방안’의 천명, 셋째, 민족적 화해와 신뢰를 조성하기 위한 ‘20개 시범실천사업’ 등의 제시로 구체화되었다.
1982년 1월 22일 전두환 대통령의 국정연설을 통하여 제시된 ‘민족화합 민주통일방안’은 대한민국 정권수립 이후 줄곧 견지해 온 평화통일정책을 종합·체계화한 것으로서, 통일헌법의 제정으로부터 총선거를 통한 통일민주공화국 완성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이 구체적으로 제시되었다. ‘민족화합 민주통일방안’은 통일이 민족자결의 원칙아래 겨레 전체의 자유의사가 고루 반영되는 민주적 절차와 평화적 방법으로 성취되어야 한다는 기본원칙에 입각하여 평화통일을 성취하는 가장 합리적인 길로서 통일헌법을 채택하고, 이 헌법에 따라 통일된 단일 주권국가를 완성시킨다는 것이 기본골자이다. 그리고 통일조국의 국호, 정치이념, 국내외 정책의 기본방향, 정부형태, 국회구성을 위한 총선거의 방법과 시기 및 절차 등은 ‘민족통일협의회의’를 구성하여 통일헌법을 기초하는 가운데 토의, 합의될 문제임을 지적하였다.
전두환 정부는 1982년 2월 1일 국토통일원장관 성명을 통해 통일방안 후속 실천조치로서 북한에 대하여 민족화합을 위해 20개항에 걸친 구체적 시범사업을 함께 추진해 나갈 것을 북한에 제의하였다. 시범사업의 내용에는 서울·평양간 도로 연결개통, 남북 이산가족들의 편지교류 및 상봉실현, 설악산 이북과 금강산 이남지역의 자유관광 공동지역 개방, 쌍방 정규방송의 자유로운 청취, 민족사의 공동연구, 남북간 자연자원의 공동개발 및 공동이용 등이 포함되었다.
1984년 8월 20일 전두환 대통령은 “북한측이 동의한다면 북한 동포들의 생활 향상에 실질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기술과 물자를 무상으로 제공할 용의가 있다”고 하면서 “남북한이 같은 민족으로서 화합과 공동번영을 이룩하기 위하여 교역과 경제협력을 실시할 것”을 제의했다.
이후 동년 9월 8일 북한의 대남수재물자 제공 제의를 우리측이 수락함에 따라 교착상태에 빠져 있던 남북관계도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1984년 11월 15일 남북경제회담이 시작되고, 이어서 적십자회담, 국회회담, 체육회담 등 일련의 회담이 열리게 되어 1986년 초까지 진행되었다. 특히 1985년 9월에는 남북이산가족 고향방문 및 예술공연단 교환방문이 성사되었다. 전두환 대통령은 1985년 1월 9일 서울과 평양에 상주연락대표부 설치를 제의하였고, 그 후 우리측은 남북정상회담, 남북총리회담 등의 실현을 위하여 다각적인 노력을 경주하였다.
5. 노태우 정부의 통일정책
1980년대 중반 이후 국제정세와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정세는 급격한 변화를 거듭하게 되었다. 소련의 개혁·개방정책에 힘입어 동구 공산권 국가들의 개혁과 개방추세가 급속히 진전되는 등 세계적으로 화해·협력의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1988년 2월 출범한 노태우 정부는 이러한 변화와 국민적 통일 열망에 부응하고자 1988년 6월 2일 통일논의 자유화 조치를 취하고, 동년 7월 7일에는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이하 「7·7 특별선언」)을 발표하였다. 「7·7 특별선언」은 북한을 대결의 상대가 아니라 ‘선의의 동반자’로 간주하고, 남과 북이 함께 번영을 이룩하는 민족공동체적인 관계로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통일조국을 실현하는 지름길이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남북간 대결구조를 화해구조로 전환키 위한 기본방향을 제시한 정책선언이었다.
특히 「7·7 특별선언」은 민족공동체 형성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남북간의 인적·물적 교류협력이 활성화되어야 한다는 인식에 따라 이를 위한 실천조치들과 정책방향을 제시하였다. 실천조치의 일환으로 1990년 8월 1일에는 「남북교류협력에관한법률」을 제정, 시행함으로써 남북교류협력시대의 개막을 가능하게 하였다.
또한 노태우 정부는 국민 각계의 의견을 수렴하여 통일의 원칙과 방향을 담은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을 1989년 9월 11일 대통령의 국회연설을 통해 발표하였다.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은 남북간에 누적된 불신과 대결의식, 그리고 이질화 현상을 그대로 둔 채 일시에 통일을 이룩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즉 완전한 통일을 이룩하려면 남북간의 교류와 협력을 통해 먼저 민족공동체를 회복·발전시키고, 이를 바탕으로 정치적 통일이 이루어질 수 있는 상태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의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통일의 원칙으로 자주·평화·민주를 제시하고 통일국가의 미래상으로는 자유·인권·행복이 보장되는 민주국가를 제시하였다. 통일국가의 수립절차는 우선 남북대화를 추진하여 신뢰회복을 기해 나가는 가운데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민족공동체헌장’을 채택하기로 하였다. 이어 남북의 공존공영과 민족사회의 동질화, 민족공동생활권의 형성 등을 추구하는 과도적 통일체제인 ‘남북연합’을 거쳐 통일헌법을 제정하고, 마지막으로 통일헌법이 정하는 바에 따라 총선거를 실시하여 통일국회와 통일정부를 구성함으로써 완전한 통일국가인 통일민주공화국을 수립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남북연합단계에서는 ‘민족공동체헌장’에서의 합의에 따라 남북정상회의, 남북각료회의, 남북평의회, 공동사무처 등을 두도록 하였다.
노태우 정부는 「7·7 특별선언」의 발표와 서울올림픽 개최를 계기로 남북간의 고위급회담을 비롯한 다각적인 대화와 교류를 적극 추진하였다. 1988년 12월 28일 강영훈 국무총리는 연형묵 북한 정무원 총리 앞으로 서한을 보내 남북한간 제분야에서의 상호 신뢰구축과 긴장완화문제 등을 포괄적으로 협의 해결하기 위한 남북총리회담의 개최를 제의하였다. 이에 따라 남북쌍방은 1989년 2월 8일부터 1990년 7월 26일까지 여덟 차례의 예비회담과 두 차례의 실무대표접촉을 가진 끝에 남북고위급회담을 개최키로 합의하였다. 이에 따라 역사적인 제1차 남북고위급회담이 1990년 9월 4일 서울에서 개최되었다. 남북고위급회담은 예비회담에서 합의한 절차와 의제에 따라 8차례에 걸쳐 진행되었다.
이후 남북 쌍방은 상호 의견접근을 위해 노력한 결과 1991년 12월 서울에서 개최된 제5차 회담에서 전문과 25개 조항으로 된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를 채택하였다. 아울러 한반도 핵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대표접촉을 갖기로 하였다.
1992년 2월 19일 평양에서 개최된 제6차 남북고위급회담에서는 「남북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 「한반도의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 「남북고위급회담 분과위원회 구성·운영에 관한 합의서」가 발효되었다.
이후 남북 쌍방은 정치, 군사, 교류협력 분과위원회와 공동위원회 구성·운영에 관한 합의서 채택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 결과 제7차 회담에서 남북 양측은 「남북군사공동위원회 구성·운영에 관한 합의서」, 「남북교류·협력 공동위원회 구성·운영에 관한 합의서」와 「남북연락사무소 설치·운영에 관한 합의서」를 채택·발효시켰다.
제8차 남북고위급회담에서 쌍방은 「남북화해공동위원회 구성·운영에 관한 합의서」, 「남북화해의 이행과 준수를 위한 부속합의서」, 「남북불가침의 이행과 준수를 위한 부속합의서」, 「남북교류·협력의 이행과 준수를 위한 부속합의서」를 채택·발효시켰다.
그러나 이후 북한의 핵무기개발 의혹이 증폭되고, 북한이 우리의 팀스프리트훈련을 구실로 1993년 1월 29일 모든 남북당국 사이의 대화를 재개할 의사가 없음을 선언함으로써 남북관계는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6. 김영삼 정부의 통일정책
1993년 2월 25일 출범한 김영삼 정부는 국제정세의 변화와 우월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적극적인 대북정책을 시도하였다. 김영삼 대통령은 1994년 8월 15일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기존의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을 보완·발전시키면서 전반적인 통일환경의 변화상황을 반영한 ‘한민족공동체 건설을 위한 3단계 통일방안’(이하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을 천명하였다.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은 통일을 추진함에 있어서 견지해야 할 기본원칙으로서‘자주·평화·민주’를 제시하였다. 또한 통일은 하나의 민족공동체를 건설하는 방향에서 점진적·단계적으로 이루어 나가야 한다는 기조에서 통일의 과정을 화해·협력단계→남북연합단계→통일국가 완성단계의 3단계로 설정하였다.
제1단계인 ‘화해·협력단계’는 남북이 적대와 불신·대립관계를 청산하고, 상호 신뢰속에 긴장을 완화하고 화해를 정착시켜 나가면서 실질적인 교류·협력을 실시함으로써 평화공존을 추구해 나가는 단계이다.
제2단계인 남북연합 단계에서는 남북간의 합의에 따라 법적·제도적 장치가 체계화되어 남북연합 기구들이 창설·운영되게 된다.
마지막 제3단계인 통일국가 완성단계는 남북연합단계에서 구축된 민족공동생활권을 바탕으로 정치공동체를 실현하여 남북 두 체제를 완전히 통합하는 것으로서 1민족 1국가 1체제 1정부의 단일국가로의 통일을 완성하는 단계이다.
김영삼 대통령은 1993년 2월 취임사 및 취임 1주년 기자회견에서 김일성과 만날 용의가 있음을 밝힘으로써 정상회담 추진 의지를 천명하였다. 그러나 1993년 3월 12일 북한이 「핵비확산조약(NPT)」 탈퇴를 선언하고 핵무기 개발 의혹에 대한 제재조치에 ‘서울 불바다’, ‘전쟁 불사’등의 발언으로 위협함으로써 남북관계는 최악의 위기국면으로 치닫게 되었다. 정부는 북한의 NPT 탈퇴 선언 철회 및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 수용을 촉구하면서 핵문제 해결을 위한 남북 고위급회담을 제의하였다.
한편 북한의 핵문제 해결을 위한 미·북한간 고위급회담이 3차례 개최되었으며, 그 결과 미·북한은 1993년 6월 11일 북한 NPT 탈퇴 보류 관련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이후 미·북한간에 ‘제네바 기본합의서’가 채택(94.10.21)됨으로써 북한 핵문제는 일단 고비를 넘기게 되었다.
1994년 6월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온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은 북한의 김일성 주석이 김영삼 대통령의 정상회담 제의에 대해 호응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고 전해왔다. 이에 따라 1994년 6월 개최된 남북정상회담 개최 절차문제를 협의하기 위한 부총리급 예비접촉을 통해 「남북정상회담 개최를 위한 합의서」를 채택하였다. 이에 따라 남북정상회담 개최를 위한 준비가 진행되었으나, 1994년 7월 8일 김일성이 사망함으로써 북한이 7월 11일 “우리측의 유고로 예정된 북남최고위급회담을 연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음을 위임에 의하여 통지한다”는 입장을 통지해와 남북정상회담은 개최되지 못하였다.
한편, 1990년대에 들어 북한은 경제난이 심화되면서, 식량난 또한 더욱 악화되었다. 특히 1995년 수해로 북한은 심각한 식량난에 직면하게 되었다. 정부는 북한의 적대적 태도에도 불구하고 같은 동포에 대한 인도적 견지에서 북한 주민의 식량난을 덜어주기 위한 노력을 전개하였다. 우선 우리정부가 1995년 5월 26일 아무런 전제조건 없이 북한에 곡물을 제공할 용의가 있음을 표명함에 따라 북경회담이 성사되었으며, 이후 동년 6월부터 10월까지 국내산 쌀 15만톤을 북한에 직접 전달하였다. 그러나 쌀 15만톤의 전달과정에서 발생한 몇 가지 문제로 인해 우리 내부적으로 대북지원에 대한 논란이 유발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인도적 차원의 대북지원을 꾸준히 전개하여 1996년과 1997년 국제기구를 통해 2,737만 달러 상당을 지원하였으며, 민간차원에서도 1995년 6월부터 1997년 말까지 2,229만 달러 상당을 지원하였다.
김영삼 정부는 한반도 평화정착을 위한 노력도 본격적으로 전개하였다. 김영삼 대통령은 1995년 8월 15일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3원칙」을 천명하였는데, 그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문제는 반드시 남북 당사자간에 협의·해결되어야 한다.
둘째, 「남북기본합의서」와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비롯한 모든 남북간의 합의사항이 존중되어야 한다.
셋째,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은 관련 국가들의 협조와 뒷받침이 있을 때 그 실효성이 더욱 보장될 수 있다.
이러한 입장에 따라 한·미 정상은 1996년 4월 16일 제주에서 정상회담을 갖고 남북한과 정전협정 서명 관련국인 미국과 중국이 참여하는 ‘4자회담’을 제의하였다. ‘4자회담’ 예비회담이 8월부터 11월까지 세차례 개최되어,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과 긴장완화를 위한 제반문제를 협의하기 위한 ‘4자회담’을 개최키로 합의하였고, 이에 따라 ‘4자회담’ 제1차 본회담이 1997년 12월 9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개최되었다.
1994년 10월 북한의 핵개발 저지를 위한 미·북 제네바 합의에 따라 대북 경수로지원사업이 추진되었는데, 1995년 3월 9일 우리와 미국·일본 등이 중심이 되어 대북 경수로지원사업 및 대체에너지 공급 등 제네바합의의 이행을 위해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를 공식 발족시켰다.
KEDO는 동년 12월 15일 북한과 「경수로 공급협정」을 체결하였는데, 북한도 우리의 중심적 역할을 사실상 인정하였다. 이로써 경수로 지원사업이 안정적으로 추진될 수 있는 법적 기반이 마련되었다. 이후 KEDO는 한국전력을 주계약자로 지정하고, 1996년 3월 20일 KEDO-한국전력은 주계약자 합의문에 서명하였다. 또한 KEDO와 북한간에 경수로 공급협정 이행을 위한 후속합의서 채택도 순조롭게 진행되어 「특권·면제 및 영사보호 의정서」, 「통행 의정서」, 「통신 의정서」 등이 체결됨으로써 1997년 8월 19일 북한 신포지역에서 경수로 부지준비공사가 착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