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에 대한 추억이야 누구에게나 있겠지만 권달호 선생에겐 특별한 추억이 있다.
초등학교를 갓 입학한 무렵, 장터에 들어온 천막극장에서
'돌아오지 않는 해병'을 본 것이 영화와의 첫 인연이었지만
훗날 도시로 이사해 극장 매표소를 하는 이모부와 이웃해 살게 된 덕에
할인권을 쉽게 구할 수 있어 틈만 나면 영화를 볼 수 있었다.
이모부댁 벽에 붙여 놓은 영화 포스터를 보고
동갑나기 사촌과 함께 드나 들며 본 극장 프로는
존 웨인 주연의 '역마차'같은 서부영화로 부터
장동휘, 독고 성, 최무룡, 황 해, 이예춘, 신성일, 남궁 원,
박노식, 허장강, 김희갑, 최남현, 이 향, 이대엽, 트위스트 킴 같은 배우들이 등장하는
'광야의 호랑이', '5인의 해병' 같은 전쟁영화나
`맨발의 청춘' 같은 멜로 영화, 그리고 첩보영화들로 이루 말 할 수 없을 정도다.
그런 영화를 보고 나면 사촌과 함께 서로 역할을 분담하여
더블 스텝 발걸음으로 말타는 시늉을 하며 보안관을 하거나
독립군, 국군이 되어 총싸움을 하면서 영화장면을 흉내내곤 했다.
이모부 댁 뒤뜰은 제법 넓어 구석구석 숨을 곳이 많았고
우물 정 자(井)로 쌓아 놓은 장작더미나, 긴 장대로 허리를 받쳐 든 빨래 줄에 널린
빨래들 사이를 헤집고 다니다 보면 총싸움 같은 것 하기엔 안성맞춤이었다.
그날도 사촌과 놀기 위해 이모부 댁을 찾았지만,
녀석은 지 누이들과 풀장엘 갔으므로
달호 혼자 그 뒤뜰에 들게 되었다
심심해서 어슬렁 거리던 달호는 바람에 펄럭이는 빨래 사이를 이리저리 다니다가
드디어는 혼자 원맨쇼를 하기에 이르렀다.
우선 장작 하나를 집어 들곤 그것이 총이라도 되는 양 '뚜두두두', '따르르륵'
입으로 소리내며 이리 숨고 저리 숨으며 총 쌈을 하다가
이내 혼자 때리고 , 맞으며 '윽, 으윽' 소리를 내며 죽는 시늉을 내고......
달호는 혼자 장동휘도 하고 독고 성도 하였으며 나쁜 놈인 이향, 허장강 역할을 하느라 바빴다.
그러다 아무래도 느낌이 이상해 고갤 들어보니
누군가 뒤뜰로 이어진 창문을 통해 그를 보고 있었다.
꽃님이 아줌마였다.
아줌마는 그냥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었을 뿐인데도
달호는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꽃님이 아줌마!
꽃님이 아줌마는 김하사 아저씨 부인이었다.
월남전에 참전했었다는 김하사는 베트콩처럼 마른 몸매에 짓궂은 눈웃음을 치며
달호나 사촌 우선이의 고추잡기를 취미 삼던 터라 진짜 베트콩처럼 싫은 사람이었지만
갓 시집온 꽃님이 아줌마는 정말 예쁜 새색시였다.
어른들 말로는 열 아홉 살이라 했고
처음 시집와서 언제나 입고 있던 색동저고리에 빨간 치마는 아줌마를 생각할 때
제일 먼저 떠 오르는 모습이었다.
꽃님이 아줌마는 정말 동그란 얼굴에 동그란 눈, 동그란 코를 가진 여인이었다.
말 하는 것을 거의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조용했다.
딱 한번, 우물가에 앉아 고무신을 닦고 있을 때 곁에 앉으며
"달호야, 이리 줘, 내가 닦아 줄께" 한 것이 달호가 들은 아줌마 목소리의 전부였다.
그 꽃님이 아줌마는 첫아이를 낳다가 죽었다.
이국의 한 주점, 시중드는 동글동글하게 생긴 조선족 처녀의 모습에서
권달호선생은 꽃님이 아줌마를 떠 올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