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아난 양을 찾다가 여러 갈래 길에 이르러 길을 잃었다. 학문의 길이 다방면이면 진리를 얻기 어렵다. 또는 방침이 많아 도리어 갈 바를 모른다. [동]亡羊之嘆(망양지탄) *岐 : 岐路, 分岐點
[출전]『列子』 [내용]양자의 이웃집에서 양 한 마리가 도망을 했다. 양의 주인이 동네 사람들을 이끌고 양자에게 노복(奴僕) 청하여 양을 쫓아가려 하자, 양자가 물었다. "단 한 마리의 양을 잃었는데 어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뒤쫓아가는고." 이웃집 사람이 대답하였다. "도망간 쪽에는 갈림길이 많기 때문이오." 얼마 뒤에, 그들이 피곤한 몸으로 돌아와서 양을 잃었다고 하였다. 양자가 양을 잃은 까닭을 묻자, "갈림길을 가면 또 갈림길이 있어서, 양이 어디 갔는지 모르게 되어 버렸소(多岐亡羊)."
양자는 그 말을 듣고는 묵묵히 앉아 입을 떼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하루종일 웃는 얼굴 한번 보이지 않았다. 제자들이 기껏해야 양 한 마리를 잃은 일이요, 더구나 자기의 양도 아닌데, 그렇게 침울해 있는 것은 이상하다 생각하고, 까닭을 물어도 대답이 없었다. 제자인 맹손양(孟孫陽)은 스승의 고민을 알지 못하고 선배 제자인 심도자(心都子)에게 양자가 침묵하는 까닭을 물으니 심도자는 "단 한 마리의 양이라 할지라도, 갈림길에서 또 갈림길로 헤매어 들어가서 찾다가는 결국 양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하물며 학문의 길은 어떻겠느냐? 목표를 잃고 무수한 학설들에 빠져 헤맨다면 아무리 노력한들 그 또한 무의미한 것 아니겠느냐." 하였다.
《장자(莊子)》 변무편(騈拇篇)에도 양을 잃은 이야기가 있다. 남녀 종이 책을 읽고 주사위놀음을 하다가 양을 잃었다는 이야기로, 이 곳에서도 주위의 사물이나 현상에 휩쓸리다 보면 자기의 본분을 잊게 된다는 비유로 사용되고 있다. 망양지탄(亡羊之歎)이라고도 한다.
학문에는 지식의 집적과 이론의 분석이 필요한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부질없이 지엽말절을 꼬치꼬치 캐고 살피는 일에 빠져서 근본 목표를 잃어버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란 것을 풍자한 이야기이다.
[예문] ▷ 20세기를 가득 채웠던 수많은 승리와 좌절, 환희와 비탄을 돌이켜보면 승리를 기리고 패배를 모멸하는 숱한 담론 속에서 서서히 그리고 결정적으로 논의의 중심에서 밀려난 것은 바로 사람들의 삶 그 자체이다. 인간논리와 인간에 대한 애정이다. 다기망양(多岐亡羊)의 형국이어서 이들 논의는 그가 복무해야 할 대상을 상실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지적 현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은 결국 최후의 근본적 성찰로서의 휴머니즘이 요청되는 역사적 조건이 되고 있는 것이다.--「전환기적 전망으로서의 휴머니즘」--신영복
▷ 겉으로 보기에 나의 삶은 사치스러웠다고도 할 만큼 배 움만을 위해 살아 왔고, 앎의 길만을 따라다녔지만, 나는 아직도 잘 배우지 못했고, 아직도 잘 알지 못한다. 배운 것 이 있다면 잘 알 수 없다는 사실 뿐이며, 아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단편적(斷片的)인, 파편과 같은 것 뿐이다<나의 길 나의 삶>
[출전]『史記』, 淮陰侯傳 [내용]: 漢나라 유방(劉邦)이 천하통일 후 한신(韓信)을 楚 왕으로 임명하고, 한신에게「임금이 묻기를“나는 얼마쯤의 군사를 거느릴 수 있느냐? ”한신이 대답하기를“폐하께서는 10만의 군사를 거느리는데에 불과합니다.”임금이 가로되“그대는 얼마쯤인가?”한신이 대답하기를“신은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 좋습니다.”유방이 웃으면서“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하는 사람이 어째서 10만의 장군에 불과한 나에게 포로가 되었느냐?”하니 한신이 대답하기를“폐하께서는 장군의 능력은 없지만 장군을 통솔하는 폐하의 능력은 하늘이 주신 것이므로 도저히 사람의 능력으로는 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문] ▷ 최근에 나오는 PC는 대부분 6GB 이상의 하드디스크를 갖추고 있을 정도다.컴퓨터 그래픽를 다루는 디자이너나 컴퓨터 전문가들에게는 10GB도 부족할 정도다."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말과 달리 하드디스크는다다익선(多多益善)의 미덕이 아직도 유효한 셈이다.<한국경제신문>
▷ 온 나라가 출산율을 끌어올리려고 난리다. 출산에 관한 한 어느덧 다다익선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시대정신이 됐다. 인구 감소라는 시한폭탄에 미리 대비해야 한다는 걸 몰라서 하는 얘기가 아니다. 그러나 저출산은 호들갑을 떤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파이낸셜 뉴스>
☞여러 가지로 일이 많고 몹시 어려움. [유]내우외환[內憂外患]/무리난제[無理難題] [반]무사식재[無事息災]/평온무사[平穩無事]
[예문] ▷ 이사장의 그간 동정이나 경영철학 등을 비롯해 우리 병원에서 이루어진 각종 기념비적 의학기록과 새생명찾아주기운동본부를 통해 결실을 맺은 감동적인 사연 등 다양한 분야로 나뉘어진 책 내용 가운데는 가천의과대학교와 가천길대, 신명여고 등 가천학원과 경원대학교·경원전문대 등 경원학원의 내용도 포함돼 있어 한 해 동안 다사다난했던 우리 재단의 전체적인 모습을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되어 있다.--<길병원보>에서
▷ 우리나라에 자동차가 처음 나타난 것은 1903년이다. 이해는 마침 이 왕가에 가장 뜻깊은 해였다. 조선 역대 임금 중에서 고종만큼 다사다난한 사건들을 겪은 임금도 드물다. 그런 와중에서도 40년 동안 큰 병고 없이 옥좌를 지켜왔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일이어서 궁내외 대신 등이 뜻을 모아 위로잔치를 베풀기로 했다. 이 잔치를 칭경예식(稱慶禮式)이라 했는데, 잔치 준비 중 몇몇 대신들이 이왕이면 자동차 한 대를 들여와 축하식장인 광화문의 광무대까지 고종을 모시자는 듯을 모았다로부터 자동차의 편리함을 충분히 들어왔던 고종은 대신들의 간청에 처음에는 빈약한 나라살림을 생각해서 거절했으나 끝내는 허락했다. <좋은차닷컴>
☞베를 끊어서 훈계했다. 학업을 중단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경계. [동]孟母斷機(맹모단기) [출전]『列女傳』, 母儀 [내용] : 맹자가 자라서 어느 날 유학을 갔다가 학업을 중단하고 집으로 돌아오니,「맹모가 바야흐로 베를 짜다가 묻기를“학문이 어느 정도까지 이르렀느냐?”맹자가 말하기를“전과 같습니다.”하니 맹모가 칼로써 베를 끊으면서 말하기를“네가 학문을 그만두는 것은 내가 이 베를 끊는 것과 같다.”하니 맹자가 두려워서 밤낮으로 부지런히 학문하였다.」맹자는 마침내 천하의 명유(名儒)가 될 수 있었다.
☞한 자루의 칼을 들고 곧바로 쳐들어 감. 허두를 빼고 요점이나 본문제로 들어간다. 또는 말을 할 때나 글을 쓸 때 서슴지 않고 정면으로 대번에 용건을 들어 말하는 것. [불교]생각과 분별과 말에 거리끼지 않고 眞境界(진경계)로 바로 들어감
[예문] ▷ 여러 말 할 것 없이 내 단도직입으로 묻겠다. ▷ 언석은 여러 말을 하는 것이 지루하다는 듯이 단도직입으로 말하였다.≪한용운, 흑풍≫ ▷ 단도직입적 질문 ▷ 단도직입적 태도 ▷ 그가 그 사실에 대해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바람에 잠시 당황했다.
▷ 나도 그가 그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대해 오자 별수 없이 사무적으로 말을 받았다.≪최인호, 잠자는 신화≫ ▷ 너무나 단도직입적인 말에 갑례는 얼떨떨한 듯 약간 얼굴이 상기되고 있었다.≪하근찬, 야호≫ ▷ 시간이 없어 단도직입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 어렵사리 그와의 술자리를 마련한 것이었다. 서문식당이 아닌 포구 안쪽 허술한 선술집으로 그를 이끌었다.손씨도 봉환의 처지를 모르지 않았기 때문에 단도직입으로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았다--김주영 <아리랑난장>에서.
[내용]말마는 범어 marman의 음역이고 支節이라고도 번역하며 또 의역하면 死血인데 사람의 몸이 이것에 닿으면 죽는 국소의 뜻임/傷害人心者 臨終受斷末魔苦(顯宗論)-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면 죽을 때 단말마의 고통을 받는다
[예문] ▷ 검이 한가닥 청광으로 화해 무섭게 날아갔다. 노승을 공격하던 흑의인 하나가 문득 심상치않은 느낌에 번개처럼 뒤를 돌아보았다. “크악!” 그 순간, 그의 입에서 단말마의 비명이 터져나왔다--<한국일보>연재 「태풍운연의」에서 ▷ [폭포」--이형기
그대 아는가 나의 등판을 어깨에서 허리까지 길게 내리친 시퍼런 칼자욱을 아는가. 질주하는 전율과 전율 끝에 단말마를 꿈꾸는 벼랑의 직립 그 위에 다시 벼랑은 솟는다. 그대 아는가 석탄기의 종말을 그때 하늘 높이 날으던 한 마리 장수잠자리의 추락을. 나의 자랑은 자멸이다 무수한 복안들이 그 무수한 수정체가 한꺼번에 박살나는 맹목의 눈보라 그대 아는가 나의 등판에 폭포처럼 쏟아지는 시퍼런 빛줄기 2억년 묵은 이 칼자욱을 아는가.
[예문] ▷ 가난하여도 원망하지 않음을 어렵다고 하건마는 내 생활이 이러하되 서러운 뜻은 없다. 한 도시락의 밥을 먹고, 한 표주박의 물을 마시는 어려운 생활도 만족하게 여긴다. 평생의 한 뜻이 따뜻이 입고, 배불리 먹는 데에는 없다. 태평스런 세상에 충성과 효도를 일로 삼아, 형제간에 화목하고 벗끼리 신의 있게 사귀는 일을 그르다고 할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 그 밖에 나머지 일이야 태어난 대로 살아가겠노라--≪박인로-누항사≫中에서
[출전] 『초사』 [예문] ▷ 일필휘지, 솔의의 서가 아닌가 한다.유두분면(기름 바른 머리와 분 바른 얼굴), 단순호치(붉은 입술과 하얀 이)의 다듬고 꾸민 얼굴도 아름답지만 꾸미지 않은 수수한 아름다움이 더 높이 평가되기도 하는 것--<월정 정주상 작품 감상조언> 中에서.
▷ 데릴사우 내가 꼭 정헐껄, 한분 되니 쓸데 있소?” 도련님 아무 대답 없이 춘향 방문을 들어서니, 그때으 춘향이는 도련님 드리려고 금낭의 수를 놓다, 도련님을 반겨 보고 단순호치를 열어 방긋 웃고 일어서며 옥수를 잡고 허는 말이, “도련님, 이제 오시니까? 오날은 왜 늦었소?--≪판소리「춘향전」≫에서
☞창자가 끊어지는 듯하게 견딜 수 없는 심한 슬픔이나 괴로움./애 끊는 슬픔 [출전]『世說新語』
[내용]晉나라의 환온(桓溫)이라는 사람이 蜀나라로 가던 도중 환온의 종자(種子)가 양자강의 삼협(三峽)에서 원숭이 새끼를 싣고 가자 그 어미가 새끼를 그리워하여 울부짖으며 백여리나 달려와 배에 뛰어 들더니 죽고 말았다. 죽은 원숭이의 배를 갈라 보니 너무나도 슬퍼했던 나머지 창자가 마디마디 끊어져 있었다고 한다.
☞어떤 일의 是非를 가리거나 결말을 짓기 위하여 논의하다. 부당한 일에 대하여 강력히 항의하여 시정하도록 하다./따짐 [예문] ▷ 유럽연합의 대표단은 19일 베이징에 도착하여 중국과의 담판을 벌인다. 한 소식통은 유럽연합의 요구사항이 미국보다 결코 낫지 않을 것으로 전했다. 또한 많은 부분들이 미국의 조건을 본따서 이루어졌고, 심지어 금융,보험,해상등의 서비스무역의 요구조건은 미국보다 높아서 유럽연합과의 담판역시 수월하지만은 않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뉴스투데이> ▷ 현대 정몽헌 회장과 LG 구본무 회장이 이헌재 금융감독 위원장 중재로 오늘 직접 반도체 빅딜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담판이 될 것이라던 기대와는 달리 회동은 성과없이 끝 났습니다.--<sbs뉴스>중에서
☞무슨 일이든지 입으로 말하는 것은 쉽지만, 실제로 해보면 쉽지 않으므로 쉽게 입을 여는 짓은 삼가야 한다는 말.
[출전]『漢書』 東邦朔傳 [내용]동방삭(東邦朔)은 전한(前漢) 중엽 사람이다. 그는 정직하며 유머를 좋아 했다. 무제(武帝)가 전국의 인재를 모집했을 때 고향의 염차(厭次:산동성)에서 수도 장안으로 나가 황제에게 글을 올렸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상시랑(常侍郞)으로 발탁되었다.
무제는 장안 근처에 황실 전용 사냥터 '상림원(上林苑)'을 만들려고 했다. 동방삭은 국고를 비게 하고, 백성의 생활 밑천을 빼앗는 짓이라며 반대했으나 무제는 듣지 않았다. 그는 부국 강병책을 건의했지만 채택되지 않아 '비유 선생론(非有先生論)' 이라는 풍자문을 써서 간했다. 거기에는 비유 선생과 오왕(吳王)이라는 두 가공 인물이 등장한다.
비유 선생은 오왕을 섬긴 지 3년이 되지만, 조금도 정견을 발표하지 않았다. 오왕이 어이가 없어서 "뭔가 말을 해주시오"하고 요망했지만, 선생은 여전히 입을 다물었다. 오왕은 안달이 났다. "말해 주시오. 뭐든 듣겠소." "좋습니다. 입을 여는 것은 간단한 일입니다."
그리고 그는 간언하다 죽은 충신의 이름을 나열하고는 또 거듭 말했다. "입을 열기가 어찌 그리 쉬운 일이오!(談何容易)" 그는 계속해서, 알랑거려 중용된 인물, 임금이 포악했기 때문에 세상을 피한 인물의 이름을 들어 충신을 멀리하고 소인을 등용한 어리석음을 말했다. "입을 열기가 어찌 쉬운 일이오!"
선생은 또 현자가 명군을 만나 서로 도와 가며 나라를 일으키고 융성케 한 사례도 들어 군주로서의 마음가짐을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오왕은 감동하여 이후부터 선생의 간언을 받아 들였다. 그리하여 정치를 개혁하고 오나라를 융성으로 이끌었다는 내용이다.
[내용]답백초(踏百草)라고도 한다. 당 ·송시대에 기원을 찾아볼 수 있다. 장안 사람들은 봄이 오면 들에 나가 자리를 마련하고, 악기를 가지고 놀았다. 남방에서는 2월 2일, 북방에서는 5월 5일, 9월 9일에 하는 예도 있으나, 대개는 청명절(淸明節)에 하는 풍류 행사이다. 묘제(墓祭)를 마친 남녀가 함께 교외로 나가 술을 마시면서 즐기는데, 오락으로 투백초(鬪百草)라는 놀이를 한다. 《천록각식록(天錄閣識錄)》에 장안 근교의 답청 상황을 “북을 가지고 교외에서 즐기며 아침에 가서 저녁 때에 돌아온다. 이것을 영부(迎富)라고 한다.”라고 묘사한 것을 보면, 단순히 놀고 즐기는 것만을 목적으로 한 것은 아니고, 실리적인 속신 때문에 성황을 이루었을 것으로 생각된다.<두산백과>
[내용]진시황(秦始皇)이 중국을 통일하고 강력한 중앙 집권화를 이룩한 이래 중국의 권력은 오직 황제 한 사람에게 집중되었다. 자연히 황제를 둘러싼 친위 집단이 권력을 농단하게 되었는데, 그 중심을 이룬 것이 환관과 외척 세력이었다. 또 한(漢)나라 때에는 유교를 국교로 하여 유학을 공부한 선비 집단이 성장하였다.
그런데 왕망(王莽)이 제위를 찬탈하자 선비들은 초야로 피해 청의(淸議)를 일삼고, 자연스럽게 명망 있는 인물을 중심으로 뜻을 같이하는 무리들이 모였다. 이를 당인(黨人)이라 한다.
후한 때에는 화제(和帝) 이후 역대 황제가 모두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다. 그래서 황태후가 섭정이 되고, 이 과정에서 황태후의 친인척인 외척들이 실권을 잡게 되었다. 그러나 후일 장성한 황제는 이들의 전횡을 탐탁치 않게 여겨 자신의 친위 세력을 키우고 이들을 제거해 나가는데, 그 중심인 된 세력이 바로 환관이었다.
환관들은 신분 상승의 욕구 때문에 스스로 거세한 사람들이었으므로 집단의 결속력이 유달리 강하고, 사회적 책임이나 정치적 경륜보다는 자신들의 이해에 민감하였다. 따라서 이들이 권력을 쥐면 부정과 부패가 만연하게 마련이었다. 유교적 교양을 쌓은 예비 관료 집단인 선비들이 환관의 농단으로 국정이 문란하고 풍속이 타락해 가는 것을 방관만 하고 있을 리 없었다.
이들도 명망 있는 인물을 중심으로 모여 전국적으로 방대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선비 집단과 외척, 환관 세력이 서로 물고 물리는 정권 다툼을 벌이는 과정에서, 옳고 그름을 떠나 다른 집단을 무조건 배격하는 것은 예상되는 일이었다. 이를 가리키는 말이 당동벌이이다.
좁게는 당고(黨錮)의 옥(獄) 이후 이응(李膺)을 중심으로 한 당인들이 유교적 지식 계급 이외의 세력을 적대시하던 사실을 가리키기도 한다. 전한은 외척이 망쳤고, 후한은 환관이 망쳤다고 한다. 후한 말에 이르러 환관들은 외척과 선비 집단을 철저히 탄압하고, 그 결과로 지식인 관료 집단인 선비 집단이 황실을 버림으로써 후한이 자멸하게 되었다.
☞당돌한 서시, 꺼리거나 어려워함이 없이 올차고 다부진 서시, 서시와 비교하지 말라는 뜻으로 자신을 낮춘 겸손한 말.
[출전]진서(晉書) [내용]진나라에 주의라는 자가 있었는데, 매사에 겸손을 미덕으로 삼는 자였다. 하루는 친구 강량이 찾아왔다. "친구들이 자네를 악광과 비교하고 있네."
악광은 진나라의 현인으로 죽어서까지 사람들의 추앙을 받는 인물이었다. 이런 인물과 자신을 견준다는 말을 들은 진의는 얼굴이 붉어져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무염은 추녀이고 서시는 재색을 겸비한 미녀라는 사실은 갓난아이도 안다네. 친구들이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악광과 함께 나를 말한다면, 이것은 무염을 서시와 똑같은 미녀라고 하는 것과 같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선녀와 같은 미모의 서시를 거스르는 것이 되네. 그대들은 어찌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서시는 월나라의 미인으로 월와 구천이 오나라에 패한 뒤 오왕 부차에게 보내졌다. 부차는 서시의 눈부신 미모에 현혹되어 국사를 돌보지 않다가 결국 구천에게 멸망하고 만다.
[참고]서시는 중국 월나라의 전설적인 미인이다. 항주를 관광하다 보면 아름답기로 유명한 서호변에 그녀의 그림이 조각 전시돼 있다. 서시는 얼굴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그 몸매가 너무나 가냘퍼 장정의 손바닥에서 춤을 출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에 무염녀라는 여인도 함께 살았는데 추녀로 세상 남자들이 모두 머리를 내젓고 달아날 지경이었다. 어느 날 서시가 머리가 아파 이마를 찡그리고 다니니 동리 남자들이 모두 서시의 그 찡그린 이마의 아름다움에 반했다. 이를 본 무염녀는 자기도 서시처럼 이마를 찡그리면 남자들이 좋아할 것이라 생각하고 이마를 찡그리고 다녔다.
추녀인 무염녀가 못생긴 얼굴에 또 이마까지 찡그리고 다니니 얼마나 보기 흉했겠는가. 무염녀는 동리 남자들의 사랑을 얻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버림받는 가련한 처지가 됐다. 사람은 다 분수가 있는 법이다. 같은 여자라도 서시가 세상 사람들의 이쁨을 받았다고 해서 무염녀도 같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서시는 미모가 아름답기만 해서 천추에 그 이름을 유전하는 것이 아니다. 월왕 구천은 회계지치(會稽之恥)의 결과로 오왕 부차에게 포로가 돼 갖은 참혹한 모욕과 곤욕을 당하며 종살이를 했다.
그가 살아난 고사는 너무 유명하다. 오왕 부차가 중병이 들어 생사를 예측할 수 없을 때 월왕 구천이 자청해 부차의 대변을 먹어 맛을 보고 그의 대변이 신맛이 나 위장이 무탈하니 곧 병이 나을 것이라 예진한 일이 있었다. 그의 말대로 병이 낫자 부차는 구천의 충성심을 믿고 월나라로 돌려 보내줬다.
월왕 구천은 귀국하자마자 오왕 부차에게 원수 갚을 일만 생각했는데 서시는 월왕 구천이 총애하는 여인이었다. 서시는 사랑하는 조국 월나라와 정인 구천의 원한을 풀어주기 위해 오나라에 공녀로 자청했다. 그 빼어난 미모로 오왕 부차의 넋을 빠지게 했고 이틈을 타 공격한 월왕 구천에게 결국 오나라와 부차는 멸망하고 말았다.
미모와 가냘픈 몸매만으로 서시를 평가해서는 안 된다. 진면목은 오히려 당돌한 서시의 일편단심이다. 무엇이 사랑인가를 생각해 볼 일이다. <김홍철 청주대 한문교육과 교수 >
[출전]『淮南子』 人間訓,『한시외전』 [내용1]: 齊나라의 장공(莊公)이 어느 날 사냥을 갔는데 사마귀 한 마리가 다리를 들고 수레바퀴로 달려들었다. 그 광경을 본 장공이 부하에게“용감한 벌레로구나. 저놈의 이름이 무엇이냐?”“예. 저것은 사마귀라는 벌레인데 저 벌레는 앞으로 나아갈 줄만 알고 물러설 줄 모르며 제 힘은 생각지 않고 한결같이 적에 대항하는 놈입니다.(淮南子)
”장공이 이 말을 듣고“이 벌레가 만약 사람이었다면 반드시 천하에 비길 데 없는 용사였을 것이다.”하고는 그 용기에 감탄하여 수레를 돌려 사마귀를 피해서 가게 했다.
[내용2] '螳螂之斧(당랑지부)'는 사마귀가 먹이를 공격할 때에 앞발을 머리 위로 추켜든 모습이 마치 도끼를 휘두르는 모습과 흡사한데서 온 말이나 '당랑거철'과 같은 뜻으로 쓰임./『문선』에 보면 '당랑거철'은 三國時代(삼국시대)로 접어들기 직전, 진림이란 사람이 劉備(유비) 등 群雄(군웅)에게 띄운 격문에 나온다."曺操(조조)는 이미 덕을 잃은 만큼 의지할 인물이 못된다. 그러니 모두 袁紹(원소)와 더불어 천하의 대의를 도모함이 마땅할 것이다. ……지금 열악한 조조의 군사는 마치 '사마귀가 제 분수도 모르고 앞발을 휘두르며 거대한 수레바퀴를 막으려 하는 것(螳螂拒轍)'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한시외전)."
[예문] ▷ 원군은 한말(韓末)의 돈키호테였다.그는 바가지를 쓰고 벼락을 막으려 하였다. 바가지는 여지 없이 부스러졌다. 역사는 조선이라는 조그마한 땅덩어리나마 너무 오래 뒤떨어뜨려 놓지 아니하였다.≪채만식 -레디메이드 인생≫ 中에서
▷ 갑주를 갖추고 진문에 나서며 원수를 불러 가로되 네 한갓 혈기만 믿고 우리를 대적하려 하니 이는 하룻 강아지 범 무서운 줄을 모르니라. 네 빨리 나와 나를 대적하라. 이때에 원수 의기 양양하여 응성하고 내다라 싸워 일합이 못하여 거의 한담을 잡게 되었더니 적진이 또 쟁을 처 싸움을 거두거늘…≪劉忠烈傳≫
▷「어디 그러면 한 번 겨뤄 보자」샛바람은 제 말마따나 재빠르게 몸을 일으켜 벽에 끌러서 걸어둔 제 환도를 떼어 든다.「허, 이놈봐,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어디 견디어 봐라…≪玄鎭健, 無影塔≫
▷ 말을 삼가라? 나는 노골적이다! 너희놈들처럼 뒷구멍으로 우물쭈물하지는 않는다! 어쨌든 애는 못 데려갈 줄 아슈. -이게 원 하룻강아지 범 무서워 할 줄 모른다드니!설사 내가 애를 찾으러 왔다 하자. 그렇드래두 그애 하나쯤은 내 주는 게 예의가 아니냐? 내가 누구라는 걸 알면 말이다!≪黃順元, 人間接木≫
☞눈앞의 욕심에만 눈이 어두워 덤비면 결국 큰 해를 입게 된다는 뜻. [동]螳螂在後(당랑재후), 당랑박선(螳螂搏蟬)
[출전] 『한시외전(韓詩外傳) 』 [내용]전국시대 오나라 왕이 싸움을 무척 좋아하여 그의 강대한 병력을 믿고 이웃 나라를 침략했다. 그리하여 오나라는 끊일 사이 없는 전화 속에서 민생은 도탄에 빠질 지경이었다. 한번은 오왕이 또 초나라를 침공할 계획을 세우자 오나라 문무대신들은 당시의 정세로 보아 다시 출병을 하게 되면 오나라에 대단히 불리해질 것을 우려하여 오왕에게 계획을 취소하도록 극구 권하였다.
그러나 오왕은 본디 성격이 강직하고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은 꼭 하고 마는 고집불통인지라 이러한 권유를 듣고 침략 계획을 스스로 포기하기는커녕 오히려 청천벽력 같은 명령을 내렸다. "무릇 누구도 초나라 침공을 저지하는 자는 용서없이 모두 처단할 것이다." 대신들이 비록 오왕의 힘에 겨운 침략행위를 찬성하지는 않았지만 모두 목숨이 두려워 감히 진언하질 못했다. 이때 소유자라고 하는 대신이 자기의 뜻을 굽히지 않고 여하간 오왕의 출병을 막고자 곰곰히 방책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리하여 그는 매일 아침 일찍 활과 화살을 들고 왕궁 후원에 나아가 배회하면서 아침 이슬로 그의 옷을 흠뻑 적시곤 하였다. 이렇게 사흘이 되던 날 과연 오왕의 주의를 끌게 되어 이상히 여긴 오왕이 그에게 물었다. "그대는 어이 하여 아침 일찍부터 옷을 적셔 놓으오?" "신은 아침 일찍 뒤 화원에 와서 꾀꼬리를 잡으려다 그만 연못에 빠졌습니다. 비록 옷은 젖었지만 오히려 귀한 교훈을 얻었습니다." 라고 소유자가 대답했다.
오왕이 이 말을 듣자 놀람과 기쁨이 엇갈렸다. 놀라운 것은 꾀꼬리를 잡는데 무엇 때문에 귀중한 교훈을 받았으며 기쁜 것은 이 귀중한 교훈이 자신의 입신처세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것이라는 희망에서였다. 그리하여 오왕이 재촉하여 물었다. "꾀꼬리를 잡는데 무슨 교훈을 얻었는지 그 사실을 상세히 아뢰렷다."
소유자는, "조금전에 신이 이후원에 와서 새를 찾아 활솜씨를 시험해 보려 했는데, 갑자기 나무 위에서 매미 한 마리가 소리 높여 울더군요. 그래 머리를 들어 보니까 매미가 붙어 있는 바로 뒤에 사마귀 한 마리가 두 팔을 내어 밀고 막 매미에게 덮치려고 하고 잇지 않겠어요. 매미는 이를 모르고 있으니 틀림없이 아침 식사로 잡았다 생각했겠지요. 그런데 천만 뜻밖에도 그 사마귀 뒤에는 꾀꼬리 한 마리가 묵묵히 앉아 있는데 그도 사마귀를 잡아먹으려고 온 정신을 기울여 주시하고 있더군요. 신은 그 때 활을 잡아당기고는 바로 쏘질 않았습니다. 사마귀가 팔을 뻗어 매미를 잡자 꾀꼬리가 확 덮쳐가 사마귀를 잡아 한 입에 넣어 막 삼키려는 찰라에 신이 꾀꼬리를 조준하여 활을 쏘니까 꾀꼬리가 맞고 땅으로 떨어지더군요. 사마귀와 꾀꼬리가 다같이 눈앞의 이익만을 탐내고 뒤의 화환은 꿈에도 생각지 않다가 그러한 결과가 생겼다고 신은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막 달려가서 그 꾀꼬리를 주우려다 옆에 못이 있는 것을 모르고 발을 헛디디어 물에 빠지는 바람에 이렇게 온 몸이 물에 젖었습니다. 그때 제자신도 똑 같은 과오를 저질렀음을 깨달았습니다. 이 얼마나 귀중한 교훈입니까?"
오왕이 듣고는 한참 무언가 깊이 생각하더니 소유자의 언중의 말뜻을 깨달아 초나라를 침공할 계획을 포기하였다.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진다. 큰 인물은 많은 노력과 어려움을 이겨내고 뒤늦게 이루어짐. [출전]『한비자』,『老子』
[내용]大方無隅 大器晩成 大音希聲 大象無形 道隱無名 대지는 모퉁이가 없고, 큰그릇은 늦게 만들어지며, 큰 소리는 드물게 소리나고, 큰 형상은 모양이 없으며, 도는 숨어있어 이름이 없다--대지는 모퉁이가 없고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 진다 .최대의 사각은 지나치게 커서 그 모퉁이가 보이지 않을 정도인 것과 같이 최고의 가치가 있는 그릇은 오랜 시간 동안 공을 들인 후라야 완성된다. 가장 힘이 강한 소리는 소리가 나지 않는 것같이 생각된다. 절대적인 불변의 참된 도(道)는 너무나도 광대해서 그 정체를 포착하지 못하기 때문에 참된 도인 것이다." 노자의 말로서, 여기서의 도는 유교가 말하는 사람이 지켜 행해야 하는 도와는 다르다.
원문에서 나온 대기만성의 본래의 의미는 큰 그릇은 덜된 것처럼 보인다고 말하고 있다. 즉, 원래 위대하고 훌륭한 것은 보통 사람의 눈이나 생각으로는 어딘가 덜된 것 같고, 그 반대인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老子』
[참고1]유노(喩老)옛날 중국 초나라의 장왕(莊王)은 즉위한 지 삼년이 지났는데도 별 정령을 내리지 않았다. 우사마(관직이름)로 있는 사람이 하루는 장왕에게 이런 말을 했다. " 새 한 마리가 남쪽 언덕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삼년이 되어도 날지 않고 또 울지도 않습니다. 이런 새를 무어라 불렀으면 좋겠습니까? "장왕이 대답했다.
" 그 새가 삼년을 안 날고 있는 것은 날개에 힘을 붙이기 위해 그러는 것이고 울지 않는 것은 주의를 살피느라 그러는 것이오. 그러나 한번 날기 시작하면 하늘 높이 솟아오를 것이며 한번 울면 세상사람들을 놀라게 할 것이오. 조금만 더 두고보시오. 그리고 난 그대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잘 알고 있소. "
그 반년 뒤 스스로 정무를 맡아 처리하는데 엄정하고 예리했다. 쓸모없는 법령 열 가지를 폐지했고 대신 아홉 가지 법령을 새로 지었다. 또 무능한 중신 여섯 명을 파면시키고 현명한 사람 여섯명을 야(野)에서 새로 등용해 썼다.그런 다음 장왕은 제(濟)나라와 싸워 크게 이겼고 진(晉)나라를 하옹(중국의 지명)에서 패퇴(敗退)시켰으며 그 여세를 몰아 뭇 제후들을 송나라에 모이게 해 그 맹주(猛主)가 되어 천하(天下)의 패권(覇權)을 쥐었다.
장왕의 이런 큰 성공(成功)은 그가 목전(目前)의 작은 공을 생각 않고 큰 공을 세울 수 있는 힘을 축적한데 있다.그래서 老子는" 큰 그릇은 쉬 만들어지지 않으며 큰 소리는 자주 나지 않는 법이다".[大器晩成 大音稀聲]이라 말했다(한비자)
[참고2]西漢(서한)말의 馬援(마원)은 어려서부터 야심이 많았지만 좀처럼 등용되지 못한 채 어렵게 지내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논밭이나 관리하는 말단 관직을 받아 부임 인사차 형인 馬況(마황)에게 들렀다. 형이 말했다.
“너는 大器晩成형의 인물이다. 기술이 뛰어난 목수는 산에서 갓 베어낸 나무를 절대로 남에게 보이지 않는다. 먼저 잘 다듬은 다음에 선을 뵈지. 열심히 노력해라.”
과연 그는 형의 말대로 열심히 노력했다. 후에 東漢(동한)이 서자 光武帝(광무제)를 도와 혁혁한 공을 세워 관직이 伏波將軍(복파장군)까지 올랐다. 伏波將軍이라면 西漢 漢武帝(한무제) 때부터 있었던 관직으로 將軍 중에서도 戰功(전공)이 뛰어난 사람에게만 授與(수여)되었던 관직이다. 후에 洞庭湖(동정호) 일대에서 반란이 일었다. 조정에서 진압군을 파견했지만 怪疾(괴질)에 걸려 潰滅(궤멸)되고 말았다. 光武帝가 난처해하자 그는 출병을 자청하고 나섰다. 그의 나이 예순이 넘어서였다. 그는 마침내 반군을 진압하여 성공적으로 개선했다.‘老益壯’(노익장)의 고사다. 비록 大器晩成의 인물이었지만 老益壯까지 과시했던 셈이다.
[참고3]삼국시대 魏(위)나라에 崔琰(최염)이라는 유명한 장군이 있었다. 그의 從弟(종제)에 崔林(최임)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다지 영리해 보이지 않았던지 친척들로부터 천치 취급을 당했다. 하지만 崔炎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큰 鐘(종)이나 큰 솥은 쉽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多才多能(다재다능)한 인물 역시 그렇다. 崔林은 大器晩成형이다. 언젠가는 큰 인물이 될 것이다.’ 과연 후에 그는 三公(삼공)이 되어 천자를 보필하는 대임을 맡게 되었다.
☞많은 사람. 여러 갈래의 당파가 큰 덩어리로 한 데 뭉치다. [예문]최근 항간에는 3영수합작이니 3거두합작이니 하는 추상적 명사가 유행되고 있다. 우리는 조국의 완전 자주 독립을 위하여 전민족적 대동단결을 주장하고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남북협상을 추진하였으며 또 남북통일의 균형적 추진을 위하여 남한에서 각 당파의 통일과 단결이 필요하다는 것을 당면과업으로 현정하였던 것이다. 통일과 단결은 전민족적으로 요청되는 것이다.--『백범어록』중에서
☞크게는 같은 데 작게는 다르다. 거의 같음. [동]五十步百步 (맹자) [출전]『장자』천하편 [내용]장자는묵가와 법가 등의 학설의 논점을 비판하고 도가 사상을 선양한 다음 장자 의 친구인 혜시의 말을 인용하여 이를 바판하는데 혜시의 말 가운데'하늘은 땅보다도 낮고 산은 연못보다 평평하다. 해는 장차 중천에 뜨지만 장차 기울어지고 만물은 장차 태어나지만 장차 죽 는다. 크게 보면 한가지이지만 작게 보면 각각 다르니(大同小異) 이것을 소동이(小同異)라고 말한다. 만물은 모두 같고 또 모두 다르니 이것을 대동이(大同異)라고 말한다.' 대동소이란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주자(朱子)도 중용장구(中庸章句)를 쓰면서 뜻은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는 표현을 쓰고 있다. 당나라의 노동과 마이가 사귐을 맺는 시(詩)에 "어제의 같음은 같음이 아니고 다름은 다름이 아니다. 이것을 크게는 같고 작게는 다르다고 말한다"고 쓰고 있다.
[예문]도보와 삼국초기로 부터 통일신라, 고려, 이조에 걸쳐 만들어 졌든 각종 고분벽화 기와회화등에 보면 맨손투기의 자세며 칼이나 창, 봉을 들고 방어, 공격하는 온갖 모습이 생생히 나타나 있는데 이를 보면 현재 기도회 술기의 자세와 대동소이 함을 알수 있을 것이다.
☞대대로 이어오는 자손. [동]子子孫孫(자자손손) 世世孫孫(세세손손) [예문]그 뒤 광주 이씨와 영양 최씨는 대대손손 세의(世誼-조상 때부터 사귀어 온 정의)를 지켜 흡사 한 집안 사람들 같이 지내왔으며, 묘삿날도 한 날로 정하여 두 집이 같이 행사(行祀)한다 하니, 오늘날 같이 메마른 인정 세태에 붕우유신의 큰 귀감이 되고 있다.<전통문화의 맥-경북교육위>
☞매우 밝은 세상. 크게 밝은 하늘과 땅. [예문]바야흐로 욕이 대명천지를 활보하고 있다. 욕이야 지천에 흔하지만 공적인 자리에선 쓰기 어려운 음지의 거류민. 그런데 어느샌가 버젓이 활자화된 형태로 얼굴을 들이밀고 있는 것이다. 주된 마당은 사이버 공간. 하지만 최근에는 욕에 대한 사전이 발간되는 등 인쇄매체에서도 욕에 대한 대접이 달라지고 있다. 무엇이 욕을 음지에서 양지로 끌어낸 것일까.
[예문2] 일본에 거주하는 외국인,특히 한국인과 중국인을 싸잡아 범법자 집단시하던 도쿄 도지사의 헛소리를 들은 게 불과 엊그제인데 이번에는 총리라는 사람이 고색창연한 넋두리를 늘어놓았단다.
그의 말씀인즉 ‘일본은 천황을 중심으로 한 신(神)의 나라’라고 했다.과로로 쓰러진 전임자의 뒤를 이어 권좌에 오른 이 이는,취임 직후 청소년 범죄가 잇달으자 이미 ‘아,옛날이여!’를 외쳐 평지풍파를 일으킨 전과(?)가 있었다.제국주의 시절,왕의 이름으로 내렸던 ‘교육 칙어(勅語)’라는 것을 케케묵은 역사책 갈피에서 새삼 끄집어내어 입에 침을 튀겼던 것이다.
대명천지에 소(牛)도 웃을 신의 나라 어쩌구 하는 궤변은 자신의 내심을 더욱 직접적인 화법으로 털어놓은 말인데,참다못한 여론의 반발이 비등했다.아사히신문은 17일자에서 “그는 태어난 시대를 잘못 택했는지 모른다.반세기쯤 더 빨리 태어났더라면 본인으로서도 훨씬 살기 좋은 세상이 아니었을까”라고 비꼬았다.그러고는 “그런 사람이 총리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다”고 아퀴를 지었다.이렇게 되자 정해진 순서대로 막말꾼들이 늘 써먹는 상투적인 수법이 나온다.“오해에서 비롯되었다” “유감이다” 운운하면서 나 몰라라 꽁무니를 빼는 것이다.(국민일보-조양옥 칼럼중에서)
[내용] 후한(後漢) 말기에 모융(牟融)이라는 학자가 있었다. 그는 불교학에 밝았는데, 유학자에게 불교를 설명할 때는 불전(佛典)이 아니라 유학의 《시경》《서경》등의 경서를 인용했다. 유학자가 이를 책하자 모융이 말했다.
"너희는 불전을 읽은 일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너희가 잘 알고 있는 경서를 인용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공명의(公明儀)의 고사를 인용했다.
"노(魯)나라의 공명의라고 하는 어진 사람이 하루는 소를 향해 거문고를 켜주었다. 그런데 소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계속 풀을 먹고 있었다. 소가 못 들은 것은 아니다. 청각(淸角)이라는 고상한 곡조는 소 귀에는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모기와 등애의 울음소리와 젖을 먹고 있는 송아지의 울음소리를 흉내냈다.
그러자 소는 꼬리를 흔들면서 발굽 소리를 내며 걸어다니고, 귀를 세우고 그 소리를 다소곳이 들었다. 이는 소의 마음에 맞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내가 너희에게 《시경》을 인용하여 불교를 설명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유학자들은 머리를 끄덕이며 모융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예문]한국경제가 '글로벌체제'에 편입되면서 경제단체들에 희비가 엇갈리고 있다. 외환위기 이전까지는 명함도 제대로 못내밀던 외국계 경제단체는 한국기업들로 문전성시를 이루는데 반해 국내 경제단체들은 회원들이 빠져나갈까봐 전전긍긍하고 있다. 한국정부에 대한 영향력도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국내가 열세다. 주한미국상공회의소(AMCHAM)나 유럽상의의 무역보고서는 바로 한국에 대한 통상압력으로 작용한다. 하지만 국내경제단체의 대정부건의에 대한 정부의 반응은 '우이독경'식이다. <PAXNET 뉴스센터>
☞큰 의리를 위해서는 혈육의 친함도 저버린다. 정의를 위해서는 사적인 일에 구애받지 않는다 [동] ▷ 滅私奉公(멸사봉공) : 사사로운 일을 저버리고 공적인 일을 힘써 받는다 ▷ 枉尺直尋(왕척직심) : 짧은 것은 굽히고 긴 것을 폄. 小를 희생시켜 大를 살림.(尺:길이의 단 위. 10촌을 말함. 尋:두 팔을 벌린 길이 7∼8尺정도.) **굽을 왕/깊을 심/받들 봉
☞빛을 감추고 밖에 비치지 않도록 한 뒤, 어둠 속에서 은밀히 힘을 기른다. 도광이라고도 한다.약자가 모욕을 참고 견디면서 힘을 갈고 닦음,자신의 재능이나 명성을 드러내지 않고 참고 기다린다는 뜻으로, 1980년대 중국의 대외정책을 일컫는 용어.
[동]韜光(도광)
[출전]『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내용] 유비(劉備)가 조조(曹操)의 식객 노릇을 할 때 살아 남기 위해 일부러 몸을 낮추고 어리석은 사람으로 보이도록 하여 경계심을 풀도록 만들었던 계책이다.
또 제갈 량(諸葛亮)이 천하 삼분지계(三分之計)를 써서 유비로 하여금 촉(蜀)을 취한 다음 힘을 기르도록 하여 위(魏)·오(吳)와 균형을 꾀하게 한 전략 역시 도광양회 전략이다. 그러나 도광양회가 널리 알려진 것은 이러한 고사 때문이 아니라, 1980년대부터 중국이 취한 대외정책 때문이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출범한 이후 중국은 '기미(羈?)' 정책을 대외정책의 근간으로 삼아왔다. 기미란 굴레를 씌워 얽맨다는 뜻으로, 주변국을 중국의 세력 범위 안에 묶어두고 통제하는 것을 일컫는다. 그러나 중국은 그동안 초강대국인 미국의 그늘에 가려 국제사회에서 제대로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였다.
때문에 덩샤오핑[鄧小平]은 1980년대 개혁·개방정책을 취하면서 도광양회를 기미정책을 달성하기 위한 대외정책의 뼈대로 삼았다. 이는 국제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경제력이나 국력이 생길 때까지는 침묵을 지키면서 강대국들의 눈치를 살피고, 전술적으로도 협력하는 외교정책을 말한다.
이후 20여 년 간 도광양회는 중국의 대외정책을 대표하였다. 그러나 2002년 11월 후진타오[胡錦濤]를 중심으로 한 제4세대 지도부가 들어서면서 도광양회는 새로운 외교노선으로 대체되었다. 그래서 나타난 것이 화평굴기·유소작위·부국강병 등으로 이어지는 대외전략이다.
[예문] ▷ 대구은행은 최근 신년 기자간담회를 갖고 올해 경영화두를 ‘빛을 감추고 어둠 속에서 실력을 기른다’는 뜻인 ‘도광양회(韜光養晦)’로 정하고 생산성 혁신을 통해 내실을 키우는 데 주력하기로 했다.
[출전]『열자(列子)』설부(說符) 편 [내용] 진문공은 나라 밖으로 나가 제후들을 모아 위나라를 정벌하려고 했다. 그때 공자 서가 하늘을 우러러보며 크게 웃었다. 문공은 그에게 물었다. "그대는 어찌하여 웃는 것이오?" 서가 말했다. "신이 웃는 것은, 이웃 사람 중에 그 아내가 私家로 가는 것을 배웅하는 자가 있었는데, 길에서 뽕나무를 잡고 어떤 여자를 보고 즐겁게 이야기하다가 자신의 아내를 돌아보니, 그 아내 역시 손짓하여 부르는 남자가 있었습니다. 신은 이 남자의 일을 생각하고 웃은 것입니다." 문공은 그 말의 의미를 깨닫고 위나라를 정벌하려는 계획을 멈추고 돌아왔다. 문공이 미처 돌아오지 못했을 때, 진나라의 북쪽을 침략하는 자가 있었다.
[출전]『莊子』 [내용] "북해(北海)에 곤(鯤)이라는 고기가 있다. 그 크기는 몇 천 리가 되는지 알 수 없다. 이 고기가 화해서 붕(鵬)이라는 새가 된다. 붕새의 등은 그 길이가 몇 천리가 되는지 알 수 없다. 이 새가 한번 날아 오르게 되면 그 날개는 하늘을 덮은 구름처럼 보인다. 이 새는 바다에 물결이 일기 시작하면 남쪽 바다로 옮겨가려 한다. 남쪽 바다는 천연의 못이다."
<제해(齊諧)>라는 것은 이상한 것들을 기록한 책이다. 그 책에 이렇게 씌어 있다.
"붕새가 남해로 옮겨가려는 때는 날개가 물위를 치는 것이 삼천리에 미치고,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며 날아 오르는 것이 구만리에 이른다. 여섯 달을 계속 난 다음에야 쉰다"고 했다. 여기에서 "도남" 이니 "붕정만리" 니 "붕익" 이니 하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헛되이 수고만 하고 보람이 없다. [유]徒勞無功/萬事休意(만사휴의)/勞而無功 [속]말짱 도루(로)묵/십년공부 도로아미타불
아미타불은 서방 극락세계의 부처님이다.이 땅의 서쪽으로 10만억 국토(國土)에 아미타불의 정토세계(淨土世界)가 있다.서방정토(西方淨土)에 태어나 아미타불과 함께 사는 것을 발원(發願)하고쉴 사이 없이 '나무아미타불'을 외우는 것을 염불(念佛)이 라고 한다.염불과 관련하여 자성미타(自性彌陀), 유심정토(唯心淨土)라는 가르침이 있다.자성(自性)이 아미타불이고 정토(淨土)는 마음속에 있다는 깊은 가르침이 있다.십 년이면 강산이 변하는 햇수다. 십년 동안 공부를 하면 자성속에 있는아미타불과 만날 수 있고 마음 속에 있는 극락정토(極樂淨土)속에서 안락하게 살 수 있다.십 년 공부가 무너지기는 매우 간단하다.한 번의 도둑질과 한 번의 싸움과 한 번의 우둔한 판단은 이내 아귀(餓鬼),아수라(阿修羅), 축생(畜生)에 떨어지고 만다. 근래 십년 공부가 도로로 떨어지는짓들을 흔히 볼 수 있다.
[참고3]어느 젊은이가 노새를 끌고서 얼음이 언 강을 건너 가고 있었다 얼음이 깨질까봐서 마음속으로 나무아미 타불을 외우면서 ......
아미타불을 외운탓인지 무사히 강을 건넜다고 생각이 들자 웬지 나무아미 타불하고 외운것이 부끄럽고 쑥쓰러워서 한다는 말이 아미타불은 무슨놈의 아미타불 하고는 강 건너쪽을 보니 그곳에 끌고 오던 노새가 있는것이 아닙니까
너무 조심 하다보니 노새의 고삐를 놓고는 혼자 건너온거지요. 그래서 그는 다시 강건너로 돌아갈수 밖에 없었답니다. 그러면서 하는말이 다시 나무아미타불 도로아미타불 하면서 건넜답니다
[참고4]만사휴의(萬事休矣)는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해 보았지만 달리 해결할 수 없는 사태에 직면하여 모든 일이 헛수고로 돌아감을 이르는 말로,『송사(宋史)』의「高氏世家」에서 비롯된 말로 남평(南平)이라는 나라의 보훈(保勛)이라는 임금은 어렸을 때 편애를 받고 자란 영향으로, 항상 웃고 살았다. 당시 송나라가 강성해지고 있던 시기였기에 국력 강화에 힘을 기울여야 함에도 만사 걱정이 없는 태도로 일관 했을 정도였다. 그래서 남평 사람들은 만사휴의(萬事携矣:모든 것이 끝났다.)요, 이제 그에게 기대를 걸어 볼 수 없으니 남평은 곧 망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도리는 말하지 않아도 아름다운 꽃과 열매가 있어 사람들이 모이므로 저절로 길이 생김. 덕 있는 자는 잠차코 있어도 그 덕을 사모하여 사람들이 따른다.
[출전]『史記』 李將軍列傳 [내용]전한(前漢)의 장군 이광(李廣)은 농서 사람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무예, 특히 활쏘기에 뛰어나 기원전 166년에 흉노가 침입해 왔을 때 그 격퇴에 힘썼다. 그 후로 자주 전공을 세워 북쪽 변경이 태수가 되었다.
흉노는 그를 존경하고 두려워하여 이 장군의 이름만 들어도 감히 침공해 오지 못했다. 그의 용병은 알기 쉬웠으며, 부하를 사랑하였으므로 모두가 기꺼이 그의 지휘에 따랐다. 행군 중 물이나 풀이 있으면 부대를 쉬게 하고, 소수의 정찰병을 보낼 뿐이었다.
기원전 121년, 4천 명의 병사를 이끌고 출전했을 때 4만의 흉노군에게 포위 당했다. 그는 부하에게 명하여 원형의 진을 만들게 하고 자기도 강궁을 가지고 적에게 화살을 퍼부었다. 화살이 떨어져 가므로 부하들은 당황했지만, 그는 침착하게 적의 부장을 쏘아 쓰러뜨렸기 때문에 흉노는 두려워서 근접하지 못했다. 그리고 자기 진영을 굳게 지켜 원군에게 구출되었다.
그는 선전했으나 부하를 많이 잃어 후(候)에 봉해지지 않았다. 뒤에 대장군 위청(衛靑), 곽거병(藿去病)이 출진할 때 종군할 것을 원했으나 무제(武帝)는 그의 노령을 염려했다. 그러나 재삼 요청하므로 무제는 하는 수 없이 이광을 위청의 한 부장(部將) 으로 임명했다. 위청은 명령대로 그를 우장군으로 종군케하고, 동쪽 길을 가게 하여 막북(漠北)에서 합류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광은 도중에 길을 잃는 등 애로가 많아 기한 안에 당도하지 못했다. 흉노에게 애먹고 있던 위청은 이광을 의심하고, 무제에게 그를 벌하라고 상주했다. 그는 모든 죄는 자기에게 있다며 부하를 감싸고 병사로 돌아와 "60이 넘어 심판을 받는 치욕은 견딜 수 없다"며 자결했다. 그의 죽음을 듣고 장병은 물론 그를 아는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 모두가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도리불언 하자성혜(桃李不言下自成蹊)' 라고 그를 절찬했다.
☞길가에 있는 오얏은 쓰다는 말로, 많은 사람이 무시하는 것은 반드시 그 이유가 있다.쓸 데가 없어 버림받는다. 모두가 버리는 것은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
[출전]『世說』 [내용]진(晉)나라의 왕융(王戎)이 일곱 살 때의 일이다. 그는 다른 아이들과 함께 놀고 있었다. 그때 길가의 오얏나무에 가지가 휘어지게 많은 열매가 맺혀 있는 것을 보았다. 아이들은 그것을 따려고 앞을 다투어 달려갔다. 그런데 왕융 혼자만은 움직이려 들지 않았다. 그래서 지나가는 사람이 물었다. "왜 너는 따러 가지 않느냐?" "길가에 있는데, 저렇게 열매가 많이 매달려 있는 것은 틀림없이 써서 먹지 못할 자두임이 분명합니다." 아이들이 따보니 과연 왕융이 말한 대로 먹을 수 없는 자두였다.
[참고] 왕융: 234~305년. 진(晉)의 정치가.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으로 노장 사상을 선호하고 유유자적하며 정치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길에 떨어진 것을 줍지 않는다는 뜻. 곧 법이 엄격하게 시행되어 길바닥에 떨어진 물건을 줍는 자가 없을 만큼 나라가 잘 다스려졌다는 말로서, 형벌이 엄해서 백성들이 법을 어기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
[출전]『史記』 상군열전(商君列傳) [내용]秦(진)은 일찍부터 法家(법가)를 등용해 부국강병을 이룬 나라다. 孝公(효공)이 상앙을 등용해 두 번에 걸쳐 變法(변법)을 실시하자 秦은 반석위에 서게 됐다. 상앙이 사용했던 방법은 간단했다. 가혹하리만큼 엄한 벌을 세워 백성들을 꼼짝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물론 여기에는 왕족도 예외가 있을 수 없었다. 과연 그가 헌법의 초안을 올리자 효공(孝公)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대로 했다가는 한 사람도 남아나지 못할 것 같았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법이 공포되자 아우성이었다. 혹자는 칭찬하고, 혹자는 비난했다. 상앙은 둘 다 잡아다 엄벌에 처했다. 이때부터 법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사람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이렇게 해놓고 법을 시행하자 백성들은 손가락 하나로 움직였으며, 백성중 감히 法을 어기는 者는 아무도 없었다. 法을 시행한지 10년, 백성들은 크게 기뻐했으며 집집마다 넉넉했고 전쟁에 용감했으며 나라는 크게 흥성했다. 당시의 사회상황을 사마천은 [史記]에서 이렇게 말했다. "길에 떨어진 물건도 줍는 사람이 없었으며(道不拾遺), 산에는 도적이 사라졌다(山無盜賊)."
[내용]왕찬의 자는 중선이고, 산양군 고평현 사람이다. 증조부 왕공과 조부 왕창은 모두 한대에 삼공을 지냈다. 부친 왕겸은 대장군 하진의 장사였다. 왕찬은 재능이 뛰어나 바둑을 두던 바둑판을 흩뜨려도 금방 원상태로 복귀할 수 있었다.
헌제가 잠시 서쪽으로 옮겼을 때, 왕찬은 장안으로 이주하였다. 그 당시 좌중랑장이었던 채옹은 재능과 학문이 탁월하여 조정에서의 관직도 높았고 귀한 신분이었다. 그가 살고 있는 마을은 항상 그의 집으로 향해 달려가는 수레로 가득 메웠으며, 언제나 집안은 빈객으로 가득했다. 채옹은 왕찬이 문밖에 와 있다는 말을 듣고는 신발을 거꾸로 신고 나가 영접하였다.
왕찬이 들어오자 빈객들은 그가 나이가 어리고, 용모도 왜소하였으므로 모두 매우 놀랐는데, 채옹이 말했다. "이 사람은 왕공의 손자로서 뛰어난 재주를 갖고 있으며, 나는 그만 못하오. 우리 집에 있는 서적과 문학 작품은 모두 그에게 주어야 하오." 채옹의 안목은 적중했다. 그러나 왕찬은 빼어난 재능으로 인하여 피살되고 말았다. '도시'와 같은 말로는 '시리', '도극' 등이 있다.
☞가욋것으로 봄. 안중에 두지 않고 무시함. 문제 삼지 않음. 불문에 붙임. [유] 치지도외(置之度外). [반] 문제시(問題視).
[출전]『後漢書』〈光武記〉 [내용]후한의 시조 광무제(光武帝)때의 일이다. 광무제 유수(劉秀)는 한(漢:前漢)나라를 빼앗아 신(新)나라를 세운 왕망(王莽)을 멸하고 유현(劉玄)을 세워 황제로 삼고 한나라를 재흥했다.대사마(大司馬)가 된 유수는 그 후 동마(銅馬) 적미(赤眉) 등의 반란군을 무찌르고 부하들에게 추대되어 제위에 올랐으나 천하 통일에의 싸움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이윽고 제(齊) 땅과 강회(江淮) 땅이 평정되자 중원(中原)은 거의 광무제의 세력권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벽지인 진(秦) 땅에 웅거하는 외효( )와 역시 산간오지인 촉(蜀) 땅의 성도(成都)에 거점을 둔 공손술(公孫述)만은 항복해 오지 않았다.중신들은 계속 이 두 반군의 토벌을 진언했다. 그러나 광무제는 이렇게 말하며 듣지 않았다. "이미 중원은 평정(平定)되었으니 이제 그들은 '문제시할 것 없소[度外視]."광무제는 그간 함께 많은 고생을 한 병사들을 하루 속히 고향으로 돌려보내어 쉬게 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예문 ▷ 이번 일이 도외시되어서는 안 된다. ▷ 봉건 시대의 결혼에는 남녀 간의 애정이 도외시되었다. ▷ 현실을 도외시하다 ▷ 그의 말을 도외시해서는 안 된다. ▷ 그는 소림을 결코 도외시하지 않았던 것이다. 도외시하기는커녕 자신의 처지로선 과람하다는 생각이었다.≪박경리, 토지≫
☞도원에서 의형제를 맺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사욕을 버리고 목적을 향해 합심할 것을 결의하다. [동]結義兄弟(결의형제) : 의형제를 맺음
[출전]『삼국지연의』 [내용] : 後漢 말기 환관들의 횡포가 몹시 심하여 정사가 혼란했고 흉년이 들어 백성들의 피폐함이 극에 달했다. 또한 황건적(黃巾賊)의 난이 일어나 국중이 시끄러울 때 유비(劉備)는 선조의 왕조를 되찾겠다는 큰 뜻을 품고「도원 안에서 세 사람이 향을 피우고 두 번 절하며 맹세하여 말하기를 생각건데 유비 관우 장비는 비록 성씨는 다르나 이미 맺어 형제가 되었으니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곤궁함을 구제하고 위태로움을 부축하여 위로는 국가에 보답하고 아래로는 백성을 편안하게 하리라.天地神明께 제사하고 같은 해 같은 달 같은 날 죽기로 맹세하고 의형제를 맺었다
☞이르는 곳마다 봄바람. 즉 좋은 얼굴로 남을 대하여 사람들에게 호감을 사려고 처신하는 사람. 가는 곳마다 기분 좋은 일.≒두루춘풍,사시춘풍,사면춘풍
[예문]헛간 입구를 통해서 우삼이와 문진이가 어깨를 출썩거리고 춤추는 게 보인다. 말똥이 : ……에그, 그 거드럭대는 꼬락서니 참 볼 수 없군! 풍년이 왔으면 먹을 꺼나 남을 줄 아니까 장관들이지. (가마니를 둘러쓰고 다시 눕는다.) 문진 : (어깨춤을 추고 헛간으로 나온다.) 우삼 : (문진이와 같이 따라 나오며)……유월 저승을 지나면 팔월 신선이 닥쳐 온다는 것은 이 때를 두고 한 말이지. 밋건덩 유월, 둥둥 칠월, 어정 팔월이란 말은 잘 헌 말이거든! 더구나 금년같이 철이 잘 들고서야 어느 빌어먹을 놈이 농사짓기를 마다하겠는가, 허허헛……텁석부리! 문진 : (어깨춤을 추며)……암, 도처에 춘풍이지 키키키…… 영실 : (술을 한 바가지 얻어키고 김치 가닥을 물고 헛간 입구에서 나오면서) 잘 먹구 갑네다. 술맛 좋은데. 국서, 우리집 타작은 모레니까 그저 바쁘잖거든 오오. 실컷 술 대접헐 테니까. (퇴장) 국서 : (나오며) 그래. 가구말구요<유치진의 소>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