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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속성-거룩하신 하나님, 이사야 6:3, 수요예배 연속설교(2011.7.20,27일)
사 6:3,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이 본문 말씀은 이사야 선지자가 보았던 환상 중에 여섯 스랍 천사들이 큰 소리로 높여서 찬양하는 대목이다. 천사들이 찬양할 때 성전이 흔들릴 정도였는데, 그 찬양의 내용은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는 것이다.
사도 요한이 훗날 환상 중에 보았던 하늘나라 천상 예배의 내용 중에도 동일한 찬양의 내용이 나온다.
“네 생물은 각각 여섯 날개를 가졌고 그 안과 주위에는 눈들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시라 하고”(계 4:8)
이처럼 “거룩하다”는 이유로 찬양이 하나님께 돌려지고 또 앞으로도 영원히 돌려질 것이다.
이러한 찬양이 돌려지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거룩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거룩하시다는 성경의 기록들이 참 많이 나온다.
출 15:11,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계 15:4,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그렇게 하나님의 속성이자, 찬송의 이유인 ‘거룩함’의 의미는 무엇인가?
흔히 거룩함을 ‘의로움, 성결함’으로 생각하곤 한다. 인간이 도덕적으로 성결하여 의로와지고 깨끗해지는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이러한 의미의 거룩함은 불충분하다. 그리고 오해의 소지가 많다.
‘거룩함’의 본래적 의미는 ‘구별하다’는 뜻에서 나왔다. ‘구별하여 떠나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악으로부터 떠나 있다. 더러움으로부터 떠나 있다. 세속으로부터, 불완전함으로부터 떠나 있다”는 듯이다. 구별되어짐, 이것이 ‘거룩함’의 근본적인 뜻이다.
그러므로 이런 의미에서 살펴볼 때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라는 뜻은 “하나님은 세상으로부터 떨어져 계신 분이라는 뜻이다.” 세상의 불완전함, 더러움, 악함으로부터 떨어져서 지극히 높으시고 완전하시고 영광스럽고 점과 흠도 없으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거룩함은 오직 하나님께만 속한 것이다. 하나님만이 온전히 거룩하신 분이시다. 다른 존재에게 이 거룩함이 부여되는 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상대적 거룩이지, 본질적 · 본래적 거룩일 수 없다. 성전도 거룩하고, 성도도 거룩한데, 이 모든 거룩함은 하나님의 거룩함으로부터 유출된 이차적 거룩이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그 거룩하신 성품적 속성 때문에 자연스럽게 다음 몇 가지의 성품적 특징을 갖고 계시다.
첫째, 거룩하신 하나님은 위엄을 갖고 계신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기에 위엄과 영광과 장엄함을 갖게 되신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홀로 하나님이시다.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이시며 그는 만물을 창조하신 장엄하신 분이시다. 홀로 크신 영광 중에 거하시는 분이시다. 이 크고 장엄하고 위엄 가득한 하나님 앞에 인간은 감히 가까이 나아갈 수 없다. 그를 본 자는 살 수 없다. 아무리 거룩한 성도라도 하나님의 은혜 속에 그의 임재를 경험한 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 떨며, 때론 죽은 자처럼 엎드려지곤 하였다.
욥은 동방의 큰 자로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의인 아닌가? 그런데 그가 고난을 겪자 고통 중에 많은 말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렇게 말이 많던 욥도 폭풍 가운데 하나님이 그를 찾아오시자 어떻게 변하였는가? 하나님의 현현 앞에서 그는 고백하기를 “보소서. 나는 비천하여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욥 40:3)라고 할 뿐이다.
거룩한 종 다니엘 역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자, 그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어 깊이 잠들어 버릴 뿐이다. 하나님의 사자 곧 주님이 찾아오시자 그는 몸에 힘이 없어지고 호흡이 남지 아니하고 감히 주님과 더불어 대화를 나눌 기력도 없어져버렸다(단 10:17). 선지자 이사야도 환상 중에 보좌에 앉으신 주님을 보자,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 6:5)라고 고백하였던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신약 시대에 예수님이 누구신지 깨닫자 베드로도 주님 발 앞에 엎드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5:8)라고 소리쳤던 것이다. 바울도 부활의 주님을 다메섹 도상에서 만나 뵙고 잠시 눈이 보지 않는 소경으로 변해버리는 충격에 휩싸이지 않았는가? 사도 요한도 밧모 섬에서 부활의 주님을 보자, 그 발 앞에 엎드려져 죽은 자 같이 되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계 1:17)
왜 이렇게 하나님을 본 자들은 이렇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가? 이는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인간은 죄인이요 하나님은 완전한 영광의 지존자요 인간은 지극히 비천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요 인간은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유한자일 뿐이다. 그러므로 거룩하신 하나님의 위엄을 아는 자는 결코 방자할 수 없다. 감히 대적할 수 없다. 감히 하나님을 향하여 입술로 능멸할 수 없다. 감히 교만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위엄을 모르는 자들은 그 무지와 교만 때문에 감히 하나님을 향하여 대적한다. 하나님과 교회를 업신여긴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이 교만하게 행한다. 그 결과 그들은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자취한다.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는 제사장 위임식을 마치고 나서 술을 마시고 여호와께서 명하지 않은 불을 담아 드렸다가 그 불이 나와 그들을 살라 즉시 죽임당하는 일을 겼었다(레위기 10:1~11).
바벨론 왕국의 마지막 왕 벨사살 왕은 술자리에서 방탕하게 주흥이 일어나니, 예루살렘 성전의 거룩한 그릇들에다가 술을 따라 마시고 은금목석의 우상을 찬양하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그 날 밤에 나라가 망하고 그 왕도 목숨을 잃어버리지 않았는가(단 5:1~31)?
유다의 웃시야 왕도 강성해지자 교만해져서 성전에 감히 들어가서 제사장만이 할 수 있는 분향을 시도하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문둥병이 이마에 생겨서 별궁으로 쫓겨나 외로운 생활을 하는 신세가 되지 않았는가?
신약 교회 시대에, 아나니야 삽비라 부부도 하나님의 위엄을 모르니까 밭 판 돈 절반을 숨기고 다 팔아 가져온 돈 전부라고 감히 속이려 들다가 성령을 속인 죄로 베드로 사도에게 사형이 선고되어 곧장 그 영혼이 세상을 떠나는 심판을 받지 않았는가?
이 모든 일들은 다 하나님의 위엄을 알지 못하기에 감히 하나님의 거룩을 범하였다가 무서운 심판을 당한 사례들이다.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는 점을 알아, 그의 위엄과 영광과 크심과 높으심을 깨닫게 된다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우리 인간의 미천함, 미약함, 죄의 부패함, 인간의 유한함을 절감하게 된다. 그래서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된다. 하나님 앞에 한걸음만 더 가까이 나아간다면, 두려워 벌벌 떨게 될 것이다. 그 앞에 나아가는 것을 얼마나 두려워하며 어려워하며 조심할 것인가?
아브라함이 그 조카 롯을 위하여, 소돔 성을 위하여 기도할 때 바로 그러한 경외심을 가진 채 그에게 가까이 나아가지 않았는가?
“...아브라함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티끌이나 재와 같사오나 감히 주께 아뢰나이다...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주여 노하지 마시옵고 말씀하게 하옵소서...아브라함이 또 이르되 내가 감히 내 주께 아뢰나이다...아브라함이 또 이르되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아뢰리이다....”(창 18:22~33)
하나님께서 그를 친구로 여기셨지만 그는 하나님 앞에 무엄하지 않았다. 방자하지 않았다. 하나님께 여러번 간구하는 용기가 있었지만 예의와 법도를 범하지 않았다. 이는 그가 하나님의 위엄을 익히 알았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오직 하나님만이 거룩하시다. 그는 지극히 크고 위대하시고 장엄하시고 존귀하시다. 그러므로 그에게 합당한 영광을 돌려야 한다. 그에게 위엄을 돌려야 한다. 그 앞에 겸손하라. 그 앞에서 방자하지 말라.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을 섬겨라. 그리하여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갈수록 거리끼지 아니하고 오히려 더 사랑받는 성도가 되라.
둘째, 거룩하신 하나님은 도덕적으로 의로우시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도덕적 측면에서 나타나신 것이 의로우심이다. 하나님은 죄가 전혀 없으시다.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옳으시다. 그의 행하심에는 불의가 없으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결코 죄와 불의를 용납할 수 없다. 죄인은 그 앞에 감히 설 수 없다.
그러나 아담의 후손들인 모든 인간은 다 죄 아래 있기에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감히 설 자가 없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기준에 아무도 용납될 수 없다. 그러므로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을 삼으시려고 행하신 것이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 사건이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값없이 의롭다 함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3~24)
한번도 죄를 범하신 적이 없는 완전한 의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된 우리 대신 십자가 위에서 우리 죄를 짊어지시고 우리 대신 정죄를 받으시고 형벌을 당하신 것이 골고다의 십자가 사건인 것이다. 그 결과 누구든지 예수님을 진심으로 믿기만 하면 예수님의 완전한의로움과 거룩함을 선물로 받아 누리는 은총을 얻게 된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이렇게 선언하고 있다.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라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고전 1:30,31)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그 믿음으로써 완전한 의로움과 거룩함을 선물로 받게 된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2장 9절에서도 이르기를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법정적으로 의롭게 되고 거룩하게 되었다면 당연히 삶의 현실에서도 거룩함의 열매를 맺어가야 한다. 만약 예수님을 믿어 거룩한 족속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이전과 같이 더럽고 악하고 불의하고 교만하고 속임수와 탐욕이 가득한 삶을 살아간다면 그 사람의 믿음은 거짓 믿음일 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고 거룩함을 얻었지만 삶속에서 실제적인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후 7:1)“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 12:4)
우리 모두,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가는 삶을 통하여 거룩하신 하나님께 속한 것을 입증하고 세상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가자.
셋째, 거룩하신 하나님은 거룩의 속성상 질투하신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그 영광을 다른 존재와 나눌 수 없다. 경배와 찬송과 영광과 사랑을 홀로 받으셔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우상을 섬길 수 없기에, 제 2계명을 선포하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까지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시느니라”(출 20:5)
그러므로 거룩하신 하나님을 모시는 성도들은 마땅히 두 마음을 품지 말고, 하나님만 섬겨야 한다. 다른 신을 섬기지 말고 우상을 만들거나 섬기지 말 것이며 무당을 찾지 말고 길흉을 점치지 말 것이다.
또한 거룩의 속성상 그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길 때 뜨겁게 섬겨야 한다. ‘질투’라는 단어는 ‘열심’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지극히 존귀하신 하나님이시다. 그 하나님을 섬길 때 뜨뜻 미지근하게 섬기기를 원치 않는다. 열정도 없고 헌신도 없고 감사도 없는 믿음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용납될 수 없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드리는 헌신이 진실하고 뜨겁고 새로워야 한다. 나뉘어진 사랑, 식어진 사랑, 형식적인 사랑, 뜨뜻미지근한 사랑은 단연코 거부하신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그를 향하여 온전한 사랑을 요구하신다. “네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다. ‘다한다’는 말은 세 번 반복되는데 원문을 보면, ‘나뉘지 않은 전체의 마음, 전체의 기질, 전체의 열정’을 말한다. 온전하게 드려진 사랑을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이다. 이것이 질투하는 하나님이 요구하는 사랑이시다.
엘리야도 그 신앙적 열심을 통하여 선지자의 대표가 되었다. 바울도 그 열심을 통하여 주님 앞에 인정받았다.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도 그 열심을 통하여 제사장의 직분을 자자손손 감당하도록 복을 받았다.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내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내 노를 돌이켜서 내 질투심으로 그들을 소멸하지 않게 하였도다 그러므로 말하라 내가 그에게 내 평화의 언약을 주리니 그와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의 언약이라 그가 그의 하나님을 위하여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속죄하였음이니라”(민 25:11~13)
이 시대 종교 다원주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자칫 하나님에 대한 열정을 잃어버리기 쉽다. 그러나 우리가 섬기고 있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기억하자.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오직 그분만이 참되시고 유일하시다. 그 질투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두 마음을 품는 자는 합당치 않다. 하나님과 우상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하나님과 재물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형식적인 신앙도 용납될 수 없다. 열정없는 헌신도 용납될 수 없다. 질투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시킬 수 있는 이 시대의 엘리야와 바울의 뜨거운 열정을 갖자.
넷째로, 거룩하신 하나님은 죄에 대하여 진노하신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죄를 묵과할 수 없다. 죄에 대하여 심판하실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진노 사상에 대하여 이 시대에 가르치는 것이 환영받는 분위기는 아니다. 하지만 성경 전체의 기록은 하나님은 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점이다.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점이다. 노아의 홍수 심판,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 가나안 땅의 심판, 앗수르에 의한 북 이스라엘의 심판, 바벨론에 의한 남 유다의 심판, 로마에 의한 예루살렘 성의 심판, 마지막 날의 심판에 대한 기록들이 가득하다.
‘진노’라고 말하면 우리는 자칫 인간의 충동적이고 비이성적인 격분을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는 분별있고 자제력 있는 공정한 법정적 심판을 가리킨다. 마지막 날의 심판을 ‘진노의 날’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이 진노의 날에도 결코 비이성적인 심판이 자행되는 것이 아니다.
로마서 2장 4절 이하에 이런 말씀이 있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며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라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롬 2:4~11)
여기서 알 수 있지만, 하나님의 진노는 절제하지 못하고 폭팔하는 것이 아니라 오래 참으심을 겸비한 진노라는 점이다. 하나님은 인자하심과 길이 참으심과 용납하심이 있다. 그러나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하는 마음을 인하여 마지막 날의 진노를 스스로 쌓는 것이다. 그 날에 악한 자들에게 합당한 보응을 주시고 선을 행한 자에게 영광과 존귀와 평강을 주실 것이다. 행한 대로 갚으시는 공정한 심판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서운 진노를 그 날에 악인들에게 발한다고 해서 그것을 결코 잔인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해낸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오래 참으심을 우리는 기억한다. 그러나 그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고 얼마나 패역하고 원망하고 불평하고 거슬러 악을 행하였는가. 그 때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그들을 심판하실 수밖에 없었던 여러 일들을 우리는 기억한다. 이 모든 과정을 직접 목도하였던 모세는 그의 노년에 지은 시편 90편에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누가 주의 노여움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의 진노의 두려움을 알리이까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 90:11,12)
그렇다. 주의 노여움의 능력을 알고 주의 진노의 두려움을 아는 것이야말로 참된 지혜다. 주의 진노를 묵상하는 자야말로 지혜로운 자다. 그는 죄를 두려워할 것이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게 될 것이다. 그는 진노의 날에서 우리를 구워하실 구주 예수의 은혜를 인하여 진정 감사할 것이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크고 무서운 그 진노를 날마다 묵상하는 것이야말로 인생을 지혜롭게 살아갈 수 있는 좋은 습관일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알면 알수록 그를 경외할 수밖에 없다. 더 이상 죄를 가까이 할 수 없다. 더 이상 미적지근한 신앙을 유지할 수 없다. 세월을 낭비할 수 없다.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기 위하여 거룩하고 진실하고 뜨거운 신앙 생활을 하게 된다.
성령이여, 우리 마음을 열어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그 크고 위대하시고 영광스럽고 죄로부터 완전히 멀리 계시며 죄를 심히 미워하시고 크게 진노하심을 날마다 마음 깊이 알아가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 구원을 온전히 이루어가는 참된 신앙인이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