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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세 이제현(李齊賢):
공(公)의 생몰(生沒-태어나고 죽음) 연대는 정해년(丁亥年 1287 충렬왕 13년)에 태어나시고
정미년(丁未年 1367 공민왕 16년)에 돌아가시니 수 81세이다.
고려 말의 문신(文臣)으로 정치가(政治家)이며 성리 학자(性理學者)이며 시인(詩人)이다.
초명(初名)은 지공(之公), 자는 중사(仲思), 호는 익재(益齋), 실재(實齋), 역옹(轢翁)이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보통 익재 문충공이라 칭한다.
아버지는 검교정승(檢校政丞) 진(王+眞)이시고 어머니는 진한국태부인 박씨 대능직 인육의 따님
(辰韓國太夫人朴氏戴陵直仁育女)이시다.
백이정(白 正)의 문인이며 익재공파(益齋公派) 파조(派祖)이시다.
1301년 (辛丑年 충렬왕27년) 15세에 성균시(成均試)에 장원하고 이어 문과(文科)에 급제
1303년 (癸卯年) 권무 봉선고 판관(權務奉先庫判官) 연경궁 녹사(延慶宮錄事) 등을 거쳐
1308년 (戊申年) 예문 춘추관(藝文春秋館)에 등용되고 제안부 직강(齊安府直講)을 지낸 후
1309년 (己酉年) 사헌부 규정(司憲府糾正)에 역임되고
1310년 (庚戌年 충선왕 2년) 선부산랑(選部散郞-이조, 예조, 병조가 합친 관아)
1311년 (辛亥年) 전교시승(典校侍丞-서적 관리) 삼사판관(三司判官-전곡의 출납과 회계)등을
역임하였다,
1312년 (壬子年) 25세에 서해도 안렴사(西海道安廉使-서해도는 황해도)로 나갔다가
그 해 성균관 악정(成均館樂正) 풍저창 제거(豊儲倉提擧-조제조와 같음. 곡식 종이 등)를 지냈다.
1313년 (癸丑年) 내부부령(內府副令) 풍저감두곡(豊儲監斗斛-술,장, 꿀 같은 직조를 맡는 곳) 을
역임하고
1314년 (甲寅年 충숙왕 1년) 백이정의 문하에서 정주학(程朱學)을 공부하였다.
이해 원나라에 있던 충선왕이 만권당(萬券堂)을 세워 익재공을 불러들이자 연경(燕京)에 가서
원나라 학자 요목암(姚牧菴-요수姚燧의 호), 조자앙(趙子昻-조맹부趙孟膚의 字),
염자정(閻子靜-閻復의 字), 원복초(元復初-元明善의 字) 등과 함께 고전을 연구했다.
1315년 (乙卯年) 선부의랑(選部議郞)이 되고 가을에 성균제주(成均祭酒)가 되었다.
1316년 (丙辰年) 서촉(西蜀) 사신. 전교사판사(典校寺判事) 진현관제학(進賢館提學)에 승진
1317년 (丁巳年) 선부 전서(選部典書)로 원나라에 가서 상왕(上王)의 생일을 축하했다.
1319년 (己未年) 충선왕을 수행하여 중국 강남지방을 유람하였으며
1320년 (庚申年) 34세 때 지밀직사(知密直事)에 올라 단성익찬공신(端誠翊贊功臣)이 되고
공거(工擧)직도 맡아보았다,
원나라에 가서 고려왕부 단사관(高麗王府 斷事官- 왕부에 병사를 두어 다스리는 자.
종1품從一品)을 제수 받았다.
1322년 (壬戌年) 원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는 도중에 충선왕이
빠이앤투그스(伯顔禿古思)의 모함을 받고 서번(西蕃)으로 유배되자
1323년 (癸亥年) 다시 원나라에 가서 부당함을 밝혀 1323년 풀려 나오게 했다.
1324년 (甲子年) 광정대부 밀직사사(匡靖大夫密直司使)에 승진하고
1325년 (乙丑年) 추성양절공신(推誠亮節功臣)이 되고
첨의평리(僉議評理) 정당문학(政堂文學)이 되었다.
1326년 (丙寅年) 삼사사(三司事)로 전임
1330년 (庚午年) 충혜왕이 복권되자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전임되었다가 얼마 후 그만 두었다.
1333년 (癸酉年 충혜왕 복위 4년) 원나라 사신이 왕을 포박해 가므로
글을 올려 사면을 요청했고
1336년 (丙子年) 삼중대광 예문관 영사(三重大匡藝文館領事)에 제수 받고
김해군(金海君)에 봉해졌다.
1339년 (己卯年) 심왕(瀋王) 고(暠)가 모역(謀逆)하다 실패하면서
원나라에 충숙왕을 모함하여 원사(元使), 두린(頭麟)등이 왕을 잡아가자
이때 연경에 가서 사실을 해명하고
이듬해 귀국 후 시골에 은거하고 락옹비설(락翁稗設-력옹패설)을 저술하였다.
1344년 (甲申年) 겨울 충목왕이 즉위하자 부원군으로 승진시키고
효사관영사(孝思觀領事)를 제수하고 서연(書筵-이조의 경연)의 스승이 되었다.
1346년 (丙戌年) 충렬왕 실록(忠烈王實錄)을 편수
1348년 (戊子年) 삼사판사(三司判事)가 되었다.
충목왕이 죽자 제조경사도감(提調經史都監)으로 원나라에 가서 충정왕의 승계을 요청했고,
1351년 (辛卯年) 공민왕이 즉위하자 우정승 권서 정동성사(右政丞權署征東省事)로 발탁되어
도첨의 정승(都僉議政丞)을 제수 받았고
1352년 (壬申年) 추성량절 동덕 협의찬화 공신(推誠亮節同德協義贊化功臣)에 올랐다.
원종공신 조일신(趙日新)이 자기보다 윗자리에 있는 것을 시기함을 알고
세 번이나 사표를 제출하여 사직했더니
일신이 야간에 궁중에 침입하여 난리를 일으키다가 주륙되자 다시 우정승에 임명되었다.
1353년 계사년(癸巳年) 정월에 사직하였다가 5월에 부원군으로서 공거(공거)를 맡았다.
1954년 (甲午年) 12월 다시 우정승이 되었다.
1955년 (乙未年) 나이 70세로 그만 두었다. 김해후(金海候)에 봉하였다
12월에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랐다.
1957년(丁酉年) 5월에 치사(致仕-나이가 많아 벼슬을 떠나는 것)하고
저술과 학문 연구에 전심하였다
1362년 (壬寅年) 홍건적(紅巾賊)의 침입 때 왕을 청주(淸州)에 호종(扈從)하고
이 해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해졌고 만년에 은퇴한 후 왕명으로 실록(實錄)을 편찬했다.
1367년 (丁未年) 공민왕 16년. 81세의 수를 누리고 타계하였다.
공민왕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고
경주(慶州)의 귀강서원(龜岡書院), 금천(金川)의 도산서원(道山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 초배는 길창국부인 안동 권씨이며 도첨의 정승 영가부원군 문정공 부의 따님으로
(配吉昌國夫人安東權氏都僉議政丞永嘉府院君文正公 溥女)
서종(瑞種)과 달존(達尊) 두 아들과 3녀를 두었다.
* 이배는 봉의화 택주 수춘국부인 춘천 박씨이며 사복정 거실의 따님으로
(配封義和宅主壽春國夫人春川朴氏司僕正居實女) 아들 창로(彰路)와 3녀를 두었다.
* 삼배는 서원군부인 통직랑 지서주사 중린의 따님으로
(配瑞原郡夫人通直郞知徐州事仲隣女) 2녀 를 두었다.
* 이외에 따님 여섯 분이 더 족보에 기록되어 있고 모두 명문거족과 혼인하였다.
★ 이중 수춘국부인이 낳은 셋째 따님이 공민왕(恭愍王) 후비(后妃)인 혜비(惠妃)이시다.
○ 원나라 진감여(陳鑑如)가 공(公)의 초상화를 그리고 탕병용(湯炳龍)이 찬(贊)을 썼는데
그 필적과 그림이 국보로 지정되어 현재 국립미술관에 보관되고 있다.
○ 당대의 명문장가(名文章家)로 외교문서에 뛰어났고 정주학(程朱學)의 기초를 확립했으며
원나라 조맹부의 서체(書體)를 고려에 도입하여 널리 유행시켰다.
○ 저서로는 익재난고, 익재집, 역옹패설, 효행록, 서정록, 사략 등이 있다.
* 익재난고(益齋亂藁) 소악부(小樂府)에 17수의 고려의 민간 가요를 한시(漢詩) 칠언절구로
번역하여 이것이 오늘날 고려 가요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 익재집(益齋集)의 익재진자찬(益齋眞自贊)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진찬(眞贊)이란 진영(眞影- 초상화)의 여백에 인물에 대한 느낌을 적은 글이다.
진자찬은 그려진 자신의 초상화에 스스로 자신에 대한 쓴 글을 말한다.
* 경주이씨가훈(慶州李氏家訓)으로도 불린다.
獨學而陋 聞道宣晩 (독학이루 문도선만)
不幸由己 何不自反 (불행유기 하불자반)
何德于民 四爲國相 (하덕우민 사위국상)
幸而致之 祇遠衆謗 (행이치지 기원중방)
不揚之貌 又何寫爲 (불양지모 우하사위)
告爾後嗣 一覩三思 (고이후사 일도삼사)
誡其不幸 早夜以勉 (계기불행 조야이면)
毋苟其幸 庶幾知免 (무구기행 서기지면)
於益齋先生眞自贊(어익재선생진자찬)
(한글 풀이)
홀로 공부하여 고루하였고, 도를 들은 것은 자연히 늦었다.
불행은 모두가 자신이 만든 것, 어찌하여 스스로 반성하지 않는가?
백성에게 덕 보인 것, 무엇이기에 네 번이나 대신이 되었단 말이냐.
요행으로 이렇게 된 것이기에 다만 모든 비난을 불러들였다.
못난 내 얼굴 그려 두면 무엇하나, 너의 후손에 알리기 위함이다.
한번 쳐다보고 세 번씩 생각하여 그런 불행을 저지를까 경계하여서
아침마다 저녁마다 노력하여라.
만일 그런 요행 바라지 않는다면 행여나 불행을 면하게 되리,
- 익재선생 진자찬에서-
첫째, 평소에 침착하지 못하게 빨리 말하거나 갑자기 당황하는 얼굴빛을 짓는 일이 없으며,
낮고 더러운 말을 하는 일이 없어라.
둘째, 선비가 사흘동안을 서로 만나지 못하면 반드시 그 동안에 학문이 부쩍는 것에
눈을 비비고 서로 대하라.
셋째, 나의 뜻인들 어찌 옛사람의 뜻과 같지 않겠는가.
다만 수덕(手德)이 옛사람에게 미치지 못할까 두렵다.
넷째, 과거를 보는 것은 작은 재주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으로는 나의 덕을 크게 기르기에는 부족하다.
다섯째, 무겁고 단단한 것은 하늘에서 얻은 것이오,
씻어서 새롭게 하기는 사람에게 매였다.
○ 익재공 제현(益齋公 齊賢)의 묘소위치(墓所位置)
익재공 제현(益齋公 齊賢)의 부(父) 동암공 진(東菴公 진)과 익재공 제현(益齋公 齊賢)과
밀직공 창로(密直公 彰路)의 묘소(墓所)는 지금의 북한(北韓)에 있다.
그 당시(當時)의 묘소 주소(墓所住所)는
김천현 장단군(金川現 長湍郡) {장단군(長湍郡)을 개성부(開城府)라고도 함.} 소남면(小南面)
지금리(知琴里) 원촌(院村)이며 일명(一名) 우봉 도리촌(牛峰挑李村)에 있으며
동암공 진(東菴公 진)의 묘소(墓所)는 방향(方向)으로 볼 때 계좌(癸坐)이고,
그 옆에 익재공 제현(益齋公 齊賢)의 묘소(墓所)는 자좌(子坐)이며,
밀직공 창로(密直公 彰路)의 묘소(墓所)는 약간 떨어져 옆에 산능선(山稜線)에 있다.
지금 묘소가 있는 북한(北韓)의 행정구역상(行政區域上) 지명(地名)은
북한당국에 의해 두 차례 행정구역 조정이 있었는데,
1946년 황해도 장풍군 소담리,
1952년 개성시 장풍군 십탄리로 지명이 바뀌었다.
근래에 황해북도 장풍군 서원리로 바뀌었다.
☆ 계좌(癸坐) ; 정남방향(正南方向)에서 서쪽으로 약 15도 방향(方向)을 말함.
자좌(子坐) : 정남방향(正南方向)을 말함.
○ 익재문충공묘지명(益齋文忠公墓誌銘) 역문(譯文)
지정(至正-元順帝의 年號) 二十七年 정미(丁未-공민왕36년 1367) 추(秋) 七月에
추성량절 동덕협의 찬화공신 벽상삼한 삼중대광 계림부원군 영예문관 춘추관사 익재 선생 이공
(推誠亮節同德協義贊化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鷄林府院君領藝文館春秋館事益齊先生李公)이
병환으로 자택에서 하세(下世) 하였으니 향년이 八十一이다.
예조(禮曹)에서 시호를 문충공(文忠公)이라 하고
十月에 유사(有司)가 의식을 갖추어 우봉현 도리촌(牛峰縣 桃李村)에 장례를 지냈다.
九年 후 동(冬-겨울) 十月에 현릉(玄陵-공민왕릉)의 묘정(廟庭)에 배향 했다.
공(公)의 휘는 제현(齊賢)이요,
자는 중사(仲思)이며 성은 이씨(李氏)이니
신라시조 혁거세(新羅始祖 赫居世)의 좌명공신(佐命大臣)인 이알평(李謁平)이 시조(始祖)이다.
그 후에 소판 휘 거명(蘇判 居明)이 병부령 휘 금현(兵部令 金現)을 낳았고
병부령이 삼한공신 태수 휘 금서(三韓功臣 太守 金書)를 낳았다.
신라왕 김부(新羅王 金溥)가 토지를 바치고 고려조(高麗朝)에 들어와서
태조의 딸 낙랑공주(樂浪公主)에게 장가들어 딸을 낳았으니
이 딸이 휘 금서(金書)의 아내가 되어
휘 윤홍(潤弘)을 낳았고 휘 윤홍이(潤弘)이 휘 승훈(乘訓)을 낳았으며
휘 승훈(承訓)이 휘 주복(周復)을 낳고, 휘 주복(周復)이 휘 칭(稱)을 낳고,
휘 칭(稱)이 휘 치련(侈連)을 낳고, 휘 치련(侈連)이 휘 총섬(寵暹)을 낳고,
휘 총섬(寵暹)이 휘 춘정(春貞)을 낳고, 휘 춘정(春貞)이 휘 현복(玄福)을 낳고,
휘 현복(玄福)이 휘 선용(宜用)을 낳고, 휘 선용(宜用)이 휘 승고(升高)을 낳고,
휘 승고(升高)가 문림랑 상의직장 동정(文林朗尙衣直長同正) 휘 득견(得堅)을 낳고
휘 득견(得堅)이 증좌복시(贈左僕射) 휘 핵(핵)을 낳고,
좌복시(左僕射-휘 핵)공이 검교정승(檢校政丞) 익문정공(諡文定公) 휘 진(王+眞)을 낳았는데
재능참봉(戴陵慘奉) 박인육(朴仁育)의 따님 진한국부인(辰韓國夫人)에게 장가들어
지원(至元-元世祖의 年號) 정해년(丁亥年-충렬왕13년 1287) 12월 경진(庚辰)에
公(휘 제현齊賢)을 낳았다.
공(公)이 어릴 때부터 숙성하여 成人과 같았다.
이미 글을 지을 줄을 알아서 작가(作家)의 기상이 있었다.
대덕(大德-元成宗의 年號) 신축(辛丑-충렬왕27년 1301)에
공(公)의 나이가 十五인데 정상시 선 성균관(鄭常侍 膳 成均館) 학생을 시험 보았다.
응시한 자들이 자기의 재능을 믿고 서로 자부하다가
공(公)의 지은 바를 듣고 움추리어 감히 앞을 다투지 못하더니 공(公)이 과연 일등(一等)이 되었다.
이 해에 국제 권공 부(菊齊權公溥- 국제공 권부)와 열헌 조공 간(悅幹趙公簡-열헌공 조간)이
예조(禮曹)에서 시험을 보이매 공(公)이 또 병과(丙科)에 합격했고
권공(權公-권부)이 그 따님을 아내로 주었다.
공(公)은『이것이 조그만 말기이므로 나의 덕량을 크게 축적하지 못한다.』하고
여러 서적(書籍)을 토론하여 널리 관통하고 정밀히 연구하여 정당으로 절충하니
문정공(文定公-공의 아버지 휘 진王+眞)께서 크게 기뻐하며 말씀하되
『하늘이 혹 우리 가문을 크게 창성 시킬 것인가!』하였다.
계묘(癸卯- 17세)年에 임시적으로 봉선고 판관 정경궁록사(奉先庫判官廷慶宮錄事)를 맡았고
무신년(戊申年- 22세)에 선출되어 예문관(藝文館)에 들어가니
관내(館內) 사람들이 미루어 사양하고 감히 글을 의논하지 못하였다.
그 해 겨울에 제안부직강(齊安府直講)으로 옮기고
기유년(己酉年- 23세)에 사헌규정(司憲糾正)에 발탁되었다.
경술년(庚戌年- 24세)에 선부산랑(選部散郞)으로 옮기고
신해년(辛亥年- 25세)에 두 번째 전교사승(典校寺丞)에 전직하고 세 번 판관(判官)을 맡으매
있는 곳마다 직책을 다 하였다.
황경(皇慶- 元仁宗 연호) 임자(壬子- 忠宜王4年 1312)에 선발하여
서해도안렴사(西海道按廉使)가 되매 옛 사람의 직간(直諫)하는 풍토가 있었다.
성균악정(成均樂正)에 승진되었다가 겨울에 제거풍저창사(提擧豊儲倉事)가 되었고
계축년(癸丑年)에 부령내부(副令內部)가 되었는데
풍저(豊儲)에서 두곡(斗斛)을 감독하고 내부에서 뇌수(瀨銖)와 척촌(尺寸)을 맡아보매
말질과 되질을 철저히 감독하고 저울눈의 한눈과 자질의 한 치와 한 자도 정확하게 하여
아무런 난색이 없이 처리하니
사람들이 이르기를
『이공(李公)은 불기(不器-그릇이 커서 일정되지 않음)의 군자라고 말 할 수 있다.
헤아리지 못할 기국이라』했다.
충선왕(忠宜王)이 원(元)의 인종(仁宗)을 보좌하여 내란(內難)을 정돈하고
무종(武宗)을 영립(迎立)하여 즉위하도록 하였다.
이에 원나라 인종과 무종의 두 조정에서의 충선왕에 대한 총애의 대우가 겨룰 이가 없었다.
따라서 충선왕이 아들 축숙왕(忠潚王)에게 전위(傳位)하기를 청하고
태위(太尉-원나라 영의정)가 되어 원(元)의 경랑(京郞)에서 머물면서
만권당(萬券堂)을 세우고 학문을 연구하고 스스로 즐기며 이르기를
『서울(元)에 있는 문학(文學)의 선비는 모두 천하에서 선발되었는데
우리 부내(府內)에 그런 사람이 있지 않으니 이는 나의 수치라』했다.
공(公)이 부름을 받고 왕도(王都-심양)에 이르니
연우(延祐-元仁宗 年號) 갑인(甲寅-忠潚王一年 1314) 正月이다.
을묘년(乙卯年)에 선부의랑(選部議郞)에 옮기고
가을에 성균좨주(成均祭酒)를 배수하고 인하여 의랑(議朗)을 겸직했다.
병진년(丙辰年)에 서촉(西蜀)으로 사신을 갔는데
이르는 곳마다 지은 시가 사람의 입에 회자(膾炙)되었다.
이해에 전교사 판사(典校寺 判事)가 되고
정사년(丁巳年)에 선부전서(選部典書)를 배수하고
을미년(乙未年)에 왕이 향강남(香江南)에 내려오니
누대(樓臺)와 풍물(風物)이 좋은 곳으로 안내하여 흥을 만나고 회포를 풀었는데
매양 조용히 말하기를
『이 사이에 이생(李生- 익재공)이 없을 수 없다.』했다.
경신년(庚申年)에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로 단성익찬공신(端誠翊贊功臣)의 호를 내리었으며
지공거(知貢擧)로 있을 때에 선비를 얻었다고 칭찬이 있었으니 대저 공의 나이 34세였다.
문정공(門定公) 및 진한국부인 박씨(辰韓國婦人 朴氏)와
외당 권공(外鏞 權公)의 부부(夫婦)가 모두 건강하였으므로
공이 잔치를 열어 술을 올리니 온 세상에서 부러워했다.
이 해에 고려왕부 단사관(高麗王部斷事官)을 재수 받았고
지치(至治-元英宗 年號) 임술년(壬戌年-忠潚王 9年 1322年) 겨울에
원(元)나라 수도에서 서울로 오다가 도착하지 못하여
충선왕(忠宜王)이 참소를 당하고 서번(西蕃)으로 쫓겨났다.
공(公)이 원나라에 가서 배알하고 잘못을 밝히고 왕이 풀려났다.
왕래하는 도중에 시를 지어 읊었는데
충분(忠憤-충성스런 분노)의 마음이 애연하게 발로되었다.
태정(泰定-元普宗의 年號) 갑자년(甲子年-忠淵王十一年 1324)에
광정대부밀직사사(匡靖大夫 密直司事)를 가자(加資)하고
을축년(乙丑年)에 공신의 호를 다시 내리어 추성량절(推誠亮節)이라 하고
두 번 첨의평리 정단문학(僉議評理 政堂文學)에 전직되었다가
병인년 삼사사(丙寅年 三司事)에 옮기었다.
천력(天曆-元明宗 年號) 경오년(庚午年)에 충혜왕(忠惠王)이 국권을 잡으매
다시 정단문학(政堂文學)이 되었다가 얼마 안되어 파직되었다.
지원(至元-元順帝 年號) 병자년(丙子年-忠淵王5年 1336)에
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서 김해군(金海君)을 봉하고 영예문관사(領藝文館事)를 받았다.
을미년(乙未年) 봄 二月에 충숙왕(忠潚王)이 승하하였다.
○ 공(公)이 15세 때 과거에 오름으로부터 명성이 한 세상을 덮었다.
조정에 선 이래로 오로지 문장(文章)을 맡았고
외직(外職)을 지낼 때에도 예문춘추(藝文,春秋)의 양관(兩館)에 속관이 되었고
김해 계림(金海 鷄林)의 양부(兩府)에 군(君)을 봉함에도 일찍이 관직을 떠나지 않았는데
오직 충정왕(忠定王) 3년 동안에는 이에 참정하지 않았으니
공(公)이 일찍이 상소(上疏)하여 현릉(玄陵-恭愍王)을 세우기를 청한 까닭이다.
* 충정왕과 공민왕을 두고 누구를 왕으로 세울 것이냐를 두고
익재공이 공민왕을 왕으로 세우기를 청하였는데 원나라의 간섭으로 충정왕이 왕이 되었으므로
이에 충정왕 3년 동안 벼슬을 하지 않았음을 말하는 것이다.
허수아비 같은 충정왕 보다는 원나라의 간섭을 배제하고 자주하려는 공민왕의 깊이를 읽고
일찍 공민왕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생각을 가진 것이었다.
명(銘- 돌에 새김)에 이르기를
*명(銘)- 금석(金
또는 마음에 새겨 교훈으로 삼고자 하는 어구
"천지가 정기를 모아 공(公)이 태생하였고 규벽(奎壁)이 빛을 내었으니 공(公)이 이에 드날리었네.
이름은 천하에 가득했고 몸은 해동(海東)에 살았도다.
도덕(道德)의 우두머리요, 문장(文章)의 종주(宗主)이네.
북두(北斗)와 태산(泰山)같으니 창려(昌黎)의 한퇴지(韓退之)이고 광풍(光風)과 제월(霽月)같으니
춘릉(春陵)에 주렴계(周濂溪)로다.
네 번 국권(國權)을 잡았고 나이는 팔순이 넘었는데 기린과 봉황새 같은 상서요, 서초와 거북같이 신통하였네.
공로는 사릉(社稜)에 존재하고 덕택은 생민(生民)에게 흘렀다.
종묘(宗廟)에 배향 되었으니 슬퍼함과 영화로움이 따를 이가 없구나.
오직 자손(子孫)들은 충효(忠孝)를 따를지어다.
앎이 없다고 이르지 마오.
공(公)이 구원(九原)에 계시니라.
★ 익재공의 '재(齋)'자와 제현의 '제(齊)'자를 구분하여 사용하여야 한다
益齋 李齊賢(익재 이제현)
호는 익재(益齋), 휘(諱-죽은 사람의 이름을 말할 때)는 제현(齊賢)이다.
고려말기 시인(詩人)이시고 성리학자(性理學者)이시고 정치가(政治家)이신 훌륭한 선조님이시다.
중시조로부터 17세(世)이다.
익재의 '재(齋)'자가 제현의 '제(齊)'자가 비슷하다.
아래쪽||안에 '재'는 '示'자가 들어가고 '제'자는||안에 '〓'자가 들어간다.
익재의 재(齋)자가 제현의 제(齊)자와 비슷하니까 모두 '제'자로 읽어 '익제파'라고 잘못 말하고 있다.
익재(益齋)의 '재-齋'자는 '제'자가 아니고 '재'이다.
그러니까 (익재공. 익재파, 익재공파, 익재공후)라고 읽고 써야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