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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5. 예종실록[3]
예종 1권, 즉위년(1468 무자 / 명 성화(成化) 4년) 10월 27일(계축)
반역을 꾀한 강순·남이·조경치·변영수 등을 환열시키고 7일동안 효수하다
임금이 창덕궁(昌德宮) 숭문당(崇文堂)에 나아갔다. 밀성군 이침(李琛)·영순군 이부(李溥)·영의정 이준(李浚)·하성군 정현조(鄭顯祖)·고령군 신숙주(申叔舟)·상당군 한명회(韓明澮)·중추부 영사 심회(沈澮)·좌의정 박원형(朴元亨)·창녕군 조석문(曹錫文) 등과 도총관(都摠管)·승지(承旨)·대간(臺諫)·사관(史官) 등이 입시하였다. 교위(校尉)로 하여금 남이를 뜰에 나치하게 하고, 도총관 홍응(洪應)·도승지 권감(權瑊)에게 명하여 묻게 하니, 남이가 대답하기를,
“신이 어려서부터 궁마(弓馬)를 업(業)으로 삼아, 만일 변경에 일이 있으면 먼저 공을 세워 국가를 돕는 것이 신의 뜻입니다. 신은 본래 충의지사(忠義之士)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네가 ‘충의지사’라고 일컬으면서 어찌하여 성복(成服) 전에 고기를 먹었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병이 들었기 때문에 먹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반역(反逆)한 이유를 묻게 하니, 남이가 사실대로 대답하지 아니하므로, 이에 곤장을 때렸더니 남이가 큰 소리로 말하기를,
“원컨대 우선 천천히 하소서. 신의 꾀한 일을 말하자면 깁니다. 원컨대 한 잔 술을 주시고 또 묶은 끈을 늦추어 주면 하나하나 진달하겠습니다.”
하므로, 명하여 술을 내려 주고 묶은 끈을 늦추게 하니, 남이가 말하기를,
“신이 과연 반역을 꾀하고자 하였습니다. 유자광(柳子光)과 더불어 이야기한 말이 모두 옳습니다.”
하고, 강순(康純)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저 이는 바로 신의 당류입니다. 지난해 9월에 세조께서 승하한 뒤에 마침 성변(星變)이 있었고 강순이 밀성군(密城君)과 더불어 도총부(都摠府)에 입직하였는데, 신이 가서 보았더니 곧 밀성군은 안으로 들어가고 강순이 신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바야흐로 이제 어린 임금이 왕위를 이었는데 성변이 이와 같으니 간신이 반드시 때를 타서 난을 일으킬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되면 우리들은 세조의 은혜를 받아 장군이라 이름하였으므로 반드시 먼저 화(禍)를 입을 것이니, 장차 어떻게 할 것인가?’ 하기에, 신이 응답하기를, ‘약한 자가 선수(先手)함이 가하겠는가?’ 하니, 강순이 옳게 여겼습니다. 다른 날에 강순과 더불어 같은 날 입직(入直)하였는데, 강순이 신의 숙직하는 곳에 이르러 서로 더불어 《고려사(高麗史)》를 열람(閱覽)하다가 인하여 강조(康兆)166) 가 그 임금 송(誦)167) 을 시해(弑害)하고 순(詢)168) 을 세운 것을 논하기를, ‘그때는 잘못이라고 하였으나 후세에서는 잘했다고 하니, 지금으로 보면 형세는 달라도 일은 같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계책이 이제 이미 정하여졌다. 장차 우리가 임금으로 삼을 이는 누구일까?’ 하고, 인하여 영순군(永順君)을 들자, 강순이 말하기를, ‘영순군과 귀성군(龜城君)은 한 몸뿐이고 그 후사(後嗣)가 미소(微少)하다. 내가 일찍이 보성군(寶城君)과 더불어 국가의 일을 말하였는데 보성군이 탄식하지 아니함이 없었고, 그 아들 춘양군(春陽君)이 세 번 우리 집에 왔다가 갔으므로 이도 또한 마음에 없는 것이 아니니, 우리들의 계책으로는 이만한 것이 없다. 그 뒤에 우리들이 공을 이루고 물러가 쉬면 사람들 가운데 누가 옳지 못하다고 하겠는가?’ 하였습니다. 다른 날에 강순이 다시 말하기를, ‘성상께서 일찍이 여러 재상을 인견하고 산릉(山陵)의 길흉(吉凶)을 물었는데, 내가 천어(天語)169) 의 정녕(丁寧)함을 들으니 참으로 명철(明哲)한 임금이다. 어떤 간신이 있어 그 사이에 틈을 내겠는가? 우리 무리는 마땅히 마음을 달리하지 말고 힘써 도울 뿐이다.’ 하였습니다. 또 먼젓날 성상께서 풍양(豊壤)에 거둥하여 산릉 터를 보고 종친·재추들과 더불어 길흉을 논할 때에 강순이 신에게 눈짓하여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말하지 아니하던가? 너도 천어(天語)를 들었느냐?’라고 하였습니다.”
하고, 장차 또 말을 하려는 듯하더니 유자광이 뒤에 있는 것을 보고 마침내 다시 말을 하지 아니하였다. 강순에게 물으니, 강순이 숨기므로, 곤장을 때렸더니 강순이 말하기를,
“신이 어려서부터 곤장을 맞지 아니하였는데, 어찌 참을 수 있겠습니까? 남이의 말과 같습니다.”
하였다. 취초(取招)하도록 명하니, 강순이 붓을 당겨 즉시 이름을 쓰지 아니하고 남이를 돌아보며 꾸짖기를,
“내가 어찌 너와 더불어 모의하였느냐?”
하니, 남이가 말하기를,
“영공(令公)이 말하지 아니하였다고 하는가? 나와 같이 죽는 것이 옳다. 또 영공은 이미 정승이 되었고 나이도 늙었으니 죽어도 후회가 없을 것이나, 나 같은 것은 나이가 겨우 스물 여섯인데 진실로 애석하다.”
하고, 한탄하기를,
“영웅의 재주를 잘못 썼구나!”
하였다. 강순이 곧 복초(服招)하였고, 또 당여(黨與)를 물으니 강순이 없다고 말하였다. 장신(杖訊)하기를 명하자 강순이 말하기를,
“신이 어찌 매질을 참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 좌우의 신하를 다 들어서 당여라고 하여도 믿겠습니까?”
하므로, 남이에게 강순의 당여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신도 알지 못합니다. 다만 강순이 일찍이 말하기를, ‘홍윤성(洪允成)은 기개(氣槪)가 활달하여 더불어 일을 의논할 만한 자라.’ 하고는 말을 하려고 하다가 말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강순이 또 말하기를, ‘본향(本鄕) 보령(保寧)의 군사 가운데 당번(當番)으로 서울에 있는 자가 1백여 인(人)인데, 만약 때에 임하여 말하면 반드시 따를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또 남이에게 난을 일으킬 계획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창덕궁·수강궁 두 궁은 얕아서 겉으로 드러나 거사(擧事)할 때에 바깥 사람이 알기가 쉽기 때문에 산릉에 나아갈 때에 사람을 시켜 두 궁을 불지르게 하고 성상이 경복궁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려서, 12월 사이에 신이 강순과 더불어 일시에 입직(入直)하기를 약속하여, 신은 입직하는 겸사복(兼司僕)을 거느리고, 강순은 입직하는 군사를 거느리고 거사하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또 당여를 물으니, 남이가 민서(閔敍)·변영수(卞永壽)·변자의(卞自義)·문효량(文孝良)·고복로(高福老)·오치권(吳致權)·박자하(朴自河)·조경치(曹敬治) 등을 하나하나 들어서 헤아리고, 모의에 참여시키려고 하다가 미처 말하지 못한 자가 20여 인이라고 하였다. 조경치를 나치(拿致)하도록 명하여 곤장 30여 대를 내려 고신(栲訊)하여도 불복하였다. 다시 남이에게 물으니, 남이가 말하기를,
“신이 만약 말을 하고 조경치가 다만 ‘저 말이 옳다.’고 하면 믿을 것이 못되고, 조경치가 스스로 말하여 신의 말과 같은 뒤에야 믿을 수가 있습니다.”
하므로, 다시 조경치를 매질하니, 그 말하는 바가 과연 남이의 말과 같았다. 남이가 말하기를,
“주상께서 성명(聖明)하신데 신이 복(福)이 적어서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또 신과 강순은 모두 일등 공신(一等功臣)이니, 원컨대 원방(遠方)에 유배(流配)하든지 아니면 죽음을 내리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네가 이와 같을 것을 알지 못하고 모반(謀反)하였느냐?”
하고, 곧 백관을 모으도록 명하여, 강순·남이·조경치·변영수·변자의·문효량·고복로·오치권·박자하를 저자에서 환열(轘裂)170) 하고 7일 동안 효수(梟首)하게 하였다. 이날 보성군(寶城君) 이합(李㝓)과 아들 춘양군(春陽君) 이내(李徠)를 잡아 와서 임금이 합과 내에게 물으니, 합(㝓)이 대답하기를,
“지난번 강순이 노비 문서(奴婢文書)의 일로 신의 집에 이르렀는데, 신이 술을 대접하였더니, 강순이 마시던 자배(磁杯)171) 를 소매에 넣고 가기에 신은 그가 술 그릇을 좋아해서라고 생각하였고, 또 백자 대종(白磁大鍾)을 그 집에 보냈으며, 모의한 바는 없습니다. 신은 일찍이 그 집에 가지 아니하였습니다.”
하고, 내(徠)는 말하기를,
“신은 상왕께서 승하하기 전에 한 번 찾아갔을 뿐입니다.”
하니, 명하여 술을 먹이고 석방하였다. 임금이 교서(敎書)를 내리기를,
“내가 덕이 박함으로써 국가의 어려움을 만나 경경(煢煢)172) 하게 상중(喪中)에 있어 오직 임무를 다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였는데, 뜻밖에 간신이 나의 처음 임금이 된 때를 틈타서 갑자기 흉한 꾀를 꾸며, 몰래 불령(不逞)한 무리를 모아 사직(社稷)을 위태롭게 하기를 도모하여 화기(禍機)가 거의 일어나게 되었는데, 오히려 천지(天地)와 조종(祖宗)의 도우심을 힘입어 역모(逆謀)가 저절로 실패하여 모두 천주(天誅)를 받았으니, 이에 난(亂)을 평정한 시초를 당하여 마땅히 죄를 용서하는 어짐을 베풀어야 할 것이다. 이달 27일 매상(昧爽) 이전으로부터 모반 대역(謀反大逆)·모반(謀叛)과 자손으로서 조부모·부모를 때리거나 욕한 것과 처첩으로서 지아비를 죽이기를 꾀하거나 노비가 주인을 죽이기를 꾀한 것과 고독(蠱毒)173) ·염매(魘魅)174) , 고의로 살인을 꾀한 것과 단지 강도·절도 및 강상(綱常)에 관계되는 일을 범한 것을 제외하고는, 이미 발각된 것이나 발각되지 아니한 것이나, 이미 결정된 것이나 결정되지 아니한 것이나 모두 용서하여 면제한다. 아아! 화란(禍亂)을 진압하여 종사(宗社)를 튼튼히 하였으니 이미 비상한 경사가 있고, 관대한 은전(恩典)을 펴서 허물을 씻으니 막대한 은혜를 내림이 마땅하다.”
하였다.
[註 166]강조(康兆) : 고려 현종 때의 무신. ☞
[註 167]송(誦) : 목종(穆宗). ☞
[註 168]순(詢) : 현종(顯宗). ☞
[註 169]천어(天語) : 임금의 말. ☞
[註 170]환열(轘裂) : 두 수레가 양쪽에서 끌어 당겨서 인체(人體)를 찢어 죽이던 형벌. 거열(車裂). ☞
[註 171]자배(磁杯) : 자기로 된 술잔. ☞
[註 172]경경(煢煢) : 외롭고 걱정스러움. ☞
[註 173]고독(蠱毒) : 독약을 먹이는 것. ☞
[註 174]염매(魘魅) : 남을 저주하는 것. ☞
예종 1권, 즉위년(1468 무자 / 명 성화(成化) 4년) 10월 29일(을묘)
재추들과 대간에서 이합 부자에게 죄주기를 청하였으나 윤허치 않다
하동군 정인지(鄭麟趾)·봉원군 정창손(鄭昌孫)·고령군 신숙주(申叔舟)·좌의정 박원형(朴元亨)·창녕군 조석문(曹錫文)·영성군(寧城君) 최항(崔恒)·상당군 한명회(韓明澮)·대사헌 양성지(梁誠之) 등이 이합(李㝓)과 이내(李徠)에게 죄주기를 청하였다. 대간(臺諫)에서 또 상소하기를,
“신 등이 합(㝓)의 부자를 법대로 처치하자는 일을 가지고 천총(天聰)을 두 번이나 번독하였는데, 어찰(御札)을 내리기를, ‘요사이의 일은 모두 간신이 한 것이고 보성군(寶城君) 등이 관여한 바가 아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 등이 되풀이하여 생각해 보아도 인신(人臣)은 사사로이 사귀는 의(義)가 없으니, 사사로이 하면 반드시 죽이는 것인데, 합은 강순(康純)과 같이 총관(摠管)이 되었으므로, 만일 공적(公的)인 말이 있으면 마땅히 공청(公廳)에서 함께 할 것이고 반드시 사가(私家)에 서로 왕래할 것이 아닙니다. 합(㝓)은 종실(宗室)의 지친(至親)이고 강순은 군사를 맡은 대장(大將)이면서 사사로이 왕복하였으니, 이것이 이미 벨 만한 것인데, 하물며 강순이 사사로운 말에 먼저 불궤(不軌)한 말을 발하여 합(㝓)의 뜻을 시험하였고 합도 말을 듣고 마음으로 깨우쳐서 곧 그 아들 내(徠)를 보내어 강순의 집에 왕래하였으니, 그 사귀고 통한 자취를 강순도 숨길 수 없고 합의 부자도 덮을 수 없습니다. 역적 강순이 합을 끼고 난(亂)을 선동한 정상을 남이가 밝게 말하였으니 합이 역모에 참여한 것은 심히 명백하므로, 의당 대법(大法)으로 처치하여 신민(臣民)의 분함을 쾌하게 하여야 할 것인데, 전하께서는 다만 종친과 재추를 생각하고, 두렵고 의심스러운 마음을 품고서 종사(宗社)의 만세(萬世)의 계책을 생각하지 아니하여 난적(亂賊)의 머리를 천주(天誅) 밖에 두니, 신 등의 통분(痛憤)만이 아니라 대소 신민(大小臣民)이 실망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옛날을 상고하건대, 대의(大義)에 관한 것은 임금이 사사로이 할 수 없습니다. 원컨대 전하는 대의로써 결단하고 법에 의거하여 죄를 정하면 종사(宗社)에 매우 다행하겠으며, 만세(萬世)에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그대로 따르지 아니하였다. 다시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용서하였는데 다시 죄를 더하면 무엇으로 신의(信義)를 삼겠는가? 다시 말하지 말라.”
하였다.
예종 1권, 즉위년(1468 무자 / 명 성화(成化) 4년) 10월 30일(병진)
대간에서 이합 부자의 죄를 청하였으나 윤허치 않다
대간(臺諫)에서 상소하기를,
“신 등이 이합(李㝓) 부자(父子)의 일을 가지고 혹은 상소로 혹은 말로 여러 번 천총(天聰)을 번독하였으나 윤허를 얻지 못하고, 물러가서 생각하건대 일이 이보다 큰 것이 있겠습니까? 신 등은 감히 그만둘 수 없는 정성을 가지고 청(請)이 이루어지기를 기약하니, 굽어 보시기를 엎드려 바랍니다. 신 등은 그윽이 생각하건대, 성왕(成王)181) 과 주공(周公)182) 은 옛 성현(聖賢)입니다. 관숙(管叔)·채숙(蔡叔)은 성왕에게는 숙부이고 주공과는 형제로서 친하고 사랑하는 정이 지극하지 않음이 없으나, 그런데도 관숙·채숙이 한 번 유언(流言)을 퍼뜨려 왕실(王室)을 동요(動搖)시키자 성왕과 주공이 사정(私情)을 두지 못하였으니, 이는 다름이 아니라 대의(大義)는 친함이 없는 것이니, 종사(宗社) 만년의 계책을 위하여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제 합의 부자는 종척(宗戚)으로서 군사를 맡는 장수와 더불어 사사로이 서로 왕복하였으므로 이로써 안율(按律)하면 죄가 마땅히 베어야 하니, 법대로 처치함이 마땅한 것의 하나입니다. 적신(賊臣) 남이(南怡)가 강순(康純)의 말을 진술하기를, ‘합의 부자가 내 말을 듣고 우리 집에 내왕하였으니 그 마음이 있는 듯하고, 또 아들이 많으므로 끼고서 우두머리로 삼는 것이 좋다고 하더라.’ 하였으므로 이는 역모에 참여함이 심히 명백하니, 법대로 처치함이 마땅한 것의 하나입니다. 이미 역당(逆黨)의 추대한 바가 되어 그 고신(告身)을 거두고 죄명(罪名)이 이미 이루어져서 마침내 그만둘 수가 없으니, 법대로 처치함이 마땅한 것의 하나입니다. 대저 악함을 없애는 데에는 반드시 그 근본에 힘쓸 것인데 이제 당류는 죄를 받고 우두머리는 그대로 있으니, 길에 다니는 사람이 지목하기를, ‘저이는 역적 아무의 머리다.’라고 하게 되면 어찌 신민(臣民)과 더불어 한 하늘을 같이하겠습니까? 법대로 처치함이 마땅한 것의 하나입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일을 꾀하기를 하늘로부터 한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꾀[謀]는 여러 사람을 따르면 천심(天心)에 합한다.’라고 하였으니, 이제 온 나라 신민이 모두 말하기를, ‘베어야 마땅하다.’고 하니, 하늘의 뜻을 가히 알 것입니다. 신 등이 여러 번 번독하기를 마지 아니하는 것은 성인(聖人)에게 질문하여도 의혹이 없으며 백세(百世)를 기다려도 의심이 없는데, 전하는 어찌하여 대의(大義)로 단정하여서 왕법(王法)을 바르게 아니하십니까? 신 등은 알지는 못하나 전하께서 종척(宗戚)이라고 하여 차마 결단하지 못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예로부터 난(亂)을 꾀하는 자는 반드시 소원(疏遠)한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고 귀하고 가까운 종척 사이에서 많이 나는데, 어찌 사사로운 은혜로써 대의를 폐할 수 있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성왕(成王)과 주공(周公)의 일을 우러러 생각하시고 신민의 통분한 정을 굽어 살피셔서 대의로써 결단하고 법으로 처치하면, 종사에 매우 다행하고 만세에 매우 다행할 것입니다.”
하였다. 상소가 들어가자 명하여 대간(臺諫)들을 불러 음식을 먹이고, 임금이 말하기를,
“먼 지방에 안치함은 가하나 죄는 더할 수 없다. 내가 이미 용서하였는데 이제 만약 죄를 더하면 이는 신의(信義)를 잃는 것이다.”
하니, 대사헌(大司憲) 양성지(梁誠之) 등이 다시 아뢰기를,
“합이 비록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진실로 또한 죄가 있는데, 하물며 더불어 사귀고 통한 것이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먼젓날 어찌하여 분경(奔競)을 엄하게 금하지 아니하여 서로 사귀고 통하게 하였는가?”
하니, 양성지가 대답하기를,
“세조께서 일찍이 전교하기를, ‘분경을 금하는 것을 고집하지 말라.’고 하였고, 또 본부(本府)에 서도(胥徒)183) 가 많지 아니하여 두루 금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도승지 권감(權瑊)에게 이르기를,
“상정소(詳定所)로 하여금 서도를 더 주게 하라.”
하고, 또 양성지 등에게 이르기를,
“물러가서 생각하라.”
하였다.
[註 181]성왕(成王) : 주(周)나라 임금. ☞
[註 182]주공(周公) : 성왕의 숙부. ☞
[註 183]서도(胥徒) : 서리(胥吏). ☞
예종 1권, 즉위년(1468 무자 / 명 성화(成化) 4년) 10월 30일(병진)
강순의 아들 강공이의 아내는 태비의 친속이므로 연좌하지 말게 하다
의금부(義禁府)에 전지(傳旨)하여 강순(康純)의 아들 강공이(康孔伊)의 아내는 연좌(緣坐)하지 말게 하였으니, 태비(太妃)의 친속(親屬)이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