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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미술
로마人
로마는 현재 세계적인 관광지로 유명합니다. 이태리를 먹여살리는것은 물론 자동차, 패션등의 산업도 있지만 관광수입은
과거에도 현재도 그리고 미래에도 그나라를 영원히 먹여살릴수 있을 겁니다(유가가 오르던 금값이 오르건 상관없이)이러한
뛰어난 관광자원을 만들어준 그들의 조상 로마인! 그들에 대해 간단히 알아 보도록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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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두상(BC1) 대리석 36.5cm
로마(ROME)의 어원은 로마국가를 탄생시킨 그들의 건국신화에서 찿을수 있습니다.로물루스와 레무스라는 쌍둥이 형제는
숙부의 왕위찬탈로 바구니에 담겨져 강에 버려집니다. 어느 늑대가 바구니를 건져 두아이를 젖을먹여 키우다 나중에 목동들
에게 양육되는데 이들이 나중에 커서 양치기들의 대장이되어 숙부를 죽이고 약 3천명 정도의 남자들을 모아 지금의 로마자리에 그들의 작은 나라를 만들게 됩니다. 하지만 곧 동생과 세력다툼이생겨 형인 로물루스는 동생 레무스를 죽이고 주변의 작은 부족들을 합하여 점점 나라를 키워가며 초대 로마 왕이 됩니다. 로마라는 도시이름은 바로 로물루스의 이름을 어원으로 나온 겁니다.
그들은 특이하게도 건국초기부터 현재의 3권 분립과 같은 정책을 펼쳤습니다. ,(왕/원로원/시민회)..신생약소국인 로마가 살아가기 위해선 돋단적인 왕권중심정책은 먹혀들지 않는다는걸 알았던거죠, 이때부터 이미 로마의중심적 성격은 드러나는데요.
보편적이고 적과도 화합하는 실용성과합리성 그리고 인간중심의 문화는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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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이져 두상(AD37-42) 대리석(50.8cm)
현재의 로마는 장화같이생긴 이태리 반도의 정가운데 강을 끼고있어 꽤 좋은 지역으로 생각 되지만 로마건국시 사실 이땅은
버려진 땅이었습니다. 반도끝 남쪽은 이미 그리스인들이 상업지역으로 번성하고 있었고 북쪽은 에트루리아인들이 강력한
국가를 만들어 살고있었습니다. 두국가 모두 반도 내부의 로마지역까지 올 필요가 없었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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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우스 베르우스 황제 마스크 (AD 166-170) 대리석 36.8cm
신생로마는 버려진 이곳에서 국가를 만들어살며 차츰 그 영역을 넓혀 갑니다. 당시의 가장 중요한 군사적, 경제적목표를 위해서는 빨리 인원을 늘리는게 중요했는데 이를 위해 로마는 끊임없는 전쟁을 계속합니다. 전쟁에서 승리후 그들은 상대국가의
시민들을 죽이거나 노예화하지 않고 로마 시민권을 부여해 승전국의 사람으로 만드는 아주 특이한 정책으로 더욱 빨리 나라의 기틀을 잡기 시작합니다, 이는 그이후 현재까지도 실시된적이 없는 특이한, 정말 로마적인 정책이었으며 이것이 바로 1,000년 가까이 로마제국을 유지할수있었던 그들의 융통성 이었습니다.
그들의 정책은 일관되게 이어져 마침내 케사르때는(시이저)그 영역이 모든 서유럽과 현재 라인강 서쪽전부 그리고 북부 아프리카까지 화대되는 대 로마제국을 구성하게 됩니다(아래 지도 참조)
기
기원전 5세기경부터 500년까지 고대 로마를 중심으로 로마제국 전 지역에서 전개되었던 미술. 로마의 미술은 일찍이 이탈리아반도로 이주해 온 에트루리아인의 미술과 반도 남부에 많은 식민지를 가지고 있었던 그리스인의 미술, 이 두 요소를 이어받아 이것들을 융합하여 발전시킨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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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트루리아의 작품
에트루리아인 로마가 세력을 얻기 전에는 남부 이탈리아에 있는 여러 그리스 식민지 외에 에트루리아가 정치·경제·문화면에서 이탈리아의 중심지였습니다.문자는 해독할 수 없으며, 도시국가를 바탕으로 종교, 경제 연맹을 맺고 있었습니다.그리스인과 경쟁했는데 BC 7세기말~BC 6세기 초에 가장 번영했으며 영토 역시 같은 때 가장 팽창했으나 그 뒤 카르타고인과 그리스인에게 지중해의 주도권을 넘겨주었으며, 곧 켈트족이 침략해옴으로써 한풀 꺾였고, 그 뒤 세력이 약해진 에트루리아족은 BC 3세기 중엽 로마에 귀속되어 독립 도시국가로서의 형식적인 자치권만 유지하다가 BC 90년 로마에 완전히 흡수되었습니다.
로마 미술은 그 형식의 대부분이 그리스 미술에 바탕을 두었지만, 실용적이고 현실적이라는 점에서는 지극히 에트루리아적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에트루리아의 영향에서 출발하였으나 에트루리아가 점차 세련된 그리스 미술의 영향을 받게 되자 로마도 서서히 그 형식을 계승하고 다시 공화정(共和政) 말기부터 직접 헬레니즘 세계와 접촉함으로써 그리스의 영향은 로마 세계를 풍미하여 그레코로만 시대를 출현케 하였습니다.
그리스 패권을 둘러싼 알렉산더 대왕에 의한 헬레니즘 제국과 카르타고의 싸움이 치열할 무렵 이탈리아 반도에서는 작은 마을에서 출발한 로마 공화국이 그리스인들보다 정치력과 군사적으로 우세한 힘을 기르기 시작하여 마침내 그리스를 정복하기에 이르릅니다.
로마인들의 그리스 정복은 평소 그리스 미술에 절대적 동경을 가지고 있던 로마인들에게 그리스의 미술을 단번에 접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그들의 우수한 문화 유산을 바탕으로 로마인들은 국제적 성격을 띤 미술을 전파하게 됩니다.
그리스와 로마 미술이 매우 유사하게 보이는 것은 로마 시대 때 활동하던 미술가들이 대부분 그리스 출신이던가 거기에서 훈련받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이고, 로마인들은 그리스 시대의 미술품을 복제하거나 수집하였습니다. 그러나 로마인들이 그리스 미술을 그대로 복제한 것만은 아니고 그들의 필요에 따라 그리스 형식을 변형하였습니다.
고대 그리스 미술이 외부적이고 이상적인 아름다움에 치중하였다면 로마 미술은 현실적이고 실용성이 강조된 시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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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로세움은 많은 영화의 장면들 덕분에 검투사들의 싸움터로, 기독교인의 박해장소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공공의 행사장소였습니다. 72년 공사를 시작해 80년에 완공되었습니다.그리스인은 주로 열주형태를 사용한데 반해 로마인은 아치를 주요 건축 요소로 적용하였습니다. 아치 사이에 그리스 식의 기둥이 있지만 건축적인 기능을 하지 않고 단지 장식적인 역할을 할 뿐이죠. 내부는 현대의 운동 경기장같이 스타디움 형식으로 되어 있어서 관람하기에 편리하도록 하였습니다. 한번에 5만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아주 실용적인 건축물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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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우스상 4세기경 그리이스 작품의 카피(로마)
앞서 설명했듯이 로마시대의 많은 조각품들은 그리스시대의 작품을 많이 모방 또는 그대로 재현하였습니다.
중기이후 로마의 조각은 나름대로의 독창성과 새로운 작업형태가 나오긴 하지만 여전히 그 작업의 근원은 그리스 조각 이었습니다.
로마를 여행하시면 수많은 조각과 훌륭한 건축물에 감탄을 금치 못하게 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건축물(특히 성당건축물들, 바티칸)은 르네상스시대때의 작품들이고 로마시대의 작품은 개선문이나 콜로세움, 묘지, 폼베이 유적등입니다. 조각물 또한 르네상스시기 작품이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무려 1천년의 시차가 나는 작품들이 한지에서 가장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는것,,참으로 대단한일이 아닐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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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황제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 철동 기마상.
청동 기마상으로는 유일하게 남아있는 로마시대 작품 입니다.
무게가 1톤에 달하는 이 청동기마상은 유일하게 남은 로마의 청동상이라고 합니다. 원래 로마황제들의 청동기마상은 22개나 되었다고 하는데, 기독교도들이 부수거나 녹여 다른 목적으로 사용하는 바람에 모두 사라져 버렸답니다.
그런데 이 동상만은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청동기마상으로 착각을 하여 다행이도 살아남게 되었다네요. 아이러니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기마상은 파괴되었다는거죠.
【조각】
조각은 그리스의 영향이 특히 뚜렷한데 BC 2세기 후반에 로마가 그리스를 정복한 이래 파시테레스를 비롯한 많은 그리스의 조각가가 로마에 초대되어 이곳에서 작품을 제작하였습니다.
로마시대 초기의 걸작 중의 하나인 《로마의 웅변가》(루브르미술관 소장)는 아테네에서 이주한 클레오메네스의 작품이라고 합니다.
로마의 평화를 확립한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대의 조각, 예컨대 《프리마 포르타의 아우구스투스》(바티칸미술관 소장), 《아라 파키스》(평화의 제단)의 부조(浮彫) 등은 그리스의 고전적 단정함과 로마의 사실성을 융합한 초기의 걸작입니다.
로마 조각의 경이적인 분야는 초상조각입니다.
초상에서는 입상(立像)과 더불어 새로이 흉상·기마상·묘비상이 제작되었으나, 이것들은 모두가 단순한 용모의 모방이 아니라 개개 인물의 성격을 예리하게 추구하였습니다. 이는 그리스 미술에서는 보기 어려운면입니다.
잘 알려진 작품으로는 키케로, 카이사르의 흉상,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입상,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기마상 등이 있습니다.
로마인은 거대한 개선문이나 기념주를 세우고 그들이 전쟁에 승리한 역사적 사건을 주제로 한 부조로 장식하였습니다.
티투스 황제의 개선문, 트라야누스 황제의 기념주(BC 113) 부조는 그 대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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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오니소스 황제의 석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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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초대황제 아우구스투스상입니다. 우리가 그리스 조각에서 본 폴리클레이토스, <창을 들고 가는 사람>(4-8)과 비교해 보면 로마인들이 그리스 미술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금새 알 수 있습니다. 즉 몸의 포즈와 형태를 그대로 수용한 채 아우구스투스의 갑옷을 입히고, 익명의 얼굴이었던 그리스 두상자리에 초상을 넣음으로써 황제의 상으로 바꾸었으니 필요에 의한 변형인 것입니다.
【회화】
로마시대의 회화는 79년 베수비오화산의 폭발로 갑자기 파묻힌 2개의 도시, 즉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의 유적에 거의 완전한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화산재 덕분에 보존이 가능했던 이지역이외의 회화작품은 불행히도 찿아보기 힘든 편입니다.
프레스코와 모자이크로 된 이러한 회화 양식은 분명히 헬레니즘시대의 회화를 반영하여 감각적·신비적·일상적인 주제가 사실적인 기법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폼페이 출토의 모자이크화 《이수스의 전투》(나폴리미술관 소장)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궁중화가 필로크세노스의 걸작을 모자이크로 박은 것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고전 말기의 양식을 전해주는 귀중한 작품입니다.
프레스코로 된 《디오니소스의비의(秘儀)》(폼페이)와《텔레포스의유아》(나폴리미술관)는 헬레니즘시대의 양식에 로마적인 취향이 가미된 새로운 양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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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실에 그려진 프레스코 벽화
막혀있는 벽에 마치 창이있는것처럼 정교하게 그림을 그려서 입체감과 원근감을 함께 표현 하였습니다.
이러한 뛰어난 회화기법은 믿어지지 않지만 그리스도교 예술이 시작되며 급격히 퇴색하여 아예 잊혀지기까지 합니다.
다시 이러한 원근법과 입체감이 뛰어난 회화작품을 보려면 무려 600여년의 세월이 흘러가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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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타라를 치며 앉아있는 여인(기원전 40-50년) 프레스코 벽화 (186 x 186 cm)
정확한 인물묘사와 인물의 풍부한 표정 그리고 안정된 구도를 보십시오.
역시 위에 적힌대로 이러한 회화를 다시보려면 많은 시간이 경과되어야 하며
천년도 훨씬 흘러간 후에야 르네상스의 대가들에 의해 온전히 복구되기 시작하여 활짝 꽃피기 시작 합니다.
【공예】
로마인이 공예 분야에서 탁월한 기량을 나타낸 것은 유리그릇과 카메오입니다. 전자는 오리엔트에서 사용되었던 유리불기 제조법을 이어받아 체크무늬·모자이크·유리 등 고도의 기술을 사용하여 술잔이나 병 따위의 여러 용기를 만들어냈습니다.
《포틀랜드 베이스》(대영박물관 소장)는 암청색의 투명유리 바탕에 불투명한 우유빛 유리를 씌우고 조석(彫石) 기법으로 그림 무늬를 부조한 것입니다.
또 카메오에는 《생트 샤펠의 카메오》(파리의 카비네 데 메다용) 《아우구스투스의 카메오》(빈미술사미술관 소장) 등의 뛰어난 작품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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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반지와 팔찌(BC1~AD4)
정교한 세공술을 보십시요. 거기에 금장술까지, 이미 이시대때 인류의 공예는 발전의 한계점까지 이르렀는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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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카메오 초상 41–54년
라틴어cameo
카메오는 일반적으로 다른 색을 띠는 2개의 층을 가진 보석(보통 마노, 오닉스, 붉은줄 마노)으로서,
그중 한 층에 상을 조각하여 바탕의 다른 층 위에 두드러지도록 한 것이다. 카메오는 같은 종류의 재료에
음각(陰刻)으로 조각하는 인탈리오(intaglio)와는 반대되는 것이다. 다량의 카메오가 BC 3100년경인
초기 수메르 시대로부터 로마 문화의 쇠퇴기까지, 르네상스 시대와 18세기 신고전주의시대부터 만들어져
전해지고 있다.주로 붉은줄 마노, 오닉스, 유리 모조보석으로 만든 로마 카메오는 대개 초상(肖像)과
신화적인 장면으로 조각되었으며, 종종 예술가들이 서명하기도 했다. 고전 문화에 대한 관심이 증대함에
따라, 카메오를 조각하는 기술은 르네상스기에 다시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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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 볼 (3~4세기) Bowl, 3rd–4th century A.D. 높이:9.2 cm
지금부터 1700여년전 만들어진 유리 그릇..그 정교함이 놀랍지 않습니까?
【건축】 로마 미술의 특질을 가장 적절하게 나타낸 것은 건축입니다.
"모든길은 로마로 통한다"
라는 말이있듯이 로마인은 토목, 건축 분야의 대가들이었습니다.
또한 그들이 많은 국가를 전쟁으로 통합하고 수세기 동안 대제국을 유지할수 있었던 가장 큰 물질적 무기는 바로 이"길"이었습니다.
그들은 부지런히 로마에서 점령지까지 이어지는 길들을 닦았으며 이길들은 로마군의 군수물자 뿐만 아니라 그들의 문화까지 같이
전 유럽에 전파하는 효과를 발휘할수 있었습니다.
실용성을 중시한 로마 건축은 외관미를 추구한 그리스 건축과는 달리 거주성(居住性)에 기초를 두고 내부 공간을 충실히 하였습니다.
기둥과 들보로 이루어진 그리스 건축과 에트루리아의 분묘나 성문에 사용한 아치형식 또는 궁륭식(穹式)을 채용함으로써 수많은 기념비적 건축물을 만들어냈습니다.
건축양식으로서의 오더(order:고전 건축에서 형식·장식 등을 규정한 건축 양식의 규범)로서는 그리스의 도리스·이오니아·코린트의 3양식에 덧붙여(전편 그리스미술에서 이미 공부 한거죠?) 새로 이오니아식의 주두(柱頭)와 코린트식의 주두를 짜맞춘 콤포지트식, 그리고 에트루리아 건축에서 유래한 토스카나식을 발전시켰습니다.
한편 구조면에서는 아치형이나 궁륭식을 채용함으로써 돌이나 벽돌을 쌓아올리고 다시 그 위에 분말로 된 일종의 시멘트를 사용하는 공법을 도입함으로써 거대한 건물의 건조를 가능하게 하였습니다.
로마 건축의 또 다른 큰 특징은 건축의 다양성입니다.
신전을비롯하여장대한바실리카·극장·경기장·별장·목욕장·개선문·
기념주(記念柱)·수도·도로 등이 역대 황제에 의하여 세워졌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으로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바실리카 및 개선문, 카라칼라 황제의 목욕장,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별장, 콜로세움, 트라야누스 황제의 기념주, 갈의 수도교(水道橋)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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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노의 개선문(ARCH OF CONSTANTINE) 312-315
로마 황제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영토확장과 그것의 유지였습니다. 그리고 전쟁에 승리를 하면 개선문과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그리스인들이 전쟁에 승리한 후 신전을 지은 것과 큰 대조를 보이죠? 그리스인은 승리 후 신에게 감사드렸다면 로마인은 이를 황제의 업적으로 기린 것입니다.
로마인의 종교와 그리스도교의 공인
로마인들은 그리스인에게서 문화뿐만 아니라 종교적인면(신)도 대부분을 받아들여 그들의 개성을 살려 이어 받았습니다.
로마인들의 신은 다신교(제우스를 비롯한 12신)와 인간의 형상(인간성에 중점)을 바탕으로 한 신이라는점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미 유다교를 중심으로 하나이신 전능한 유일신 구세주를 믿고 있었습니다.
이때 민중들 사이에서 태동된 크리스도교는 다신교인 로마에도 그들만의 유일신을 믿는 유대인에게도
절대로 환영받을수 없는 종교였지요. 다만 핍박받고 고통받는 로마의 하층계급과 점령지 지역의 주민들에겐
정말이지 획기적이고 현실적인 새로운 종교로 급부상하게 되며 로마제국의 강력한 견제로 많은 고통을 받지만
결국 민중종교로 자라나 콘스탄티누스 황제- 313년 -밀라노 칙령에 의해 그리스도교를 공인하게 됩니다.
그것 뿐만 아니라 콘스탄티누스 황제 그 자신도 그리스도교가 되었습니다.
왜 이러한 상황이 일어났을까요 ?
그리스도교가 탄압받음에도 불구하고 제국 전역에 퍼져있는 그리스도교인들의 세력이 너무 커졌기 때문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로마(제국)는 다민족 국가로 구성되어 모든 많은 민족고유의 종교를 초월한 보편성을 가진 종교가
제국을 일체화시키는것과 제국통치에도 편리하단 생각에 의해서였습니다.
지극히 로마인 적인 현실적인 감각이 결국 그리스도교를 로마의 통치이념이자 국교로 선정하게 만든것입니다.
이를 계기로 로마의 문화와 함께 그리스도교는 전 유럽으로 빠르게 전파되며 다음 세기를 장식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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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tacomb, 카타콤베
이 명칭의 유래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3세기 후반에 성 베드로와 성 바울로의 유해를 잠시 동안 안장했던 것으로 유명한
산세바스티아노 성당(로마시 근처 아피아 街道에 있음)의 지하묘지에 처음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용어는
의미가 확대되어 로마 시 주변의 모든 지하묘지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그뒤 다시 또 의미가 확대되어 원래 매장을
위해 만들어진 것의 여부와 관계 없이 굴과 방으로 이루어진 모든 지하 시설물들을 한데 묶어 가리키는 용어가 되었다.
카타콤은 그리스도교도나 로마인만이 유일하게 만들어낸 것은 전혀 아니다. 사람이 죽었을 때 돌로 된 지하의 굴 속에
매장하는 관습은 고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지중해권의 어느 지역에서든지 카타콤을 발견할 수 있다.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카타콤은 매장을 비롯해 여러 가지 다양한 기능을 했다. 사람이 죽었을 경우 지하에 있는
가족 납골당에서 매장일과 기일을 맞아 죽은 자를 위한 의식을 치렀다. 초기 그리스도교 교회 시절 장례식이 있을 때마다
수반되었던 성체성사도 이 납골당에서 치러졌다.
이상으로 로마미술을 정리 합니다.
로마의 가장큰 역사적 의미중 두가지를 뽑으라면
저는 제국의 형성과 그리스도교의 인정으로 하고 싶습니다.
이유는 제국의 형성으로 문화의 본격적인 글로벌화(국제화)가 가능해졌고
유일신과 우상숭배를 금지하는 그리스도교의 인정으로 이전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종교와 파생되는 예술을 만들게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감사 합니다.
첫댓글 현대 법의 기원도 로마 시민법에서 비롯됩니다. 제1조 Pacta sunt servanda.(약속은 지켜져야 한다.)는 우리 민법 제1조 제1항 信意誠實(신의성실) 원칙의 기초이기도 합니다.
로마의 미술은 언제 봐도 부럽습니다.로마인들의 정치적 감각과 배타적이지 않은 생각이 그들의 훌륭한 문화를 창조해 오늘날 후손까지 잘 먹여 살리나봅니다. 미술시간에 선생님께서 우리가 초가집 짓고 살때 그들은 3,4층 건물을 올렸다고 부러워하시던 말씀이 생각납니다. 예전에 배워두신게 다 기억나시나요. 요한 보스코 형제님 고맙습니다. 복 많이 받으실겝니다.
야~정말 설명과 함께 미술 감상을 하니 영화를 보는 것처럼 재밌다~ 로마는 정말 가보고 싶은 나라인데 그들의 적을 죽이지 않고 자신의 국민으로 삼아 더 큰 제국으로 만들었다는 것도 현명하고 로마는 끊임없이 전쟁을 하는 나라라는 인식과 그리스 미술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 조각들과 미술품들이 더 대단해 보입니다~유리 반지와 팔찌는 지금의 세공을 비교해도 하나 뒤떨어지지 않고 카메오 보석은 주로 여자들이 목걸이를 많이 하는데 가격 또한 만만찮지요~너무 갖고 시포요~보~코님 이왕이면 금품까지 사사하시잖고~지루하지 않게 공부 잘 하고 읽었어요~긴 이름들은 뒤돌아서면 잊혀지겠지만 서양의 역사도 참 재밌어요~탱큐~탱큐!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라고 예수님도 말씀하셨던 그카이사르가 이양반 시이저? 왔네 봤네 이겼네 라고한 이,신문의 기능이 소식을 전달하는데 있다면 최초의 신문 발행인도 카이사르?..두상이 잘도 생겼습니다 영재의 특성에 인물도 들던데요...ㅎㅎ 전쟁의 목적이 영토확장과 사람확보 함에 있었으니 전쟁도 지혜롭게 했을겄같습니다...교육인가 종교인가 어떤것들이 이토록 대국으로 성장하는 지도력이 되었을까요. 그리이스 정복기를 읽어내려가니 마치 대조영을 보는듯 합니다..
원형 콜로세움,, 영화 벤허,쿼바디스,최근의 글레디에이터의 촬영장으로 더 유명한곳...우리 성당에서 이번달에 상영할 '로마의 휴일'에도 유명한곳이 많이 나오려나 본지오래되 가물가물~....어디를가도,어느곳을 파도 유물들이 나와 지하철노선이 별로 없다는 보물이 널려있는곳 롬에 보스코님 갤러리튜어 갑시다.....암튼 그리스도교는 롬에서나 우리나라에서나 민중들틈에서 자생적으로 성장하였는데, 콘스탄티누스는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용하려 국교로 지정하기도 했네요..로마인들이 치렀던 수많은 전쟁과 현재까지 전쟁을 치르며 희생된 영혼들을 위로라도 하듯, 대성당안에서 들리는듯한 그레고리안성가 잘들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인정으로 유일신과 우상숭배를 금지하는 이전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종교와 파생되는 예술을 만들게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복사) 뭔말인지 이해가 잘안되는데요 그리스도교는 유일신을 주장하고 우상숭배를 금지하는 종교인데 예술은 어디까지 가나요?.. 댓글 많이 달면 아웃? 되나요!
죄송합니다,,유일신과 우상숭배를 금지하는 그리스도교의 인정으로 이전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종교와 파생되는 예술을 만들게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로,,수정하였습니다..
로마는 생소하지가 않아요. 앞에서도 얘기 했지만 비디오로도 워낙 많이 봤거든요.그레고리안 성가가 너무나도 좋아서 나가기가 싫어 지네요. 우리 이번 기회를 핑계 삼아" 카메오 목걸이 겸 브로치 "계 하나 할까요. 재테크 개념으로다가.고가의 미술품은 못 사지만 . 신청 받습니다. 흐흐흐.
오늘 로마의 휴일 보신다구요?,,오드리 헵번,,,나이먹어서도 그 고결한 자태를 잃지 않던 여배우,,외모보다 더 아름다운건,,암으로 투병하면서도 아프리카등의 기아들을 위해 죽음 직전까지도 봉사한 그 숭고한 정신..자매님들,,오늘 헵번의 이쁜 미소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영혼도 많이 보시고 오시길,,저는 사무실에서 야구 봅니다,,ㅋㅋ,,대~한~민~국..짝짝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