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오태학은 1938년 부여에서 태어나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 동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했다. 고향 부여의 문화유산을 배경으로 한 유년시절, 60년대의 앵포르멜운동의 세례가 지금의 그를 있게 한 생득적, 환경적 요인이라면, 이 무의식적, 미술사적 요인을 자기화 하는 확인 작업, 또한 이를 위한 방법모색이 60년대 회화 수업기 이후 지금까지 작가를 쉼 없이 채찍질 해 온 동인이다. 요컨대 30년 남짓한 작가 생활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60년 국전 특선 수상을 시작으로 동양화라는 장르에 구애됨이 없이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를 오가면서 자기 언어를 개척하기 위해 노력한 그는 6,7,80년대 오랜 모색기를 거쳐, 한국의 산과 들과 내에서 발견할 수 있는 소재들과 고유색이 작가의 관념(Idea)을 통과하여 용해되어 회화성 짙은 화면을 보여주고 있다. 푸른 하늘을 이고 과감한 몇 개의 필선으로 처리된 능선 위에 한가로이 노니는 소들, 장구를 치는 소년, 불상과 어린이의 천진함이 중첩된 작품, 지게를 지고 노을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농부들, 물 속의 어해류 등이 화면 그득히 또는 동양화의 여백을 연상시키는 옥색 배경 속에 놓여있다. 흔히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일상소재와 자연, 불교의 영향, 민화나 설화에서 따온 소재들이 한데 결합되어, 형상성을 띠고 있으면서도 현실 너머에 있는 어떤 세계를 추구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화가는 그림 그리는 것이 사는 거야. 왼손으로라도 그려야지” 한국화단의 거목 오태학 화백이 쓰러졌다는 소식이 있은지 4년. 몸의 오른쪽이 마비가 돼 그림을 그릴 수 없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함께 들렸다. 하지만, 오른손이 아닌 왼손으로 그린 그림을 가지고 전시회를 연다는 소식을 가지고 오화백은 돌아왔다.
대학교 3학년, 국전에서 ‘특선’ 신화 만들어내
오른손에 들린 붓 하나로 한국사회를 흔들었다. 오른손을 통해 한국인의 얼굴이자, 우리가 잃어버렸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화폭 위에 펼쳐졌다. 많은 사람들이 감탄했다. 나의 오른손은 세상을 호령하는 무기였고 내 생의 전부였다.
1999년 중앙대 부총장으로 난 쉼없이 바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짬을 내 강원도 고성으로 휴가를 갔다. 그림 몇 장을 완성하고 낙관까지 찍은 후 강가에 낚싯대를 던졌다. 난 그 자리에서 쓰러졌고, 달포가 넘은 후에 눈을 떴다. 내 생의 전부였던 오른손의 감각이 없었다. 아니 움직일 수가 없었다. 패기만만한 내 삶의 전부였던 오른손이…. 한국 화단에 큰 획을 그은 산동(山童) 오태학 화백(66).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몸의 오른쪽이 모두 마비가 됐다. 산동의 명성을 만들어준 오른손 역시 마비가 됐지만, 그림에 대한 강렬한 욕구는 오른손 대신 왼손으로 그림을 그리게 했다. 약 2년 반 동안 왼손으로 그린 그림들을 모아서 지난 10월 8일부터 20일까지 조선일보미술관에서 ‘산동 오태학’ 전시회를 열었다. 산동의 전시회 소식은 그의 인간 승리를 보여주는 놀라움이었다. 뇌졸중 후유증 때문에 말도 더듬고, 청력도 약해졌지만, 그림에 대한 열정을 꺽지는 못했다. 오태학 화백의 신화는 1960년 홍익대학교 3학년에 재학중일 때 시작된다. 산동을 아꼈던 故 운보 김기창 교수는 그를 신촌시장에 데리고 갔다. 그리고 시장에 있는 3층짜리 ‘닭장’을 그리라는 교수의 엄명에 하루도 빠짐없이 시장에 가서 스케치를 하기 시작했다. “스케치에만 두 달 이상이 걸렸어. 매일매일 나가서 닭장만 보고 그렸어. 스케치하고 채색까지 했지만, 뭔가가 부족했어. 4개월째 되니까 선생님께서 내 그림에 대해서 조언을 해주셨지. 닭장 하나 그리는데, 꼬박 6개월이 걸렸어.” 운보 선생은 제자가 그린 그림을 국선에 출품하는 게 어떠냐는 제의를 했다. 국선에 학생 작품을 출품한다는 것은 쑥스러운 일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국선에서 학생 작품이 뽑힌 전례가 없었다. 산동 역시 자신의 작품을 출품하는 것만으로 만족했다. 그리고 그 일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여느 때처럼 작업실에서 밤 늦게까지 작업을 하고 있었다.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이라 작업실의 불빛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커튼을 닫아놓은 채. 한 친구가 헐레벌떡 통금 시간이 다 되어서 술과 과자를 한아름 안고 나타나 ‘국전 특전’ 소식을 쏟아냈다. “친구도 국전에 출품했거든. 궁금해서 심사위원 집에 가서 확인을 했나봐. 자신은 떨어졌는데, 내가 붙었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작업실에 온 거야. 나도 믿을 수가 있어야지. 학생 작품이 특선에 뽑혔다는 것은 전래가 없었거든. 잠이 오겠어? 밤 꼬박 새우고 가장 빨리 나온 신문을 받아보니까 정말 내 이름이 있는 거야. 학교로 가니까 미대 학생들 전원이 나와서 나를 반겨주고, 교수님들도 좋아하고. 그때를 생각하니까 지금도 기분이 너무 좋은데.(웃음)” 다음해 대학교 4학년생 오태학의 명성이 더욱 높아지는 일이 발생했다. 11개월간 그렸던 500호(333.3×248.5)를 넘는 크기의 대작 ‘소 9마리’ 그림이 국전에서 ‘문교부장관상’을 수상한 것이다. “스케치한 것만도 7가마니나 됐어. 매일 밥 한끼만 먹고 그림을 완성했어. 그림을 완성한 후에 너무나 힘들어서 고향에 내려가서 쉬고 있는데 수상 소식을 들은거야. 다음날 신문에 보니까 내 그림이 전면에 나와 있는 것 보고 얼마나 좋았는지. 당시 등록금이 7천원이었는데, 상금으로 1만7천원을 받았어. 학교도 난리났지 뭐.(웃음)”
산동 오태학 화백은 대학생 때부터 실력을 인정받기 시작해 지금까지 한국화의 리더로 자리잡고 있다. 특히 산동은 80년대부터 ‘석채작업’ 일명 ‘지본암채’를 처음 시도한 작가다. 17살 나이차 극복하고 교수와 제자로 만나 결혼
지본암채는 색이 있는 암채분말(색깔 있는 돌가루)로 채색하는 그림이다. 화선지를 여러 겹 발라 장지와 같은 두꺼운 배지를 만든 후 원색의 암채분말로 색칠하고, 날카로운 송곳 같은 기물로 예리한 선획을 구사해서 이미지를 구현하는 방법이다. 암채분말은 색깔마다 다른 나라에서 구해야 할 정도로 매우 희귀하다. 산동 오태학 화백의 작업실에 있는 암채분말의 가격만 해도 수억원에 달한다. 오 화백이 이런 어려운 일을 시도 한 이유는 “한국 미술은 흙의 문화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나는 그런 문화의 토양에서 자랐고, 문화를 재현하려고 추구해왔다”라고 말한다. 지본암채화는 관리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천 년 이상 보관할 수 있다. 오 화백은 지본암채의 기본을 수묵에 두고 있어 한국화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이렇게 한국 화단의 큰 거목이기에 배출해낸 제자들 또한 미술계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영화 ‘취화선’의 장승업 그림을 그려 유명해진 제자 김선두 교수를 비롯해, 강선구 서정태 김진관 박완용 김덕기 씨 등이 1978년부터 중앙대에 재직하면서 길러낸 제자다. 17살 차이가 나는 부인 김영지씨(49) 역시 교수와 제자로 처음 만났다. “여자에게는 관심이 전혀 없었던 사람이에요. 제가 수도여사대(현 세종대)에 다니고 있을 때, 이분이 교수로 부임했어요. 심부름 때문에 댁에 갔다가, 제가 국전 전시회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그림의 주인이라는 것을 알았죠. 그때부터 좋아하게 됐어요.” 결혼을 안 하고 그림만을 위해 살겠다는 그의 마음을 돌리기도 어려웠지만, 집안 반대를 이겨내는 것도 힘들었다. 김영지씨는 어머니에게 오태학 교수 아니면 결혼 안한다는 협박(?)을 하고 어렵사리 승낙을 받아냈다.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는 어머니를 보고 있자니 가슴 아팠지만 당시에는 그것이 최선이라는 생각 때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결혼 이야기가 나온 지 1 주일만에, 김동리 선생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안화백의 나이 마흔 세살, 신부는 스물 여섯이었다. 몸이 불편한 오 화백에게 부인의 존재는 소중하다.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에는 부인이 오 화백의 불편한 몸을 대신한다. 그리고 40여명의 제자들은 쓰러진 스승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조를 짜서 매일매일 병수발 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매일매일 제자들이 집에 와서 마비된 오 화백의 몸을 주무르고, 다시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힘을 불어넣었다. “오른손으로 하는 것을 왼손으로 하니까 그림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 같애. 처음에는 5분도 앉아 있기 힘들었는데, 지금은 3시간까지 앉아서 작업할 수 있어. 처음에는 이런 내모습이 부끄러워 보여주기도 싫었는데….” 오 화백의 호인 ‘산동’은 그의 그림세계를 잘 설명해준다. 산동의 그림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벌거숭이 아이들’은 ‘누구도 속이지 않고, 천진난만하게 살고 싶어하는 오 화백의 마음을 나타낸다. 이제는 오른손이 아닌 왼손으로 힘겹게 그림을 그리지만, 산동의 그림은 예전보다 더 큰 울림을 준다. 오 화백의 그림에는 힘겨운 재활의 의지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글 / 최영진 기자 사진 / 송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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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태학의 근작 |
진 미 자(큐레이터) |
고향 부여의 문화유산을 배경으로 한 유년시절, 60년대의 앵포르멜운동의 세례가 지금의 산동이 있게 한 생득적, 환경적 요인이라면, 이 무의식적, 미술사적 요인을 자기화 하는 확인 작업, 또한 이를 위한 방법모색이 60년대 회화 수업기 이후 지금까지 작가를 쉼 없이 채찍질 해 온 동인이다. 요컨대 30년 남짓한 작가 생활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양화라는 장르에 구애됨이 없이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를 오가면서 자기 언어를 개척하기 위한 노력은 대개 10년 단위로 이어진다. 작가 자신의 서술을 빌면, '자연과 인간과 역사의 토양 속에서 자신의 회화 예술이 뿌리를 내리는 시기'로 가장 중요한 자신의 회화 수업기인 60년대, '동양화 이전에 회화라는 장르를 모색하고 발견하려는 탈 동양화의 시기'인 70년대, '유년기의 향수와 우리 것에 대한 집착이 천연암채를 통해 한국미술의 본질에 접근'하는 시기인 80년대가 그것이다. 내용과 형식, 재료의 호흡이 맞아 떨어진다고 나름대로 감을 잡을 때까지 30여년이 걸리는 원환운동을 한 셈이다. 우리 것을 확인하기 위해 십 수년간을 도자기에 빠지기도 하고, 이어 고려불화, 중국의 돈황벽화, 인도의 문화유산 기행, 그리고 다시 고구려 벽화와 부여의 문화유산으로 되돌아오는 참으로 먼 여행 후, 이제는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을 반추할 수 있는 여유(?)를 발견하였다고나 할까. 오랜 모색기를 거쳐, 그가 보여주고 있는 것은 한국의 산과 들과 내에서 발견할 수 있는 소재들과 고유색이 작가의 관념(Idea)을 통과하여 회화성 짙은 화면으로 용해된 것이다.
또한 산동의 작품세계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재료적인 측면이다. 한지를 여러 겹 배접하여 아교를 먹여 화면의 견고성과 탄력성을 담보한 다음, 수정 분말을 발라가면서 대강의 형태를 뜨고 원석분말을 발라나간다. 화면에서 오는 독특한 입체감과 깊은 맛은 이 분말의 중첩으로 인한 것이다. 가히 장인에 가까운 끈기가 엿보인다. 이번에 전시될 작품들은 일견 중국 근대미술에서 엿볼 수 있는 파격적이고 적극적인 화면구성, 구상과 추상의 구별이 무의미한 현대적 조형감각이 탁월한 소재해석과 함께 융합되어 있다. 푸른 하늘을 이고 과감한 몇 개의 필선으로 처리된 능선 위에 한가로이 노니는 소들, 장구를 치는 소년, 불상과 어린이의 천진함이 중첩된 작품, 지게를 지고 노을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농부들, 물 속의 어해류 등이 화면 그득히 또는 동양화의 여백을 연상시키는 옥색 배경 속에 놓여있다. 흔히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일상소재와 자연, 불교의 영향, 민화나 설화에서 따온 소재들이 한데 결합되어, 형상성을 띠고 있으면서도 현실 너머에 있는 어떤 세계를 추구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또 다른 시작을 꿈꾸는 작가의 다음 작품을 기대해 본다. | | 현실과 설화 - 산동 오태학의 작품세계 |
오 광 수 (미술평론가) |
1. 60년대 초반에서 최근에 이르는 약 40년간의 오태학의 작업은 한 말로 꾸준함 속에 자기 모색을 지속해 온 것이라 할 수 있을 듯하다. 실험의 확대보다는 모색의 심화속에 자기 세계를 다져온 것으로서 말이다. 이 점은 동년배의 작가들과 비교해 보았을 때 한결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60년대에서 2000년대란 시간대는 우리 미술에 있어 엄청난 변모가 점철된 연대로 특징된다. 부침이 심한 만큼 작가들의 모색의 진폭이나 자기변신의 풍속도 현저한 것으로 드러난다. 더러는 혁신이란 이름 하에 대담하게 전신을 던져 새로운 사조에 뛰어드는가 하면, 변혁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강박관념에 뒤쫓겨 자신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 채 방황하는 예들이 얼마나 많았든가. 그래서 적지 않은 미술가들이 시대의 파도에 떠밀려 어디론가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있는 현실이다. 더욱이 한국화 영역은 그것이 전통회화이기 때문에 더욱이 한국화 영역은 그것이 전통회화이기 때문에 더욱 많은 시대적 길항에 처해질 수밖에 없었으며 여기 속한 작가들의 방황도 그만큼 심각한 수준에 이르지 않을 수 없었다. 낡은 시대의 구각에서 탈피해야 한다는 절실한 명제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대안은 선명하지 못했다. 더욱이 서양미술사조의 영향은 한국화란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국면으로까지 진전되었다. 한국화란 없다라는 대담한 발언이 공공연히 재창되고 있는 현실이다. 물론, 관념상의 한국호의 존재를 실재하는 한국화로 탈바꿈하기 위해선 과감한 자기부정은 필요하다. 한국화이기 이전에 회화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옳다. 회화로서 한국화지 한국화가 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같은 자기 부정의 치열함은 역설적으로 자기 정체에 대한 강열한 희구에 다름 아니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금의 한국화단은 어슬픈 자기 변혁의 늪에 빠져 있는 인상이다. 외부사조에 편승해서 자기모습을 가장한다는 것은 정체성 추구에 더욱 혼란만 초래할 뿐이다. 한국화의 정체성을 추구하기 위해선 철저한 자기부정 위에 자기의 원형을 되찾는 작업이 병행되지 않고선 안된다. 산동의 40년의 작업에서도 한국화가 처한 시대적 상황인식이 편재되고 있다. 맹목적으로 과거의 양식을 답습하는 것도, 지나치게 시대적 미의식에 편승하는 것도 아니면서 전통과 현대의 관계 모색에 일관된 관심을 지속하고 있음을 만날 수 있다. 그러면서도 그는, 앞서 지적했듯이 어떤 집단적 의식에 유대되지 않은 자기 독자의 모색 속에서 자신을 지탱해 온 드문 예에 속한다. 산동의 작업내역은 우선 편의적으로 시대에 따른 분류가 가능할 것 같다. 초기인 60년대, 중반기인 70년대와 80년대, 그리고 최근인 90년대와 2000년대로 묶어볼 수 있다. 그의 작품 내역이 지니는 분류의 간략함은 그만큼 자기 확대의 논리보다 자기 심화의 방법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각 시기마다 다소의 변화된 특성들을 점검할 수 있으나 비교적 전시기로 관류하는 일관된 흐름을 감지할 수 있음도 자기 심화에 기인함이다.
2. 산동은 대학(홍대) 재학 중에 국전을 통해 데뷔하였다. 60년대 초 <닭장>, <군우>, <화>가 연이은 특선으로 일찍이 추천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같은 경우로 서울대의 이종상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다 같이 재학중 특선을 시작하여 졸업 직후에 추천작가가 된 선망의 대상이었다. 산동의 초기 대표적인 작품 <판자촌>, <군우>, <회>, <정물>, <대화>를 보면 그의 조형적 형성의 내역을 가늠할 수 있다. 수묵과 채색을 병용하면서 구성적 패턴이 강하게 드러나고 있음을 만날 수 있다. 아직도 자기세계가 틀 잡히지 않은 모색기인 만큼 선생의 영향은 떨쳐버릴 수 없다. 당시 홍대 교수로는 청전 이상범, 운보 김기창, 천경자 세 분이 있었지만 산동은 특별히 운보에게 많은 영향과 감화를 받고 있었던 듯하다. <판자집>에서 보이는 굵은 선조에 의한 대상의 구조적 파악이나 <닭장>, <군우> 같은 거대한 스케일의 화면조성이나 <화>, <대화> 같은 분석적인 구성의 패턴이 운보의 방법으로부터 받은 깊은 감화를 반영하고 있다. 거칠지만 힘에 넘치는 구성의 밀도는 운보가 시도했던 일련의 작품들과 깊게 맥락된다. 산동이 운보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시점은 대체로 60년대 중반경으로 보아진다. 물고기를 모티브로 한 수묵구성인 <정물>에서 산동 독독자의 화풍이랄 수 있는 칙칙하면서 침잠하는 화면의 톤과 약간 어눌한 것 같은 대상의 묘사에서 드러나는 소박한 운필과 일상을 설화하하려는 내용의 고졸미가 두드러지게 엿보인다. 특히 옛 고분벽화나 마애불을 연상케하는 퇴락한 질감과 필획의 암시적인 흔적은 고졸미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 전반으로 이어지는 시기에 두드러지는 점은 화면을 평면 패턴으로 재구성하고 여기에 이미지를 간헐적으로 삽입하는 방법이다. 평면패턴의 구성화는 이미 입체파시대에서 기하학적 추상주의에 이르는 20세기 회화의 가장 기본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50년대 후반경부터 한국화에 평면구성의 방법이 적극적으로 원용되면서 이른바 대상의 해체와 종합의 시도가 60년대까지 활발히 이어지고 있다. 직관적인 대상의 묘출이란 전통적인 묘사의 인식에서 벗어나 화면을 논리적으로 재창조한다는 이른바 회화의 자율성이 한국화 영역에도 깊은 감화로 작용한 것이다. 그리고자 하는 대상의 실존이나 실존의 배면을 장식하는 상징성보다 매재가 만드는 순수한 결정에 더욱 의미를 부여할려는 회화의 자율성이 대상의 해체와 평면으로의 환원이란 맥락으로 이어진 것이다. 70년대 초반의 <심하>, <상 70>, <풍어제>, <어> 등의 작품에 공통적으로 보이는 것은 평면구성에 이미지를 삽입하는 방식이다. 해체와 재종합이란 추상화의 방법이 적극적으로 구사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목마>, <소와 아이>, <호>, <고기와 아이>, <허상> 등의 작품에 이르면 평면구성의 화면패턴이 점차 선조 위주의 암시적인 구성으로 선회하고 있다. 그것이 70년대 후반에 집중적으로 제작된 <허상> 시리즈에 오면서 평면구성의 화면 분절도 사라지고 어두운 모노톤의 기조 위에 예리한 선획의 영상이 명멸하는 그 독자의 화풍으로 무르익는다.
3. <허상> 시리즈를 통해 독자의 화풍을 심화시켰던 산동의 세계는 80년대에 들어오면서 재료의 새로운 개발과 적용이란 단계를 거치면서 확고한 영역에로 진입되고 있다. 70년대까지 그의 매재의 근간은 지본수간채색이었다. 그것이 80년대로 오면서 지본암채로 바뀌고 있다. 화선지를 여러 겹 발라 장지와 같은 두꺼운 배지를 만든 후 원새의 암채분말로 도포하고는 거기 모필이나 죽필 또는 날카로운 송곳같은 기물로 예리한 선획을 구사해서 이미지를 구현하는 방법이다. 화면은 마치 거대한 암벽에 시술된 고대의 벽화처럼 육중하면서도 깊은 여운을 주고 있다. 고대 벽화의 기법을 도입한 그의 독자적인 모색은 한국회화의 원형에 대한 회귀의 염원을 담고 있음이 분명하다. 제작의 방식은 배지를만드는 일에서 채색을 도포하는 과정에 이르기까지 오랜 시간을 요한다. 옛 장인들이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기 우해 오랜 시간의 추이를 따랐던 것과 같이 그의 작업은 시작에서부터 마무리까지가 하나하나 벽돌을 쌓아올리는 공정에 비유됨직하다. 이 시작과 끝의 시간의 거리가 마치 현재와 아득한 과거를 잇는 회화의 견인 같은 인상마저 준다. 그것은 현실과 현실 저 쪽의 세계를 이어주는 것이기도 하고 실재와 상상을 연결시켜주는 것이기도 하다. 김병종은 이를 두고 특이한 만남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소위 <현실>과 <현실너머>의 어떤 양자적 세계가 서로를 손상시키지 않은 대단히 아름다운 <거리감>을 유지하면서 특이한 만남을 이루는 바로 그 점이고 이 성향은 세월과 더불어서 정제된 앙금으로 남겨지고 있는 것이다.」 산동의 화면이 갖는 설화의 근간도 어쩌면 이 정제된 앙금에서 기인된 것은 아닐까. 80년대로 오면서 그의 화면엔 더욱 설화적 내용이 증가함을 엿볼 수 있다. 물론 설화적 내용은 이미 70년대 작품들을 통해 내용상의 일정한 맥락을 유지한 바 있다. 그것이 80년대에 이르러서는 더욱 확고한 틀을 형성해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김병종이 지적한 것처럼 산동의 설화적 요체는 막연한 상상의 산물이 아니라 현실과 현실너머를 연결해 주는 거리감에서 태어난 것이다. 현실이면서 상상의 세계, 현재이면서 동시에 아득한 과거의 시산이 부단히 왕복하면서 독특한 설화의 구조를 형성해 주고 있다. 산동의 세계는 이미 초기에서부터 인간과 인간을 에워싼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그것은 그만큼 인간실존에 모티브의 근간을 두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80년대 이후 최근에 와서야 풍경이 보이지만 예외에 속할 뿐이다. 때로 동물이나 어류가 주제로 떠오르기도 하지만 설화의 연장으로서의 대상일 뿐이지 그 자체가 모티브로 자립하고 있지는 않다. 그것들은 언제나 인간들과 연계되어 있고 인간이 중심이 되는 세계의 보조적 대상으로 그 모습을 나타내고 있을 뿐이다.
4. 인간을 중심으로 한 설화의 근간은 70년대 후반에 집중된 <허상> 시리즈를 통해 잡힌 것으로 보아진다. 허상이란 상이 비어있음을 말하는데, 산동의 허상은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과의 간극에 명멸하는 어떤 모습으로 가늠된다. 그런만큼 그것은 존재에 대한 질문을 동반한 비판적 언술에 값한다.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세계에 대한 인식의 통열한 자기성찰을 동반한 것에 다름 아니기도 하다. 예리한 선조에 의해 가까스로 걷잡히는 인간의 모습이란 존재하는 모습이자 동시에 그림자로 남는 영상이기도 하다. 70년대 전반까지 이어졌던 평면 분할의 구성패턴은 전면 모노톤으로 대치되면서 화면은 침잠하는 깊이를 동반하고 있다. 희미하게 떠오르는 영상은 이 깊이의 저 쪽에서 점차 다가오는 형국을 띤다. 그만큼 화면은 저쪽에서 이쪽으로 이어지는 거리감에 의해 한결 심미적 특징을 드러낸다. 80년대는 70년대의 암시적인 화면에서 벗어나 보다 구체적인 이미지의 구현과 분명한 설채의 변화를 보인다. 여전히 설와적 내용이란 맥락을 유지하면서도 그것이 더욱 선명한 윤곽으로 자라잡는다. 아마도 매재상의 변화가 이 같은 변화에 상응되었을 것으로 본다. 70년대까지 산동의 화면은 선지에 수묵이거나 선지수간채색으로 일관되었으나 80년대에 접어들면서 지본암채를 매재의 틀이 잡히고 있다. 70년대까지의 산동의 화면이 벽화적인 스케일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지본암채란 바뀌면서 벽화적인 스케일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지본암채란 바뀌면서 벽화적인 요소가 한결 두드러지게 드러나고 있다. 암채의 도포에 의한 임파스토(두껍게 바르기)의 효과나 암채 특유의 퇴락한 질감, 여기에다 내용의 설화적 설정이 어우러짐에서다. 운보 김기창은 산동의 이 같은 방법을 두고 「화선지와 석채를 매지로 하여 토속적인 한국의 이미지를 반구상기법으로 화폭에 표출해서는 산동의 회화예술은 이제 그만의 독자적인 것」이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내용과 형식이 어우러져 그만의 세계를 확립했음을 시사한 것이다. 이미 지적한 바대로 그의 이미지의 설정은 현실과 기억의 과거를 왕복하는 독특한 상황으로 이어진다. 어릴 때 꼬마친구들과 개울에 가서 고기를 잡던 일, 물에서 어우러져 뛰어놀던 일들이 어른이 된 후의 낚시질과 천렵으로 자연스레 이어져 시간이란 아득한 거리가 부단히 지워진다. 현실의 이야기가 바로 설화가 되는, 현실과 상상의 교차 역시 같은 문맥을 이룬다. 그래서 상상의 이야기는 이야기로 머물지 않고 현실에 존재했던 이야기로 탈바꿈된다. 자기보다 큰 물고기를 안고 있는 아이의 설정은 그렇게 큰 물고기를 잡으려는 아이의 염원이 설화란 매개를 타고 현실로 현현하는 것이다. 목마를 타고 가는 아이의 <목마>나, 물고기를 긴 장대에 주렁주렁 매달아 어깨에 매고 가는 아이들의 행열인 <풍어>나, 용을 타고 하늘로 달리는 다섯 아이들의 절실한 염원이 설화란 매개를 통해 현실로 구현되는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실현되지 못하는 영원한 꿈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산동의 화면에 나타나는 영상은 꿈을 현실화하는 회화적 리얼리티의 구현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인간은 꿈을 가지고 산다. 적지 않은 예술가들이 그들의 유년과 소년기의 꿈을 예술로 실현하려고 한다. 산동의 작업도 유년기의 꿈을 실현하는데 경주해 온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꿈은 작가 개인의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많은 어른들에 공유되는 보편적인 것이기도 하다. 실로 많은 사람들이 그의 작품에 공감하는 것도 이 보편적 감정의 유대에 기인되었음일 것이다.
말없이 모든 것을 보여준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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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선두 |
나에겐 두 분의 큰 스승이 있다. 한 분은 학교 안에서, 다른 한 분은 학교 밖에서 만났다. 학교 안의 스승은 산동 오태학 선생님이시고 학교 밖의 스승은 이종상 선생님이시다. 우연이랄 수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지만 비슷한 시기에 두 분과 사제관계를 맺었다. 내가 생각하기엔 두 분은 출신 학교도 다르고, 화풍과 성격이 매우 달라 서로 친하실 일이 없으실 것 같은데 40년이 넘게 서로에 대한 우정이 남다르시다. 학연의 벽이 높은 우리 현실에서 출신 학교가 다른 두 스승을 모시고 공부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서로 라이벌 의식이 강한 분들이라면 이건 꿈 속에서나 가능할 일이었다. 내가 서울대에 재직하신 일랑 이종상 선생님께 배울 수 있었던 것은 산동 선생님의 크신 배포와 당신의 작품에 대한 작가적 자존심, 그리고 상대의 실력을 인정해 주는 솔직함이 없었다면 애시당초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는 평소 “사람이 커야 작품도 크다. 작품은 사람의 됨됨이에서 나온다.”라고 가르치셨던 선생님이셨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산동 선생님께 늘 죄송스럽지만 마음 한편으론 깊이 감사하고 있다. 산동 선생과의 첫 만남은 내가 대학교 1학년이었던 1978년 여름 방학때였다. 그때 나는 3학년 실기실에서 선배들 틈바구니에 끼여 방학 실기 자율 학습을 하고 있었다. 그 해 7월 어느 무더운 여름 오후였다. 이마가 시원하게 넓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날카로운 눈매의 젊은 선생님 한 분이 학생들을 앞에 놓고 열변을 토하고 계셨다. 이 분이 바로 산동 선생님이셨다. 나와 선생님과의 첫 만남은 이렇게 뜨거운 창작의 열기가 창 밖의 지열만큼이나 가득했던 실기실에서 이루어졌다. 선생님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는 자신에 차 있었고 신념이 넘쳐 흘렀다. 약간 어둑했던 실기실을 환하게 밝혔던 선생민의 형형했던 안광을 25년이 지난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선생님은 참 엄하셨다. 제자의 작품을 평가하실 땐 더욱 그랬다. 학부 4년과 대학원 2년을 합쳐 도합 6년 동안 한번도 칭찬을 받아 본 기억이 없다. 2학년 1학기 때 학교 뒷산을 열심히 그려 선생님께 뵈드린 적이 있다. “선생님 산수화를 완성하였는 데 한번 봐 주십시요” 했다가 “야! 이녀석아 그림에 완성이 어딨어! 작가는 자기 작품에 만족할 수 없는 존재야. 만족한다면 더 이상 그릴 것이 없다. 나는 작품을 완성하면 그 작품은 곧 잊어버린다. 잊어야 다른 것을 그릴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오히려 철퇴를 맞은 적이 있다. 예술가는 불완전하기에 어느 한 세계에 머무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는 것, 불완전하기에 완전을 향해 간다는 것, 그리고 불완전은 모든 완전의 상위개념이라는 것을 막 그림을 배우기 시작한 올챙이에게 확실히 심어주었다. 선생님의 지도 방식은 늘 이러하셨다. 선생님의 추상같은 엄한 평가는 때론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선 그림의 신기를 꺽어버리는 것이기도 하였지만 나에게는 오히려 저 바닥에 잠자는 오기와 투지를 불러일으켜 준 쓴 약이었다. 어마어마한 스트레스로 나를 압박했지만 한편 이를 극복하기 위해 로마시대의 검투사처럼 변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대학원때였다. 선생님께서 KBS 2TV에서 문인화를 강의하게 되었는데, 나와 몇몇의 제자가 학생으로 출연하게 되었다. 선생님의 체본을 보고 우리가 그린 그림을 품평하는 시간이었다. 예의 추상같은 평가는 여기서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다행히 손만 나오게 되어 전국적인 망신(?)을 면하였지만, 마지막 녹화날 슬그머니 장난기가 발동하여 용감하게 “저.... 선생님 오늘은 녹화 마지막 날이니 저희 그림을 한번만 칭찬해 주십시오”했다가 정작 녹화 때는 더욱 무참히 깨진 일도 있었다. 선생님은 이런 분이시다. 제자 앞에서 제자를 칭찬하는 일이 있다면 그 날은 해가 동쪽으로 질 날일 것이다. 그냥 아무 말씀이 없는 것이 칭찬이었고, 바람잔 날 감나무 잎이 흔들리 듯 희미하게라도 고개를 끄덕여 주시면 극찬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엄한 선생님이셨지만 제자에 대한 칭찬이 어찌 없을 리가 있겠는가. 당신 마음에 든 제자의 작품에 대한 칭찬은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전하곤 했으니까. 선생님이 이렇게 제자들을 혹독하게 가르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다. 학교를 졸업하고 10년이 넘어 어느 후배의 개인전 뒷풀이에서 그 이유를 들을 수 있었다. 화단은 적자생존의 법칙이 엄존하는 정글과 같은 곳인데 사자가 자기 새끼들을 키우듯이 강하게 키우지 않으면 화단에 나왔을 때 그 시련과 고비를 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재능있는 제자일수록 더욱 엄하고 힘들게 가르치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어줍잖은 재주나 기교를 부릴라치면 불호령이 떨어졌다. “좋은 작가는 기교를 부리지 않고 정도를 간다. 인간 그 자체를 보여주어야 한다. 꾸밈없이 자기 자신을 그리면 된다. 진실되면 언젠가는 이긴다.”라는 말씀과 함께. 선생님은 겉으로 그렇게 엄하고 강해 보이시지만 속 마음은 참 따뜻하시고 정이 많은 분이시다. 선생님의 18번 노래는 “얼굴”이다.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이라는 가사로 시작되는 소녀 취향적인 노래말이다. 평소 선생님의 이미지와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 노래를 보면 선생님이 얼마나 부드러운 분이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판소리 같기도 하고 신세대 랩같기도 한, 리듬과 박자를 초월해 버린 선생님의 노래에는 구수한 선생님의 선처럼 허스키와 바이브레이션의 독특한 맛이 있다. 일본의 소설가인 시바료 따로는 “문학이란 결국 자기 속에 내재한 소년의 투영이다.”라고 하였다. 선생님의 그림세계가 순진무구한 동심의 세계에 닿아 있는 이유도 이 속정과 따스하기 그지없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 학교의 대부분의 제자들은 선생님은 엄하고 무서운 분으로만 기억할지도 모른다. 나도 딱딱하고 견고한 껍질안에 영양가 풍부하고 맛있는 속살이 있는 호두처럼 선생님의 속내를 안 것이 졸업하고도 한참 지난 다음이었으니까. 선생님은 고집에 쎄시다. 더구나 말씀 속에 약간의 과장법도 만만치 않으신 분이시라 화단 동료들 사이에 “오대포”라는 재미있는 별명을 지니고 있다. 그 과장법은 허풍이 아니라 선생님 특유의 언어 스타일이다. 사람이 무엇인가를 힘주어 강조하고 싶을 때 본의 아니게 약가의 과장법을 섞는 것이 자연스런 현상이니까. 물론 선생님의 모든 말씀이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94년 초 가을 평소 허물없이 지내는 우리 학교의 동료, 후배 교수들과의 회식이 있었다. 선생님께서 청태콩을 먹었더니 머리가 다시 많이 났다고 은근히 자랑을 하셨다. 그때 나 또한 탈모가 시작되어 주의 깊게 듣고 있었다. 나는 선생님의 옆자리에 앉아 있었기에 슬쩍 선생님의 머리를 보니 평소와 별반 다를 것이 없어 어떻게 감당하실려고 그러시나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좌중의 어느 분이 그럼 한번 머리를 보여달라고 하였을 때 “자! 보라구” 하시며 일행들에게 고개를 숙여 머리를 앞으로 내민 순간 갑자기 식당이 떠나갈 듯한 폭소가 터져나왔다. 물론 선생님의 머리숱이 전혀 변화가 없던 것은 아니었다. 몽고의 대초원에 돋아난 어린 새싹들처럼 드문드문 가는 머리카락이 여럿 보이기는 하였다. 머리가 새로 났다는 것이 전혀 근거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머리가 새까맣다라고 과장한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외관상으로는 전과 전혀 달라 보이질 않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선생님의 과장은 남에게 해를 끼치는 일은 전혀 없다. 선생님께서 한번 이거다 하면 우길 생각을 말아야 한다. 이러한 고집에서 선생님 그림의 개성이 나왔으며, 변형된 형태들은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아무나 넘볼 수 없고 오를 수 없는 깊은 맛이 우러나왔다. 선생님께서 배운 많은 것들을 이 짧은 글에서 다 이야기하기란 불가능하다. 고래심같은 지구력, 오랜 세울 동안 일관되게 당신의 작품세계를 천착해 간 신념, 주정하기 위해 마신다는 술과 낚시로 대변되는 풍류...... 등등, 하지만 선생님의 생활과 작품 모두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다름아닌 “여유”다. 당신을 이것을 “여”라고 말하시지만 제자들 작품 속에 이 “여”가 없다면 좋은 평가를 내리는 일이 결코 없었다. “여”는 넉넉함이요 너그러움이요, 초월적인 것이고, 자유스런 것이다. 허허로움이고, 풍류이고, 졸박이고 천진스러움이다. 백제 미술을 관통하고 있는 이 “여의 미”는 선생님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이지만 선생님 당신이 지닌 인간적 향기이기도 하다. “참다운 스승은 입벌려 가르치지 않지만 슬기로운 제자들은 그의 곁에서 늘 새롭게 배운다.”라는 말이 있다. 선생님은 당신 스스로 참 예술가란 어떠해야 하는지를 몸소 실천하여 보여줌으로써 이 아둔한 제자에게 끝없는 가르침을 주시고 계시는 것이다. 99년 그 혹독한 병마를 이기고 선생님께서 돌아오신 것은 아직도 우리 후학들에게 다 못 전한 사랑과 가르침이 많이 남아있는 것이라 생각되어 감사하고 또 감사할 뿐이다.
우리는 영원한 맞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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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종 상 (미술가) |
세월을 낚는 곧은 낚시질 그것은 차라리 고역이었다. 구름 한 점 없는 땡볕 아래서 한나절이 넘도록 연 잎처럼 떠 있던 한평 남짓한 너래 바위에 쪼구리고 앉아 생전 처음 해보지도 않던 짓을 친구 따라 흉내 내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이었던지...... 한 여름 막바지를 치닫던 그 날은 아침부터 유난히도 찌는 날이었다. 새로 생긴 제방 뚝에는 아직 풀도 나지 않을 정도로 잘 알려져 있지 않을 때인데도 물은 거의 만수위가 되어 제법 호수다운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었다. 그 날은 무슨 바람이 불었던지 내가 좋아하는 친구의 꿰임(?)에 빠져 낚시도구를 챙겨 싣고 차를 몰아 멀리 경남에 있는 진양호까지 가게 되었다. 그런데 용케도 알고 전국에서 모여든 강태공들의 차량으로 호수 초입부터 차가 밀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전국 낚시터라면 어느 곳을 막론하고 현지인들보다 더 지리를 빼꼼히 꿰뚫고 있는 이 친구가 마양 남의 차 뒤꽁무니만 쳐다보며 길바닥 위에서 기다릴 리 만무한 일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 친구 덕분에 겨우 차 한 대 빠져나갈 소롯길을 찾아 어찌저짜하다가 아주 한적한 물가에 명당 터를 잡을 수가 있었다. 물가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고백컨대 사실 나는 수영을 못하기 때문에 물가에 가면 공수병증세가 생겨 뱃놀이나 낚시질 따위와는 담을 쌓고 살아온지 오래였다. 그래도 젊었을 땐 유도나 승마는 물론, 한 때는 1200cc나 되는 대형 오토바이를 다니며 진경 여행을 즐길 정도로 취미가 다양했었다. 그런 내가 유독 물에 대한 두려움증 때문에 물놀이와 담을 쌓고 살게 된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러니까 해방과 더불어 당시 명동에서 삼천리전구회사를 운영하시던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이사 온 뒤로 후암동에 있는 삼광초등학교 3학년 때 일이었다. 격세지감이 있으나 당시에는 lwrma 국회의사당이 마주보이는 마포 나룻터에 누런 황포돗대를 매달은 새우젓배들이 한강의 물살을 가르며 한유롭게 오르내리고 있었다. 어느 무더운 여름날 어린 나는 효창동에 사는 친구들과 어울려 모래톱에서 미역을 감으며 물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모래를 파간 물 웅덩이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급류에 휘말려 한참이나 떠내려 가는 걸 마침 무를 씻으러 왔던 무드렁장수 눈에 띄어 겨우 목숨을 건진 일이 있었다. 그날 이후로는 부모님의 철저한 감시망이 삼엄하게 펼쳐지는 바람에 도무지 물가라고는 목욕탕 물마저도 혼자서는 접근을 못하게끔 서서히 길들여져 갔다. 그 후로 초등학교 때는 ‘망치’로, 중학교 때는 ‘쇠망치’로, 고등학교 때는 ‘맥주병’으로 별명이 점차 승격되면서 줄곧 나를 따라다녔다. 그래서 물가에 간다면 겁부터 더럭 나는 내가 그날은 사방이 시퍼런 물로 넘실대는 호수 한 가운데 두 명이 겨우 앉기도 비좁은 바위 위에서 생전 해보지 않던 낚시질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구름 한점 없는 하늘에서는 땡볕이 따갑게 내려쬐는데 정오가 지날 때까지 도무지 입질인가 뭔가 하는 것을 경험조차 해보지 못한 채로 겨우 피라미 두 마리를 낚아 올린 것이 고작이었다. 그런데 더 부아가 치미는 것은 나를 꼬득여 여기까지 불러낸 이 친구, 내 바로 등 뒤에서 호반이 떠내려 갈듯이 너털웃음과 함께 호기를 부리는 소리를 들어보란듯이 시도때도 없이 질러대기 때문이었다. 심사가 뒤틀릴 대로 틀어진 내 귓바퀴에 바리톤 같은 그의 음성이 들릴 땜다 눈부신 은빛을 내뿜으며 펄떡거리는 붕어들을 능란한 손놀림으로 낚시줄에서 분리시켜 바구니에 던져대는 것이다. 산동 오태학, 그는 나의 ‘영원한 맞수’이면서 평생 같은 예도의 멋진 동반자로 고향 친구이자 내가 존경하는 화단의 선배이다. 내가 많은 질시와 모함 속에서도 서울을 벗어나지 못하고 세상 일에 미련을 둔 채 뛰어다니는 꼴이 안쓰러웠던지 나를 유혹하여 ‘세월 낚는 법’을 한 수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다. “이봐! 알랭이! 자넨 아직두 고기를 잡으려드남”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사투리를 써가며 무슨 도사 같은 선문답을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자넨 아직두 멀었구먼, 고기가 잽피길 기다리는 걸 보면 말여” 아니 고기를 잡으라고 입질에 손 맛까지 가르쳐 줄 땐 언제고 이제와서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릴 하는 건지 알다가도 모를 친구다. “그래두 피라미 두 마리는 건졌잖여” 맞수에게 그냥 지기는 억울해서 퉁명스레 내뱉듯이 대꾸를 했다. “허긴 그려, 허나 꾼들은 피라미를 안 잡는 법여 이 사람아” “피라미는 물고기 아닝감” 그때, 내가 입을 나발처럼 내민 채로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린 걸 그는 미처 듣지 못했을 것이다. “고기란 본시 곧은 낚시에 걸리는 겨....” 이제 아예 혼자 선문답하듯, 내가 하는 대꾸에는 관심조차 두질 않는다. “고기나 잡을려구 낚시질 하는 줄 아남, 세월을 낚을려구.....” 말하는 도중에도 연신 그의 낚싯줄 끝에는 손바닥만큼씩 한 은빛 물고기가 팔닥거리며 매달려 나온다. 그놈의 ‘세월’과 ‘고기’가 어떻게 다르며 무엇이 같고 무슨 뜻을 갖고 있는지를 나는 그때까지도 미쳐 알지 못했었다. “일랑이 그만치 당하구서두 아직 기다리는 걸 보면 곧은 낚시질하긴 다 틀렸구면 그려” 목까지 꼴딱 차 오른 고기바구니를 보고 낚싯대를 접으며 그가 하는 말이다. “ ...................” 해가 벌써 서산에 기울어 뚝방 너머 엷은 주황빛 하늘을 배경으로 산비둘기 한 마리가 하늬바람을 타고 포물선을 그리며 아스라이 사라져 간다.
국전에서 첫 만남 그는 영웅이었다. 그때는 그랬었다. 1960년대 초 4,19를 겪고 5,16을 맞으며 국전의 대 개혁과 함께 미술대학 3학년 재학생부터 출품자격이 주어지고 있을 때였다. 그는 나보다 한 학년 선배로 홍익대학 4학년이었고 나는 서울대학 3학년 학생이었다. 당시 국전은 대한민국에서 유일무이한 최고 권위의 미술전람회였고 화가들의 emddydans이었다. 경쟁자가 옆에 있는 친구들이 아니라 한참 선배인 기성작가들이었고 국전은 한치도 허용할 수 없는 처절한 한 판의 승부처였다. 내가 막 동양화를 전공으로 선택하고 나서 처음으로 국전에 출품했던 작품이 혁명을 상징하는 대장간 그림이었다. 입선만 되면 혁명의 메시지를 한 달 가깝게 전시장에 걸린 채로 전국의 대학생들에게 보일 수 있을 것이라는 소박한 생각에서 택했던 소재였다. 그런데 운이 좋았던지 뜻밖에도 특선을 하게 되었다. 의기양양하여 경복궁에 있던 전시장으로 달려가 책에서나보고 소문으로나 듣던 대가들의 작품과 경쟁자들의 작품을 유심히 관찰하고 연구하기에 이르렀다. 내심 자신감이 생기면서 오만기가 발동할 즈음 갑자기 발걸음이 얼어붙고 나를 주눅들게 하기에 충분한 거대한 화폭이 내 시야에 숨막힐 듯이 펼쳐지고 있는게 아닌가. 힘찬 먹선으로 거칠 것 없이 그어 내린 필선과 암갈색으로 채워진 우시장의 풍경은 내가 고향 땅 예산으로 피난 갔을 때 보았던 바로 그 생생한 현장의 박진감 그 자체였다. 그림 밑에는 금박지 위에 <무감시 특선 문교부장관상>이라고 까만 먹글씨로 선명하게 쓰여져 있었다. 한 마디로 무서운 필력이었다. 그런데 더욱 놀란 것은 바로 그 그림의 주인공이라는 사람이 그 작품 앞에서 기자들에게 작품을 설명하고 있었는데 자기가 홍익대학교 재학생이라는 것이다. 나와 같은 재학생으로써 너무도 반가워서 손을 덥석 내밀고 인사를 나누고 보니 뜻밖에도 같은 고향 사람인지라 내심 강력한 라이벌의식을 느끼면서도 반가움에 한동안 손을 놓지 못했다. 이렇게 해서 그 산동과 이 일랑은 만나게 된 것이다.
가장 빠른 등단에 가장 늦은 입성 자의반 타의반응로 산동은 홍익대학을, 나는 서울대학을 대표해서 한 판 실력을 겨뤄야 하는 숙명적인 만남이 시작된 것이다. 당시 국전의 권위가 천장부지로 그 위세가 대단할 즈음, 그와 나는 재학시절부터 연속 특선을 거머쥐며 졸업과 함께 가장 어린 나이에 국전에 추천작가가 되어 일찍 기성인의 대열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이렇게 가장 이른 등단이 가장 늦은 입성의 빌미가 될 줄은 그도 나도 알 수가 없었다. 그 후로 무슨 연유인지 그는 모교 강단에 잠시 머무는 듯싶더니만 이내 박차고 나와 혼자서 외로운 길을 걸어가야 했고 나도 외톨이가 되어 모교 언저리에서 변죽만 울리는 떠돌이가 되었다. 당시는 추천작가로서 6년동안을 쉬지 않고 출푸을 했을 경우에는 당연히 초대작가로 대우해 주는 제도가 있었다. 그러나 산동과 나는 그 혜택을 받지 못하고 겉돌아야 했다. 동병상련이라 했던가 동향에 동년배로 동일전공을 하는 우리는 국전 데뷔마저 같은 상황 속에서 같은 시기에 치러낸 화업 동지다. 그런 저런 연유로 해서 산동과 나는 늘 서로 좋은 경쟁자이자 협조자로써 상부상조하며 살아왔고 서러움마저도 함께 나눌 정도로 처지가 비슷했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그의 모교에서 그만큼 빠르게 정식으로 등단해서 약관의 나이에 국전을 졸업한 예가 일찍이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결국 그는 그렇게 단단한 실력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모교의 후배들을 가르치지 안고 중앙대학교에서 정년을 맞았으니 어찌보면 중앙대학교의 복이라고 하겠다. 이런 사정까지도 서로 닮은 우리이고 보니 나도 마흔 살을 훌쩍 넘긴 나이에 처음으로 실시하는 교수공채제도가 시행되고 나서야 12년의 기나긴 시간강사를 겨우 면하고 모교에 식구가 될 수 있었다. 이렇게 긴긴 세월을 인내로 살아가면서 겪어야 했던 말 못할 서러움을 나는 알고 있으며, 그는 분명 기억하고 있으리라. 그래서 산동은 일찍이 세월을 낚는 곧은 낚시질에도 도가 텄고 나의 철없는 기대에 혐오감을 느꼈는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는 영원한 맞수 20여년 전의 일이다. 지금은 전문위원으로 계신 이용 기자가 우리 두 사람을 경향신문 특별기획으로 특별취재를 했고 그래서 “우리는 영원한 맞수”라는 타이틀로 두 사람의 사진이 신문에 나란히 실려나갔던 일이 있었다. 산동과 나처럼 사회에는 전공이 같으면서 선의의 경쟁자로써 좋은 맞수들이 많을 것으로 믿고 이들을 찾아내어 서로의 장단점을 파악하고 경쟁력을 길러 상호간에 발전을 꾀한다는 기획 취지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어림 짐작으로 화단에서 그런 맞수들이 20여 쌍 정도는 무난히 나올 것으로 생각하고 그 첫번째로 우리 둘을 인터뷰해 간 것이었다. 그때 우리는 서로의 장점도 얘기했지만 단점도 신랄하게 꼬집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하여간에 그 내용이 너무 재미있다고 하면서 다음호의 맞수 커플을 찾는데 온갖 노력을 기울였으나 결국 찾아내지 못하고 단 한 번으로 맞수 시리즈는 끝을 내고 말았다. 왜 그렇게 많고 흔한 경쟁자들이 득시글거리는데 한자리서 인터뷰 할만한 맞수는 없는 것일까? 그때 우리는 그 좋은 기획물이 단명하게 끝나는 것을 아쉬워하며 이상하게 생각했었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니 세상에는 질시와 모함으로 상대를 적대시하는 적수는 널려있으나 자기와 동행할 적수는 찾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하물며 바둑을 두더라도 적수량 두어야 실력이 는다. 진정한 프로정신이란 접바둑이 아니라 맞수와의 대결에 있다. 산동과 나는 바둑에 맞수다. 그가 늘 큰소리는 쳐대지만 물르지만 않는다면 별 수 없는 맞수다. 바둑에서 마저 맞수인 것처럼 예술에서도 우리는 영원한 맞수다. 누가 더 세속적인 출세를 했느냐도 아니고 누가 더 오래 사느냐도 아니며 누가 더 건강하냐도 문제될 게 없다. 우리는 40년을 한결같이 영적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왔기 때문에 숙명처럼 그렇게 믿고 있다. 한평생 살아가면서 진정한 맞수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은총인가를 알아야 한다. 바둑에 맞수가 이웃에 살고 있을 때 우리는 행복한 것처럼 말이다. 상대를 폄훼하려는 적수는 혼자서 정하지만 상대를 존중해 줄 수 있는 맞수는 두 손바닥이 마주치듯이 쌍방관계에서 성립이 가능하다. 나는 그와 함께 정든 교단을 동시에 떠났다. 작년에 죽을 고비를 함께 넘기기도 했다. 그 동안 한국미술의 근원을 찾아서 새로운 방법을 모색해보겠다고 평생을 함께 고민하여 뛰기도 했다. 이제 천의무봉으로 세상 욕심 훨훨 털고 그 동안 못다한 그림이나 실컷 그리며 가끔은 둘이서 진야호로 곧은 낚시질을 하러 가보려 한다. 뒷일은 그렇게도 사랑하던 제자들에게 맡기고 말이다.
평창동 사자바위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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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묵과 채색의 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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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정 걸 (미술사, 미술평론) |
산동 오태학 (山童 吳泰鶴)은 한국의 토속정서를 회화 양식으로 심화시켜온 대표적 작가 중 한 사람이다. 그의 작업은 한국미에 대한 끊임없는 천착의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의 회화는 동양화로 이해되지만, 매우 구축적인 양상을 보인다. 화면 속의 선은 문인화에서 느껴지는 직관적인 선이며, 발색은 깊은 내면으로부터 우러나온다. 분채기법, 장지기법 등 전통기법의 현대적 변용과 한국적 정서에 기반한 회화세계의 추구, 그리고 수묵화에 대한 끊임없는 수련 등이 오태학 회화의 독자성을 만들어낸 기본 요소들이다. 이 글은 산동 오태학의 회화세계 중 한국화의 가장 실험적인 작업을 보여주었던 60년대와, 80년대부터 시작했던 석채화(암채화)의 의미, 그리고 잘 알려지지 않은 그의 수묵화에 대해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미술사적인 의미를 규명하는 일은 그에 합당한 근거를 밝혀야만 되는 것이어서 쉬운 작업이 아니다. 여기서는 미술사적 의미부여의 기초적인 단서가 될만한 내용들을 논의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이다. 60년대 한국화의 리더 오태학은 60년대에 현대 한국화의 새로운 양식을 찾아내기 위한 치열한 모색과 실험을 보여준 선구적 반열에 있었다. 그 시대를 대표할 만한 풍부한 기량과 예술적 감각이 돋보였던 화가로 인정하는 데 이의가 없을 것이다. 양식적으롣 새롭고 진취적이며 정제된 필치와 묘사력, 그리고 구성력을 갖춘 그림들을 발표했다. 그 작품들은 국전 최연소 초대작가라는 사실보다도 더욱 명확하게 그의 역량을 대변해 주고 있다. 60년대에 그는 한국화의 현대적 변화를 주도했던 리더로서 참신한 감각과 기량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청전 이상범과 운보 김기창으로부터 전통회화에 대해 공부했고, 그들 두 대가의 필치와 감각을 익혔다. 청전과 운보에게 산동은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화가로서 총애를 받았다. 산동의 초기 회화에서 그들의 영향(특히 운보의 영향)이 얼핏 보이기는 하지만, 그는 그들 대가들의 그늘 속에 안주하지 않았다. 그는 그들 두 대가를 섭렵하는데 만족했을 뿐 자신의 개성을 찾아내어 자신만의 독특한 회화세계를 세우는 데 뜻을 두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20세기 후반 수없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사조들에 연연하지 않고, 독자적인 세계를 개척해 왔다. 그 독자적인 세계의 바탕에는 동양회화의 원리와 자기 수행의 과정들이 들어 있다. 오태학은 다양한 양식을 펼치는 외향적 기질과는 대조적인 외길을 깊이 천착하는 예술가형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그는 기질적으로 치열하게 파고드는 열정적인 성품을 지녔으나 동시에 밖으로 내세우지 않는 겸손을 지닌 작가이다. 시류에 초연하고, 인기에 영합하지 않았으며, 오직 자신이 나아갈 길에 몰입해 온 화가이다.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 이즘과 개인이 이분법적으로 대립하고 갈등하는 구조 속에서 하나의 전형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20세기 후반이 한국회화는 특별한 전형이 만들어지기보다는 변화의 과정 속에 있었으며, 그 변화는 외부의 주도 속에 이루어졌다. 서구로부터 넘어오는 새로운 양식들의 수용과 심화의 연속이었다. 그의 젊은 시절도 그러한 범주 속에 있었다. 60년대의 그의 회화는 그러한 과정을 보여준다. 특히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면이 있었다. 80년대 이후의 그의 예술적 태도와는 다른 젊은 패기가 서려 있는 것이다. 바로 그 시점으로 돌아가서 그 작품들을 판단해 보면, 60년대에 그는 젊은 화가로서 한국화의 변화에 중요한 시도들을 보여주었다. 시대상을 반영하는 현실적 소재들을 선택하는 것은 그 시대 몇몇 전위적인 화가들이 시도하던 것이었지만, 추상적 회화로의 전환은 특히 돋보인다. 그때까지 전통화가들이 다루던 수묵의 변화와는 다른, 현대적 색채를 강하게 드러내는 추상성을 향해 수묵의 변화를 이끌어내고 있으며, 생명력 있는 동양적 필선들이 만들어내는 추상성은 서양적 추상과는 다른 깊잉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추상성에 대한 동양적 접근이며, 필선과 수묵의 운치와 정신이 감도는 추상의 세계이다. 그의 그러한 작업은 60년대라는 과도기적 시대에 한 획을 그을 수 있는 이른 시도였다. 동양회화가 가지고 있던 본래의 추상성을 확장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추상성에 대한 시도는 구별된다. 그것은 붓을 다루는 능숙한 솜씨와 수묵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는 불가능한 작업이다.
끊임없는 필묵의 수련 여기서 우리는 그의 그림의 바탕이 되는 선과 형태를 유심히 볼 필요가 있다. 그의 필선은 질적인 면에서 강한 힘과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끊임없는 연마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선이다. 형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그가 소재를 다룰 때의 형태들은 견고하며 어색한 구석이라곤 없다. 그는 끊임없는 사생을 통해 기본기를 연마하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 동야의 회화전통은 자연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정신을 담아내는 것이어서, 사물에 대한 깊은 사색을 통해 물리를 깨우치고 반복되는 사생을 통해 형태 속에 정신을 불어넣을 수 있는 능력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그는 일찍이 닭을 그리기 위해 살아있는 닭을 방안으로 가지고 들어와 몇 말 몇 일을 사생에 몰입하기도 하고, 비무장지대에 들어가 야생화를 사생하기도 했다. 그러한 연마의 결과로서 그의 작품 속의 필선들은 정신성이 느껴질 만큼 생명력이 충만한 선들이다. 그는 그의 그림을 영원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열정적으로 사생을 심화하고, 재료와 시간을 쏟아부어 작업하였으므로, 작품을 발표하는 일에는 관심을 쏟지 않았다. 시대의 흐름에 영합하기보다는 오직 자신의 그림 속에 몰입하며 살아왔던 것이다. 바로 그러한 점이 산동 오태학의 작가적 기질이며 예술적 성향이다. 그리하여 그는 외부로 알려진 것 이상의 깊이 있는 세계를 지니고 있다. 그가 발표하지 않은 수묵화의 문인화들을 보면 마치 옛 선승회화에서 느낄 수 있는 간결성과 정밀함이 통합되어 있다. 빠른 붓질, 어지럽게 난무하는 듯한 선들이 하나의 조화로운 장면을 잉루는 그 완숙한 경지에 매료되지 않을 수 없다. 서정적 풍속화와 같은 수묵담채화들, 사색에 잠긴 문인, 모래무지?메기?개구리?연꽃?버드나무?소나무 등 문인화의 소재들을 다룬 수묵화들은 그 필력의 경지가 어느 정도인지 잘 보여주고 있다. 먹색은 맑고 부드러우며, 필선은 강약이 잘 조절되어 리듬감에 차 있다. 옛 것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양식의 구사, 맑고 향기로운 기분의 표현 등 현대 문인화의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 매혹적인 세계는 시대양식을 떠나 보는 이의 마음을 끈다. 문인들이 추구하던 청담한 세계를 맛볼 수 있다. 그러한 예술적 성취들은 그가 오랜 기간 몰입해온 석채화 속에 동질의 것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석채와 산동(山童)의 양식 70년대부터 시작한 석채작업은 그의 예술방향을 외곬의 것으로 돌려놓았다. 석채라는 재료에 심취한 이후부터 그에게서 수평적 변화는 크게 일어나지 않았다. 채색화라 할 수있는 석채화를 통하여 줄곧 수직적 깊이를 추구해 왔다. 30여 년을 추구해온 그의 석채화 세계는 오태학 회화의 전형이 되었다. 그러나 그가 석채화를 추구하면서도 수묵작업을 계속해왔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수묵이 바탕을 이루지 않는 채색화는 그에게 있어서 무의미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석채화는 단순히 채색화로 규정할 수 없다. 그의 채색화는 전통 채색화와는 뚜렷이 구분되는 여러가지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그것을 채색화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고 규정할 수도 있지만, 석채를 이용한 그의 회화는 채색화로서의 의미만 가지는 것은 아니다. 석채는 재료일 뿐이고, 그것이 채색화의 재료라는 점에서, 즉 재료적 측면에서 채색화인 것이다. 따라서 그의 석채화가 채색화 전통의 개량이라거나 채색화의 새로운 개척이라고 해석할 수는 없다. 채색과 수묵의 통합이라고 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의 석채화 속에는 채색화 전통과 수묵화 전통, 그 밖의 전통기법들이 응용되었으며, 한국적이고 토속적인 정서가 담겨 있다. 박수근이 유화물감을 두텁게 쌓아서 한국적 미감의 원형을 보여주었듯이 그의 회화가 추구하는 것은 석채를 쌓아올려서 한국적 정서를 담아내는 것이었다. 그는 시대양식이나 시대성을 반영하기보다는 한국인의 정서에 호소하는 양식을 만들어내고자 했다. 현대성이나 동시대성보다는 표현하고자 하는 미학적 본질이 무엇인가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의 작품에서는 짙은 서정성이 느껴진다. 그 서정성은 아득한 깊이의 기억속에서 꺼내온 서정성이다. 어린 시절 백마강변에서 벗들과 노딜던 서정성이기도 하고, 중년의 기억속에 잠재되어 있는 그리움의 서정성이며, 한국인의 고향에 대한 회귀적 본능이다. 그의 회화적 서정성은 견고하고 깊다. 그 견고함은 구축적인 화면 구성에서 온다. 그것은 적묵법에서 비롯된 것이다. 먹을 쌓아나가듯 그는 석채를 쌓는다. 쌓여진 석채는 투명성을 유지하는 것이어서 바탕의 색채를 배어나게 한다. 적묵법적 방법으로 인한 그의 석채기법은 깊이와 투명성을 간직하고 있다. 현대에 석채를 사용했던 어떤 화가의 작품과도 그의 석채화는 구별된다. 채색화의 범주에 있는 여타의 석채와는 근본적인 차이를 지니고 있다. 석채가 일본의 것이긴 하지만, 그의 석채에선 한국성이 물씬 풍겨나온다. 그는 석채를 단지 영구한 보존성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오랜 기간 석채를 사용함으로써 그의 회화를 석채라는 재료적 해석으로부터 접근해서는 안된다. 그에게 있어서 석채는 영구히 보존될 수 있는 재료 이상의 의미는 없다. 석채는 수단이었을 뿐 목적은 아니었다. 석채를 다룸에 있어서 적묵법적 기법을 사용했다는 것은, 그의 회화적 태도가 채색화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점을 시사한다. 동양회호에서 먹을 쌓는다는 것은 유화의 그것과는 사뭇 다른 것이다. 옛 화가들은 먹을 쌓는 기술을 최고의 경지로 쳤다. 경지에 오르지 못한 화가의 적묵법을 사용하면 지저분해지고 탁해진다. 적묵법의 적용을 통한 석채의 경영은 그의 화면을 두텁고 맑게 해주고 있다. 바탕의 색이 우러나와 깊고 맑은 분위기를 연출함으로써 그의 석채화는 다른 화가들의 그것과 구별된다. 그의 석채화에서 특히 뛰어난 것은 필선이다. 두터운 화면에 새겨진 듯한 선은 고졸하면서 강하고, 직관적이다. 서양화의 선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선이다. 그것은 선이 아니라 리듬이고 살아있는 선이다. 그 선의 맛은 높은 경지의 필력이 없으면 불가능한 선이다. 그의 그림 속에 선은 수묵회의 선맛을 그대로 유지한다. 그의 회화적 목적은 한국적 정서를 진솔하게 담아내는 데 있었지, 재료적 실험이 아니었다. 우리는 석채라는 재료에 얽매여 그의 회화를 채색화적 시각에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나는 그의 회화를 관찰하면서 산동 회화에 있어서 석채의 의미는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었다. 그가 석채를 구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재료일 뿐이지 목적이 아니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산동회화에 나타나는 소재들 또한 그의 회화적 목적이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었다. 그의 회화에서 중요한 것은 그림의 소재가 아니라, 발색과 선, 깊이, 우러남, 명징선 등 작품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예술적 요소들이다. 고대 벽화를 보는 듯한 아득한 깊이, 기억 속의 풍경을 보는 듯한 아련함, 저 깊은 곳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노을처럼 아름다운 빛, 화강암에 새겨진 경주남산의 선각 불상을 보는 듯한 선의 맛은 그의 회화가 주는 하나의 선물이다. 급변하는 다양한 현대 회화속에서 그의 회화는 양식적으로 두드러지지는 않는다. 그것은 어쩌면 석채라는 재료와의 필연적인 만남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일관된 석채작업은 그를 평가하는 데 있어서 장애요소이기도 하다. 석채는 그를 양식적 다양성을 추구하는 것을 제한했다. 그런 점에서 그의 수묵화들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 두번째 단락에서 언급한 그의 수묵화들은 여기로 그린 듯한 것들이지만, 그의 회화적 기량과 수묵에 대한 완숙한 경지를 보여주며, 그러한 감각과 기본기가 석채화의 바탕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의 세계에 대한 몰입, 영원성에 대한 추구, 시류에 대한 무관심 등이 그를 평가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60년대에 보여준 그의 참신성과 새로운 모색에도 불구하고 수십년간 그는 하나의 목적만을 위해 화가로서의 명성을 얻는 일에 무관심했다. 그는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수십일씩 걸리는 석채작업을 하면서 20여 년을 지내왔다. 새로운 양식을 고안하여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자 노력하는 대신, 하나의 양식을 견고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수많은 날들을 지내왔다. 그러므로 동시대 양식들에 대한 의미가 퇴색되어질 훗날에 그의 그림이 지니는 깊이와 힘은 훨씬 높은 평가를 받게 되리라 생각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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