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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순종의 능력
말씀 : 눅1:26-39
성 프란시스의 인품과 명성이 드높은 때 성자 프란시스가 어느 날 제자가 되겠다고 자원하는 제자 후보생을 만났습니다. 선생님의 제자가 되어 신앙의 훈련을 닦고 싶습니다. 두 사람을 바라보던 프란시스는 이런 요청을 했습니다. “저 밭에 나가면 배추들이 고랑을 지어 있습니다. 한 고랑씩 맡아서 배추를 뽑아 가지고 뿌리는 하늘 쪽으로 이파리는 땅 속으로 들어가도록 다시 묻어주십시오” 라고 요청을 했습니다. 한 사람은 말없이 배추밭에 가서 한 고랑을 다 뽑아서 거꾸로 박는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몇 번 해 보다가 ‘이 성자가 여기에서 오랫동안 도를 닦더니 완전히 돌았구만’ 하면서 손을 털고 가 버렸습니다.
왜 프랜시스는 제자가 되겠다고 하는 두 사람에게 이런 이상한 요구를 했습니까?
제자가 되는 첫 번째 덕목은 순종입니다, 순종할 마음의 준비가 돼 있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의, 예수님의 뒤를 따를 수 없습니다. 제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그 내용이 무엇이든지간에 그 이유를 묻지 않고 순종할 수 있는 마음의 자세가 먼저 되어야 그 길을 갈 수 있겠기에 프랜시스는 그들의 제자로서의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지를 확인한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비상식적인 이야기가 많이 등장 합니다. 이해될 수 없고 논리로나 이성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이야기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바로 그러한 순종자들을 통해서 위대한 구원의 역사가 아담과 하와가 넘겨줘버린 이 땅의 구속사의 회복의 역사가 그 순종자들을 통해서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우리는 마리아를 중심해서 몇 몇 사람의 비상식적인 태도를 보면서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응답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모델을 찾기 원합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면 그것이 논리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고 윤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순종했던 몇 몇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과연 나는 바른 순종의 길을 걷고 있는가를 점검하시기를 바랍니다.
엡2:19-20절 말씀에 보면 내가 새롭게 거듭난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어떤 자세로 임해야 될 것인지에 대한 우리 신분에 대한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19-29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아멘!
우리가 누구냐고 하는 신분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는데 외인도 아니고 손님도 아니다. 구별된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다. 하나님의 권속이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움을 입은 그리스도를 모퉁이 돌로 한 교회다.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 가지 신분을 확인해 봅시다. 하나님의 권속이라는 말은 패밀리,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시민이라고 하는 말은 군신관계를 말합니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움을 입었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말씀을 전달하는 사역을 맡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를 가지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인 사람들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말씀이 살아 있어야 합니다. 말씀의 권위를 인정할 때 온전한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세 구조, 세 가지 신분, 내가 하나님의 가족이고 하나님의 백성이며 말씀에 근거해서 살아야 할 사람이다 라고 하는 이 세 가지 기초에 근거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순종하고 하나님께 쓰임을 받았습니다. 이 세 구조를 중심으로 어떻게 하나님께 순종했는가를 우리가 한번 오늘 찾아보기를 바랍니다.
첫 번째로 가정적인 구조로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십니다.
이 가정의 기본 바탕은 ‘신뢰’입니다. 신뢰가 갔을 때 우리는 비로소 순종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을 신앙하는 마음, 하나님을 믿는 마음이 없이는 우리가 신뢰할 수 없고 순종할 수 없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의심하고 아버지가 아들을 의심하게 되면 이미 가정의 구조는 깨어집니다. 아내가 음식을 차려 왔는데 ‘보험을 타기 위해서 뭐 약을 넣지 않았나’ 생각한다고 그러면 벌써 이 가정은 붕괴된 가정입니다.
가정은 상식 보다 더 위에 있습니다. 가정을 지탱하는 구조는, 가정을 지탱하는 힘은 법이 아닙니다.
가정은 윤리다 도덕보다도 더 높은 구조에 있습니다. 자식이 잘못해도 사람들은 손가락질을 하고 ‘저런 자식 낳아 놓고도 미역국 먹었나’ 하고 비방할지 모르지만 내 자식이기 때문에 내가 보호해야 되고 변명해야 되고 기다려 줘야 됩니다. 내 부모님이기 때문에 남들은 무식하다고 말할지 모르고 또 사회적인 지위가 높지 않다고 폄하할지 모르지만 나를 길러 주시고 내 생명을 오늘날까지 지탱시켜주신 내 부모님이기 때문에 비상식적인 행동을 해도 비윤리적인 행동을 해도 내가 보호해야 되고 내가 부양해야 되고 내가 섬겨야 됩니다. 가정은 법이나 상식, 윤리보다 훨씬 더 높은 위치에 있습니다. 이것을 생명의 관계라고 말합니다.
인류 최초의 범죄가 무엇입니까? 선악을 아는 지식이 밝아진 겁니다. 사람을 볼 때 선이다 악이다 하고 보기 시작하면 벌써 내가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는 겁니다. 우리는 사람을 볼 때 선악의 구조로 보지 않고 생명나무의 질서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섬겨야 할 자식이다. 내 부모가 나를 위해서 삼십년 이상 기다려 주었듯이 나도 내 자녀를 위해서 삼십년쯤 기다릴 수 있다. 이것이 교회 생활의 질서가 되어야 되고 사람을 대할 때 우리의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타락한 이후에 인간의 눈은 사람을 볼 때 정죄의 눈으로 봅니다. 뭐가 잘못되고 교회는 뭐가 부족하고 목사님은 뭐 허우대는 멀쩡한데 속이 안 찼고 이런 식으로 선악의 구조로 보기 시작하면 벌써 타락이 시작된 거고 이건 에덴의 풍요로움을 놓치고 있는 겁니다. 조금 부족해도 조금 못났어도 내 자식이기 때문에 사랑스럽고 내 부모이기 때문에 내가 인격과 관계없이 내가 존경해야 되고 외모와 관계없이 이쁘다고 말할 수 있는 구조, 아멘? 그런게 복음이고 그런 관계가 신앙의 구조입니다.
가정은 선악의 구조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법의 구조 속에 만나는 것이 아니라 비상식적이고 초 상식적인 것들이라도 용납되는 것이 가정입니다. 성경에 이런 비윤리적이고 비상식적인 이야기를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의 아브라함의 얘기를 우리가 잘 압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니 아들을 나보다 더 사랑하느냐 내가 니 아들보다 좋으냐 희한한 요청을 하십니다. 아들을 잡아서 번제의 제사로 드리라는 겁니다. 당시에 몰렉신이 있었습니다. 이 몰렉신을 섬기는 방법은 아들 가운데 제일 잘난 아들을 불이 타고 있는 그 불구덩이 속에 그냥 산채로 집어넣습니다. 우리나라 에밀레종의 전설이 있듯이 하나님께서 아주 금하셨던 종교가 몰렉 종교입니다. 그래서 신명기서나 레위기서를 읽어보면 ‘자식을 불 가운데로 집어넣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그렇게 말씀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런 비상식적인 요구를 하신 겁니다. 아들을 잡아서 양을 죽이듯이 죽여 가지고 제단에 그 아들을 바쳐라 이건 상식적인 얘기도 아니고 논리적으로도 이해할 수 없고 사랑의 하나님이 이런 요구를 한다고 하는 것은 이해가 안 되는 얘깁니다. 그렇게 요구하는 하나님도 이해가 잘 안되고 그 말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묵묵히 삼일씩이나 고통 가운데 인내하면서 모리아 산까지 데리고 가서 아들을 죽이겠다고 하는 아브라함도 헷갈리고 이미 이삭의 나이가 열대여섯살 청소년기를 이미 넘은 나이로 학자들은 추정을 합니다. 백열살이 넘는 아버지의 손에 끌려서 ‘나를 잡아 잡수십시오’ 하고 목을 내 놓는 이삭도 이해가 안 되고 하는 일들이 이성이나 논리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한나의 일을 우리가 잘 압니다. “내게 자식을 주시면 그 자식을 내가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뭐 거기까지는 우리가 이해가 됩니다. 아이가 태어났는데 젖을 떼자마자 빨리 떼는 가정은 삼개월 아이가 늦게까지 엄마 젖을 요구하면 6개월까지 젖을 먹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길게 잡고 한 사오개월 잡아 봅시다. 사오개월 되는 그 아이를 포대기에 싸가지고 갖다 바치는 그 엄마가 제 정신입니까? 배운 사람이라면 6세 이전이 아이의 경험이 아이에게 얼마나 중요한 인생을 기초하는 가치관이 6세 이전에 형성이 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그 젖먹이 아이를 포대기에 싸 가지고 가서 갖다 바치는 그 엄마의 마음이나 또 그런 애를 받는 엘리도 그렇지요 자, 엄마가 생각할 때 엘 리가 좀 교양스럽고 인격적인 사람이면 우리가 이해를 하지요. 이 제사장이 잘 키워주겠다 하겠지만 이미 엘리는 영성이 죽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음성도 들을 수 없고 이스라엘에 등불이 이미 꺼져 버린 상황입니다. 얼마나 비둔했던지 의자에 앉아 가지고 졸다가 떨어져 가지고 목이 꺾여 죽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고 이가봇이라고 하는 손자의 이름을 지어야 할 상황입니다. 그런 썩은 제사장에게 젖먹이 아이를 갖다 바치는 한나가 제 정신입니까? 그건 상식이 통하지 않는 얘깁니다. 누가 봐도 그것은 이해될 수 없는 얘깁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런 한나의 헌신을 통해서 썩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마감을 하고 새 왕정시대 사울 왕을 세우고 그리고 역사에 빛나는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던 그 사무엘을 하나님이 세우십니다. 이해될 수 없는 얘기지요?
우리나라에 성자로 일컬어지는 손 양원 목사님 ‘사랑의 원자탄’ 이라고 하는 책으로 그 분의 이야기를 우리가 접할 수 있습니다. ‘공산당은 싫어요’ 이런 얘기를 우리는 많이 듣고 자랐습니다. 그 공산당에 의해서 두 아들 동인이와 동신이가 죽었습니다. 순교를 했습니다. 슬퍼하고 좌절하고 낙심해야 할 이 아버지가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내 아들들을 미국에 유학 보낼려고 했는데 미국 보다 더 좋은 천국으로 데려 가셨으니 하나님 오히려 더 감사합니다” 그리고 두 아들로 인해서 감사의 제목 열 가지를 하나님께 드립니다. 거기까지는 우리가 이해를 하지요 그 분이 목사니까! 그 정도는 훌륭한 분이니까 그 정도는 할 수 있겠다. 생각이 되는데 그 아들들을 죽였던 원수를 양자로 삼아서 평생 데리고 삽니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얘깁니다.
성경은 이런 비상식적인 이야기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머리로 납득할 수 없는 얘깁니다. 요즘 이런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가 다 손가락질 하고 ‘광신자다 저런 사람들 때문에 하나님이 모독을 당한다. 교회 전도길 막혀!’ 하면서 혀를 찰 대상들입니다. 아브라함도 한나도 손 양원 목사님도 하나님의 말씀하심 앞에 순종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얘기를 하고 있는데도 신앙은 그것을 훌륭하다고 평가해 줍니다.
‘주님이 원하신다면 언제든지 드릴 수 있습니다. 주님이 내게 요구하신다면 무엇이라도 바칠 수 있습니다’ 신뢰관계, 하나님을 신앙하는 사람,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들, 그 분의 인격과 그 분의 계획을 믿는 사람들은 드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선배들의 마음의 자세였습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순종해야 할 또 하나의 구조는 통치구조입니다.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군신의 관계, 왕과 백성의 관계, 다스리는 자와 다스림을 받는 자가 순종으로 만나고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라고 말합니다.
마21장을 보면 또 하나의 우스꽝스러운 광경을 우리가 목도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서 이제 백성들이 나와서 자기 겉옷을 벗어서 바닥에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다윗의 자손 예수여 당신을 환영합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극적인 상황이 펼쳐지는데 정작 왕으로 입성하시는 모습은 그 몰골이 숭악합니다. 어린 나귀 새끼를 타고 비틀거리면서 들어오시는데 누가 봐도 그것은 우스꽝스러운 모습입니다.
마21:3절에 보니까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마21:6-7절에 보니까 ‘제자들이 가서 예수의 명하신 대로 하여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재미있는 모습입니다. 스가랴서의 말씀을 인용해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입성하실 때 나귀를 타고 입성하실 것이다. 그래서 나귀를 데려 오라고 그러는데 그 나귀가 한 번도 멍에를 매 보지 않은 어린 새끼 나귀입니다. 대개 소나 말 나귀를 길들일 때 사람을 태우거나 수레를 끌게 하거나 일을 시킬 때 먼저 나귀에게 멍에를 매우고 반항하지 못하도록 훈련을 시킵니다. 일정 기간의 훈련을 통해서 익숙해 졌을 때 수고와 섬김이 익숙해졌을 때 그 다음에 사람이 타거나 짐을 싣게 합니다. 그런데 한 번도 멍에를 매 보지 않은 어린 새끼 나귀를 주님이 요청을 하신 겁니다. 제자들도 문제지요? 제 8계명에 내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 도둑질 하지 말라고 그랬는데 아, 스승이 그렇게 말을 하면 “평소에 가르치심하고 좀 다르십니다. 이건 남의 것을 그냥 가져 오는 건데 이래도 됩니까” 하고 이렇게 시비를 걸어야 하는데 그냥 묵묵히 갑니다. 주인도 조금 이상한 사람이에요. 왜 가져가느냐 누구를 위해서 쓰느냐 물어야 되는데 ‘주가 쓰시겠다하라’ 그 말 한마디 하면 그냥 내 보내준다는 거예요. 실제로 주인이 묻지 않고 그냥 돌려줍니다.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 한마디면 됩니다.
그 분은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그 분은 우리의 인생을 책임지시는 소유주이십니다. 그 분이 쓰시겠다고 하는데 무슨 시비를 가리고 도덕을 얘기하고 해야 되는지 안 해야 되는지 따질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주’라고 표현하셨습니다. ‘큐리오스’ 그 분은 모든 것의 소유주이십니다. 창조주이십니다. 지금도 그 분은 우리의 역사를 우리 인생의 갈 길을 인도하시고 통치하시는 분이십니다.
사43:1절 말씀에 ‘너는 내 것이라 내가 너를 책임진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내가 너를 값을 주고 샀다. 구스와 스바를 대속물로 주었고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너를 샀다’ 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롬14:8절에 보면 바울이 동일한 고백을 합니다.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하늘과 땅의 주인이실 뿐만 아니라 내 지갑과 내 시간과 내 건강의 주인이십니다. 내 배우자도 내 자녀도 내 부모님도 모두 다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이 달라 하시면 내가 적신으로 왔기에 적신으로 가는 것이 가합니다. 빈손으로 간다 할지라도 내가 무슨 할 말이 있습니까? 다 가져 가셔도 나는 할 말이 없습니다. 이것이 욥의 신앙 고백이었습니다.
사렙다에 한 과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가뭄이 들어서 먹을 것이 없어서 마지막 가루 한 움큼 기름 한 병이 남아 있는데 엘리야가 거기를 가서 “무엇이 있느냐” “가루와 기름 조금 있습니다” “그걸 가지고 빵을 만들어서 나를 공궤하라” 말이 됩니까 이게? 이런 목사를 여러분 따라가겠습니까? 벼룩의 간을 내 먹지, 세상에 그 가난한 과부에게 도움을 못 줄지언정 마지막 있는 재산까지 다 털어 가지고 자기를 섬기라고 이럴 수가 있는 겁니까? 엄마야 배고프면 할 수 없지만 견딘 수 있지만 자식 하나 남은 거 마지막 있는 것 탁 털어서 실컷 먹이고 먹고 죽은 귀신은 화색도 좋다고 그렇게 갈라고 생각을 했는데 세상에 잔인한 목사가 와 가지고 있는 것 다 털어서 내 놓으라고 하니 이래도 되는 겁니까 이거? 그런데 그런 비상식적인 이야기들로 하나님의 구속사가 진행이 됩니다. 기가 막힌 일입니다.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내 인생의 주인 되시기 때문에, 내 삶을 인도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그런 요구를 할 수 있고 그런 부탁을 들었던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묻지 않고 시비를 가리지 않고 응답합니다. 순종으로, 순종으로 응답함으로 하나님의 구속사를 이루어 드리고 있습니다.
롬11:36절은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간다’ 라고 말씀합니다.
주가 쓰시겠다 하면 드릴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이요 시민일 뿐만 아니라 또 하나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움을 받은 교회의 지체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움을 받은 자라 그리스도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리스도를 중심한 말씀의 터 위에 우리 인생을 기초해야 됩니다. 교회는 말씀의 터 위에 서 있습니다. 주님 말씀하시면 내가 듣겠습니다. 내가 계획하고 있는 일들이 주님 뜻이 아니라고 한다면 나는 그 가는 길을 거절하겠습니다. 주님 뜻이 우리 삶의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말씀이 리더십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말씀의 권위가 성도의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면 꼬박 죽어야 돼요. 이스라엘의 특징이 뭡니까? 말씀,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그러면 천지가 뒤집어져도 그것은 이루어지는 겁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장점입니다. 우리 삶 속에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인정할 수 있는 순종이 있기를 바랍니다.
마리아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이것도 아주 비상식적인 얘기 아닙니까? 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12-15살이 되면 우리나라로 말하면 여중생입니다. 어느 날 이웃집에 있는 여중생의 배가 쑥 불러왔다 그 아이가 ‘성령으로 잉태되었다’ 그러면 누가 그걸 믿겠습니까? 여러분 믿겠어요? 요즘처럼 성이 자유화 되고 개방된 시대에도 우리가 그걸 믿기가 어려운데 2000년 전은 그때는 여러분 상상 할 수도 없는 얘깁니다. 하나님도 너무 짓궂지 않습니까? 좀 나이가 드신 분, 베들레헴에는 노처녀가 많았대요. 처녀가 애를 낳았다고 하니까 전부가 다 자기가 메시아의 어머니가 될려고 시집도 안가고 기다리고 있었대요. 그건 좀 나이가 있고 노련하고 지혜를 가지고 피해갈 수 있는 그런 사람을 선택해서 배가 불러오면 얼마나 좋습니까? 애가 무얼 안다고 그 불쌍한 애를 뭐 하나님이 인신매매하실 분도 아니실 텐데 꼭 그렇게 하셔야 했습니까? 마리아가 이것을 받아들이게 되면 온갖 비난을 받아야 되고 가족들에게 버림을 받게 되고 집안에서 쫓겨날 수도 있습니다. 약혼한 요셉에게도 버림을 받게 되고 “이 아이는 내가 모르는 아입니다” 하고 한마디만 하면 돌로 그 자리에서 죽입니다. 그것이 당시 이스라엘의 법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을 감내해야 합니다. 어린 소녀가 여중생이 이런 엄청난 고통을 감내할 때에 그 상황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의 계집종입니다. 둘레입니다”
우리나라 씨받이는 애 낳아주면 논밭이라도 얻어먹어요. 그런데 여기 ‘둘레’ 라고 하는 말은 내가 임신해 가지고 애를 낳고 맞아 죽어도 할 말이 없습니다. 아무런 댓가도 보상도 기대할 수 없는 그런 개념입니다. ‘나는 둘레입니다’ ‘나는 둘레입니다’ 내가 이 일을 감당하다가 욕을 먹고 사람들에게 버림을 당하고 죽임을 당한다 할지라도 나는 감내하겠습니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구속사는 이런 순종자들을 통해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눅5:5절을 보면 베드로가 희한한 고백을 합니다.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이것이 교회의 기초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면 제가 순종하겠습니다’ 우리가 한번 유추를 해 보십시다. 꼭 하나님이 말을 하고 하셔야 됩니까? 그냥 지나가는 소녀 딱 쳐다보고 “임신이 돼라!” 그러면 되잖아요. 그런데 왜 와서 천사를 통해서 물어요. 안 물어도 할 말 없잖아요. 하나님 마음이라면 뭐라 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동의를 구합니다. 이게 구속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멋진 소명, 기가 막힌 부르심이 있다 할지라도 엄청난 은혜를 주셨다 할지라도 내가 동의하지 않으면 내가 순종하겠다고 결단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쓸 수가 없습니다.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의 비극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그토록 많은 기적과 신비로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이 끝까지 응답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 시작!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 이 고백이 없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쓰시지 않습니다. 구속사입니다. 여러분 순종은 기회입니다. 아무나에게 하나님이 헌신할 기회를 주지 않습니다. 준비되었던 사람, 메시아의 오심을 기다렸던 사람 주께서 이런 헌신할 기회, 순종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내가 하겠습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응답을 해야 합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시간을 요구하신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브라함에게 요구하셨듯이 비상식적인 아들을 내 놓으라고 하신다면 여러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재산을 말씀하신다면 주님이 내게 있는 재능을 요구하신다면 여러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바리새인처럼 시시비비를 가리면서 따지고 정죄하고 메시아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겠습니까 아니면 주가 쓰시겠다 하라! 주의 선한 계집종입니다. 말씀대로 이루어지기 원합니다. 고백하는 여러분이 되시겠습니까?
순종은 특권입니다. 순종은 기회입니다.
순종은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영광스러운 축복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순종하십시다. 비상식적인 초월적인 얘기, 비논리적인 얘기를 하신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주님 말씀이시라면 목숨을 바쳐서라도 제가 순종하겠습니다. 이 소녀 마리아의 헌신을 통해서 메시아가 이 땅에 오셨고 전 인류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나의 작은 헌신, 상식을 초월한 말씀하심 앞에 순종하는 나의 결단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속사가 진행이 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얻게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