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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5대제국
5대 제국을 정리하면서 작은 민족이 민족주의로 나가고, 제국주의를 꿈꾸며, 제국으로까지 가면 제국의 최고 통치자는 결국 교만해져 스스로 전지전능(全知全能)하고 무소부재(無所不在)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속성을 자기의 것인 양 착각을 하는 것이지요. 결국 제국은 ‘제국이여 영원하라’는 구호를 외치나, 오히려 모두 하나같이 다 멸망했습니다.
인간은 시간과 공간과 이념의 기반 위에 서 있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시간을 과거, 현재, 미래로 나눕니다. 우리가 현재를 살면서 과거나 미래를 동시에 살 수는 없기 때문이지요. 공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동으로 가면 나머지 서와 남과 북은 갈 수 없습니다. 이념도 그렇습니다. 보수와 진보의 자리에서 상대 진영은 가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다 포함하고 계십니다.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시기 때문입니다.
선행 학습 - 애굽(이집트)과 성경
3,400년 전 애굽, 그리고 2011년 다시 주목받는 이집트
이집트는 B.C 20세기경부터 즉, 4,000년 전에 이미 최첨단 산업인 농업을 선도했고, 최첨단 무기들인 병거와 일반 병거로 구분해서 보유하고 있었다. 피라미드, 스핑크스, 카르낙 신전, 오벨리스크들의 건축물은 불가사의한 건축물들이며 미라의 비밀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히브리 민족을 노예화해서 120만 명의 무임금 노동력을 확보해 상상추월의 경제적 효과를 창출했다. 헤로도토스는 일찍이 ‘이집트는 나일 강의 선물’이라고 말했다. 고대 4대 문명의 발상지며 성경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나라이다. 그런 이집트가 2011년 30%의 실업률을 기록하고 도시 청년 실업률은 70%라는 심각한 경제난을 겪고 있다. 30년 독재에 신음하는 안타까운 나라이다.
민족, 민족주의, 제국주의, 그리고 제국
‘민족’은 기본적으로 문화적 특징을 바탕으로 설정된 범주 : 아브라함을 불러 민족을 삼고, 모든 민족이 복을 받게 하겠다고 하심
민족주의 : 민족의 통일, 독립, 발전을 지향하는 이데올로기이자 그 운동을 말함 ‘주의’라는 말‘ism'가 들어가면 그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다른 것을 배타적으로 여길 수 있어서 위험하다.
제국주의 : 한 국가가 다른 국가를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지배하려고 시도하거나 실제로 지배하는 상태
제국 : 임페리움이라는 용어는 로마 공화정 말기와 제정 초기에 로마법의 권위가 통용되는 공간 영역을 의미했다. 본래는 군사적 총수가 가진 최고 권위를 의미했는데 거기서 지배라는 일반적인 의미가 파생됨
*. 다윗은 130만 이라는 상비군인을 보유했으나 제국을 이루려고 하지 않았다. 다윗의 위대함이다.
제국과 제사장 나라
제국과 제사장나라의 공통점은 둘 다 민족에서 출발했다. 차이점은 제국은 민족을 계급화 했고, 제사장 나라는 민족 대 민족을 동등하게 하나님 앞으로 가게 했다.(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애굽 총리 요셉과 애굽 / 애굽 왕자 모세와 애굽 / 제국 애굽의 추락: 홍해 사건
애굽 제국이 추락한 이유는 하나님의 백성 히브리 민족을 박해해서 하나님이 내리시는 아홉 가지 재앙으로 나라가 초토화 되었으며, 마지막 10번째 재앙으로 장자들이 죽으면서 질서에 대 변화가 일어났고,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홍해까지 쫓아가서 수많은 군사들이 몰살당하면서 추락 하게 된다.
애굽 공주를 부인으로 맞이한 솔로몬
솔로몬 시대에 이스라엘이 얼마나 부강했으면 애굽이 공주를 솔로몬에게 주면서까지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했을까? 당시 솔로몬은 1,400대의 병거와 12,000명의 마병을 소유하고 금으로 방패를 만들었는데 방패 하나에 600세겔의 금이 들었다고 했다. 이러한 방패를 200개를 만들었으며 금으로 작은 방패 300개를 만들었다고 했다. 하나님이 복되게 하시는 은총의 역사를 보게 된다.
애굽의 운명을 결정한 요시야
앗수르와 오랜 친구였던 스키타이가 배신하자 메대와 손을 잡은 바벨론이 앗수르를 공략하여 니느웨를 빼앗게 된다. 이때 애굽은 니느웨를 차지하기위해 전쟁을 일으키는데 이때 애굽을 막아서서 치열한 전쟁을 벌인 왕이 요시야 왕이다. 므깃도에서 진을 뺀 애굽은 니느웨를 포기해야했다. 이 전투에서 나유다의 요시야가 전사하자 애굽은 그들의 구미에 맞는 여호야김을 왕으로 세우고 조공을 바치게 한다.
므깃도 전투(Megiddo/B.C.609)와 갈그미스 전투(Carchemish /B.C.605) / 애굽의 멸망
므깃도 전투는 애굽과 남유다와의 전쟁이고 갈그미스 전투는 애굽과 바벨론과의 전쟁이었다. 이 전쟁에서 애굽은 바벨론에게 패하고 망하게 된다.
하나님의 세계경영
애굽의 키워드는 ‘자연’이다. 애굽이 제국의 꿈을 키웠지만 결국 히브리 민족의 저항으로 그 꿈을 접어야 했다. 좋은 입지 조건에서 큰 나라를 이루었던 애굽도 하나님이 징벌하시므로 그 명을 다하게 되었다.
앗수르 제국과 성경
520년간 상(上)아시아의 주인 앗수르
520년간 상 아시아를 지배했던 앗수르는 그 유적이 발견되지 않아서 설화 속의 나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영국의 고고학자 레이어드가 1846년부터 약 7년간 니느웨를 발굴하는데 성공하게 된다. 니느웨 성은 도시를 둘러싼 성벽의 길이가 13km, 성벽의 높이가 200피트(60m이상), 성벽의 두께는 마차 3대가 나란히 달릴 수 있는 넓이, 5개의 성벽, 3개의 외호로 수비외어 있고, 변두리는 30채도 넘는 사원들이 금과 은으로 찬란했다고 한다. 이러한 니느웨가 성 위로 물이 범람해서 토사가 20피트(약6m)나 쌓여 도시 전체가 땅 속에 묻혀있었다.
대영 박물관과 앗수르 유적 / 요나 선지자(B.C. 8세기)와 앗수르
북이스라엘과 앗수르
엘리야, 엘리사, 아모스, 호세아 선지자와 앗수르
앗수르의 식민지 정책과 사마리아인
남유다의 외교 정책과 앗수르의 제국주의
남유다 아하스 왕의 치명적 실수
이사야 선지자(B.C. 8세기)와 히스기야의 국방 외교 정책 대결
1867년에서 1870년까지의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고고학자 캐슬린 케년은 히스기야가 판 터널의 역사성을 입증했다. 물을 끌어들인 거리가 1천2백 규빗에 달한다고 했다.
앗수르의 언어 천재 랍사게의 무지
앗수르 군대 18만 5천 명의 죽음에 대한 헤로도토스의 기록
앗수르의 군대가 남유다를 점령하기 위해서 왔으나 그날 밤 하나님의 사자가 앗수르 진중에서 18만 5천명을 쳤다.(왕하20:35) 이 사건에 대해 헤로도토스는 이 사건을 쥐들이 전염시킨 페스트라고 기록하고 있고, 유대의 역사가 요세프스는 “하루 밤에 수많은 쥐 떼가 나타나 앗수르 군의 활과 그 밖의 무기를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일로 인해 앗수르의 국력은 무섭게 쇠퇴하게 된다.
나훔 선지자(B.C. 7세기)와 앗수르
나훔선지자는 니느웨가 범람하는 물에 의해 진멸될 것을 예언했다.(나1:8)
범람한 물은 앗수르 유적의 키워드인데 티그리스 강물이 니느웨를 덮어 그 위에 토사가 쌓여 있었다.
앗수르 제국의 멸망(B.C.609)
B.C 609년 신흥 강대국 바벨론에게 앗수르는 수백 년을 이어온 상 아시아의 주인 자리를 내주어야 했다. 앗수르 수도 니느웨는 B.C612년에 바벨론에 의해 함락되었고 하란으로 수도를 옮긴 앗수르는 B.C610년 하란까지 내주게 된다.
앗수르는 매우 잔혹한 제국이었다. 앗수르바니팔은 “짐은 잔인하고.... 굴복하지 않는 자는 모두 짓밟아 버린다.” 살만에셀은 스스로 “ 온 백성의 태양이며 온 나라의 구주”라고 칭했다. 앗수르 왕의 어느 기념비에서 “나는 귀족들의 껍데기를 벗겼고, 3,000명의 포로들을 불에 태워 죽였다. 나는 한 명의 포로도 남겨 두지 않았다. 나는 그들의 손과 발을 자르고, 코와 귀를 베어 내기도 했다. 수많은 병졸들의 눈을 도려내기도 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는 나훔의 예언대로 호우로 물이 범람하여 도시 위로 6M나 토사가 쌓여 B.C609년부터 A.D1846년 까지 2,450년 이상 그 존재를 깊은 땅 속에 묻어 두게 되었다.
하나님의 세계경영
앗수르제국 경영 키워드는 “경계”이다. 하나님이 북이스라엘을 심판 하는 몽둥이로 앗수르를 사용하셨다. 그러나 나라와 민족과 거주의 경계는 하나님이 정하시는 것이다. 경계를 넘어야 하는 것은 제국의 말발굽이 아니라, 구원의 복된 소식‘복음’이어야 한다.
바벨론 제국과 성경
히스기야 왕과 바벨론 특사
히스기야가 병들었다 나았다는 소식을 듣고 바벨론의 특사가 히스기야를 방문한다.
이사야 선지자와 바벨론
바벨론 제국 정책과 1, 2차 포로(B.C.605/B.C.598)
바벨론은 남유다를 3차에 걸쳐서 공략하고 포로로 끌고 간다. B.C 605년 애굽을 점령한 바벨론은 남유다를 들려 여호야김과 더불어 다니엘과 세 친구를 1차 포로로 끌고 간다. B.C 598년 여호야김이 폐위 되고 여호야김의 아들 여호야긴이 왕이 되지만 3개월 만에 바벨론이 올라와서 에스겔을 포함한 1만 여 명의 인력들을 포로로 끌고 간다. 이것이 2차 포로이다. 3차 포로는 예루살렘에 포도농사나 지을 최소한의 인력만 남기도 모든 사람들을 잡아갔다.
포로 다니엘과 포로 에스겔
선지자 예레미야와 거짓 선지자 하나냐
레위기 토지 정책과 포로 70년의 비밀
레위기의 토지 정책은 크게 안식일, 안식년, 희년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토지 정책에 지켜지지 않았다. 바벨론 유수기간은 땅이 안식을 누리는 의미가 되기도 한다. “너희가 원수의 땅에 살 동안에 너희의 본토가 황무할 것이므로 땅이 안식을 누릴 것이라”(레26:34-35)
왕과 선지자의 비밀 회동
시드기야 왕과 그의 아들들의 비참한 최후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과 에스겔이 그린 성전 조감도: 3차 포로(B.C.586)
바벨론에 보낸 예레미야의 편지
바벨론 성(城) 스케치
바벨론 성은 광대한 평야 한 가운데 있는 대도시로 사각형을 우리고 있다. 각 변의 길이가 120스타디온에 이른다. 한 변의 길이가 14마일(1마일:1.6km)이므로 한 쪽 변이 22.4km에 이른다. 성 전체의 둘레를 합치면 56마일로 90.16km이다. 바벨론 성 둘레에는 100개의 성문이 있었다. 모두 청동으로 되어 있었으며 문주와 상인방도 청동이다. 도시는 아름답게 정비되었고 물이 가득차서 깊은 해자가 도시 주위를 돌고 있다. 아스팔트도 있었다. 성벽 위 양쪽 가장자리는 연하여 두 채씩 마주보게 지었다. 그 건물 사이로 사두 전차를 타고 지날 수 있었다. 도시 중앙으로는 유프라테스 강이 흘러 도시를 갈라놓았다. 바벨론의 국력은 전 아시아의 3분의 1에 해당되었다고 한다.
두 프로젝트: 하나님의 인재 양성과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학교
바벨론 제국의 멸망(B.C.539)
느부갓네살의 아들 마르둑(Amel-marduk)이 2년간 다스렸고, 마르둑을 살해한 매부 네리글리살과 네리글리살의 아들 라바시마르둑이 나라를 다스리다가 신하들에게 암살당한다. 그리고 느부갓네살 집안이 아닌 나보니두스가 왕권을 차지한다. 이는 하란 출신 귀족의 아들이다. 느부갓네살과 그의 집안은 마르둑이라는 신을 섬기는데 나보니두스는 '신'(sin) 이라는 신을 섬기면서 문제가 발생한다. 나보니두스의 아들 벨사살 때 마르둑 신을 섬기는 느부갓네살 집안과 바벨론 사람들이 나보니두스와 그의 아들 벨사살보다 오히려 페르시아의 고레스(키루스2세) 쪽으로 마음을 돌린다. 벨사살은 귀족 1,000명을 초대해 잔치를 벌이면서 예루살렘에서 탈취한 성전 기물을 가지고 술을 마시게 된다. 이때 손들이 나타나서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고 썼는데 벨사살의 최후를 암시하는 내용이었다.
하나님의 세계경영
바벨론 제국의 경영 키워드는 ‘교육’이다. 이데올로기 교육이 굉장히 무서운데 히브리인들은 신앙과 율법교육이 잘 되어있었기 때문에 바벨론의 교육을 받으면서도 동화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율법과 신앙의 토대위에 바벨론제국의 지식을 접목시켰다.
페르시아 제국과 성경
페르시아 제국과 구약 7권의 성경
페르시아 제국과 관련 있는 성경은 다니엘, 학개, 스가랴, 에스더, 에스라, 느헤미야, 말라기이다.
애굽의 바로(파라오)와 페르시아의 고레스(키루스 2세)
페르시아의 두 도시 국가: 메대(메디아)와 바사(페르시아)
그리스라는 나라가 여러 개의 도시 국가였던 것처럼 페르시아도 고레스에 의해 통일이 되기 전까지 여러 개의 도시 국가였다. 그 중에 가장 힘이 센 두 국가가 바로 메데와 바사였다. 그러나 본래 메데라는 나라가 더욱 강했기 때문에 메대가 바사를 주로 다스렸다. 그런데 고레스가 등장하면서 반전이 일어난다. 나라를 통일시키고 제국으로 발전시킨다.
페르시아의 왕, 리디아의 왕, 그리고 그리스의 현인 솔론
메데의 왕 아스티아게스가 페르시아까지 다스리고 있었다. 어느날 아스티아게스가 꿈을 꾸는데 그의 딸 만다네가 소변을 누었는데 전 도시가 잠기고, 아시아 전역에 물이 범람하는 꿈을 꾼다. 사제들의 꿈 해몽은 만다네가 낳은 아들이 아시아 전체를 점령할 것이라고 해석해 주자 아스티아게스는 만다네를 페르시아의 작은 도시의 캄비세스라는 청년에게 시집보내다. 그런데 만다네가 임신했을 때 아스티아게스는 전보다 더 해괴한 꿈을 꾸므로 딸의 아들을 죽이기로 작정하고 그의 충복 하르파고스에게 죽이라고 한다. 하르파고스는 소치기에게 죽이라고 했는데 이 소치기가 마침 사산된 자기 아이와 그 아이를 바꿔치기하고 기른다. 그 아이가 10살 되던 해에 아이들이 노는 것이 심상치 않아서 왕에게 보고했는데 왕이 그 아이를 보는 순간 자기의 외손주 임을 알아보았다. 그래서 아스티아게스는 그 아이를 딸에게 보내버리고 자신을 속인 하르파고스를 식사에 초대하여 하르파고의 아들을 요리한 음식을 먹게 했다. 이 일로 인해 하르파고스는 훗날 고레스와 손을 잡고 아스티아게스를 무너뜨리게 된다.
리디아는 오늘날 터키인데 엄청난 부의 나라였다. 고레스는 리디아를 침공하여 2주 만에 점령한다.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로 인해 그리스의 7현인 중에 한 명인 솔론을 알게 된다.
현인 솔론과 크로이소스가 만났을 때 크로이소스가 솔론에게 질문한다. “솔론이여 여러 나라를 여행하면서 지금까지 만났던 사람 중에 누가 가장 행복해 보였습니까?” “아테네의 어느 가난한 집안에 효자 2명을 둔 어머니가 가장 행복해 보였습니다.” “두 번째는? 세 번째는?”하면서 계속 질문하자 “끝까지 지켜야 할 것을 다 지킨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했단다. 이 이야기를 크로이소스가 고레스에게 해 주자 고레스도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리고 둘은 평생 좋은 친구요 조언자가 되었다고 한다.
크로이소스를 통해 그리스의 철학과 학문을 접한 고레스는 상당한 지식과 교양을 갖추게 되었고, 관용정책을 펼치게 되었다.
페르시아의 아버지 고레스(키루스 2세) 왕
페르시아 백성은 고레스를 아버지라 불렀다. 고레스는 조서를 내려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국으로 돌아가 성전을 재건하도록 했다. 예루살렘에 돌아가지 않고 페르시아 제국에 사는 사람들도 마음껏 예루살렘에 헌금과 헌물을 해도 되는 길을 열어 놓았다. 이후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1년에 3차례 명절에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십일조를 바치고 제2의 십일조로 30일 동안 예루살렘에 머물면서 소비를 촉진하므로 예루살렘을 세계적인 도시로 만들어 가게 되었다.
고레스(키루스 2세)의 아들: 캄비세스
고레스의 아들 캄비세스는 재위 기간 8년 여 동안에 이집트를 점령한다. 캄비세스는 이집트로 원정을 떠나기 전 자기 친남동생 스메르디스를 죽이도록 명령했다. 그리고 자기의 친여동생 아토사와 메로에를 자기 아내로 삼았다. 캄비세스는 ‘폭군’이었고 그 뒤를 이은 다리오(다레이오스)는 ‘장사꾼’으로 불렸다.
캄비세스는 이집트 침략 중에 그의 신하 프렉사스페스에게 그의 친동생 스메르디스를 죽이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원정 중에 스메르디스가 수사 성에서 왕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이 일을 처리하려고 캄비세스가 말에 올라탔다가 갑자기 말에서 떨어져 죽게 된다. 스메르디스가 가짜임을 밝히기 위해 프렉사스페스는 그의 딸 오타네스를 스메르디스에게 시집 보내어 가짜임을 밝혀낸다. 오타네스와 그의 친구들 그리고 함께 거사에 동참할 3명의 천거인과 페르시아의 총독 다리오가 함께 합세하여 가짜 스메르디스를 끌어 내리려고 한다. 그러나 스메르디스의 형 마고스의 철저한 방어에 가로막혀 애를 먹고 있는데 마고스가 프렉사스페스를 회유하여 가짜 스메르디스를 고레스의 친아들이라고 공포하게 했다. 당일 날 프렉사스페스는 진짜 스메르디스는 자신이 죽였고, 지금의 스메르디스는 가짜라고 공포하고 왕궁 밑으로 떨어져 자살한다. 그때를 틈타 7명이 성으로 들어가 가짜 스메르디스와 사제들을 모두 죽인다. 왕을 뽑기 위해 오타네스를 제외한 6명이 경주하여 가장 먼저 말이 히이잉하고 외치는 말을 탄 주인을 왕으로 삼기로 한다. 이때 다리오의 마부가 다리오의 암말의 소변을 받아서 도착지점에 미리 뿌려 놓으므로 다리오의 말이 도착하여 가장 먼저 울부짖음으로 다리오가 다음 황제가 되었다고 한다. 다리오의 비문에 “히스타스페스의 아들 다레이오스가 말과 마부의 공적으로 페르시아의 왕위를 얻었노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애굽의 술 맡은 관원장과 페르시아의 술 맡은 관원장
페르시아 총독 스룹바벨: 1차 포로 귀환(B.C.537)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스룹바벨과 다리오 왕이 오랜 친구였다고 한다. 그런데 다리오는 자신이 왕이 되면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고, 하나님의 모든 기물들을 예루살렘 성전으로 반환하겠다고 맹세했단다.
실제로 다리오가 왕이 되었을 때 잠이 오지 않아 세 경호원을 불러 대화를 나누었는데 다리오가 질문하기를 첫 번째 경호원에게 “어째서 술이 가장 강하지?” 두 번째 경호원에게 “어째서 왕이 가장 강하지?” 세 번째 경호원에게 “어째서 여자가 가장 강하지?” 그리고 “어째서 진리가 모든 것 가운데서 가장 강하지?”라고 질문했을 때 스룹바벨은 “다 강하지만 모든 것은 진실하고 의로우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고 말하고 앞의 모든 것은 일시적이지만 영원히 변하지 않는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래서 스룹바벨의 소원을 묻자 다리오가 왕이 되기 전에 한 말을 지켜달라고 해서 중단된 성전을 재건하게 되었단다.
페르시아 왕비 에스더와 아하수에로(크세르크세스) 왕
세계 역사에서 다루는 아하수에로(크세르크세스) 왕
아하수에로 왕은 역사상 세계최대의 제국을 거느린다. 동쪽으로는 현재의 파키스탄, 서쪽으로는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 북쪽으로는 마케도니아 남쪽으로는 시나이 반도를 거쳐 이집트까지 왕국의 길이가 6,400km이고 제국의 총 면적은 480만제곱km였다. 인구만도 2천여 만 명에 이르렀다. 아하수에로는 70만 명의 군인을 동원하여 그리스 원정에 나섰다.
세계 4대 해전 중 하나인 살라미스 해전은 그리스 연합군의 함대 380척과 페르시아 함대 600-800척과의 싸움이었다. 이 살라미 해전에서 아하수에로가 패하고 퇴각한다.
페르시아 왕의 자문 학사 겸 제사장 에스라: 2차 포로 귀환(B.C.458)
페르시아 총독 느헤미야: 3차 포로 귀환(B.C.445)
페르시아 제국의 멸망(B.C.331)
페르시아는 천인 대장 환관 바고아스가 아닥사스다와 그의 아들들을 모두 살해하는 끔찍한 일이 벌어지면서 위기로 치닫게 된다. 이후 아닥사스다의 유일한 생존자 아르타샤타가 왕위로 물려받고 이후 몇 명의 왕을 거치지만 다리오 3세 때 알렉산더가 페르시아를 침공해 와서 이수스전투에서 다리오가 패하게 된다. 이수스 전투는 페르시아 보병 10만과 기병 1만 명이 전사했다. 페르시아 제국은 206년 만에 멸망하게 된다.
하나님의 세계경영
페르시아의 경영 키워드는 ‘숫자’이다.
헬라 제국과 성경
헬라 제국과 신구약 중간사
말라기와 마태복음 사이에는 약 400년의 세월이 있다. 이 기간에 하나님은 침묵하신다. 하나님의 침묵 속에 세계는 엄청난 회오리에 휩싸이게 된다. 페르시아 제국이 무너지고 헬라제국이 들어서게 된다.
다니엘의 제국 그림과 마케도니아의 발흥
페르시아 제국이 그리스를 침략했을 때 마라톤전투, 살라미스 해전, 프라타이아 전투, 미칼레 전투가 있었는데 이 모든 전쟁에서 페르시아가 패배하므로 페르시아가 에게해로 진출하는 것이 좌절된다. 이후 알렉산더에게 패권이 넘어가게 된다. 민주정을 대표하는 아테네 중심의 동맹 도시들과 과두정을 대표하는 스파르타 동맹 도시들과 B.C431-B.C404년까지 27년간 전쟁을 치르게 되는데 이 전쟁이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다. 이 전쟁 기록을 남긴 사람은 투키디데스이다. 이 전쟁에서 스파르타가 승리하나 스파르타는 오히려 더 많은 전쟁에 휘말리게 된다. 마케도니아를 반석에 세운 왕은 알렉산더의 아버지 필립포스2세이다.
요세프스에 의하면 알렉산더는 예루살렘에 가서 성전을 방문하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적이 있다고 한다. 그때 알렉산더는 다니엘서 7장6절과 8장3-8절과 21-22절 그리고 11장3절을 통해 자신의 등장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이미 예언되어 있음을 알고 크게 놀랐다고 한다.
빌립보(필립포스): 헬라 제국의 경제 동력과 유럽 복음의 출발지
필립포스 2세가 크레니데스라는 곳에서 금광을 발견하게 되어 엄청난 재력을 확보하게 된다. 필립포스는 반기를 든 그리스 연합군을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철저하게 응징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필립포스는 암살당한다.
알렉산더(알렉산드로스)의 스승 아리스토텔레스
에스겔 27장과 해양 도시 두로, 그리고 알렉산더(알렉산드로스)
한때 두로는 무역의 중심지가 되어 지중해를 주름잡았다. 자주색 물감 산업과 카르타고를 비롯한 중동 각국과의 해상 무역으로 경제적 번영과 문화를 꽃피웠다. 당시에 두로는 어마어마한 부자나라였다.
알렉산더가 페르시아에 가서 이수스 전투를 승리하고 돌아 올 때 대부분의 나라들은 모두 항복했는데 두로는 항복하지 않았다. 바다 한가운데 있는 두로를 공략하지 못해 쩔쩔매다가 200척의 배와 군인 1만 명을 동원해 산에서부터 큰 바위를 굴려서 바다에 깔고 길을 내어 결국 사륜마차들을 끌고 두로를 공략하게 되었다. 두로는 1984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될 정도로 로마의 유물들이 많이 있다고 한다.
알렉산더(알렉산드로스)의 예루살렘 방문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유대로 진군해 오는 알렉산더를 유대의 대제사장이 자주색과 주홍색의 옷에다 하나님의 이름이 새겨진 금패가 달린 모자를 쓰고, 백성에게 힌 옷을 입히고 알렉산더를 맞이했다고 한다. 그러자 알렉산더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대제사장에게 안부를 물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알렉산더가 원정을 떠나기 전 꿈을 꾸었는데 유대인 가운데 대제사장 복장을 한 사람이 나타나 자기가 군대를 인도해 페르시아를 점령할 수 있게 해주겠노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래서 알렉산더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고 한다.
알렉산더(알렉산드로스)와 트로이의 영웅 아킬레우스
알렉산더의 롤 모델은 아킬레우스였다고 한다. 알렉산더는 매일 밤 책 읽어 주는 담당 군인에게 일디아드를 읽게 했다고 한다. 그에게 최고의 보석은 일리아드였다. 그는 항상 베게 아래에 그의 칼과 일리아드를 두고 잤다고 한다.
일화) 알렉산더가 수사를 정렴했을 때 페르시아 최고의 요리사가 최고의 요리를 바치겠다고 하자 “열심히 최선을 다해 땀 흘려 일하고 난 후에 먹는 음식이 최고의 요리이다.”고 했단다.
일화) 한니발을 물리쳐 로마의 영웅이 된 스키피오가 아프리카에서 승리하자 가장 아름다운 처녀를 바치겠다고 했다. 그때 스키피오는 “젊은 남자에게 이보다 더 좋은 선물은 없겠지만 전쟁을 계속해야 하는 장수에게 이보다 더 곤란한 선물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알렉산더(알렉산드로스)의 죽음과 헬라 제국의 분열
페르시아를 점령한 알렉산더는 인도의 인더스 강 유역을 경계선으로 회군했다. 전쟁의 피로감에 빠진 군인들 때문이다. 알렉산더는 B.C323년 다리우스달 30일에 32세의 젊은 나이에 원인 모를 병으로 요절한다. 알렉산더의 죽음으로 제국은 그의 7명의 장수에 의해 나누어 져서 다스려지다가 4명의 장수가 분할 통치한다.
마케도니아는 안티고누스가 다스리고, 애굽과 퀴레네, 홍해, 동아프리카, 페니키아, 에게 해, 소아시아 해안, 갈리폴리 반도는 프톨레미가 다스리고, 옛 페르시아 제국의 대부분, 시리아 북부, 메소포타미아, 인도 서북부, 아프카니스탄, 중앙아시아, 투르케니스탄는 셀루커스가 다스리고, 소아시아 북쪽은 페르가몬이 다스리게 되었다.
프톨레미 왕조와 셀루커스 왕조의 예루살렘 쟁탈전
유대는 프톨레미 왕조에 합병된다. 프톨레미는 유대의 종교적 전통을 존중한다. 이때 70인 번역본이 나오게 된다. 유대 땅을 차지하기 위해 프톨레미 왕조와 셀루커스 왕조가 전쟁을 벌이다가 B.C198유대는 셀루커스 왕조에 합병된다. 당시 서방에서는 로마와 카르타고의 포에니 전쟁이 23년간 걸쳐 이어지다가 지중해의 패권이 로마로 넘어가게 된다. 이때 마게도냐의 통치를 받던 그리스는 로마에게 도움을 청하면서 마케도니아는 더 이상 그리스를 통치하지 못하게 된다. 훗날 로마와 셀루커스 왕조와 전쟁에서 셀루커스 왕조가 참패하게 된다. 그 이후 셀루커스 4세의 동생 에피파네스가 왕이 되는데 애굽 원정길에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오는 길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돼지를 잡아 제우스신에게 제사 드린다. 할례를 실시한 아이들을 찾아내어 죽이고 그 시체를 어머니 목에 걸어놓게 하는 잔인함을 보인다. 제사장 600명을 묶어 그 위로 마차가 지나가게 해서 참혹하게 죽인다. 이때 에피파네스에 저항한 저항세력이 하스몬 왕조이다.
애굽의 클레오파트라 여왕과 유대의 헤롯 대왕
로마의 1차 삼두 정치는 카이사르, 폼페이우스, 크라수스였는데 헤롯은 이들과 아주 절친이었다고 한다. 2차 삼두정치는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 레피두스인데 이들과도 절친이었다고 한다. 옥타비아누스와 안티오누스가 전쟁을 벌일 때 헤롯은 양쪽 모두에게 어마어마한 군자금을 보내주었다. 안티오누스가 클레오파트라와 사랑에 빠졌을 때 클레오파트라는 유대를 달라고 요청했지만 헤롯과의 우정으로 인해 클레오파트라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마카비(마카베오) 혁명과 하스몬 왕조
B.C175년 안티오쿠스 4세는 유대를 개혁하기 위해 야손을 대제사장으로 세우고 공공기금을 관장하여 성전 기금을 마음대로 사용했다. 그 이후 메넬라우스가 대제사장이 되면서 성전에서 희생제를 금지시키기 까지 이른다. 이에 반발하여 죽음을 불사한 사람들이 매를 맞아 죽게 되는데 이때 순교자 개념이 생겨나게 되었다. 여호야립의 파수꾼이라고 알려진 옛 제사장 가문 출신 마타디아스 하스몬이 우상숭배를 요구하던 셀루커스 왕조의 관리와 우상숭배에 참여하려 한 유대인을 살해하고 하스몬의 셋째 아들 유다 마카비 형제들이 그리스인들을 몰아내게 되었다. 결국 셀루커스 왕조는 B.C142년 세금을 면제해 주는 방식으로 유대의 독립을 인정한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하스몬 왕조이다. 그러나 B.C 63년 로마의 폼페이우스와 협정하여 유대는 다시 로마의 속국이 된다.
헬라주의 정책과 유대 민족의 분파들: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세네파
헬라문화를 거부하고 끝까지 율법을 지키는 자들을 하시딤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바리새 ‘분리하다.’라는 파가 형성된다. A.D1세기에는 바리새파 사람이 6천명 이상이었다. 바리새파는 도시 상인의 후손들이었다.
사두개인들은 제사장의 후손들 가운데 헬라문화를 받아들인 자들이다. 육체의 부활, 죽음 후의 심판, 천사와 악마의 존재를 부인했다. 에세네는 침묵, 경건을 의미한다.
헬라 제국의 멸망
애굽을 통치했던 플톨레미 왕조는 클레오파트라 여왕을 마지막으로 문을 닫는다. 로마에 합병된다.
하나님의 세계경영
헬라 제국 경영의 키워드는 “융합”이다.
로마 제국과 성경
마태복음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로마 제국의 시작과 가이사(카이사르)
여우 헤롯 가문과 로마 제국
하스몬 왕조를 끝나게 하고 B.C63년 유대를 로마의 예속국으로 넘긴 인물이 헤롯의 아버지 안티파터이다. 안티파더는 카이사르와 폼페이 사이에 내전에서 카이사르 편에 서게 된다. 그 후 안티파터의 아들 헤롯대왕이 B.C 37-B.C 4년까지 유대를 다스린다. 헤롯대왕은 하스몬 왕가의 딸인 마리암네와 결혼한다. 그는 가이사랴라는 이름의 신도시를 건설하고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면서 로마 황제의 마음과 유대인들의 마음 두 가지를 다 얻게 된다. 아기 예수님을 피신시키고 애굽에서 돌아오실 때의 헤롯은 헤롯 아켈라오이다. 그는 폭력 정치를 하므로 A.D 6년에 왕 위에서 쫓겨난다.
예수님이 저 여우라고 한 자는 헤룻 안티파스이다. 그는 자신의 동생의 아내인 헤로디아와 결혼한다.
로마 초대 황제 옥타비아누스와 베들레헴 마구간
팍스 로마나라는 말은 옥타비아누스때 생긴 말이다. 그는 B.C 29-A.D14년 까지 통치한다.
로마 2대 황제 디베료(티베리우스)와 총독 본디오 빌라도(폰티우스 필라투스)
디베료의 별명은 테러블 티베리우스인데 무서운 소름끼치는 의미이다. 본래 티베리우스는 옥타비아누스의 의붓아들이다. 옥타비아누스의 첫 부인은 율리아라는 딸을 낳고 이혼한다. 그리고 유부녀인 리비아아와 사랑에 빠져서 권력의 힘으로 리비아를 자신의 아내로 삼는다. 이때 리비아의 3살 된 아들이 디베료였다. 옥타비아누스와 리비아 사이에서는 어떤 자녀도 생겨나지 않았다. 디베료에게 후계를 물려주지 않으려 했지만 자기 핏줄이 없어 어쩔 수 없이 디베료에게 물려주게 된다. 단 조건이 디베료가 이혼하고 옥타비아누스의 딸 율리아와 다시 결혼하라고 한다. 어쩔수 없이 율리아와 결혼하게 되지만 율리아는 간통죄로 유배형을 받게 되므로 그 이후로 디베료는 다시 결혼하지 않았다고 한다.
애굽 제국에서 유월절과 로마 제국에서 유월절
빌라도는 유월절의 의미를 살려 예수를 풀어주려고 했으나 대제사장세력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데 유유월절을 이용했다.(민란을 무기로), 예수님은 복음이 온 세상에 퍼지는 카드로 사용했다.
로마 총독 재판과 대제사장 재판: 십자가 처형과 돌 처형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선지자와 율법의 완성
디아스포라 유대인과 디아스포라 그리스인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명절에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1년분의 십일조를 바치고 약 1달간씩 머무는 것은 예루살렘 경제를 매우 활성화시켰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과 함께 회자되는 사람들은 디아스포라 그리스인이다. 두 집단이 마찰을 일으킬 때가 많았는데 유리한 쪽은 디아스포라 그리스인이었다. 그들은 다신교를 믿기에 30만 개의 신을 가진 나라 로마와 상당부분 통했다. 그런데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손을 들어준 황제가 율리우스 카이사르이다.
로마 3대 황제 칼리굴라를 만난 유대인 필로
칼리굴라는 A.D37-41년까지 다스리다가 암살당한다. 그는 자신이 신이 되고 싶었다. 로마 제국 전체에 동상을 세우고 숭배하게 했다.
로마 4대 황제 글라우디오(클라우디우스)에 의해 추방된 브리스길라, 아굴라
천 년 도시 예루살렘과 신도시 가이사랴(카이사레아)
바울에게 뇌물을 기대한 로마 총독 벨릭스(펠릭스)
로마 총독 행정과 유대 산헤드린 행정: 가말리엘
산헤드린 공회는 페르시아에서 출발하게 되는데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유대의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 이후 유대 공동체는 공식적인 지도부를 자길 수 없었다. 바벨론이 관대한 정책을 펼치자 유대공동체가 지도부를 만든다. 유대출신 페르시아 총독들, 제사장 가문, 평민 귀족들이 동맹을 맺어 세운 것이 산헤드린공회이다. 로마로부터 유대의 최고 대표기구로 인정받고 재판국으로까지 승격되었다.
유대의 3대 율법학자는 에스라, 힐렐, 가말리엘이었다. 바울은 가말리엘의 수제자였다.
로마 노예 제도와 미국의 링컨 대통령
로마 제국 내에 노예는 약 20%에 가까웠다.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법과 바울의 황제 재판 청구
가수 황제 네로와 로마 대화재, 그리고 바울의 순교
유대인의 방해와 로마의 박해
로마 제국의 기독교 공인(A.D.313)과 국교화(A.D.392)
로마 제국 멸망(A.D.476)
B.C 8세기에 시작한 로마는 왕정, 공화정, 제정을 거치면서 제국으로 성장한다. 그러나 A.D 4세기에 동로마와 서로마로 나뉘어지고 동로마는 A.D1453년 오스만 쿠르크의 술탄 메메트 2세의 침략으로 멸망하지만 서로마는 그보다 훨씬 전인 A.D476년에 제국의 문을 닫는다.
하나님의 세계경영
로마 제국 경영의 키워드는 ‘관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