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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상을 거부한 사람?
노벨상은 세계적으로 저명한 과학자들이 추천하고,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에 의해 비밀리에 치밀한 선발과정을 거친다. 따라서 그 동안 별 문제없이 노벨상 후보자들이 추천되고 엄격한 선발 과정을 통해 수상자가 결정되었다. 노벨상 수상자의 선발 원칙은,
1. 제1원칙은 업적이 인정되기 전에 사망하면 안 된다.
업적이 인정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살아 있어야 한다.
노벨의 유언에 따라 물리학, 화학, 생리⦁의학 분야에서 당 해에 “인류를 위해서 최대 공 헌을 한 사람”에게 상을 수여하라는 노벨의 유언을 따른 것이다. 이런 원칙이 지켜지지 않았다면 18세기 과학자인 뉴튼, 갈릴레이 갈릴레오, 맥스웰 등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없는 쟁쟁한 과학자들이 모두 상을 휩쓸었을 것이다. 따라서 생존하는 공로자들이 수상자가 되지 못하는 모순을 없애기 위한 원칙이다.
노벨상 수상자로 선정된 수상자의 사망
2011년 10월 3일 노벨위원회가 노벨생리⦁의학상 수상자 3인을 발표했다. 하지만 공동 수상자인 랠프 슈타인머 박사는 발표 며칠 전에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노벨위원회는 새로운 수상자를 선정하지 않았다.
랄프 스타인먼은 1973년 잰빌 콘 (Zanvil Alexander Cohn) 박사의 연구실에서 박사후 연구원으로 근무하던 시절에 새로운 종류의 면역세포를 공동 발견한 후, 그것이 인체가 병원체로부터 자신을 지켜내는 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며, 질병을 퇴치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데 매진해 왔고, 그로부터 34년의 세월이 지난 후 2007년 그가 바로 그 면역세포를 이용하여 자신의 생명을 살리고자 노력하게 되었다.
수지상 세포(DCs)라고 명명된 그 면역세포는 다른 면역세포들로 하여금 외부의 침입자들을 인식⦁파괴하게 함으로써 면역계를 지휘하고 조절한다. 록펠러 대학의 의사이자 과학자인 스타인먼의 목표는 DCs를 이용하여 만성감염질환(예: HIV, 결핵)을 예방하고 암을 치료하는 백신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던 중 2007년 3월 그 자신이 진행성 췌장암으로 진단받았을 때, 필생의 연구과제로 여겼던 DCs에 자기의 생명을 걸기로 결심했다.
그는 같은 분야의 탁월한 연구자들과 손잡고 자기 자신의 DCs를 이용하여 새로운 췌장암 치료법을 설계하는 데 올인했다. 그리고 노력의 결과로 수지상세포 백신에 관한 임상연구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그리고 전통적인 화학요법과 수지상세포 백신의 병용이 가능하다 는 것을 입증했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2011년 노벨 생리 의학상을 수상했으나, 기쁜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4년여 동안 암과의 사투 끝에 노벨위원회가 수상자로 발표하기 3일 앞두고 69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노벨상은 사망자에게 수여하지 않는 것이 그동안의 관례였으나 랠프 슈타인먼의 경우는 심사위원들이 사망 사실을 모른채로 최종 수상자로 선정된 상황에서 타계했기 때문에 그의 노벨상 수상은 유효하다고 노벨위원회는 밝혔다.
노벨상을 받기 위해 얼마 동안 연구해야 하는가?
다양한 연구들 중에서 최고 성과를 얻기 위해서는 사실상 1년으로는 불가능하다. 또 그 연구의 중요성이 확인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노벨상 초기는 연구에서 수상까지 기간이 짧았다. 그러나 현대물리학이 발전되면서 물리학의 내용이나 틀이 과거와 많이 달라졌다.
연구결과가 1년 안에 노벨상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인공 방사성 원소 발견한 졸리오와 퀴리부인, 인슐린을 발견한 밴팅과 메클라우드가 있다. 이런 연구 결과들을 그 당시 인류를 위해 개발된 연구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최장 기간은 55년이 걸렸다. 1986년 전자 현미경으로 수상한 루카스 박사는 전자현미경의 원리가 된 전자광학에 관한 최초 논문을 1931년 발표한 공로가 인정되어 55년이 지난 후 노벨상을 받았다. 다행인 것은 그는 당시 80세로 생존해 있었다.
아인슈타인 박사는 상대성이론으로 노벨상을 수상한 것이 아니다.
아인슈타인 박사는 연구 16년 만에 노벨상을 수상했다. 노벨위원회는 상대성이론을 공리공론이고 자연 현상의 설명이라기보다는 수학적 정식화라는 견해를 표명했다. 물리학 발전보다는 인류를 위해서 특별하게 공헌한 과학자들에게 우선적으로 상을 수여한다는 입장에서 보면, 상대성이론이 당시 노벨상을 받지 못한 것은 타당한 면도 있다. 당시는 상대성이론을 결코 이해하기 쉽지 않았다. 더구나 광범위한 공격을 받고 있었으므로 과학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논쟁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광전효과 법칙은 실험적으로 입증돼 아인슈타인에게 노벨상을 수여함에 있어 극히 안전한 이유가 되었다.
1922년 아인슈타인은 일본의 출판사로부터 초청을 받는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을 태운 배가 일본에 도착하기 전에 노벨상 수상 소식을 듣는다. 수상자가 자기 스스로 노벨상을 받으러 가지 못할 경우에는 본인의 나라 주재대사가 대신하여 받는 것이 관례였다. 아인슈타인은 스위스 대사가 자기 대신 이 역할을 해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당시 독일 측에서 이의를 제기해 독일 주재 스웨덴 대사가 개인적으로 증서와 메달을 서베를린의 아인슈타인 앞으로 보낸 것으로 마무리했다.
오래 살아 있어야 업적을 인정받는다.
노벨상 최고령 수상자는 1973년 꿀벌의 행동양식을 연구한 공으로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한 프리쉬 박사다. 그의 나이 87세 때 노벨상을 수상했다. 또 한 사람, 페이톤 라우드 박사는 육종 바이러스를 발견한 공로를 인정받아 87세에 노벨상을 받았다. 그는 시골에 살고 있었고, 어느 날 이웃집 농부가 목에 혹이 난 닭을 들고 와서 그 이유를 물어본 것으로 연구의 모티브를 삼았다. 그는 닭의 목에 혹이 난 것은 육종바이러스라는 것을 밝힌다. 이 바이러스는 암 연구에 중요한 결과를 제공했다. 좋은 연구 결과를 내놓았더라도 당시 생존해 있지 않으면 노벨상을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최연소 노벨상 수상자는 20대에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윌리엄 로랜스 브래그다. 그는 X-선에 결정 구조 해석연구로 1915년 노벨상을 받았다. 초기에는 물리학상을 받은 연령이 40세였지만 최근는 60대가 많아지는 경향이다.
노벨상을 거부한 사람들도 있다.
노벨상은 개인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상이기도 하지만 국가적으로 자랑스러운 일이기 때문에 거절하지 않고 거의 수상한다. 특별한 경우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수상 당시의 정치적 여건으로 받지 못한 사람도 있다. 하지만 자신의 의지로 노벨상 110년 역사상 이 상을 거절한 사람이 있다.
1964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장 폴 사르트르는 실존주의 철학자로 이념에 따라 문학활동을 했다. 하지만 실존주의 문학활동을 함께 했던 프랑스의 알베르 까뮈보다 훨씬 늦게 노벨상을 받은 데에 불만을 표시했다고 전해진다. 까뮈는 1957년 최연소 나이로 노벨문학상을 타게 되는데, 까뮈 보다 나이가 많은 사르트르는 1964년에 노벨상을 수상자로 결정됐지만 자신의 라이벌이 카뮈보다 늦게 노벨상 수상자로 선정된 데 불만을 품고 수상을 거부하였다. 사르트르의 수상 거절은 당시 노벨상 심사위원회의 노여움을 샀다. 그 이유로 해서 20년 동안 프랑스 작가에게는 상을 주지 않았다고 한다.
또 한 사람은 베트남 출신의 정치가 레둑토이다. 그는 노벨평화상을 거부했다. 그는 월남전 당시 파리에서 미국 측 헨리 키신저를 상대로 여러 해 동안 외교적 노력을 기울여 휴전을 이끌어냈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지명되었다. 그러나 그는 월남에 아직 평화가 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수상을 거부한다. 동시에 서방세계에서는 공산주의자에게 노벨평화상을 주었다는 이유 때문에 논란이 일기도 했다.
◎ 에필로그
내가 매년 참여하는 학회가 있다. 학회기간은 3박 4일이지만 마지막 날 오후엔 마라톤 경기가 있다. 이 학회를 참가하는 학자들은 자신이 발표할 논문과 함께 마라톤에 필요한 신발과 운동복을 가지고 온다. 처음에 참가할 땐 너무 당황했다. 10킬로를 달리지만 중간에 포기할 정도로 힘이 들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이 학회에 참가한 나이 드신 분들은 거뜬히 10킬로를 달리고 자신의 작년 기록과 비교까지 했다. 학회 마지막 날엔 그 해의 달리기 기록을 발표하고 나눠줬다. 그 후에 달리기를 시작했다. 학생들을 설득해 달리기 경기에 함께 참가하기도 했다. 지금 나는 술 마신 다음날도 가뿐하게 10킬로를 달릴 정도다.
이 학회를 매년 빠지지 않고 가고 싶은 이유 중 하나는, 사실 논문보다도 학회 마지막 날 나 자신을 시험할 수 있는 달리기 기록 때문이다. 학문은 체력이다. 올해 기록을 얼마나 갱신할지 열심히 노력하고 싶다.
2002년까지 노벨상 수상을 거부한 수상자(총 6명)
1. 리하르트 쿤: 화학상, 1938년, 독일, 카로티노이드 및 비타민 연구
2. 아돌프 부테난트: 화학상, 1939년, 독일, 성 호르몬 연구
3. 게르하르트 도마크: 생리의학상, 1939년, 독일, 프론토질의 항균 효과
4.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문학상, 1958년, 소련, 소설가/시인
5. 장 폴 사르트르: 문학상, 1964년, 프랑스, 철학자/극작가
6. 르 둑 토(黎德壽): 평화상, 1973년, 북베트남, 베트남 분쟁 해결
이들의 수상 거부의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2, 3(리하르트 쿤, 아돌프 부테난트, 게르하르트 도마크 ): 외부 압력 때문
1937년 아돌프 히틀러는 1935년 당시 독일의 정치범이었던 반나치 저술가 <카를 폰 오시에츠키>에게 평화상을 수여한 데 격분해 향후 독일인들의 노벨상 수상을 금지하는 포고령을 내린 바 있다.
4(보리스 파스테르나크 ): 정치적인 이유
장편소설 〈의사 지바고 Doctor Zhivago〉로 1958년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되자 소련 내에서 커다란 반대가 야기되어 수상을 거부했다. 러시아 혁명의 잔혹함과 그 여파 속에서 펼쳐지는 방황, 정신적 고독, 사랑을 서사적으로 기술한 이 소설은 국제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나 소련에서는 비밀리에 번역본으로만 유포되었다.
1956년 파스테르나크는 큰 기대에 부풀어 모스크바의 유력한 월간지에 소설 〈의사 지바고〉를 기고했으나 "10월혁명과 혁명의 주역인 인민, 소련의 사회건설을 중상했다"는 비방과 함께 거부당했다.
1957년 이 소설은 이탈리아의 출판사를 통해 서유럽에 알려지게 되었는데, 파스테르나크에게서 저작권을 사들인 그 출판사는 '수정을 위해' 원고를 되돌려달라는 요청을 거절했다. 영역본이 출간된 1958년에는 이미 18개 국어로 번역되어 있었다.
노벨상 수상 소식이 알려지자 소련에서는 파스테르나크 탄핵운동이 일어났다. 그는 작가동맹에서 제명되었으며 생계유지의 수단마저 빼앗겼다.
공공 모임에서는 그를 국외로 추방하자는 목소리가 높았다. 그는 제1서기장 흐루시초프에게 "조국을 떠난다는 것은 내게 죽음을 의미한다"라는 취지의 탄원서를 써보냈다. 그는 페레델키노의 집에서 암과 심장병에 시달리며 여생을 보냈다.
5(장 폴 사르트르 ): 본인 의사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사르트르는 프랑스 정치운동에 적극적 관심을 보였고 공공연하게 좌익으로 기울었다. 또 비록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하지는 않았지만 소련에 대한 열렬한 찬양자가 되었다. 1954년에는 소련·스칸디나비아·아프리카·미국·쿠바 등을 방문했다.
그러나 1956년 부다페스트에 소련 탱크가 진입하면서 공산주의에 대한 희망은 처참하게 짓밟혔다. 그는〈현대〉에<스탈린의 환상 Le Fantome de Staline〉이란 긴 글을 써서 소련의 침공과 모스크바의 독재에 굴복한 프랑스 공산당을 모두 비난했다. 몇 년이 지나 이러한 비판적 태도 때문에 '사르트르적 사회주의'란 형식이 나타났는데, 이것은 새로운 주요저서〈변증법적 이성 비판 Critique de la raison dialectique〉(1960)에서 표현되었다. 사르트르는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데 착수했고 소련식 변증법은 살아날 수 없음을 발견했다.
그는 여전히 마르크스주의가 당대의 유일한 철학이라고 믿었지만, 마르크스주의는 화석처럼 굳어졌으며 특정 상황에 적응하는 대신 그 특정 상황을 미리 정해진 보편성에 따라 억지로 짜맞춘다고 인정했다. 그에 따르면 마르크스주의는 그 근본적·일반적 원칙이 무엇이든 다른 구체적 실존상황을 인정하는 법과 인간의 개인적 자유를 존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변증법적 이성비판〉은 빈약한 구성이 문제이지만 지금보다 좀더 관심을 끌 만한 인상적이고 유려한 책이었다. 그는 이 책의 제2권을 기획했다가 포기했다. 대신〈말〉을 출판할 준비를 했는데, 이 책이 1964년 노벨 문학상을 받게 된 것을 알고는 수상을 거부했다.
6(르 둑 토(黎德壽) ): 본인 의사
1973년 헨리 키신저와 함께 노벨 평화상 공동수상자로 지명되었으나 거절했다. 1930년 인도차이나 공산당의 창당 일원이었으며 정치적 활동 때문에 프랑스 정부에 의해 투옥되었으나 1940년 중국으로 탈출했다. 1945년 하노이로 돌아와 공산당인 베트남 노동당 재건과 공산반란 단체인 베트민을 창설하는 데 기여했다.
1955년부터 베트남 노동당의 정치국에서 일했고 1976년부터는 노동당에서 공산당으로 명칭이 바뀐 베트남 공산당 정치국의 일원이 되었다. 1968~73년 파리 평화회담에 월맹측 대표단 특별 고문으로 파견되어 1973년 베트남 종전을 위해 활약한 것으로 유명하다. 나중에는 대표단의 수석 대변인이 되었다.
참고로, 지정된 날짜 전에 수상을 사양하거나 거부할 경우에 상금은 기금으로 환수된다. 수상을 거부했던 사람이 나중에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고 금메달과 상장을 찾아간 사례도 있었지만 상금은 이미 기금에 환수된 뒤였기 때문에 돌려받지 못했다고 한다.
한편, 각 부문별 상금은 1,000만 스웨덴 크로나(약 94만 3,000달러, 2001년 현재)라고 한다.
노벨상을 거부한 사람들
1938 리하르트 쿤((RecharrKuhn) : 화학상, 독일, (카로티노이드와 비타민 연구)
1938 아돌프 부테난트(Adolf Fridrich Johann butenandt) : 화학상, 독일, (성호르몬 연구)
1939 게르하르트 도마크 (Gerhard johnnes Paul Domadk) : 생리의학상, 독일, (프론토질의 향균효과)
1958 보리스 파스테르나크(Boris Leonidovich Pasternak) : 문학상, 소련, (닥터지바고)
1964 샤르트르(Jean-Paul Sartre) 문학상, 프랑스, (구토)
1973 레 둑 토(Le Duc Tho) 평화상, 베트남, ( 미국과 평화협정 체결)
노벨상을 거부한 과학자들
노벨상과는 다른 이야기지만 이번 베이징 올림픽에서도 메달을 거부한 선수가 있다.
“심판 판정이 공정하지 못했다” 는게 이유다. 차후 스포츠중재재판소에서도 주장을 수용하는 판결이 내렸지만 거부한 메달은 되찾을 수 없었다. 이처럼 안타까운 상황들이 의외로 빈번하게 벌어졌던 베이징 올림픽이었다.
노벨상을 타는 것은 한 나라의 영광이 될 정도로 엄청나게 의미있는 상이지만 실제로 노벨상을 거부한 과학자도 있었다. 이런 영광스런 상을 거부할 수 있는 그들이 대단하면서도 그들이 왜 그랬을까 궁금하다.
노벨상은 수상을 사양하거나 거부할 경우에도 상금은 기금으로 환수 된다. 만약 수상을 거부했던 사람이 나중에 메달을 찾아가게 되더라도 상금은 이미 기금에 환수된 뒤기 때문에 찾아가지는 못한다.
일단 수상자로 결정되면 ‘수상거부’ 라는 언급과 함께 수상자 명단에 기재된다고 한다.
100년 넘게 상을 주었는데 지금까지 노벨상을 거부한 사람들은 총 6명이다.
1938년 화학상 독일 – 쿤
1939년 화학상 독일 – 부테난트
1939년 생리의학상 독일 – 도마크
1958년 문학상 소련 – 파스테르나크
1973년 평화상 베트남 – 레둑토
국가가 노벨상을 거부하는 바람에 놓친 과학자
독일인 과학자 (쿤, 부테난트, 도마크)는 당시 절대 권력을 가진 히틀러가 독일인의 노벨상 수상을 거부해서 받지 못함. 나치 독일이 패망한 후에야 받을 수 있었다.
당시 아돌프 히틀러는 독일인들의 노벨상 수상을 금지하는 포고령을 내렸다고 한다.
파스테르나크는 소련 정보의 방해로 상을 받지 못했다.
수상 거부가 풀리기 전에 사망하는 바람에 아깝게 노벨상을 놓쳤다.
본인이 의지로 노벨상을 거부한 과학자
레둑토는 당시 자신의 조국인 베트남이 아직 전쟁 중에 있는 것을 이유로 들어 평화상을 거부했다.
프랑스의 문호 샤르트르는 자신의 라이벌인 카뮈보다 늦게 선정된 것에 대해 항의하는 표시로 노벨문학상을 거부 했다.
노벨상 상금은 얼마나 되나?
노벨이 남긴 유산을 기금으로 쓰는 노벨상은 1년동안 운영한 이자 등의 수입에서 나온다.
한 해 이자 수입의 76.5%를 다음 해에 준다고 한다.
노벨상은 금메달과 상장, 상금으로 구성된다.
수상자에겐 1000만 스웨덴 크로네(약 165만 달러)의 상금이라고 한다.
▲ 미국의 포크가수이자 시인 밥 딜런이 노벨상 수상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냐는 조심스런 관측이 나오고 있다.
2016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미국의 포크가수 밥 딜런은 발표 일주일이 가깝도록 자신의 수상에 대해 어떤 공식적인 반응도 내보이지 않고 있다. 노벨상을 주관하는 스웨덴 한림원은 아직까지도 그와 직접통화를 못 했으며 이미 밥 딜런과의 접촉을 단념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래서 밥 딜런이 이대로 수상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냐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명확한 의사표명을 하지 않은 채 12월 10일 열리는 시상식에 불참할 수도 있다. 밥 딜런은 2000년 오스카상을 수상했을 당시 직접 참석하는 대신 영상소감을 보내기도 했다.
과거 노벨상 거부사례와 이유는?
밥 딜런이 실제 노벨상 수상을 거부하더라도 이번이 첫 거부사례는 아니다.
이전부터 다양한 이유로 노벨상을 거부한 사례가 있다.
노벨상을 최초로 순수하게 ‘자의’에 의해 거부한 인사는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작가 장 폴 사르트르이다. 그는 196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지만 “노벨상은 수상자가 서구에 편중돼 있고 더구나 상은 작가 자신을 묶는 굴레가 된다”며 “작가는 스스로 체제가 되는 것을 허용해선 안된다”는 명언과 함께 거부의사를 밝혔다. 사르트르는 노벨상 거부 이전에 프랑스의 최고훈장인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거부한 적도 있다.
1973년 아시아인 최초로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된 르둑토(黎德壽) 당시 베트남 총리는 베트남 전쟁종결과 파리평화협정을 이끈 공로를 인정받았지만 “아직 조국에 평화가 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수상을 자진 거부했다. 실제로 베트남전은 1973년 1월 파리평화협정 체결 이후에도 교전이 계속되다 1975년에야 완전히 종결된다.
▲ 노벨상을 완전히 자신의 의사로 거부한 사례는 1964년 프랑스 작가 장 폴 사르트르와 1973년 르둑토 전 베트남 총리 두 가지이다.
이에 앞서 나찌 체제 아래의 독일에서 1936년 반체제 인사 카를 폰 오시츠키가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되자 격노한 총통 아돌프 히틀러는 모든 독일인의 노벨상 수상을 금지시켰다.
결국 리하르트 쿤(1938년 화학상), 아돌프 부테난트(1939년 화학상), 게르하르트 도마크(1939년 의학상)은 2차 대전이 끝나고 히틀러가 실각한 뒤에 상금을 제외하고 상과 메달만 받을 수 있었다.
1958년 구소련의 작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도 노벨문학상 시상식에 참석할 수 없었다.
그의 대표작 ‘닥터 지바고’는 소련혁명과정에 대한 비판적 내용이 담겨 있으며, 그가 노벨상 수상자로 발표되자 소련작가동맹이 그를 매국노로 비난하며 국외추방운동까지 벌였다. 결국 이런 압박을 견디지 못한 파스테르나크는 결국 수상을 거부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수상포기가 더 적절한 표현으로 보인다.
소비에트 체제 아래의 강제노동 수용소 실상을 폭로한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수용소군도>로 유명한 러시아의 작가 알렉산드르 솔제니친도 시상식에 참석할 수 없었다. 그는 스탈린에 비판적이던 흐루시초프 집권 시기 작가들에 대한 검열이 완화된 시대적 배경에서 자신의 수용소 생활을 바탕으로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발간했지만 이후 흐루시초프가 실각하자 탄압의 대상이 됐다.
솔제니친은 1970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지만 소련 정부가 그의 귀국을 허가하지 않을 것이 두려워 시상식에 참가하지 못했다. 그러나 1974년 2월 결국 그는 국외추방 당했고 그해 12월 노벨상메달을 받았다. 솔제니친은 국외추방 기간 동안 <수용소 군도>를 집필했으며 소비에트 체제가 붕괴한 뒤 1994년 조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외에도 1991년 평화상 수상자인 미얀마의 민주화인사 아웅산 수치와 2010년 평화상 수상자인 중국의 작가이자 인권운동가 류샤오보도 각각 정부의 가택연금과 조치와 제재로 시상식에 참여할 수 없었다.
수치는 남편과 아들이 대신 시상식에 참석했으며 21년이 지난 2012년에야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열리는 시상식장에서 수상소감 연설을 할 수 있었다.
노벨상의 권위는 절대적인가?
한편 노벨상의 권위 자체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도 있다. 주로 수상자의 서구 편중현상과 지나치게 비밀에 부쳐진 시상기준이 지적된다.
노벨평화상의 경우 수상 이후 노벨상의 근거가 된 행위를 뒤집은 사례도 있다.
노벨상이 처음 시상된 1901년부터 2013년까지 수상자들을 대륙별로 보면 유럽이 579명, 북미가 355명, 아시아 62명, 아프리카 21명, 오세아니아 16명, 남미 14명 순이다. 실제로 전체 수상자의 약 90%가 북미와 유럽에 편중돼 있는 것이다.
그리고 노벨상 운영원칙상 심사와 시상의 전 과정이 비밀에 부쳐지고 이에 대한 모든 기록과 자료는 50년간 비공개 되며 이후에도 연구의 필요성이 중요한 때만 심의를 거쳐 공개된다.
이스라엘 총리 메나헴 베긴은 1978년 이집트의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과 평화협정인 ‘캠프데이비드협정’을 체결해 같은 해 사다트와 공동으로 평화상을 수여했다.
그러나 베긴 총리는 젊은 시절 91명이 사망한 다윗왕호텔 폭탄테러 등에 연루된 우익테러리스트였으며 죽을 때까지 이에 대해 사과하지 않았다. 그리고 평화상 수상 이후 1982년 레바논 침공을 지시했고 2만여 명의 아랍인이 희생된다.
일본 총리 사토 에이사쿠는 1967년 “핵무기를 만들지도, 보유하지도, 반입하지도 않는다”는 이른바 ‘비핵 3원칙’을 주장해 1974년 평화상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비핵 3원칙을 발표한 2년 뒤 미국의 닉슨 대통령과 “극동지역 방위를 위해 긴급 사태가 생길 경우 일본과 사전에 협의한 뒤 핵무기를 오키나와에 다시 반입하거나 오키나와를 통과할 권리를 인정한다”는 내용의 밀약을 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메나헴 베긴 전 이스라엘 총리와 사토 에이사쿠 전 일본 총리은 모두 본인의 노벨평화상 수상 근거와 정반대되는 행동을 보였다.
'닥터 지바고'의 작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그는 왜 노벨상을 거부했나
올해 밥 딜런을 수상자로 선정하는 이변을 연출한 노벨 문학상에 대한 얘기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 특히 일각에서 그의 수상 거부 가능성까지 제기되면서 관심이 쏠리기도 했다. 지금까지 노벨 문학상 수상을 거부한 사례는 두 번 있었다. 처음으로 수상을 거부한 작가는 '닥터 지바고'의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였다.
하지만 그의 수상 거부에는 말 못할 속사정이 있었다.
영화 '닥터지바고' 스틸컷
23일은 파스테르나크가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지 58년이 되는 날이다. 스웨덴 한림원은 1958년 10월23일 그를 수상자로 발표했다. 하지만 엿새 뒤인 29일 파스테르나크는 "노벨상 수상을 거부한다"는 뜻을 전했다. 노벨상이 제정된 이래 첫 수상 거부에 한림원은 당황했다.
그의 사정은 이랬다. 그가 쓴 유일한 장편소설 '닥터 지바고'는 주인공 유리 지바고가 러시아혁명 등을 거치며 겪는 방황과 혼란을 그렸다. 전쟁과 혁명 속에서도 인간에 대한 사랑을 잃지 않는다는 게 이 소설이 담고 있는 이야기다. 하지만 당시 소련에서는 혁명을 왜곡했다는 이유로 출판이 금지됐었다. 파스테르나크는 자국에서 출판이 어렵게 되자 완성 이듬해인 1957년 이탈리아에서 번역본으로 발표했다. 이후 인기를 얻으며 18개국에 번역 출판됐다.
문제는 노벨상 수상이 결정된 뒤 불거졌다. 자국의 사회상을 담은 이 소설에 분노한 소련작가동맹은 그를 제명하고 정부도 추방을 하겠다고 한 것이다. 이에 그는 당국에 '조국을 떠나는 것은 내게 죽음과 같다'는 탄원서를 보내고 노벨상 수상은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 노벨상까지 포기하며 조국을 버릴 수 없었던 이유는 바로 자신이 시대를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닥터 지바고였기 때문이다. 여주인공 라라도 실제 그의 연인이었던 올가 이빈스카야를 모델로 했다. 파스테르나크는 시대의 격랑 속에서도 비극적인 운명과 사랑을 껴안은 것이다.
그는 이후 번역 작업을 주로 하다 1960년 암으로 숨졌다. 그토록 떠나지 않으려고 했던 조국에서 '닥터 지바고'가 출판된 것은 그가 세상을 떠나고 27년이 지난 1987년이었다. 스웨덴 한림원은 그의 노벨상 거부를 받아들이지 않고 수상식을 보류했고, 1989년 그의 아들이 노벨상을 대신 받았다.
그들은 왜 노벨상을 거부했나
자의, 타의에 의한 다양한 거부 선례… 노벨상 권위 자체에도 회의적 시각 있어
▲ 미국의 포크가수이자 시인 밥 딜런이 노벨상 수상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냐는 조심스런 관측이 나오고 있다.
2016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미국의 포크가수 밥 딜런은 발표 일주일이 가깝도록 자신의 수상에 대해 어떤 공식적인 반응도 내보이지 않고 있다. 노벨상을 주관하는 스웨덴 한림원은 아직까지도 그와 직접통화를 못 했으며 이미 밥 딜런과의 접촉을 단념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래서 밥 딜런이 이대로 수상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냐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명확한 의사표명을 하지 않은 채 12월10일 열리는 시상식에 불참할 수도 있다. 밥 딜런은 2000년 오스카상을 수상했을 당시 직접 참석하는 대신 영상소감을 보내기도 했다.
과거 노벨상 거부사례와 이유는?
밥 딜런이 실제 노벨상 수상을 거부하더라도 이번이 첫 거부사례는 아니다. 이전부터 다양한 이유로 노벨상을 거부한 사례가 있다.
노벨상을 최초로 순수하게 ‘자의’에 의해 거부한 인사는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작가 장 폴 사르트르이다. 그는 196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지만 “노벨상은 수상자가 서구에 편중돼 있고 더구나 상은 작가 자신을 묶는 굴레가 된다”며 “작가는 스스로 체제가 되는 것을 허용해선 안된다”는 명언과 함께 거부의사를 밝혔다. 사르트르는 노벨상 거부 이전에 프랑스의 최고훈장인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거부한 적도 있다.
1973년 아시아인 최초로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된 르둑토(黎德壽) 당시 베트남 총리는 베트남 전쟁종결과 파리평화협정을 이끈 공로를 인정받았지만 “아직 조국에 평화가 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수상을 자진 거부했다. 실제로 베트남전은 1973년 1월 파리평화협정 체결 이후에도 교전이 계속되다 1975년에야 완전히 종결된다.
▲ 노벨상을 완전히 자신의 의사로 거부한 사례는 1964년 프랑스 작가 장 폴 사르트르와 1973년 르둑토전 베트남 총리 두 가지이다.(사진출처: 위키백과)
이에 앞서 나찌 체제 아래의 독일에서 1936년 반체제 인사 카를 폰 오시츠키가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되자 격노한 총통 아돌프 히틀러는 모든 독일인의 노벨상 수상을 금지시켰다. 결국 리하르트 쿤(1938년 화학상), 아돌프 부테난트(1939년 화학상), 게르하르트 도마크(1939년 의학상)은 2차 대전이 끝나고 히틀러가 실각한 뒤에 상금을 제외하고 상과 메달만 받을 수 있었다.
1958년 구소련의 작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도 노벨문학상 시상식에 참석할 수 없었다. 그의 대표작 ‘닥터 지바고’는 소련혁명과정에 대한 비판적 내용이 담겨 있으며, 그가 노벨상 수상자로 발표되자 소련작가동맹이 그를 매국노로 비난하며 국외추방운동까지 벌였다. 결국 이런 압박을 견디지 못한 파스테르나크는 결국 수상을 거부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수상포기가 더 적절한 표현으로 보인다.
소비에트 체제 아래의 강제노동 수용소 실상을 폭로한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수용소군도>로 유명한 러시아의 작가 알렉산드르 솔제니친도 시상식에 참석할 수 없었다. 그는 스탈린에 비판적이던 흐루시초프 집권 시기 작가들에 대한 검열이 완화된 시대적 배경에서 자신의 수용소 생활을 바탕으로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발간했지만 이후 흐루시초프가 실각하자 탄압의 대상이 됐다.
솔제니친은 1970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지만 소련 정부가 그의 귀국을 허가하지 않을 것이 두려워 시상식에 참가하지 못했다. 그러나 1974년 2월 결국 그는 국외추방 당했고 그해 12월 노벨상 메달을 받았다. 솔제니친은 국외추방 기간 동안 <수용소 군도>를 집필했으며 소비에트 체제가 붕괴한 뒤 1994년 조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외에도 1991년 평화상 수상자인 미얀마의 민주화인사 아웅산 수치와 2010년 평화상 수상자인 중국의 작가이자 인권운동가 류샤오보도 각각 정부의 가택연금과 조치와 제재로 시상식에 참여할 수 없었다. 수치는 남편과 아들이 대신 시상식에 참석했으며 21년이 지난 2012년에야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열리는 시상식장에서 수상소감 연설을 할 수 있었다.
▲ 러시아의 작가 파스테르나크와 솔제니친은 소비에트 체제를 비판적으로 그린 작품 때문에 어쩔수없이 노벨상 수상을 거부하거나 뒤늦게 메달을 받았다.
노벨상의 권위는 절대적인가?
한편 노벨상의 권위 자체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도 있다. 주로 수상자의 서구 편중현상과 지나치게 비밀에 부쳐진 시상기준이 지적된다. 노벨평화상의 경우 수상 이후 노벨상의 근거가 된 행위를 뒤집은 사례도 있다.
노벨상이 처음 시상된 1901년부터 2013년까지 수상자들을 대륙별로 보면 유럽이 579명, 북미가 355명, 아시아 62명, 아프리카 21명, 오세아니아 16명, 남미 14명 순이다. 실제로 전체 수상자의 약 90%가 북미와 유럽에 편중돼 있는 것이다. 그리고 노벨상 운영원칙상 심사와 시상의 전 과정이 비밀에 부쳐지고 이에 대한 모든 기록과 자료는 50년간 비공개 되며 이후에도 연구의 필요성이 중요한 때만 심의를 거쳐 공개된다.
이스라엘 총리 메나헴 베긴은 1978년 이집트의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과 평화협정인 ‘캠프데이비드협정’을 체결해 같은 해 사다트와 공동으로 평화상을 수여했다. 그러나 베긴 총리는 젊은 시절 91명이 사망한 다윗왕호텔 폭탄테러 등에 연루된 우익테러리스트였으며 죽을 때까지 이에 대해 사과하지 않았다. 그리고 평화상 수상 이후 1982년 레바논 침공을 지시했고 2만여 명의 아랍인이 희생된다.
일본 총리 사토 에이사쿠는 1967년 “핵무기를 만들지도, 보유하지도, 반입하지도 않는다”는 이른바 ‘비핵 3원칙’을 주장해 1974년 평화상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비핵 3원칙을 발표한 2년 뒤 미국의 닉슨 대통령과 “극동지역 방위를 위해 긴급 사태가 생길 경우 일본과 사전에 협의한 뒤 핵무기를 오키나와에 다시 반입하거나 오키나와를 통과할 권리를 인정한다”는 내용의 밀약을 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메나헴 베긴 전 이스라엘 총리(왼쪽)와 사토 에이사쿠 전 일본 총리(오른쪽)은 모두 본인의 노벨평화상 수상 근거와 정반대되는 행동을 보였다.(사진출처: 위키백과, 브리태니커 백과)
허수영 기자 heoswi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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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상 거부한 작가·정치가… 왜 그랬을까?
매년 이맘때면 노벨상 얘기로 세상이 떠들썩하다. 세계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노벨상은 알프레드 노벨(1833~1896)이 자신의 재산을 기부해 만든 상. 1901년 이후 해마다 생리학·물리학·화학·문학·평화·경제학 등 6개 분야에서 가장 뛰어난 업적을 이룬 인물에게 상과 상금을 준다. 지금까지 900명의 개인과 단체가 이 상을 받았다. 숱한 기록과 이야깃거리도 쏟아졌다. 오늘(3일)부터 시작되는 노벨상 시즌을 맞아 이와 관련된 '별별 기록'들을 한데 모았다.
‘최초’ ‘최연소’ 기록 누구?
“우리가 ‘폴로늄’과 ‘라듐’을 발견했어!” 방사선 방출 원소인 폴로늄, 라듐을 찾아낸 프랑스의 여성 과학자 마리 퀴리(1867~1934). 그의 이름 앞에는 늘 ‘처음’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퀴리는 최초의 여성 노벨상 수상자이자 사상 처음으로 노벨상을 두 번 받은 과학자다. 그의 방사능 연구는 원자력발전 시대를 여는 열쇠가 됐다.
파키스탄의 인권운동가 말랄라 유사프자이(19)는 역대 최연소 노벨상 수상자다. 2014년 17세의 나이로 평화상을 탔다. 1915년 25세에 물리학상을 받은 윌리엄 로런스 브래그(1890~ 1971)의 ‘최연소 기록’을 8년이나 앞당긴 것. 말랄라는 어린이와 여성의 인권 신장을 위해 힘쓴 공로를 인정받아 평화상을 품에 안았다.
아시아인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는 인도 시인 라빈드라나드 타고르(1861~1941)다. 우리나라 조선을 위해 쓴 시 ‘동방의 등불’로 한국에서도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1913년 시집 ‘기탄잘리’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노벨상은 서양인의 전유물이라는 편견을 깬 첫 사례였다.
피는 못 속여… 가족 수상자들
1959년 열두살 소년 로저 콘버그는 가족과 스웨덴 스톡홀름을 찾았다. 아버지 아서 콘버그(1918~2007)의 노벨 생리학상 수상을 축하하기 위해서였다. 소년은 시상식을 지켜보며 ‘나도 언젠가 저 자리에 서겠다’고 다짐했다. 50여년 후인 2006년 로저 콘버그는 아버지가 상을 받은 바로 그곳에서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아버지와 아들은 ‘노벨상 부자(父子)’로 역사에 기록됐다.
가족 수상자로는 ‘퀴리 가문’을 빼놓을 수 없다. 메달을 무려 5개나 가져갔다. 1903년에는 퀴리가 그의 남편 피에르 퀴리(1859~1906)와 공동으로 물리학상을, 1911년에는 단독으로 화학상을 받았다. 1935년에는 퀴리의 첫째 딸 이렌 졸리오 퀴리(1897~1956)가 남편 프레데릭 졸리오 퀴리(1900~1958)와 함께 화학상을 수상했다.
다관왕 주인공들
한 번도 받기 어려운 노벨상을 두 번, 세 번 받은 사람(단체)도 있다. 사회봉사 활동에 앞장서는 국제적십자위원회는 1917·1944·1963년 세 차례나 평화상을 차지했다. 미국 라이너스 폴링(1901~1994)은 노벨 화학상을 받은 데 이어 전쟁과 핵무기 반대 운동을 펼쳐 평화상까지 거머쥐었다.
미국 물리학자 존 바딘(1908~1991)은 노벨 물리학상을 두 번 받았다. 이와 관련해 재밌는 일화가 전해진다. 바딘은 1956년 노벨상 시상식에 학생이었던 두 아들을 데려가지 않았다. 학업에 집중하라는 이유에서였다. 시상식에 참석한 스웨덴 국왕은 이를 나무랐고 바딘은 얼떨결에 “다음번에는 데리고 오겠다”고 답했다. 말이 씨가 된 걸까? 1972년 바딘은 또다시 물리학상을 받게 됐고, 이번에는 가족을 모두 데리고 시상식에 참석했다.
괴짜 연구자들을 위한 ‘이그노벨상’
물리학, 화학, 환경보호 등의 분야에서 기발하고 재밌는 연구를 펼친 사람에게 주는 상이다. 미 하버드대의 과학잡지인 ‘애널스 오브 임프로버블 리서치’(AIR)가 1991년 과학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자 제정했다. 이그(Ig)는 ‘있을 것 같지 않은 진짜(Improbable genuine)’의 약자다.
벌에 쏘였을 때 가장 아픈 부위를 알아내기 위해 몸에 200여번 벌침을 놓은 미국인, 몸을 왼쪽으로 기울여 프랑스 에펠탑을 보면 탑이 더 작게 보인다는 사실을 밝힌 네덜란드인 등이 이 상을 받았다.
지난달 22일(현지 시각) 하버드대에서 열린 올해 시상식에서도 톡톡 튀는 아이디어가 쏟아졌다. 사흘간 초원에서 팔다리에 보조장치를 달고 염소의 삶을 체험한 영국인 토머스 트워이츠는 생물학상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한쪽 팔이 간지러울 때 거울을 보고 다른 쪽 팔을 긁으면 가려움이 해소된다는 사실을 발견한 독일 뤼베크대 연구팀은 의학상을 수상했다.
이그노벨상 수상자 가운데 노벨상까지 탄 사람도 있다. 주인공은 네덜란드의 물리학자 안드레 가임이다. 그는 2000년 개구리를 공중부양하는 실험으로 이그노벨상을, 2010년에는 ‘꿈의 신소재’로 불리는 그래핀을 발견해 노벨 물리학상을 거머쥐었다. 한국인도 세 사람이나 이그노벨상을 받았다. 1999년 ‘향기나는 정장’을 개발, 환경보호상을 차지한 권혁호씨가 대표적이다.
'닥터 지바고'의 작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그는 왜 노벨상을 거부했나
올해 밥 딜런을 수상자로 선정하는 이변을 연출한 노벨 문학상에 대한 얘기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 특히 일각에서 그의 수상 거부 가능성까지 제기되면서 관심이 쏠리기도 했다. 지금까지 노벨 문학상 수상을 거부한 사례는 두 번 있었다. 처음으로 수상을 거부한 작가는 '닥터 지바고'의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였다. 하지만 그의 수상 거부에는 말 못할 속사정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