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준비물: 여권, 여권사진 2매, 유로화, 가방, 후라쉬, 묵주, 성서(매일미사) 성가책, 카메라, 본인의 약(소화제, 감기 ,혈압약 멀미약, 지사제등), 선그라스, 우산 ,보온병 또는 물통(버스이동시 오차), 필기구, 책
세면도구(치약, 칫솔, 화장품, 삼푸, 선크림, 면도기 등)
의류: (동계용 잠바, 장갑, 모자, 목도리, 수영복, 실내용스렛바)
간식: 초코렛, 과자, 사탕, 오징어, 고추장, 김, 멸치볶음, 깻잎캔, 라
면, 참치캔 등),
기온: 6-10도(현지 기온이 낮으므로 겨울용 두터운 잠바, 장갑)
8. 현지교통: 이스탄불-앙카라(450km, 7시간40분 전용버스),
앙카라- 가파도키아(276km, 11시간 “ )
가파도키아-파묵갈레(270km, 13시간 “ )
체스메-히오스(야간 FERRY로 이동)
특기사항: 1)항상 주님께 감사한 마음을 갖고 순례합시다.
2) 조금 불편하더라도 서로 협조하고 양보합시다.
3)장기간 버스로 이동하는 관계로 간식준비가 요망됩니다.
성지 순례를 위한 기도문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늘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 감사합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고 가신
고통의 길, 순교자들이 생명을 내어놓고 걸어가신 신앙의 길을 마음 깊이 새
기고 굳건한 신앙을 닮아가기 위해 터키, 그리스 성지를 순례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계획한 대로 성지 순례를 할 수 있도록 저희를 지켜주시고 이끌어 주
소서. 또한 ,우리로 하여금 순교자들의 정신을 이어받아 어떤 어려움 속에서
도주님께서 가르쳐주신 진리의 길을 꿋꿋하게 걸어갈 수 있는 용기와 건강을
주시고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는 참된 신앙인이 될 수 있도록 격려 해
주소서.
모든 순교자의 모범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나이다.
아멘 (주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
9. 성지 순례기
찬미 예수님! 감사합니다. 사도 바오로께서 소아시아 지방에서 초대교회를 창립하시고 전교를 하신 터키, 그리스를 순례하도록 허락하여 주신 주님 감사합니다.
이번 성지 순례는 인천교구 연수동 출신 신부님, 신학생 부모님의 기도모임인 게쎄마니 회원이 2003.7월부터 성지순례를 다녀오기 위해 기금을 매월 마련하여 2006년1월에 출발하기로 결정하였다. 또한 서울교구의 필자의 친구 박길범사장과 서울교구 신자와 함께 가게 되었다.
봄 날씨 같은 화창한 일요일 오후 공항 리무진 버스를 타고 인천공항에 도착하니 이길용사장님 부부께서 맞이한다. 잠시 기다리니 우리 일행 전원 20명이 도착하여 출국수속을 마치고 18:10분 인천공항을 출발하는 대한항공 KE6955편은 이스탄불로 떠나는 승객으로 만석으로 빈자리가 없었다. 혼잡한 기대에 대한항공 승무원은 친절한 서비스로 22:30분에 이스탄불에 도착하니 터키 이스탄불은 겨울이라 그런지 쌀쌀한 초겨울 날씨 같았다.
마중 나온 현지 가이드의 안내로 대형버스에 오르니 가이드 박선우양은 터키에 대하여 인구는 7500만 명, 면적은 78만 평방키로미터로 남한의 7배이며 , 이스탄불은 아시아 쪽으로 97%가 차지하며 서양 쪽은 3%라고 한다. 또한 여행 시 주의사항으로 여권과 소지품의 보관에 대하여 단단한 주의를 환기 시켰다. 호텔에 도착하여 방 배정을 받고 박길범사장과 같이 9일간 같이 사용하기로 하고 이스탄불에서 첫 밤을 맞이했다.
숙소: H. NAZAR
T:0090. 212. 522 2727
Ordu cad, yesil Tuluma sok no17 Laleli, ISTANBUL
터키
터키는 자연과 문명이 조화를 이루고 동, 서양이 공존하며 그리스, 로마시대의 문화유적과 이슬람 문화가 한데 모여 있는 이른바 “퓨전” 국가이다.
메소포타미아와 오리엔트 문명이 이곳에서 잉태되었고 그리스, 로마, 비잔틴, 이슬람 등 인류역사를 주도했던 많은 문명이 이곳에서 명멸하였다. 멀리 기원전 20세기 시작되어 알렉산더대왕이 정복한 후 그리스문화권에 들어갔다가 그 후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이곳은 바오로사도께서 AD 45-58년까지 전도한곳이며 초대교회의 흔적이 남아있어 많은 성지순례 객이 찾고 있으며 축구를 좋아하는 나라, 한국동란 시 참전으로 맺은 인연으로 형제의 나라라고 생각하는 가까운 나라 터키, 문화만이 아니라 천혜의 자연환경을 가지고 있는 신비의 나라이다.
이스탄불(콘스탄티노플)
이스탄불은 동양과 서양이 만나는 지점에 있으며 예루살렘, 로마와 더불어 그리스도교의 3대 역사적인 도시 중 하나로서 동서양 문화와 상업의 교류지 역할을 다하여 왔다. 오늘날은 세계적인 국제도시로 정치와 상업의 중심지이다.
이 도시는 보스포러스 해협이 이스탄불을 둘로 가르고 있는데 동쪽은 아시아, 서쪽은 유럽에 속하므로 동양과 서양이 한데 어우러져 있는 곳이다. 그리고 두 대륙을 보스포러스 대교가 이어준다.
이스탄불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1600년 동안 세계를 제패한 로마, 비잔틴, 오스만투르크의 중심지로서 무려 120여 황제들이 집정하였고 도시의 이름도 제국의 변화에 따라 원래 비잔티움(BYZZANTIUM)으로 불렀다. 동로마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330년에 수도를 로마에서 비잔티움으로 옮긴 후 새 수도의 이름을 신 로마(NEA ROMA)로 붙였지만 사람들은 콘스탄티노플 이라고 불렀다.
콘스탄티누스는 312년 10월 말세티우스와 세력 경쟁 직전 비몽사몽간에 십자가 환상을 보았고 승리를 계시 받았다.
콘스탄티누스는 황제 자리에 오르기 전 경쟁자 막센티우스와 결렬한 싸움을 치루어야 했다.
321년 10월 로마 제국의 황제자리를 두고 콘스탄티누스와 막센티우스 사이에 역사적인전투가 벌어졌다. 운명의 결전이 있기 전날 정오 비몽사몽간에 환상을 보았다. 그것은 십자가였다. 태양위에에서 광채가 나는 십자가에는 이런 문구가 있었다. “이것으로 승리하리라” 그 문구를 콘스탄티누스 혼자만이 본 것이 아니라 전군이 보았다고 한다. 그날 밤 콘스탄티누스는 꿈에 그리스도를 보았으며 그리스도는 그에게 십자가를 보이면서 “ 이것으로 군기를 삼아라”하고 말했다고 한다. 이튿날 전투에서 콘스탄티누스가 승전 했다. 콘스탄티누스는 십자가 환상을 결코 잊을 수가 없었고 황제로 즉위 한 후 로 예수님을 믿기 시작했다고 하며 그의 어머니 헬레나도 그리스도를 믿으며 여러 군데 교회를 건립했다..
그는 313년 밀라노에서 그리스도교를 공인하는 칙령을 내렸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허락한 최초의 로마제국의 황제이다. 지하에서 숨어 복음을 전하면서 온갖 박해와 죽음을 당했던 그리스도교는 비로소 긴 박해의 터널에서 벗어낫다. 그는 그때까지 로마제국의 수도였던 로마를 교황에게 내어주고 330년 비잔티움(콘스탄티노플)으로 천도 하였다.
이 도시는 320-1453년 터키군대가 함락 될 때 까지 1100여 년 동안 비잔틴제국(동로마제국)의 수도이자 동방교회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곳에는 박물관, 성당, 궁전, 모스크 등이 있고 현재는 1500여만 명이 살고 있는 현대도시로 변화, 서양과 동양의 절묘한 조화된 모습을 간직, 묘한 신비가 깃든 도시가 되었다. 이스탄불의 특징은 돔과 첨탑이다. 이슬람교 국가인 터키에는 이슬람사원인 모스크가 많고 대부분의 모스크들이 돔과 첨탑으로 이루어져 잇기 때문이다. 서기 500년 이래 동방교회 (ORIENTAL CATHOLIC) 콘스탄티노플 대주교가 간활해왔다. 이스탄불은 3개 지역으로 나누는데 첫 번째 골든혼의 남쪽에 있는 술탄 아흐메트지역으로 구시가지로 역사지구이며 현재는 이스탄불의 관광의 중심지역이다. 두 번째로는 북쪽 갈라타지역은 무역, 행정, 상업의 중심지이고 도 다른 하나는 아시아 사이드지역으로 주거지역으로 구분되어 있다.
(1)보스포러스해협
호텔에서 아침을 마치고 밝게 전등불을 밝히고 있는 생선가게를 바라보며 유람선 선착장에는 09:30분에 도착했다. 당초에는 정기선으로 보스포러스 해협을 유람하려고 하였으나 관광객 3팀이 유람선을 대여하여 골든 혼 선착장에서 구시가, 신시가, 동서양을 가르는 항로를 따라 언덕위에 아름다운 주택들과 궁전, 모스크를 바라보며 그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있는데, 갈매기들이 몰려다니며 우리를 반긴다. 보스포러스 브리지의 현수교를 지나고 처음 만든 다리 아타튜르크 브리지를 지나 한바퀴 유람하며 터키에서 첫 번째 여행을 즐겼다. 바닷바람이 차가워서 객실에서 환담도 나누다가 아름다운 이스탄불항구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기에 바쁘다. 여행은 언제나 즐겁다. 조금 부담은 되었으나 같은 믿음을 가진 신자들과 가게 되어 마음은 편안하고 기분이 좋았다. 보스포러스해도 우리나라 겨울날씨처럼 해안에서 불어오는 매서운 해풍으로 상당히 쌀쌀했다. 유럽과 아시아 사이에 위치한 해협으로 흑해와 마르마라해를 연결하고 있다. 길이가 30km, 넓은 곳의 폭이 3500m, 좁은 곳이 700m 로 , 물 흐름이 세차서 여기저기에 소용돌이가 치고 있다. 양측 해안에는 여기저기에 둥근 돔과 미나렛, 고대유적지, 그림 같은 아름다운 전통적인 터키마을, 울창한 숲 등이 곳곳에 장관을 연출하고 해협이 바라보이는 언덕에는 갑부들의 별장 등이 매우 아름답게 펼쳐 있다. 고세 중세만 해도 지중해와 흑해간의 거의 모든 상거래는 이 해협을 통해서 이루어지며. 온화한 기후, 생동감 넘치는 밤 문화, 선한국민들, 맛있는 터키 음식점이 있다. 국제 무역에 있어 보스포러스 해협의 중요성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년 간 38,000여척이 이곳을 통과한다고 한다.
(2) 소피아 대성당(아야소피아 박물관)
비잔틴 제국시대의 수많은 유적 가운데 으뜸이며 서기 6세기 중엽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명령으로 건축된 비잔틴시대의 건축 예술 중 가장 아름다운 꽃 소피아 대성당은.로마 성 베드로성당이 지어지기 전 까지는 규모면에서 세계의 최대를 자랑 했다.
이 성당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360년에 대성당의 기초를 세웠고 415년 증수 되었으며 여러 차례 지진과 폭동 및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유스티니아누스황제의 명으로 532-537년 까지 5년간 공사 후에 현재모습으로 완공하였다. 이 성당은 오스만 터키에 의해 정복되기 전까지 916년간은 교회로 사용하였고, 그 후 1453년-1934년 까지 481년간 이스람교 사원으로 사용되었다가, 1935년 2월부터 아야소피아박물관으로 바뀌어 일반인에게 공개하고 있다. 소피아는 “하느님의 지혜”란 뜻으로 그리스도를 지칭한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베들레헴에 “예수탄생교회”와 시나이산 기슭에 “성 카타리나수도원”을 건립하도록 했으며 에페소에 “사도 요한 기념교회”도 건립하였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콘스탄티노플을 로마보다도 더 아름다운 도시로 만들려고 했다.
건축가 안테미우스와 이시도루스가 맡아 교회의 건축을 위해 좋은 건축자재와 돌을 나라 전역에서 운반하였고 교회 내부에 사용된 대리석들은 지중해에 있는 국가들에서 가져온 것으로 본당 양쪽에 있는 4개의 녹색 화강암기둥은 에페소의 항구 체육관에서 가져온 것이며 코너에 있는 한 쌍의 반암 대리석 기둥은 바알벡(현재 레바논)에 있는 아폴로 신전에서 가져온 것이다.
대성당의 높이 55.6m이며 동서의 폭은 31m, 남북의 폭은 33m 로서 내부로 들어가 보면 이 건물의 중심이 되는 기둥을 찾아 볼 수 없고 천장은 대리석으로 된 둥근 돔 (DOME) 형태이고 내부는 모든 벽면은 모자이크 성화로 장식되었고 규모와 기교에서 세계의 자랑할만한 걸작이다.
2층 갤러리는 여성들이 예배를 보는 장소이자 종교회의 시 사용된 곳으로 올라가는 길은 계단 대신 비탈길로 마차가 올라 갈수 있도록 만들어져있다.
성모마리아께서 어린 아기예수를 안고 있는 모자이크는 삼면 어디에서 바라보더라도 관람자를 정면으로 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또한 중앙에 예수그리스도, 왼쪽에 성모마리아, 오른쪽 세례자 요한이 그려져 있다. 그 중에서도 예수그리스도의 얼굴이 너무 인간적인 모습으로 따뜻한 미소를 한 주님의 모습을 바라보는 순간 너무 아름답고 우리들에게 축복을 내려 주시는듯하여 너무나 이번 여행이 행복하며 기쁘다. 2층 왼쪽 끝부분의 모자이크 벽화는 예수님이 성좌에 앉아계시고 양옆에는 조이여왕이 16세 때 결혼한 첫 남편 로마노스3세의 모습이 있었다. 그러나 40대에 남편이 죽자 두 번째 남편의 얼굴과 이름으로 바꾸었으나, 60대에 남편이 죽자 세 번째 남편으로 바꾸어 첫 번째 남자의 몸에 세 번째 남편의 늙은 얼굴이 새겨져 있다. 또한 그때 그녀에 대한 흉흉한 민심을 반영하여 예수님의 눈이 그녀를 노려보고 있다고 가이드 박 양이 재미있게 설명을 하고 있다. 가이드 박 양은 열심히 우리에게 모자이크에 얽힌 야사를 설명하니 흥미로웠다.
1453년 오스만제국의 메메트는 콘스탄티노플을 함락 하자마자 소피아 대성당을 찾아가 그 아름다움에 압도되어 파괴하는 대신 이슬람의 모스크로 사용, 십자가 대신 초생 달 표지로 모자이크 벽화위에 회칠을 하고 이슬람교의 코란의 금문자와 문양들로 채워졌다. 이후 복원작업이 진행되면서 두꺼운 회칠이 벗겨지면서 성모마리아를 비롯한 비잔틴시대의 화려한 흔적들이 드러났지만 현재는 복원작업도 중단된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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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톱카프궁전
세계의 최강국으로 막강한 국력을 자랑하던 오스만 터키 제국의 24명의 술탄(황제)과 그 가족들, 그리고 궁녀와 하인 군인 등 5천여 명이 1478-1853년 까지 400여 년간 사용하던 궁전으로 정치, 문화의 중심지였다. 가장 뛰어난 비종교적 건물로 손꼽히며 소장된 유물만 86,000여점으로 세계적인 박물관이다. 1452년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한 오스만 술탄 마호멧은 처음엔 그랜드 바자르 근처의 베야지트 지역에 조그마한 궁전을 세워 머물다가 고대 동로마 도시의 페허 위에 톱가프 궁전을 건축 그 후 술탄들이 19세기까지 새로운 건축물들을 증축하고 화려하게 장식하면서 궁전을 넓혀 나갔다고한다.
골든 혼 해협이 바라다 보이는 곳에 세워진 현존하는 오스만제국의 거대한 호화로운 궁전으로 이궁전은 아름다운 건축물이 미로와 같이 이어져 있으며 호화로운 궁전 안에서 술탄과 그 부하들이 생활하며 통치하여왔다. 궁전의 외측, 제1정원으로 불리어지고 있는 곳은 수목으로 무성한 아름다운 정원이다. 제2정원으로 들어가면 톱가프 궁전의 메인 전시관이 있다. 오른쪽 전시관에는 술탄들이 사용하던 각종 무기를 비롯하여 장신구, 도자기, 의복 등 세계 각국에서 보내온 선물들이 전시되고 있다. 왼쪽은 술탄의 많은 처들과 그 자식들이 생활하여온 할렘이 있으나 관람하지는 못했다. 오른쪽 사이프러스와 플라터너스 그늘로 늘어진 장소가 일찍이 궁전의 조리 동 이었으며, 현재는 크리스탈, 은제품, 중국도자기 등을 전시하고 있다. 술탄들은 시계에 큰 흥미를 가졌고 역사적으로 유럽의 여러나라 왕들이 기증한 시계 수집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또한 보석관에는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86캐럿 다이아몬드와 커다란 에메랄드가 박혀 있는 단검 , 선지자 모하메드의 무덤에 사용하기위해 만들어진 거대한 황금촛대 등 가장 귀중한 것들을 전시하고 있다.
(4) 블루모스크(술탄 아흐멧 모스크)
이스탄불의 가장 높은 지역에 위치한 블루모스크는 보스포러스해협이 한눈에 들어오고 멀리서도 그 장대한 돔과 미너렛(첨탑)을 볼 수 있는 오스만 터키시대에 지어진 직경 27.5m, 높이가 43m에 다다르는 아름다운 회교사원으로, 술탄 아흐멧 모스크는 규모 면에서 터키의 최대의 것이다.
술탄 아흐멧은 (1609-1616)은 성 소피아 성당을 능가하는 더 크고 웅장한 모스크를 짓도록 명령하고 소피아성당 바로 맞은편에 이 모스크를 건축하였다. 따라서 이 모스크는 공식적인 이름은 술탄 아흐멧 모스크이다. 일반적으로 블루 모스크라 불리는 이유는 내부에 21,000개의 푸른 타일로 장식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모스크는 내부의 벽이 아름다운 청색과 백색이 이즈닛크 타일로 장식되어 있다.
이곳에서 왕들은 종교적인 중요한 선언을 이곳에서 가졌고 종교휴일에는 이곳에서 축제와 메카를 향한 순례의 출발지가 되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첨탑(MINARET)이 6개나 있는 대형 모스크로 오스만제국의 영화를 자랑하는 모스크이다. 이사원은 위대한 건축가 시난의 제자였던 메흐멧 아가에 의해 1609년 착공 17년 만에 완성한 오스만제국의 대표적인 고전 건축물이다.
전설에 의하면 아흐멧 1세가 메카로 떠나기 전에 건축가에게 황금으로 된 첨탑들을 세울 것을 명령하였으나 당시 재정적인 형편으로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건축가는 재치를 발휘하여 터키 말로 금(GOLD)은 알 틴이고 여섯은 알 타 이므로 명령을 따른다는 뜻으로 6개의 돔 첨탑을 세운 것이라고 전한다.
돔의 200개가 넘는 조그만 창은 스태인드 글래스로 장식되어 있어 이를 통해 들어오는 아름다운 햇살이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5) 히포드럼 광장
유니모스크(비들기)를 지나 오리엔탈 특급열차가 출발하는 실게지 역을 지나 갔다. 이곳에서 불가리아 소피아까지 가서 파리, 이란, 중국을 거쳐 한국까지 철로가 연결이 된다고 가이드선생님이 재미있게 안내한다. 구시가지에는 깨끗한 전차가 지나가고 도로변에는 허물어진 성곽이 파괴된 체 그대로 방치하고 있었다. 구시가지의 골목길 돌바닥은 콘스탄티노플 시절부터 있었던 것 이라고 한다. 히포드럼 광장에는 11;00가 조금 넘어 도착하니 높이 솟아있는 오밸리스크만 우리를 반기었다. 오늘날 술탄 아흐멧 광장이라 부리는 히포드럼은 고대 도시의 심장부이다. 오벨리스크등 옛 터전에는 유적은 남아 있지 않다. 세 개의 탑이 남아 있는 넓다 란 광장이 로마시대에 전차차경기장으로 3만 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었던 히포드럼이다. 비잔틴 수도에서 발생한 각종 정치의 중심지이다. 히포드럼의 건축은 이 도시를 정복한 로마 황제 셉티우스 세베루스의 통치기간중인 203년에 시작하여 비잔틴 콘스탄틴 대제에 의해 330년 5월11일 완성 각종 스포츠경기, 귀족들의 사회모임, 결혼식, 그리고 시장 등이 열리던 곳이다.
전차경기는 이 장소에서 가장 인기 있던 경기였다.
이집션 오벨리스크(디킬리타쉬)
히포드럼 뿐만 아니라 이스탄불에서 가장 오래된 기념비로 원래 높이는 32.5m 이었는데 현재는 일부 파손되어 20m이다. 이 오벨리스크는 BC 15세기 즉 3500년 전에 만들어 졌다.
이집트의 파라오가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위해 세운 것이다. BC 390년 비잔틴황제 테오도시우스1세는 이집트 룩소르에 있는 카르낙의 아몬신전에서 이 기둥을 가져와 현재의 위치에 세웠다.
또한 히포드럼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기념비는 B.C 479년에 그리스 델피의 아폴로신전에서 가져온 뱀 기둥이다. 326년 콘스탄틴대제가 그리스에서 가져와 이곳에 세워 놓은 뱀 기둥은 팔라태아전투에서 페르시아에 대항하여 싸운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세 번째 콘스탄틴기둥는 코스탄틴 7세에 의해 세워졌는데 그의 할아버지 바실레우스를 기념하기위해 세웠다. 10세기에 세워진 이 기둥은 높이가 32m이며 외부는 청동이 입혀졌는데 13세기 초 라틴군이 이 도시를 점령 후 떼어냈다고 한다.
성소피아성당 박물관을 순례 한 후 이스탄불에서 10:40분 354km떨어진 앙카라를 향해 떠났다. 18:20분에 6.25동란 시 한국에 참전하여 전사한 한국참전 용사탑이 있는 한국공원을 방문 전몰장병에 대한 묵념을 한 후 어둠이 깃 뜬 앙카라 시내에 잇는 아타투르크 영묘를 바라보며 호텔로 갔다.
(6)가파토키아
터키의 수도 앙카라에서 300km 가량 떨어진 네브쉐히르 도시에 위치하고 있는 가파토키아로 투어버스를 타고 잘 닦인 고속도로를 따라 질주하는데 우측에는 강물이 흐르고 저 멀리 산등성이에는 하얀 눈으로 뒤 덥혀있었다. 괴뢰메 마을 입구에 들어서자 기암절경들이 마치 동화 속에서나 볼 수 있음직한 버섯모양의 기암괴석들이 드넓은 계곡지대에 세계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장관을 이루고 있다.. 이 지역은 먼 옛날 화산 분화구에 의한 화산재와 용암 등이 오랜 세월동안 바람, 비, 눈 등에 의해 침식당하고 지진을 겪으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약한 사암과 강한 용암으로 형성된 바위 속에 언뜻 보면 아무도 사는 것같이 보이지 않으며 불가사의한 이 대규모의 지하 도시 데린구유에는 많을 때는 200만 명 정도가 생활했다고 한다. 우리는 네브쉬힐에서 29km떨어진 마을 가장 규모가 큰 데린구유로 들어갔는데 개미집처럼 뻗어 있는 암굴 통로를 따라 내려갔다. 끝없이 얽혀 있는 미로에서 방향감각을 잃어버릴 수 있어 앞사람과 떨어지지 않게 바짝 따라 들어갔다. 지하 50m(20층) 까지 파고 들어간 면적이 2500 평방키로미터에 달하고 마치 개미집처럼 상하좌우로 파 내려간 동굴의 전체길이가 수십 km에 달하고 2만 명 정도가 거주하였다고 추정하고 있다. 발견된 지하 도시가 50여개 정도가 발견되었다. 최초로 누가 동굴을 파기 시작했는지 정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BC 1400년에 히타이트족에 의해 형성 되었다는 추측이다. 내부의 통기구멍은 각층을 통과하도록 되어 있고 여기에는 토굴과 암혈을 파고 숨어살던 초기 기독교인들의 은신처들, 기도처와 신학교, 동굴교회들이 말로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로 거대한 생활공간의 모습을 갖고 있어 관광객들을 놀라게 하고 있다. 유다인들과 이방인들이 로마제국의 박해를 피해 지하도시에 숨어살던 기독교인들이 신앙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처절한 삶을 살았을까 상상을 하며 초대교회의 생생한 역사를 보는듯하다. 십자군, 이교도, 외부세력의 침입에 대비하여 맷돌과 같은 커다란 둥근 돌로 출입구를 막아 외부의 침입을 막기도 했다. 우리는 바위에 머리를 부딪치기도 하고 지하 8층 까지 내려가 널따란 교회 지하광장에서 주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서기 17년 로마황제 티베리오는 카파도키아 왕국을 멸망시키고 로마 제국의 속주로 삼았다.
이 지역에 관해서 신약 성경에는 두 번 나온다. (사도 2,9: 1 베드로 1,1)
서기 30년 5월경 예루살렘에서 베드로 사도가 그 유명한 오순절 설교를 할 때 “ 파르티아사람, 메디아사람, 엘람사람, 또 메소포타미아와 유다와 가파토키아와 폰포스와 아시아주민”들이 있었다 한다. 그런가 하면 1세기말 씌어진 베드로전서 서두에서 지금의 터키 여러 지방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인사를 전하는데, 그 가운데 가파도키아가 등장한다. 이미 1세기 말욥에 가파도키아 에는 그리스도인들 있었다고 하겠다. 이와 같이 놀라운 자연의 경이로움과, 기독교인들의 처절한 믿음을 지키기 위한 흔적들을 보면서 주님께 우리의 신앙을 더욱 굳건히 하도록 용기와 지혜를 간구하였다.
가파도키아의 지하도시와 괴뢰메의 지하됴회를 순례하고 숙소인 GOMEDA .H에는 18:00시에 도착 체크인을 한 후 필자와 박 토마스 아퀴나스는 호텔 지하에 있는 터키탕에 15$를 주고 들어갔다.
이슬람 경전에 “청결은 신앙의 절반” 이라고 명기되어 있기 때문이다. 터키탕 안에는 사람이 보이지 않아 사우나실, 탈의실, 마사지실 등을 오가며 찾았으나 안보였으나 잠시 기다리니 가슴에 시커먼 털이 많은 마사지사가 나와서 안내하여 옷을 벗고 스팀실에 들어가 땀을 흘리고 있는데 반라의 젊은 여성이 들어와 깜짝 놀라 수건으로 아랫도리를 가렸다. 이 아가씨와 잠시 인사를 나누니 21세의 스위스여성이고, 남자친구가 없다고 한다. 사우나 실에서 땀을 흠뻑 흘리고 원 탕으로 들어가니 수증기가 자욱한 가운데 전라의 중년여성이 남자 두 명과 마사지 차례를 기다리며 넓은 대리석 바닥에 누워 있었다. 마사지사는 나더러 대리석 바닥에 전라의 여성 옆에 누우라고 하여 눕지 않고 물을 받아놓은 큰 탕도 없어 벽면 수도꼭지가 설치되어 있어 바가지로 받아서 끼얹으며 몸을 닦았다. 내 차례가 되어 마사지를 하는데 비눗물로 온몸을 잠시 문지르고 거품을 내고 물을 끼얹는 것이 전부였다.
19:00시에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하는데 목욕탕에서 만난 3명의 여성이 가족과 식사를 하니 반가웠고 보기가 좋았다.
(7)파묵갈레
데니즐리에서 19km 떨어진 해발 750m 높이의 리쿠스계곡 언덕위에 세워진 파묵칼레는 자연이 만들어낸 경이로운 산물로서 수 만 년 전부터, 땅 속에서 흘러나오는 산화칼슘을 주성분으로 한 백색석회수가 함유된 온천수가 절벽으로 흘러내려 온 산 과 절벽이 빙산 같고 흰눈으로 덥힌 듯 한 장관을 이루고 있다. 세계에서 둘도 없는 경관을 만들어, 목면을 뭉쳐 놓은 듯 보이는 환상적인 이곳을 터키인들은 “목화의 성 ”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파묵칼레 온천수는 건강에 좋다고 해서, 옛날부터 질병치료에 도움이 되는 이 온천수 때문에 일찍부터 많은 사람들이 다녀갔는데, 특히 로마황제 하드리안, 카라칼라 황제와 귀족들이 이곳에서 온천을 즐겨 찾았다고 한다. 바로 옆에 히에라폴리스가 있다. 히에라폴리스는 “거룩한 도시” 라는 뜻으로 기원전 190년 페르가몬의 왕조였던 유메네스 11세에 의해 세워진 로마시대의 유명한 온천지로 2-3세기동안 번영한 국가도시로 예전의 명칭이 파묵칼레 였다.
온천지대 윗마을에 있는 호텔에서 저녁식사 후 흥미롭게 밸리 댄스를 함께 춤추며 즐기고 난후 호텔의 온천장에서 수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여 분다 자매님이 소지품 여권과 돈을 도난당했다고 발을 동동 구르신다. 식사 후 들어오니 창문이 열려있고 침대 밑에 감추어둔 지갑 두 분 것이 몽땅 도난 당 했다고 하여 호텔 측과 인솔자에게 연락 대책을 강구하려고 하는데 침대 맨 밑에 있는 지갑을 찾아 천만다행이었다. 잠시나마 안절부절 못하고 걱정을 하였다.
주님! 감사합니다. 오늘따라 유난히 비가 많이 내린다.
(8)에페소(셀주크)( 묵시2, 1-7 :에페1, 1-2)
지중해연안의 손꼽히는 최대 유적지 에페소는 이즈미르에서 74km 떨어진 셀주크 시내에서 30분 거리에 위치한 고대도시이다. 바오로사도가 전교하였고 요한묵시록의 7대교회중하나가 있던 성지로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 성모마리아께서 말년을 보내셨던 곳이다. 에페소의 출입구는 두 곳으로 남쪽과 북쪽으로 각각 하나씩 있다. 산 위쪽(남쪽) 누가의 무덤이 있는 주차장에서 아랫길(북쪽)정문이 있는 곳으로 중앙대로를 따라 온통 대리석을 깔아 만든 도로를 따라 공회당, 도미티안황제의 신전, 아르테네스신전, 헤라크라스의 문, 공중목욕탕, 트라이안화제의 님파니움(분수), 화장실, 유곽 , 에페소 전용극장 그리고 대표적인 셀수스도서관 건물이 나온다. 에페소에서 가장 인상적인 건물로 쥴리우스 셀수스가 소아시아총독으로 114년에 70세의 나이로 죽자 그의 딸 쥴리우스 아퀼라가 그의 아버지 셀수스를 기리기 위하여 125년에 건축하였다. 도서관 정면 입구는 2층으로 아름답게 장식 되었는데 지혜, 행운, 지식, 미덕 4가지의 의미에 석상이 있다. 에페소는 생각보다 넓은 지역이다. 에페소에서 7km 떨어진 브루브르산 남서쪽 능선 아래에 있는 성모마리아의 집을 시간이 없어 못보고 가는 것이 아쉬웠다.
바오로 사도는 에페소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도가 된 바오로가 에페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사는 신자들에게 인사합니다. 하느님 우리아버지와 주 예수그리스도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라는 바오로 사도가 에페소인에게 보낸 서간의 서두로 에페소는 초대교회의 전도여행에 아주 중요한 지역이다. 이곳은 지금은 지도에서 찾아보기조차 어려운 곳이 되어 버렸지만 바오로 사도 당시만 해도 동, 서양을 잇는 상업 중심지 항구도시였다.
고대 상업의 중심지였던 에페소는 B.C 3세기의 도시로 아르테미스신전은 고대 7대불가사이의 하나로 수차례 복원 되었고 도서관, 극장, 아고라, 목욕탕 등의 유적이 남아있다.
요한묵시록의 일곱 교회가 언급 되는데 에페소 스미느라 (현 이즈미르),베르가모, 티아디라, 사르디스, 필라델피아, 라오디게이아 교회이다.
에페소는 바오로시대만 해도 번창한 항구였으나 카이스터강을 타고 흙이 씻겨 내려와 지금은 배가 드나들지 못하고 바다와 에페소 사이에는 큰 거리가 생겼다. 에페소는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다가 기원전 334년 알렉산더 대왕의 입성으로 해방되었다.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후 리시마쿠스가 막강한 통치력을 발휘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고 그리고 높이 10m, 총 길이 9km의 성벽으로 요새화 시키고 경기장, 체육관, 원형극장을 세워 에페소를 크게 발전 시켜 아울러 철학, 문학, 역사 등 학문의 중심지가 되었다.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게 된 에페소는 소아시아 서부지역의 수도가 되었고 상업과 교역의 중심지가 되어 정치적, 경제적 번성기를 맞이하였다.
기원전 88년 시민들이 로마의 압제에 항거하여 라틴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죽이자 로마의 실라장군은 에페소를 완전 초토화시켰다. 아우구스투스황제 때부터 다시 재건된 이 도시는 아시아 속주의 정치, 상업,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4세기경 에페소는 소아시아에 있어서 그리스도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고고학적 발굴은 기원전 13세기부터 인간이 거주했음을 증명했고 이들은 아나토리아의 여신 키벌레를 숭상하던 카리아인이다. 그 후 기원전 10세기경 그리스의 이오니아인들이 이곳에 들어와 정착하며 자신들이 가져온 아르테미스 여신과 키벨레여신의 이미지를 접속했다. 기원전 560년경에 리디아왕국의 크로수스왕이 이 도시를 침략하여 잠시 지배를 받았으나. 그 후 항구도시인 에페소는 페르시아와 그리스 국가간의 각축장이 되어 혼란을 거듭하다가 페르시아의 정복되었고 , 다시 알렉산더대왕의 정복으로 평정을 되찾았다. 당시에 세워진 아르테메스 신전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였다. 그러나 기원전 7세기 키메르인에 의해 아르테미스 신전을 포함하여 완전히 파되 되었고 이후 이곳은 그리스의 참주들에 의해 다스려졌다.
에페소는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도시이다. 사도 바오로는 제2차 전도여행(사도 18, 19-28)에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아폴로가 에페소에서 선교하다
“한편 아폴로라는 어떤 유다인이 에페소에 도착하였는데 그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으로 달변가이며 성경에 정통한 사람이었다. 이미 주님의 길을 배워 알고 있던 그는 예수님에 관한 일들을 열정을 가지고 이야기하며 정확히 가르쳤다...“ 또 제3차 전도여행(사도 19,1,1-41)때 두 번 이 도시를 방문했다. 특히 제3차 여행 때에는 약 2년 3개월간 머물고 전도를 했다.
AD 64년 사도 바오로가 로마에서 순교하자 요한이 그를 대신하여 에페소에 그리스도교의 지도자가 되었으며 도시티안황제(81-96)의 그리스도교인들에 대한 탄압과 박해 속에서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용기를 주기위해 계시록을 썼고
사도 요한은 100년경에 밧모섬에서 귀양을 갖다 돌아와 에페소에서 성모마리아와 함께 말년을 보냈다. 또한 막달라 마리아, 안드레아, 필립보도 요한을 따라 에페소에서 살았고 마리아는 그곳에서 일생을 마치셨다.
오늘날의 유적으로는 사도 요한의 무덤자리에 유스티니안 황제 시대에 세운 사도 요한의 교회의 성모마리아가 말년을 지내신 성모마리아의 집이 있다.
아르테미스신전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제우스와 레토사이에서 태어난 쌍둥이 남매로서 태양의 신 아폴로의 여동생으로 순결의 여신이다.
로마 신화에서 아르테미스로 디아나라 부르며 본래 달의 여신이었는데 호머의 작품에서는 사냥꾼의 여신으로 등장한다. 아르테미스는 다산의 여신으로 숭배되었다. 에페소 박물관에서 300m 가까운 거리에 고대 7대 불가사의중 하나로 꼽히는 신전이 단 한 개의 기둥만이 초라하게 남아있다. B.C 7세기경 이 신전을 120년에 걸쳐서 건축할 당시 길이 115m, 폭이 55m, 터의 높이 19m의 대리석 원주가 127개 지탱하고 있던 거대한 규모였다.
에페소에서 터키의 순례를 마치고 이즈미르에서 80km 떨어진 체스메에는 16:00시에 도착했다. 히오스항으로 17:00시에 출항하는 페리호편으로 히오스항에는 50분 정도 걸렸는데. 필자는 갑판 위에서 에게해의 일몰사진을 몇 장 찍고 선실로 들어와 이번 순례하는 일행 임 베드로, 박 바오로, 이 프란치스코, 박 토마스 아퀴나스 형제님과 함께 소주와 양주를 마시고 여행담을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그리스 항구의 출입국 관리소에서는 터키지역에서 발생한 조류독감 때문인지 여행객의 짐을 세밀히 검사하고 포장이 안 된 농산물과 음식물은 전부 압수했다. 히오스 항구에서 쇼핑을 한 후 저녁식사를 마치고 대형 여객선을 타고 4인실에서 하룻밤을 보냈는데, 여객선에 오르기 전에 배 멀미가 염려되어 준비한 멀 미약을 붙이고 승선하였으나 파도가 일지 않아 흔들림이 없어 배 멀미는 하지 않았다. 아테네 페레우스항구에는 다음날 아침 07:00시에 도착했다.
에기나섬
헬레니즘 문화의 발원지 그리스 아테네의 아침은 쾌청한 날씨로 기분 좋은 상쾌한 아침이다. 샌드위치로 아침을 간단히 하고 아테네 페레우스항에서 09:40분에 출항하는 크루즈에 승선하여 에게해 섬 가운데 하나인 에기나섬에 도착하니 레몬, 아몬드, 피사초나무, 오리브나무 가 많은 피스타치오농장을 바라보며 산타마리아성당, 아페아신전을 관광 한 후 햇살이 좋은 아름다운 섬의 잔잔한 바닷가에서 한가로운 여행을 즐기니 너무나 낭만적이다. 점심식사 후 치료의 은사로 유명한 그리스 정교회인 아기오스 넥다리우스성당을 순례하면서 주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아테네로 출발하였다.
제1차 전도여행 지역(AD45-49년) (사도행전 13-14장)
시리아 안티오키아의 셀루기아항구-바포(키프러스섬)-베르게
-비시디아의 안티오키아-이고니온-리스트라-데르베-안탈리아
제2차 전도여행 지역(AD 50-52년)( 사도 15장,36-18장22)
갈라디아지방(앙카라)-트로아스(트로이)-네아포리스(카발라)
-마케도니아, 필립비-데살로니카-베레아(베리아)-아테네-코린토스(코린토)
그리스북부지방 필립비, 데살로니카, 베레아 3개지역에 교회를 세웠다.
제3차 전도여행 지역(AD 53-58) (사도 18장23-21장16)
에페소-히아라폴리스(파묵칼레)- 라오디게이아-골로사이
-아쇼-밀레도스-프트레마이스로(야코)-가이사리아
-예루살렘-로마(사도 바오로 순교지)
그리스
그리스는 발칸반도 남단에 위치한 아테네가 수도이고 면적 132천 평방키로미터,(남한에 1.3배), 인구 1100만명 남서쪽은 이오니아 해, 남쪽은 지중해, 동쪽은 에게해로 두러 쌓인 반도 국가이다.
폴리스는 미케네문명을 일으키고 B.C 8세기 성립 B.C 6세기에 세계 최초로 민주정치가 행하여졌고 B,C 479년 페르시아를 굴복시키고 최전성기인 페리클레스시대를 맞이하였다.
도시국가의 맹주로 소크라데스가 활약하고 파르테논신전도 건축하고 올림픽의 발상지, 그 후 헬레니즘, 로마, 비잔틴시대를 거치면서 이민족의 지배를 받아 학문과 예술에서 멀어지고 전쟁과 지진으로 고대 유적들이 많이 파괴되었다.
아테네
아테네로 들어가는 길은 여러 군데가 있는데 우리는 히오스항구에서 대형 크루즈 여객선을 타고 페레우스항으로 입항하였다.
그리스 본토의 남동부 살론만의 아티카 평야에 위치하여 두개의 강을 끼고 섬들로 둘러싸인 천년 요항인 아테네는 고대 그리스 문화의 발생지로 기원전 600년경부터 헬라(HELLAS) 민족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서 그리스 전체인구의 1/3 400만 여명이 모여 사는 역사적인 대도시이다.
(1) 올림픽 스타디움
1896년 제1회 국제 올림픽경기가 최초로 열렸던 경기장이다. 산타그마광장에서 15분 거리에 있다. B.C 330-329년 리코우르고스에 의해서 “위대한 아테네 축제”의 운동경기를 위한 스타디움을 만들었다. A.D 140-144년 사이에 헤로데스 아티쿠스에 스타디움이 복원되어 이것이 1870년 발굴된 현재 모습 길이 204m, 넓이 33m의 말발굽 모양의 구조로 약 5만 명 수용 할 수 경기장을 만들었고 예전에는 투기장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2)산티그마 광장
아테네 시의 교통의 중심지이며 번화가에 있는 산티그마 광장에는 평화스럽게 비들기가 날고 어린이가 비들기를 잡으려고 쫒아 다니며 즐기고 있는데 광장 저편에는 그리스 노동자들이 국민연금의 불만을 가지고 데모를 하고 있다.
무명용사광장앞 도로는 바리케이트를 치고 차량진입을 막아놓아 우리는 걸어서 버스에서 왔다. “헌법 광장” 이란 뜻으로 1843년 이곳에서 최초의 헌법이 공포된 데서 유래 되었다.
광장 정면에는 국회 의사당이 있고 의사당 앞 벽면에는 병사들의 모습이 조각된 무명용사 기념비가 있다. 이 기념비는 1923년 터키에 대항하다 희생된 용사들과 오른편 하단에 그리스어로 “코리아” 라 쓰여 있는 한국전쟁에 참전하여 희생된 용사에 관해서 적혀 있었다. 비의 양면에는 두개의 초소가 있고 독특한 전통 의상과 커다란 구두를 신은 근위병 두 명이 천천히 걸으며 우스광스럽게 교대식을 하는 것을 한창동안 재미있게 보고, 데모 때문에 텅 빈 도로를 따라 버스로 가서 저녁식사를 하러 한국인이 경영하는 귀빈식당에서 김치, 계란찜, 낙지볶음, 국을 맛있게 먹으며 그리스 국가대표팀과 우리 팀과 축구경기를 중계하여 저녁식사를 하며 축구경기를 보니 기분이 좋았다.
(3)아크로폴리스(Acropolis)
2500년 전 있었던 페르시아와 스파르타와의 전투 때 도시국가의 리더였던 아크로폴리스는 아테네 시내 한복판 산 언덕위에 있다. 호텔에서 아침식사를 마치고 09:00에 아크로 포리스로 가는데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하니 대리석 바닥이 미끄러워 조심스럽게 올라갔다.
AKROS(높은) 라는 수식어 앞에 붙여 아크로폴리스(높은 곳에 위치한 도시국가) 로 부르게 된 것이고 아크로폴리스는 동 남북 삼면이 가파른 높은 절벽으로 되어 있고 서쪽은 올라가는 입구이다. 그리스의 상징적인 유적지이자 서양세계의 가장 중요한 고대 기념물이 있는 아크로폴리스 정상에는 파르테논신전을 비롯하여 에레크테이온, 니케신전 등 이 오랜 역사를 간직 한 채 서 있다. 고대 그리스시대에는 올림포스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던 성역으로 지도층 인사들도 출입이 제한되었던 장소였다.
B.C 6세기가 되어 아크로폴리스에 사람이 살기 시작하였고 B.C 510년에 델피신탁(Delphic Oracle)으로 신의 영역으로 선포, 최초의 신전들이 미케네시대의 여신 아테나에 대한 숭배로 건축이 시작되었으나 아크로폴리스의 모든 신전들이 B.C 480년 살라미스해전으로 페르시아인 들에 의해 파괴 되었다.
아크로폴리스의 언덕으로 올라가면서 입구 오른쪽을 보면 승리의 여신 “아테나신전”이 있다. 이 자리는 오래전부터 승리의 여신 아테나를 섬기던 곳 이었는데 기원전 4세기 후반에 건축사 칼리크라테스가 지금의 자그마한 신전을 세웠다. 아크로폴리스 언덕 뒤편에는 작지만 아름다운 아크로 박물관이 있다. 아크로폴리스 오르다 왼편 아래쪽을 보면 수십 명이 앉을 수 있는 나지막한 바위 언덕이 있다. 바오로사도께서 예수님의 부활을 설교한바 있는 아레오파고 이다(사도17,16-34) 사도 바오로께서는 2차전도 여행(50-52년경)시 베레아 마을에서 전도를 마치고 홀로 아테네로 가셔 전교하셨으나 문화적으로 수준이 높은 아테네에서의 바오로 설교는 문화시민들의 비웃음만 사고 단지 몇 명만 주님을 믿었다고 하며 성과가 적었다.
“아테네에서 전교하다”
바오로는 아테네에서 그들은 기다리는 동안 그 도시가 우상으로 가득 찬 것을 보고 격분하였다, 그래서 그는 회당에서 유다인 들과 하느님을 섬기는 이들과 토론하고 또 날마다 광장에 나가 그곳에 모인 사람들과 토론하였다.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 및 몇 명의 철학자도 바오로와 대담을 나누었는데 어떤 이들은 “ 저 떠버리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가?” 하기도하고 어떤 이들은 바오로가 예수님과 부활에 관한 복음을 전하는 것을 보고 “이방 신들을 선전하는 사람인 것 같군” 하고 말하였다. 그들은 바오로를 아레오파고스로 데리고 가서 물었다....“
아테네(사도 17,15-22, 16-34, 18:1, 데살1, 3.1)
바오로사도는 제2차전도 여행 중 그리스 북부지방인 마케토니아에서 필립비, 데살로니카, 베레아에서 교회를 세웠다.
베레아에서 전도할 때 데살로니카 유다인들이 들이닥쳐 난동을 부렸기 때문에 바오로는 실리스와 디모테오를 거기에 남겨두고 (사도 17,14-15)
“그러자 형제들은 곧바로 바오로를 떠나보내어 바닷가까지 가게 하였다, 그러나 실리스와 티모테오는 그곳에 남았다. 바오로를 안내하던 이들은 그를 아테네까지 인도하고 나서, 자기에게 되도록 빨리 오라고 실라스와 티모테오에게 전하라는 그의 지시를 받고 돌아왔다.” 그리고 자신은 남쪽으로 510km 떨어진 아테네로 내려가서 전도했다. 바오로는 티모테오를 데살로니카 교회로 올려 보내고 자신은 실라스를 데리고 남쪽으로 89km 떨어진 코린토로 내려가 18개월 동안 머물면서 대대적으로 전도하여 큰 성과를 얻었다.
당시 아테네는 정치, 경제적으로 몰락했지만 문화수준은 여전히 높았고 당시 주민은 약 5천여 명 되었다고 한다.
고대 그리스의 심벌이며 현대 그리스의 헌법광장 이라고 할 수 있다. 관공서나 현대적인 건물, 호텔 등이 모여 있는 아테네의 중추이다.
서구 문화의 원류를 찾아 고대 그리스의 사적 포세이드신전, 파르테논신전, 산티그마신전 등을 찾아보고, 옛날 여기 살던 사람들을 생각해 보는 것만도 감회가 무량하다.
아테네 한복판에 있는 아크로폴리스에는 니케, 파르테논, 에레크테이온, 또한 기원전 5-4세기에는 철학의 아버지 소크라데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유명한 철학자를 비롯하여 정치가, 시인, 역사가,, 철학자등 인류문화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을 많이 배출하였고 찬란한 문화를 꽃 피웠다.
아크로폴리스의 신전들은 B.C 8세기에 건립하여 기원전 6세기에는 세계 최초의 폴리스(도시국가)의 중심이었던 언덕으로 폴리스의 수호신을 제 지냈던 신역 이었다.
고대 그리스의 전성기에는 많은 예술가의 위대한 작품이 탄생했으며 아크로폴리스 중심에 있는 파르테논은 그리스식의 거대한 궁전으로 기원전 438년 아테네여신을 제 지내기 위해 세워졌다. 그러나 기원전 86년 로마제국의 수중에 들어간 아테네는 정치적, 경제적 쇠퇴로 수세기동안 폐허로 있었다.
오늘날 그리스인구의 95%가 그리스정교회이고, 5%가 이슬람교도 이다.
그리스도교인들은 15세기이후로 370년간 터키(투르크)의 박해를 받았지만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 주산업은 해운업이고 비율이 60%이고 관광수입이 20%이고 그 외는 해외교포의 송금과 수출로 얻어지고 주요생산품은 올리브유, 포도주, 도자기 등이 유명하다.
아테네의 결혼 풍습은 특이하며 신부는 집도 장만하고 가재도구도 마련해야하지만 신랑은 침대 하나만 가지고 오면 된다. 아테네시민은 오후 2시만 되면 문을 닫고 낮잠을 자고 5시에 일어나 다시 가게 문을 열고 장사를 계속한다.
(4) 파르테논 신전
고대 그리스문명의 최고 걸작품으로 간소하고 웅장한 기둥머리 장식을 의 특징을 지니고 있는 도리아식 신전의 극치를 이루고 있는 파르테논신전은 “처녀가 머무는 집” 이란 뜻으로 아테네의 수호여신 아테나를 모시고자 익티노스가 설계하고 아테네시장 페리클레스(기원전 495-429)가 공사를 감독하고, 조각가 피아디아스, 건축가 익티노스가 합세하여 15년간(기원전 447-432년)에 걸쳐 공사를 하여 완공한 건축물이다. 파르테논 신전은 두 가지의 목적으로 건축되었는데 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를 감사하는 뜻으로 아테네의 수호신 아테나를 모시기 위한 것이고 또 하나는 델로스로부터 가져온 조공품을 보관하기 위에서였다 .건물의 폭이 30.8m, 길이 69.5m, 직사각형 건축물로 높이 10.4m이며 도리아식 석주가 46개, 정면의 기둥은 8개가 세워졌다. 또한 본전 외벽 상부에 4면의 길이가 163m에 이른다. 수천 년간 웅장한 자태를 보여주며 아테네 시가지를 내려다보고 있는 파르테논신전은 전쟁과 지혜의 신이자 아테네의 수호신이기도한 아테나여신을 모시기 위해 세워졌다.
세계에서 가장 균형 잡힌 건축물로 불리며 도리아 양식의 건축물중 최고봉으로 꼽히는 이신전은 규모면에서 아크로폴리스에서 최대이며 한때 아테네가 폴리스 동맹국 사이에서 제국적인 역할을 담당하던 시가 델로스 동맹의 금고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역사의 흐름과 함께 이곳은 신전에서 교회로, 그 이후에는 사원으로 사용되다가 급기야는 터키인의 화약고로 사용되기도 하고 1687년 베네치아 인들이 쏘아올린 대포로 인해 파괴되기도 했다. 고대 그리스인들의 예술적인 업적의 성과물이다. 찬란했던 과거의 한때를 상지와는 건축물로 수천 년을 이어져 내려온 전 인류의 귀중한 보물이 같은 인간들에 의해 얼마나 짧은 순간에 파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5) 에렉테리온 신전
이신전은 아테네의 전설상의 왕인 에리크로니우스의 이름을 따서 붙여진 신전으로 아테나, 포세이든, 에레크테우스 등 삼위의 신에게 지내기 위하여 파르테논 신전 북쪽에 세워진 이오니아식 아름다운 여인상의 기둥 6개가 현관 복도 난관을 받치고서있는 작은 신전으로 유명하다. 동서로 뻗은 몸체는 여신 아테나의 내실이고 몸체의 중앙부에는 포세이돈과 에레크데우스의 내실이다.
아크로폴리스에서 가장 신성시 되는 곳에 세워졌고, 바다의신 포세이돈이 그의 삼치 창을 내던져 꽂힌 곳에 지혜의 신 아테나가 올리브나무를 심은 곳이 바로 이곳이다. 그래서 신전에는 신화의 내용을 재현한 조각상들이 있다.
또 한편에는 BC 420년경 건축한 4개의 원주로 이루어진 승리의 여신 아테나 니케신전이 있고 아크로폴리스정상 파르테논신전 동쪽에 위치한 전망대에서 바라본 아테네 시가지의 아름다운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도심지 중앙에는 올림피아 제우스신전의 열주와 올림픽 스타디움의 성벽 아래로 손에 잡힐 듯 선명하게 보인다.
비가 촉촉이 내리는 언덕에서 대리석 바닥이 미끄러워 조심스럽게 내려가는데 많은 관광객들이 비를 맞으며 붐비며 올라가는 모습을 보면서 세계적인 관광지를 실감 하게한다.
사도 바오로의 전도여행
사도 바오로는 서기 5-10년 사이에 길리기아의 달소에서 출생하여 베냐민 지파의 바리사이파 소속의 유다교의 신자로서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다가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서 그리스도를 체험함으로써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어 초대 교회 때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한 이방인의 사도
로써 예수님의 승천이후 좁은 팔레스티나를 벗어나 소아시아와 그리스반도를 거쳐 로마제국에 까지 3차에 걸친 전도여행을 하며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교회를 세워 초대교회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이번 성지순례는 터키, 그리스의 유명한 관광지 위주로 기획한 상품으로 가토릭 신자가 원하는 성지 코린토 등은 빠져 있어 순례하지 못하고 가는 것이 아쉬어 바오로사도가 코린토인에게 첫 번째로 보내신 서간을 기술합니다.
(6)코린토
바오로사도께서 코린토 신자들에게 첫 번째 보낸 서간에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오로와 소스테네스 형제가 코린토에 있는 하느님의 교회에 인사합니다.
하느님 우리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이와 같이 코린도인에게 인사를 하고 하느님께도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
“나는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여러분에게 베푸신 은총을 생각하며, 여러분을 두고 늘 나의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어느 모로나 풍요로워졌습니다....” 이와 같이 코린토 성도들과 하느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린 코린토는 아테네에서 힘든 전교를 하시다 내려온 곳이다.
현재 코린토 라고 하는 시는 현대 코린토(NEW CORINTH)이며 1858년 ,1928년의 대지진 후에 세워진 곳으로 아테네에서 서쪽으로 83km 내려가면 펠로폰네소스 반도 초입에 현대 코린토가 있고 거기서 서남쪽으로 6km를 더 내려가면 고대 코린토(OLD CORINTH)에는 페허된 유적만 남아있다. 옛 코린토 자체는 항구도시가 아니지만 북쪽과 동쪽에 항구들을 끼고 있어 고대로부터 그리스 본토와 반도를 연결하는 그리스 남북 육상 교통의 요충지로 상업이 번창하였으나 심한 빈부격차와 퇴폐적인 윤리생활로 악명이 높기도 했던 곳이다..
북쪽 코린토만에는 레카이온 항구가 있어 아드리아해로 통했고 동쪽 사론만에는 겐크레아 항구가 있어 에게해로 통했다.
기원전 146년 로마군은 코린토를 점령하고 초토화 시켰다. 그로부터 거의 한세기가 지난 기원전 44년 유리우스 시저는 코린토를 로마인이 사는 식민지로 재건 했다. 마침내 기원전 27년 고린토는 아카이아( 지금 펠로폰네소스반도)속주중의 총독부를 습격, 당시 코린토는 그리스인, 로마, 유다, 동방인등, 여러 민족이 어울려 사는 인종 박람회장과 같은 도시였고 인구도 13만 여명이었다고 한다. 자연히 종교도 매우 다양해서 마치 종교 전시장 같았다고 한다. 그리스인들은 미남 신 아폴로,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비너스), 예술의 여신 아테네, 승리의 여신 니케, 운명의 여신 튀케, 치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 지하의 남신에게 강간당한 코레, 바다의신 포세이톤 등을 섬기었고, 로마인은 율리우스시저, 초대 황제 아우쿠스토를 신격화하여 섬겼는데, 코린토 서쪽 박물관 옆에 그들을 모신 신전이 있었다. 코린토인들은 이집트의 치유신 사라피스, 바다의 여신 이시스 도 섬겼다. 유다인들은 유다교를 믿었다.
이곳에 통용어는 그리스어 이었고 행정기관에서는 라틴어를 사용했다.
아테네를 떠난 바울로사도는 1년 반 동안 체류하면서 복음을 전 했던 곳이다.
코린토에서 선교하다.(사도 18,1-22)
“그 뒤에 바오로는 아테네를 떠나 코린토로 갔다. 거기에서 그는 폰토스 출신의 아퀼라 라는 어떤 유다인을 만났다. 아퀼라는 클라우디스 황제가 모든 유다인은 로마를 떠나라는 칙령을 내렸기 때문에 자기 아내 프리스킬라와 함께 얼마 전에 이탈리아에서 온 사람이었다. 바오로가 그들을 찾아갔는데 마침 생업이 같아 그들과 함께 지내며 일을 하였다. 천막을 만드는 것이 그들의 생업이었다 바오로는 안식일 마다 회당에서 토론하며 유다인들과 그리스인을 설득하려 애썼다....”.
바오로는 늘 그랬듯이 코린토에서 손수 일을 해서 생계비와 전교비를 벌었다. 단 필립비 교우들이 보낸 물질적인 도움만은 기꺼이 받아 드렸다. 그때 유다계 그리스도인 부부 아퀼라와 프리스킬라는 코린토로 피신해 살던 중 바오로를 만나 함께 생활 하면서 코린토 교회 창립을 도와주었던 것이다.
그 후 이 부부는 바오로를 따라 에페소에서 전도 했다.(사도 18, 18-28)
“안팅키아로 돌아가다” “바오로는 한동안 그곳에 머물다가, 형제들과 작별하고 프리스킬라와 아퀼라와 함께 배를 타고 시리아로 갔다.... 그들은 에페소에 도착 하였다. 바오로는 그 두 사람을 그곳에 따로 남겨두고 혼자 회당으로 가서 유다인들과 토론하였다....”
코린토 교회의 초창기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유다인들이 제법 있었다. 아퀼라와 프리스킬라부부(사도 18,1-4,18-28) 1고린 16,19: 로마 16,3-5), 회당장 크리스보스(사도 18,8: 1고린 1,14)와 소스테네스(사도 18,17: 1고린 1,1)는 모두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이다. 그 밖에 인종을 밝힐수 없는 코린토교회의 초창기 그리스도인들이 잇다. 코린토에서 제일 먼저 예수 신앙을 받아드리고 바오로에게 세례를 받은 스테파나스 집안사람들( 1고린 1,16: 16,15-17) 바오로에게 세례를 받고 나서 자기 집을 코린토 신도들의 집회 장소로 제공한 가이오스( 1고린 1,14: 로마 16,23) 역시 코린토 교회의 초창기 신도였다.
(7) 그리스 정교회
1054년 7월 로마 교황대사 훔베르토 추기경이 콘스탄티노플 성 소피아 대성당에서 콘스탄티노플 총 대주교 미카엘 체룰라리오를 파문함으로써 동, 서방 교회는 아주 갈라섰다. 동방교회의 대표인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는 비잔틴 황실의 지배를 받다가, 1453년 오스만 투르크 군주 메흐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함으로써 총대주교는 오스만 회교 군주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슬람 군주는 코란 법에 따라 그리스도인들도 “경전의 백성” 이므로 그들이 일정한 세금만 내기만 하면 신앙의 자유를 보장해준다고 했지만, 1453년부터 마지막 군주 메흐메트가 6세가 영국으로 망명한 1922년 사이에 총대주교가 직위 해제된 게 무려 105회요, 6명은 아예 살해당했다.
1833년 그리스 왕국의 정교회 주교들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의 통치권을 거부하고 그리스 정교회로 자립하기로 의결했다. 물론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는 일 거부했지만 1850년 마침내 그리스 정교회의 “자치권 헌장”을 부여했다. 1852년 그리스 국회는 그리스 정교회를 국교로 정했다.
아테네 공항을 이륙한 비행기는 비가 내리는 에게해 창공을 날러 2시간 비행한 후 이스탄불공항에는 20시 15분 이스탄불공항에 도착 후 3층 출국장으로 가서 대한항공 창구로 가니 인천공항으로 가려는 승객들이 기다랗게 줄을 지어 기다리고 있어 필자는 모닝 캄 회원이라 한가한 창구에서 편안히 출국하여 인천으로 가는 KE6956편으로 인천을 향했다.
이번 순례를 무사히 마치고 돌아오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항상 주님의 은총이 각 가정에 충만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