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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명클럽 원문보기 글쓴이: 풀빵지기
6.3동지회 "1965년 한일협정은 굴욕외교, 관련 문서 공개하라"
8.15 해방 이후 최초의 일제강점기 역사 청산의 기회였던 1965년 한일협정... 한일협정은 일제 침략 식민지 통치시대의 불행한 과거를 청산하고 한국과 일본 간 국교 정상화를 위해 체결된 조약이었다. 그러나 타결 직후부터 과거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했다는 비판과 함께 굴욕적인 외교를 둘러싼 의혹은 40년 동안 지속돼왔다. 의혹의 중심에는 당시 작성된 미공개 문서가 있다. 'KBS 일요스페셜'은 한일협정 미공개 문서를 최초로 입수해 한일협정의 숨겨진 진실을 밝힌다.
지난 2월 법원은 한 소송 사건에서 주목할만한 판결을 내렸다. 일제강점기 시절 깅제동원되어 부역에 시다렸던 피해자들이 외교통상부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서 1965년 한일협정 체결 과정에서 작성된 일련의 문서들을 공개하도록 결정했다. 비공개 보존기간 30년을 넘겼다는 근거였다. 40년 동안 베일에 싸여왔던 한일협정의 진실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현재 한일협정에 관련된 미공개 문서는 외교부서나 외교안보연구원에 보관돼 있다. 1심 판결 직후 외교부는 문서 공개를 거부했으며, 현재 항소심이 진행중인 상태다.
비공개 보존기간을 훨씬 넘긴 이들 문서, 우리는 외교부에 문서의 공개에 관한 범위를 논의했다. 하지만 외교부가 밝힌 문서의 공개 범위는 매우 제한적이었다. 공개된 문서는 극히 일부에 불과했으며 그나마 이승만 정권 시절에 작성된 4차 한일회담과 관련된 회의록과 훈령의 표기에 불과했다. 외교부는 문서를 공개하면 광범위한 반일감정이 일게 되고 결국 한,일 간 관계를 험악하게 만들수 있다는 우려를 들어 공개를 거부했다. 한,일 간 국교를 정상화하기 위한 노력은 1951년 이승만 행정부에 의해 시작되었다. 일제 침략 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죄와 보상에 대한 이견으로 협상은 타협점을 찾지 못한 채 박정희 정권으로 이어진다. 1961년 11월 6차 한일회담이 재개되면서 협상은 급물살을 타기 시작한다. 당시 경제개발을 위해 자금이 필요했던 박정희 정권은 협상 타결을 지나치게 서둘렀다. 협상이 교착 상태에 빠질 때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종필은 막후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마침내 1965년 6월 20일 한일협정이 체결된다. 14년간 무려 1400여회의 회의를 거듭했던 한일협정, 최대 화두는 일제 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죄와 보상 명목으로 지불되는 청구권 금액이었다. 하지만 협정문 어디에도 일본의 사죄라는 표현은 없었으며 청구권은 무상으로 3억 달러에 해당되는 일본국의 산천물과 용역을 10년에 걸쳐 제공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추가로 2억 달러의 차관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이로써 일본의 침략 행위로 인해 정신적, 육체적 피해를 받은 한국인들에 대한 청구권 문제가 최종적으로 그리고 완전히 해결된 것으로 합의되었다.
한일협정이 체결된 이후 박정희 행정부는 국민들을 상대로 협상 결과가 대단히 성공적이었음을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그러나 야당과 국민들은 격렬하게 반발했다. 일제 식민지 지배에 대한 일본의 사과와 8백만명에 이르는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한 보상으로 30억불을 요구했던 국민들은 협상 결과가 대단히 굴욕적이라며 비난과 의혹을 제기했다. 시위가 확산되자 박정희 정권은 계엄령을 발동, 한일협정 체결을 반대하는 시위를 강제로 진압했다.
오상섭 63동지회 사무총장 "당시에 그같은 굴욕외교가 어떻게 가능할수 있었느냐. 그래서 회의록을 바롯한 관련 문서를 공개하라고 했지만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은 계엄령을 발동해서 시위를 진압하고 은폐했고..."
8.15 해방 후 유일한 일제 식민지 지배 과거사 청산의 기회였던 한일협정, 이후 협정의 실체는 숱한 의혹과 논란을 남긴채 역사 저편으로 사라졌다.
군사독재정권이 계속된 1980년대 말까지 일제 침략에 대한 피해와 한일협정에 대한 의문은 금기시됐다.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죄 및 보상 문제가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온 것은 민주화운동 바람이 불기 시작한 1990년대 초반, 춘천에서 태평양 전쟁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 문제를 주도하고 있는 김경섭 씨, 그는 16살 때인 1942년에 강제 징용되어 한 철광회사에서 모누자로 일하면서 임금도 받지못한 채 갖은 고통을 겪어야 했다.
김경섭 태평양전쟁 피해자 유족회 회장 "倭놈들에게 매일 두들겨 맞아서 왼쪽 어깨가 골절되고 평생을 불구로 살아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만 폭력을 당했다 안당했다 문제를 떠나서 그들이 노동력은 노동력대로 착취하고 인권은 인권대로 유린하고 노임도 주지않고 외골수의 바탕이 단적으로 여기에 나타났다고 나는 본다."
지난 1991년 김 씨는 일본 정부와 기업을 상대로 강제동원에 대한 피해보상과 사죄를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김경섭 씨 "태평양 전쟁 피해자로는 내가 처음으로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내 손으로 소송장을 직접 써서 동경재판소 민사재판 소송 12부에 접수했다. 접수 이후 눈물이 나더라. 저들의 태도는 거만했다. 감히 조센징이 일본 정부와 기업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고 일본재판소에 소장을 제출했다는 것이다."
당시 김 씨가 굴욕적인 외교 협상을 체결하고 축소된 보상금을 받았다는 한국 정부 대신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는 양국 간에 체결된 한일협정을 합법적인 조약으로 인정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김경섭 씨 "한일협정을 부정한다. 그것은 뇌물을 받기 위한 협정, 다시 말해 작물 협정이다. 국민의 권리와 자존심을 도둑놈들에게 팔아 넘겼으니 작물 아닌가. 작물 협정은 당연히 부정한다. 그러니까 원고는 당연히 일본 정부나 일본 기업이 돼야 하는 것이다. 지금도 한일협정을 인정하지 않는다."
김 씨가 소송을 제기한 이후 일제에 의해 강제동원된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와 기업을 상대로 피해보상 소송을 잇달아 제기했다. 일제에 의해 강제동원됐던 피해자들이 다양한 형태로 소송을 제기했으며 이들에 의해 제기된 국내외 소송은 무려 70여건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들 소송은 대부분 기각되었으며 소송 가운데 일부가 개류중인 상태다. 1990년대 들어 이들 대부분이 패소한 이유는 두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재일교포 강부종 씨의 피해보상 소송에서 일본 법원은 국내법인 국가 무책임 원칙을 적용, 국가간 권력작용에 대해 민사상 보상할수 없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런가 하면 한국인 송선도 씨 외 5명의 피해보상 청구소송에서는 시효가 지나 보상을 청구할수 있는 권리가 소멸됐다는 판결을 내렸다.
90년대 후반 한국인들의 일본에 대한 피해 청구소송은 미국에서 제기되기 시작했다. LA에 살고 있는 재미교포 정재원 씨, 일본 대학의 유학생이었던 그는 느닷없이 일본의 한 시멘트 공장에 끌려가 혹독한 노동에 종사해야 했다.
정재원 시 "갑자기 시멘트 공장으로 강제동원되어서 1944년부터 45년 해방될때까지 한없는 말로 표현할수 없는 고생을 하며 목숨을 우지하다가 개중에 질병이나 혹은 기타 이유로 사망한 사람이 거의 반..."
정 씨는 지난 1999년 자신이 강제징용됐던 서류들을 근거로 LA 주 법정에 못받은 임금에 대한 반환소송을 제기했다. 소송 대상은 자신을 강제동원했으며 당시 미국에서 사업을 하고 있던 모노다 시멘트 회사였다. 정 씨가 미국 법정에서 소송을 제기할수 있었던 것은 1999년 캘리포니아에서 통과된 헤이든법 때문이었다. 시효문제와 일본 국내법인 국가권력 무책임론이 미국에서 적용될수 없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미국 법정에 한국인들의 피해보상 소송이 잇따랐다.
김창록 부산대학 교수"미국에서는 캘리포니아 주에서 시효문제를 법률에 의해서 해결했고 뉴욕 법정에서는 국가권력 무책임론이 통할 가능성이 없었다. 그래서 그 시점부터 일본 정부는 청구권 협정에 의해서 문제가 해결됐다는 식으로 주장의 중심점을 이동한 것이다."
도쿄 한복판에 자리잡은 세계적인 철강기업 신일본제철, 출근길에 일본의 시민단체 회원들이 한국인 여운택 씨의 피해보상 문제를 지원하고 있다. 이들은 시민들을 상대로 여운택 씨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전단을 나누어 주고 있다. 여 씨는 일제강점기 당시 신일본제철의 전신인 일본제철에 소속돼 임금을 받지못한 채 혹독한 노동에 종사했다.
여운택 "(일본어로..)나는 (임금을) 다 빼앗겼고 지금도 지불받지 못하고 있다. 이처럼 분한 일을 어찌하면 좋겠는가?"
여운택 씨가 거리에서 투쟁을 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여운택 씨는 2003년 일본 상급법원에서 미지불임금 반환소송에 패소했기 때문이다. 그의 보상을 막은 것은 1965년 한일협정 때문이었다. 재판에서 일본 정부는 한일협정으로 한국인들에 대한 모든 피해 청구권이 해결됐다는 주장을 했고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였다. 2000년대 들어 한국인들의 피해보상 청구에 대해 일본 정부의 주장은 바뀌고 있다. 이제 한일협정은 일본을 상대로 한 소송에서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한일협정이 체결된지 39년이 되는 2004년 6월 22일, 일본군 강제징병, 일본군 위안소, 강제동원 부역 피해자들이 외교통상부 앞에 모여들었다. 이들은 이날 외교통상부가 한일협정 관련 문서 공개를 거부하며 제기해 놓은 항소를 취하하고 관련 문서를 즉각 공개할 것을 요구했다.
"도대체 이게 어느 나라 정부인가? 문서를 공개해서 일본 정부가 책임이 있는지 한국 정부가 책임이 있는지 파악해서..."
이들은 청구권 협상 과정에서 정부가 자신들의 피해보상 문제를 어떻게 처리했는지 알고 싶어한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일본을 상대로 10여년 이상 법정투쟁을 벌여오는 동안 한국 정부는 무관심으로 일관했고 이날 이들의 요구에도 침묵을 지켰다.
김광렬 광운대학 교수"떳떳하게 인정해가면서 이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국익을 위해서 제대로 했다면 공개를 해도 상관없지 않은가? 왜 공개를 꺼려하는지 이해가 안된다."
요시자와 후시토미 도쿄대학 교수 "지금까지 일본과 한국의 수뇌부가 교섭을 해왔고, 그들만이 진실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과거 청산이라는 점에서 생각해보면 올바은 길이 아니다. 자료를 공개해서 일본과 한국의 국민들에게 과연 일한협정의 진실이 무엇이었는지 생각하게 하는 것이 진정한 과거 청산으로 이어질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신문기사를 통해 한일협정 미공개 문서를 직접 찾아보기로 했다.
한,일 간 협상이 본격적으로 진행됐던 1960년부터 65년... 우리는 당시 기사를 통해 협상에 참가했던 한일 양국 관계자들을 확인해 보기로 했다. 또다른 방법으로 정보공개 시한이 지나 국사편찬위원회에 유입되고 있는 1960년대 미국 국무부 문서에 대해 한 민간 연구소에 의뢰하기로 했다. 한일협정 타결 과정에서 미국의 개입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당시 외교부 사무관으로 참석했던 김정태 씨를 어렵게 만날수 있었다. 김 씨는 자신을 촬영하지 않는 조건으로 인터뷰를 수락했다. 그는 먼저 외교부가 문서 공개를 거부할 특별한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김정태 "특별한 이유는 없다. 외교 교섭에 있어서 작성된 문서는 함부로 공표하지 않는다."
협상의 실무자로서 굴욕적인 외교라는 당시 국민들의 비판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궁금했다.
김정태 "그걸 언제까지 따질 작정인가? 죽을 때까지 자자손손 따져서 무엇을 할 생각인가? 세계라는 것이 그 때나 지금이나 혼자 독불장군 식으로 사는 게 아니다. 일본이라는 것이 바로 옆에 있고, 또 미국도 지리적으로는 멀지만 생각은 가깝고 이런 것인데, 그렇게 가까운 친구를 옆에 만들어 놓고 있다는 것은 큰 재산이다. 우리한테 유익한 협상이었다."
한일협정에 관련해서 막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진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이유로 인터뷰 요청을 거절했다. 우리는 일본으로 가 일본 측 협상 당사자들을 만나보기로 했다. 수소문 끝에 당시 일본 외무성의 한국 담당 과장 직책으로 협상에 참여했던 구로다 미즈오 씨를 만날수 있었다. 그는 공개되지 않은 문서는 없다고 얘기했다.
구로다 미즈오 당시 일본 외무성 한국 담당 과장 "미공개 문서는 없다. 합의된 문서는 모두 발표됐다."
그러나 협상 당시 일본 외무성 사무관이었던 마츠다 료헤이 씨의 의견은 달랐다.
마츠다 료헤이 당시 일본 외무성 사무관 "(한국어로...) 미묘한 문제도 있고, 지금 서로가 그때 교섭을 한 사람들도 살아 계시고, 지금 한국은 일본에 대해서 감정도 나쁘고, 6억 보상했는데 적다, 안된다는 분위기도 있고, 그런 상태에서 문서를 전부 공개하면 또 양국 관계가 마찰이 생길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일본 측에서 문서를 전혀 공개 못한다."
정보 미공개 시한 30년은 일본에서도 적용되고 있다. 우리는 외무성에 정식으로 문서 공개를 요청해 보기로 했다. 협상이 급진전되었던 5차부터 7차 회담에 관련된 문서들을 대상으로 했다. 일주일 뒤 외무성으로부터 문서를 공개하겠다는 답신을 받을수 있었다. 한국 정부와 달리 선뜻 문서를 공개하겠다고 밝혀 의아했지만 우리는 외무성이 공개한 문서를 받아올수 있었다.
일본 외무성이 공개한 문서는 단 두장이었다. 서류에는 회담 날짜와 당시 회의에 참가했던 양국 협상 실무자들의 이름만이 기록되어 있을 뿐이었다. 외무성은 북,일 수교 과정에서 일본의 협상전략이 노출될수 있기 때문에 더이상의 공개는 불가능하다고 밝혔다. 우리는 취재 과정에서 한일협정의 회담 내용을 쓴 책자 하나를 발견할수 있었다. '검정 일한회담(저자 다카사키 쇼지)' 책자 뒷편에서 저자가 한일협정 회의록을 참고 문헌으로 했다는 것을 발견냈다.
저자는 한일협정 분야의 최고 권위자로 알려진 다카사키 쇼지 교수, 90년대 중반 도쿄대학에서 회의록을 봤다고 설명했다.
다카사키 쇼지 츠다숙대학 교수 "1995년경 다른 사람들에게 회의록의 존재가 알려지지 않았을 때 도쿄대학에 회의록이 있다는 말을 듣고 보러 갔다. 그리고 나서 얼마되지 않아 한번 더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찾았을 때 담당자가 그런 자료 자체가 없다고 했다."
다카사키 교수에 따르면 도쿄대학에서 보관중인 회의록 복사본이 한 재일교포가 운영하는 문화센터에 있다고 했다. 우리는 이 문화센터 지하서고에서 5차와 6차 회담 회의록 5권과 만날수 있었다. 문화센터 측에 따르면 복사하지 못한 일부 회의록은 여전히 도쿄대학에 남아 있다고 한다. 회의록은 뜻밖에도 모두 한글로 적혀 있었다. 다카사키 교수에 따르면 이들 회의록은 90년대 초반 일본의 한 학자가 한국의 고서전에서 구입해 도쿄대학에 기증한 것이라고 한다. 회의록 한권 분량은 200페이지 이상이었고 평화선, 어업권, 청구권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수많은 회의가 반복해서 열린 것으로 돼 있었다. 그리고 참가자들의 발언 내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1961년 5월에 있었던 한 청구권 회의의 주제는 한국인 징용 피해자에 대한 보상이었다.
한국 측 "다른나라 국민을 강제로 징용해 고통을 줬으면 보상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일본 측 "징용 당시 한국인은 법적으로 일본인이었다. 일본인에게 보상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보상할 수 없다."
한국 측 "당시 한국에서 길가는 사람을 트럭에 실어서 탄광에 보냈다. 그런데, 그들을 일본인이라 하는 건 진실을 은폐하는 것이다."
회의가 진행되면서 일본 측의 태도가 바뀌었다. 보상을 하겠으니 한국 측에 근거를 제시하라는 것이었다.
한국 측 "한국인 징용 노무자의 미지급 임금에 대한 자료가 있는가?"
일본 측 "자료가 있으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과 대조하자."
한국 측 "우리는 자료가 없다. 때문에 일본이 갖고 있는 징용자 자료를 요구한다. 일본 측에는 자료가 있다고SCAP 공문에 있다."
일본 측 "우리도 없다. 징용된 한국인 중에는 북한으로 간 사람도 있어서 사실을 알수 없다."
마츠다 료헤이 당시 일본 외무성 사무관 "(한국어로...) 개인적인 청구권 문제도 한국 측에서 요청했으니까 "그렇다면 어떤 케이스가 있습니까? 구체적으로 제시하십시오. 금액이 얼마입니까." 일본이 이렇게 한국에 요청했는데 한국에도 자료가 없었다. 전부 한국이 일본에 대해서 이런 문제를 청구하겠다고 했는데 자료가 없었다. 자료가 없으니 구체적인 숫자가 나올수 없었다.
다카사키 쇼지 교수 "전쟁이 1945년에 끝나고 65년까지 20년이 지난 뒤에 그런 증거를 제시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정확한 숫자를 제시하라, 한국인이 일본의 전쟁에 몇명 동원되고 몇명이 죽고 몇명이 부상당했는지를 정확히 산출할 수는 없다. 결국 한국은 일찍부터 (피해보상 청구권 주장을) 포기했다."
결국 당시 자료를 둘러싼 논란은 30억불까지 요구되던 청구권 금액이 축소되는데 결정적인 원인이 됐다. 빼곡히 꽂혀진 이들 징용자 명단은 일본으로부터 입수된 것이다. 한일협정이 체결된뒤 일본은70년대 말부터 90년대 말까지 적게는 몇십권에서 많게는 몇만권에 이르는 징용자 명부를 한국에 보냈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신원 파악을 위한 한국 측의 요구 때문이었다. 작년에는 일본의 한 민간인이 전국 각지를 돌며 30여년 동안에 찾아낸 징용자 명부를 독립기념관에 기증하기도 했다. 대규모의 징용자 명부를 발견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 사람은 한 일본인 교육자였다. 교쇼 다다시 교수. 그는 태평양 전쟁 당시 강제 징용자들의 미불임금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한국인들의 미불임금이 법원에 공탁된 기록을 발견했다. 서류에는 징용자의 이름과 미지급된 임금의 액수가 정확히 기록되어 있었다. 심지어 한국인 노무자들의 임금에서 본인들도 모르게 빠져나간 연금이 기록된 사실도 일본 정보기관을 통해 찾아냈다. 고쇼 다다시 교수는 강제동원 노무자들의 명부를 여전히 일본 정부가 관리하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고쇼 다다시 고마자와대학 명예교수 "지금도 모두 컴퓨터에 입력되어 있어서 몇년 몇월까지 아시오 지역에 있어서 누가 진두하고 있었는지 아시오 지역의 사회보험사무소에 가면 접수서류를 보여준다. 나도 몇통 가지고 있다. 보험에 들었던 증명서가 컴퓨터에 입력되어 있다. 그러니까 이것은 강제노동 피해자들에 대한 자료를 가지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결국 5차 회담 당시에 징용자에 관련된 자료가 없다던 일본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었다.
기미야 다다시 도쿄대학 교수 "청구권 금액을 한국 측이 확정하기 위해서는 근거가 필요했다. 일본 측이 한국 정부에게 근거를 요구했는데 근거와 관련된 숫자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오히려 일본 정부 쪽이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그런 자료를 공개하지 않은채 한국과 교섭을 한 것이었다. 그것은 교섭의 하나의 방법일지도 모르지만 정말 비겁한 교섭이었다고 할수 있다."
우리는 도쿄대학에 보관되어 있는 나머지 회의록도 확인해 보기로 했다.
대학 측과 수차례 교섭을 벌인 끝에 우리는 언론사 최초로 도쿄대학에 보관중인 나머지 회의록도 확인할수 있었다.
도쿄대학은 모두 열권의 한일회담 회의록을 보관하고 있었다. 이들 중 아리랑 문화센터의 복사본에 빠져 있었던 것은 5차와 6차 회담 일부 회의록이었다. 우리는 회의록을 꼼곰하게 살펴보던 중 뜻밖의 내용을 발견했다. 협상 당시 일본 측이 한국 측 대표에게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개별보상을 제의했던 사실이었다. 1961년 당시 회의록에 따르면 일본은 피해보상을 개인별로 하겠다고 밝힌 반면, 한국은 정부에게 일괄적으로 줄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일본 측 "징용 한국인의 미불임금을 지급하겠다. 그러나 돈은 본인 손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 측 " 그것은 국내조치로서 우리가 지급하겠다. 일본이 지급할 필요는 없다."
일본 측 "양국 국민의 감정을 완화하기 위해선 개인에게 지불하는 것이 좋다."
한국 측 "국내 문제로서 조치할 생각이며 인원수라던가 금액에 문제가 있으나 여하튼 지금은 우리 손으로 하겠다."
이 논쟁은 회의르 거듭하면서 수차례 반복됐다. 그런데 보상금액 중에는 미불임금 뿐만이 아니라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한 정신적, 육체적 고통에 대한 보상까지 논의되고 있음이 시사되고 있었다.
한국 측 "보상금은 생존자와 부상자, 사망자를 포함해 강제징용된 사람들의 정신적 고통에 대한 것을 말한다."
일본 측 "일본의 일반 법률에 따라 개별적으로 해결하는 방법도 있다."
한국 측 "우리는 국가가 대신해서 개인들의 피해보상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김민철 민족문제연구소장"일본의 주장에 따라 협정이 체결됐다고 한다면 협정 체결 이후 재일한국인 대량학살, 강제징용자에 대한 미불임금 같은 사실이 밝혀질 때마다 일본 정부는 배상 의무를 지게 된다. 시기 문제를 떠나서 그런 사실이 밝혀질 때부터 일본 정부의 개인에 대한 배상 책임은 살아있게 되는 것이다."
협상은 한국 측의 주장대로 정부가 일괄해서 받는 형태로 끝났고 결국 개인에게 지급될수 있었던 보상을 막은 것은 한국 정부였던 셈이다. 일본으로부터 받았던 무상 3억불 돈의 대부분은 중공업 육성과 포항제철 건설 등 경제성장을 위해 쓰여졌다. 정부는 개인에 대한 보상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 협정이 체결된지 10년이 지난1975년 정부는 피해자들의 신고를 받아 보상을 하겠다는 신문공고를 냈다. 그런데 대상은 8.15 광복 이전 일본에 돈을 남겨놓고 온 사람과 사망자 등 지극히 제한적이었다.
일제에 의해 강제징용돼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의 한을 가슴에 묻고 사는 이윤재 씨, 아버지 이화소 씨는 1942년 군속으로 끌려간지 2년만에 일본 땅에서 사망했다. 광복 이전에 사망했고 증명서류가 명확한 이 씨는 대상자가 되었음에두 불구하고 보상을 받지 못했다. 1975년 당시 신문이나 라디오가 거의 보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정부가 보상을 실시한다는 사실을 몰랐다.
이윤재 강제징용 피해자 유족 "그때는 라디오도 없고 신문도 없고 아무것도 없었다. 일단 정부에서 통보하기 전에는 시골에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런 정보가 없었으니까 우리는 듣지 못했던 것이다. 1975년 당시에 보상을 실시한다는 공고가 있었다면 개개인에게 통보를 해 주어야 하는 것이 정부의 임무이다."
전라남도 소록도. 일제는 이곳에 한센병 환자들을 격리수용한 뒤 강제노역을 시켰다. 아직도 이곳에는 당시 피해를 입은 생존자 100여명이 남아있다. 치료해준다는 말만 믿고 소록도로 들어왔다는 장기진 씨. 그러나 밤낮으로 강제노역에 시달렸다.
장기진 소록도 강제수용 한센병 환자 "낮에는 벽돌 만들고 밤에는 가마니 파고, 일도 힘들고 배도 고프니까 도망을 간다. 배고파 죽으나 물에 바져 죽으나 마찬가지니까 도망을 간다. 그때는 자살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가마니 짜다가 목을 매 죽는 사람도 있고..."
군수물자를 만드는 혹독한 노동을 견디다 못해 자살하는 사람까지 있었다.
장기진 씨 "상처가 나면 치료를 해야 하는데 치료도 제대로 안해주니까 병균이 들어가 손가락이 절단되고 다리도 절단되고 상처를 제대로 치료 못받아서..."
한센병은 치료를 통해 완치가 가능하지만 혹독한 강제노동으로 인해 병은 더욱 심해졌고 양손과 발은 절단됐다.
더욱 경악스러운 것은 일제가 한센병 환자들을 대상으로 생체실험을 했다는 것이다.
당시 환자들을 해부했던 이곳은 약간의 보수만 했을뿐 모든 것이 60년 전 그대로다. 환자들의 장기를 모아두던 보관함도 보존되어 있었다.
장기진 씨 "간도 빼내 담고 창자도 빼내 담고 허파도 빼내 담고... 여러가지 자기들이 연구하려고 떼다 담았다."
당시 피해자인 유인섭 씨, 그는 환자들을 실험대상으로 삼았던 고통을 잊지 못하고 있다.
유인섭 소록도 강제수용 한센병 환자 "이 사람들이 임상실험을 할 때에는 먼저 쥐나 토끼나 짐승을 통해서 연구한 다음에 사람한테 실험을 해보고 그 약의 효과를 달성해야 하는 것인데... 소록도 환자들을 완전히 동물 취급했다."
소록도 곳곳에는 한센병 환자들의 고통스러운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일제 치하 피해자들에 대한 한국 정부의 외면이 계속되는 가운데 최근 일본의 한 시민단체는 소록도의 한센병 환자들을 대상으로 자행됐던 인권유린 실태를 밝혀냈고 일본 정부를 상대로 보상 소송을 제기해 놓은 상태다.
1991년 피해자들의 증언에 의해 처음으로 존재가 드러난 종군위안부들의 인권유린 실태, 민간단체의 오랜 노력으로 실체가 드러난 우키시마호 폭침 사건과 하이난 섬 집단학살 사건... 결국 한국 정부는 일제 치하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한 실태 조사를 전혀 하지 않았고 피해자들의 실체가 세상에 드러난 이후로도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1976년 경제기획원이 작성한 한일회담백서에 따르면 당시 박정희 행정부가 피해자들에게 보상 명목으로 지급한 돈은 95억원, 정부가 스스로 청구권을 해결하겠다고 일본 측으로부터 받았던 3억불의 5%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정부 유관기관이 나눠서 사용했다.
김창록 교수"박정희 정권은 일본으로부터 교섭의 대가로 일정한 돈을 받아서 그걸 정략적으로 삼아서 경제개발을 실시한다는 데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고 과거사 청산이라는 측면은 일반 국민들의 여론에 의해서 어쩔수 없이 하는 척을 했지만 그 문제에 대해서 심각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서 그 뒷처리 결과도 충분한 보상이 이뤄지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한일회담이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과거사 청산을 목적으로 했음에 불구하고 회의록 어디에서도 일본 측의 사과를 찾을 수가 없다.
일본은 한국 측에 제공하는 돈을 피해보상을 위한 청구권 명목이 아니라는 것을 지속적으로 강조했다.
일본 측 "명목의 문제는 국교정상화를 축하한다든가, 한국의 번영을 바라고 한,일 친선을 기원하에서라는 돈의 명목으로 일본 측이 지불하는 것이라 하고 한국은 이를 수령한뒤 청구권이 해결되었다고 하면 될 것이다."
한국 측 "본국에서는 일본이 청구권 명목을 사용하지 말자고 제의했다는 보고를 받으면 실망할 것이다."
돈의 명목에 대해 타혐점을 찾지 못하자 양 측은 일단 지원금 규모로 회의의 주제를 바꿨다,
일본 측 "일본은 경제협력의 명목으로 1억 5천만불을 제공하고자 한다."
한국 측 "한국은 피해보상 명목으로 총 6억불은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비슷한 시기 당시 버그 한국주재 미국 대사가 미국 국무성에 보낸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박정희 정권의 관심사는 명목이 아닌 돈의 액수라고 밝히고 있다. 그로부터 5개월 뒤 당시 김종필 중앙정보부장과 오히라 일본 외상은 비밀리에 회담을 갖고 협상의 최대 관건이었던 금액에 대해 무상 3억불, 차관 2억불로 합의했다.
최명호 영신대학 교수"쿠데타를 일으켜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 행정부의 정당성 없음이라고 하는 문제, 그리고 정당성을 획보하기 위해서는 경제개발이라는 것을 내세울 수밖에 없었고, 경제개발을 위해서는 자금이 필요한데 미국으로부터는 자금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자금원으로서 생각한 것이 일본 밖에는 없다라고 하는 선택이었다. 그래서 일본과 수교를 서둘렀던 것이다."
우리는 취채과정에서 당시 한국 측 수석대표였던 배의환 씨가 보관해온 것으로 알려진 회의록의 일부를 입수할수 있었다. 회의록은 협상 타결 직전인 1965년 5월에 작성된 것이었다. 협상이 타결되는 시점까지 일본은 한국에 제공하는 돈의 성격을 배상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일본 측 "우리의 제공은 배상과 같이 의무적으로 주는 것이 아니며 경제협력이라는 기본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다."
주목할 만한 것은 당시 한국 측 대표도 배상이 아니라는 일본 측의 주장에 동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 측 "우리도 일본의 제공이 배상이 아닌 특수한 성격이라는 것에 동의하나 표현은 달라야 한다."
일본 측 "김종필, 오히라 합의에 이르게 된 경위를 보면 한국은 청구권과 경제협력을 위한 것이었으나 일본의 생각은 분명 경제협력 차원이었다."
한국 측 "이 문제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피해보상의 청구권 차원에서 시작된 것이지 한국의 사정이 어려워 도와달라고 해서 시작된 것은 아니지 않느냐?"
일본 측 "아무튼 우리는 경제협력 차원에서 제공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수차례에 걸친 회담 과정에서 한국이 청구권 명목으로 받았다고 하는 무상 3억불에 대해 일본은 피해보상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었고, 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과도 전혀 하지 않았다.
마츠다 료헤이 당시 일본 외무성 사무관 "(한국어로...)아시아는 거의 식민지였다. 아프리카도 거의 식민지, 남미도 12개 나라 중에 9개국이 식민지였다. 지구상 표면의 84%가 식민지시대였다. 그런 식민지시대였기 때문에 식민지 지배를 받은 나라에 대해 식민지 통치를 한 나라가 사과한다든가 보상한다는 얘기가 하나도 없다."
다카사키 쇼지 교수 "사실상 그것은 역사청산이 아니라 경제협력, 좋게 말하면 일본이 한국과의 경제협력이라는 이름 아래 한국을 일본의 시장으로 만들기 위한 계기로 이용했다는 점에서 역사청산이라는 부분에서는 0점이라고 생각한다."
민족문제연구소에 미국 국무성 문서 분석을 의뢰한지 한달, 한일협정에 대한 미국의 개입에 대해 새로운 사실을 찾아낼수 있었다. 한일협정 타결에 관심을 가진 것으로 알려진 케네디 행정부, 문서에서 드러난 미국의 개입은 관심의 차원을 훨씬 넘는 놀라운 것이었다. 1962년 5월 당시 미국은 한일회담의 진행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음을 알수 있다. 국무성 문서에 따르면 미국은 한,일 양국이 금액 문제로 타협점을 찾지 못한 초기에 청구권 문제가 협상의 가장 큰 장애물이라고 분석하고 있었다.
두달 후 미국 국무성이 도쿄와 서울의 미국대사관에 보낸 전문이다. 국무성은 한국주재 대사와 일본주재 대사에게 협상이 타결될수 있도록 미국의 영향력을 행사하라고 지시했다. 그런가하명 한일 양국의 비밀거래가 필요하다면 미국을 통해서 하도록 하라는 지시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국무성 파일에 포함되어 있던 기밀이란 이름의 또다른 문서다. 미국 국무성 관계자가 한국 정부 관계자에게 일본의 무상원조로 3억에서 4억 달러가 적당하다는 구체적인 금액을 제안했음을 밝히고 있다. 이 관계자는 다시 3억 달러가 적당하다고 실체 타결금액의 근사치를 제시했음을 밝히고 있다.
이세일 민족문제연구소 현대사연구원 "지금까지 일려진 바로는 미국이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 한일협정에 개입을 했느냐가 뚜렷이 드러난 바가 없이 그저 미국이 제3자 입장에서 한일협정을 촉구한 정도로 알려져 있는데 이 문서를 검토해본 결과 미국이 한일간 협상 초기부터 마지막까지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문서 작성이나 금액의 단초 등 모든 부분에 개입, 협살타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드러났다."
일본의 한국에 대한 지원금액을 담판지은 것으로 알려진 김종필, 오히라 회담. 그러나 미국 국무성 문서에 따르면 금액 문제는 미국의 사전정지작업에 의해 타결된 것으로 드러나 있다. 워싱턴에서 7년간 한일협정 분야를 연구해온 이종원 교수, 그는 금액타결이 실제 미국이 주도했음을 주장한다.
이종원 릿쿄대학 교수"금액 부분에 있어서 미국이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이 크기 때문에 그 금액이 단순히 김종필, 오히라 두 개인의 담판에 의해서 성립되었다고 보기 보다는 어떻게 보면 논의 과정에서 상당한 안이 나왔고 미국의 중재적인 역할이 금액타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부인할 수는 없다."
우리는 미국 국무성 문서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한국과 일본 사이에 불법 정치자금 거래가 있었음을 확인할수 있었다.
1966년 CIA가 작성한 내부 보고서다. 당시 민주공화당이 일본 기업으로부터 정치자금을 받고 있다는 내용이다. 또6,7차 한일회담이 한창 진행중이던 시기에 일본 기업들이 민주공화당 예산의 3분의 2를 제공했다는 기록도 있다. 일본 기업 6군데가 총 6600만 달러를 지불했고 기업 별로 액수는 1백만~ 2천만 달러에 이르는 구체적인 수치까지 기록되어 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의 실세였던 김종필도 한일협정을 추진한 대가, 또 일본 기업들이 한국에서 독점권을 갖게 해준 대가를 받았다고 밝히고 있다. 한국 정부가 방출한 쌀 6천톤을 일본에 수출하는 것을 통제했던 한국 기업 8군데가 민주공화당에게 11500달러를 주었다고 한다. 이런 사실의 출처를 밝히지 않은 CIA 보고서에는 주목할만한 표현이 있다. 'Well Founded'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우리는 이 표현이 가지는 의미와 신뢰도에 대해 미국인 학자에게 자문을 구했다.
Rob 한국외국어대학 영어교육과 교수 "'Well Founded'라는 의미는 근거가 있고 신용할만한 증거가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매우 강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더욱 문장에 통계치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총 6600만 달러라는 숫자, 6개 회사가 총 6600만 달러를 총 1백만불당 2천만불씩 지불했다는 것' 거기에는 특정한 사실이 있다."
우리는 CIA 문건과 연관성이 있어 보이는 또다른 미국 국무성 문서를 입수했다. 1964년 한국주재 미국대사가 미국 국무성으로 보낸 문서이다. 문서에 따르면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김종필을 제거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한다. 한일회담 반대시위가 한칭일 무렵이었다. 이후 둘의 대화내용에서 박정희는 자민당 총재인 오노의 편지내용을 소개하면서 오노가 김종필을 제외시킨다면 일본과의 협상타결은 없을 것이라고 경고해 제외시키지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홍성률 성신여자대학 사회학과 교수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시 이러한 일들에 관여했던 당사자들이 지금도 살아있고 그 사람들이 한일협정의 진실을 토설해야 하고 또 한국 정부는 정부대로 문서를 공개해야 하고 또 미국 정부에 이와 관련된 문서들을 공개하는 것을 요청하는 일, 이러한 다각적인 노력을 통해서 진실을 밝혀내는데 힘서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는 문서에 언급된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에게 공문을 보내 미국 국무성 문서 내용에 대한 사실여부를 물었다.
유운영 전 자민련 대변인 "김 전 총재께서는 당시 민주공화당이 일본 기업으로부터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일이 없으며, 미국이 관여할 이유도 없다 누가 만들어낸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이야기한다."
1960년대 초 미국은 한일관계를 정상화해야만 할 전략적 이해를 갖고 있었다. 베트남 전쟁을 중심으로 아시아의 공산화가 활발해지면서 자유주의 진영의 결속이 절실했기 때문이었다.
이종원 교수"미국을 중심으로 하고 일본을 강화시키는 지역동맹체제를 실현시키고자 하는 미국의 당시 중요한 전랙적 보루이다. 이것은 베트남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중요한 체제이기도 하고 그것을 실행하기 위한 중요한 부분으로서 한국과 일본 간의 관계정상화가 전체적인 구조 속에서 한반도가 가지는 의미라고 할수 있겠다."
1965년 한일협정. 그것은 당시 미국, 한국, 일본 수뇌부들의 이해관계가 맞물린 결과였다.
한,일 양국 정부가 40년 동안 침묵해온 데는 이유가 있다. 한국 정부는 굴욕적인 협상의 내용이 드러날 것을 우려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일본 정부는 북한과 수교를 진행중인 상황에서 자신들의 협상전략과 억지스러운 협상내용이 드러날 것을 우려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미국 문서를 들여다볼때 가장 큰 이유는 불법 정치자금 때문은 아닌지 의문을 갖게 한다.
한국과 일본, 양국의 인적교류는 확대되어 왔고 적어도 겉으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양국 사이에 늘 갈등의 불씨가 잠재되어 있다고 지적한다.
최영호 영신대학 교수"한일관계는 지금 원만하게 이루어져 있는 것처럼 표면적으로 보이면서 잠재적으로는 불신의 씨앗을 품고 있다고 말씀드릴수 있겠다. 기본적으로는 일본이 역사인식 문제에 대해서 말끔하게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에 주변국에 대한 역사인식 문제가 해결되지 못한 상황에서 일본이 우경화되고 국수주의적 흐름이 강화되고 있다. 이것은 주변국으로부터 불신과 우려를 증폭시키는 과정으로 작용할 것이다."
일본의 우경화 움직임은 전후 60년이 흐르도록 변하지 않고 있다. 그 밑바탕에는 한일협정 체결 과정에서 드러난 일본의 역사인식이 고스란히 깔려 있다. 전문가들은 동아시아의 화합과 안정을 위해서 일본의 역사인식에 대한 변화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다카사키 쇼지 교수 "한일 간 화해가 제일 중요하다. 중, 장기적으로 보면 동아시아 공동체로 갈 것이 틀림없지만 진정한 과거사 청산은 그때의 최대 장애를 제거하는 것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동아시아 미래를 위해서도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현재 일본과 북한은 국교 정상화를 위해 10년째 협상을 계속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최근의 국제 정세상 양국 사이의 수교 가능성은 높다고 전망한다. 그리고 북한과 일본이 수교할때 한일협정 개정의 기회가 될수 있다고 지적한다. 한국 정부가 한반도에서 유일한 합법적 정부임을 인정하는 한일협정 3조를 개정해야 하고 그때가 기회가 될수도 있다는 것이다.
김원웅 열린우리당 의원"북한과 일본 사이의 수교 협상이 10년째 진행되고 있다는 것은 1965년 한일협정의 협상 내용을 일본이 스스로 파기하고 있다고 볼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한일협정의 조약문은 근본적으로 재검토되고 재협상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전문가들은 개정의 내용에는 일본의 침략 만행에 대한 사죄와 책임있는 배상이 포함되어야 하고 개정에 대한 노력은 부실한 협상을 방치해온 정부가 앞장서야 한다고 지적한다.
김광렬 교수"정상적인 독립주권을 가진 국가의 정부라면 과거의 군사독재정권의 외교적 실수를 떳떳하게 수정하고 원상복구시킬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그러한 노력이 진정한 한일관계를 위해서 외교통상부가 견지해야 할 자세가 아닌가 생각한다."
일제 36년간 강점의 역사가 남긴 상처는 아물지 않은채 대를 이어가고 있다. 3년전 일제 식민지 지배의 사죄와 보상을 요구하다 사망한 재일교포 석성기 씨의 딸. 그녀는 매일 아침 묘지를 찾아 한을 품고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넋을 달랜다.
석성기 씨의 둘째 딸"아버지는 일본인의 자격으로 전쟁터에 끌려갔다. 그런데 돌아오니까 한국인으로 취급하면서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했다. 정말 억울한 일이다. 그것이 마지막까지도 확실한 형태로 나타나지 않았던 것에 대해 무덤 속에서도 상당히 분해 하실것 같다."
죽어서도 씻지 못할 한을 간직한 채 세상을 떠난 석성기 씨, 그는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에 의해 강제징병되어 한쪽 팔을 잃었다. 전쟁터에서 돌아온 그는 재일한국인들을 모아 일본 정부를 상대로 사죄와 보상을 요구했다. 1965년 한일협정이 타결됐지만 그와 동료들에겐 아무것도 돌아온 것이 없었고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한 투쟁은 계속되었다. 석씨와 그의 동료들은 보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해 최고재판소까지 갔지만 지난 2001년 결국 패소했다.
석성기 일제 치하 강제동원 피해자 "대일본제국의 침략전쟁으로 인해 생겨난 희생이다. 이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도쿄 외곽에 위치한 병원에서 석성기 씨는 다른 한국인들의 소송이 기각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며 임종을 맞이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자신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한국 정부에 대해 원망하지 않았다고 한다.
김경득 일본 최초의 재일한국인 변호사 "그 사람이 남긴 유언 중에서 내가 잊어버릴수 없는 말이 두가지 있다. 하나는 일본 정부에 한 말인데 우리는 걸레같은 존재였다. 일본에서 사용가치가 있을 때는 쓸데로 쓰고 사용가치가 없어지면 버림받았다. 우리는 걸레같은 존재라고 이야기한다. 다른 하나는 우리나라가 약하니까 언제까지 일본에게 괄시를 당한다. 그러면서도 한국 정부에 대해서는 비판하지 않았다. 우리나라가 강한 나라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자신이 버림받았다고 하는 말을 얼마나 한국 정부에게도 하고 싶었겠는가."
일본의 침략전쟁으로 인한 불행한 과거를 청산하기 위해 체결됐던 1965년 한일협정, 그러나 협정이 체결된지 39년이 지났지만 두 나라 사이에 가로놓인 어두운 과거는 청산되지 않은채 우리의 발목을 잡고 있다. 이제 침략전쟁의 수많은 한을 달래고 미래로 가기 위해서는 과거사를 제대로 청산해야 한다. 우리가 밝혀낸 한일협정 미공개 문서는 일부에 불과하며 아직도 많은 문서들이 공개되지 않고 있다. 역사를 바로잡기 위한 첫 걸음은 한일협정의 진실을 밝히는 것이며 그 몫은 이 문제를 방치해온 한국 정부의 것이다.
첫댓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