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유 해석(사람마다 다 해석이 다른 이유) 1. 삼상17:40, 5개의 돌: 믿음, 소망, 사랑, 기쁨, 평안 혹은 용기, 힘, 인내, 권능, 견인 2.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
a. “누가복음 10장의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한번 봅시다. 한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예루살렘은 교회이고 여리고는 세상입니다. 교회에서 세상 밖으로 나가면 강도를 만납니다. 우리는 여리고로 내려가지 말고 예루살렘에 머물러야 합니다. 또 만약 강도를 만나서 피투성이가 되었다면 - 죄악에 물들었다면 - 포도즙과 기름으로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포도즙은 그리스도의 피요, 기름은 성령입니다. 예수님의 피와 성령으로 치료를 받아서 우리 영혼의 상처를 고쳐야 합니다. 그리고 더욱 더 잘 치료 받으려면 데나리온 둘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신약과 구약입니다.” (또 더욱 더 심하게 해석하는 경우에는 강도 만난 자를 태우고 가는 짐승의 네 다리는 사복음서라고 합니다). 우리는 사복음서라는 짐승을 타고 가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영적 상처는 치유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b. 또 어떤 목사는 사마리아 사람이 예수님이고 두 데나리온은 2,000년을 가리킨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 사건 이후 2,000이 지난 이 시점에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비유에서 과연 어디에 예수님의 재림 내용이 있는가?
c. 전후 문맥을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인가?”를 알려주시
고,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주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을 문맥과는 전혀 무관하게 해석하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의도나 그 말씀을 들은 율법사의 반응은 고려하지 않은 채 오로지 비유나 상징으로만 해석하면 우리는 그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전달하고자 하시는 의미를 발견할 수 없다.
신천지의 비유 해석
1. 마태복음 13장 34-35절 개역: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
니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을 드러내리 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킹제임스: 예수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없이는 그들에게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All these things spake Jesus unto the multitude in parables; and without a parable spake he not unto them:
계시록 7장의 144,00명: 4절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지파, 5-8절 유다 지파, 르우벤 지파 등
막내아들 셀라, 셀라가 장성해도 다말을 그에게 주지 않음. 창녀 변장하여 유다와 음행을 벌임, 아기를 잉태함, 베레스와 세라, 다말이 메시아 계보를 잇기 위해 간음하였다. No!
2. 아브라함의 씨가 저주받는 이유(10절), 그래서 그의 자손이 400년 동안 나그네로 살면서 저주를
받음, No! 새는 원래 쪼개는 것이 아니다(레1:14-17). 이방 나라에서 떠도는 이유(16절)
QT 문제
1. Quiet time은 중요하다. 그런데 그룹 모임에서 어떤 성경 구절로 QT를 하면서 받은 은혜를
나누라고 하니 성경을 자의적으로 문맥과 전혀 상관없이 해석하는 나눔이 이루어진다.
2. 작은 화분 하나를 보고도 거기서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고, 성경 한 구절에서도 자기만의 진지한
적용과 철학을 발견하는 것에 놀란다.
3. 이런 식의 묵상을 하다 보면, 말씀을 깨닫고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기보다는 점점 자기만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개발해 사람들에게 들려주려는 쪽으로 방향이 기울게 된다. 한마디로 사람을 위한 생각, 남을 감동시키기 위한 생각을 개발하는 매너리즘에 빠지게 된다.
4. 그래서 QT의 파트너가 바뀌면 나눌 내용이나 수위나 코드 자체가 바뀌는 것은 당연하고, 그러다
보면 하나님을 통해 나눔을 잘하는 사람만 부각되거나, 신앙보다는 느낌과 감동에 치중하는 모임이 된다.
5. 예를 들면, 유명 강사가 와서 사람의 입술 위 인중의 패인 골은 태어나면서 하나님이 “내가 너를
사랑한단다. 이건 너와 나만의 비밀이야.” 하시면서 입을 다물도록 꾹 눌렀기 때문에 생겼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 자국이 생겼고, 아기는 그 비밀을 발설하면 안 되기 때문에 어려서는 말을 못하는 것이며, 자라면서 그 약속을 잊는다.
6. QT의 폐해를 만들어내는 이런 실수는 논리적인 사람보다 감상적인 사람들이 자주 한다. 성경과
기독교는 명확한 논리를 기본으로 하고, 그 이후에 은혜와 감동과 스토리가 있다. 그런데 명확함은 간과하고 감상적인 묵상만을 좇는 습관은 성경을 이해할 때도 그대로 드러나 제1의 의미를 알기도 전에 부수적인 것만 찾아 느끼려 하고, 누구에게 준 말씀인지 파악도 하기 전에 무작정 자기 것으로 소화하려고 한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는 제대로 깨닫거나 개념을 파악하기가 어렵다. 많은 기독교인 들의 신앙적 지식이 늘 제자리걸음을 하는 첫째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7. 하나님은 느낌으로 다가가는 존재가 아니다. 하나님은 성경에 계시된 것을 이해하면서 먼저 알게
되고, 그 후에 서로 알게 되며, 관계를 맺는 분이다.
8. 성경에 없는 것을 자꾸 찾으려 하면 세상 논리와 학문이 동원되면서 궤변을 말하는 실수를 범하기
쉽다. 물론 성경 안에서만 말할 수 없을 때도 있고, 그러다 보면 완벽할 수는 없겠지만, 기본적으로
바른 전제를 통해 말해야 한다는 생각과 기준이 필요할 것입니다.
9. 신학자는 참신한 자기만의 해석을 시도하고, 목사는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호소력 있는 메시지를
구하며, 크리스천은 주변에 함께 나눌 감동을 찾는다.
10. 이 모두가 나쁜 일은 아니지만 본질과 목적에 집중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영광보다 스스로가 드러나
는 결과를 낳게 되고, 이런 일을 지속하다 보면 진리에서 그만큼 멀어질 수밖에 없게 된다.
11. 한국 교회를 망친 것 중 하나는 QT이다. 성경은 읽고 받아들이면 되는데, 초신자 때부터 혼자
묵상하며 자기만의 하나님을 찾다 보니 절대적인 기준과 절대자 하나님의 속성은 사라지고, 각자 느끼는 기준과 개인적인 모습의 하나님만 남아, 기독교는 그때그때 다른 '상대주의적' 종교가 된다.
12. 성경과 하나님에 대한 이런 방식의 접근이 계속되면, 교리는 교훈이 되고, 좁은 길은 넓은 길이
되며, 유일한 방법은 다양한 요령으로 바뀐다. 그러므로 진정한 의미의 묵상은 먼저 말씀을 읽고 언어적으로 이해하는 능력을 키워 하나님의 최소한의 경륜을 이해할 수 있는 정도는 되어야 성경적으 로 할 수 있다. 어설픈 QT는 초보운전자가 고속도로에 나가는 것처럼 위험한 일이다.
13. 바르게 QT를 하려면 (1) 우선 정확한 교리 공부가 필요하다. (2) 지나친 해석을 하기보다는
단순히 읽고 그 뜻을 알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3) QT 안내서를 버리라. (4) 질문에 신중해야 한다. 제대로 된 지식과 바른 상식 안에서 말씀을 다루는 곳을 찾고 분별해 신중하게 질문하는 것이 중요하다. (5) 답변에 신중하라. 모르는 것이나 애매한 것은 정직하게 모른다고 해야지, 답변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이나 도움을 주고 싶다는 의욕에서 적당히 답하면 타인에게 바른길을 제시하지 못한다. (6) 설교나 나눔에 진지해야 한다. 모임에 믿을 만한 리더가 없다면 아무나 말씀을 나누거나 돌아가면서 설교를 하는 등의 일은 최소화하는 것이 좋다. 이런 때는 검증된 사람이 전하는 말씀을 인터넷 등을 통해 함께 듣거나, 검증된 신앙도서의 내용 일부를 한 사람이 전달하고 교육하는 방식이 좋다. (7) 적당한 리더가 없다면 바른 성경을 그대로 읽고 이해하는 습관을 들인다.
14.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완벽함이 아니라 제대로 알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인정하며,
이웃에게 바르게 전하면서 그분 안에 거하려는 간절하고 진정한 마음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QT는 구원과 말씀 그리고 성화의 성장을 가져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