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온글 충북 철이야기, 철의고장 충주
충주는 철의 고장이었다.
충주지방은 예로부터 양질의 철이 생산되는 우리나라 3대 철산지의 하나였다.
비록, 현재에는 모든 철광이 폐광되어 운영되고 있지 않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하여도 가금면 창동 등에서 철광산이 운영되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빈철, 납, 강철, 연철 등이 생산되어 철로 만들 수 있는 모든 도구를 만들 수 있었기에 고대로부터 이 지역을 확보하기 위한 치열한 싸움이 전개되기도 하였다.
물론 이곳 충주의 지리가 이중환의 <택리지>에서 언급한 것처럼 ‘한강 상류이어서 물길로 오가기 편하였던 ~’ 교통의 요지이기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고대의 무기를 만들 수 있는 철의 주요 산지였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고구려 . 신라 . 백제의 삼국이 이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전개한 치열한 싸움도 바로 이 철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고대의 전투에 있어서 무기의 중요성은 새삼 강조하지 않아도 될 만큼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것이고, 전시에 있어서도 각종 무기류를 비롯한 군수품의 공급은 끊임없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때에 철광의 존재는 각종의 철제품을 생산하는 노동과 함께 전쟁의 승리를 보장하는 척도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곳 충주에서는 언제부터 철이 생산되었을까?
물론 철기가 우리나라에 들어와 쓰이기 시작한 철기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보아야 하겠으나, 철기시대의 유적에서 철제품이 출토되기는 하나 생산되었다는 사실은 확인할 수 없다.
다만, 삼국시대에 들어와 이 지역을 백제가 선점하였을 때인 근초고왕 무렵 칠지도가 어디서 만들어 졌는가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한다. 백제의 왕이 370년대에 일본왕에게 하사한 일본의 국보 칠지도의 경우 그 생산지가 어디였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4세기 후엽의 가장 첨단기술을 응용하여 만든 칠지도는 1,500년이 넘는 지금도 녹슬어 부서지지 않고 잘 남아있는데, 이는 당시의 기술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일본서기> 에는 칠지도의 생산지를 곡나철산(谷那鐵山)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 철산이 어디인지가 분명하지 않다. 우리나라에서 곡나철산의 위치로 여러 곳을 비정하고 있는데 그중 가장 타당성이 있는 곳 중의 하나가 충북 충주이다. 아직 충주에서는 아무런 증거 자료가 출토되지 않아 단정하기는 어려우나, 가까운 인근에 있는 진천의 석장리에서는 백제 초기의 야철지가 발굴되었다. 이곳에서 발굴된 야철 유적에서는 일본의 제련술보다 200년이나 빠른 증거들이 찾아지고 있다. 그런데, 이곳 진천 석장리 주변에서는 아직 철광산의 흔적을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사철과 철광석이 모두 이용된 것으로 확인되고 있는데 철광석은 충주의 명현으로 일컬어지는 신라의 대문장가 강수(强首)선생이 대장간집의 딸과 혼인을 하였다던 일도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고, 고려시대 몽고군이 침입해 왔 을때 다인철소의 사람들이 몽고병을 막아내어 익안현으로 승격하고 있음도 이러한 철의 문화가 뒷받침하는 역사적 사건인 것이다.
우리 고장에는 많은 철산지가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는데 이류면 완오리, 본리, 독동 일대와 가금면의 창동, 노은면의 수룡, 소태면의 야동, 충주시 금능동 등지가 그 산지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에 대하여는 최근 이류면 일대를 조사한 충주박물관팀에 의하면 이류면 지역에서만 41군데의 야철지가 존재한다고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14의 충주목 토산조의 첫머리에도 충주에서 산출되는 토산품 중에서 으뜸으로 철이 꼽히고 있음을 본다. 이 충주의 철은 실제로 대몽항쟁이 진행되던 시기에 일반 생활도구 이외에 각종 무기류의 제작 및 공급에 사용되고 있음이 확인된다. 고려시대의 최자가 쓴 <삼도부 三都賦> 에 보면
“중원과 대령(지금의 황해도 해주)의 철은 빈철, 납, 강철을 내는데 바위를 뚫지 않아도 산의 골수처럼 흘러나와 뿌리와 그루를 찍고 파내되 무진장 끝이 없네. 홍로에 녹여 부으니 녹은 쇠가 물이 되어 불꽃에 달군 양문, 물에 담군 음문을 대장장이 망치 잡아 백번 단련하니 큰 살촉, 작은 살촉, 창도 되고 갑옷도 되고, 칼도 되고 긴창도 되고, 화살도 되고 작은 창도 되며, 호미도 되고 괭이도 되며, 솥도 되고 물통도 되니, 그릇으로는 집안에서 쓰고 병로로는 전쟁에 쓰네.”
라는 내용이 있다. 여기에서 무기류가 농기구보다 훨씬 강조된 것을 보면 그 중요성을 짐작할 수 있고, 실제로 다인철소(지금의 이류면)에서는 철소민들이 몽고의 침략에 대항하여 대대적인 항전을 전개하여 승리를 거두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 철소민들의 승리의 주된 원인은 이곳 사람들의 용맹에도 있겠지만 몽고병사들보다 월등한 무기를 지니고 있었기에 가능한 것은 아니었을까?
고려사에 나타나는 대몽항쟁의 대표적인 4곳의 승전지는 1차 침입시의 귀주(龜州)와 2차 침입시의 처인성(지금의 용인), 5차 침입시의 충주, 그리고 이곳 다인철소였다. 이 4곳 가운데 충주와 익안은 바로 이곳에서 생산되는 철을 이용한 병기를 사용하였을 것이고 그것이 승리의 밑거름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라는 것은 분명하다고 하겠다.
또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이곳을 차지하려는 고대국가의 눈물겨운 몸부림도 짐작할 수 있다. 보통 한강유역을 지금의 서울을 가리키는 말인 양 생각한다. 그러나 고대국가의 경우 강력한 무기를 가진 집단이 정복국가가 되어 큰 힘을 떨쳤듯이, 무기를 생산하는 곳을 장악하는 나라가 전체를 지배한다는 말로 바꾸어 본다면 과연 지금의 서울을 지칭하는 말일까?
더욱이 예부터 중원땅은 수로와 육로가 발달되어 있던 교통의 요지였다. 사통팔달의 대로가 뚫려 있기에 이곳을 장악하면 곧 중부지방 전역을 손아귀에 넣을 수가 있었다. 이렇기에 신라의 진흥왕이 죽령을 넘어 적성(단양)과 중원을 장악하고 삼국통일의 발판을 마련한 것과, 조선의 선조가 충주의 패전 소식에 곧바로 피난을 떠난 것, 한말 유인석의 의병이 충주성을 점령했을 시 전국의 모든 국민이 기뻐한 사실은 결코 우연은 아닐 것이다.
충주가 ‘철의 고장’임을 증명하는 뚜렷한 증거물은 이 지역에 남아있는 고려시대의 철제 불상 3구일 것이다. 이 철불은 충주 대원사에 위치한 충주철불좌상(보물 98호)과 단호사철 불좌상(보물 512호), 그리고 엄정 백운암의 주존불로 안치된 철불좌상(지방유형문화재 21호)에서 현재까지 발견된 20여 개의 철불들 중의 일부로 이곳에서만 3구가 있다는 사실은 이 고장이 철의 산지임을 입증하는 증거가 된다.
대원사의 충주철불좌상은 광불 거리에 있던 것을 충주관아에 안치하였다가 근년에 대원사 경내로 옮긴 것인데 고려시대 밀교의 영향을 받은 독특한 불상이다. 철불의 모습은 큼직한 나발의 머리에 뚜렷이 육계가 표현 되였으며, 반개한 양눈사이에는 백호공이 있다.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고 통견의 법의엔 v자형 의문이 돌여있고 가슴에 군으의 결대가 보인다. 수인은 두 손이 모두 결실되어 확인할 수 없으나 무릎 부분이 동체에 비하여 넓어 안정감을 주고 있다.
단호사 철불좌상은 충주철불좌상과 동일한 장인의 손에 의하여 만들어진 듯 전체적으로 주는 느낌이 동일하다. 다만 백호가 남아있고, 가슴 앞에서의 옷무늬의 처리가 대원사의 것이 3돌 줄기의 U자형을 이루는데 비하여 단호사의 철불은 6줄로 표현되는 등 몇까지의 작은 차이점을 찾을 수 있을 뿐이다. 전면에 금도금을 하여 철불인지 금방 식별이 어려운 철불이 백운암철불좌상이다. 이 불상도 역시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는데 대원사나 단호사의 철불보다는 전체적인 모습이 안정되어 있지 못하나 당시에 유행하던 고려철불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여준다.
충주지방에 전하는 이 3구의 철불은 후삼국의 혼란을 극복하고 등장한 고려의 신흥세력들에 의해 유행처럼 만들어진 것이겠으나, 지역의 자원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하였음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우리의 고장 충주는 한반도의 중심고을이다. 중심주를 상징한 법경대사자등탑비 (보물17호)의 ‘충주(忠州)’라는 기록과 사자빈신사지 석탑(보물94호)의 기록을 들지않더라도 한반내의 중앙탑이 이를 단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질 좋은 철을 생산하던 자원의 보고로 누구나 탐내던 고장이었고 ‘남방의 인후(咽喉)를 질러 막은 곳’이라고 표현한 정인지의 말을 예로 들지 않더라도 사통팔달의 요충으로 물산이 풍부하며 정치, 경제의 중심이 되었던 고장이다.
철의 산지로 고대와 중세의 우리 역사에 중심이 되었던 우리 고장!
근세에 접어들며 철의 비중이 약화되고 하운(河運)이나 조령, 죽령으로 통하던 육상 교통로의 역할도 약화되어 점차 그 기능을 잃어 요즈음에 이르러서는 낙후된 고장으로 변해가고 있다. 그러나 철의 고장으로서의 전통은 결코 약화되어서는 안 될 것이고, 현대적으로 표현되는 철의 고장으로서의 상징은 강철 같은 정신력으로 표출도리 수 있지 않을까?
대몽항쟁의 전승지로써의 전통이 근대에는 동학으로 표출되고, 임난시의 백기당, 조웅, 조덕공의 의병 정신은 일제에 맞서는 유인석의 의병 전쟁으로 나타났던 우리 고장이 아니던가. 자원으로서의 철이 아닌, 굳센 강철의 정신력으로 현대에 있어 역사와 문화의 중심 고장으로 새롭게 가꾸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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