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년은 대중음악사적으로 중요한 해다. 그해 록그룹 ‘키보이스’와 신중현의 ‘에드훠’에 의해 최초의 한국 록 음반이 등장했고, 서수남의 4인조 남성 보컬그룹 ‘아리랑 브라더스’가 최초의 통기타 음반을 발표하며 미8군 출신 가수들과 함께 대중음악의 르네상스 시대를 열기 시작했다.
당시 록·포크·팝·재즈 등 새로운 장르의 바람은 거셌지만 트로트의 철옹성을 깨지는 못했다. 그 해 불멸의 명곡인 이미자의 <동백아가씨>가 발표됐기 때문이다. 대중가요사에서 트로트는 오랫동안 권좌를 차지했던 주류음악이다.
하지만 천편일률적 멜로디와 천박한 가사로 장르의 미덕을 박탈당하기도 했다. 오죽하면 이미자조차 자신을 트로트 가수가 아닌, 전통가요 가수로 불러달라고 했을까?
근 들어 장윤정·박현빈 등 젊은 가수들이 새로운 감각적 트로트로 반전의 계기를 마련하고 있다. 여성 트로트의 상징인 이미자는 타고난 미성에 꾸밈없는 애절한 창법으로 시대를 초월해 당대 서민의 고단한 삶을 위로해준 존재였다.
반세기 동안 최다음반(500여 장), 최다취입곡(2,300여 곡) 가수로 기네스북에 오른 그에게는 ‘엘레지의 여왕’, ‘국민가수’등 수많은 찬사가 따라다닌다. 여기에 한 가지 기록이 더해져야 한다. 500편에 가까운 영화·TV드라마·라디오연속극 주제가를 취입한 가수라는 사실이다.
적은 출연료로 연명하던 데뷔 초, 가난하던 시절
고등학교 2학년 때인 1957년 KBS 라디오 노래자랑대회에 교복을 입고 나갔다 ‘학생 출전 불가’라는 이유로 퇴짜를 맡고는 다음날 새엄마 옷으로 갈아입고 출전하는 대담성을 보이기도 했다.
여고 졸업을 앞두었던 1958년, 단발머리에 검은색 싸구려 운동화를 신고 최초의 민영TV 방송인 HLKZ의 <예능 로터리>에 출전해 최고상을 받았다.
입상을 계기로 그는 화신백화점 카바레의 전속가수로 픽업됐고, 유니버샬레코드를 통해 <행여나 오시려나>등 4곡을 취입해 정식 가수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 사실은 올해가 그의 데뷔 50주년이 아니라 51주년이라는 사실을 새롭게 밝히는 대목이다.
데뷔곡으로 알려진 <열아홉 순정>은 1959년 작곡가 나화랑의 주선으로 인연이 닿은 킹스타레코드를 통해 발표한 것이다. 초창기 그의 가수활동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노래 잘하는 기대주였지만 싸구려 출연료를 받고 지방무대를 돌아다니며 선배들 양말을 빠는 등 온갖 잔심부름을 도맡아야 했다.
여관방이 너무 추워 몰래 도망친 적도 있었다. 춥고 외로웠던 이 시기에 그는 악단의 콘트라베이스 주자와 사랑에 빠져 결혼한다. 1960년대 초반 스카라극장 건너편 ‘국제다방’이나 ‘모나미다방’은 가수를 비롯한 각종 음악 관계자들의 집합소였다.
주목받는 가수였지만 경제사정이 곤궁했던 이미자도 이곳에서 일거리를 찾으며 레코드회사를 기웃거려야 했다. 그때 작곡가 백영호의 추천으로 <동백아가씨>를 취입할 기회를 맞았던 것. 35주 동안 인기 차트 1위를 점령했던 <동백아가씨>의 대박 행진에 언론은 “가요계 판도를 뒤바꾸는 일대 사건”이라며 흥분했다.
1964년 겨울, 대학생들이 주 고객층이던 충무로의 음악감상실 ‘세시봉’과 서린동경 음악실에서는 트로트를 천시하던 젊은이들이 <동백아가씨>를 합창으로 따라 부르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이후 이미자는 몸값 폭등과 더불어 하루에 극장쇼 네 곳을 도는 귀한 몸이 됐다. 1965년 말 <동백아가씨>는 ‘왜색이 짙다’는 이유로 방송금지됐다.
1962년 신설된 한국방송윤리위 산하에 설치된 가요심의전문위원회의 첫 작품이었다. 1966년 <섬마을 선생님>도 뒤이어 판매금지를 당했지만, 그는 파월장병이 손꼽는 초청 1순위 인기가수로 성장해 있었다.
1965년 첫 월남 파병부대 위문공연단에 뽑힌 이후 5년 동안 장병들 앞에서 <동백아가씨>를 노래했다. 애절한 노랫가락은 장병들의 눈물샘을 자극해 공연 때마다 눈물바다를 이뤘다고 한다.
1967년 11월 놀라운 음반의 탄생
이때의 공로로 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치하를 받았음은 물론, 1973년 방한한 베트남 티우 대통령으로부터 최고문화훈장까지 받았다. 최초로 외국의 문화훈장을 받은 가수로 기록된 이미자는 이후 국내외에서 세 번이나 더 훈장을 받으며 최다 서훈가수로 등극했다.1965년 말 독주를 계속하던 <동백아가씨> 열풍이 주춤했다.
라이벌 레코드사들의 시기와 질투 속에 1962년 신설된 한국방송윤리위 가요심의전문위원회에 의해 방송금지 처분이 내려졌던 것이다. 하지만 1966년 후속곡 <흑산도아가씨>와 1967년 <섬마을선생님> 등 무려 4곡이 연말결산 톱 10곡에 선정되며 이미자의 인기 퍼레이드는 고속행진을 계속했다.
금지곡 <동백아가씨>가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애창곡이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다. 이미자는 대중음악까지 정치적으로 이용당했던 시대의 희생양일지도 모른다. 2006년 KBS 2TV 김동건의 <한국 한국인> 프로그램이 그 증거다. 당시 청와대에서는 박정희 전 대통령과 일본 외상이 함께하는 자리에 이미자를 초청해 방송금지한 <동백아가씨>를 부르게 하는 장면이 포함돼 있다.
1967년 11월 놀라운 음반이 탄생했다. 나무로 제작한 상자에 4장의 음반과 책자를 담은 한정본 음반 세트였다. 이것은 여러 가수의 노래를 담은 컴필레이션 박스음반이 아닌, 개인 가수로는 대중가요사상 최초의 박스음반으로 평가받는다. 1968년 이전까지의 히트곡을 망라한 것으로, 구경조차 하기 힘겨운 200만 원을 호가하는 희귀 음반이다. 이 박스음반에 수록된 28쪽짜리 책자에는 악보는 물론 박정희 대통령과 악수하는 귀한 사진부터 그의 인생 전반이 상세하게 기술돼 있다.
다사다난한 인생사를 헤치고
이미자는 상복도 유난히 많았다. 1964년부터 1970년까지 MBC 10대 가수상의 단골 수상자였고, 그 중 세 번은 가수왕에 등극하는 영광을 누렸다. 여성 가수 지망생은 너나 할 것 없이 이미자의 창법을 모델로 삼았을 정도. 그러나 1969년은 그에게 악몽 같은 한 해였다. <기러기 아빠>에 또다시 방송 금지라는 철퇴가 내려지고, 6월에는 북악스카이웨이 팔각정 앞길에서 대형 교통사고를 당했다.
그 해 연말 취입곡 1,000곡을 넘어선 기록만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1972년 KBS TV드라마 <여로>는 <모래시계>처럼 온 국민을 TV 앞에 모여들게 했던 최초의 국민드라마였다. 이혼 이후 크고 작은 스캔들에 연루됐던 이미자는 재혼하며 안정을 되찾았다. 1987년 8월에는 <동백아가씨> <유달산아 말해다오> 등 다섯 곡이 한꺼번에 금지의 멍에를 벗었다.
생기를 되찾은 이미자는 1989년 10월 순수예술계의 반발을 딛고 국내가수로는 최초로 세종문화회관 무대에서 30주년 기념공연을 여는 쾌거를 이뤄냈다. 1991년에는 SBS 라디오를 통해 <이미자의 가요앨범>의 DJ로 변신하기도 했다. 미국인들은 “엘비스 프레슬리의 성대를 영구보존해 해부해보고 싶고, 아인슈타인의 뇌를 해부해 특이한 구조를 발견하고 싶다”고 한다.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목소리’로 극찬을 받았던 이미자도 오래 전부터 일본 쪽에서 사후에 성대를 영구보존해 해부학적으로 연구해볼 가치가 있다는 말이 있었다. 1993년, 실제로 한 TV 방송사의 의뢰를 받은 이대부속병원 음성관리소에서 이미자의 목소리를 성대·음폭·발성·공기역학 부문으로 나눠 정밀검사했다.
이 검사에서 “이미자는 훈련이 아닌 천부적 창법과 발성법을 체득하고 있다”는 결과가 나올 만큼 그의 성대는 일반인과 달랐다. 1995년 문화훈장을 받은 데 이어 1997년에는 전남 신안군 흑산도에 히트곡 <흑산도아가씨> 노래비가 세워졌다. 또 2002년에는 국내 가수로는 처음으로 ‘평양특별공연’을 남북 동시 생중계로 방영해 한민족의 심금을 울렸다.
2007년에는 한형모 감독의 1967년작 <엘레지의 여왕>이 40년 만에 충무로 국제영화제를 통해 재상영돼 화제를 뿌렸다. 이미자가 직접 출연한 이 영화는 그의 어린 시절부터 <동백아가씨>의 방송금지까지를 사실적으로 그렸다. 중요한 것은 이 영화가 한국 최초의 대중가수 일대기를 담은 영상자료라는 사실이다.
이미자는 끊고 맺음이 분명하고 감정표현이 직설적인 성격에 사생활 공개를 꺼려 인터뷰하기 힘든 가수로 유명하다. 그럼에도 가요계의 대모이자 국민가수로 칭송받는 이유는 실력을 타고났음에도 꾸준한 연습과 진지하게 노래하는 한결같은 태도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