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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법정의실천연합 원문보기 글쓴이: 박경범
법관 成씨와 그의 딸 |
이십대 중반의 여자 성정아는 방에서 문득 생각에 잠겼다. 아직 많이 살았다 말할 수는 없는 그녀였으나 새삼스럽게 추억이 물 밀 듯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차리리 내가 더 윗세대였다면...' 어릴 때의 기억이 자꾸 떠올랐다. 하지만 기억은 분명 있는데 멀리 아른거리는 듯 희미하기만 했다. 그것을 잡아두기엔 추억을 되새기는 자기의 힘이 너무 약했다. 어릴 때의 좋은 추억을 최근의 일처럼 잘 기억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자기가 어릴 때는 정말 살기 좋은 때였던 것 같았다. 그러니 그 때 성인이었던 세대들이 부러워지기도 하는 것이었다. 성정아는 돌이켜보았다. 어렸을 때 아빠와 함께 했던 추억은 헤아려 봐야 얼마 안 된다. 지방으로 발령이 잦은 직업에다가 그리 자상한 편 도 아닌 성격을 가진 아빠였다. 게다가 그녀는 어렸을 때 자의식이 강 한 영웅주의에 빠져 있었다. 그녀는 종종 항상 삼국지의 관우나 괴에 테의 희곡의 파우스트와 같은 영웅이 되길 꿈꾸었던 것이었다. 때문에 정아는 여자애답게 애교를 떤다든가 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결국 그녀의 부녀지간은 잔정이라곤 없는 무뚝뚝한 관계가 되어버렸던 것이었다. 그래도 기억을 되짚다보면 아빠한테 고맙다고 느끼는 몇몇 장면들이 있었다. 그녀가 국민학교를 갓 마친 때였다. "오늘 아빠와 함께 외출 좀 하자." 아빠는 그녀의 손을 붙들고 종로에 있는 큰 서점으로 데려갔다. "이제 너도 중학생이니 어린이가 아니다. 네가 앞으로 읽을 책들을 사주마." 아빠가 골라주는 책들은 아동물은 커녕 중학생을 위한 책들 같지도 않았다. 아빠가 그녀에게 얼마나 큰 기대를 걸었는지는 몰라도 그날 아빠는 소크라테스부터 니체에 이르는 철학자들 전기 열 대여섯 권을 사왔던 것이다. 그 전에도 아빠는 국민학교 3-4학년 짜리가 신문을 읽으며 걸어오 는 온갖 시비를 논쟁 반 설교 반의 모습으로 성실하게 받아주곤 했다. 제삿날처럼 친척들이 많이 모이는 날에는 아빠와 친척들이 이야기하는 정치, 경제 문제에 조그만 딸이 쥐꼬리만한 지식으로 툭툭 끼어들어도, "그래 알았다. 네 말대로 정승화가 잘 대처했더라면 12.12 사태가 안 일어났을 텐데. 그러면 전두환이 집권하지도 못했을 것이고 많이 달라 졌겠지." "그래, 네 말대로 박정희의 성장정책이 국민총생산을 올려놓긴 했다 만 우리의 빈부격차를 심화시킨 문제가 있으니 전두환 정권의 물가안 정 정책은 실물재산 소유자에 대한 무산자의 불이익을 덜어주어 부의 고른 분배를 증진시키는 효과가 있겠다." "이건 애들 참견할 얘기가 아니니 가서 맛동산이나 먹고 놀아라." 때로는 농담 반 권위적인 말투 반으로 깔아뭉개곤 했지만 분명히 이 야기에 방해가 되었을 텐데도 화는 내지 않던 아빠였다. 그것이 남달 리 호기심이 많았던 정아로 하여금 자기의 소질을 키우기에 거침이 없 었던 환경을 만들어준 것이었다. 얼마 전 추석에는 친한 친지 어른 셋이 찾아왔다. 성인이 된 정아는 오랜만에 그런 자리에 앉아 있어보니 색다른 재미가 있었다. 아버지와 교수인 삼촌사이에서는 "형님, 반(反)문화라고 해서 반드시 포스트모더니즘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아?" "현대에 들어와서는 방송의 지나친 상업화가 문화에 끼치는 악영향 이 많지." 등등의 화제가 오갔다. 정아는 별별 이야기가 다 나온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것은 그녀가 어릴 때부터 보아오던 분위기였다. '정말 내가 어린 시절부터 이런 분위기를 맛보면서 컸다는 게 얼마 나 행운인가. 다른 사람들 집도 모두 그런가?' 그녀는 혼자 슬쩍 웃음을 지었다. 사실 친척끼리 모이면서 그런 이 야기를 나눌 분위기가 되는 집안은 별로 없는 것이었다. 그녀는 스스 로 생각해도 타고난 재능에다 주위환경이 더해져서 다른 사람들의 몇 배의 속도로 자기는 지성과 문장력을 향상시켜왔음을 느꼈다. 집안 어른들은 술을 마시면서도 그런 이야기들을 눈을 반짝이면서 하고 있었다. 그럴 수 있는 윗 세대들이 상당히 존경스러웠다. 그것은 그녀가 자라면서 바깥의 사람들과 대화하는 생활을 하면서 더욱 깨닫 는 것이었다. 자기 집안과 다른 사람들 집안과의... 단적으로 말해서 수 준차이를 알아갈 수 있었던 것이었다. 이 때 전화벨이 울렸다. 집에서 정아가 단독으로 쓰기 위해 따로 마 련한 전화였다. 정아는 수화기를 들었다. "정아야. 나 윤정이야. 그래 다음주 축제할 때 파트너 구했니? 없으 면 내가 하나 소개해 주려고 하거든." "아직 못 구했는데." "그럼 얘. 저기 말야... 있잖아? 우리 과 선배 문혁이형 고등학교 친 구가 있거든 그러니까 모레 저녁 다섯시에 우리 학교 앞 종달새 다방 으로 올래?" "그래 그건 그렇고. 이번 축제 학술대회에 우리가 발표할 주제는 무 엇이니?" "그건 먼저 번에 얘기했잖아. 청소년 성문화와 기성세대의 가치관과 의 충돌이잖니?" "아니 그건 표제고. 우리가 토론할 각론을 말하는 심층주제를 정해 야 하잖아?" "그런 건 그 때 발표자들이 알아서 할 일이지." "지난번에도 준비 없이 가만 놔두면, 뭐 고교생 미팅은 어떻게 해야 재미있다는 등 피상적인 얘기만 하더라. 시대가치관과 청소년 성문화 의 연관성과, 전통가치와 기성세대의 가치관의 동질성 여부 등을 따져 야 할 것 같은데. 내가 전에 학보에 쓴 칼럼을 한번 다시 봐봐. 나도 다시 정리해서 발표해 볼게." "어머, 참. 정말. 야, 머리 아프다. 그런 어려운 이야기는 그만 하자. 얘. 어땠든 내일 봐." 친구는 전화를 끊었다. 정아는 한숨을 쉬었다. 친구와 대화 중에 골치 아픈 얘기하지 말자 는 말은 한 두 번 들어온 게 아니었다. 그녀는 컴퓨터 통신 접속을 걸어놓았다. 채팅방에 들어갔다. 그리고 화면엔 신경을 쓰지 않고 다른 책을 펴들었다. 그러다 얼마안가 그녀는 책을 덮었다. "에이 시시해. 이건 순 내용도 없는 맹물탱이를 가지고 글이라고 하 다니... 글쓰는 자들이 젤 많이 하는 얘기가 글은 관념적이지 않고 사 람들에게 쉽게 다가가야 한다느니 글은 생활에서 우러나와야 한다느니 하고 또 문학은 겸허한 마음으로 대중에게 다가가야 한다는 그런 것들 인데 그렇다면 그렇게 어려운 글들이 우리 나라에서 판 친 적이 언제 있기라도 했냐?" 투덜댄 그녀는 방안에 신문지조각과 양말, 머리카락 등이 어지럽게 널려 있는 것을 알았다. 먼지도 꽤 쌓인 것 같았다. 그녀가 중학생 때 까지는 가정부가 와서 청소를 해주었는데 고교생이 된 무렵부터는 그 녀는 자기 방에는 자기만의 사생활이 있다면서 가족의 출입을 금지시 켰다. 그래서 방 청소는 자기가 맡아서 해야 했다.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들고 방을 쓸었다. 그 동안에도 컴퓨터 화면은 약간의 글씨를 올려보내면서 켜져 있었다. 당시에는 인터넷 전용선이 대중화되지 않았고 대부분의 통신사용자 들은 전화로 접속하는 국내통신망을 쓰고 있었다. 한번은 엄마가, 정아 가 방에 컴퓨터통신을 접속해놓은 채 집안 일을 보고 아침이면 세수도 한다는 것을 알고 "어머? 전화비가 얼마라고? 그럴 바엔 왜 통신을 끊고 일을 빠릿빠 릿하게 처리하지 못하니?" 했다. 그러나 정아가 대답할 말은 "심심해서..." 밖에 없었다. 엄마는 그러면서도 정아의 전화비를 아무 말 없이 꼭꼭 대주었다. 자식이 작가로서 훌륭하게 자라게 하려면 다소 기벽(奇癖)이 있더라도 그 개성을 억눌리지 않고 마음껏 키워나갈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 주 어야겠다는 배려에서였다. 방 청소를 마친 후 컴퓨터를 보니 통신은 저절로 끊어져 있었다. 다 시 접속한 정아는 채팅방으로 갔다. '안녕 정아님 반가워요~ *(^.^)*' 거기서 자기의 이름을 띄우자 그녀를 아는 몇몇 사람들이 반가이 인 사했다. 그녀는 '안녕 나도 반가워요~' 하고 화답하려다 손가락이 멈췄다. 문득 지금 자기의 위치가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회의가 들었 다. 이제 나는 작가로서의 위치가 완전히 다져 있다. 이제부터 내가 글 을 쓰면 그것은 웬만하면 출판이 된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그 수요 를 충족할 만큼 내게서 생산이 될 수 있는가 이다. 과연 내가 그 요구 를 감당할 수 있을까? 한동안 그녀는 채팅하는 글의 흐름을 보면서 컴퓨터 화면 앞에서 멍 하니 있었다. 그녀는 컴퓨터를 그냥 놔두고 벌떡 일어섰다. 빌라의 넓은 거실을 지나 엄마가 있는 방으로 갔다. 엄마는 안방 외에 따로 주어진 자기의 방에서 큰 책상에 앉아서 일 을 보고 있었다. 엄마의 책상에도 역시 컴퓨터가 있어서 엄마는 수시 로 필요한 출판관련 정보를 검색하여 업무자료로 삼곤 했다. "엄마." "왜냐?" 책상에서 엄마는 검은 테 안경을 고쳐 쓰면서 회전의자를 돌려 앉았 다. "뭐하고 있었는데?" "뭐긴 뭐냐? 이번에 우리가 기획한 한국 현대 문학전집에 실릴 작가 들을 선정하고 있는 중이다." "어떤 사람들을 모았는데요?" "해방 후로는 유명한 사람 몇 만 추리고 그 다음 60년대에서 80년대 까지 한 열 명... 그리고 그 다음 90년대로 열 다섯 명쯤 할 예정이다." "요새 무슨 문학전집을 내요? 요즘은 문학전집 내는 곳 없는데." "그래, 근래 이십년간 문학전집은 별로 나오질 않았지. 그래서 우리 가 시도하려는 것 아니니?" 엄마는 다시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보고 마우스로 무언가 조작했다. "나 지금 바쁜데 뭐 할 얘기 있어서 들어온 거니?" 정아는 멈칫했다. 자기도 무슨 용건으로, 재택 근무를 즐기는 모친의 방에 들어왔는지 모르는 것이었다. 잠시 머뭇거리다 그녀는, "엄마, 나도 이 전집에 넣어줄 수 있어?" 엄마 최여사는 의외인 듯 잠깐 눈을 깜빡이더니 "그럼, 너라고 못 넣어줄 수 있겠니?" 했다. "그래? 정말이야?" "그럼. 네가 그럴 만한 작품을 쓴다면..." 최 여사는 인자하게 웃었다. 나이에 비해 주름이 없고 기름기 있는 흰 얼굴이었다. 웃는 입술은 화장을 안 했는데도 붉었다. "엄마, 나는 이미 작품을 썼잖아?" 성정아는 조금 볼멘 소리를 했다. 최여사는 미처 생각 못한 허를 찔린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미 나온 정아의 작품은 그만한 자격이 못된다는 것이 아닌가. "다음에 또 작품을 쓰면 되지 않니?" "다음에 쓴다는 보장이 어디 있어요?"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하니?" "엄마, 김성욱이란 작가 알지?" "그래, 내가 학생 때 좋아했던 작가 아니니? 이번 전집에도 물론 포 함되었지." "내가 엊그제 그 작가의 연보를 보았는데 말야. 그 작가의 대부분의 작품이 21세에서 26세 사이에 다 쓰여졌던데요. 대표작인 유명한 <長 進山行>도 겨우 22세쯤에 쓰여졌더라고요. 정말 연보를 찾아보기 전엔 그럴 줄 미처 생각지도 못했어요." "그래, 사실 20대, 그것도 초반에 그렇게 훌륭한 작품들을 썼다는 것 은 물론 놀랄만한 일이지." "하지만 그 뒤로 더 훌륭한 작품을 쓰지 않았어요. 일반 사회에서 젊은이가 자기 나이답지 않게 훌륭하게 일을 해내면 크게 칭찬 받고 주목을 받아요. 왜냐하면 그 젊은이는 앞으로의 성장 가능성이 있고 그러니까 앞으로 일 처리를 더 훌륭하게 해내는 인재로 성장할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문학은 어떻단 말이냐?" "그러나 문학은 해낸 일의 결과만이 그대로 남을 뿐이에요. 훗날의 잠재력을 기대하고 기다린다는 것은 우스워요. 같은 작품을 그 사람이 20세에 쓰건 40세에 쓰건 60세에 쓰건 결과물이 남는 것은 마찬가지예 요." "그런 건 특별한 경우야. 어쩌면 우리나라의 구조 안에선 그 작가가 그 이상 자라날 만한 여지가 없었던 것인지도 모르겠고... 어쨌든 그 작가의 작품은 우리문학의 최고의 명작 대열에 있는 것 아니니?" "난...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너는 더 자라나야 하는 것 아니니?" "난 이미 그 때 그 작가보다 서너살 더 먹었는데..." 딸의 갑작스런 심경변화에 엄마는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는 것이 었다. 무조건 꿈과 의욕을 가지라고는 더 이상 조리 있게 설득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엄마, 문학작품은 글의 내부에 작가 자신의 정한(情恨)이 스며들어 있나 아닌가의 여부로 나눈다는 말이 있던데..." "그렇게 말할 수 있지. 작가의 정한이 녹아든 것이 순수소설들이고 그런 것이 없는 것은 어떤 기법에 의해 만들어진 오락소설들이지." "나는 그렇게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다고 내세울 만한 자기의 정한을 가지고 있지 않는 것 같아요. 엄마도 알다시피 나는 그저 좋은 아빠와 엄마 밑에서 행복하고 부족함 없이 자라난 것 밖에는..." "문학에 꼭 자기 얘기가 들어가야 하겠니? 대신 너는 많은 독서로 간접경험을 하지 않았니? 그것이 너의 큰 재산이야." "작가는 물품생산자와 달리 작가의 프로필이 작품과 같이 나오는 것 이 거의 필수적이잖아요. 이 말은 그러니까 작가 자신이 어떤 사람이 라는 것이 독자의 감흥에 영향을 준다는 것이죠." "경험이 꼭 있어야 훌륭한 글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란다." "그렇긴 하지요. 저도 이미 몇 편을 썼잖아요. 하지만 내게는 순수문 학 단편소재는 좀처럼 나오지 않아요. 정 글을 쓰려면 차라리 어떤 역 사물 같은 걸 자료조사해서 쓰면 잘 나올 것 같아요." 최여사는 잠시 고개를 숙이고 묵묵히 있다가 다시 답을 했다. "네가 그런 오락물 작가나 하길 바라고 엄마가 신경 써 주는 건 아 니란다. 돈벌라고 작가 하라는 것은 아니야. 그런 생각 말고 좋은 예술 문학 작품 쓰는 것이나 신경 쓰려무나." 최여사는 정아의 어깨를 다독였다. 성정아는 최여사의 손을 잡고 다시 물었다. "엄마, 정말 내가 훌륭한 작가가 될 수 있을까요? 어떤 평론가는 이 런 말을 하던데요. 작가의 창작은 글을 쓰지 않으면 안될, 내부의 정한 의 농축액을 미세히 열린 분출구를 통해 조금씩 흘려 보내는 그것이 되어야 한다고요. 그것이 머리로부터 짜여져 입으로 나오는 글이 아니 라, 자신의 내부 깊숙한 곳의 퇴적물을 휘저어 끄집어낸, 자신으로부터 의 추출물이어야 한다고요. 그런데 그러려면 남다른 고생의 경험도 있는 사람들이 더 유리할 것 같은데 그냥 엄마 아빠 사랑 받고 잘 자라난 내가 잘 될까요? 내 나름 대로 특별히 사람들에게 토해내고 싶은 얘기도 별로 없는데요. 그냥 다른 작품들에서 봐온 인간사회의 문제에 대해서 써본 것뿐이었는데 요." "작가는 그 영혼이 중요하거든. 그 본질부터 선한 영혼이 중요한 거 야. 너는 전생의 선업(善業)을 타고났기에 우리같이 유복한 집에서 태 어난 거야. 생이 바뀌어도 깃든 영혼의 본질은 변하지 않아." 정아는 이 말에 큰 위안을 받았다. 이제까지 자기가 유복한 집의 자 식이라는 것이 작가생활에 오히려 걸리적거리고 때로는 미안하기도 하 였는데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라는 것. 그리고 자기는 남들보 다 더한 도덕성을 갖춘 영혼이라는 자부심이 생겨나니 자기야말로 남 들에게 자기의 생각을 퍼뜨리는 작가로서의 자격이 있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정아는 다시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이 때 또 전화가 울렸다. "성정아 선생님 댁이십니까?" "예, 전데요." 이제 선생님이라는 칭호도 듣다니... 자기는 정말 어엿한 작가라는 의식이 와 닿았다. 이 정도의 성취면 집안의 위신에도 가히 부족하지 않은 보탬을 준 셈이었다. 이십대에 이미 사법고시를 합격해서 사십세 가량의 하급 공무원들을 아랫사람으로 부리는 것은 그녀의 집안 사람 으로서는 엘리트로서의 필수적인 과정이었다. 그녀 또한 이미 이십대 에 인정받는 본격작가의 대열에 올라섰으니, 사십세 안팎의 다른 무명 신인작가들보다 한 단계 높은 사회적 계층의 신분으로서 인정되는 것 이었다. 기자의 질문이 있었다. "이번 추석 연휴를 어떻게 보내실 것입니까?" 작품을 발표한 것도 아닌데 어떻게 일정을 보낼 것이냐고 신문에서 물어볼 정도면 이미 상당한 위치의 작가에 속한다. "애절한 사랑의 이야기를 쓰려고 해요" 정아는 예전에 컴퓨터 통신상에서 같은 통신작가라는 한 남자와 채 팅을 한 바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예상했던 만큼 그 남자와의 관계가 진전되지 않아 답답해 한 적이 있었다. 그런 애타는 마음을 소설로 표 현해 볼까 생각했던 것이었다. '설령 그 남자와 잘 사귄다 해도 우리 부모님이 허락하실까?' 그 남자는 글을 쓰는 재능은 있는 것 같은데 집안에서 어머니를 모 시고 살면서 작가생활의 돌파구를 열지 못하는 것 같았다. 정아는 자 기를 물심양면으로 후원하는 자기의 어머니와 비교할 때 그 남자의 어 머니가 한심스러워 보였다. '참. 낳아주면 다 부모냐. 제대로 키워줘야 부모 자격이 있지.' 이 때문에 정아는 그 남자를 밖에서 만나 부모님께 소개하는 것은 엄두를 내지 못했다. '어디 남자가 없어서 그런 집안의 남자를 데려오 냐?'고 호통을 칠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되도록 그가 집 앞 에 와서까지 정아를 짝사랑하니 마지못해 사귀었다는 것을 부모에게 보였으면 했다. 그러나 그는 종종 통신대화를 하고 전화나 편지 등은 보내면서도 좀처럼 정아의 뜻대로는 행동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렇 다고 직접 어떤 행동을 요구한다면 그것은 자기가 그 남자를 좋아했다 는 것이니 부모님 앞에 명분이 안 서고... 정아는 이래저래 답답하기만 했다. 신문은 정아가 전화로 말한 얘기를 기사화 했다. 정아는 약속대로 연애소설을 쓰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막상 쓰려 하니 좀처럼 뜻대로 안되었다. 나오는 얘기는 그 저 만나고 그리워하고 좋아하고... 평범한 유행가 가사 같은 글뿐이었 다. 게다가 제대로 연애소설이라고 발표하려면 장편은 되어야 하는데 장편은커녕 단편분량도 완성되기 어려웠다. '아아. 나는 정녕 재능이 없는 것일까?' 정아는 걱정하며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다. 혼자서의 생각으로는 한 계에 다다른 것 같았다. 교양 있는 그녀 집안의 어른과 가족들은 더 이상 그녀에게 힌트를 줄만한 거리는 갖고 있질 못했다. 그녀 자신의 집안과는 다른 또 다른 경험의 자극이 있다면 혹 그녀자신의 풍부한 문학적 바탕과 합해져서 무슨 작품이 나올 수는 없지 않을까... 정아는 고민 끝에 결론을 내렸다. '아예 그를 잡아 끌어들이면 돌파구를 열 수 있을지 모르겠다.' '통신상의 성폭행을 고발합니다.' 정아는 이전에 그 남자와 채팅한 기록을 갈무리한 것을 컴퓨터 통신 상에 공개했다. 신변잡담과 통신문학에 관한 일반적인 담론을 조금 한 뒤에, 그 남자가 그냥 아는 사람으로서 모임에서라도 한번 만나자고 하는 얘기와, 그녀가 우리는 인연이 아니니 앞으로 영원히 만날 수 없 을 것이라고 말하는 내용이었다. "아니, 이런 일을 가지고 성폭행이라고 하다니..." "그러면 대한민국 남자들 중 성폭행죄 짓지 않은 사람이 없겠네." 사람들은 성정아가 이상한 여자라고들 했다. 그 기록은 일방적인 대 화가 아니라 서로 자연스럽게 말을 주고받은 것으로서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저 평범한 하나의 통신대화 기록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었 다. 그러나 성정아의 생각은 먼저번의 그와의 대화가 마음에 걸리고 불 만스러웠다. 이대로 놔두면 그냥 묻혀버리고 말 수도 있으니 어떻게 해서라도 그가 자기를 좋아하려 했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으면 참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 사건은 통신상에서 화제가 되었다. "정아 왔소?" 저녁에, 갑자기 집에 들어온 아버지의 부르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방안에 있어요. 우선 쉬세요." 어머니가 웃옷을 받아 걸었다. 아버지는 부산에서 열리는 국제 법원장회의에 참석하고 돌아오는 길 이었다. 그런데 오자마자 정아를 찾는 것도 이례적이고 평소 부드러웠 던 모습과 달리 노기 띈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오늘 오면서 기차에서 심심풀이로 잡지 하나를 사봤더니, 거기 우 리 정아 이름이 나왔더라고." 아버지는 들고 있는 가방에서 조잡한 표지의 얄팍한 잡지 하나를 꺼 내 소파 쪽으로 휙 던졌다. "무슨 일로 나왔었는데요? 인터뷰인가요?" 엄마는 잡지를 집어들면서 물었다. "그러면 말을 안 해!" 아버지는 소파에 풀썩 앉으며 내뱉었다. "왜요? 뭐 안 좋은 이야기라도 써 있었나요?" 엄마는 잡지를 뒤적였 다. "그래 겨우 열차에서 파는 도색잡지에나 나오라고 우리가 정아를 기 른 건 아니잖소?" "무슨 비방이 실렸나요? 하긴 정아 작품이라고 해서 모든 평론가들 에게서 다 호평을 받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겠죠." "그런 게 아니라니까! 이 사람 멍청하긴. 컴퓨터 통신 스캔들 가십이 나와 있더라고!" 아버지는 역정을 냈다. "같은 이름이겠지요 요새 같은 이름이 어디 하나둘인가요?" 차분한 성격의 엄마는 잡지를 펴들고 보면서 말했다. 펴든 잡지에는 '날로 심 각해 가는 컴퓨터 통신 성폭력 시비'라는 타이틀 아래 남녀가 정사하 는 사진이 크게 음화(陰畵)로 나와 있었다. 그 아래 기사 중에 성정아 의 이름이 나와있는 것 같았다. "통신에서 데뷔한 작가라고 분명히 써있는데 무슨 소리요? 장현진이 라는 놈과 한참 얘기가 있었던 것 같소. 옆의 동료가 볼까 무서워서 얼른 가방에 숨겨 넣었소." 성정아의 아버지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는 착잡한 마음으로 딸의 장래를 생각했다. 딸이 고교생일 때 딸의 진로를 놓고 고민했던 일이 생각났다. 정아가 고등학교 졸업반일 때 그녀는 학교 책상에다 '입시기계가 되 기 싫다.'는 쪽지를 남기고 가출했던 적이 있었다. 성씨 가족은 부리나 케 학교와 파출소 등에 수소문해서 이틀만에 실업학교를 다니는 중학 생 때 친구의 자취방에 숨어있는 딸을 찾아왔지만, 그 때 성씨 부부의 충격은 컸다. '어릴 땐 기대를 했더니만 성적도 신통찮고 행실은 제멋대로고... 참 걱정이네. 이대로는 사법고시는커녕 쓸만한 법대에도 못 들어가겠다. 정말 어떻게 해야 할까?' 그 때 법관 성씨는 딸의 진로에 대해 정말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그러다 그에게는 퍼뜩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지금 한국 최고의 작가라고 거들먹거리는 작자도 애초에 사법시험 도 떨어졌던 자인데... 차라리 내가 그 때 문학을 했더라면...' 성씨는 후회했다. 젊어서부터 문학적 소양이 누구이상으로 풍부했고 일찍이 사법시험을 수석으로 합격한바 있는 그였다. 자기는 학생 때 가뿐히 통과한 사법시험을 몇 년씩 공부해놓고도 낙방하는 자들은 그 의 눈에는 정말 아둔한 멍청이들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랬 던 자가 지금은 자기가 하고싶은 말도 아무 때나 다하고 수많은 사람 들에게 존경과 우상의 대상이 되는 영향력과 지위를 갖고 있는 것이 다. 제한된 범위의 사람들에게서만 공경을 받는 자신의 위치는 거기에 비하면 보잘것없어 보였다. 그는 자신이 능력만큼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음을 느꼈다. '그렇다. 교수로 있는 동생들한테 잘 길러달라고 부탁하면 되겠다.' 성씨의 동생은 하나는 서울에 있는 대학의 영문학 교수이고 또 하나 는 대구의 국문학 교수였다. 그 외에도 자신과 동생의 친구들까지 합 치면 문학계의 실력자는 망라한 듯 했다. 그 뒤로 성씨는 딸에게 학교는 아무 곳에나 들어가도 좋으니 공부는 신경 쓰지 말고 문학작품 창작에 힘쓰라고 격려했다. 딸 정아도 그러 한 아빠의 마음을 감사히 받아들이고 문학에 전념했다. 문학과 출판계 쪽에 영향력 있는 동생들과 친구들도 도와주고 해서 그 결실로 지금 딸은 작가로서의 위치가 잡혀가는 중이었다. 작가라 하더라도 결코 시시한 오락물 작가가 아닌 순수문예물 작가로서 한국 의 손꼽는 지성으로 자리잡게 하려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었다. 그런데 딸이 그런 저급한 가십에 나온다는 것은 결코 집안의 위신에 보탬되는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 무슨 일이세요?" 성정아가 방에서 나왔다. "너 장현진이라는 놈 아냐?" "알긴 아는데요." "그놈하고 어떤 일이 있었길래 저질 잡지에도 네 이름이 그놈하고 같이 나오냐?" 성정아는 겁이 났다. 자기가 작가로서 이 정도 자랄 수 있었던 것도 아버지의 후원이 없었으면 불가능했는데... 아버지는 아직도 그녀에게 절대적인 영향력을 주는 존재였다. "그건... 저는 전혀 안 그랬는데 그놈이 일방적으로 날 좋다고 쫓아 다녀서..." "그래?" "그래요. 제가 컴퓨터 통신상에도 그 사실을 다 밝혀 놓았어요." 성씨는 갑자기 일어서서 정아의 방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실로 십 년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당황한 정아와 엄마는 아빠를 제지하려고 손짓은 했으나 감히 나서지는 못했다. 특히 사생활의 당사자인 정아는 두려움이 컸다. 성씨는 정아의 방에 들어가서 책상 서랍을 있는대로 열었다. 조그만 장농의 문도 열고 서랍도 열고 그 안의 작은 상자가 있으면 그것도 열 었다. 책꽂이에 노트나 앨범 같은 것이 있으면 빼내 펼쳤다. "이게 뭐야?" 방안으로부터 종이 무더기가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정아가 받은 편 지뭉치였다. 방 밖에 서있는 정아와 엄마는 발밑에 떨어지는 그것을 보았다. "그런 놈하고 잘도 사귀었었구나!" "아녜요. 저는 한번도 안 보내고 그놈이 자꾸 일방적으로..." "그렇다면 가만둘 수 없다!" 성씨는 둘이서 사귀었더라도 그 남자를 그냥 두지 않고 싶은 마음이 었는데 일방적으로 자기 딸을 쫓아다녔다니 분노가 일었다. 그런 것을 도색잡지에서는 단순히 두 사람의 스캔들로 보도했으니 모르는 사람이 볼 때는 둘이 똑같은 연놈으로 보일 것이 아닌가. "당신 어서 고소장 좀 준비해 보쇼. 그냥 둘 수는 없지 않소? 올리 기만 하면 내가 다 알아서 할테니." 성씨는 아내에게 다그쳤다. "안돼요." 여태 사태를 가만히 서서 지켜보고만 있던 아내 최씨는 만류했다. "왜 그런가? 우리 딸 잘못은 없는데 고소하면 남들이 오해할까봐 그 러나? 걱정 없소. 철저히 비밀로 하면 되니까." "그게 아니에요. 우리 정아는 이미 본격문단의 기성작가니까 공인이 거든요. 그래서 이미지 관리를 잘 해야 돼요. 만약 우리 정아가 그 일 을 고소한다면 공인이니까 사건을 비밀로 할 수가 없어요. 그러면 차 라리 길거리의 거지한테서라면 몰라도 삼류대중문학작가와 법정다툼이 생긴다면 우리 딸의 이미지는 끝장나게 돼요. 사실 먼저 번에 정아가 저한테 그놈 일을 상의한 적이 있었어요. 저도 그 문제를 고민하다가 우리 정아를 추천했던 문학상 심사위원에게 물어봤거든요. 그러니까 딸을 본격문학 작가로 키우려면 어떤 일이 있어도 상대하지 말라고 하 는 거였어요. 대중 통속 소설을 붙들고 싸워주는 것만도 그들을 격상 시켜주는 결과를 낳는다면서 대중문학을 아예 없는 것으로 치부하는 해외 본격문단의 분위기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고 하던데요. 그러니 잘 잘못을 떠나서 우리 정아가 통속작가와 같이 싸운다는 것만으로도 정 아는 문학을 할 수가 없게 돼요." 아내의 말을 들은 성씨는 조금 분을 가라앉히고 소파에 앉았다. "그 저질 삼류작가놈이 감히 우리 딸을..." 성씨는 거실의 책꽂이에서 두툼한 법대 동창회 주소록을 꺼내 펼쳤 다. 거기서 잘 아는 후배를 찾아 곧바로 그의 집에 전화를 걸었다. 전화에 대고 하는 성씨의 말은 계속되었다. "아, 엄군. 오랜만이네. 부탁 좀 하려는데 자네도 딸들을 키우는 입 장에서 잘 이해하겠지. 그래서 하는 말이네. 글쎄 우리 딸 정아를 장현 진이란 놈이 추근거렸다는데 그놈을 아나?" "......" "그래? 그놈이 딴 데서도 그런 일이 있었어? 그럼 잘됐군. 이 기회 에 그놈을 아주 확실히 손봐주게." "......" "고소는 무슨 고소인가? 그냥 구속하면 됐지. 다 수가 있잖아? 집안 체면도 체면이지만 우리 정아 같은 본격문학 작가가 그런 삼류작가를 상대로 고소를 한다면 세상이 웃을 걸세. 그러니 우리 딸에게는 손이 가지 않도록 하게나." "......" "그래. 좋은 아이디어네. 역시 자넨 수재야. 우리가 힘을 합하면 이 세상에 안될 일이 어디 있나! 영장담당 판사는 내가 골라서 잘 통과되게 해줌세." 검찰은 컴퓨터 통신상의 비방을 근거로 하여 성희롱 사건을 만들었 다. 성정아로서는 장현진은 자기 수중에 넣지 못하면 경쟁자밖에는 되 지 못하므로 아예 그를 제거할 수 있는 길이 생긴 것이었다. 이로써 법관 성씨는 딸의 진로를 열어주는데 결정적인 힘을 보탤 수 있었다. |
첫댓글 이런 츠암나..... 어처구니가 없어서........ 법관 딸에게 조금의 무슨 일이있다면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을 자기들의 희행량을 만들어버리다니.. 더럽고 치사하고 한심스럽기 짝이 없군... 우리나라의 법조인들의 행태가 아니겠는가.. 일반 국민들은 모른다.. 그 점잖은 법관 나리들.. 검사 하면 절절 기고 아주 높은 사람
이라고만 생각하지 이렇게 지개인적인 것에서 조금이라도 뒤틀리면 어떻게 해꼬지 까지 할려고 하는것 까지는 사람들은 생각도 못하고 있는것이다.. 통신상의 대화를 가지고 성희롱으로 간주하다니...ㅎㅎ 나온참...일을 만들면 다 해결할수 있는자들.. 그것이 대한민국의 법조인들의 행태이고 날강도 의 짓이었다니 쩝~~
엄 ? 임인데
ngo해결사를 해하는 검사를 어 떻게 해준다고요. 그부인이 공비처에 있는데 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