以逸待勞 困敵之勢, 不以戰. 損剛益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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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이 지칠 때까지 편안하게 기다린다는 뜻으로 강한 적을 상대할 때 사용하는 계책이다. 적을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직접 출병해 공격하는 방법을 취할 필요가 없다. 이는 “강한 것을 덜어내 부드러운 곳에 더한다”는 뜻을 지닌 〈손괘〉의 손강익유(損剛益柔) 단사(彖辭)와 취지를 같이한다.
[해설]
손익(損益)은 강유(剛柔)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전쟁에서는 일로(逸勞)로 나타난다. 승자는 이일대로한 덕분이고, 패하는 자는 지친 상태에서 편히 쉰 자와 싸우는 이로대일(以勞對逸)을 행한 탓이다. 이 계책은 기본적으로 강적을 상대할 때 사용하는 계책을 말한다.
이일대로는 《손자병법》 〈군쟁〉과 〈허실〉에서 나온 것이다. 이 계책은 무작정 적을 피해 출전하지 않는 소극적인 방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힘을 비축하며 때가 오기를 조용히 기다리는 것을 말한다. 전한 초기 한문제(漢文帝) 때 박사(博士)로 있던 가의(賈誼)와 조조(晁錯)가 중앙정부를 강화하고 제후왕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계책을 제안했다. 이를 강간약지책(强幹弱枝策)이라 한다. 이는 막강한 위세를 자랑했던 회남왕 유장(劉長)이 모반죄에 연루된 데서 비롯되었다. 한나라는 진나라와 달리 군국제(郡國制)를 실시했다. 크게 2가지 이유였다. 첫째, 한고조 유방은 진나라가 황족을 제후왕으로 봉하는 봉건제(封建制)를 버리고 중앙집권적인 군현제(郡縣制)를 실시했다가 반란이 일어나자 울타리가 약해 이내 패망했다고 보았다. 둘째, 한나라 황실은 개국 초기만 해도 군현제를 실시할 만큼 막강한 힘을 보유하지 못했다. 한나라가 봉건제와 군현제를 절충한 군국제를 채택했던 이유다.
군국제도 약점이 있었다. 지방의 제후세력을 인정한 까닭에 기본적으로 황권을 강화할 길이 없었다. 한고조 유방은 중앙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이성(異姓)의 제후를 차례로 제거했다. 그러나 이는 동성(同姓)의 제후 세력이 발호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조정에서는 이를 견제할 수 있는 뾰족한 방안이 없었다. 제후왕을 지도하는 태부(太傅)와 관원을 통솔하는 승상(丞相)을 파견해 간접적으로 제어하는 것이 유일했다. 가의와 조조가 강간약지책을 건의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한문제는 황족인 제후왕과의 대결을 피하기 위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한문제의 뒤를 이은 한경제(漢景帝)는 달랐다. 그는 이를 적극 수용해 제후왕들의 영지를 대폭 삭감했다. 오왕 유비(劉濞)를 비롯한 제후왕들이 크게 반발했다. 기원전 154년, 마침내 오왕 유비를 비롯해 7개 제후왕이 합세해 반기를 들었다. 이것이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난’이다. 한경제가 곧 태사(太師) 주아부(周亞夫)에게 군사를 이끌고 가 이들을 토벌하게 했다.
당시 주아부는 관군의 병력이 부족한 것을 알고는 정면공격을 피한 채 반군의 예기가 꺾일 때까지 기다리는 이일대로의 계책을 택했다. 당시 한경제의 동생인 양왕(梁王) 유무(劉武)는 반군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고 더 이상 참지 못해 여러 차례 주아부에게 도움을 청했다. 주아부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양왕이 분한 나머지 한경제에게 직접 글을 올렸다. 한경제가 곧 사자를 주아부에게 보내 속히 양왕을 구하도록 했다. 사자가 주아부 앞에서 큰 소리로 한경제의 칙지를 낭독했으나 주아부는 접수만 할 뿐 군대를 동원할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 대로한 사자가 꾸짖자 주아부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폐하께서 나에게 군을 이끌고 적을 대항하라고 명하라며 지휘권을 주셨다. 군대의 구체적인 배치는 전쟁터의 실제 정황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장수가 전장에 있으면 왕명도 때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양왕이 위급하다고는 하나 아직도 5만 명의 군사가 사수하고 있고, 양초도 충분하다. 열흘을 버티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다. 우리 군대는 멀리서 왔기에 피곤한 상태다. 반군의 세력이 매우 커 결전을 벌일 형편이 못 된다. 우선 휴식한 후 기회를 봐서 출병해야만 한다. 절대 경거망동해서는 안 된다.”
사자는 부득불 그대로 돌아가 복명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 소식을 들은 반군은 주아부가 죽음을 두려워하고 전쟁을 겁내는 인물이라 여겼다. 전력을 다해 양나라에 맹공을 가했다. 경계가 소홀해졌다. 주아부는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정예병을 선발해 반군의 군량을 탈취했다. 양초를 빼앗긴 반군은 오래 버틸 수가 없었다. 곧 양나라를 포기하고 회군하여 주아부와 결전하고자 했다. 주아부는 교전을 피하면서 반군이 지키기를 기다렸다. 이미 극심한 피로에 지친 반군은 식량까지 부족하자 예기가 크게 꺾였다. 주아부가 경기병을 보내 야습을 감행하자 전력이 날이 갈수록 더욱 떨어졌다. 주아부는 고의로 경계가 느슨한 듯이 꾸며 반군을 유인해 주도적으로 공격해오도록 만들었다. 결국 반군은 주아부의 유인책에 걸려들어 결전을 서두르다가 전멸하고 말았다. 오왕 유비는 칼을 뽑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주아부의 반군토벌은 이일대로의 대표적인 전례로 자주 거론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