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空海(くうかい, 774-835)쿠카이
: 사이쵸(最澄)와 함께 헤이안 초기를 대표하는 스님으로 진언종(진언밀교)의 개조. 시호는 홍법대사(弘法大師こうぼうだいし).
쿠카이, 하면 사이쵸 ... 사이쵸, 하면 쿠카이...나란히 거론되는 헤이안 시대를 이끈 두 스님입니다.
사누키(讃岐、현 시코쿠 카가와) 출신으로 15세에 외숙부에게서 한학공부를 시작했으며
18세에 헤이안쿄(平安京, 현 교토)의 대학에 들어가 유학(儒學)을 공부했습니다.
→우리 조선시대의 '성균관'이나 당나라의 '국자감'처럼 관료양성을 위한 국가차원의
고등교육기관으로, 일본에서는 8세기, 38대 텐지(天智)천황 시절에 '대학료' 설립.
쿠카이가 일찍이 15살에 漢學에 입문하고, 그 후 대학寮(기숙사)에서 공부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동북아시아권에서 한자와 한문에 밝았다는 것은 그만큼 당나라에 들어가 불교의 교학을 공부하는 데
절대적인 어학력(語學力)이 뒷받침될 수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유컨대 토익, 토플 만점 가까운 상태에서 영어권 유학을 나선 것에 진배없다고 하겠습니다.
아무튼 803년, 쿠카이에게 견당선을 탈 수 있는 기회가 옵니다.
뛰어난 의약(醫藥) 관련 지식을 인정받아, 의약을 배우러 가는 약학생도의 신분으로 발탁되어
견당사 일행으로 합류하게 되어 (중국에서 공인받을 수 있는) 도다이지(東大寺) 계단에서 계첩을 받고 입당하려 했으나
악천후로 인해 입당(入唐)의 꿈은 좌절되고 이듬해인
804년, 제16차 견당사에 뽑히게 되는데, 이때는 장기유학승(留學僧)의 신분이었습니다.
장기유학승은 보통 약 20년 간을 예정하고 당나라의 불교를 비롯 선진문명을 공부하고 귀국하기로 하고 보내지는
것입니다. 이때 견당선은 모두 4척이 출발했는데,
제1선(船)에 쿠카이가, 제2船에 사이쵸가 탔던 것입니다.
그런데 제3, 제4선은 조난당하고 맙니다. 중국에도, 일본으로도 돌아가지 못하는 불귀(不歸)의 객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렇다고 쿠카이가 탔던 제1견당선이 무사히 당나라에 안착할 수 있었는가, 그렇지도 않습니다.
도중에 풍랑을 만나 떠돌다가 생고생 끝에 3개월 만에 당나라 복주(福州) 앞바다에 겨우겨우 표착하게 되는데(8월10일)
당국으로부터 해적 혐의를 받게 되어 약50여일 간, 배에서 내리지 못 하는 신세가 됩니다.
이에 억울함을 주장하며, 자신들은 견당사 일행으로 배가 난파당하여 그 지경에 이르렀음을 탄원하는 글,
복주성 장관에게 보내는 탄원서를 견당사 대신 쿠카이 스님이 대필하게 됩니다.
동시에 쿠카이는 개인적으로도 자신의 입경(당시 당의 수도인 長安에 들어가) 유학의
염원(20년 예정)을 적은 탄원서를 올립니다.
쿠카이의 논리정연한 문장과 뛰어난 필적으로, 마침내 당국으로부터 견당사로 인정받아 입경허락이 떨어져
장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12월 23일) 쿠카이의 탁월한 한학력 덕분이었습니다.
이렇게 당나라 장안에서 약 2년 간 체재하면서 최신 불교, 특히 밀교(密敎)를 본격적으로 공부하고
→ 밀교는 7세기 경 인도에서 발흥하여 8세기 초에 중국에
전해졌는데, 쿠카이는 이를 장안의 청룡사(靑龍寺) 혜과(惠果)
에게 직접 사사합니다. 혜과는 밀교를 중국에 직접 전한 不空
삼장의 직제자입니다.
귀국하여 일본 진언종(眞言宗)의 개조가 됩니다.
진언종은 밀교의 별명이지만 중국에는 진언종이라는 종파는 없습니다.
인도에서 온 '불공삼장'의 제자인 혜과 아래서 공부한 만큼 쿠카이는 범어(梵語) 공부까지 하고 돌아왔습니다.
진언종 총본산인 고야산(高野山)을 뒤덮은 오륜탑에 새겨진 범자(梵字)들에서도 그 역사의 단면을 엿볼 수 있습니다.
아무튼 약 2년 간 공부해 보니 이제 더 공부할 게 없다 싶었던지, 쿠카이는 귀국하기로 합니다.
쿠카이가 큐슈에 도착하자 교토에서는 난리가 납니다.
20년 기약의 장기유학승 신분으로 가서, 겨우 그 10분의1도 안 되는 2년 만에 돌아왔으니 그럴 만도 합니다.
진노한 천황(平城天皇)은 쿠카이에게 입경(入京) 금지령을 내렸고, 쿠카이는 교토는커녕 혼슈(本州)에 발도 못 들여놓고
큐슈 다자이후(太宰府)에서 809년까지 그러구러 3년을 지내게 됩니다. 그러다가
새로운 천황(嵯峨天皇、재위 809-823)이 즉위하여 입경금지령이 풀려, 쿠카이는 교토로 들어가 천황의 총애를 받으며
활발하게 진언밀교를 펼쳐나갑니다.
고야산(高野山金剛峯寺는 진언종 총본산입니다)을 하사 받는가 하면,
헤이안쿄(平安京, 현 교토) 천도로 진호국가 기도를 위한 관사(官寺)로 설립되었던 토지(東寺)까지 천황으로부터
하사 받았습니다. 토지는 진언종 근본도량이며 고야산(콩고부지)과 함께 진언종 총본산입니다.
토지 오층탑은 꼭 관광 관련해서뿐 아니라 교토라는 도시 자체의 상징처럼 여러 책자나 인쇄물에 거의 빠지지 않습니다.
쿠카이 문하에는 이름을 날린 수많은 제자들이 있습니다.
얼마나 제자들이 많았으면 『弘法大師弟子伝』, 『 弘法大師弟子譜』...이런 책들이 다 있었을까요.
더 흥미로운 것은 『弘法大師弟子譜』에는 사이쵸(最澄)가 쿠카이 제자로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쿠카이 스님에 대해서는 무궁무진 이야기해도 모자랄 정도입니다만 이 정도로 일단락 소개를 마치겠습니다.
* 외래어 표기법에 의거하면 空海(くうかい)는 '구카이'가 맞습니다만 개인적 신념에 따라 '쿠카이'로 표기합니다.
이 점 양해를 부탁드립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