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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영 트라우마: 그의 아들 원경과 나눈 치유 이야기
손석춘, 철수와영희, 2013.04.17 P.204
- 박헌영(朴憲永 1900-1955) 이정(而丁)
- 박병삼(1941-) 승 원경(圓境).
김일성의 이야기든 박헌영의 이야기든 세상에서 이런 저런 식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세월이 많이 흘러서, 사람들이 무디어진 것인지, 아픔도 슬픔도 그냥 단어로서만 남았는지 그래, 그래서, 그래 하면서 이야기한다.
이 책이 2013년인데 승 원경이 그전에 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했을까? .. 참 조정래가 많이도 들었다고 했었는데 말이다... 손석춘이 더 깊은 이야기를 들었을까? 여기에서 풀어논 이야기로는, 심훈과 친구라는 이야기, 김상룡과 이주하의 아지트, 이 길상사에 뒤에 얽힌 이야기, 이현상의 발언과 아마도 토벌대에 의해서는 죽지 않았을 것이라는 이야기, 아버지 처형 소식이후 방황과 군입대에서 유디티 부대까지 간 이야기, 소설가 김성동과 교통사고 등이 새롭다. 그럼에도 나로서는 한산스님이 흥미롭다. (47NLA)
손석춘이 박헌영을 복권시키려는 의도는 아니지만 이제는 말할 수 있는 것을 말하자는 의미에서 이 글을 쓴 것같다. 사실 원경은 학자와 관계자들 “이정 박헌영 전집”(2004)을 낸 것 만으로도 사실상 복권에 가깝다고 느끼는 것 같다. 한 사람의 복권이 시대사와 맞물려서 얼마나 시간이 지나야 할지 알 수 없다. 그 시대사의 트라우마은 아직도 지속되고 있으니 말이다. 남북의 트라우마를 부수는 작업은 아마도 새로운 사회의 건설이어야 할 것 같다. 그래도 일반적으로 사후 50년에는 진솔한 평가가 나와야 하고 그리고 그에 상응하는 글들이 자유로워야 하지 않겠나 싶다. 50년이전에 동상을 세우느니 기념을 하느니 하는 것은 개인 또는 가문 등과 같은 집단이 하는 것이야 뭐라 하겠나마는 정부차원이나 지자체 차원에서 하는 것은 삼가야 할 것 같다. 참고로 까뮈(1913, 알제리-1960)가 죽은 지 50년이 되던 해에 까뮈를 판테온에 옮기려는 청원을 하려고 했는데, 가족 중의 한 사람(딸)이 반대해서 안되었다는 기사를 본적이 있다.
선거철이라 정도전을 이야기한단다. 정도전은 한 시대를 여는 기획자가 맞다. 그 시대의 기획은 하나의 방식이다. 이제 시대는 다양한 방식이다. 들뢰즈가 벩송의 표현을 빌어 했던 다양체이다. 이 다양체는 인민의 다발이며 리좀의 연결 연대이다. 이 다발의 공생이 인민 공화국이다. 새로운 기획자는 인민의 자주 자유 평등 박애가 이루어지는 다발의 공존의 사회를 만드는 것일 것이다.
인민을 위한 인민에 의한, 인민의 라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인민 속에서 일 것이다. 이제 그런 시대가 도래할 것이다. 인민 속에 타오르고 정화되고, 인민과 더불어 고원으로 솟아오를 것이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자유 평등 복지 등을 실행하는 빨강이 시대로 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인류가 생산력이 이렇게 높아졌고, 일하는 사람의 수는 적어도 생산물은 엄청 많아지게 마련이다라는 점이다. 기술이 발달하여 노동시간보다 자유를 찾을 시간이 훨씬 많아졌다는 것은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사과 같은 겉 빨갱이도 복지와 평등을 주장하지 않는가. 진솔하게 살명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잘 엮어가는 삶을 사는 시대가 이미 도래했다. 전쟁과 공포를 먹고 사는 흑마술자들은 곧 사라지리라.
웰빙, 치유, 치료, 상담이니 하는 겉만 번지레한 이야기는 입술 빨갱이들의 이야기다. 이 거짓의 이야기를 뻥튀기를 더 뻥튀기기 하자니 대박이란다. 대박은 로또에나 쓰는 것이지 인격을 지닌 인간이 노력을 하는 것이 진솔한 빨강이가 아닌가. 아무도 아뇨!라고 하지 않을 때 아뇨!라면서 새로운 길을 마련하는 자는 노공이산처럼 삽을 들고 한삽을 뜨는 것이다. 옆에 같이 삽을 뜨는 사람이 있으면 좋고, 그렇지 않더라도 한 삽을 뜬 사실 또는 작은 사건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인민의 노력 그 속에 답이 있다.
(47N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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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영 트라우마: 그의 아들 원경과 나눈 치유 이야기
손석춘, 철수와영희, 2013.04.17 P.204
# 들어가는 말: 남과 북 모두의 역사적 트라우마 6
“역사는 과거를 잊은 민족에게 반드시 보복한다.” 딱히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독자가 깊이 새겨볼 만한 경구다. (6)
소설 상록수로 유명한 작가 심훈은 경기고등학교 같은 반 친구였던 박헌영을 위해 시를 썼다. (7)
박정희가 일본 육사에서 일본 왕에게 충성을 굳게 맹세하고 있을 때, 대다수 자칭 ‘민족주의자’들이 일제 앞잡이로 전락해 갈 때, 박헌영은 불굴의 의지로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왕이 항복했던 그 시점에 압록강-두만강 아래 한반도에서 가장 강력한 항일세력의 지도가가 바로 박헌영이었다. / 해방직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조선공산주의 운동의 최고 지도자였다. 해방 직후 조선공산당은 남북을 아우르고 있었고, 박헌영은 그 당 대표였다. 김일성은 그 아래 있었다. (7)
1947년 3월 21일에 작성된 미군 정보 문서는 지금 만일 총선거가 실시된다면 공산당 지도자 박헌영이 대통령에 당선될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8)
2013년 4월 17일 통일동산에서 손석춘 (9)
차례 10
[사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수립직후초대내각... 좌로부터 박헌영(朴憲永, 1900-1955), 김두봉(金枓奉 1898-1960) 김일성(金日成, 1912-1994) 레베데프(소련군 정치위원) (15)[이 네 사람만이 큰의자에 앉아 있다.]
1. 김일성의 아들, 박헌영의 아들 16
* 무봉산 자락에서 만난 원경 스님 16 / 혁명가 박헌영이 걸어온 길 24 / 기억 속 아버지를 찾아서 30
두 사람 아들의 운명도 대조적이다. 김정일(1942-)과 박병삼(1941-)[원경] (18)
. 경기도 평택에 어머니 젖무덤처럼 도톰한 무봉산 자락에서 .. (20)
1922년 3월에 ‘고려공산청년회(고려공청) 책임비서를 맡았다. (26)
1925년 4월 17일 조선공산당이 창립되고 다음날 고려공산청년회가 서울에서 결성된다. 두 조직 창립대회에 모두 참여한 박헌영은 고려공산청년회의 책임비서를 맡았다.(26)
원경스님은 당시(1928년 8월) 신문에서 대문짝만 하게 보도된 박헌영의 탈출 소식을 가수 김정구의 친형 김용환이 두만강변에서 접한 뒤 노랫말을 짓고 동생이 부른 노래가 「눈물젖은 두만강」이라고 말했다. “두만강 푸른물에 ... ” (27)
박헌영은 국제레닌학교에서 .. 호찌민(胡志明, 호지명, 1890-1969)을 만났다. .. 박헌영은 호찌민에게 조선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를 선물했다. (28) [이 근거자료로서 안재성의 박헌영 평전이라 한다. 박헌영 입학 1928년 11월-1932년 1월 상해도착.. 호찌민 나이 서른여덟인데... 저우언라이(周恩來, 주은래, 1898-1976)는 장정중인가? (47NLA)]
저를 키워주고 지켜주신 한산 스님 .. 1946년[여섯] 2월에 찍은 사진 ,, 이현상선생과 한산스님, 김삼룡선생... (31)
경기도 여주 흥왕사.. 서래암 .. (33-34)
인천 주안에 있은 용화사... 송담스님 (34)
옛날 한산 스님한테 비운 건데, 스님이 성황당이나 돌탑같은 곳의 돌 밑에 창호지에 기름 먹인 거로 싸서 묻어 두는 걸 보았어요.(34)
누군가 온 방을 다 뒤지고는 그 사진 하나 찾아서 가져간 거예요(34)
2. 잃어버린 사진 속의 혁명가들 36
* 죄인의 아들이라는 멍에 36 / 한산 스님과의 인연 42 / 남로당 핵심 김삼룡과 함께한 어린 시절 50
사진: 고명자, 주세죽 허정숙 .. 사회주의 여성활동가인 이들 셋은 김단야, 박헌영, 임원근과 각각 결혼한 사이었다.. (39) [임원근(林元根 1900-1963) 김단야(金丹冶 1901-1938)].
이재유 선생은 나중에 옥사를 하시는데, 바로 주세죽 여사의 이종사촌 동생입니다. (42)
[박헌영의 할머니와 할아버지 광산 식당에서 만났고, 큰할머니 돌아가시면서 박헌영이 다섯 살 때 합가를 했다고 한다. 누님(조봉희)이란 할머니가 조씨와 결혼해서 낳은 딸이다] . 그래서 수양 어머니가 조봉희를 권번에서 키웠어요. .. 머리 올리는 데 김가 성을 가진 사람입니다. .. 이 아이가 한산스님입니다.(46) [한산스님(김제술)은 (아버지 다른) 누님의 아들이다.]
조봉희라는 사람이 바로 누구냐면, 그러니까 지금의 길상사 자리인데요, 대원각의 주인이었어요. 조봉희 여사가 권번의 수양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겁니다. 대원각의 건물과 토지대장에 지금도 이름이 남아 있어요. (46)
조봉희는 아들(김제술)을 동경제대까지 유학 보냅니다. (48)
고모의 아들이니까 고종사촌이지요. (48)
1949년에 김소산이라는 여간첩 사건이 터지면서입니다. 당시 반공검사였던 오제도가 사랑했던 여인이지요. 그런데 오제도가 직접 잡아넣지요. 김소산은 조봉희의 딸로 김제술의 동생입니다. 바로 그 유명한 김소산이에요. 우리 고모의 딸이지요. .. 그런데 김소산이 감옥에 갈 때, 당신이 나올때까지 ‘새끼 기생’이던 자야에게 책임지고 관리하라 했어요. 그랬는데 전쟁이 났어요. .. 자야가 당시 국회부의장이던 이재하의 애첩이 됩니다. 그리고는 이재하와 결탁해서 1955년에 대원각 등기를 자기 앞으로 바꿔버려요. (50)
[1950년 남로당 아지트가 털리고 김삼룡도 피신하고.... 이주하 선생이 ... 원경이 10살때란다.]
3. 지리산에서 만난 ‘빨치산 사령관’ 아저씨 56
* 홀로 남은 소년, 스님이 되다 56 / 전쟁의 시작과 노근리 학살의 진실 64 / 지리산 사령관 이현상과의 만남 68
1946년 민전 .. 이강국을 사무총장으로 앉힌 사람이 바로 김제술(한산)입니다. 이 사람이 자료에는 아무 직책도 없어요. 얼굴이 새카맣고 키도 작아 볼품 없는 사람입니다. 고위 지도자들하고만 어울렸지요. 박헌영선생의 비서였다고 생각해요 김삼룡 선생의 측근이라고도 할 수 있지요. (58)
한산스님은 남로당이 당시 각계에 침투시킨 비밀당원들을 관리하는 총책임자가 아니었을까 짐작해요 실제로 그런 증언도 있었고요. (58)
[원경: 한산스님의 손잡고, 누님이 있는 요정으로(?) .. 서오릉으로 조봉희 여사(고모) ... 화엄사로 .. 1950년 5월 이었다..]
당시 화엄사 주지가 서동월 스님.. 그 서동월 스님이 나중에 빨치산들한테 죽습니다. (60)
화엄사에서 피아골 연곡사... 거시서 서울에서 봤던 아저씨가 거기 있더군요. / 아 그럼 그분이 이현상인가요? (60-62)
그때 「부용산」이라는 노래를 거기서 처음 들었어요. ... 박기동선생의 여동생은 의식이 깨어 있던 분 같아요., ... 죽은 누이를 그리워하는 시였으니까요. “솔밭 사이 사이로 회오리 바람 타고 /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너는 가고 말았구나” (64)
노근리 학살 이유.. 미군 24단장 윌리엄 딘 소장 .. 딘 사령관이 금산으로 잘못들어 덕유산 빨치산들에게 생포 당하잖아요. 그래서 미군이 보복을 하고 나선 겁니다. (66).
김소산 누나.. 그 빨간 장화 신고 권총 차고 몇 사람 따라오고 ... 군복입고 지휘봉인지 채찍인지 그런 걸 들고 있었어요.. (68)
학자들은 한국전쟁시기에 아버지가 서울에 왔다가 한산 스님 말씀은 절대로 서울에 내려오지 못해다고 합니다. (68)
겨울 초에 북평(동해) .. 스님은 삼화사에 데려나 놓고 .. 두타산 삼화사... (69)
충북 단양의 소백산 자락까지 .. 지금의 구인사 .. 그때는 초가삼간 하나 밖에 없었습니다. 원각 상월 스님이 그곳에 살고 .. 상월스님에게 [원경] 맡겨지다. (70)
덕유산 원통사... 그 다음에 대원사 칠선계곡으로 해서 지리산으로... 3년을 살았지요.. (72)
그런데 문제가 생깁니다. 제가 있는 동안 이현상 암살 사건이 두 번이나 일어났어요. 부대에서 수류탄이 터지기도 했습니다. .. 네 이현상 사령관을 죽이러 북쪽에서 사람을 보냈어요. (72) [이현상(李鉉相, 1905-1953) 지리산 남부군 총사령관 .. 이병주의 지리산에 나오는 남도부(南道富) 즉 하준수(河準洙 1921-1955)는 해방후 여운형 주도의 조선인민당에 가담, 함양군당 위원장, 조선인민유격대 제3병단 부사령관(사령관인 김달삼)이었다.]
손: 말하자면 스님은 열 한 살의 어린 빨치산이었군요? .. (73)
당시 ‘산사람’들은 옷 안에 쑥으로 만든 솜을 넣고 다녔습니다. 쑥을 말려서 비비면 솜 같은 것이 남아요. 그걸 옷자락 속에 넣고 다닌 거죠. .. 아무튼 그걸 조금 꺼내서 돌과 돌 사이에 두고 탁탁 때리면 불이 붙습니다.(73)
그러자 이현상 선생은 “난 여기서 동지들하고 같이 죽겠소. 절대 하산 안하오. 저놈들이 날 죽이려고 사람을 여기까지 내려 보낸 놈들인데 날 그냥 두겠소?” 하더군요. 이게 아주 무서운 말이에요. 김일성이, 그가 이끄는 정부가, 집단이 이현상 선생을 죽이려고 했던 겁니다. (74)
4. 박헌영은 김일성을 얕봤다 75
* 보천보 전투를 둘러싼 진실공방 75 / 박헌영이 함구령을 내린 까닭 78 / 원경 스님이 김일성을 보는 눈 84 /
이현상 선생은 1947년에 모스크바 육군대학에 들어가게끔 되어 있었어요. .. 그러던 어느 날 남과 북의 주요 인사들이 참석한 주연이 벌어졌어요. 이 자리에는 최현, 이상조도 있었어요.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 이현상 선생이 그 때, “다들 좋다. 그렇지만 우리가 통일된 새로운 조죽을 건국하는데 있어서 국내에서 활동한 투사가 우선 아니냐? 김일성 장군이야 그 많은 업적이 있지만 중국 공산당에 소속되어 일을 했는데, ..” (77)
보천보를 일으킨 사람은 정확하게 김창희 장군입니다. (78)
일본이 이 사건을 조사하다 보니 배후가 박달과 박금철로 드러나요. (80)
원경의 어머니: 정태식 선생은 어머니의 오촌 당숙 (82) [정태식은 “해방일보”주필.. ]
그 때 무정 장군의 보좌관이 한 이야기가 있어요. 자기가 지린성에서 중국 공산당 김성주 부대에 배치되어 있었을 때, 보천보 사건을 일으켰다는 김일성이라는 사람이 총상을 입은 것 자기가 구해줬다는 겁니다. 구해서 김성주 의무대에 보내 치료를 받게끔했는데 나중에 이 사람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답니다. 그런데 그 다음부터 김성주가 김일성이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86)
마침 1948년에 여순 사건이 터졌어요. 여자만(汝自灣)이 피바다가 될 만큼 많은 사람이 죽었죠. 살아남은 자들이 지리산으로 몰렸습니다. (91) [1948년 10월 19일 전라남도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국방경비대 제14연대에 소속의 일부 군인들이 일으킨 사건. 제주도 4·3사건 진압출동을 거부]]
5. 어느 날 다가온 아버지의 처형 소식 92
* ‘이현상 아저씨’의 부탁 92 / 아버지의 고향으로 피신하다 96 / 산사에서 아버지 제사를 지내다 98 /
‘산상의 여인’이라고 불린 이현상의 여인이 있었어요. 경상도 어딘가 사신다고 그래요. (92)
화엄사 주지 서동월 스님에게 사람을 보내 경찰서에 있는 아이를 만나 꺼내오라 했는데 .. 나중에 산사람들이 내려와서 그 스님을 공개적으로 처형했답니다. (97)
1958년 12월 15일이었습니다. .. ‘박헌영 영가’ .. [원경 열 여덟..]
“남의 허물을 보지 마라. 그러면 너한테 적이 없다”며 “세상을 항상 착하게 살어라. 너만 착하면 이 세상이 다 착해진다.” (102)
6. 박헌영 사형 판결문과 최후 진술 104
1) 박헌영 판결문(1955년 12월 15일) 104
<강상호가 “중앙일보”에 기고한 글이다. 1993년 8월과 9월에 걸쳐 연재되었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재판소 특별재판장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차수 최용건.
2) 재판을 지휘한 강상호의 증언: 사형선고 받은 박헌영의 최후 진술 110
이사건의 조사 예심 주관부처 내무성 부상인 나(강상호)는 맨 앞줄 왼쪽에 앉아 예심처 간부들의 재판 진행 업무를 진두지휘했다. (110)
최용건과 박헌영: 심문과 응대
정확히 밤 10시였다. 5시간 동안 진행된 마라톤 재판이 막을 내렸다. (119)
사형집행 직전 박헌영은 “오늘 죽을 것을 아니까 여러 가지 절차를 밟지 말고 간단하게 처리해주시오. 그런데 수상께서 내 처와 두 아이를 외국으로 보내주겠다고 약속해놓고 아직까지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소. 꼭 약속을 지켜달라고 수상께 전해주시오”라는 말을 남겼다. - 주: 강상호의 증언에 따르면 기익을 1956년 7월 19일이된다. 그날 만기사에서 제사를 지낸다. (122, 123)
[박헌영은 의연했다. 대의를 위해 행동했지 개인의 영달을 위해서 일한 적이 없다는 의미이다. (47NKB)]
7. 해군 특수부대 자원한 ‘박헌영 아들’ 124
* 열일곱의 소년, 복수를 꿈꾸다 124 / 어머니와의 첫 만남과 자살 기도 128 / 이현상은 사살당하지 않았다 134 /
세상을 보기 시작하는데 제일 강렬하게 다가온 것은 4.19였어요. / 저게 혁명이구나. 저렇게 억눌렸던 사람들이 외치고 저렇게 피투성이가 되고 싸우고 잡아가고 하는데, 아버지가 바로 저런 일을 했던 사람이구나. (125)
친구대신 신체검사 받고 해군에 지원했어요. 그래서 제가 해군 72기입니다... .. 유디티에 지원했어요. 거기서 진해 하수구란 하수구는 다 빠져 다니는 훈련, 그 무서운 수중폭파, 선반용접, 낙하훈련, 사격, 단검 쓰는 훈련 등을 하며 혹동한 나날을 보내죠. 그러면서 정말 김일성을 죽일 수 없을까 생각했어요. (126) ,
요로법, .. 화룡탕 ... (131)
한산 스님도 1968년 잠적을 하셨어요. 그 이후 그분의 행방을 전혀 모릅니다. (138)
원: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있어요. 김대중 선생이 납치당하기 전에 관여한 한민통이라고 있죠? 손: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일본에 있을 때 참여한 한국 민주회복 통일 촉진 국민회의를 말씀하시는 거죠? 원: 그때 한민통의 고문 명단이 나오던데 그 중에 김제술이 나와요. (138)
한산스님 1910년 생 (138)
윤레나 한국명 윤옥 .. 딸 이름이 나타샤였어요 딸이 전쟁 전에 태어났고 아들 세르게이는 1951년생인가 52년생인 것 같아요. (140)
동생들이 북쪽에 살아 있다는 것은 모스크바에 사시는 누님이 증언해주셨어요. (140)
8. 수도승 사이에서도 불거진 ‘색깔공세’ 142
“빨갱이의 자식을 쫓아내라!” 142 / 안기부, 아버지의 이름을 묻다 148 / 역사문제연구소와의 인연 152 /
더구나 그는 현존하는 한국 최고의 선승으로 꼽히는 송담 큰 스님의 맏상좌다. (142)
사진: 1996년 8월 동국대학교에서 사회복지학 석사학위를 받은 원경. 원경은 평택 만기자 부설로 연꽃유치원을 운영하고 있다. (143)
1983년 제가 교통사고를 당했어요... 그 사고로 소설가 김성동 선생은 머리를 다쳐서 뇌수가 흘러나올 정도였고 운전하던 저는 핸들에 가슴을 부딪쳐 갈비뼈가 아홉 개나 부러졌어요. (147)
병원을 감시하던 사람은 안기부 요원 ... 12년 전부터 저를 보호해 왔다... (151)
제가 바깥에 사람들을 배치해둔 것도 이미 다 알아요. 그러면서 계속 보호해줄테니 겁먹지 말라면서, 단 어디에서 시국성명서 같은데 서명해 달라고 하면 그러지 말라고 강조했어요. (151-152)
1972년 10월 28일 저녁입니다. .. 불을 탁 켰더니 군화가 보이더라고요.. (152) [안기부의 감시를 받고 있는 것을 안 것이 1972년이었으니... 그전에도 이미 관리하고 있었겠지.. 그러니까 잡으러 갔지. (47NLB)]
1985년이에요. ... 박원순 변호사가 전화도 놓고 당시 월 100만원씩 내기로 했어요. 서중석 선생, 김남식 등을 초빙해서 ... 한번은 밤중에 세미나를 하다가 전부 종로경찰서에 연행되기도 했습니다. (154)
그 투서가 운동 내부에서 나온 건가요? / 네 그건 확실해요. (웃음) 김남식이 그런 이야기를 나중에 해주더라구요. 김남식은 안기부의 북한 문제 담당이었으니까요. (156)
9. 아버지 박헌영 ‘복권’의 진정한 뜻 158
* 찬탁-반탁의 소용돌이와 언론의 역할 158 / 박헌영의 ‘8월 테제’와 박정희 162 / 박헌영의 복권과 통일 166 /
주2: 박갑동(朴甲東 1919) 경남 산청, 중앙고보 일본와세다 대학 정경학부. 해방후 조선노동당 입당 “해방일보” 정치부 기자. 1957년 북경을 거쳐 탈출 일본거주. 1973년 <중앙일보> “남기고 싶은 이야기”기고 ... [박갑동(朴甲東, 1919- )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언론인, 정치인이었다. 남로당 당수 박헌영의 비서로 지낸바 있었으며, 박헌영의 측근이었다. 현재는 일본도쿄에 거주하고 있다.(네이버)]
[박정희는} 박갑동 씨가 보는 앞에서 지를 하더래요. 이 사람한테 지면을 활용할 수 있게 하라고요. 그래서 이건희 씨로부터 500만원을 받았답니다. 당시 500만원은 엄청난 돈입니다. 그런 돈을 원고료로 미리 준 거죠. 박갑동씨가 그 돈으로 아파트 세 채나 샀다는 거예요. 박정희가 지면을 준거죠. 박갑동 씨는 글을 쓰면서 분명치 않으며 중앙정보부로부터 자료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쓰인 글은 “중앙일보”에 실리기 전에 중앙정보부에서 한 번 걸렀다고 하네요. (164) [글의 맛사지 값이 제법 비싸군 (47NLB)]
박정희는 남로당 전력이 있다. 본디 그는 일제 강점기에 혈서를 써가며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가서 일본 육사를 졸업할 만큼 친일행적이 또렷했다. 육사를 졸업한 뒤 만주에서 복무하며 일본에 충성했다. 해방 뒤에 국내에 들어와서는 당시 최대의 정치 세력이었던 조선공산당과 그 후신인 남로당에 가입했다. 하지만 군 내부에서 남로당 숙청이 전개되자 그 순간까지 동지였던 남로당원들의 명단을 넘겼다. 그 결과 그가 넘긴 명단에 있는 남로당원은 모두 사형당하고 박정희는 살아남았다. (165)
우리 후세대들이 김일성이나 전쟁 책임문제 이런 걸 떠나서, 지금과는 다른 세계관에서 남북이 서로 이야기할 수 있을 때, 그 때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을까요. 우리가 아무리 통일을 이야기한다고 해도 지금은 쉽게 통일이 될 수는 없다고 봅니다. (170) [다른 세계관, 자연관, 그리고 다양체, 다발이론이 자연스레 받아들여질 때, 그리고 걸어서 추가령 지구대를 자유로이 이리저리 다닐(évoluer) 수 있는 노력이 있을 때, (47NLB)]
그저 김정은을 옹호하면서 권력을 차지하려는 무리들만 주변에 있는 것 같아요. 자기기반이 없는 겁니다. 아직은 ‘얼굴마담’에 불과하다는 거죠. 사정을 모르니 평가하기가 참 쉽지 않지만 말입니다.... 손: 현실을 냉철하게 바라보고 계시네요. (172)
10. 박헌영 글 직접 읽기 172
1) 방송 연설문: 진보적 민주주의 깃발 아래서 175
우리 당은 노동자, 농민, 도시소시민과 지식인 및 일반근로 대중의 이익을 대표하는 정당입니다. (175)
1. 건국의 이상을 진보적 민주주의를 원칙으로 할 것.
2) 8월 테제: 현 정세와 우리의 임무 178
- 현정세 178 [정세분석]
- 조선혁명의 현 단계 180 [시점에 대한 규정]
오늘 조선은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 단계에 있다. 이 혁명의 중요한 과업은 완전한 민족적 독립의 달성과 농업혁명의 완수 이다. (180)
- 조선 공산주의 운동의 현상과 그 결점 181 [내부단속]
그러나 이러한 탁규라 황포히 흐르는 금일에 있어 한 가지 맑은 물결이 새암같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캄캄한 밤중에 밝은 등불같이 진정한 공산주의 운동은 백색테러 시기로부터 오늘날까지 계속 빛나고 있다. ...(182)
- 우리의 당면 임무 [과업]
이러한 인민대중의 자연발생적 투쟁은 옳은 정치노선을 가지지 못하였으며 전국적 혁명적 지도가 없이 지연되고 있다. 이렇게 중대하고 절박한 시기에 있어 조선공산당은 시각을 다투어 진정한 노동계급과 농민의 지도자로서 인민 앞에 나서야 한다. (182-183)
- 대중운동을 전개할 것 183 [노동운동 과 농민운동 강조]
- 조직사업 [야체이카(소련어로 세포, 대중운동의 씨앗)]
- 프롤레타리아의 헤게모니를 위한 투쟁 186 [노동자 농민의 민주적 지도권 행사]
- 인민정권을 위한 투쟁을 전국적으로 전개할 것 186
1945년 8월 20일 조선공산당 재건준비위원회
원주: 28명 당중앙위원회 명단 1. 박헌영, 2. 김일성, 3. 이주하, 4. 박창빈, 5. 이승엽, 6. 강진, 7. 최용건 8. 홍남표, 9. 김삼룡, 10. 이현상 ... 이다.(187) ,잉 하
# 나가는 말: 21세기 박헌영:남과 북에 보내는 메시지 188
1980년대 이 땅의 순수한 영혼들을 사로 잡았던 ‘자주’와 ‘통일’ 또한 한 차원 높여 2010년대에 걸맞게 재구성해야 옳다. (190)
# 박헌영 연표 192
[벩송이 그리스 철학의 주요성을 네 가지로 말한다. 정확성, 엄밀성, 증거, 구별(분류) 이다. 아직도 정확성은 중요하다. 증인 증거가 인위적이지 않아야 하는 것은 학문만이 아니라 도덕과 종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전쟁의 상처(trauma)는 (47NLB)]
(8; 15, 47NL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