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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정동‧2: 정동이론(affect theory)의 신경과학적 접근의 초고
-'affect/affection'과 ‘affect/emotion'의 구도에 대하여
박대현(문학평론가)
1. 스피노자의 affection과 마수미의 emotion
한국에서 유행하는 정동(affect) 이론은 스피노자의 ‘정동’(affect)에 대한 들뢰즈와 네그리의 창조적 해석에서 비롯되고 있다. affect[affectus]와 affection[affectio]을 각각 ‘정동’과 ‘정서’로 번역하는 것에 대한 진태원의 이의제기도 존재하지만, 그것은 affect의 개념을 스피노자에게 지나치게 환원함으로써 발생하는 비판이라 할 수 있다. affect의 근대적 개념은 스피노자에게 빚지고 있지만, 그것은 지금껏 다양하게 변주되어 왔기 때문에 진태원의 지적이 전적으로 옳다고는 보기 힘들다. 궁극적으로 정동 이론은 신경과학(neuroscience)에 의해 규명되고 정리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피노자의 'affect/affection', 이에 대한 들뢰즈와 네그리의 재해석, 그리고 브라이언 마수미의 'affect/emotion' 개념적 구도가 각각의 영역에서 이론적 효용성과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오늘날의 신경과학이 이 개념들을 규명하고 정리할 정도로 발전하지 못한 탓이 크다.
문학연구자들이 자주 사용하는 정동 개념에 대한 진태원의 비판(「정동인가, 정서인가?」, 현대시학 2016.4)은 번역의 정확성과 개념적 엄밀성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한 성찰을 촉발시킨 바 있다. 진태원의 논의를 이어받아 스피노자의 ‘affect/affecton’을 ‘affect/emotion’으로 치환시켜버린 브라이언 마수미에 대한 최원의 비판 역시 마찬가지다. 이 비판의 근거는 사실상 스피노자가 사유했던 'affect/affection' 개념에 있다. 정동 이론이 스피노자 철학에 머물러 있다면 이들의 비판은 지극히 온당하겠으나, 문제는 오늘날의 신경과학은 충분히 발전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스피노자의 개념보다 훨씬 정교한 논리를 과학적으로 증명해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이 글은 스피노자의 'affect/affection'이 브라이언 마수미의 ‘affect/emotion’으로 환치되게 된 신경과학적 맥락에 대한 설명에 해당할 것이다.
2. 'affect/affection'의 정신분석‧신경과학적 맥락
진태원은 우선 문학 연구자들이 'affection'을 ‘정서’로 번역하는 것을 매우 불편하게 여긴다. 실제로 다음과 같은 들뢰즈의 진술에서 ‘affecion’을 정서로 옮기게 되면,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가 힘들어진다.
태양은 밀랍을 녹이고 진흙을 굳힌다. 이러한 요점들은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닙니다. 그것들은 affectio(정서)의 관념들입니다. 나는 [녹아] 흘러내리는 밀랍을 보고, 그 오른쪽 옆으로 딱딱해지는 진흙을 봅니다. 이것은 왁스의 정서이며 진흙의 정서입니다.
진태원의 말대로 위 인용글에서 ‘정서’는 ‘변용’으로 번역되는 것이 옳다. 그러나 문제는 진태원이 지적하고 있듯이, affection이 에티카에서 여러 맥락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진태원에 따르면, 스피노자는 윤리학 1부에서는 이 단어를 주로 ‘양태’와 동의어로 쓰고, 2부에서는 ‘물체나 신체 사이의 물리적 작용 및 그것이 남긴 흔적’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하고 있으며, 3부 이하에서는 인간의 정신이 어떤 대상에 의해 변화되는 작용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한다. 변용(affection)은 이 세 가지에 모두 적용 가능하겠으나, 인간의 의식과 관련해서는 ‘정서’라는 번역어가 타당할 수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물체와 물체, 물체와 신체 사이가 아니라, 인간 신체 내부의 정동과 의식 사이에서 일어나는 신경생리학적 작용에서는 affection이 ‘정서’로 번역될 수 있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에티카 4부 정리7의 증명에서 “affect는 정신에 연관되는 한, 정신으로 하여금 자기의 신체에 대하여 이전보다 크거나 적은 존재력을 긍정하도록 하는 관념이다. 그러므로 정신이 어떤 affect에 사로잡힐 때 동시에 신체는 자기의 활동 능력을 증대시키거나 감소시키는 변용을 겪는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확인할 수 있듯이 affect는 인간의 정신, 즉 의식에 심대한 영향을 준다. 그리고 4부의 머리말 첫 부분을 보도록 하자.
affect의 통제와 억제에 대한 인간의 무능력을 나는 예속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affect에 복종하는 인간은 자신의 권리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운명의 권리 아래에 있으며 흔히 스스로 더 좋은 것을 보긴 하지만 더 나쁜 것을 따르도록 강제당하는 것처럼 운명의 힘 안에 있기 때문이다.
스피노자는 affect의 통제와 억제로부터 벗어날 것을 강조한다. 그것은 예속이기 때문이다. affect로부터 벗어날 때 인간은 운명의 권리를 벗어나 자신의 권리를 획득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쉽지 않다. 에티카 4부 정리7의 ‘보충’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affect는 정신에 연관되는 한, 우리들에게 작용하는 신체적 변용에 반대되며 더 강한 변용(affection)의 관념에 의하지 않고는 억제될 수도 없으며 제거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우리들에게 작용하는 affect는 그것보다 더 강하고 그것에 반대되는 affect에 의하지 않고는 억제될 수 없기 때문이다.”이 진술은 오늘날의 신경과학의 관점에서 매우 정확한 진술이다. 왜냐하면 affect는 의식을 몰아낼 수 있지만, 의식이 affect를 몰아내지는 못한다는 것이 신경과학의 기본 입장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불안이나 우울이 의식에 많은 영향을 주는 반면, 의식이 불안과 우울을 효과적으로 통제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affect에 복종하는 수동적 주체는 무엇인가? affect에 영향을 받은 인간의 정신이다. 스피노자는 affect와 인간 의식 사이에 일어나는 신경생리학적 작용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스피노자는 affect를 인간 정신과의 관계 속에서 사유한다. affect의 용법이 물체와 물체(물리학), 물체와 신체(생물물리학)뿐만 아니라, 신경과학적으로도 활용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실제로 affect는 정신분석에서 중요한 개념으로 사용된다. 프로이트의 맥락에서 affect는 “표상에서 분리된 본능”이다.표상에서 분리된 본능은 불안으로 바뀐다. 즉, affect는 표상을 잃은 본능이 불안으로 바뀐 상태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표상이 사라질지라도 affect는 사라지지 않고 신체 내에 남아 있다. 이유 없이 불안해지고 우울해지는 것은 affect 때문이다. affect와 결합된 표상이 불안의 원인이겠으나, 그것이 망각된 경우 인간은 알 수 없는 우울과 불안에 시달리게 된다. 이처럼 affect는 정신분석학에서 중요한 개념으로 활용된다.
정동과 표상의 관계를 보면 더욱 확연해진다. 프로이트가 표상을 잃어버린 본능이 affect라고 말했듯이, 들뢰즈 역시 affect를 “비재현적인(non-representation) 사유양식”이라고 말한다. ‘non-representation’은 ‘비재현적’으로 번역되기도 하지만, ‘비표상적’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결국 affect는 프로이트와 들뢰즈에게 유사한 개념이다. affect가 인간의 의식에 영향을 미친 양태가 곧 affection이다. affection이 affect로부터 영향을 받은 인간 정신이라는 점에서 affect와 affection은 정신분석학과 신경과학의 대상이기도 하다.
3. 브라이언 마수미의 'affect/emotion' 구도
들뢰즈는 affection은 affect를 함축(포함)한다고 말한다. affection에 affect가 포함된다는 것이다. 이는 스피노자의 내용을 그대로 반복한 것이다. 태양이 밀랍을 녹이고 진흙을 굳힌다면, 녹은 밀랍과 굳어버린 진흙의 ‘순간’적인 양태가 affection이고, 이들 affection은 밀랍과 진흙에 영향을 주는 태양의 연속적인 ‘변이’(지속)인 affect를 함축한다. 따라서 들뢰즈의 구도에서 affect와 affection은 잠재성(viruality)와 현실성(actuality)에 대응한다. 들뢰즈의 잠재성은 베르그송의 지속(duration) 개념과도 근친성을 지닌다. 실제로 들뢰즈는 affect를 지속의 개념으로 설명한다. affection이 함축(포함)하는 affect를 하나의 이행 혹은 변이로 설명하면서 ‘지속’ 개념과 연결시키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놀랍게도 들뢰즈는 베르그송이 중요하게 언급한 제논의 역설에 근거하여 affect와 affection을 설명한다.
들뢰즈는 affect와 affection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세 개의 시간들(A, A', A")로 구성된 선을 상상한다. A는 현재 순간의, 순간적인 affection이고, A'는 조금 전의 affection이며, A"는 앞으로 일어날 affection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들 세 개의 시간들 사이에는 그것들을 분리하는 이행의 현상, 즉 지속이 존재한다. 다시 말해 A, A', A"는 모두 affection에 해당하는 것으로 순간적이다. A, A', A" 사이에 존재하는 분리 불가능한 이행과 변이는 affect로서 지속에 해당한다. 여기서 다시 제논의 역설을 떠올려보라. 아킬레스가 거북이를 영원히 따라잡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베르그송이 말했듯이, 이는 분할불가능한 운동의 ‘지속’을 ‘순간’들로 분할한 데서 비롯된다. affection은 affect의 지속을 분할함으로써 발생하는 ‘순간’적 양태다. 따라서 들뢰즈가 언급했듯이, affection은 순간(성)의 형식이고, affect는 지속의 형식이다.
마수미는 신체적인 것에 가까운 affect과 달리 emotion을 사회언어학적으로 고정된 것이자 틀에 박힌 것으로 정의한다. emotion은 인지적인 측면에 가까운 동시에 오래 유지되고 전 생애를 통해서 촉발되며, 이와 달리 affect는 일종의 신체적 현상으로서 스쳐 지나간다. 즉, emotion이 전기(biography)의 영역에 가깝다면, affect은 생물학(biology)의 영역에 가깝다는 것이다. emotion이 의미화의 시도에 포섭될 수 있는 것이라면, affect는 의미화의 시도에 쉽게 포섭되지 않는 신체의 자질이다. 마수미의 관점에 따르면, 정서(emotion)는 “통념화되거나 코드화된 표현”이며 “정동(affect)의 아주 부분적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마수미는 ‘affect/affection’ 구도를 affect와 의식(정신)의 관계에 적용한다. affect가 인간 의식에 미치는 효과에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 마수미는 affection을 emotion(정서)으로 치환한다. 그리하여 스피노자의 ‘affect/affection’은 마수미에게로 와서 affect/emotion의 관계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이를 두고 최원은 마수미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지만, 이는 신경과학의 맥락을 고려하지 못한 탓이 크다. 마수미의 emotion은 신경과학적 관점에서 볼 때 affection의 층위에 있기 때문이다.
마수미에 따르면, affect는 ‘신체의 관념’으로서 인간 정신에 중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정동은 인간의 정신에 비해 신체에 더 가까운 속성을 띤다. 예컨대, 불안, 공포, 기쁨 등의 정동적 자질은 심장 박동, 호흡의 변화 등과 같은 신체의 증상을 동반한다. 정동이 신체적인 것에 가깝다는 주장은 현대 신경과학의 관점에서 쉽게 받아들여진다. 신경과학자 안토니오 다마지오는 인간의 충동(drive), 동기(motivation), 정서(emotion), 느낌(feeling)을 스피노자가 정동(affect)으로 통칭한 것으로 보고 있다.중요한 것은 스피노자 역시 정동의 신체성에 주목했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신체가 외부의 물체에서 자극받는 방식의 모든 관념은 인간 신체의 본성과, 동시에 외부의 물체의 본성을 포함하지 않은면 안 된다.”스피노자의 affect는 외부 물체의 자극이 인간 신체를 관통하는 지속(duration)으로서의 이행이자 변이이다. affect는 신체 내부의 감각이자 신체 내부를 이행하는 지속(duration)인 것이다. 그리고 이 지속으로서의 affect는 인간의 의식에 영향을 미친다. 마수미에게서 affect의 의식화(혹은 의미화)가 곧 emotion인 것이다. 마수미는 스피노자의 affection(변용)을 emotion(정서)로 치환함으로써 affect를 더욱 인간 정신의 영역으로 끌어와 정신분석과 신경과학의 이론에 접속하고자 했던 것이다. 즉, 정신분석과 신경과학의 관점에서 'affect/affection'보다는 ‘affect/emotion’이 효율적인 용어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affection과 emotion의 본질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4. 정동이론의 신경과학적 정리
신경과학 이론에서는 마수미의 '정동(affect)/정서(emotion)'의 구도가 이미 존재한다. 다만, 용어상의 혼란이 있다.
정서(emotion)는 몸이라는 무대 위에서 연기한다. 한편 느낌의 무대는 마음이다. 곧 보게 되겠지만, 정서 및 정서의 근간이 되는 관련 반응들은 생명 활동을 조절하는 기본 메커니즘이다. 느낌(feeling) 역시 생명 조절에 이바지하지만 좀 더 높은 수준에서 작용한다.
안토니오 다마지오는 “좀 더 높은 수준에서 작용”하는 느낌(feeling)의 내용이 신체의 특정 상태에 대한 표상이며, 따라서 느낌(feeling)은 신체의 특정 상태에 대한 지각인 동시에 특정 방식, 그리고 특정 주제를 가진 생각에 대한 지각이라고 말한다. 즉, 정서(emotion)는 몸이라는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신체적인 것이며, 느낌(feeling)은 인간의 마음, 즉 의식과 관련된 것이다. 여기서 눈치를 챘겠지만, 신경과학자들의 ‘정서(emotion)/느낌(feeling)’ 구도는 정동이론가 마수미의 '정동(affect)/정서(emotion)'에 상응한다. 즉 정동이론가 마수미와 신경과학자들 사이에 개념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용어법(terminology)의 혼란이 존재하는 것이다.
사실 이런 혼란은 윌리엄 제임스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제임스에 따르면, 정서(emotion)는 신체적 변화의 패턴 변화의 결과이며 대뇌피질의 영향을 받는 것이라고 추정한다. 그리고 느낌(feeling)은 정서(emotion) 반응에 의한 신체적 변화가 ‘의식적’으로 변화할 때 발생한다고 말한다. 에릭 캔델은 이를 좀더 구체화하여 진술하는데, 정서(emotion)는 신경계의 피질하 부위(특히 편도, 시상하부, 뇌간)의 신경핵 사이의 연결 구조를 토대로 자율신경, 내분비, 근골계의 운동반응에 의존하는 것이고, 느낌(feeling)은 이러한 신체적 정서(emotion)에 대한 학습 증진에 관여하는 인지적‧의식적 요소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마수미의 '정동(affect)/정서(emotion)' 구도는 현대 신경과학의 ‘정서(emotion)/느낌(feeling)’의 대비 구도와 일치한다. 이를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이 정리될 것이다.
| 신체적인 것(지속) | 의식적인 것(순간) | |
| 스피노자 | affect | affection |
| 마수미 | affect | emotion |
| 현대 신경과학 | emotion | feeling |
참고로 안토니오 다마지오는 스피노자가 ‘정서(emotion)/느낌(feeling)’의 구분 없이 'affect'만을 사용했다고 했으나,이는 스피노자의 affection이 느낌(feeling)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간과한 탓이다. 베르그송의 관점에서 ‘affect’와 ‘affection’의 속성이 각각 ‘지속’(이행 혹은 변이)과 ‘순간(성)’이라는 들뢰즈의 주장에 노출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스피노자는 affect와 affection을 구분했고, affection이 바로 신경과학에서 말하는 의식화되고 코드화된 것으로서의 느낌(feeling)이다. 신경과학적 관점에서 볼 때 affect와 의식 사이에 발생하는 신경생리학적 작용의 양태가 의식적인 것으로서의 affection(스피노자)이다. 이것이 마수미에게는 emotion이고 신경과학에서는 feeling(윌리엄 제임스)이다. 이 개념들은, 들뢰즈식으로 말하자면, 분할될 수 없는 지속(duration)의 상태로 이행하는 신체적인 정동(affect)을 ‘순간(성)’으로 고정시킨 것에 해당한다. 다시 말하지만, 마수미는 이를 정서(emotion)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러한 용어법은 신경과학의 관점에서 타당한 것이다. 물론 차후에 신경과학의 용어법과 통일될 필요는 있다.
5. 정동의 시적 기능-비논리적 목소리의 초선형적 결합
그렇다면 정동(affect)이 시에서 함의하는 바는 무엇인가? 브라이언 마수미는 정동은 배중률(the excluded middle)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배중률은 ‘참/거짓’과 같은 이항대립의 논리적 세계를 구성한다. 정동은 이항대립의 논리적 세계뿐만 아니라, 의미론적, 기호학적 질서를 벗어난 곳에 존재한다. 마수미는 정동의 이러한 성질을 초선형성으로 설명하는데, 이는 정동이 언어의 계기적 질서와 논리를 벗어난 있다는 뜻이다. 마수미가 보기에 정동에 언어적 의미가 있다면 역설이다.
정동이 지배하는 시는 의미론적 질서를 배반하게 된다. 정동은 강도(intensity)와 잠재성(virtuality)의 세계에 속한 것이다. 정동은 의미화되기 이전의 자율신경, 내분비, 근골계의 운동반응에 속한다. 정동이 인지와 의식의 영역으로 들어오는 순간, 그것은 감산의 과정을 거치게 되며 이로써만 의미와 논리의 질서로 진입하게 된다. 시 또한 언어로 매개되므로 기본적으로 의미와 논리에 근거하지만, 정동의 많은 부분은 의미와 논리로 포획되지 않는 잉여로 남는다. 시의 정동은 논리적 질서의 이성보다는 언어 외부의 신체를 더욱 강하게 전율케 한다. 이성은 정동으로 촉발된 전율을 사후적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그 과정에서 정동의 많은 부분이 해석의 그물망을 빠져나가면서 감산될 것이다. 이러한 정동의 특징은 현대시에서 해명하기 힘든 지점에 대한 중요한 단서로 기능한다. 현대시는 논리적 질서와 선형성으로부터 이탈하고자 하는 경향을 지니며, 깊은 전율을 주는 시일수록 그런 경향은 배가된다.
나는 야만스럽게 너는 고통스럽게 이불을 뒤집어 쌌다. 시체를 들쳐업고 강가로 가서 떠내려오는 모든 뼈 냄새를 잠재우는 이 죽음의 강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내려놓았다. 그 시체를 싼 이불이 흥건하게 피 냄새를 피워 올리는 상상은 할 필요가 없었다. 나는 여러 번 목격한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이불을 풀어서 차갑게 굳은 한 사람의 육신을 강에 띄웠다. 내 손에서 축축한 목덜미가 떨어져나가던 순간의 그 얼굴을 나는 아버지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그는 열심히 물로 돌아가는 중이다. 시작만 있고 끝이 없는 삶을 기원하는 이곳의 풍습이 만들어낸 장례는 다시 물에서 태어나는 목숨과 교묘히 이어지는 믿음을 만들어낸다. 한 번 만들고 두 번 만들면 그는 이미 불멸하는 자의 얼굴을 가지게 될지도 모른다. 나의 동반자는 허겁지겁 이불을 개켜 들고 돌아가려 한다. 피 묻은 그 얼룩을 얼굴처럼 또렷한 그 흔적을 어디 가서 태울 것인가? 나는 두어 번 말을 바꾼 나의 동반자의 선택을 신뢰하지 않는다. 한 사람은 유령처럼 말하고 있고 또 한 사람은 그림자처럼 따라갈 뿐인 이 갈림길에서 그는 주저앉아서 울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가까운 산으로 올라갈 것인가? 강물은 여러 번의 결심으로 흙을 깎아내리지 않는다. 그것은 다만 끊임없는 실천의 연속이다. 문장이 곧바로 행동이 되는 연습, 그것이 내게 필요한 선택이고 그가 따라야 할 운명처럼 보였다. 말이 곧 실천이 되는 장면을 바로 앞에서 지켜보면서도 그는 그 강 같은 눈물을 거두지 않고 주저앉은 자세를 일으켜 세울 만한 의지를 보여주지도 않았다. 맥이 빠져서 시체는 떠내려간다. 아무런 혼령도 없이 뜨끈한 온기도 없이 싸늘하고 차가운 강바람을 대책 없이 불러들이고 있었다. 그 심장을 열어젖히지 않고서야 어떻게 불같은 의지를 다시 집어넣을 수 있겠는가. 그는 아버지의 흔적이 연기로 변하는 모습을 보아야 한다. 나의 동반자는 착실하게 살아온 자신의 손가락에 묻은 피를 흥건한 강물에 씻고 또 씻는다. 참회와는 무관한 강물이 흐른다. 의지는 우발적으로 일어난다. 분노는 다시 오지 않을 때 붙잡아야 한다. 나는 마른 담배를 붙잡고 연기를 조종하는 것 같았다. 뜻대로 되지 않으면 그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고 일어난 후에도 바람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들 것이다. 자수할 생각은 꿈에도 꾸지 않는 이 피로한 동반자의 얼굴이 조금씩 상하고 변해가기 전에 내가 보관해두어야 할 곳은 그 연기가 최초로 피어올리던 불씨, 그리고 그 불씨를 당겼던 한 사람의 폭압적인 얼굴을 끝없이 상영해주는 밀실이어야 할 것이다. 인생은 덧없고 덧없지만, 밀실은 완고하게 자신의 죄를 털어놓지 않는다. 흔들어도 제 속에서 요란한 부스러기 소리를 한 줌의 뼈만도 못한 그 연기의 몸부림치는 소리를 가볍게 인내해야 한다. 너는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무거울수록 달아나는 연습을 수없이 해오지 않았느냐. 마치 먼지가 달아나듯이 연기가 흩어지듯이 나는 두 번 다시 오지 않는 이 순간을 너무 깊이 담아두지 않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강조하였다. 그는 지혜?라고 반문하였다. 그럼 용기라고 해두자. 그는 둘 다 만족할 수 없는 단어를 붙잡고 일어섰다. 용기와 지혜, 이 모두가 내 손에서 나와서 나의 동반자를 일으켜 세우고 있다. 앞서가는 것은 그였지만, 헐렁한 그림자 같았다. 등뒤에서 지는 해가 간신히 세워놓은 듯한 존재. 우리는 심야의 강바람을 등지고 걸었다. 생각보다 가벼운 이불을 짊어지고서 걸었다. 이 안에 든 것은 언제나 피를 부르는 아버지의 말라붙은 부장품이었다. 주인 없는 그 분신들이 너무도 가벼워서 태우는 순간 금방 날아갈 것 같았다. 불에 타 죽은 새처럼 돌멩이는 말없이 발끝에서 툭툭 차이고 흩어졌다. 울림 없는 메아리, 반향 없는 그 실종을 위장하기 위하여 산속의 깊은 곳과 깊은 곳을 다 헤집고 돌아다닌 후에도 여전히 상황은 실종이었다. 처음 생각해낸 단어가 그대로 돌아온다는 것. 아무런 의심도 없이 단어가 만들어낸 그 상상을 더는 상상하지 않고 기억하듯이 말해야 한다. 머릿속을 굴릴 때도 우리는 어느 한쪽 방향으로만 눈을 돌려야 한다. 기억하듯이, 기억하듯이, 그래 기억하듯이. 우리는 드디어 말하지 않고도 기억할 수도 있다. 기억이 만들어낸 그 상황을 정확히 때로는 흐릿하게 때로는 가슴 아프게 되풀이해서 풀어낼 수 있는 기억이 조용히 완성되는 것 같았다. 우리는 실제로 아버지의 실종을 지켜보았고 그것은 운명이 만들어낸 장난 같았다. 운명이 데려간 아버지의 시신을 이제 여기 와서 묻지 말고 우리가 되걸어온 강에 가서 물어보시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고 나의 동반자는 돌아서서 한번 더 우는 연습을 하였다. 그는 실제로 울고 있었다. 나약한 그 심장이 정말로 꿈틀거리며 비통한 얼굴을 내비치는 것이었다. ⓐ그날 우리는 산에 갔던 우리를 본 적이 없다. 나는 측은하게 너는 울먹거리며 서로의 얼굴을 뒤집어썼다. 우리의 내면이 너무도 충실하였으므로 나는 꼭 한 사람 같았다. 너도 마찬가지 얼굴을 뒤집어쓰고 걸어다녔다. 그 이불 속에서 흘러나간 한 사람의 얼굴이 생각나지 않을 때까지 강은 흐르는 속도를 멈추지 않았다.(밑줄 및 알파벳ⓐ: 인용자)
-김언, 「동반자」 전문, 너의 알다가도 모를 마음(문학동네, 2018)
어느 계간지에서 우연히 읽은 시다.(시인에게서 들은 말을 옮기자면, 산문으로 보낸 작품을 시로 수록해놓았다고 한다.) 그리고 우연히 읽은 시가 큰 충격을 줄 때가 있다. 어느 계간지에 발표되어 다시 내 눈 앞에 나타나기까지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김언의 새 시집 한 문장(2018.1)이 출간되었을 때 이 시를 찾았으나 보이지 않아 실망했고 두 달 후 발간된 너의 알다가도 모를 마음(2018.3)에서 비로소 마주한 기억이 있다. 이 시는 시적 주체가 아버지의 시체를 강물에 내다버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내면 풍경에 대한 묘사다. 더할 수 없는 비극의 ‘습기’로 가득하다. 아버지의 죽음을 집어삼킨 강물의 흐름이 언어의 완만한 속도와 일체를 이루면서, 온전한 이해 없이도 읽는 독자에게 전율을 준다.
그러나 이 전율 이후에 시를 해석하고자 할 때 어떤 난맥상에 빠져든다. 이 난맥상은 ‘나’, ‘너’, ‘그’, ‘우리’라는 대명사의 혼란으로 인한 것이다. ‘나’는 시적 주체이고, ‘너’는 ‘나’의 ‘동반자’이며, ‘우리’는 ‘너’와 ‘나’를 지칭하는 1인칭 복수대명사일 것이다. ‘그’는 ‘너’와 ‘나’가 이불에 싸매어 강물에 내다버린 아버지(의 시체)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이 시를 해석하려는 순간, ‘나’, ‘너’, ‘그’, ‘우리’의 경계가 흐릿해지고 급기야 의미의 혼란이 초래된다. 위 시에서 밑줄 그은 부분은 대명사가 포함된 문장이다. 대명사는 특정 대상을 지시하겠으나, 그 대상은 시적 맥락에 따라 혼란을 초래한다. 나, 너, 그, 우리 모두가 죽음의 강물에 휩싸인 ‘동반자’일 수도 있겠고, 어쩌면 이 모두가 서로의 모습을 껴입은 존재일 수도 있겠다. ⓐ의 진술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나’와 ‘너’는 “서로의 얼굴을 뒤집어 썼”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내면이 너무도 충실하였으므로 나는 꼭 한 사람 같았다”고 말한다. 비문을 포함하고 있는 이 진술들은 언어적 논리와 질서를 초과하고 있다.
애초에 대명사란 특정한 대상을 지칭하지 않는다. 대명사는 특정한 ‘실재’나 시공간의 객관적 위치를 가리키지 않는다. 대명사는 현실에 대하여 아무것도 지시하지 않으며 담화의 현실태로부터 의미가 발생될 때까지 대기 중일 뿐이다. 이것이 벤베니스트가 말한 대명사의 본질이다.이 시에서 대명사 ‘나’, ‘너’, ‘우리’, ‘그’ 등의 대명사는 매번 각각의 동일한 지시대상을 지시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너’와 ‘그’는 뒤섞여 있으며, 심지어 ‘나’를 포함한 이들이 누군지도 확실치 않다. 확실한 것은 아버지의 죽음인데, 이 대명사들은 아버지의 죽음을 둘러싼 채 의미론적으로 희미하고도 흐릿하게 부유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 시의 대명사들은 의미론적으로 텅 비어 버린 채 이 시를 흐르고 있는 정동의 흐름에 제 몸을 허락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 ‘너’, ‘우리’, ‘그’는 서로가 누구인지도 흐릿해진 채 죽음의 불안에서 비롯된 정동에 관통당한 ‘동반자’로서의 공동체는 아닌가.
따라서 이 시는 무의식적 꿈의 목소리에 가깝다. 무의식의 중요한 특징은 비논리성과 무시간성이다. 다시 말해 시간적‧논리적 계기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꿈속에서 앞뒤 맞지 않는 무시간적이고 비논리적 사건이 벌어지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이 시 역시 논리를 염두에 두지 않는 흐릿하고 낮은 꿈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그러나 아버지의 죽음에서 비롯되는 불안의 정동(affect)만은 선명하다. 이 시의 목소리는 해명 불가능한 요소에도 불구하고 언어의 논리와 질서를 넘어선 초선형적 정동을 통해 결합된다. 그것은 신체적인 것으로서의 변이와 이행, 즉 지속(duration)의 상태에 육박하고 있는 것이다.
박대현
2005년 부산일보 문학평론 당선. 평론집 『우울한 것의 추락』, 『혁명과 죽음』, 『황홀한 아파니시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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