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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이쁜 초딩 친구들이 추억 이야기를 좋아하니
억지로라도 이야기 거리를 만들어야겠제 ㅎㅎ
초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서울을 가셨다.
둘째인 내가 2년 이상 병에 시달리다가
다행히 약을 끊게 되고 좀 살아난 듯 싶으니 애처로우셨는지 .....
평소에 늘 무섭고 늘 야단만 치시던 아버지하고
서울 구경가는게 뭐 좋을리 있겠어?
어머니하고 가야 좋지!
지금 생각하면 당시엔 중학교 입학시험이 있어서
여름방학 때였는데도 집에 내려오지 않고 서울에서 공부하는 6학년 형님 보러 가신 거 같다.
막내 고모가 대학을 다니고 있어서 함께 마포구 아현동 허름한 동네에서
셋방을 얻어 살고 있었다.
아직 비포장이었던 강화에서 서울가는 길로 달려가는
낡은 버스 속에서 멀미를 하지 않았던 게 이상할 정도지.
갑곳리('갑구지'라고도 불렀지 아마) 포구에서 버스채 통재로 실는
배를 타고 건넜다. 이 배 이름이 지금도 창후리에서 교동 등으로 갈 때 있던 그 배하고 같은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당시에 뭐 "엠뽀드"라고 부르더군. 자세한 설명은 울 친구들의 도움이 필요하군ㅎㅎ
김포평야를 달려갈 때의 풍광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 걸 보니
아버지는 차멀미 약을 먹이신 것 같다.
지금은 김포신도시라고 해서 삐까번쩍이지만 예전에 김포읍은 강화읍보다 더 못했는데.....
아! 그 때는 "강화면"이었지.
그래서 편지봉투에 "경기도 강화군 강화면 월곳리 433 황인찬"이라고 주소를 썼었는데
어째 강화가 인천시가 되었냐? 난 마음에 안들어!
인천에서 고등학교를 다녔어도 자취방을 7번이나 옮길 정도로
짠물 아지매들에게서 홀대를 받아서
인천은 영 마음에 ㅎㅎ
*** 이 사진은 내가 찍은 사진이 절대 아님. 1969년도 서울 사진인데 당시 주한미군 네일 미스로프가 찍은 사진 ***
서울에 도착하니 별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형님 사는 쪽방은 강화집 보다 훨씬 열악해서 별루여서 곧장 아버지하고
밤에 남산을 올라갔다. 형님이 함께 갔는지 전혀 기억이 없어. 고모도 이미 초등학교 교사가 되어
직장에 가셨는지 기억도 없구!
와! 케이블카를 타고 남산 꼭대기를 올라가니까 하늘에도 별이 있고 땅에도 별이 반짝였다.
특히 한강다리들에 켜져 있는 불빛들이 얼마나 신기했는지!
우리가 살던 동네엔 내가 초딩 6학년 때 전기가 들어왔나?
강화다리가 준공되고 나서 전기가 들어온다고 전보선대가 세워지고
옛날 한옥집 서까래에 애자를 달고 그 위에 전기선을 감아서 방마다 전등불이 들어온 날
얼마나 마음이 설레었을까? 그것도 기억이 가물가물.
전기가 들어왔어도 아직 TV를 살 여력이 없었던 시절
김일 레슬링 중계가 나온다는 연락을 어떻게 받았는지 온 동네 사내아들에게 소문이 돌았다.
그 중계를 보려고 우리 동네에서 대여섯명이 현병이네 집까지 가기도 했다.
현병이 큰 형님이 심도직물 다니면서 잘 살게 되었는지 집도 제법 규모를 갖추고
그 귀하디 귀한 텔레비젼을 소장하고 있었다. 울 집에는 라디오만 있었다.
선학골 동네에 살고 있는 작은 아저씨네 건익(7회) 찬익(9회) 용국(10회) 등과 함께 주로 다녔지.
건익(5촌)과 찬익(7촌)은 친척 아저씨이기에 늘 함께 지냈고 용란 동생 용국은 그보다 가까운 이웃사촌이기에
맨날 붙어다녔다. 어린시절 이 세명을 빼놓으면 놀이가 안될 정도였을 정도로 소중한 놀이친구였다.
건익아저씨는 서울에서 체육교사를 한다고 하는데 거의 20여년 이상 못 만나고 찬익아저씨는 자주 만나고
용국이도 20년 이상 못 만났다. 용란을 통해서 소식을 듣기는 해도 사는게 바빠서 이러고 있으니 ㅠㅠ
현병이네 가는 길은 대월학교 가는 길과 거리가 비슷했어도 문제가 안되었다.
우리는 레슬링 중계를 보기 위해서 신작로길을 따라 걷고 또 걸었다.
다행히 보름달이 뜨면 문제 없는데 그믐이라도 걸리면 바가지에 관솔을 켜들고 랜턴 삼아서 길을 비추고
걸었다. 목적지에 도착해서 보면 이미 소문듣고 달려온 꼬마시청객들로 방은 만원이고 우리는 친절하게 열어둔
문을 통해서 김일이 승리하는 것을 보며 환호성을 지르곤 했다.
서울에서 이 극장을 보았던 기억도 없고
울 아버지가 극장을 가실 양반도 아니고.....
이 극장을 보면 생각나는게 강화극장이다. 초등학교 때도 "의리의 사나이 돌쇠"
같은 영화가 들어오면 단체로 귀경갔었는지 모르지만
그 극장에는 이상하게 매일 비가 왔다. ㅎㅎ
밖에는 날씨가 좋기만 한데 극장 안에만 들어가면 비가 와서.....
저 극장 사진을 보면 서울도 별거 아니었던 것 같다. 지금도 별거 아니지만 ㅎㅎ
왜 초딩시절에는 서울에서 왔다고 하면 대단한 거 같구
주눅이 들고.....
울 나라가 이렇게 요상한 꼴을 하고 있는게 다 서울 탓이라구
노통이 뭔가 해보려다 서울놈들에게 되통 당했던 것도 불행한 사건인 것 같다.
이 사진 속에 보이는 저 건너편이 여의도 같은데 맞는지 모르겠다.
개발되기 전 여의도!
그 때 땅을 좀 사 뒀어야 하는 건데 ㅎㅎ
1969년 서울역 사진이니 저 인파들 속에 나와 울 아버지도 있을지도 모른다.
형님 셋방에서 하루밤을 잔 우리는 서울역에서 인천행 열차를 탔다. 아버지는
그 무더운 여름날 아이스케키 하나 안 주셨으니 난 심술이 나지나 않았을까?
지금 울 아들 현우 녀석을 데리고 다녔으면 심술 때문에 ㅎㅎ
아이구! 상상하기도 싫다.
심술이 나도 비빌 언덕이 있어야 비비지
무서운 아버지가 나를 데리고 서울 구경을 시켜주는 것만 해도 감지덕진데
어딜 먹을 것을 사달라고 떼를 쓸 수 있겠는가!
그래도 인천역에서 내려서 연안부두로 강화행 연락선을 타러 가서는
드디어 떼를 쓰고야 말았다.
뭐를 사달라고 하자 아버지는 안된다고 하고
난 심술을 부렸고 어디론가 달아났다.
그러자 아버지는 나를 버리고 그냥 가시는 것이었다.
무섭던 아버지도 다른 사람 보는 앞에서 아들을 때리지는 않으셨으니 남 눈치는 보시는 양반이셨나 보다.ㅎㅎ
나는 결국 포기하고 눈물을 훔치며 아버지하고 배를 타고 다시 갑구지 포구로 돌아올 수 밖에.....
이 글을 쓰면서 문득
아버지는 그 때 어머니의 흔적을 찾으시려고 여행을 떠났다는 생각이 든다.
어머니가 위암말기로 단말마적 고통을 호소하시며
병원에서도 포기하자 어머니를 모시도 단 둘이
마지막 여행을 떠나셨다고 한다.
그게 남산 케이블카를 타고 서울구경시켜주고 .....
인천 자유공원 구경시켜주고 .....
** 이 사진은 우리집 앞에서 찍은 어머니 사진
형님이라면 1956년 정도....나라면 1959년 정도
사랑채를 새로 짓고 아직 기와를 올리지 않고 초가를
이었다.
아참! 나도 자유공원도 갔었겠군! 근데 기억이 왜 전혀 없지....
연안부두에서 배를 타고 강화집으로 와서
어머니를 저 세상으로 보내셨다.
먼저간 마눌의 분신
그것도 병으로 시달려서 말라비틀어지고
얼굴엔 버즘이 피고
살피둥은 전혀없는
둘째 아들을 데리고 그 마지막 여행코스를 답사하셨던 아버지의
마음을 어찌 내가 알 수 있으랴!
이 서울역에는 울 넷째 할아버지가 철도 기술자로 근무하셨던 곳이다.
기차가 도착하면 자그마한 망치 하나 가지고 열차바퀴를 두드리며 지나가는 기술자
두드리는 소리만 듣고도 어디가 고장났는지 알 수 있던 유능한 기술자였단다.
넷째 할아버지가 서울에 사시니 아버지도 초등학교 때 서울로 유학을 가신 모양이다.
하지만 가난했던 시절 넷째 할아버지네도 먹고 살기 힘든데 큰 조카가 와서 있으니
할머니는 얼마나 힘들었을지 짐작이 간다.
남자들은 출근하면 그만이고.....할머니는 살갑게 대해주지 않았고 춥고 배고픈 학교생활을 견디다 못한
아버지는 등 따스고 배부른 고향으로 도망치듯 중학교 때 내려왔단다. 그리고 16살 때부터 쟁기를 잡기 시작햇고
이날 이때까지 농사꾼으로 살아오고 계시다.
울 할아버지는 엄하딘 엄한 증조할아버지의 폭정(?)에 시달리다 못해 전국을 떠돌아다니는 보부상도 해보셨단
다. 아마 용란이하고 울 사랑방에서 들었던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일제시대부터 전국을 여행하면서 할아버지가
경험했던 삶이었을 것이다. 나도 수없이 듣고 또 들었기에.....
결국 증조할아버지에게서 재산관리권은 할아버지에게 넘어오지 않고(물론 상속은 그렇게 했지만) 한 대를 건너뛰어
아버지에게 넘어왔다.
1968년 10월 28일 중소기업은행 수원지점 신축이전을 알리는 현수막이 전혀 낯설지 않다. 그러니까 이때 우리는 초딩 3학년인가?
이게 서울 남대문 사진인지 동대문 사진인지 아니며 수원 팔달문 사진인지 알 수가 없다.
울 강화에도 남문 북분 서문 동문이 있지. 선환이 말대로 월곳리 신당리 대산리 사람들은 모두 동문을 통해서 강화읍내로
들어가고 나가곤 했지. 그래서 자연스레 천주교회 수녀병원을 이용했을 것이라고....미영이 말대로 수녀병원에서는 좋은 약으로 저렴하게 치료해 주었을 것이고.....지금 그 수녀병원은 운영을 하지 않고 성당에서 교리실로 운영하던 것을 보았었는데.....
똑똑한 인천교구 주교라면 그 병원을 다시 복원시켜도 오히려 관광상품이 될 텐데....."그리스도의 왕 의원"
문화선진국이 되려면 바로 이런 것들부터 시작해야겠더라고 .....
강화성공회 앞에 종각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우리가 초딩졸업하면서 그 앞에서 졸업사진을 찍었는데.....
그 종이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내가 강화를 오래 떠나 있기도 하고 관심도 없었었는데
왠지 궁금하다.
그 종의 유래에 대해서는 강화사람은 다 아는 내용이니 생략하고.....
그 종 뒤에 있는 강화성공회가 1900년도 초에 영국선교사가 지은 최초의 한옥형교회다.
백두산에서 벌목해서 압록강에 뗏목으로 만들어서
띄워서 서해바다를 통해 강화도로 가지고 와서 치목(나무 다듬기)한 다음 세운 집인데 건축학적으로 상당히 가치를 인정받아서
전국의 건축학과 학생들은 반드시 답사를 해본다. 백두산 낙락장송 그러니까 낙송이다. 옹이도 별로 없이 쭉쭉 자란 그 나무들은
지금도 최고의 목재로 인정받고 있는데 영국에서 온 선교사가 어떻게 그 나무의 가치를 알며 또 한옥으로 성당을 지으려고 했을지
정말 존경스러운 마음이 든다. 우리 다음에 만나면 손에 손잡고 함께 구경가보면 어떨까? ㅎㅎ
역사와 문화의 고도인 강화도에서 태어나서 어린시절을 살았다는 걸 다시 한 번 감사하게 생각해 본다.
힘든 시절도 있었지만 그 시절이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을 수 있다는 것도 감사하고.....
언제나 찾아갈 수 있는 고향이 있다는게 감사하고.....
이쁜 친구들(만나면 전혀 아닐까? ㅎㅎ)과 초딩시절을 함께 보냈고 그 시절을 공유하며 살아가는 것도
감사하고.....
난 아들을 재울 때
"어머님 은혜"
"고향의 봄"
등 같은 노래를 불러주곤 하는데 어느새 어릴 때 고향집 전경이 떠오르고
할머니 할아버지도 보고 싶고 그냥 옛날 고향산천을 그리워하다가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는 시절을 그리다가는 어느새
눈가에서 눈물이 주루룩 베게잇이 축축해 지곤 한다.
그러다가 아들 보다 내가 먼저 잠들기 일수고~~~
첫댓글 마자!마자! 그 당시 강화에서 서울을 가려면 비포장 도로를 합승버스를 타고 다녔지! 또 김포와 강화는 비교도 되지 않았지 ! 강화땅 1 평 팔면 김포땅 3평은 사고도 남았다는 말도 있었고, 갑구자 엠보드는 1968 년 10월인가 강화대교가 세워지면서 자취를 감췄고, 엠뽀드라고 불려진 동기는 나도 잘모르겠어, 지금은 카페리호라 부르지 ! 그리고 강화동종은 강화초등학교 위 고려 궁지로 자리를 옮겼단다! ㅋㅋㅋ 김일 레슬링 대산리 울 동네에서 유일하게 텔레비젼 있는 집은 조경숙 선생님 댁이였지! 김일, 천규덕 외국선수는 압둘러 부쳐, 타이거 마스크 등 그땐 왜그리 레슬링하는 날엔 마음이 들뜨곤 했는지 !! 계속 연재 해주게 !
강화동종이 고려 궁지로 옮겨졌군! 선환이가 더 기억력이 좋네~ 합승버스 기억나네.....1968년에 다리가 세워졌구먼^^ 와우^^ 레슬링 선수 이름을 아직도 다 외우고 있다니.....역시 스포츠맨 답군. 재미없어도 재미있게 읽어주게. 그럼 함 계속 써보겠네 ㅎㅎㅎ
"보드" 는 영어로 보트(boat)에서 나온거 가구먼... 우린 현병이네로 레슬링 보러갔는 데..
아니 그럼 우리가 거기서 만났었겠군. 이거 재미있는데
난 유은집에서 "여로" 본기억이 나는데 시간만 되면 쪼르르 려가 마루에 텔레비젼 켜놓고 옹기기 모여앉아 숨죽이며 바보신랑 섬기는 태현실을 지켜보며 눈물도 찔끔찔끔 찍었지 . 은이가 얼마나 부럽던지 그사이에 남친들은 그 먼곳까지 가서 레슬링 선수들을 보았군. 남자 여자 성향이 이런데서도 차이가 나누먼
ㅎㅎ 그랬구나! 은이네도 그 때 티비가 있었었군~~~ 여자친구 집이라서 부끄러워 안 갔나? 아니면 여로가 좀 후대적 연속극인가? 아 기억력의 한계여~~~
매일 인찬이의 글이 궁금하여 늦은 밤에도 카페문을 두두린다. 그리고 선환이 명선이의 잦은 방문 또한 고맙고 인찬아 기행문 자알 읽었다 . 어린 나이에 호랑이 아버지와의 여행이 고행길이었겠지만 그래도 너의 아버지는 앞서가시는 대단한 분이셨어. 할아버지도 대단하신 학자셨는데 증조부할아버지가 자식보다 손주를 앞세우셨구먼 그래서 할아버지가 한이 많으셨던것 같아
친애하는 용란!! 부회장님 ! 번개팅 한 번 ////
아! 란이가 부회장님? 에공 조직사회에 빨리 적응해야되는뎅^^
경선아 " 노동은"이가 뱀 잡아 하교길 길목에 놓은 얘기좀 해봐라
친구들이 빨리 이야기 바톤을 이어받아야 하는디 큰 일이닷
그럼 명절지나고 31일 토요일 아님 일요일 덕유산 눈산행과 인찬이의 황토한옥집방문 번개는 어떨지
그날 맞춰 눈이 와야허는디~~~눈이 30센티는 와야허는디 ㅠㅠ 그럼 친구들이 왔다가 못 가는데 ㅎㅎ 사업하는 명선이는 신중하게 결정하슈! 난 대환영이지만.....
달력좀 보고요...
^^ 그 옛날..연속극..여로..레슬링 시간여행을 타고 거슬러 올라가 보는 그 시절의 그 모습들...그립다.^^
학교 갔다가 집에 오는길은 동은이 땜에 돌머리 우리친구들은 늘 괴로웠어.....뱀,개구리 잡아 길에 늘어 놓고.......돌 던지고등등 장난이 힘했는데....지금 기억하나 몰라 동은이..... 원곤이는 고무줄 마이 짤라서 다 어디다 썼지????/
에고~~ 그런 일이 있었군! 동은이가 돌머리 여자친구들을 무척 좋아했난 보다 ㅎㅎ 원곤이도 벌써 여자친구들에 대한 감정이 남달랐군! 그럼 난 뭐야? 완전 쑥맥이잖아! 사실 그랬으니까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