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빨리 안 따라와? 늦게 오면 놓고 간다?"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던 나는 저 뒤에서 다리를 일부러 크게
절뚝거리며 천천히 따라오고 있는 청명이 녀석을 노려보았다. 청
명이 녀석은 나에게 좀 심하게 정강이를 차였는지 한참이나 아파
서 쩔쩔맨 다음에 날 따라 걸음을 옮겼는데 삐쳤는지 볼이 퉁퉁
부어 있었다.
하긴, 왕자라는 녀석이 언제 정강이를 차여봤겠는가? 그래도 내
가 누나가 되었기에 대들지는 못하고 혼자 투덜투덜대는 게 고작
이었다. 그리고 나는 녀석의 태도를 이해해 주기보다는 녀석의 속
좁음에 은근히 부아가 났다. 그래서 녀석이 또 한 번 투덜투덜대
는 소리가 들리자 저절로 눈이 치켜 올라갔다.
"쳇, 자기가 이렇게 만들어놨으면서... 내가 왜 이런 신세가 되
어야 하지?"
"너, 빨랑 안 올래?"
투덜대던 청명이는 내가 다시 한 번 눈을 부라리며 목청을 좀
더 높이자 그제야 입을 다물고 속도를 좀 더 빨리했다. 하지만 그
래도 내가 보기에는 느렸기에 나는 그에게 다가가 손목을 잡고
거칠게 잡아당겼다.
"빨리 좀 와!!"
"어, 어어어....."
그렇게 청명이를 이끌고 걸음을 빨리하던 나는 문득 떠오른 생
각에 발걸음을 멈췄다.
'혹시... 저쪽에서 안 좋은 일이 일어나는 거라면, 이대로 막 가
는 건 안 좋겠지? 음... 마나가 절반 넘게 찼으니까 마법을 사용해
서 기척을 죽이는 게 좋겠어.'
속으로 결론을 내린 나는 청명이를 돌아보았다.
"야!!"
내 얼굴이 굳어 있어서 청명이가 긴장했는지 내가 부르자 움찔
놀라는 기색이었다.
"으응?"
"너 혹시 네 몸을 지킬 수련 같은 거 했니? 검술을 배웠다든가,
아니면 호신술 같은 거 배운 적 있어?"
그러자 녀석이 순순히 고개르르 끄덕였다.
"응, 인간 세상을 구경하려면 자신의 몸 정도는 지킬수 있어야
한다고 숙부님이 말씀하겨서 권법과 각법을 좀 배웠는데?"
"오, 그래? 잘됐다. 그럼 네 기척을 죽일 수 있어?"
혹시나 청명이까지 내가 마법을 걸어줘야 하는 게 아닌가 걱정
했던 나는 안도감을 느끼며 물었다. 그러자 이 녀석이 삐친 게 아
직 안 풀어졌는지 내가 묻는 말에 대답은 안 하고 오히려 틱틱대
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왜?"
나는 이마에 힘줄이 하나 솟아오르는 걸 느꼈지만, 어차피 청명
이가 알아서 나쁜 것도 아니고 청명이 스스로가 조심하면
더 좋을 것이란 생각이 들어 순순히 설명해 줬다.
저쪽에 안 좋은 일이 일어나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 사전에 조
심하자는 거지. 할 수 있어, 없어?"
그제야 청명이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몰래 다가가는 건 한 번도 안 해봤지만, 한번 해보지 뭐."
녀석의 대답이 못 미더웠지만 나는 마나를 조금이라도 아낄 수
있다는 생각에 청명이 스스로 기척을 죽이도록 했다. 그래도 한
번 더 다짐하는 건 잊지 않았다.
"기척을 최대한 죽여야 해. 알았지?"
내가 되게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자 청명이는 그제야 사태가 심
각할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는지 저도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최대한 조심할게."
그의 대답과 표정에 만족한 나는 수풀을 헤치고 냄새가 나는
방향으로 조금 더 걸어갔다. 조금 더 가서 상황을 보아 기척을
죽이는 마법을 사용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때 바람이 한
번 더 내 쪽으로 불어오자, 그제야 나는 나의 궁금증을 솟게 만들
었던 냄새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혈향.....
비릿한 그 냄새는 바로 피 냄새였던 것이다. 일이 정말 심각하
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이대로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계속 가서 상황을 볼 것인가를 고민했다. 나 혼자면 몰라도 실력
을 확실하게 모르는 청명이까지 같이 있으니 약간 불안했던 것이
다. 하지만 썩어도 준치라고 용인데 별일이야 있겠나... 하는 생각
이 들면서 불안을 가라앉혔다. 그래도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나는 청명이에게 입을 열었다.
"청명아, 앞에서 싸움이 일어난 거 같아. 피 냄새가 나거든. 아까
우리가 있었던 저쪽까지 냄새가 나는 걸로 보아 꽤 심각한 것일
수도 있으니까 넌 여기서 기다릴래? 내가 상황을 살펴보고 올게."
그러자 청명이가 고개를 저었다.
"아냐, 나도 갈래."
"위험할지도 모르는데?"
은근히 떠보자 청명이가 굳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괜찮아. 이래 봬도 나도 꽤 능력있다는 소리 들었어. 충분히 조
심할 테니까 걱정 마."
"좋아. 그렇다면 우리 두 갈래로 갈라지자. 나는 위쪽으로 갈 건
데, 넌 어떻게 할래?"
"나는 이대로 가지 뭐."
청명이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아래에도 자신의 몸을 감출 수 있
는 수풀이 있다는 걸 알았는지 밑으로 가겠다고 했다.
"그럼 너, 바람을 다룰 수 있다고 했지? 바람으로 네 주위를 보
호하면서 가도록 해. 조심하는 거 잊지 말고, 기척 죽이는 것도 잊
지 말고."
"알았어."
청명이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나는 어느 정도 안심을 하
고 몸을 허공에 떠올렸다.
"레비테이션!!"
그러다 뭔가 한 가지 생각나자 나는 다시 청명이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아참, 지금부터 나에게 말을 걸 때에는 입을 사용하지 말고 의
지로 전달해라. 알았지?"
막 걸음을 옮기려던 청명이가 방해를 받아 화가 났는지 얼굴을
살짞 찡그렸지만 순순히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청명이가 나보다도 먼저 발걸음을 옮기는 걸 보고 나도 급히
내 몸에 마법을 걸고는 혈향이 나는 곳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컨실 마이셀프!!"
나의 몸을 투명하게 만듦과 동시에 내 기척도 완전히 가려주는
4클래스의 마법이었다.
청명이의 모습을 위에서 간간히 체크하면서 그보다도 앞서서
날아가자 얼마 지나지 않아 혈향이 점점 짙어졌고 그 근원지가
눈에 보일 무렵에는 금속이 부딪치는 것과 같은 음향 소리까지
들리고 있었다.
'누가 싸우고 있나 봐.....'
숲을 가로지르는 듯한 길 위에 예전에 무협 영화에서 가끔 봤
던 마차가 서 있었고 그 주위에는 십여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피
를 흘린 채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 쓰러진 사람들과 일행으로
보이는 다섯 명의 사람들이 검은색 옷에다 복면까지 해서 눈만
내놓은 아주 수상해 보이는 다섯 명의 사람들과 대치 중이었다.
그리고 그들과 좀 떨어져서는 다섯 명의 금은 옷에 복면까지 한
사람들이 가만히 서서 싸우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과 대치 중인 사람들은 싸우는 모습이
무척 힘겨웠고 여기저기 피를 흘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벌써 많
이 다친 모양이었다. 저들을 도와줘야 할지 말아야 할지 내가 갈
등하고 있는 그 짧은 시간 동안 검은 복면의 다섯 사람은 자신들
과 대치하는 사람들의 목을 그어버리고 있었다.
'저게... 중국 무술인가 보군. 어쨌든 이제는 너무 늦었으니 나
중에 저 사람들을 묻어주기나 해야겠어.'
그리고 밑에서 저들을 살피고 있는 청명이의 모습을 힐끔 바라
보았다. 그는 이제 막 근처에 와서는 잔뜩 긴장한 채 수풀 뒤에
몸을 숨기고는 조심스레 사태를 관찰하고 있었다. 다행히 이곳에
와서 몸을 숨기는 동안 저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에게 기척을 들
키진 않은 모양이었다. 청명이도 안전하게 있다는 걸 확인한 나는
검은 옷의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우선은 저들이
사라져야만 나가서 살피고 시신도 묻어주고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갈 때까지 기다릴 참이었다.
몇몇 검은 옷의 사람들은 살아 있는 사람들이 있는지 확인하려
고 하는 듯 시신들을 일일이 들춰보며 들고 있던 검으로 찔러보
고 있었다. 그리고 마차 안에서도 곧 검은 옷을 입은 사람 하나가
나와서는 저쪽에서 가만히 서서 사태만 바라보고 있던 사람들을
향해 고개를 저어 보였다. 자신들이 찾는 것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러자 사태를 바라보고 있던 사람들 중 가운데 있던 사람이 -대
장이었는지- 자세히 보면 알아차리지도 못할 만큼 작게 고개를 끄
덕이더니 내가 있는 쪽과는 반대 방향의 숲 쪽으로 고개를 돌리
는 것이었다. 마치 그곳에서 뭔가가 나오기를 기다린다는 듯이. 시
체를 뒤져 보고 마차 안을 확인하더너 검은 옷의 사람들은 자신들
이 할 일을 다했는지 별도의 지시가 없었는데도 그 대장으로 보
이는 사람의 뒤로 가서 조용히 섰다.
'뭘 기다리는 거지?'
더 이상 검은 옷의 사람들이 움직이지 않고 계속 숲 쪽만 바라
보고 있자 나도 호기심이 생겨 그쪽으로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거의 20분쯤이 지났을 무렵, 숲 속에서 세 명의 사람들이 걸어
나왔다. 아마 검은 옷의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던 일행인 듯 그
들도 같은 검은 옷에 검은 복면의 사람들이었는데 한 사람이 앞
장서고 있었고 다른 두 사람이 뒤에서 자신들의 가운데에 어떤
여인을 끌고 오고 있었다. 앞장선 사람이 그 여인의 모습을 가렸
기 때문에 그들이 완전히 숲에서 빠져나와 그들의 대장으로 보이
는 사람 앞으로 가서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을 때에야 나는 그 여
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약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꽤 예쁜 부인이었는데, 무척 지친 안
색에 머리와 옷은 잔뜩 엉망인 폼으로 보아 도망치려다가 잡힌 듯
했다.
그녀의 몸을 거칠게 대장 앞에다 꿇려놓은 세 명의 사람들은
여인이 도망치지 못하게 하려는 듯 그녀의 뒤에 버티고 섰다.
"애들은?"
갑자기 그들 사이에서 조용하고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마 그 대장의 목소리인 듯했다. 그러자 여자 뒤에 서 있던 남자들
중 하나가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놓차고 말았습니다."
"귀찮게 됐군."
예의 그 대장과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그 대장은 여자에게
애들이 어디 있는지 물어볼 생각도 없는지 여자 뒤에 서 있던 남
자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러자 한 남자가 자신의 검
을 꺼내더니 여자의 등을 푹 찔렀다가 빼었다. 내 눈에 희미하게
보일 정도의 굉장히 빠른 속도여서 나는 순간적으로 그 남자가
무엇을 했는지 모를 정도였다.
심장을 관통했는지 여자의 가슴 부근에서 선홍색의 많은 양의
피가 흘러나왔고, 여자는 서서히 옆으로 쓰러져 버렸다.
하지만 그 여자 주위에 있던 검은 옷의 사람들 누구 하나 여
자를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다시 대장에게만 시선을 보내고 있었
다.
'이런, 그 아이들을 찾으려고 하겠구나. 이거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리겠는걸? 어떻게 하지? 그냥 이대로 뒤로 빠지는 게 좋지
않을까?'
애들을 놓쳤다는 부하의 대답에 귀찮음을 표시한 대장의 말과
지금 가지 않고 모여 있는 저들의 모습을 보니 그럴 것 같았다.
게다가 수색을 하려고 저 사람들이 흩어진다면 저들을 피하기가
어려울 것 같았고, 만약 저들과 마주치기라도 했다가는 우리를 가
만둘 것 같지 않았다. 사람들을 모두 죽인 것을 보니 증인을 없애
려는 듯 보였기 때문이었다.
'지금 여기서 멀어지는 게 낫겠어.'
생각을 정리한 나는 검은 옷 무리들을 주시하며 청명이를 부르
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내 눈에 대장이 뭔가 지시를 하다가 멈추
는 것이 들어왔다. 그와 동시에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
의 검 쪽으로 손을 가져가는 것이 보였다.
'이런, 들켰다!!'
나는 마법으로 기척을 아에 죽이고 있었으니 아마도 청명이가
들킨 것이리라. 이럴 때를 대비하여 한 가지 마법을 더 준비하고
있었던 나는 지체없이 마법을 구현시켰다.
'크리에이트 이미지!!'
환상 마법중에서도 고위 환상 마법으로 시작한 물론 촉각, 후
각, 청각까지 현혹시킬 수 있는 마법이었다.
"사형, 여기 피 냄새가 나고 있어요!!"
"이쪽인 것 같은데요? 가보는 게 어떨까요?"
예전에 무협 영화에서 봤던 청색 도사복 차림의 남자들을 십여
명이나 만들어내어 떠들게 했던 것이다. 마치 지금 이곳을 발견한
것처럼 소란스럽게 했다.
"누나!!"
아무것도 모르는 청명이가 자신의 뒤쪽에서 여러 명의 사람들
이 나타난 것에 놀라 다급하게 나를 불렀다.
"괜찮아. 내가 만든 환상이니까 너는 그냥 가만히 있어!!"
내 말에 일어나려던 청명이가 다시 그 자리에 주저 않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뒤에 도사 복장을 한 사람들이 몰려오기 시작
했다.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 모두 주의하도록 하여라. 너희들은
먼저 앞으로 가서 살펴보도록 하고 사제는 제자들을 단속하게!!"
"예, 사형!!"
중년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온 뒤 몇몇의 도사들이 나타날 듯
발자국 소리가 요란하게 나자 검은 옷의 남자들이 다급해졌는지
대장의 손짓에 재빨리 반ㄴㄴ대 편 숲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 속도
가 얼마나 빠른지 그들의 모습이 사라지는 건 정말 순식간의 일
이었다.
'저게... 이곳의 무공이로구나. 빨리 움직이는 방법을 신법이라
고 하지, 아마?"
순식간에 사라지는 그들의 모습에 감탄하고 있을 때 내가 만들
어낸 환상의 사람들은 죽어 있는 사람들의 곁으로 가서 신나게
떠들어대도 있었다.
"이럴 수가....."
"이렇게 참혹하다니....."
"이건 너무한 거 같습니다."
"누구 짓일까요?"
나는 검은 옷의 사람들이 사라졌지만 안심을 못하고 마법으로
주위의 기척을 살펴본 후 그들이 아주 멀리까지 갔다는 것을 안
다음에야 안심하고 밑으로 내려와서 청명이를 불렀다.
"청명아, 이제 나와도 돼. 그리고 너희들은 수고했으니까 그만
사라져 줄래?"
주위에서 아직도 떠들어대는 도사들에게 말하자 도사들은 그들
을 바라보며 숲에서 쭈뼛쭈뼛 나오는 청명이에게 살짝 웃어주고
사라졌다.(물론 내가 시킨 거긴 하지만).
"와~ 저들이 정말 환영이었단 말이에요?"
"그래, 사람들의 눈을 현혹하는 거야."
"정말 진짜 같아요."
그들이 환상인 게 아직도 믿겨지지 않는다는 듯 주위를 둘러보
는 청명이의 모습에 나는 피식 웃었다.
"그러니까 눈속임이지. 쉽게 속지 않는다면 그게 눈속임이니?
그건 그렇고 나 좀 도와줘. 이들을 묻어줘야겠어.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죽다니 가엽잖아?"
나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길을 벗어난 곳의 공터에 마법으로 큰
구덩이를 팠다.
"디그!"
그러자 청명이가 바람을 다스려 주위에 있는 시체들을 하나하
나 구덩이 안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이들은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요?"
"모르지. 그러나저러나 저 마차는 어떻게 하지? 그냥 여기에다
둘까?"
말은 도망쳐 버렸는지 보이지 않았고, 이곳에서 피 튀기는 싸움
이 있었다는 걸 증명하듯 온몸에 핏자국이 선명한 마차만이 홀로
남아 있었다.
"우리가 한번 살펴보는 건 어때요? 뭔가 알 수도 있을지 모르잖
아요."
청명이의 제의에 나도 호기심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던 터라
귀가 솔깃했다.
"그럴까? 그럼 우선 이들부터 묻어주고."
주위에 있던 시체들이 모두 하나 구덩이에 들어가자 청명이와 나
는 그 위에 흙을 덮고 무덤으로 보이게 둥그렇게 흙을 높이 쌓아
줬다.
"한 명 한 명 묻어줘야 하지만, 이곳은 장소가 넓지 않으니까
이걸로 봐주세요."
"부디 편히 잠드세요."
무덤을 앞에 두고 우리는 가볍게 고개를 숙인 뒤 뒤를 돌아 호
기심 어린 눈으로 마차를 바라보며 다가갔다.
"헤에... 이곳 마차는 입구가 뒤에 있구나. 내가 살던 곳의 마차
는 옆에 있는데... 어쨌든 꽤 큰 마차다. 어른만 해도 여덟 명쯤은
충분히 들어가겠구나."
마차의 겉모양을 이리저리 둘러보던 청명이와 나는 조심스레
마차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마차 안도 누군가가 뒤져 본 듯 잔뜩 흐트러져 있었는데 대부
분이 옷가지 같은 것들이었다. 꽤 괜찮아 보이는 것들이었기에 나
는 그들 중 깨끗한 것들만 골라서 챙겼다. 어차피 나는 이곳 옷차
림이 아니어서 이곳 옷을 따로 마련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꽁짜로 생기는 기회를 차버릴 내가 아니었다. 하지만 청명
이는 이런 내 모습이 못마땅하게 보였나 보다.
"누나, 지금 뭐 하는 거야?"
잔뜩 찌푸린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녀석의 표정에는 황당감마
저 어려 있었다.
"뭐 하는 거긴, 쓸 만한 걸 찾아내고 있잖아. 너도 가만있지만
말고 돈 될 만한 것들은 다 챙겨."
내가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자 청명이는 못마땅하다는
듯이 나를 나무랐다.
"이건 저들 것이잖아. 남의 것을 뒤지면 어떻게 해?"
"뭐 어떠냐? 저들은 이제 죽은 거고, 우리들은 이게 필요하단
말야."
"그래도 그렇지....."
"시끄러. 그럼 너 돈 있냐? 난 돈 하나도 없다고."
화가 나서 내뱉은 말에 청명이가 약간 멍청한 얼굴로 나를 바
라보았다.
"돈? 음... 보석을 약간 가지고 왔는데, 그정도로 모자랄까?"
청명이의 말에 나는 순간적으로 황당했지만, 그렇다고 이제 와
서 '응, 그래? 그럼 뒤지지 말지 뭐...' 라고 말하기는 싫어서 나는
내 주장을 계속 밀어붙이기로 했다.
"그러냐?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있는 건 다 챙겨."
"뭐야, 꼭 이래야 해?"
이렇게 해야 하냐고 묻는 듯한 녀석의 말에 나는 녀석이 왕자
였다는 것이 생각났다.
'그래, 왕자라는 녀석들은 다 저렇지... 세상 물정 모르는 녀석
같으니라구... 기회란 흔하게 찾아오는 게 아니라구!'
나는 한숨을 내쉬면서 입을 열었다.
"인간 세계에서는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한단 말야. 우리가
이 나라를 구경하다가 돈이 모자라거나 잃어버릴 수도 있으니까
미리미리 대비하는 셈 쳐. 게다가 우린 지금 이곳 옷을 입고 있지
않잖아. 넌 좀 이곳과 비슷한 옷을 입었지만 난 완전 딴 세계 옷
이잖아. 그러니 옷을 갈아입지 않으면 너무 튄다구. 튀면 얼마나
고생하는 줄 알아? 잔소리 말고 빨리 시키는 대로나 해."
그제야 청명이가 풀이 죽어서 보따리 속에 있는 것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생각 같아서는 시신들의 몸도 뒤져 보고 싶었지만, 벌써
다 묻어준 데다가 설사 아직 안 묻어줬다고 해도 그건 생각일 뿐
엄두도 안 나는 일이어서 나는 잠자코 옷가지들을 뒤졌다.
그런데 그 옷들 중에는 아이들이 입는 듯한 자그마한 옷도 여
러벌 끼어 있는 것이었다.
'아이 옷? 어라? 한두 벌이 아니라 꽤 많은데? 여기에 아이들도
있었나?'
의아한 듯 그 옷을 집어 바라보던 나는 그제야 아까 그 검은 옷
의 사람들이 하던 말이 기억났다.
"아차!!"
"왜 그래?"
뒤돌아서 열심히 마차 안을 뒤지고 있던 청명이가 나의 놀란
목소리에 의아한 듯이 돌아보자 나는 그에게 다급한 어조로 말했
다.
"아까 그 사람들이 대화하는 걸 들었는데 숲 속에 아이들이 숨
어 있다고 했어. 그 애들이라도 찾아서 도와주자고."
나는 서둘러서 지금까지 골라낸 옷가지들과 방금 내가 찾아낸
아이들의 옷가지들을 황급히 챙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청명이도 덩달아 급하게 일어나며 물었다.
"뭐야, 왜 이렇게 서두르는데?"
"곧 있으면 밤이니까 이대로 애들이 숲에 있다가는 위험할지도
몰라. 언제 그 검은 옷의 사람들이 수색할지도 모르고, 또 밤에는
위험한 동물들도 돌아다니니까 빨리 찾아내야지. 서둘러!!"
내가 급하게 말하며 마차에서 뛰어내려 숲 속으로 뛰어가자 청
명이가 뒤따라 달려오며 다시 물었다.
"마차는?"
"지금 마차가 문제야? 벌써 많이 어두워졌잖아. 시간이 없어!!"
최대한 빨리 서두르기는 했지만, 우리가 마차에서 나왔을 때에
는 벌써 해가 다 진 때였기에 숲을 얼마 들어오지 않아 하늘에는
달과 별이 떠버렸다. 물론 이 정도의 어둠은 나에게 별다른 방해
가 되지 않았지만 청명이는 나와는 다른 듯 주위가 어두워지자
나에게서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누나, 벌써 어두워졌어. 이래서는 찾기도 힘드니까 나중에 찾
는 게 어때?"
"안 돼. 애들에게는 밤이 위험하다고. 또 지금 얼마나 무서워서
떨고 있겠어? 잔소리 말고 빨리 좀 찾아봐. 야, 혹시 넌 기척을 감
지할 수 있는 능력은 없냐? 그러면 금방 찾을 수... 아, 이런....."
나를 만류하는 청명이를 이끌고 숲 안을 열심히 두리번거리며
빠른 속도로 걷던 나는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그 자리에서 ㅏㄹ걸
음을 멈춰 섰다.
"왜? 뭔가 찾아냈어?"
의아한 듯 내 곁에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청명이를 보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아, 나 왜 이렇게 바보 같냐? 나한테 기척
을 감지할 수 있는 마법이 있는데 그걸 깜박 잊고 있었잖아. 내가
왜 이러지? 나 지금부터 정신을 집중해야 하니까 방해하지 말아
라!"
청명이에게 정말 일방적이다시피 빠르게 말해 놓고는 그의 대
답도 듣지 않고 시동어를 외치며 정신을 집중했다.
"Detect Invisibility!!"
이 마법은 숨어 있는 생명체를 찾아내는 마법이기는 하지만 시
전자의 시야 내애서만 찾을 수 있다는 단점이 있기 때문에 내가
이 마법을 시전한 채로 아이들을 찾으러 다녀야 한다는 단점이
있었다. 아이들이 몇 명인지, 몇 살인지, 약한지 강한지 등등 아이
들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들을 찾을 수 있는 탐지
마법이 이것밖에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자, 가자!!"
청명이를 한 번 툭 치며 앞장서서 걸어가자 뒤에서 녀석이 투
덜대며 따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에? 또 숲을 헤매고 다녀야 하는 거야?"
"자, 가자!!"
청명이를 한 번 툭 치며 앞장서서 걸어가자 뒤에서 녀석이 투
덜대며 따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에? 또 숲을 헤매고 다녀야 하는 거야?"
"이번에는 금방 찾을 수 있을 테니까 조금만 참아. 이 어두운
숲에서 벌벌 떨고 있을 애들이 가엽지도 않아?"
"그거야 그렇지만....."
"더 이상 말 걸지 마라. 정신 사납다."
"알았어."
청명이는 풀이 죽은 목소리로 대꾸한 뒤 입을 다물고 계속 뒤
에서 조용히 따라왔다.
하지만... 반달이 밤하늘 가운데로 올 때까지 아무리 숲을 뒤지
고 다녔어도 아이들은 찾아낼 수가 없었다. 북두칠성-그러고 보니
참 오랜만에 보는 별자리였다. 내가 살던 곳은 북두칠성이 존재하지 않
았던 것이다-내 머리 위에서 빛나는 걸 보니 새벽 3시는 된 듯했
다.
결국 난 마나도 많이 써버린 데다가 숲 속을 오래 헤매고 다녀
지쳐 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지칠 때까지 아무 말 안 하고 나를
따라서 같이 다녀준 청명이가 고맙기도 하고 또 미안하기도 했다.
"청명아, 여기서 좀 쉬자!!"
어두운 숲을 하도 돌아다녀서 도대체 내가 있는 곳이 어딘지는
모르겟지만, 꽤 굵어 보이는 큰 고목 밑에 약간 평평한 공터가 있
고 풀도 적당히 나 있는 걸 발견한 나는 그곳으로 청명이를 끌고
갔다.
"어우, 넘 힘들다."
너무 지쳐 버린 나는 고목에 등을 기댄 채 하늘을 바라보았다.
새벽이라서 그런지 북두칠성이 유난히도 가깝게 보여 손만 뻗으
면 닿을 것 같았다.
'하아, 저게 얼마 만에 보는 북두칠성이냐... 아까까지는 애들
찾느라 정신이 없어 저걸 굉장히 오랜만에 본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네.....'
아직 과학이 발달한 시대가 아니라서 그런지 별들이 에스라 왕
국에서 보던 것처럼 무척 밝게 보였다.
내 옆에서 주저앉은 청명이가 다리를 두드리며 나를 쳐다
보았다.
"누나, 이제 어쩌지?혹시 애들이 벌써 숲을 벗어난 게 아닐
까?"
그래도 다리 아프다고 투덜대지 ㅇ낳고 애들을 걱정해 주는 청명
이가 기특해 보여 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그럴지도... 넌 괜찮아? 힘들지는 않구?"
"나? 아, 이 정도야 뭐....."
청명이가 내 얼굴을 마주하기 어색한지 얼른 자신의 다리 쪽으
로 시선을 돌리며 말끝을 흐렸다. 그 못브에 나는 더 진한 미소가
나왔다.
"착하네? 힘들 텐데 투덜대지도 않구."
"내가 앤감?"
"후후후, 하긴... 너도 성룡이지?"
"그나저나 이젠 어쩔 거야? 그렇게 열심히 애들을 찾아다녔는
데 찾지도 못하고....."
청명이가 화제를 돌리려는 것인지 다시 애들 이야기를 꺼내자
나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글쎄... 이렇게 오랫동안 찾아다녔는데 찾지 못한 걸 보면...
네 말대로 숲에 없는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아이들끼리 숲을 벗어
났다고는 생가가 안 되고... 혹시, 아까 그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에
게 발각된 건 아닌지 모르겠네....."
"좀 쉬었다가 다시 한 번 찾아볼까?"
내가 어두운 얼굴을 해서 그런지 청명이가 약간 걱정스런 어
조로 물어왔다.
"아냐, 이렇게 찾았는데도 없으면... 이곳에 없는 거 같아. 어쩔
수 없지. 그 애들이라도 도와주고 싶었는데 우리와는 인연이 없나
봐. 그냥 날이 밝으면 우리는 우리 갈 데로 가자."
"괜찮겠어?"
아에 몸을 내 쪾으로 돌리며 묻는 청명이에게 나는 빙그레 웃
어 보였다.
"응 괜찮아. 나도 내 나름대로 열심히 그 애들을 찾기 위해 노
력했다고 생각하니까... 단지 그 애들을 돕지 못한 게 좀 아쉽기
는 하네."
"그 애들도 괜찮겠지 뭐... 너무 걱정하지 말고 그렇게 생각해."
청명이는 이제 자기도 편안히 앉고 싶은지 고목 밑둥치로 자리
를 옮기더니 두 손을 깍지 껴 뒷머리에 대고 고목에 등을 기대려
고 하다가 갑자기 뒤로 넘어갔다.
"우악!!"
"청명아!!"
놀라서 몸을 일으키니 청명이의 상체가 고목 안으로 들어가 있
었다. 청명이를 위하여 황급히 라이트 마법을 사용하여 주위를 밝
히고 바라보니 청명이가 몸을 버둥거리며 구멍에 끼인 상체를 빼
내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고목이 너무 오래되어서 그런지 밑둥치
에 커다란 구멍이 있었는데 그 구멍이 수풀과 낙엽, 나뭇가지들로
인해 가려져 있어서 청명이나 나나 둘 다 보지 못한 것이었다.
"도와줄게!!"
뒤로 넘어간 상태에다 머리가 어디여 걸렸는지 잘 나오지 못하
는 청명이를 위해 손을 잡아서 당겨주자 그제야 구멍에서 머리를
빼낼 수 있었던 청명이는 머리에 묻은 먼제를 털기 위함인지 고
개를 흔들어댔다.
"아휴, 놀랐네."
"그러게, 웬 구멍이라니?"
청명이가 다친 곳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나는 갑자기 발견한
고목 밑둥에 생긴 큰 구멍을 신기하게 바라보다가 불빛에 언뜻
구멍 안에서 옷자락이 보이는 것을 보고 놀라서 좀 더 다가갔다.
"청명아, 이리 와봐!!"
청명이를 부르는 동시에 들어다보니 과연, 구멍 안에 사람이 있
었다.
구멍의 크기가 그렇게 크지 않아 어른은 들어갈 수 없었지만,
어린아이라면 충분히 들어가고도 남는 크기였던 것이다.
"찾았다. 애들이 여기 있었어. 얘들아, 괜찮니?"
"뭐? 애들이 거기 있어?"
구멍은 작아도 안의 공간은 넓었는지 두 명의 아이가 안에 나
란히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그런데 겁에 질렸는지 내가 말을 걸
었는데도 꼼짝도 하지않고 가만히 있기만 했다.
"애들아, 괜찮아. 도와주려고 왔어. 아휴. 여기 있는 걸 왜 못 찾
았을까? 어서 나와!!"
나느 ㄴ내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애들을 직
접 끌어내지 않고 그들이 스스로 기어나오길 바라면서 계속 말을
걸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계속 반응을 보이지도 않고 나올 생각도
하지 않았다.
"너무 겁먹은 거 아냐? 우린 나쁜 사람 아니니까 나와도 돼. 나
쁜 사람들은 다 갔어."
조금 기다려도 애들이 나올 생각을 안 하자 청명이가 몸을 굽
혀 구멍 안을 바라보며 말을 건넸지만, 그래도 애들이 가만히 있
자결국 손을 뻗어 애들을 건드렸다.
"얘들아? 어?"
청명이의 놀란 외치을 듣자 나는 곧바로 청명이의 옆으로 가서
몸을 구부려 안을 들여다보았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청명이는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 애들, 되게 굳어 있어. 너무 오랫동안 쭈그리고 앉아 있어서
그런가?"
청명이의 말에 왠지 불안함을 느낀 나는 외쳤다.
"나무를 부숴. 구멍을 넓혀서 애들을 빼내자!"
나의 외침에 청명이는 손바닥으로 강하게 구멍의 바깥 부분을
쳐대기 시작했다.
탁~!! 탁~!!
나무가 썩어 있어서 그런지 청명이의 손짓에 가볍게 부셔져 나
갔고 덕분에 구멍은 점점 커져서 아이들의 모습을 완전히 드러내
기 시작했다.
"됐어. 이 정도면 충분히 애들을 꺼낼 수 있겠어!!"
구멍이 아까보다 두 배 정도로 커져서 어른도 쉽게 드나들 수
있을 것 같았기에 나는 청명이를 멈추게 하고 조심스럽게 손을
넣어서 아이들을 밖으로 꺼내었다. 그 애들은 붉은 옷을 입고 있
는 여아와 파란 옷을 입고 있는 남아였는데 열 살도 채 되어 보이
지 않은 어린아이들이엇다. 생김새도 비슷한데다 나이도 같아 보
이는 게 이란성 쌍둥이거나, 아니면 연년생인 남매가 분명했다. 둘
은 마치 자는 것 처럼 눈을 감고 있었는데 몸이 무척 차가운데다
맥박도 뛰지 않았다.
"꼭 자는 것 같네. 어렵게 찾았는데 죽다니... 이 애들도 참 안
됐다."
청명이가 아이들의 머리애 붙은 먼지를 조심스레 털어주면서
중얼거리더니 나를 바라보았다.
"이 애들... 왜 죽었을까?"
"모르지... 내가 이런 데 전문적인 지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에휴, 아까 이 애들을 왜 못 찾아냈는지 이제야 알겠군. 내가 시전
한 마법은 생물을 찾는 거였으니, 이미 죽어버린 애들이 내 마법
탐지에 걸릴 리가 없었지....."
"이 애들... 묻어줘야지?"
다시 아이들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묻는 청명이의 말에 나는 주
위를 둘러보며 건성으로 대꾸했다.
"그래야지. 이렇게 된 거 여기에다 묻어줄까?"
"어, 누나? 이것 좀 봐봐."
"왜?"
청명이의 부름에 의아함을 느끼며 그를 돌아보자 그는 남자 아
이의 손에서 뭔가를 빼내고 있었다. 나는 몰랐는데 남자 아이는
그 물건을 두 손으로 꼭 쥐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무슨... 가문을 상징하는 패인 것 같은데? 금으로 만들어진 거
보니 꽤 괜찮은 가문이었나 봐."
청명이가 살펴보고 나에게 건네준 패는 금으로 만들어진, 내 손
바닥 절반만한 직사각형으로 만들어졌는데 위에는 고리가 있고
그 고리에는 붉은 술 두 개가 달려 있었다.
한쪽에는 한자가 하나 양각으로 새겨져 있었고 그 반대 편에는
학이 고고한 자세로 날아가는 모습이 양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그
러나 한문을 워낙 싫어해서 진로도 이과로 설정했던 나로서는 그
게 무슨 자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게 무슨 자지? 너, 아냐?"
청명이에게 묻자 그는 이것도 모르냐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
며 대답해 줬다.
"그것도 몰라? '은' 이라고 써 있는 거잖아."
"헤에, 너네는 이런 글자를 사용했나 보다? 잘 아는데? 하지만
우린 이거와는 다른 문자를 사용했다구."
다시 패를 바라보며 '이게 '은' 자였구나.....' 라고 생각하는
나에게 청명이가 의아한 듯 물어왔다.
"하지만 말은 잘하잖아?"
"그거야 주술을 사용한 거야. 대신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때
문에 다른 뜻이 숨겨져 있는 거는 못 알아듣지만, 그래도 대충은
알아들을 수 있지."
"그래? 누나는 별 희한한 주술을 다 알고 있네."
"내가 사는 곳은 주술이 무척 발달한 곳이었거든."
손 안에있는 패를 바라보며 이것을 팔면 얼마를 받을 수 있을
까를 고민하고 있던 나는 문득 차가운 땅바닥에 눕혀져 있는 아
이들이 눈에 들어오자 조용히 패를 들고 있던 손을 내리고 그 아
이들에게 다가가 그 옆에 쭈그리고 앉아 중얼거렸다.
"이걸 팔면 벌받겠지? 본가에 가져다 주는 것이 좋을 거야. 이
애들의 행방도 알려주고....."
내 말을 들었는지 청명이가 나와 반대 편에 와서 쭈그리고 앉
으며 대꾸했다.
"그래야지. 그러면 민이와 진이도 고마워할 거야."
"민이와 진이?"
생각지도 못한 청며이의 말에 내가 의아한 듯 그를 바라보며
묻자 청명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아마도 이 애들 이름인 것 같던데? 봐봐. 여기에 새겨져 있
어."
청명이가 가리킨 곳은 남자 아이의 왼쪽 팔목 안이었다. 거기에
검게 한문 한개가 새겨져 있는 것이었다. 여자 아이의 왼손을 바
라보자 그 아이의 손목 안쪽에도 역시 한문 하나가 새겨져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이 아이들 쌍둥이 인가 보다. 그러니까 아이들 손목에 이름을
새겨놓지. 그런데 누가 민이고 누가 진이냐?"
한문을 모르는 나는 어느것이 '진' 자이고 '민' 자인지 알 수가
없어서 청명이에게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여자 아이는 '진' 자가 새겨져 있고, 남자 아이는 '민' 자가 새
겨져 잇는걸?"
"그래? 그럼 여자 아이는 은진이고 남자 아이는 은민이구
나....."
그 아이들을 바라보며 가만히 있던 나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청명이를 바라보았다. 그가 내 생각에 찬성해 줄지 몰랐기 때문이
었다.
"청명아, 나 갑자기 어떤 생각이 떠올랐는데....."
"응? 뭔데?"
의아한 듯 나를 바라보는 청명이에게 나는 배시시 웃어 보였다.
왠지 내 생각이 재미있게 느껴졌기도 했지만, 아이들 앞에서 재미
있게 생각한 것이 미안하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있지... 우리 이 아이들로 변신해서 다니지 않을래?"
"응? 갑자기 무슨 소리야?"
청명이는 나의 말에 무지 황당해하며 쳐다보았다.
"이 아이들로 변신해서 다니자고. 왜냐하면, 우리는 너무 튀지
않니? 이곳은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을 가진 사람이 거의 대부분
인데 우리처럼 빨갛고 파란 머리에 눈을 가지면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받기 쉽상이지 않니?"
"그렇다면 우리가 검은색으로 바꿔서 다니면 되잖아."
"물론 그렇기야 하지. 하지만 우리가 이 아이들의 모습으로 다
닌다면, 혹시 이 아이들에게 왜 이런 일들을 당햇는지 알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이 애들의 가문에 어려움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도와줄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게다가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다니
면 주위에서도 관대하게 본단 말야. 응? 응? 이 아이들과 만난 것
도 인연이라면 인연이니까 그렇게 하자."
두 손을 모아 기도하는 모습으로 간절하게 말하자 청명이는 못
미더운 표정으로 나를 보더니 혹시나 하면서 입을 열었다.
"누나, 이건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재미있을 것 같아서
그러는 건 아냐?"
아니라고 하면 못 믿겠다는 표정인 걸 보니 간절하게 말하긴
했지만 표정은 웃고 있었나 보다. 나는 웃어 보이며 부정하지 않
았다.
"헤헤헤... 겸사겸사... 어쩔래? 할래. 말래?"
그러자 청명이는 머리를 긁적이며 생각해 보는 듯하더니 대꾸
했다.
"뭐... 누나 말대로 이 아이들을 도울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하
고 싶기는 한데... 나는 딴 모습으로 변신할 줄은 몰라."
거의 찬성하는 말투였기에 나는 기분이 좋아져서 얼른 대꾸했
다.
"괜찮아, 괜찮아. 내가 주술을 사용해서 너를 바꿀 수 있으니까
걱정 마. 그럼 할 거지? 하는 거다?"
내가 너무 좋아하자 청명이는 약간 얼떨떨한 모습이었다. 그리
고 이제 오ㅓㅏ서 거절할 수는 없었는지 내키지 않은 표정으로 고개
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지 뭐... 하지만, 그러다가 귀찮은 일에 말려들면 어
쩌려고?"
정말 그렇게 될지 모르는 일이었지만, 나는 그 모든 게 다 재미
있게 생각되어 자신만만한 어조로 말했다.
"괜찮아, 괜찮아. 혹시 알아? 우리 때문에 어려운 문제가 해결될
지도.... 후후훗, 그럼 이제 나는 진이가 되는 거고 너는 이제부터
민이가 되는 거다? 이제부터 너를 부를 때는 민이라고 부를게."
"그럼 나는... 그냥 누나라고 부르면 되는 건가? 하지만, 누가
누나거나 오빠인지 모르잖아."
"뭐 어때? 설사 민이가 오빠라고 해도 진이가 워낙 말괄량이라
오빠를 휘어잡아서 그렇게 부르게 했다고 둘러대면 되니까 넘 걱
정 마. 조ㅓㅎ아, 그럼 이제 아이들의 모습으로 바꿔볼... 려고 했지만,
지금은 내가 너무 지쳐서 안 되겠다. 우선은 푹 쉬고 나서 내가
회복된 다음에 하자고!!"
"그래, 그래. 다 좋은데 이 아이들부터 묻어주는 건 어때?"
청명이가 만사 다 포기한 어조로 제안하자 나는 그제야 아차
싶어 얼른 고개를 끄덕혔다.
"아, 그래. 깜밖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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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린이야기 제3부 제3화 나는진이,너는민이
ZIPㅉI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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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7.16 2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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