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아포리즘 ⑤
붓
그가 죽었다. 이름 없이 살다 간 무명의 화가다. 번듯한 갤러리에서 전시회 한 번 하지 못했다. 홀아비로 마흔일곱 해를 살다 간 그는 투병 중에 작업실에 흩어져 있는 그림들을 모두 불태워 달라고 당부하였다. 그가 숨을 거두고, 장례식장에 제일 먼저 찾아온 사람은 고인의 누이였다. 평소 연락 한번 없던 사람이었다. 여자는 눈물은커녕 부의금부터 챙기고 있었다. 그림 한 점 팔아보지 못한 그는 결혼도 하지 않은 채 당대의 평가에 연연하지 않는다며 오직 그림에만 몰두한 화가였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지만 막노동과 택배 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병이 악화되기 전까지 그림을 그렸다. 고인의 육신은 벽제에서 화장되어 양평 소나무숲에 잠들었다. 장례식이 끝나고 가까운 지인들이 그가 세 들어 살던 집을 찾아갔다. 그의 누이가 먼저 다녀간 듯 집은 깨끗이 정리되어 있었다. 그가 남긴 그림들은 유언대로 불태웠는지, 쓰레기로 버려졌는지 확인할 길이 없었다. 어두워지기 시작한 산 27번지를 마악 돌아 나오는데 말라 비틀어진 붓 하나가 눈에 띄었다. 무명화가의 짧은 생애가 남긴 마지막 유품이었다. 겨우내 눈 감고 있던 숭어가 어디선가 조용히 눈을 뜨고 있을 것 같았다.
놀이터
놀이터는 생성 변화의 찬란한 무대이다. 예측할 수 없는 몸들이 자유롭게 뛰노는 공간이고, 망둥어과 아이들이 정형화된 틀을 깨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장소이다. 놀이터는 아이들이 있을 때 비로소 정체성이 드러난다. 아이들이 없는 놀이터는 0의 공간이다. 숨 쉬지 않는 땅, 정지된 심장이다. 인근 초등학교에서 나온 아이들이 사방팔방 뛰어다니며 들뢰즈적으로 논다. 제멋대로 이어지고 끊어지며, 헤어지고 만나면서 아이들은 자신들만의 세계를 만든다. 획일적 규칙이나 정보에 얽매이지 않는 지유발랄이 놀이터를 설레게 하고, 춤추고 달리게 한다. 벤치에 앉아서 가만히 보면 얼핏 엉망인 듯 싶은데 무질서 속에 나름의 질서가 있다. 물론 질서는 고착된 법칙이 아닌 변화무쌍한 리듬이다. 리듬에서 이탈하지 않는 한 아이들은 마음대로 놀이터를 굴리고 놀 수 있다. 시소도 미끄럼틀도 그네도 스스로의 의지가 아닌 천방지축인 아이들의 즉발적 감각에 따라 움직인다. 그러므로 ‘놀이’가 떠나면 ‘터’만 남아 더 이상 율동하지 않는다. 무정형의 힘찬 호흡이 ‘터’를 살아 움직이게 하고, 아이들은 ‘놀이’를 통해서 고삐 물린 심장으로 무한을 향해 질주한다. 아이들이 가장 화려한 꽃으로 만개하는 순간이다.
빨랫방망이
빨래의 고수가 있다. 요즘은 세탁기에게 비법을 전수하고 뒷전으로 물러났지만 예전에는 그의 기술을 능가할 자가 없었다. 그가 형을 집행하는 장소는 주로 동네 우물가였다. 더러워진 옷가지를 가져다가 물고문을 한 다음 곤장을 휘둘러 제압을 하고 주리를 튼다. 대부분 징징거리며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읍소를 한다. 그러나 집행관은 실토를 할 때까지 사정없이 내려친다. 결국 옷가지들이 오물을 다 토하고 널브러지면 주리를 틀어 마지막 한 마디까지 뱉어내게 한다. 자백을 마친 옷가지는 곧바로 십자가형에 처해지고 마침내 부활의 새날을 맞아 백의의 천사가 된다. 시를 비롯한 모든 문화 예술의 창조 과정도 이와 같다. 요지부동의 고정관념이나 고집불통의 통념을 잡아다가 몽둥이질부터 해야 하는데 방망이 들기를 주저하는 자는 니체(Friedrich Nietzsche)의 망치 학교에 입학시키는 것도 한 방법이겠다. 오염된 옷은 썩은 내와 곰팡이만 낳는다고 하니, 시의 옷자락이 눈부시게 펄럭일 때까지 공유자가 많은 통념의 머리통을 두들겨 패면서 새 언어를 만드는 일이 글 쓰는 이들의 몫이겠다.
곰팡이
곰팡이는 선지자다. 위급 상황을 알리는 잠수함 속의 토끼 같은 존재이다. 산소가 부족하면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토끼의 상태를 보고 잠수함에 산소를 공급하던 시절이 있었다. 토끼는 시대의 안테나 역할을 하던 시인 부족과 비슷한 동물이다. 토끼만큼의 뛰어난 미모를 갖지 못한 탓인지 곰팡이는 어디서나 천대를 받는다. 열악한 환경에서 같은 역할을 하는데도 곰팡이에 대한 예우는 멸시와 혐오가 전부다. 벽지 너머 어둡고 습한 곳에서 비상시국을 알리지만 일상에 마취되어 사는 이들은 곰팡이의 존재를 눈치 채지 못한다. 견디다 못한 곰팡이의 정동이 폭발한다.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후각에 호소하여 실체를 알린 후에야 사람들은 벽지 너머를 의심하고 뒤늦게 문제의 원인을 발견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오늘도 여전히 일상 곳곳에서 곰팡이는 활약 중이다. 곰팡이의 발언을 기층민중의 거칠고 험한 항변으로 폄하하지 말고, 파국의 방향을 바꾸는 국면 전환의 기회로 삼았으면 좋겠다.
우상
‘영웅’ 제조공들이 있다. 주로 예술 및 학술 분야에서 활약 중인 그들은 적잖은 연봉을 받으면서 ‘영웅’을 제조하여 요긴하게 사용한다. 영웅의 이름을 딴 상을 만들어 돌아가며 타 먹기도 하고, 기념비와 동상을 세워 기리기도 한다. 동일 분야에서 이의를 제기하거나 비판의 날을 세우는 자가 있으면 뭇매를 맞는다. 집단 테러를 당하여 지탄과 매도의 대상이 되어 퇴출되는 경우가 많다. 영웅이 극복의 대상이 아닌 숭배의 대상으로만 존재하면서 방송, 언론, 대형 출판사들까지 제조공들을 거들고 나선다. 영웅은 고가의 상품이기 때문이다. 과거 완료형이 아닌 현재진행형이라며 온갖 칭송과 찬사를 이어가며 영웅을 팔아먹는다. 제조공들이 여러 차례 우려먹은 자료들을 가지고 유사하거나 같은 결론을 되풀이하면서 북 치고 장구 치는 사이 영웅은 슬며시 ‘우상’으로 등극한다. 그때부터 우상은 본격적으로 사람들에게 소비되기 시작한다. 그들의 말에 현혹된 얇은 귀들도 덩달아 우상을 소비한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조각조각 해체된 우상은 여러 토막으로 분절되어서도 목숨을 이어가니 대단한 생명력이다.
견인 줄
해남 도솔암 가는 길을 잘못 들어 차를 돌리다가 고랑에 빠졌다. 바퀴 밑에 돌을 괴고 몇 차례 시도를 해보았으나 소용이 없었다. 바퀴가 계속 헛돌고 뿌연 연기까지 솟아올랐다. 난감했다. 궁리 끝에 토문재 박병두 촌장에게 전화를 하여 구조 요청을 하였다. 재빨리 달려와 견인 줄을 연결하여 서너 번의 시도 끝에 차를 끌어올렸으나 이번에는 두 차를 연결한 쇠줄이 풀리지 않았다. 손으로 아무리 힘주어 돌려봐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할 수없이 박병두 촌장이 동네 후배에게 연락하였다. 만능인 후배가 도구를 가져와 엉킨 쇠줄을 풀었다. 처음 와보는 낯선 장소에서 당한 일이라 당황했으나 주위 사람들 덕분에 고랑에서 무사히 빠져 나왔다. 고맙고 미안했다.
십수 년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강원도 오지의 험한 산길을 달리다가 차량 가운데가 돌에 걸려 오도 가도 못했다. 주위에 인가도 없고 핸드폰도 터지지 않았다. 날은 점점 어두워 오는 데 이대로 있다가는 산속에서 밤을 새울 것 같았다. 슬슬 두려움이 밀려왔다. 그때 반대쪽 방향에서 비포장 돌길을 털털거리며 달려오는 자동차가 보였다. 하느님 같았다. 손을 들어 도와달라고 하였다. 사내는 아무 말 없이 차에서 내려 트렁크에서 견인 줄을 꺼내 내 차에 연결하였다. 헛돌기만 하던 차가 금방 빠져 나왔다. 익숙한 동작으로 앞뒤 고리를 푼 사내는 다시 가던 길을 갔다. 연신 고맙다는 말을 하였지만 사내는 별일 아니라는 듯 씨익 웃기만 하였다. 지금 생각해도 그는 석가 여래불이나 하느님이 현신하신 게 아니었나 싶다.
그동안 이런저런 일을 겪으면서 도움을 받은 적이 많았는데 앞으로 갚아나가야 할 일만 남았다. 부디 내 손이 크고 넉넉하여 난세를 건너는 목숨들에게 작은 징검돌이라도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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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일표
199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하였다. 시집 『매혹의 지도』, 『밀서』, 『나는 노래를 가지러 왔다』, 『중세를 적다』. 평설집 『홀림의 풍경들』. 산문집 『사물어 사전』 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