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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정기구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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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 30분
선우진 비서는 박동엽이 앉은 자리를 지나 안두희를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으로 안내했다. 12시 30분경이었다. 정오 뉴스를 끝낸 라디오에서는 흥겨운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장세정이 부른 「해방된 역마차」였다(어떤 인터뷰에서 안두희는 그 노래가 자신이 제일 싫어하는 노래였다고 말했다.)
ㄱ자형으로 꺾인 경교장 2층 계단을 올라가면 적십자병원 쪽을 향해 복도가 있고, 복도 왼쪽에 선생의 방이 있었다. 선생은 방 오른쪽에 놓인 책상 위에서 책을 보거나 붓글씨를 썼다. 백범은 그때 새로 출판된 그의 자서전인 『백범일지』(白凡逸志)에 자필 서명을 하고 있었다.
선우 비서가 미닫이문을 반쯤 열고 말했다.
“포병 사령부 안소위가 문안드리겠다고 왔습니다.”
“누가?”
“전번에 탄피 꽃병을 가져온 안두희 소위 말입니다.”
“응 그래! 가까이 오라고 해라.”
선우 비서는 안두희를 백범 거실에 안내하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이때 불안한 마음으로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박동엽씨가 안을 안내하고 내려오는 선우 비서에게 “지금 올라간 군인이 누구냐”고 물었다. 선우 비서는 ‘전에도 두어 번 와서 선생님을 면회한 사람’이라고만 하고 점심 준비 상황을 점검하느라 지하에 있는 식당으로 가 버렸다. 박동엽은 탐보하러 온다는 간첩 홍종만과 2층에 올라간 군인이 마음에 걸려 한편으로 2층의 동정을 엿들어 보려고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었으나 불행히도 라디오의 소음 때문에 조금도 동정을 알 수가 없었다.
악마의 총소리
그리고 1~2분이 지났을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랫소리를 가르며 날카로운 총소리가 들렸다. 소리를 제일 먼저 들은 사람은 2층을 향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박동엽이었다.
---------------------------주석
안두희가 2층으로 올라간 뒤에도 2층의 동정에 계속 귀를 기울이고 있었을 만큼 안두희를 미심쩍어 했으면서도 박동엽은 도대체 왜 선생의 죽음을 막지 못했을까? 비서가 대답이 없으면 직접 이름을 확인해 보거나 따라 올라가기라도 해야 하지 않았을까? 그는 1960년 6월 24일에서 26일까지 3일간 한국일보에 연재한 「백범 김구 선생 참변 목격기」에서 그 까닭을 이렇게 설명했다.
“나는 지금도 다음 몇 가지의 사고방식 때문에 안을 사전 방어하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한하고 있다.
① 26일 밤 거사가 사실인지 확인한 다음에 대비할 생각으로 비서들과 미리 내통하지 못한 점.
② 간첩 홍종만이 경교장에 온다는 것만 중시하고 군인에게 그다지 세심한 주의를 갖지 않은 점.
③ 26일 밤 사전 대비만을 계획하고 있었던 점.
④ 안이 오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을 뿐더러, 혹시 온다고 하더라도 공주행(公州行)이나 탐지하려고 오려니 한 점.
⑤ 안이 단독 행동을 하리라고는 거의 상상조차도 못한 점 등이었다.”
즉, 26일 밤에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알았던 바람에 낮에 암살이 일어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고 또 낮에 홍종만이 탐지하러 올 것이라는 말에 온 신경이 가 있어서 홍종만 아닌 다른 사람이 온다든가 또는 와서 혼자 범행을, 그것도 대낮에 하리라고는 상상을 못했다는 것이다.
------------------------------ 주석
“아 그놈이 안소위였구나!”
박동엽이 눈앞이 캄캄해지는 걸 느끼며 2층으로 뛰어 올라가려는 순간 경교장 정문 경비순경 조기행과 유원선 두 명이 현관문으로 뛰어들었다.
“방금 2층에서 총소리가 났어! 누구야!”
그들은 총소리가 난 2층을 향해 총을 겨누었다. 그때 안두희가 층계를 내려왔다. 안은 먼저 군모를 벗어 내던지더니 이어 계급장을 뚝뚝 때내었다. 그리고는 너무나 여유 있는 태도로 “선생은 내가 죽였다”며 권총을 든 채 손을 들었다.
박동엽과 이풍식, 이국태가 내려오는 안두희를 경비순경에게로 밀치고 2층으로 뛰어 올라왔다. 선생은 책상 모서리에 얼굴을 대고 무참히 쓰러져 있었다. 저격당한 탁자 위에는 선지핏덩이가 뛰는 듯했고 흘러내린 피가 다다미를 흥건히 적시고 있었다. 비서들, 집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달려들어 선생의 몸을 가누며 “선생님, 선생님” 목이 메어 불렀으나 이미 소용없는 통곡이었다. 경교장 바로 옆 적십자병원으로 내달렸던 이국태가 외과과장 이기섭을 데리고 왔다. 그러나 상처는 치명적이었다. 이기섭은 강심제를 놓긴 했지만 고개를 저었다. 선생은 차미 무슨 말씀이라도 하실 듯이 푸- 푸- 푸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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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중희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
민족정기구현회 www.koreakjh.net
“영감과 나라와 바꿉시다”
2층에 올라간 안두희는 과연 어떻게 선생을 쏘았을까? 돌아가신 선생과 안두희만 알 것이다.
안두희는 재판정에서 선생과 정치 논쟁을 벌이다가 선생이 기물을 던지며 모욕을 주는 바람에 순간적으로 그만 총을 쏘았다고 했다. 『시역의 고민』에는 소위 그 정치 논쟁의 내용이 상세히도 나와 있다.
여기서 안두희가 경교장에 들어서서 선생을 쏘고 계단을 내려올 때까지의 과정을 『시역의 고민』이 어떻게 묘사해 놓았는지 한번 살펴보자. 여러 증인들이 증언 한 바 이제까지 기술한 상황과 견주어 보면 암살자 일당들이 실제로 있었던 객관적 사실조차도 얼마나 대담하게, 또 가증스럽게 부인하고 도색하였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암살 장면을 묘사한 데서 드러나는 그들의 뻔뻔함, 교활함, 능수능란함을 명심하지 않고서는 우리는 결코 진상에 가까이 갈 수 없을 것이다.
경교장을 들어선 것은 오전 11시경이다. 분위기는 전날보다도 더 엉성하다.
‘오늘은 일절 면회사절’이라고 접종하려는 방문객을 물리치느라고 비서들은 바빴다.
나는 일찍 무상으로 출입하던 터인지라 안내를 새삼스러이 청할 것도 없었지만 일반 내방객을 물리치는 분위기를 돕기 위하여 “선생님 지금 안 계십니까?” 하고 예의를 차릴 수밖에 없었다.
비서는 나지막한 음성으로 자리를 권한다.
“잠깐 기다리십시오. 지금 선객이 계십니다.”
‘선객이라?’ 누구인지 궁금하다.
“어떤 손님이신가요?”
“문산헌병대 강대위입니다.”
강대위, 인사 교환은 아직 없었지만 이 응접실에서 여러 번 과면이 있는 사람으로서 나와 같이 ‘비밀당원이 아닌가?’ 하고 가끔 만날 때마다 느껴지던 사람이다.
약 30분간 아래층 응접실에서 기다렸다. 강대위와 교체하여 2층으로 올라갔다. 활짝 열린 창가, 회전의자에 몸을 싣고 서안에 기대어 부채 든 손으로 무슨 서류를 뒤적이고 계시다가 안내 없는 인기척에 약간 놀라시는 얼굴로서 “너냐, 왜 왔느냐”하고 첫마디로 쏜다. 대단히 귀찮으신 모양이다.
“인사 여쭈러 왔습니다.”
마루에 연달은 ‘다다미’위에 꿇어앉았다.
“인사? 오지 않겠다더니 또 왔어?”
“저어 지금 옹진 국사봉 전투에 우리 국군 창설 이후 처음으로 포병이 출동하게 되었는데 기 제일진으로 저의 중대가 참가하게 되어 내일 떠나기로 명령을 받았습니다.”
“아니 국사봉 전투가 그렇게 치열하냐?”
“네, 적의 작전이 지금까지의 모양과는 좀 다른가 봅니다. 대공 전투 참가라는 것은 저의 큰 숙원이었사오며 더욱이나 포병대의 초진에 참가케 된 데 대하여서는 무어라 말할 수 없이 기쁩니다. 목숨을 홍모에 비기는 군인의 몸이오라 이번도 살아서 돌아오리라 어찌 단언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마지막이 될는지 모를 선생님과의 대면의 기회를 얻기 위하여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들으실 뿐 대답이 없으시다. 지난 한때 같으시면 나의 등이라도 쓰다듬으시면서 ‘그렇지 참 반갑다. 무운장구를 빈다’고 여러 가지 격려의 말씀이 계셨을 것은 물론, 무슨 과자 한 봉이라도 사다 놓고 장행회라도 하시려고 떠들으셨을 선생님이 이렇게도 표변하시다니.....
잠시 피차 말이 없었다. 나는 다시 말문을 열었다.
“선생님 생사를 기약할 수 없는 길을 떠나는 이 마당에 임하와 꼭 선생님께 여쭈어 볼 말씀이 있습니다.”
선생님은 먼 밖을 바라보던 자세대로 머리를 돌리시지도 않으신다.
“세상 이목이 귀찮다. 시끄럽다. 어서 가거라.”
“선생님! 저는 이 의문과 이 번민을 풀지 못하오면 죽사와도 옳은 귀신이 못될 것 같습니다. 선생님! 간절한 청이오니 이 몽매한 자식의 마지막 소원을 풀어 주실 수 없으십니까?”
“또 무엇이냐?” 하시면서 회전의자를 틀어 이쪽으로 얼굴을 돌리신다.
“상전이 벽해로 변할망정 선생님의 철석같이 굳으신 지조야 변할리 있사오리까마는 저희들이 우미하와 선생님께 대한 여러 가지 풍설과 당의 행동에 있어서 불가사의한 점을 해명치 못하고 있습니다.
그 동안 여러 차례 선생님께 직소앙문(直訴仰問)코자 애썼사오나 좀처럼 기회를 얻지 못했삽고 본시 이런 회의를 갖는 것부터가 성스러우신 선생님의 정신을 모독함일까 저어하와 감히 입 밖에 내지를 못하였습니다.
그러하오나 선생님으로서는 여기에 대하여 석연히 그 내용을 밝히시어 저의 왜곡된 의심을 씻어 주심이 이런 혼란기에 처한 자제를 사랑하시는 길일까 하옵니다.“
“그래 말해 봐.”
다소 표정은 부드러워지셨으나 어조는 역시 거칠으시다.
“국회 소장파와 선생님 사이에 일찍부터 내통되어 있다는 것은 세상의 정평이요, 이번 그들 피검시 김약수를 선생님께서 숨기셨다는 억측까지 가지게 되었던 것이온데 선생님과 그들과의 관계는 정말 어떤 것입니까?”
“세상이 아무러면 어때, 또 공산당이라면 어때!”
“그러시면 공통된 노선이란 말씀이십니까?”
“네 멋대로 해석하렴.”
“선생님께서 남북 협상 당시 서울을 떠나시며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그렇게 굳은 서약을 하시고서 돌아오신 뒤에 왜 뚜렷이 대국의 전망과 선생님의 심경을 밝혀 말씀치 못하셨습니까? 무슨 숨은 사정이 계셨습니까?”
나는 일방적인 흥분조로 변해졌다.
선생님은 적이 태연을 잃으신 안색이시다.
“그래 내 나라, 내 땅을 갔다 온 것이 잘못이란 말이냐.”
“왜 모든 것을 국민 앞에 해명치 못하셨다는 말씀입니까?”
“그래 밤낮 반쪼가리 땅에서만 살자는 말이냐?”
요령부득의 답변이시다.
“협상 다녀오신 후에 태도는 어떠하셨습니까. 미군의 철퇴를 주장하셨고 미국의 원조를 거부하셨고, UN의 처사를 비방하시면서 급기야는 5․10선거까지 부인하신 것, 어떻게 그렇게 기 주장하심이 공산당과 꼭 같으십니까?”
“그러면 이놈! 내가 공산당의 사주를 받았단 말이냐?”
“전라도 방면을 순회하실 적에 정부를 부인하시고 미국을 침략자로 규정지으시며 이 박사를 사대주의자의 전형적인 존재로 매도하셨으니 공적인 국면도 국면이오나 그렇게도 국민 전체가 쌍벽으로 모시는 두 분의 교의가 끊겼다고 생각될 때에 온 겨레의 실망은 어떤 것이었는지 아십니까?”
“그래 이놈! 이것이 정부 구실을 한단 말이냐, 그러고 미국놈이 무슨 전생에 은혜를 입었기에 그리고 고맙게 적선을 할 것이란 말인가. 대국을 좀 큰 눈으로 보아라.”
“그리고 건국실천원양성소는 무엇하는 기관이며 혁신탐정사는 누구의 것이며 또 한독당의 소위 비밀당원 조직망이란 무슨 사명을 부여한 결사입니까? 한국 군대는 김구씨의 군대라는 외인의 평론에 대하여 선생님은 무슨 말로써 반박하시렵니까?
선생님! 제게 8․15 기념일을 전후하여 중대한 지령이 있을지 모른다던 예비 명령은 무엇에 대한 준비입니까?”
나의 음성은 높을 대로 높았다. 선생님도 노기 등등한 안색으로 안절부절못하시면서
“무어야? 이놈 죽일 놈? 입이 달렸다고 함부로 지껄이는 거야.”
고함을 지르신다. 이제는 피차가 사리를 가릴 이지의 여유를 잃었다.
“여순반란은 누가 교사한 것입니까?”
“뭐야 이놈.”
주먹으로 서안을 치신다.
“표소령, 강소령과 기거를 같이 하던 놈이 어떤 놈입니까?”
“저런!”
책뭉치가 날아온다. 얼굴에 맞았다.
나도 주먹을 부르쥐고 고함을 질렀다.
“송진우씨는 누가 죽였습니까?”
벼루가 날아와서 머리를 스치고 뒷벽에 부딪힌다.
“장덕수씨는 누가 죽였습니까?”
“이놈! 너 이놈!”
붓이 날아오고 또 책이 날아오고 종이 뭉치가 날아오고....
나는 고개를 수그리고 잠깐 생각의 여유를 포착하려 했다. 무슨 말씀인지 기억은 없으나 선생님게서는 노후를 계속하시는 것이다.
‘안되겠다. 선생의 심기는 도저히 바꿀 수 없는 것이 되고 말았구나. 저 그늘 밑에 칩복한 것들을 제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오히려 도로(徒勞)일 것이다. 그늘의 주체인 대목을 찍어 버리자. 그것이 비상시에 봉착한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길이요, 백범 선생 장본인의 오명을 막는 길일 것이다. 하물며 폭풍을 잉태한 8․15 지령이 숨가쁘게 때를 기다리는 아슬아슬한 찰나가 아닌가, 꺾어야 한다. 이때다.”
뒤 허리를 스친 나의 오른편 손에는 어느새 권총이 뽑혔다. 반사적으로 움직인 왼손은 날쌔게 총신을 감아 쥐었다. 제끄덕! 장탄을 하면서 얼굴을 들었다. 앗! 선생께서는 그 거구를 일으켜 두 팔을 벌리고 성난 사자같이 엄습하여 오는 것이 아니냐. 눈을 감으며 방아쇠를 당겼다.
“영감과 나라와 바꿉시다.”
고함인지 신음인지 나도 모르는 소리를 지르며.....
빵! 빵! 빵! 빵!.....
안이 2층으로 올라간 뒤 1~2분 후에 곧바로 총소리가 난 걸 당일 날 경교장에 있었던 사람들이 모두 들었는데도 암살자들은 이런 어처구닌 없는 극본을 꾸며내 선생을 능멸했다.
안두희는 1992년 9월 23일 박배규씨의 농장에서 나에게 이렇게 실토했다.
“나는 선생과 정치 논쟁을 벌일 상대도 못되고 또 그럴 시간도 없었다. 2층으로 올라가 몇 마디 인사하는 척하다가 ‘선생님’하고 불렀다. 선생님이 고개를 들고 쳐다보시기에 그대로 쏘았다. 너무 무서워서 한발을 쏘고 나선 눈을 감고 방아쇠를 계속 당겼다.”
그러나 그 이튿날인 9월 24일 안은 가지들 앞에서 다시 이 진술을 번복하고 극본에 나와 있는 그대로를 줄줄 외우면서 선생이 자신에게 ‘참을 수 없는 모욕’을 주었다고 눈물을 흘려 가며 이야기했다. 인간은 대체 어느 정도까지 사악할 수 있는 걸까.
이 가소로운 대본 앞에서 더욱 분노가 치미는 것은 역대 정권이 이 뻔한 거짓말을 밝혀 보려는 기미초차 보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진상을 은폐하려고만 했다는 사실에 대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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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중희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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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곡의 바다
선생는 그렇게 가시었다. 모진 옥고로 하반신을 못쓰게 된 김창숙옹은 연락을 받고 제일 먼저 달려와서는 백범의 유해에 매달려 이렇게 대성통곡했다.
“우리 김구를 어떤 놈이 죽였느냐? 어느 놈이 시켜서 죽였느냐? 백범이 어떤 인물인데 감히 이놈들, 이런 무엄한 짓을 한단 말이냐!”
백범의 피살 소식은 온 나라를 울음바다로 만들었다.
비보를 듣고 놀란 수많은 시민들이 경교장을 향하여 물밀듯 모여들어 경교장은 순식간에 통곡의 바다가 되었다.
선생은 서거하신 지 열흘 후인 1949년 7월 5일, 온 겨레의 애도 속에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어허 여기 발구르며 우는 소리
지금 저기 아우성치며 우는 소리
하늘도 땅도 울고 바다조차 우는 소리
끝없이 우는 소리 임이여 듣습니까
임이여 듣습니까
이 겨레 나갈 길이 어지럽고 아득해도
임이 계시오매 든든한 양 믿었더니
두 조각 갈라진 땅 이대로 버리고서
천고에 한을 품고 어디로 가십니까
어디로 가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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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중희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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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당국의 발표문
백범 피살에 관한 최초의 공식 발표는 암살 당일 오후 2시에 있었으며, 육군 헌병 사령부 부사령관 전봉덕의 이름으로 발표되었다.
“한독당 위원장 김구가 26일 낮 12시 반경 정체불명의 괴한에게 저격을 당해 절명했다. 범인은 현장에서 즉시 체포 구속 중이며, 현장에서 많은 상처를 입어 의식 불명 상태에 있다. 수사기관은 범인이 의식을 되찾는 대로 그 배후를 엄중 조사하겠으나 단독범행인 것 같다.”
사건 발생 1시간 24분 만에 재빨리 나온 공식 발표문은 ‘단독 범행인 것 같다’고 범행의 성격을 일찌감치 규정해 놓았다. 그 시간에 안두희는 헌병 사령부 의무실에 누워 있었다.
한편 긴급히 소집된 국무회의는 서울 전역에 비상경계령을 내리고 통행금지 시간을 10시로 앞당겨 실시토록 결정하고 5시 반에 끝났다.
두 번째 공식발표는 6월 27일 아침 10시 국방부 보도과에서 내놓은 수사의 중간발표였다.
“범인 안두희(32세)는 평북 용천군 동하면 용산동에 본적을 두고 서울 중구 태평로에 현주소를 둔 자로, 1948년 11월 11일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해서 8기 졸업생으로 포병 사령부 장교로 배속되어 있는 자. 안두희는 한독당원으로 김구의 가장 신뢰하는 측근자로서 누차에 걸쳐 김구를 만나 직접 지도를 받던 자다. 사건 당일은 인사차 김구를 만나러 갔다가 언론 쟁투가 벌어져 격분한 결과 순간적으로 살의 발생, 총을 쏜 것이다. 그 외의 상황은 아직 문초 중이므로 추후 상세한 것을 발표하겠다.”
범인 안두희의 인적 사항과 함께 그가 한독당원이며 김구의 ‘가장 신뢰하는 측근자’로서 ‘언론 쟁투’ 끝에 격분하여 범행한 것이라고 못을 박아 놓았다(그러나 발표가 있었던 이 시간까지 안두희는 성명 정도를 확인하는 이외의 어떤 취조도 받지 않았다는 것이 나중에 수사관련자들의 증언으로 밝혀졌다. 또한 안두희 본인도 ‘헌병대에선 일체 수사를 받지 않았다’고 밝혔다).
군 당국이 안두희를 한독당 당원일 뿐만 아니라 ‘김구의 가장 신뢰하는 측근자’라는 어이없는 발표를 하자 한독당은 그것을 부인하고 김구 선생의 피격 경위를 밝히는 성명서를 냈다.
한편 처음으로 수사결과가 발표된 27일 저녁 9시경 안두희는 헌병 사령부에서 육군특수정보대(SIS)로 이첩되었다. 육군 참모총장 채병덕의 명령 때문이었다. 안두희의 신병이 SIS로 이첩된 이튿날, 즉 6월 28일 국방부는 두 번째로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28일 하오 국방부 수사대는 경찰에 의뢰하여 한독당 조직부장 김학규씨를 중부경찰서에 연행, 문초 중이다. 한편 현재까지 문초 결과는 다음과 같다.
1. 김학규는 안두희를 한독당에 가입시키고 지도를 계속해 왔다.
2. 전기 김학규는 한독당 보통당원 이외에도 비밀당원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3. 이에 확증을 제시하면 한독당 간부 김현묵이 건국실천원양성소에서 한독당 입당 희망자를 획득하였다고 김학규에게 보고하는 동시에 그중 범인 안두희는 비밀당원의 자격이 있으므로 그 수속을 요청한 서한문 및 서류에 의하여 비밀당원으로 4월 14일 수속된 한독당 비밀당원증이 있다.”
1차 공식발표에선 단독 범행임을, 이어 1차 수사발표에서는 안두희가 한독당 당원이었고 선생의 신뢰받는 측근자이며 범행은 언쟁 끝에 순간적으로 이루어졌음을, 그리고 이제 제2차 수사발표에서는 당내에 ‘비밀당원’이라는 게 있고, 그것을 관장하는 사람이 조직부장 김학규임을 수사당국은 차례로 밝혀 낸 것이다. 이날 김학규를 비롯하여 일곱 명의 한독당 간부들이 경찰에 체포되었다.
한독당 조직부장 김학규는 항일독립투사로서 광복군 제3지대장을 지낸 거물이었다. 노선을 둘러싼 한독당의 내부 갈등이 백범 살해사건을 낳고 말았다는 이야기가 설득력이 있으려면 상당한 비중의 인물을 마치 관련자인 양 옭아 넣어야 했고, 김학규가 거기에 걸려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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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의 특별성명
치밀하게 연출된 이러한 수사극은 이승만의 특별성명으로 절정에 다다랐다. 그는 백범이 살해되고 일주일이 지난 7월 27일, 경교장으로 문상을 가면서 특별성명을 발표했다.
김구씨를 살해한 동기에 관하여서도 공표하고 싶은 것은 발표할 때가 되면 물론 반드시 공표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때 모든 사실을 일반 앞에 공개해 놓는다는 것은 나의 생각으로는 그 생애를 조국독립에 바친 한국의 한 애국자에 대한 추억에 불리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우리의 법정에서 신중히 검토될 이들 사실은 김구씨의 살해가 순수히, 여하한 행동노선이 조국을 위해서 가장 유일할 것인가에 관한 당내의 의견 차이의 직접적 결과임을 표시한 것이다. 아직 한독당내의 의견대립이 외부에 알려진 일이 없는데 백범의 추종자가 그 의견차이의 논쟁을 결말짓고자 취한 격렬한 수단은 결국 비극을 초래했다고 볼 수 있다.
백범의 암살이 ‘순수히 여하한 행동노선이 조국을 위해서 가장 유익할 것인가에 관한 당내의 의견차이’로 비롯되었으며, 안두희의 범행은 그 ‘논쟁을 결말짓고자 취한 격렬한 수단’이었다는 것이다. 더구나 ‘지금 이때 모든 사실을 공개’하면 ‘한 애국자에 대한 추억에 불리할 것’이라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자신은 김구 선생에 대한 어머어마한 비밀을 많이 알고 있지만 죽은 김구의 명예를 생각해서 지금은 덮어두겠다고 속 깊은 마음 씀씀이까지 과시하고 있다.
이미 노골적으로 드러난 수사당국의 조작극본, 즉 암살은 한독당의 노선을 둘러싼 내분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는 설명을 그대로 인정하고 그 위에 한 발 더 나아가 조국을 위해 ‘더 유익한’ 측이 ‘덜 유익한’측을 거세한 것이라고 사건의 의미까지 밝혀 놓은 것이었다.
그러나 극본이 사람의 마음을 휘어잡으려면 우선 현실논리와 합치해야 한다. 암살자 일당의 극본은 현실의 논리, 현실의 법칙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아무도 그 극본을 믿으려 하지 않았고 ‘이승만이 김구를 죽였다’는 이야기만 무성히 떠돌아다녔다. 조소앙은 경교장 담벽에 “이승만은 회개하라. 민족의 영웅이 죽은 데 책임을 져라”는 글을 써 붙이기까지 했다. 이런 발 없는 소문이 무서웠던 걸까. 7월 3일 전봉덕 헌병사령관(그는 3일 만에 부사령관에서 사령관으로 승진했다)과 김태선 서울시경국장은 공동으로 ‘항간에 유포되는 유언비어와, 사실을 왜곡하여 정치적 야망으로 모략 선동함에 부화뇌동하여 경거망동하지 말며 생업에 일층 전력을 다하고 군경에 절대적인 협조를 바란다’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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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중희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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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지는 한독당
군당국이 최종 수사결과를 발표한 것은 1949년 7월 20일이었다.
그 요지는 이러했다.
“안두희는 한독당에 입당한 후 여섯 번이나 김구를 직접 만나 지도를 받아 오다 점차 한독당과 김구의 사상 및 정치노선에 회의심을 품게 되었다. 특히 한독당의 세포조직 의도는 대한민국 정부를 전복하려는 것이었으며, 소련의 주장에 따라 미군의 완전 철수를 추진시키는 데 주력하고 있어 그 음모의 위험성이 대한민국 정부에 점차 절박해 옴을 느꼈다. 안두희는 한독당을 탈당하려 했으나 탈당 후의 테러 위험성을 우려하여 끝내 김구를 살해했다는 것이다.”(신문에 보도된 당국의 발표문 요약)
수사당국은 또한 백범이 영도하던 한독당의 정치노선을 친공이라고 규정하고 그 사례를 이렇게 열거하였다.
1. 5․10 선거 반대, 5․10 선거에 의한 대한민국 정부수립 부인
2. 평화적 통일의 이름 아래 공산당과의 제휴를 기도하고 북로당원을 한독당 주요간부로 포섭
3. 남북 정치협상에 의한 연립정부 수립 기도
4. 미군 철수를 주장하고 철수 후의 군사고문단 설치 반대
5. 미국의 대한 원조 반대
6. 북한 정책의 합리성 찬양
7. 독립투사 및 혁명가에 대한 정부의 박해를 공격
8. 남한에서 조만간 일대 쿠데타를 할 예정이었음
한마디로 줄인다면 한독당은 대한민국 정부를 전복시키려 한 반국가 단체요, 김구 선생은 그런 반국가단체의 수괴라는 말이다. 이승만 정권 이래 지금까지 한국 현대사를 주름잡아 온 정적 제거의 논리, 그 낯익은 논리가 태동된 것이 바로 이때이다.
그리고 수사당국의 이 발표는 이후 안두희의 법정 진술, 그리고 『시역의 고민』과 완벽하게 일치하였다.
한편 한독당은 김구 선생을 잃어버린 비탄에서 헤어날 겨를도 없이 이승만 정권의 거듭되는 ‘친공’포격에 비틀거리고 있었다. 신문광고란에는 연일 한독당 당원들의 탈당성명서가 게재되고 있었다. 성명서는 한결같이 한독당이 남북노동당과 은밀히 제휴하여 친공노선을 걷기 때문에 한독당을 떠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군부에 침투했던 한독당 비밀당원들이 ‘대오각성’하여 분연히 당을 떠난다는 성명서까지 게재되었다. 이들은 성명서 말미에다 “전 국방부 제4국 정보원 남일송(南一松), 전 국방부 제3국 정보원 독고녹식(獨孤錄植), 정익태(鄭益泰), 전 사정국원(내세포원) 김낙기(金洛基), 한경일(韓京一)”등으로 자신들의 직위를 표기하여 군부내에 소위 한독당의 비밀당원이 어마어마하게 침투되어 있었던 양 조작하였다(이 가운데 독고녹식, 정익태, 한경일은 암살행동대에 속한 사람이었음이 나중에 확인되었다).
또한 당국의 수사발표가 있은 후, 기회 있을 때마다 백범과 한독당을 격렬히 비난해 온 민국당 당무회의는 백범을 국적으로 규정하여 신문에 발표했고 안두희 석방운동까지 폈다.
해방 후 결성된 한국의 정당은 어떤 당이냐를 막론하고 뿌리가 깊지 못한 까닭에 영향력 있는 지도자를 중심으로 운영되는 원시적인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김구 선생을 잃은 데다 주요간부들까지 구속되고, 그 위에 암살자일당의 치밀하고 조직적인 친공 모략까지 겹치자 한독당은 급속히 와해되기 시작하였다.
사람의 밥을 먹고 사람의 옷을 입었으니
품은 뜻은 평생토록 어김이 없어야 한다
- 『백범일지』
역사의 시판에는 시효가 없다.
권중희 민족정기구현회
66
■ 배후세력을 밝혀 주는 열두 가지 정황 증거
당국의 수사발표에 제일 먼저 의혹을 표명한 것은 한독당 중앙상무위원회였다. 안두희의 재판이 끝난 8월 초순, 한독당 중앙상위는 그 동안의 군사재판이 안두희의 일방적 진술만을 자료로 삼아 사건 심리를 졸속으로 종결시키자 이승만 대통령에게 다음과 같은 ‘요청서’를 보냈다.
① 김구 선생 저격 당시의 범인과의 응대시간은 불과 3분간이다.
② 김구 선생이 한 청년과 정치 언쟁 운운은 근본적으로 상식이 허용하지 않는다.
③ 범인 심리로 보아 일시적 흥분이었다면 1발로써 족할 것이다.
④ 저격 후 8발의 탄환이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권총을 던지고 체포를 당한 것은 개인적 행동으로 간주할 수 없다.
⑤ 경교장 경비경찰관의 손에 체포되는 즉시 난데없이 헌병대가 범인의 인도를 요구하며 데리고 간 것.
이상의 여러 정황으로 보아 우리는 이 흉계를 결코 단순한 것으로 해석할 수 없고, 또 김구 선생 서거는 민족적․역사적 대손실인 중대사건이므로 진상을 철저히 규명하여 자손만대의 의혹을 풀어 줌과 동시에 그 흉모의 근거를 전멸시키기 위하여 본당 상무위원회 결의를 정부당국에 이와 같이 요청하는 것임.
한국독립당 중앙상무위원회
한독당이 암살 현장의 사실적인 정황에 근거해 제시한 이 몇 가지 의문만으로도 암살 뒤에는 조직적인 배후세력이 있다는 심증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뒤이어 안두희의 체포․구속․수사․재판․수감․석방과정에도 수많은 의혹이 뒤따랐다. 그것은 암살자 일당이 감출래야 감출 수 없었던 음모의 긴 꼬리였다. 여기서는 그것을 대략 열두 가지로 간추려 보았다. 이 꼬리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암살 배후세력의 윤곽을 그려 낼 수 있을 것이다.
[1] 암살이 일어나기도 전에 헌병대엔 비상명령이 떨어졌다
사건이 일어난 후 2층으로 뛰어 올라가 참상을 목도한 비서 이풍식, 선우진 등은 격분한 마음에 의자니 책상이니 손에 잡히는 대로 들고 안두희를 두들겨 팼다.
“죽이면 안 돼! 배후 조종자들을 붙잡아야 해!”
안두희가 얻어맞다가 혹시 죽기라도 할까 봐 박동엽이 소리쳤지만 그 자신도 발길질을 멈추지 못하고 있었다.
“이놈이 범인이야? 어떤 놈이 선생님을 쏘았어?”
정문 입초 순경까지 달려와 가세하려 하였다. 그런데 그때 난데없이 군복을 입지는 않았으나 군인인 듯한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그들은 때리는 사람들을 제지하고 안두희를 일으켜 세웠다. 때리던 사람들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들을 쳐다보는 순간 경비경찰관의 전화 연락을 받고 서대문경찰서 형사주임 강용수 경위가 허겁지겁 달려 들어왔다. 안두희는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이놈이 범인입니까?”
그는 전후 사정을 살필 겨를 없이 일단 안두희를 연행하려 하였다. 관할서 형사주임으로선 당연한 행동이었다. 그런데 이때 한 떼의 헌병들이 사나운 기세로 들이닥쳤다. 인솔자인 듯 대위 한 명이 제일 앞에 서 있었다.
그들은 둘러서 있던 사람들을 와락 밀어제치며 욕설을 퍼부었다.
“이 새끼들아. 너희들이 뭔데 군인을 때려!”
비서와 경찰관들이 어안이 벙벙해 쳐다보는 가운데 헌병들은 안두희를 데리고 나갔고, 앞서의 사복 입은 군인들도 헌병들과 뒤섞여 우르르 몰려 나갔다. 그들은 안두희를 스리쿼터에 싣고는 필동 헌병 사령부 쪽으로 사라졌다. 안을 데리고 간 헌병 대위는 현병 사령부 순찰과장 김병삼으로 밝혀졌다.
그들이 안을 싣고 사라진 다음에야 적십자병원의 의사 이기섭이 도착했다. 선생의 가슴은 그때까지 조금씩 뛰고 있었으나 의사가 당도한 후 곧바로 숨이 끊어졌다.
그때까지 경교장에서 바깥으로 한 연락이라곤 이국태가 의사를 부르러 적십자병원으로 달려간 것과 경비경찰관이 서대문서로 전화 통지한 것밖에는 없었다. 그런데 경교장 바로 옆에 있는 적십자병원의 의사가 당도하기도 전에 헌병들이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순식간에 나타나 범인을 낚아채 가 버린 것이었다.
그런데 ‘군복을 입지는 않았으나 군인인 듯한 사람들’이 누구며 어떻게 그렇게 빨리 사건 현장에 나타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당시 SIS 대장이었던 김안일(증언 당시 68세, 목사)씨가 1984년 『월간 조선』에서 처음 증언을 했다.
그날(26일)이 일요일이어서 SIS소속 장교 몇몇이 우이동으로 아유회를 갔다. 그런데 무슨 일이 있었던지 일찍 돌아오게 됐다. 돌아올 때도 또 어찌 그랬던지 우이동에서 경교장 앞으로 돌아서 오게 됐다. 막 경교장 앞에 당도해 보니 사람들이 웅성웅성하고 있어서 우리는 그 안으로 들어갔다.
사건이 금방 일어난 것처럼 보였다. 안두희가 막 매를 맞고 있었다(그는 말렸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우리가 도착한 것은 헌병보다 빨랐다. 조금 있으니까 헌병들이 스리쿼터를 타고 들어와서 범인을 싣고 나갔다. 우리 숫자는 그때 지프 한 대에 탈 정도였으니까 네댓 명이었다. 이진용, 장복성, 이한진, 나 이렇게 거기에 갔을 것이다. 우리는 사복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우리를 눈치 채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거기서 직책상 시신의 위치 등을 눈여겨보고 그냥 돌아왔다. 거기서 한 20분쯤 머물렀을 것이다. 우리가 나올 때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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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씨는 사건당시 제일 먼저 현장 검증을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으며, SIS 소속으로 안두희를 직접 조사했던 담당관이다. 당시 계급은 소위였다.
이진용 씨는 자신이 당일 날 경교장에 가게 되었던 경위를 김안일씨와 다르게 말하고 있다.
“그때 백선엽 육본 정보부장이 명륜동에 살았는데, 마침 그날 자기 집으로 장교들을 초청해서 점심식사를 하고 있었다. 식사 중에 갑자기 백범이 암살당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즉각 특수정보대 한 명을 보내 현장을 파악시키자고 해서 내가 경교장에 가게 됐다. 가서 보니까, 이미 안두희는 헌병대에서 끌어 갔고, 김구 선생 유해는 2층에 그냥 눕혀져 있었다. 나는 우선, 돌아가신 자리, 형태, 쏜 자리 이런 걸 돌아보고 왔다.”
--------------------------- 주석
그러나 김목사의 증언은 또 다른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야유회를 갔다가 왜 그토록 일찍 돌아왔으며, 또 돌아올 때 왜 경교장(서대문 근처)까지 가게 됐는가 하는 점이다. 그는 이 점에 대해서 모두 ‘무슨 일이 있었던지’ ‘어찌 그랬던지’라는 이유밖에 대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안두희를 인수해 간 김병삼 헌병 대위는 어떻게 그렇게 빨리 사병들까지 데리고 올 수 있었던 걸까?
사건 후 그에게 의혹이 쏠리자 그는 취재진들에게 경위를 밝혔는데 그의 주장을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나는 그날 11시경 용산에 있는 집을 출발해 헌병대 조사과장 김문호 소령이 입원해 있는 서울대 부속병원으로 갔다. 김문호 소령이 금요일인 24일 오후에 시골에 다녀오다 교통사고로 크게 다쳤기 때문이다(김문호 소령은 광복군 출신으로서 한독당 계열, 혹은 이범석의 족청 계열로 분류되고 있었다). 김소령의 지프차 운전병은 김하사였다. 그도 부상이 심했다.
서울대 병원에 가서 김소령을 만났더니 가능한 한 김하사가 처벌을 당하지 않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운전병의 처벌 여부를 결정짓는 권한은 내 소관이었다. 그래서 김하사가 입원해 있다는 적십자병원으로 갔다. 그때가 11시 50분~12시경이었다.
김하사의 병실을 찾아간 나는 사건 경위를 들었다. 아야기를 자세히 다 듣고 병원을 막 나서려는데 누가 병원 마당으로 급히 달려오며 김구 선생이 죽었다고 외쳤다. 그 사람이 이국태 비서인 줄은 나중에 알았다. 놀라고 있는데 뒤이어 또 한 사람의 청년이 병원 안으로 뛰어 들어오며 ‘이박사, 이박사’ 하고 고함을 질렀다.
그 사람에게 조금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다. 백범 선생이 암살을 당했는데 범인이 군인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급히 차를 타고 경교장 근처로 가 봤더니 벌써 많은 사람들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다시 돌아 나와 근처 약방에서 헌병 사령관실로 전화를 했으나 받지 않았다. 장흥 사령관의 집으로 전화를 했더니 전화 받는 여자애가 집에 아무도 없다고 했다. 그래서 전봉덕 부사령관의 집으로 전화를 했더니 마침 집에 있었다. 상황을 보고했더니 우선 현장을 보존하고 범인을 체포하라고 말했다. 그리고 헌병이 출동할 때까지 현장에 있으라고 했다. 부사령관의 명령을 받고 약방을 나서서 경교장을 향해 가는 순간 이국태의 연락을 받은 적십자병원의 백범 주치의 이기섭이 간호원과 함께 달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안을 체포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모든 일이 아주 순식간에 일어났다는 데 있다. 증언자들에 따르면 짧게는 저격 후 10분, 길어야 20분을 넘지 않는 시간 안에 일어났다는 것이다.
이기섭 의사도 들어올 때 헌병들의 저지를 받을 정도였으니 사건이 나자마자 헌병들이 경교장을 포위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었다.
김병삼의 말을 사실로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너무도 신속한 대처였다. 게다가 헌병대엔 암살이 일어나기도 전인 오전 11시 20분경에 비상이 걸렸다는 게 밝혀졌다.
그날은 일요일이라 헌병들 대부분이 시내로 외출을 나갔고, 나는 헌병 사령부 2층에 있었다. 그런데 11시 20분쯤 아래층에서 요란한 전화소리가 나더니 하사관 한 명이 달려와선 비상이 내렸다고 했다. 그래 내가 ‘당직사관인 나도 모르는데 무슨 비상소집이냐’고 했더니 ‘김병삼 과장이 내렸다’는 것이었다. 잠시 후 김과장이 왔기에 내가 물었다.
“무슨 일 났습니까?”
“경교장에서 백범이 총 맞았어!”
나는 또 궁금해서 물었다.
“그래 돌아가셨습니까, 살았습니까?”
“그건 몰라!”
나는 허둥지둥 헌병을 모았지만, 그날이 일요일이라 헌병들이 별로 없어서 위병들을 모아 가지고 스리쿼터에 태워 보냈다. 한참 후에 안두희를 싣고 왔는데 전봉덕 부사령관이 시트를 깔고 그 위에 눕게 했다. 내가 범인 방에 보초를 세웠더니, 전봉덕 부사령관이 ‘다 치워라, 여기 있는 헌병들 다 경교장으로 보내라’하고 말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나중에 보니 백범 선생이 낮 12시 이후에 총을 맞은 것으로 발표되지 않는가! 당직사관인지라 비상이 걸린 시각을 일지에 기록해 놓았기 때문에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헌병사 행정계장으로서 암살 당일 날 당직사관이었던 오석만 중위의 증언. 그는 4․19 직후 결성된 ‘백범 살해 진상규명 투위’관계자들에게 이 증언을 했다).
오중위는 이런 증언을 한 이후 별 까닭 없이 파면됐다.
그래서 김병삼 대위를 음모의 가담자로 의심하는 쪽에서는 김대위가 암살음모 지휘자로부터 미리 지시를 받고 사건 1시간 전에 헌병대에 비상을 소집해 경교장에 출동하도록 했으며, 자신은 안두희를 재빨리 체포하여 보호했다고 보는 것이다.
그가 암살 사건이 마무리된 후 신성모 국방장관의 비서로 영전하였다는 사실도 그런 혐의를 뒷받침해 준다. 물론 그는 그런 사실을 완강히 부인하였다.
김병삼 대위의 음모 가담 여부는 확정적인 증거가 나오기 전에는 확실히 단정을 내릴 수는 없는 형편이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헌병 사령부의 수뇌부 누군가가 암살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김병삼 대위 혼자 그런 역할을 맡았을 리는 없고, 수뇌부 중 누군가가 지시를 했을 것이다.
그래서 당일 날 암살 현장이 완전히 헌병 사령부의 손에 장악되었던 것이다.
67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
[2] 현장 출입을 저지당한 검사장
사건 당시 서울지검 지검장이었던 최대교씨는 6월 26일, 집에서 특별히 할 일도 없고 해서 낮 1시경 검찰청으로 나갔다. 이것저것 잡무라도 처리할까 해서였다. 그리고 반시간쯤 지났을까, 당직 중이던 이원희(李元熙) 부장검사가 허겁지겁 3층 지검장의 방으로 뛰어 들어왔다.
“검사장님, 김구 선생께서 암살당했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뭐요?”
순간 최검사장은 강한 전력에 감전이나 된 듯 벌떡 일어나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는 이부장검사와 함께 김구 선생의 숙소인 서대문 경교장으로 지프차를 타고 달렸다. 우선 현장검증을 하기 위해서였다. 두 사람은 경교장으로 가던 도중 관할서인 서대문경찰서에 우선 들렀다. 일요일이었기 때문인지 한산했다. 경철서 문을 들어서면서 소리쳤다.
“누구 간부 없어.”
“서장님은 숙직실에 계십니다.”한순경이 지하실에 있는 숙직실로 그들을 안내했다.
서장 이하성(李夏成)이 신발을 벗고 모자를 쓴 채 누워 있다가 깜짝 놀라며 벌떡 일어났다.
“아니 김구 선생께서 암살당했다는데 현장엔 안 가고 왜 이러고 있는거요?”
검사장이 대뜸 나무라자 이서장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손을 내저으며 말을 더듬었다.
“검사장님, 모... 못 갑니다. 헌병들이 지켜 서서 절대 못 들어가게 합니다.”
이서장 자신이 이미 현장검증을 하기 위해 현장에 갔다가 헌병들에게 얻어맞고 쫓겨났다는 설명이었다. 최검사장은 기가 막혔다.
“설혹 김구 선생이 아니라 해도 한 민간인이 피살됐는데 검사나 경찰관이 현장에조차 접근 못한대서야...”
그렇다고 더 이상 지체할 수는 없었다. 두 사람은 경찰관의 안내 없이 경교장으로 급히 갔다. 집 주위를 헌병들이 삼엄하게 경비하고 있었다.
문 앞에서 책임자인 듯한 헌병 대위에게 신분과 목적을 말했지만 키가 작달막한 헌병 대위는 한마디로 잘라 버렸다.
“못 들어갑니다.”
최검사장은 치밀어 오르는 화를 누르며 타이르듯 말했다.
“살인사건이 나면 법대로 검사가 검증을 하도록 돼 있소. 우리는 법집행을 위해 온 거요.”
그러나 헌병 대위는 막무가내였다. 최검사장은 나중에 책임문제도 있고 하니 무언가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럼 헌병이 검사를 폭력으로 경교장에 못 들어가게 했기 때문에 현장검증을 못했다고 상부에 보고하겠소.”
그리곤 헌병 대위의 가슴에 적혀 있는 이름을 적고 되돌아섰다.
검찰청에 돌아온 검사장은 청사 앞에서 부장검사와 함께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검사장으로서의 체면도 체면이지만 수사상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처사였다. 그런데 5분쯤 지났을까. 몸집 작은 그 헌병 대위가 달려왔다. 그는 정중히 사과하면서 “안내하겠으니 검증하십시오.”라고 말했다. 화가 풀리지 않았지만 검사장은 직무수행을 위해 그를 따라 나섰다.
최대교씨를 제지한 그 헌병 대위는 바로 김병삼 대위였다. 계엄령이 선포된 것도 아니고 군 영내에서 사건이 발생한 것도 아니었다. 범인은 비록 현역군이었지만 피해자는 엄연한 민간인이었다. 그런데 수도권 경찰력을 총감독하는 지위에 있는 서울 검사장까지도 일개 헌병 대위에게 현장 접근을 차단당한 것이다. 상부와 연락을 했는지 나중에 허락을 하긴 했지만 안두희의 체포에서 범행 현장관리까지 철저히 헌병대가 전권을 행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더욱 괴이한 일은 그 헌병대의 수장인 헌병 사령관 또한 경교장출입을 삼가야 했다는 사실이다.
‘수십 년간 망명 생활 중 누대 산소를 성묘하지 못했기에 6월 26일 일요일을 이용하여 고양군 원당면 주교리에 계신 9~11대 선조의 묘를 성묘했다. 돌아오는 길에 원당리에 있는 고려말 마지막 왕이었던 공양왕릉에 도착하여 당시 왕씨조의 역사를 호위 헌병들에게 설명해주고, 이웃 친지 주민들의 환영 오찬을 받았다.
그런 다음 우리 일행이 오후 4시경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서대문거리를 지나노라니 거리가 뒤숭숭하고, 백범 선생 계신 저택 앞에서는 사람이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곡성이 진동했다. 길가에 우리 헌병 차량들이 즐비한데, 순찰과장 김병삼 대위가 경비하고 있기에 즉시 차를 내려 곡절을 물었다.‘
‘그가 “백범 선생님께서 흉수 안두희 놈에게 저격을 당하시어 절명하셨다” 하기에 범인은 어찌 되었느냐고 물었더니 “당장에서 체포되어 헌병 사령부로 데려가 수감했다”고 했다.
이 말을 들은 나는 천지가 아득하여 분한 마음에 범인을 때려 죽여 버리려고 급히 차를 몰아 사령부로 갔더니, 수사과장 김득모, 행정과장 정강 두 사람이 보고를 했다. 그들은 “이 사건의 내막을 추측컨대 정치적으로 ‘국회 프락치 사건’과 관련된 음모사건인 듯하니 상부 지시를 기다려 취급하자”는 건의를 했다.
나는 비로소 송진우․여운형 같은 이의 피살사건과 동류일 것으로 짐작했다. 그러나 해외에서 수십 년간 모셨던 정의상 조문을 안 갈 수 없어 가려고 했더니 정․김 두 과장이 “지금 정보국에서 총출동하여 경교장 출입을 금지할뿐더러 왕래 인사들의 사진을 찍고 있다”며 나를 막으려 했다.
이런 여러 가지 정보를 종합하고 보니, 어느 정파가 일으킨 계획적인 거사임이 분명하므로 부득이 직접 가지 못하고 통분한 마음을 억제하면서 마음으로만 조의를 표할 뿐이었다.‘(전 헌병 사령관 장흥 회고록)
현장에서는 헌병 대위가 정문을 지키고 서서 검사장의 출입까지 저지하는 위세를 부리고 있는데 정작 헌병 사령부 안에서는 조문 가려는 사령관을 두 과장이 “정보국에서 경교장 출입을 금지시키고 있다”며 막았다는 것이다. 장흥의 자서전을 읽다 보면 행간에서 그가 실세가 아니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을 수 있다. 과장들이 사령관의 행동을 막고, 사령관이 그 말에 조문을 포기했다는 것은 어느 모로 보나 정상적인 상황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헌병 사령부의 실세는 누구였을까?“
68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 궈중희
[2] 전봉덕, 헌병 사령관이 되다
원래 헌병의 직무는 육해공군의 군기 유지와 군법에 관한 수사에만 국한되었고, 민간인의 범죄 또는 정치범에 관해서는 관할 범위에 두지 않는 것이 민주국가 법령에 부합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1949년 3월 갑자기 소위 ‘국회 프락치 사건’이라 하여 국회의원 김약수․노일환 등 6, 7명을 국군 참모총장 채병덕의 명령으로 체포하여 사령부에 감금하고 특별수사본부를 두어 부사령관 전봉덕으로 수사본부장을 삼아 수사를 진행했다.
‘나는 사령관의 처지에서 이 사건을 법원으로 이첩하기를 주장했지만, 결국 채병덕의 압력과 반대로 이송하지 못했고 전부사령관이 직접 다루었다. 나는 이 사건에 관여하지 않은 까닭에 그때부터 채군은 나에 대해 불만스럽게 생각했었다.’(장흥, 회고록)
헌병 사령부의 실세는 부사령관 전봉덕이었던 것이다(장흥씨는 국회 프락치사건이 3월에 발생했다고 써 놓았지만 정확히는 5월에 발표되었다. 아마도 일련의 계획표에 따라 사건을 조작하고 의원들의 뒷조사를 시작한 건 그보다 훨씬 전일 테고, 그래서 정확한 시간을 착각한 듯하다).
사령관 장흥은 중국군 헌병 대령 출신으로 중국에 있을 때부터 백범 김구를 섬겼으며, 임시정부가 환국한 후에는 중국에 남아 있는 임시정부 잔무를 수습한 다음 뒤늦게 귀국한 몸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임정계 고급장교로서 백범의 측근으로 꼽혀 일찌감치 미운 털이 벽혀 있었다.
안두희는 처음 헌병 사령부에 체포되어 들어갔을 때 진술을 거부했다. “장흥이 사령관으로 있는 헌병 사령부에서는 조사받지 않겠다.”는게 이유였다. 지금도 안두희는 “장흥은 김구와 가까워서 내가 굉장히 싫어했다”고 이야기한다.
일개 소위에 불과한 안두희 조차 “장흥 밑에서는 조사받지 않겠다.”고 큰소리쳤으니, 장흥이 군부 안에서 얼마나 철저히 배척되고 있었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리고 체포한 안뒤희의 신병처리를 놓고도 웃지못할 일이 벌어졌다.
안두희가 헌병 사령부에 도착하자 전봉덕은 김병삼 대위에게 서대문 경찰서에서 압수해 간 안두희의 소지품을 찾아오도록 지시하고, 범인 안두희를 의무실에 옮겨 치료하도록 명령했다. 그리고 경교장 현장에 다녀와서는 의무실에 누워 있는 안두희를 2층 부사령관실 옆으로 옮기게 했다. 한편 4시경 경교장 앞에서 김병삼 대위에게 안두희가 헌병 사령부로 연행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사령부로 달려온 장흥 사령관은 안두희의 소재부터 확인했다. 범인이 부사령관실 옆방 침대 위에 누워 있는 것을 본 장흥은 호통을 치며 당장 자히실 감방으로 옮길 것을 명령했다. 그런데 조금 후 전봉덕이 왔다가 안두희가 없어진 것을 알고는 발칵 화를 내었다. 다시 제자리로 옮기라는 것이었다. 얼마 후 장흥이 안두희가 다시 2층으로 올라와 있는 걸 보고 부하에게 물었다.
“누가 여기에다 데려다 놓으랬어?”
“네.... 전부사령관님이 옮기라고 해서...”
장흥이 이때 한 말이 두고두고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이 새끼야! 사령관이 높아, 부사령관이 높아?”
사령관보다 더 높은 부사령관 전봉덕은 어떤 인물인가.
‘내가 헌병 사령관으로 취임하기 전에 참모총장 채병덕군이 전봉덕군을 나에게 소개하면서 당시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이었던 이범석씨의 명령에 따라 나를 헌병 사령관으로 발령해 주는 조건으로 전군을 부사령관으로 받아 달라고 했다. 나는 즉석에서 응낙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일정 시대에 제국대학 법과를 나와 경기도경 경무과장까지 지낸 사람이었다.
당시, 일정 시대에 경찰관을 지내던 자 10여 명이 헌병대에 입대했기 때문에 그때 반민특위에서는 헌병 사령부가 악질 친일파의 피신처라는 말까지 나게 되었다.‘(장흥, 회고록)
앞서 지적했듯이 이승만은 집권 후, 단순히 친일파를 보호해 주는 차원을 넘어서서 자신의 독자적인 정치기반을 구축하기 위해 목적의식적으로 친일파들을 군부․경찰․행정부 곳곳의 요직에 기용했다. 전봉덕이야말로 이승만에 의해 그렇게 목적의식적으로 심어진 친일파의 전형이었다.
전봉덕은 유명한 문인 전혜린의 아버지이다. 그는 1940년 3월 경성제국대학을 졸업한 뒤 평안북도 경찰부 보안과장으로 부임하면서 친일관로서의 첫발을 디뎠다. 8월 15일 해방이 되었을 때 전봉덕은 일제 경찰의 직급 서열상 두 번째인 경시까지 올라가 있었다.
당시 조선인 친일 경찰 간부들로는 오늘날의 경무관에 해당하는 도경찰부장 1명, 경시(지금의 총경) 21, 경부(지금의 경정) 105명, 경부보(지금의 경감) 220명이 있었다. 따라서 해방 당시 전봉덕은 도경찰부장이었던 윤종화를 제외하고는 가장 높은 지위에 있었던 셈이다.
해방 직후 악질적인 친일 경찰들이 주민들에게 맞아 죽기도 하는 상황에서 전봉덕은 잠시 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미군정이 시작되면서 그런 위험도 사라졌고 전봉덕은 경기도 경찰부 보안과장으로 그대로 눌러 앉게 되었다. 그리고 1946년 4월에는 미군정 경무부 공안과장으로 임명되었으며 1947년 10월에는 경찰전문학교 부교장으로 부임하였다.
그러나 1948년 9월 반민법이 제정되자 그는 다른 많은 친일파들과 마찬가지로 친일파의 ‘성역’으로 간주되던 군대로 도파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1948년 10월 육군사관학교 제1기 고급장교반에 입학하여 그해 12월에 졸업, 육군 소령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장흥 전 헌병 사령관이 증언해 놓았듯이 채병덕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헌병 부사령관직에 앉게 되었던 것이다.
신성모와 채병덕은 전봉덕을 대단히 신뢰했다. 명석한 전봉덕이 정계내의 동향과 인맥 등을 정확히 꿰뚫고 있어서 그에게 여러 가지로 의존했다고 한다. 그들의 엄호 아래 그는 마침내 장흥을 무력화시키고 특별수사를 직접 지휘함으로써 반민특위로 자신을 불안에 떨게 했던 소장파들에게 속 시원히 복수를 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이승만의 눈에 들게 되었던 것이다.
장흥 사령관이 자신의 처지를 뼈아프게 자각하고 있는 바로 그 시간, 전봉덕은 국방장관 신성모의 집에 가 사건을 보고하고 있었다. 이 자리에는 육군 참모차장 신태영도 함께 있었다.(『비화 제1공화국』, 동아일보사)
이들이 안두희 문제를 논의하고 있을 때 경무대에서 전화가 걸려 왔다. 임시 국무회의가 열린다는 전갈이었다.
신성모․신태영․전봉덕이 경무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임시 국무회의가 시작되고 있었다. 국무총리인 이범석은 목포에서 급히 상경 중이었다.
전봉덕 헌병 부사령관을 통해 사건을 보고받은 장관들의 표정은 모두 침통했다. 아무런 말들이 없었다. 보고를 받은 이승만 대통령이 입을 열었다.
“그러면 범인이 지금 어디 있다는 게야?”
“헌병 사령부에 있습니다.”“무엇 때문에 백범을 죽였다고 했지?”
“예, 각하! 범인은 한독당의 비밀당원으로서 김구 선생과 매우 잘 아는 사이입니다.”
“한독당 당원이 김구를 죽였다는 게야?”
“그렇습니다. 각하!”
“그러면 다른 장교나 군인들의 접근을 막고 철저히 조사하도록 해봐.”이승만 대통령은 이 말을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다시 무슨 생각이 났는지 도로 앉았다.
“범인이 한독당 당원이라고 했지?”
“그렇습니다. 각하!”
“그러면 헌병 사령관을 바꾸는 것이 좋겠구만. 그는 백범과 가까웠으니. 신장관, 그 문제를 생각해 봐.”
“예, 각하!”
임시 국무회의에서 결국 장흥 대령을 전출하는 문제가 가결된 셈이다.
사령관이 그 사간에 엄연히 사령부에 돌아와 있는데도 부사령관이 국무회의에 참석하여 보고를 하고, 사건이 일어난 지 다섯 시간 만에 범인의 수사를 담당한 헌병 사령부의 사령관을 교체할 것을 지시한 것은 어디로 보나 형식상의 체계와 별도로 실제의 명령 체계가 따로이 있었다는 심증을 주기에 충분하다.
신성모 국방장관은 그 다음날로 자기 명함 뒷면에 헌병 사령관을 교체한다는 메모를 적어 최영희 중령에게 내려 보냈다. 그리하여 암살이 일어나고 이틀 뒤인 28일, 전봉덕 부사령관은 전격적으로 헌병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그 와 동시에 장흥은 육본 정보국에 소환당했다. 그는 김구 선생과의 관계를 문초받고 돌아와 두문불출하고 지냈다.
그후 7월 하순경 채병덕 참모총장은 장흥을 불러 국방부 정훈국장직을 맡으라고 권했다.
장흥은 “당국에서 나를 임정파니 김구파니 하는데, 그런 사람들에게 오해를 사라고 그런 직책을 맡으라 하느냐”고 완강히 거부하면서 군에서 퇴역하겠다고 했다. 그러자 채병덕은 그러면 하고자 하는 직책을 택해 보라고 하였고, 당시 정국을 비취 볼 때, 중앙에 있다가는 결국 타인의 모략중상에 걸려들고 말 것이라 생각한 장흥은 강원도 지구 병사구 사령관을 자청해 부임했다.
상황의 전개가 이러했다면 우리는 안두희의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그저 특유의 자기 과시로만 여기고 지나칠 수는 없을 것이다.
‘지금 그 양반(전봉덕을 가리킨다) 만난 지가 10여 년 넘는다. 한동안 나보고 ‘안형, 안형’ 했었다. 나 때문에 진급을 해서 대령이 됐는데, 나한테 농담으로 이랬다.
“이 계급장 안형 주겠소!”
다른 사람들도 전봉덕씨한테 ‘안두희 때문에 헌병 사령관이 됐다’고 했다. 사실 장흥보단 자격이 백배 낫지. 일본 시대에도 무슨 관리였잖아.‘
자심 빗나가는 이야기가 되겠지만 일제시대 때 관리를 한 게 헌병사령관으로서의 자격에 보탬이 된다고 믿는 안두희의 사고방식에 그저 절망적인 경탄을 느낄 분이다.
어쨌든 전봉덕은 사건 이틀 후에 헌병 사령관이 되어 윗사람들의 자신에 대한 신뢰에 충분히 응답했다. 1․2차 공식발표를 믿지 않는 분위기가 강하고 한독당이 국방부의 발표에 강력히 반발하자 그는 ‘금번 사건을 마치 배후에 정치적 사주가 있는 것같이 문자로, 언어로 세간에 암시를 주는’ 자들에게 ‘언동에 각별히 자숙하여서 탈선된 언동으로 인하여 법망에 걸리지 말라’는 협박에 가까운 경고문을 발표했다.
69‘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 한길 권중희
[4] 신성모의 첫마디, “이젠 민주주의가 되겠군”
한편 경교장에서 현장검증을 끝낸 최대교 지검장은 보고도 할 겸 직속상관인 김익진 검찰총장에게 전화를 했다. 하지만 집에 없었다. 그래서 다시 권승렬 범부장관 관사로 달려갔다.
권승렬 범부장관의 관사는 서대문구 서소문동 지금의 명지대학 앞 부근이었다. 다급한 마음과 발걸음이었는데도 헛수고였다. 외출 중이었다. 검찰청에 돌아와 막 자리에 앉으려는데 전화 벨이 울렀다. 권장관의 전화였다.
“무슨 일이 있었소?”
“예, 김구 선생께서 암살당하셨습니다.”
“뭐요?”
권장관은 깜짝 놀라며 빨리 자기 관사로 오라고 했다. 사건 전후를 설명하자 권장관은 나를 대동하고 신당동에 있는 이범석 국무총리 관사로 갔다 이총리 집 문에는 ‘수렵 출장 중’이라고 커다랗게 써 있는 두꺼운 종이가 붙어 있었다. 그래도 정문을 지키고 있는 군인한테 “어디 가셨느냐”고 물어 보았다.
“아침에 사냥 가셨습니다.”
사건 현장의 헌병들과는 달리 고분고분 대답해 줬다.
“사냥철도 아닌 6월에 무슨 사냥일까.....”
나는 중얼거렸다.
우리는 발을 돌려 그 길로 마포구 공덕동 대원군의 별장이었던 집에서 기거 중이던 신성모 국방장관을 찾아갔다. 막 대문을 들어서는데 공군 참모총장 최용덕 장군이 거기에 있었다(최용덕은 당시 국방부차관이었음. 최대교씨가 잘못 적은 듯하다). 최장군은 우리 일행을 보자 놀라며 “무슨 일로 이렇게 오셨습니까?”하고 물어왔다.
“김구 선생이 돌아가셔서 신장관을 만나 보기 위해 왔습니다. 장관 계십니까?”
권장관은 최장군에게 다급히 되물었다.
“예. 계시긴 한데 몸이 불편하셔서 누워 계십니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제가 들어가 보고 나오겠습니다.”
최장군은 잠시 후에 나와 우리를 안방으로 안내했다. 우리가 방에 들어서자 신장관은 잠옷바람으로 침대에 누워 있다가 일어나 앉았다.
권장관은 “김구 선생이 돌아가셔서 할 말이 있어 왔습니다”면서 말을 꺼냈다. 그러자 신장관은 묘한 표정을 짓더니 대뜸 “이제 민주주의가 되겠군...”하고 뜻 모를 첫마디를 던졌다. 이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도 몰랐으나 그것을 가릴 새는 없었다. 권장관은 “대통령께서 조의도 표하시고 추모한다는 내용의 담화문도 발표하시도록 말씀드리러 갑시다”고 말했다.
그때까지도 몸이 불편하다던 신장관은 “좋습니다”면서 벌떡 일어나 옷을 갈아입고 나섰다. 부리나케 경무대로 달려갔다. 대기실에 들어서니 김효석(金孝錫) 내무장관이 와 있었다. 해맑은 중절모자를 쓰고 혼자서 서성거리다 우리 일행을 보자 무척 반가워했다. 김구 선생 사건을 대통령에게 보고하기 위해 왔다고 말했다. 당시 분위기로 봐서 서울시경의 간부들은 사건을 미리 예측하고 있었던 것 같았는데도 이들의 상사인 내무장관은 사건에 전혀 몰랐던 듯 ‘돌발사건’으로만 알고 있는 듯했다(서울시경국장 김태선이 사건 당일 아침 9시에 주요 간부들을 비상 소집했다 -지은이).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도 부재중이었다. 아침 일찍부터 낚시하러 갔다는 것이다.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도 이상하다는 느낌도 들었다. 대통령이 ‘낚시’, 국무총리는 ‘때아닌 수렵’, 국방장관은 ‘칭병(稱病).... 이들 모두가 외부 인사와의 면회를 피하기 위해 붙인 구실들이 아니었는지....(최대교, 「그때 그 일들」)
백범이 피살되었다는 소식에 신성모가 보인 반응은 “이제 민주주의가 되겠군” 의미심장한 이 한마디였다.
그리고 그는 법무부장관 등과 같이 경무대에 갔다가, 이승만이 없자 다시 집으로 와서 전봉덕을 만났고, 이어 그와 함께 경무대로 가 임시국무회의에 참석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헌병 사령관 교체가 결정 난 것은 앞서의 설명대로이다.
신성모는 원래 ‘살인교사를 조작해 내는 데 능수였다’고 한다.
신성모라는 자는 본래 어떤 인물이었던가. 그는 청년시절에 우리와 같이 해외에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종사하다가 영국에 가서 상선학교를 졸업하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수송선장까지 지낸 자이다. 독립운동 당시 이박사가 (한국을-지은이) 미국 자치령으로 만들려는 운동(소위 맨디토리 사건)을 전개하는 데 극력 반기를 들고, 신숙, 박용만 제씨와 모의하여 이박사를 살해하려다가 탄로되어 영국으로 도망했던 것이다.
정부 수립 후 이범석 장군이 인재를 등용하려는 견지에서 다시 이박사께 충간하여 해군 참모총장을 시키려고 그를 소환했으나 당시 손원일 장군이 해군을 장악하고 있어 못 시켰다. 그는 입국 후에 잠시 대한청년단 단장으로 있으면서 자주 이박사에게 접근하여 이범석 장군이 겸임하고 있는 국방장관직을 박탈하려는 음모로서 소위 88구락부라는 단체를 조직, 친일파 장관들과 결탁하여 이범석씨와 이대통령 두 분 사이를 모략중상으로 이간시켰다.
이로써 결국 이장군으로 하여금 총리직에서 물러나게 한 후 이장군 측근까지 몰아내게 되었고, 임정 세력을 배제하려는 음모를 책동하여 백범 선생을 우선적으로 살해한 것이다.
신성모군은 그후 이대통령에게 아부하여 총리 이범석씨를 몰아내고 스스로 서리라는 명칭을 붙여 국무총리 자리를 박탈했다.(장흥, 회고록)
신성모가 ‘살인교사의 능수’라는 걸 알 수 있는 일은 그 후로도 수없이 일어났다. 저 악명 높은 거창 양민 학살사건 때, 군대를 공비로 위장시켜 국회 진사조사단을 총격하게 한 사건도 바로 신성모가 교사한 일이었다. 공비를 토벌한답시고 죄 없는 양민들(공식 기록 : 187명, 주민 집계 : 719명)을 처참하게 살육하고, 그것도 모자라 진상을 조사하러 간 국회의원들을 총격하면서, 마치 그것이 공비들의 짓인 양 위장하기 위해 군인들에게 빨치산 옷을 입혔던 수법은 암살을 지휘하기에 하등의 부족함도 없는 능력이었다.
70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한길 권중희
[5] 대통령이 영장을 신청하다
사건이 일어나고 일주일쯤이 흐른 7월 3일, 최대교 검사장은 이른 아침부터 한격만(韓格晩) 서울지방 법원장이 울타리 손질을 하고 있는 걸 보고 같이 거들었다. 서울지검 검사장 관사와 서울지방 법원장 관사는 서대문구 서소문동에 판자로 된 담을 사이로 이웃해 있었다.
그런데 이 판잣담이 며칠 전 바람으로 쓰러져 버렸다.
“원 이런 일도 다 있소?”
“무슨 일인데요?”
최검사장은 무슨 일인가 싶어 물었다.
“한독당 당원들에 대한 구속영장을 날더러 직접 떼라고 합디다. 그래서 영장을 떼긴 했지만 다시는 그런 짓을 안 하렵니다.”
최검사장은 깜짝 놀랐다. 검사장인 자신도 모르게 민간인 7명에 대한 구속영장이 청구되었다니 놀라는 게 당연했다.
“아니, 나도 모르는 일인데, 대체 누가 영장을 청구했습니까?”
“김익진 검찰총장이 직접 부탁을 합디다.”현장 접근마저 저지하더니 이번에는 용의자에 대한 영장 청구도 검사장을 따돌리고 검찰총장이 ‘직접’ 청구한 것이다. 법원은 또 판사를 젖혀놓고 법원장이 ‘손수’ 영장을 발부했다.
계통을 무시한 이 처사에 최검사장은 너무도 분격했다. 즉시 김검찰 총장에게 찾아가 따졌다.
김총장은 몹시 난처한 표정을 지으면서 경무대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영감태기가 노망이 들었지..... 저 영감이 최검사장한테는 일체 비밀로 하라고 해서 그리 된 거요. 양해해 주시오.”
당시 군 수사당국은 암살이 한독당 내분 때문이었다고 몰기 위해 한독당 조직부장 김학규 등 7명의 당원을 구속할 방침을 세웠다. 그런데 최대교 지검장이 ‘자기들 사람’이 아니어서 혹시라도 일에 차질이 생길까 봐 두려웠다. 그래서 이승만이 직접 검찰총장에게 지시해 영장을 받아 내게 한 것이었다. 이처럼 계통을 무시한 사례는 그 당시 한둘이 아니었다. 이승만은 조금이라도 자신의 뜻에 비판적인 사람은 두고 보지 못했다. 그래서 이승만의 주변엔 노예적 아첨을 일삼는 비굴한 모사꾼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대통령의 신임을 받고 있는 사람은 누구나 계통을 무시하고 직접 보고 할 수 있었고, 또 대통령은 자신이 신임하는 사람이면 그 누구에게라도 계통을 묵살하고 직접 일을 시켰다. 바로 그 때문에 암살 모의와 실행도 가능했으며 암살 이후의 시나리오를 행동으로 옮기는 데도 아무런 걸릴 게 없었던 것이다. 장흥 사령관이나 최대교 검사장처럼 앉은 채 허수아비가 되어 버리는 사람이 생겨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앉은 채 허수아비가 된 사람은 이들 말고도 여럿 있었다.
71 권중희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 민족정기구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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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허수아비가 된 SIS 대장
채병덕 참모총장은 사건 당일 날 옹진반도 전투에 참가했기 때문에 저녁 늦게 서울로 돌아왔다. 그는 신성모 국방장관을 먼저 만난 뒤 헌병 사령부로부터 수사 결과를 보고받았다.
그리고 이튼 날 백범 살해사건은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정치사건이니 만큼 안두희에 대한 수사를 육군 투수정보대(SIS)에서 다루도록 하라고 조치했다. 그 사이에 국방부 보도과는 현병 사령부 조사내용에 근거하여 사건수사의 중간발표를 내놓았다. 당시 육본 정보국장은 백선엽(白善燁) 대령, SIS 대장은 김안일(金安一) 소령이었다.
SIS 사무실은 조선호텔 맞은편에 있었는데, 겉으론 대륙공사란 간판을 붙이고 있었다. 안두희가 SIS로 이첩된 28일 밤 채병덕 총참모장이 부관 이상국 소령을 데리고 SIS 사무실에 나타났다. 김안일 소령은 깜짝 놀라 일어섰다. 채병덕 총장은 김안일이 비켜 준 자리로 가 앉더니 대뜸 이렇게 말을 던졌다.
“김소령은 안두희 사건은 취급하지도 말고 곁에도 가지 마시오.”
“그럼 어떻게 합니까?”
“노엽(盧燁) 중위한테 취조를 맡겨.”
노엽 중위가 채총장과 가깝다는 건 그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노엽 중위는 일제 말기에 원산헌병대에서 특무조장(지금의 준위)을 지낸 친일경력자였다.
나는 이 사건이 정치적 사건인 것 같은 직감이 들어서, 물어 볼 형편도 아니고, 또 총참모장이 일부러 누추한 곳까지 나와서 지시하는 거라서 아무 말도 못했다. 그날 밤부터 숙직실에 안두희를 데려다 놓고 노엽 중위와 이진용 소위가 신문했다. 나는 채총장의 지시가 있어서 어떻게 돼 가는가 물어 보지도 않았다. 노엽도 나한테는 보고도 않고 채병덕한테 직접 보고하고 지휘를 받았다. 그 사건은 채병덕이 직접 지휘했다.(김안일의 증언, 1984년 8월 『월간 조선』)
28일 밤, SIS로 이첩된 안두희를 맞이한 것은 김창룡이었다. 김창룡은 안두희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안의사, 수고했소.”
이후로도 김창룡은 안두희의 외삼촌을 자처하는 김지웅과 함께 자주 면회를 왔다. 김지웅은 면회 올 때 경찰의 에스코트까지 받았으며, 홍종만과도 함께 자주 왔다.
수사를 맡은 노엽과 이진용 중위(이진용은 수사 도중 중위로 진급했다)에게는 가끔 신성모와 전봉덕이 직접 전화를 걸어 왔다.
김창룡은 나한테 반드시 경어를 썼다. 나를 ‘안의사’라고 불렀다. 부하들에게도 나를 잘 봐주라고 지시했다. 그래서 SIS 전체가 나를 안의사라고 불렀다.
대륙공사에 가서 말이 감방이지 숙직실에 있었다. 아주 편했다. 김창룡이가 압력을 넣었다. 한 열흘 지나니 김창룡이 압력을 넣고 있다는 걸 알겠더라.
그때 도진희가 SIS 상사였다. 처음엔 나한테 마구 욕을 했다. 그러더니 나중엔 태도가 백 80도 달라졌다. 전부 김창룡이 독단해서 처리했다. 이랬을 거다 하는 식이었다. 김창룡은 하여튼 했건 안했건 이사람(안두희) 훌륭하다고 했다,(안두희, 1984년 7월 『월간 조선』인터뷰)
안두희는 처음 3,4일간은 취조에 제대로 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김창룡에게서 어떤 지시를 받은 듯 입을 열기 시작했고, 시종일관 단독범임을 주장했다. 노엽과 함께 수사를 맡은 이진용은 현장검증까지 했던 터라 단독범행일 수 없다는 심증을 일찌감치 굳히고 있었다. 그러나 안두희의 억지 주장을 그대로 인정해 줄 수밖에 없었다.
채병덕 참모총장이 SIS 대장을 제치고 직접 수사를 지휘하고, 김창룡이 수시로 찾아와 ‘안의사’의 안녕을 확인하는 그런 상황에서 누가 감히 ‘배후’가 누구인가 따위의 불온한 질문을 던져 화를 자초하겠는가.
72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 한길 권중희
[7] 구형량을 조절하려 한 참모총장
안두희가 구속된 지 1개월이 지난 7월 25일, SIS는 범인 안두희를 육군 본부 법무감실 검찰과로 송치했다. “여러 가지 상황을 참작할 수 있으나 사건의 중대성에 비추어 살인죄는 면할 수 없다”는 의견서가 첨부되어 있었다.
법무감실의 홍영기 검찰과장이 사건을 배당받았다. 홍영기 소령은 조사를 마친 후 안두희를 ‘살인 및 군인의 정치 관여’혐의로 기소했다. 수사 도중에 안두희의 입을 열게 하려고 애썼으나 허사였다. 홍소령의 끈질기고 날카로운 심문에 말꼬리가 잡혀 새로운 사실이 발각날 듯싶으면 안두희는 “조금 전 한 말은 거짓이다. 정신이 없어 대답을 잘못했다”하고 횡설수설하는가 하면 입에 거품을 품으며 실신한 척하거나 정신병자 같은 행동을 취해 위기를 넘겼다.
안두희를 살인죄로 기소했다는 신문보도가 나간 다음부터 홍영기 소령의 집에는 협박 전화와 편지가 끊이질 않았다. 그럴 즈음 채병덕 참모총장이 홍소령을 총장실로 호출했다.
“홍소령, 거 안두희에게 얼마나 구형할 생각인가?”
“살인자는 마땅히 사형을 받아야지요. 그래야만 두 번 다시 이런 사고가 발생하지 않을 것입니다.”“그리나, 홍소령!”
“..... ”
“사형은 너무 심해, 내 생각 같아선 말인데, 징역 10년만 구형하면 좋겠어.”
“그렇게는 안 됩니다. 살인자는 사형이라는 게 우리 나라 불문율 아닙니까? 하물며 현역군인이 전투에나 써야 할 무기를 남용해서 애국자를 살해했는데 구형을 10년만 한다면 국민들이 이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두꺼비처럼 입맛만 다시고 있던 채병덕 총장은 투박한 평안도 사투리로 맞받았다.
“그건 귀관의 생각이지, 내 생각은 달라. 10년이면 적당해. 검찰관도 총참모장의 지휘를 받는다는 거, 그걸 알아야 돼. 돌아가서 잘 생각해 봐.”(『비화 제 1공화국』동아일보사)
총장실을 나서는 홍영기 소령에게 암살 며칠 후의 일이 떠올랐다. 김구 선생의 시체를 검시하겠다고 보고했더니 직속상관이 “이번 사건은 범인의 진술대로만 조사해서 처리하라는 명령이오.”라며 참모총장의 지시를 전해 주었던 것이다.
홍영기 검찰과장은 두려운 생각도 들었지만 법무장교로서의 곧은길을 걷기로 다짐했다.
안두희에 대한 공판은 8월 3일에 개정되었다.
그런데 홍영기 검찰관은 “10년쯤만 구형하라”는 채병덕 육군 참모총장의 압력을 묵살하고 안두희에게 총살형을 구형했다. 그 후 선고 공판이 끝나기가 무섭게 홍영기 검찰과장은 해임조치 되어 일선부대 한직으로 추방되어 버렸다.
이쯤 되면 우리는 저 ‘무고한 제3자’의 행렬에 채병덕 참모총장을 끼워 주지 않을 수 없게 된다.
73 권중희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 민족정기구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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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검찰관을 호통친 재판장
8월 3일, 안두희를 재판하는 육군 중앙고등군법회의가 대법원 대법정에서 개정되었다. 재판장은 원용덕 준장이었다. 그는 만주군 출신으로 군의관 경력을 지니고 있었다. 공판이 열리고 있는 대법정 근처에는 서북청년회의 회원들로 보이는 청년들이 몰려다녔고 대법원 담벼락과 전신주, 덕수궁 돌담에는 ‘대한민국의 초석이며 애국자인 안두희를 석방하라’는 삐라가 곳곳에 나붙었다.
안두희는 수사과정에서 홍영기 소령에게 공판 내용을 라디오로 생중계해 줄 것을 요구하다가 그것이 거절되자 법정에 방청객들이 다 들어오지 못할 경우 밖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확성기라도 설치해 달라고 요구했다. 또 여러 사람들에게 편지와 함께 방청권을 보냈다. 살인범이 옥안에서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방청권을 보낸 것이다.
공판 첫날 사람들의 관심을 끈 증인은 홍종만이었다. 한독당 사람들은 사건 후에 홍종만이 감쪽같이 사라져 버리자 김학규 부장과 같이 구속되었거니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증인석에 나타나 한독당에 불리한 증언을 하는 것을 보고 그때서야 그의 정체를 깨닫게 되었다. 이날 법정에서 그는 자신이 안두희를 한독당에 입당하도록 권고했고 안두희는 비밀당원임에 틀림없다고 증언했다.
또 법정에는 홍종만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증거물로 홍종만의 일기가 제출되었다.
-------------------- 주석
뒷날 홍종만은 1974년 5월, 동아일보에 연재한 고백수기에서 이때의 내막을 이렇게 밝혔다.
“사건 후에 김지웅이 변호사를 사 가지고 와서 ‘안두희는 이렇게 얘기하기로 했다’고 하면서 나한테는 한독당이 공산당과 내통하고 있다고 법정에 나가 진술하라고 했다. 김지웅은 또 한독당의 조직이 점조직으로 돼 있다고 하라고 했다. 그러나 법정에서 그런 말을 묻지 않아서 그렇게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평생 일기 같은 거 써 본 일이 없다. 내 일기장은 그 사람들이 만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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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판이 끝나자 그를 쫓으려는 한독당 당원들을 따돌리고 홍종만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져 버렸다.
진풍경은 공판 사흘째이자 마지막 날인 8월 5일 날 벌어졌다. 대법정 주변에선 아침 9시부터 김성주가 이끄는 서북청년단원들이 삐라를 살포하고 다녔다.
‘공산도배 김구를 죽인 것은 애국적 행동이다’
‘애국자 안두희에게 훈장을 주어라’
변호인의 반대심문을 받은 안두희는 군 수사당국의 수사 결과와 똑같은 내용을 당당한 태도로 진술했고 “나에게 사형을 내리지 않는다면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리겠다”는 ‘의사’다운 자못 비장한 발언까지 했다.
검찰관 홍영기 소령은 피고인의 궤변을 일일이 반박하고 안두희에게 사형을 구형했다. 이에 안두희의 변호인단(관선 김종만 소령, 권정수 중령, 민간 변호사 이상기)은 검찰관을 향하여 폭언에 가까운 궤변을 늘어놓았다.
“피고인의 범행 목적과 동기는 ‘정당’하다. 국가가 중요한가. 법이 중요한가. 피고인의 행위는 대한민국에서 ‘표창’할 일이다. 국토방위의 신성한 임무를 띠고 있는 군인은 어느 곳에서든지 조국을 위해 싸울 수 있다.”
김구 선생 암살이 ‘장소에 구애됨이 없이 조국을 위해 싸운’ 결과이니, 백범 살해에는 훈장을 주고, 다만 군인으로서 정당에 가입한 죄만을 물어 집행유예로 석방하라는 것이었다.
“옳소!”
“잘한다!”
방청석에서 고함소리와 박수가 쏟아져 나왔다. 안두희가 보낸 방청권으로 방청석을 차지하고 앉아 있던 서청원들의 응원이었다.
변호인의 이같은 노골적인 살해 옹호 발언에 홍영기 검찰관은 흥분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변호인은 법률가로서는 너무 상식에 벗어난 말을 하고 있소.”
이에 변호사도 “검찰관의 발언은 인신공격”이라며 응수했다. 공방이 가열되자 원용덕 재판장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제지했다.
“검찰관은 변호인의 위신을 손상시키는 발언이나 개인에 대한 인신공격을 삼가사오!”
홍영기 검찰관은 그래도 굴하지 않고 이번에는 재판부를 향해 호소했다.
“같은 군인 입장에서 구형하고 재판하게 되었지만 감상적인 인정에 끌리는 일이 없이 어디까지나 냉정한 처단을 함으로써...”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원용덕 재판장이 벼락같이 호통을 쳤다.
“검찰관의 지금 발언은 우리 재판관들을 모독하는 중대한 발언이오! 취소하시오!”
결국 홍영기 검찰관은 발언을 정정해야 했다. 원용덕 재판장의 호통은 변호사의 변론 못지않게 노골적이었다. 안두희가 재판을 받는 게 아니라 홍영기 검찰관 혼자서 재판장을 비롯한 법정 안의 모든 사람들과 외로이 싸우는 것 같았다.
판결은 그날 바로 내려졌다. 재판관들의 무기명 투표 결과 ‘과반수’의 동의로 종신형이 선고되었다.
한편, ‘군인인 안두희를 당원으로 가입시켰다’는 죄목으로 김학규 부장은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안두희에게 종신형이 선고되자 김성주는 곧바로 대기하고 있던 서북청년당원 50여 명을 동원, ‘애국자 안두희를 무죄석방하라’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광화문을 거쳐 경무대 입구까지 시위를 감행했다. 경무대 입구에서는 밤늦게까지 연좌시위를 벌였다. 그리고 이튿날부터는 안두희의 석방을 요구하는 벽보, 삐라가 서울 시내에 난무했다.
<비격
애국청년 안두희를 즉시 석방하라
김일성 괴뢰군은 잔인무도하게도
음모와 학살로 동족을 살해하고 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협상이니 타협이니 운운하는 분자가 있다
이를 격파함이 실지회복(失地回復)의 첩경이다
아! 애국청년 안두희 동지는
실지회복의 전초전을 감행하였다
애국청년 안두희에게
종신형이란 웬 말이냐
석방하라! 석방하라!>
위대한 민족지도자의 암살을 다루는 재판은 고작 3회의 심리 끝에 이렇게 끝나 버렸다.
재판장이었던 원용덕 준장은 이후 이승만의 총애를 받아 중장으로까지 승진하였으며 정치장군으로서의 권세를 한껏 누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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