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원자력연구소 출범
1959년 3월 1일 홍릉에 있는 서울대 공과대학 4호관을 빌려 원자력연구소가 출범했다.
3·1절을 택해 원자력연구소를 개소한 것은 힘이 없어 당한 식민지배를 설욕하겠다는 이승만 정부의 의지 때문이라는 말도 있었다.
연구소는 해외에서 훈련받은 20여 명의 연구관을 주축으로 출발했고, 당시 최고의 대우를 해 주면서 인재들을 불러모았다.
이때 연구소에 입소한 이창건(李昌健) 박사(1929년생)에 따르면, 원자력연구소 근무자는 각각 본봉의 100%에 해당하는 연구수당과 위험수당을 받았기에 본봉만 받는 원자력원 근무자에 비해 월급이 세 배나 많았다고 한다.
5. 전문가 의견에 손들어준 박정희
1960년대 중반 박정희 정부는 본격적인 원자력 발전소 건설에 나섰다.
어떤 노형(爐型)을 도입할 것인지를 놓고 정부는 선택의 갈림길에 섰다.
당시 3가지 노형 가운데 비등경수로(후쿠시마 원전에 쓰인 모델)는 조기 탈락하고 미국형 가압 경수로와 영국형 가스 냉각로 두 가지가 남았다.
동해화력과 인천제철 등을 짓기 위한 차관 도입을 성사시켜 한국 정부에 발언권이 컸던 유대인 숄 아이젠버그가 가스 냉각로를 밀고 국내 정치인들이 이에 가세했다.
“정상배들이 작당하여 가스 냉각로를 밀어붙였고 정치적 배려를 하면 가스 냉각로가 채택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는데, 기술진들은 자리를 내놓을 각오를 하고 가압 경수로를 추천했다”고 이 창건 박사는 회고했다.
대통령이 내린 최종 결정은 가압 경수로였다.
가압 경수로는 안전성과 방사선 관리 면에서 가장 뛰어난 모델로 후일 주류가 됐고 가스 냉각로는 지금 거의 쓰이지 않는다. 만일 이때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눈부신 한국의 원자력발전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창건 박사는 “당시만 해도 국가 최고지도자가 기술인의 말을 듣고 정책에 반영했음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강조했다.
6. 원자력 원로가 국립묘지 찾은 이유
2009년 12월 한국이 UAE에 원자력발전소 4기를 수출하는 데 성공했다.
후발주자 한국이 기술을 배워 온 미국 등을 따돌리고 거둔 쾌거였다
며칠 뒤 이창건 박사는 서울 동작구 국립묘지를 찾았다.
가장 먼저 들른 곳은 이승만 대통령 묘역. 그는 원자력발전소 수출 성공 기사가 실린 신문을 놓고 젊은 시절 부르던 호칭을 사용하며 이렇게 보고했다.
“할아버지께서 50년 앞을 내다보시고 저희를 훈련시킨 보람이 있어 이번에 중동에 원자로를 수출했으니 기뻐하십시오. 앞으로도 계속 노력하겠습니다.”
다음으로 박정희 대통령 묘소를 찾았다.
“각하 한국 원자력계가 드디어 중동 사막에 무궁화 꽃을 피웠습니다.”
뒤이어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의 묘소도 찾았다.
“DJ는 야당 지도자 때부터 목포선언 등을 통해 원자력 발전을 지지했고, 노 대통령도 반(反)원전주의자들에 둘러싸여 있었지만 집권 2년 후부터 원자력발전을 인정하고 육성했다”는 게 그 이유다.
실제로 두 대통령 시절엔 원자력발전소가 추가 건설됐다.
7. 탈 원전 정책에 대한 이창건 박사의 견해
최근 망백(望百)의 한국 원자력계 산 증인 이창건(李昌健) 박사에게 정부의 탈 원전 시책에 대한 그의 의견을 물어봤다.
1)문재인 대통령은 왜 탈원전에 집착한다고 보나?
“영화 ‘판도라’를 보고 그랬다고도 하는데, 과학기술 전문가들의 말에는 귀를 닫고 정치적으로 ‘내 편’의 말만 듣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실제로 문 대통령이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죽은 사람이 1368명이 죽었다고 발언했지만 그건 진실이 아니다. 방사선 누출로 사망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이런 왜곡된 정보로 국가 기간산업이 흔들리고 있다. 전직 대통령들과는 정반대 아닌가.”
2)앞으로 원자력 발전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결국 국민이 선택할 문제 아닐까 생각한다. 다음 대통령 선거에서는 후보들이 탈 원전 정책 존속 여부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국민에 물어야 한다는 얘기다. 현명한 국민은 무엇이 옳은지 정확하게 판단할 것이라 본다. 힘들게 쌓아 올린 원자력 성공신화가 허무하게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다.” (끝)
첫댓글 이 창건 박사
1949.09 ∼ 1957.09 서울대학교 전기공학 학사 1970.09 ∼ 1973.08 서울대학교 원자력공학 박사 1994.04 ∼ 2002.03 대한민국 원자력위원회 원자력위원 1995.09 ∼ 현재 한국전력기술위원회 정책위원장
1950년대 후반 자생적 모임인 Nuclear Study Group 회원으로 활동하며 원자력 관련 1)법 제정 및 2)정부 기구 및 연구소 설립을 주도했다. 이후 한국인 최초의 원자로 운전면허 취득에서부터 대한민국 최초의 원자력 발전소인 고리 1호기 건설을 거쳐 한국형 원자로 개발에 이르기까지 그의 족적은 한국 원자력의 성공신화와 일치한다. 그는 최근까지도 스마트 원자로에 냉동·냉방 기능을 추가하는 방안 등으로 2건의 특허를 따낸 ‘현역’ 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