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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을 걸려 해모수는 성산聖山(백두산)남동쪽 동아리하東阿里河(압록강)의 어느 나루터에 당도했다. 나룻배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는데, 여러 사람이 배를 기다리며 선착장에 대기하고 있었다.
훤칠한 풍채와 환한 얼굴의 해맑은 젊은이 해모수가 붉은 빛 말을 타고 검과 창, 활 등으로 무장한 채 그곳에 나타나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쏠렸다.
“흥! 꼬락서니하고는! 지가 무슨 대단한 영웅호걸이나 된다고! 요즘 애들은 별 장난감을 다 가지고 다니는군.”
선착장에 있던 사람들 가운데서 돌연 비아냥거리는 소리가 들리며 해모수의 귀와 낯을 간질였다. 뜻밖의 말에 다소 놀란 해모수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아보았다. 선착장 변두리에 두 젊은이가 나란히 앉아 있었는데, 아마도 거기서 나오는 소리 같았다.
해모수가 그들을 훑어보니, 둘 다 스무 살쯤 돼 보이는 젊은이들로서 위아래 흰옷을 입었는데, 검과 활을 차고 있었다. 얼굴은 아주 예쁘장한 게 꼭 여자들 같았다. 해모수가 말에서 내려 그들 곁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두 남자가 두 눈을 크게 뜨고 해모수를 쳐다보았다. 해모수도 불길 같은 시선으로 그들을 잠깐 바라보다 곧 미소를 지으며 그들에게 예를 표하고 물었다.
“실례합니다만, 방금 혹시 저를 두고 말씀하신 건가요?”
그 때 마음 한 구석에서 어머니가 생전에 하신 말씀이 떠올랐다.
“선비는, 까닭 없이 시비를 거는 사람들과 절대로 상대하지 않는 법이다. 그것이 너의 몸과 마음을, 분쟁과 재난으로부터 지키는 지혜다. 알겠느냐?”
그런 교훈은 이미 해모수의 뇌리에 안착되어 있었으므로 해모수는 본능적으로, 그들에게 질문을 던지면서 뭔가가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직감했다.
“그렇다! 그래도 귀는 먹지 않았구나.”
두 사람 가운데 하나가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었다.
해모수는 속으로 몹시 불쾌했으나 내색하지 않고 검은 눈동자를 굴리며 대꾸했다.
“귀하는 입이 좀 거칠군요. 그리고 귀하의 눈은 정상인가요? 이것들이 장난감으로 보이니.”
해모수가 자기 무기들을 가리켰다.
흰옷의 젊은이가 한차례 씩 웃었다.
“그대 입도 그리 부드럽진 않군. 장난감인지 아닌지는 시험해보면 금새 알 수 있지.”
이것은 싸움을 거는 도전적인 말이었다. 해모수는 어이가 없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이토록 다짜고짜 시비를 거는 자들은 거의 만난 적이 없었다.
‘거만하기 짝이 없는 게, 본때를 보이지 않으면 수그러들 기세가 아니군.’
이런 생각이 떠올랐지만, 이들과 결코 다투어서는 안 된다는 어떤 양심의 소리 때문에 해모수는 다시 웃음을 던졌다.
“시험해볼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런 건 아이가 가지고 있으면 장난감이고 어른이 가지고 있으면 무기죠. 난 아직 아이니까, 당연히 형들의 말이 옳수다.”
해모수와 상대하던 흰옷의 젊은이가 빙긋이 웃으며 받아쳤다.
“겁을 먹었군. 애는 애구나.”
갑자기 해모수의 가슴에서 불덩어리 같은 게 불끈 솟아올랐다. 해모수가 막 대꾸하려 할 때, 저쪽에서 어떤 컬컬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배 떠나갑니다! 손님들 배 타지 않소?”
해모수와 두 청년이 옥신각신하는 사이 어느 샌가 나룻배가 도착해 모든 사람이 이미 승선하고 해모수와 두 청년만이 아직 뭍에 남아 있었다.
해모수는 나룻배를 흘끗 바라본 후 두 청년에게 말했다.
“우리 셋은 여기서 좀 더 놀다 가는 게 좋지 않겠소?”
“하하! 꼬마가 드디어 달아올랐군. 우린 바쁜 몸이니 너 혼자 여기서 실컷 놀아라.”
말을 마친 두 백의 청년은 사공에게 소리쳤다.
“잠깐만요! 같이 갑시다.”
사공은 삿대를 밀며 배를 뭍에서 강으로 빼고 있었다. 황급히 달려간 두 청년은 일제히 몸을 날려 나룻배에 사뿐히 내려섰다.
“사공 아저씨, 멈춰 주시오!”
해모수가 역시 소리쳤다.
“젖비린내 나는 저 녀석은 말까지 가지고 있는데다, 무슨 대장군이라도 되는 듯한 차림이니, 수상한 놈이오. 태우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소. 말까지 태우면 배가 가라앉을 거요.”
해모수와 입씨름하던 백의 청년이 웃음을 흘리며 사공에게 부탁했다.
사공은 그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말없이 배를 다시 뭍으로 붙였다. 해모수는 말과 함께 배 위에 올랐다. 두 청년이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일단 강을 건넌 후에 함께 놀아도 괜찮을 것 같소.”
해모수가 두 사람을 향해 다시 포문을 열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한차례 쳐다보고 빙긋이 웃었다.
“꼬마가 아직 열이 식지 않은 것을 보니, 강물에 빠뜨려 좀 식혀주어야 하지 않을까?”
“하하! 그것도 좋은 생각이네. 하지만 열을 식히려다 목숨을 잃게 하면 우리가 아주 귀찮아지지 않겠나?”
“그렇다면 바가지로 물을 퍼서 식혀주는 수밖에.”
한 청년이 이렇게 대꾸하고 사공에게 물었다.
“사공 아저씨, 여기 물 퍼내는 바가지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야말로 갈수록 가관이었다. 화가 잔뜩 나 있던 해모수는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고 말았다.
“내 열을 식혀준다니, 고맙기 짝이 없소. 결자해지結者解之라. 형들이 열을 올렸으니, 열을 내리는 것도 형들의 책임일 터.”
“아무렴, 그렇고말고.”
한 청년이 드디어 배 밑바닥에서 바가지를 찾아냈다. 그는 정말로 허리를 굽혀 한 손으로 배 난간을 붙잡고 다른 한 손의 바가지로 강물을 떴다.
“꼬마야, 이리 와서 머리를 내밀어라. 물을 부어줄 테니.”
자신의 애마愛馬와 함께 혼자 고물 쪽에 서 있던 해모수가 대답했다.
“거긴 사람이 많으니 자칫 다른 분들이 피해를 입을 수도 있소. 이쪽으로 와서 부어주시오.”
“어찌 버르장머리 없이 형님께 이리오라 저리가라 명하느냐? 오기 싫다면 내가 그냥 뿌리지.”
말과 함께 그는 실제로 해모수를 향해 바가지의 물을 날렸다. 해모수는 팔짱을 낀 채 고스란히 물벼락을 맞고 말았다. 강물이 얼굴에서부터 온몸으로 흘러내려 옷을 흠뻑 적셨다.
두 백의 청년뿐만 아니라, 배 위의 모든 사람이 깜짝 놀랐다. 검과 활과 창으로 무장하고 있는 해모수가 어떻게 나올지 몰라, 모두들 가슴을 졸였다.
“열이 너무 많이 올라서, 한 바가지로는 잘 식지 않는 것 같소. 한 바가지 더 부어주시오.”
해모수가 고요한 목소리로 부탁했다.
뜻밖의 말에 바가지 물을 뿌린 청년이 얼굴에 긴장하는 빛을 띠었다. 하지만 그는 다음 순간 다시 물 한 바가지를 퍼 올려 해모수를 향해 보기 좋게 휙 뿌렸다. 해모수의 얼굴과 옷이 흠뻑 젖었다.
“꼬마야, 이젠 좀 식었느냐?”
“옛 말에도 ‘삼 세 번’이라는 속담이 있소. 두 번은 부족하오.”
청년은 거침없는 행동으로 다시 물을 떠서 해모수에게 쩍 부었다. 해모수는 물에서 나온 생쥐 꼴이 되고 말았다.
차가운 강바람이 해모수의 얼굴을 때리고 어떤 서러운 기운이 그의 가슴을 강타했다. 어릴 적에 아버지와 형들에게 쫓겨나 어머니와 단 둘이 외롭게 살았으나, 어머니마저 얼마 전 돌아가시고 말았다. 아버지나 형에게도 편안히 기댈 수 없어 의지가지없는 몸을 이끌고 갈 곳 없이 헤매는 자신의 모습이 순간적으로 너무나 처량하게 생각되었다.
가슴 속에서 뜨거운 눈물이 솟구치려 했다. 아니, 그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다행히 얼굴이 물에 흠뻑 젖어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그가 울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선미船尾에 서 있던 해모수는 뒤 돌아서서 멀어져가는 강 언덕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마음 한 비탈에서는 어떤 만족감도 든든하게 솟아올라왔다. 마침내 이겼다는 만족감. 까닭 없는 시비에 휘말려 싸움을 일으킬 뻔 하다가 마침내 자신의 분노를 이기고 정복했다는 어떤 자족감이 아랫배를 꽉 채웠다.
“성城을 정복하기보다 백배나 더 어려운 것이, 자기 마음의 분노를 정복하는 것이다. 마음의 분노를 제어할 줄 아는 사람은, 마침내 성을 얻을 수도 있고 나라를 얻을 수도 있단다.”
이것은 어머니의 유훈이었다.
‘그렇다. 내가 이까짓 시정잡배 같은 자들의 충동질에도 참지 못하고 일을 터뜨린다면, 어찌 장차 도적들을 멸하고 나라를 평정해 백성들을 편안하게 할 수 있겠는가.’
두 백의 청년은 해모수가 물벼락을 세 차례나 맞은 후 아무 일도 없는 듯, 뒤돌아서서 고요히 강 언덕 쪽을 바라보고 서 있자,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좀 어색한 미소를 흘렸다.
그 사이에 나룻배가 남쪽 강가에 도착한다.
해모수는 말과 함께 배에서 천천히 내렸다. 두 백의 청년은 해모수의 일거수일투족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해모수는 얼굴의 물기와 눈물을 깨끗이 씻어버린 후 말에 올라타려다 말고 갑자기 두 백의청년에게 뚜벅뚜벅 걸어갔다.
두 사람이 해모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해모수가 점잖게 인사하며 말했다.
“아까는 실례했소이다. 그리고 고맙소. 하지만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소.”
“마음껏 묻게나. 동생.”
백의청년의 말투가 좀 부드러워져 있었다.
“이 길로 곧장 내려가면 삼삼촌, 칠칠동이라는 동네가 나온다고 들었는데, 혹시 그 곳을 알고 있소?”
“알다마단가. 우리가 거기서 왔네. 하지만 삼삼촌, 칠칠동이라는 동네는 지금 없네.”
“그게 무슨 뜻이오?”
해모수가 놀라며 되물었다.
“두 마을은 오래 전에 사라지고 그 대신 그 자리에 삼칠성三七城이라는 큰 성읍이 생겼다네.”
해모수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자, 그들이 설명했다.
“두 동네에 인구가 많이 유입해 수만 명이 넘어가자 두 동네는 자연히 하나의 도시가 되고 오래 전 나라에서는 주변에 성을 쌓았네.”
“아, 그런 일이 있었군요. 아무튼 잘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형들은 지금 거기로 되돌아가는 길인가요?”
“그렇다네. 자네도 거기로 가는 중이라면 우리가 길잡이를 해 주지.”
“그럼 너무 고맙겠습니다.”
해모수가 정중하게 인사했다.
“하하, 인사는 필요 없네. 어차피 가는 길인데.”
“어느 정도 가면 거기까지 도달할 수 있을까요?”
“말을 좀 분명하게 하게. 시간을 말하는 건가, 아니면 거리를 말하는 건가?”
“죄송합니다. 둘 다요.”
“거리상으로 아마 오백여리 될 터이니, 얼마나 걸릴지는 가는 수단과 속도 나름이겠지.”
“이 말이 이래 뵈도 아주 힘이 좋습니다. 형들은 몸이 가벼울 것 같으니, 아마도 우리 셋이 타고 간다 해도 끄떡없을 겁니다.”
두 사람이 빙긋이 웃었다.
“괜찮네. 우리도 말을 한 필 사서 둘이 함께 타고 가면 좀 빨리 갈 수 있겠구먼.”
강을 건너 얼마 걷지 아니해서 큰 성읍이 나타났다. 세 사람은 마 시장을 들러 말을 한 필 구입한 다음, 길을 재촉했다.
해모수와 두 청년은 부지런히 말을 재촉했지만 험준한 산길이 많아 말들은 속력을 내기 어려웠다. 이튿날 어느 작은 성시에 겨우 당도한 세 사람은 여관으로 들어갔다. 백의청년이 먼저 제안한다.
“여러 가지로 불편할 테니, 우리 두 사람은 한 방을 쓰고, 동생은 방을 따로 하나 얻는 게 좋겠군.”
해모수는 별 생각 없이 그러자고 했다. 그가 잠자리에 들려고 할 때 밖에서 헛기침소리가 들렸다.
“동생, 잠들었는가?”
“아닙니다. 무슨 일이오?”
“잠깐 할 얘기가 있네.”
“들어오시오.”
백의청년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이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어제 낮 강변과 배안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사과하러 왔네.”
“뭐, 그런 일 가지고 아녀자처럼 그렇게 따집니까? 저는 다 잊어버린 지 오랩니다.”
“동생이 그렇게 넓은 도량으로 용서해 주니 고맙네.”
옆에 있던 다른 청년이 허리춤에서 조롱박을 풀어내더니 세 개의 잔을 내 놓았다.
“사과하는 뜻으로 우리가 동생에게 사죄 주 한 잔 올리겠네. 부디 우리를 용서한다면, 꼭 받아주게나.”
“아닙니다. 이미 용서했으니, 이런 술은 필요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지금까지 술을 배우지 못한 어린 아이입니다.”
해모수가 정중하게 사양했다.
“아닐세. 동생의 헌헌한 풍채와 맑게 빛나는 눈, 해 같이 환한 얼굴은 영웅의 기상을 듬뿍 담고 있네. 영웅이 술을 못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네. 술을 아직 배우지 못했다면, 지금부터 배우면 될 게 아닌가? 부디 우리 성의를 무시하지 말게나.”
해모수는 난처하기 짝이 없었다. 어렸을 적부터 어머니로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래로 남아대장부를 패가망신시키는 게 세 가지가 있는데, 그 중 첫째가 색色과 술이고, 둘째가 은금이고, 셋째가 명예욕이니라. 무릇 큰 뜻을 품은 남아는 언제나 이 셋을 멀리해야 하느니라. 알겠느냐?”
커가면서 해모수는 이렇게 반문한 적이 있다.
“어머니, 대다수 남자들이 아름다운 여자를 얻고 돈을 벌고, 명예를 얻는데 일생의 목표를 두고 사는 것 같은데, 그 셋을 멀리하라면, 그럼 산 속에 들어가 선인仙人이 되라는 말인가요?”
“그런 것들을 구하고자 애쓰는 자는, 큰 뜻이 없는 소인배다. 너는 큰 뜻을 품어 만백성을 돌보는 큰 사람으로 살고 싶냐 아니면, 오로지 그런 것만 추구하며 사리사욕을 위해 살다가 일생을 허무하게 마치는 한낱 필부가 되고 싶냐?”
“저는 만백성을 위해 큰 사람으로 살고 싶사옵니다. 어머니.”
“장하다, 내 아들아. 그렇다면 부디 그 세 가지를 독사 보듯 하고 돌멩이 보듯 하렷다?”
“명심하겠사옵니다.”
어머니의 말씀이 떠오르자 집을 떠나오면서, 누군가가 전해 준 금화와 은전들을 챙겨 온 것이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빈손으로 어떻게 여행을 한단 말인가?
해모수는 다시 한 차례 사양했다.
“죄송합니다. 저의 모친께서 생전에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술은 거두어 주심이 좋을 듯합니다.”
“에이, 이 사람, 소인배같이 왜 이러나? 대범한 마음을 가지게나. 술 한 잔이 뭐가 어쨌다고? 딱 한 잔만 받게. 더 이상 권하지 않겠네.”
백의청년은 호리병박의 술을 각 잔에 따랐는데, 해모수의 잔에는 반만 채웠다.
“자, 우리 셋이 이 한잔만하고 헤어지세.”
“건배하지. 동생 어서 들게.”
“자, 어서!”
해모수는 술을 좋아하지 않았으나 그들의 성의를 차마 무시하기 어려워 그 반잔을 마셨다.
“동생, 우리 성의를 받아줘서 참으로 고맙네. 자 그럼, 편히 주무시게.”
두 사람은 두 말 않고 자기들 방으로 돌아갔다.
해모수도 잠자리에 들었다. 술은 그다지 독하지 않은지 처음 입에 대보았으나 아무런 취기도 일으키지 않았다.
새벽녘인가, 해모수가 잠에서 얼핏 깨어나 보니 옆에 인기척이 느껴졌다. ‘여기가 어디지? 아, 삼삼촌, 칠칠동을 찾아가는 길에 묵은 여관이지.’
해모수는 가슴이 갑갑함을 느낌과 동시 이상한 감정과 욕망이 솟구침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 그가 일어나 초에 불을 켰다.
그의 옆에 어느 여인이 이불을 덮지 않고 누워있었는데, 반라의 모습이었다. 그가 불을 켜자 그녀가 일어나더니 속삭였다.
“서방님, 어서 누우세요.”
그녀는, 선연洒然해 우두커니 서 있는 해모수에게 아주 요염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다, 당신 누구요?”
“쉿! 목소리 좀 낮추세요.”
“저는 서방님께 시중을 들러 온 가련한 여자예요. 부디 천첩의 청을 거절하지 말아주세요.”
그녀가 해모수의 몸을 건드리자 해모수는 가슴이 뛰고 불같은 정념이 속에서부터 타올라 견디기 어려웠다.
소스라치게 놀란 해모수는 여인을 밀치며 냉정하게 말했다.
“어서 밖으로 나가시오. 나가지 않으면 강제로 떠밀어내겠소.”
“서방님, 부디 천첩을 가련히 여겨 주세요. 흑흑.”
그녀가 갑자기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어서 옷을 입으시오. 당신은 도대체 어디서 왔소?”
그녀는 해모수의 시퍼런 낯을 훑어보다가, 이내 단념한 듯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으며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더니 말없이 밖으로 나갔다.
해모수는 방문을 걸어 잠그고 잠자리에 다시 누웠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몸이 불편해 잠이 오지 않았다.
일어나 앉아 어머니께 배운 호흡기도법呼吸祈禱法으로 가슴을 안정시켰다.
이른 아침에 세 사람은 다시 길을 재촉했다. 해모수는 새벽에 있었던 일에 대해 의문이 가득했지만 함구했다.
두 백의청년과 여행하는 동안 해모수는 이상한 일들을 몇 차례 겪었다. 하루는 잠자리에서 일어날 때 이불 위에 뱀이 똬리를 틀고 있어서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검으로 뱀을 때려잡느라 한 바탕 홍역을 치렀다.
어느 날은, 속옷을 갈아입을 때 등에 선뜻한 감촉이 들어 혼비백산해서 옷을 벗어보니, 굵은 지네 한 마리가 옷에 붙어있는 게 아닌가. 그놈에게 물리지 않은 게 천만 다행이었다.
해모수가 이런 일들을 백의청년들에게 털어놓을 때, 그들은 뭐가 그리 우스운지 배꼽을 잡고 웃어 제쳤다.
한 날은 맹수들이 나타나 셋이 그놈들을 물리치느라고 진땀을 흘렸다. 다행히 두 백의청년의 무예가 아주 탁월하고 해모수 역시 맹수들과 싸워본 경험이 있었는지라 불과 돌들을 이용해 맹수들을 물리친 후 별 피해를 입지 않고 첩첩산중을 지나갈 수 있었다.
해모수와 두 백의청년은 동고동락하며 며칠 오는 동안 상당한 정이 들었다. 해모수가 사귀고 보니 백의청년들은 참으로 마음씨가 순박하고 의리가 굳센 자들인 것 같았다.
하지만 목적지인 삼칠성까지의 여정이 하룻길쯤 남았을 때, 우려하던 일이 기어이 벌어지고야 말았다. 산중에서 도적떼를 만난 것이다. 그곳은 길이 험준하고 대낮인데도 어두컴컴하였다.
“휘이익, 휘이익, 휘이익!”
어디선가 날카로운 휘파람소리가 세 차례 들려왔다. 이어서 까마귀 울음소리, 부엉이 울음소리 등이 기분 나쁘게 나더니, 늑대가 울부짖는 소리, 호랑이의 포효하는 소리까지 귀 고막을 자극했다.
(다음회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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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2021. 11. 26. 초겨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