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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연재물은 취금헌 박팽년 선생 탄신 6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순천박씨충정공파종친회가 발행하고,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송은석이 지은 [충정공 박팽년 선생과 묘골 육신사 이야기]라는 책의 원고이다. 책의 처음부터 순서대로 차근차근 시간 나는대로 게재토록 하겠다. 강호제현들의 많은 관심과 질책을 기다린다.
4. 박일산[박비] 스토리는 진짜일까?
육신사에서의 해설사 근무는 꽤나 매력적이다. 왜냐하면 풍부한 이야기꺼리 때문이다. 그래서 요즘 대세라고 할 수 있는 ‘스토리텔링’에 최적화된 문화관광유적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가끔씩은 이러한 장점이 오히려 우리 해설사를 당황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묘골 육신사를 대표하는 스토리텔링 한두 가지를 꼽으라면 아마도 ‘박일산[박비] 이야기’와 ‘박계창의 꿈 이야기’가 될 것이다. 이 두 이야기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살펴본 바가 있으니 지금부터는 생략하기로 하자. 그런데 묘골 육신사를 찾는 답사객 중 일부가 이 스토리에 대해 시비를 거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해설사 양반! 그거 다 그렇고 그런 얘기 아니요. 자기 문중, 자기 조상 빛내기 위해 꾸며낸 이야기 말이요.”
“해설사 선생! 묘골의 박일산[박비] 이야기를 조선왕조실록에서 검색해보니 하나도 나오는 게 없어요. 성종 임금이 직접 이름을 지어줄 정도였다면, 조선왕조실록에 뭐라도 한 줄 정도는 실려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일견 그럴싸하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 560년 내력을 지닌 한 명문가의 역사가 그렇게 허술할 리가 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는 ‘박일산[박비] 스토리’의 진실 혹은 거짓에 대해 이야기해 보기로 하자.
1. 거참! 조선왕조실록에 나와 있다는데도 자꾸 그러네…
세상 참 좋아졌다. 조선시대에는 임금조차도 열람이 쉽지 않았다는 조선왕조실록. 바로 그 조선왕조실록이 인터넷을 통해 전 세계에 공개되었으니 말이다. 실제로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를 방문해보면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그 속에 정말 엄청난 세상이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검색어 몇 자를 입력하는 것만으로도 조선왕조 오백년의 역사를 한 눈에 다 들여다볼 수 있으니, 놀라움을 넘어 경이롭기까지 하다.
스토리텔링의 보고(寶庫)인 묘골 박씨 혹은 묘골 육신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호기심 차원에서라도 인터넷 검색을 한두 번쯤은 해보기 마련이다. 이때 주로 접속하는 사이트들 중에는 아마도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도 빠지지 않을 것이다. 방대한 양의 자료는 물론이거니와 검색기능도 탁월한데다가 조선왕조 오백년의 정사(正史)를 살펴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일산[박비]’과 관련해서는 기대와는 달리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에서는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다음과 같은 검색어로는 의미 있는 검색결과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박일산·朴壹珊·朴一珊·박비·朴婢’
이쯤 되면 사람들은 ‘그럼 그렇지! 결국은 다 지어낸 이야기구나.’라며 묘골 스토리의 가치를 평가절하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검색어를 잘 선택하면 ‘박일산[박비] 스토리’가 조선왕조실록에 등재되어 있는 정사(正史)임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검색어를 다음과 같이 한 번 입력해보라.
‘朴斐(박비)’
그러면 화면에 다음과 같은 단 1건의 검색결과가 나온다.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http://sillok.history.go.kr/)에서 ‘朴斐(박비)’로 검색한 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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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161권, 선조 36년[1603, 만력 31] 4월 21일 정미(丁未)
사헌부에서 산음 현감 김응성과 태안 군수 박충후를 탄핵하다.
사헌부가 아뢰기를, …태안군수(泰安郡守) 박충후(朴忠後)는 난리 뒤에 출신(出身)한 사람으로 무재(武才)가 없고 또한 글을 알지 못합니다. 적을 방어하고 백성을 다스리기에는 실로 소임을 감당하기 어려우니, 체차를 명하소서.” 하니, 【박충후는 문종조(文宗朝)의 충신 박팽년(朴彭年)의 후손이다. 세조(世祖)가 육신(六臣)을 모두 주살(誅殺)한 뒤에, 박팽년의 손자 박비(朴斐)는 유복자(遺腹子)이었기에 죽음을 면하게 된 것이다. 갓 낳았을 적에 당시의 현명한 사람을 힘입어 딸을 낳았다고 속여서 말을 하고 이름을 비(斐)라고 했으며, 죄인들을 점검할 때마다 슬쩍 계집종으로 대신하곤 함으로써 홀로 화를 모면하여 제사가 끊어지지 않게 되었다. 박충후는 곧 그의 증손으로서 육신(六臣) 중에 유독 박팽년만 후손이 있게 된 것이다.】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고 의성군(義城君)을 추고하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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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인용문에서 밑줄 친 부분은 주(註)에 해당하는데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의 국역 원문 그대로이다. 그 내용을 보면 지금 세상에 알려진 이야기와 별반 다를 게 없다. 다만 여종의 딸과 바꿔 키웠다거나, 성종 임금으로부터 일산이라는 이름을 하사 받았다는 등의 이야기는 나타나지 않는다. 하긴 지금으로부터 무려 560년 전, 그것도 당시로서는 역모사건에 연루된 인물의 후손이었던 만큼 애시 당초 충실한 자료를 기대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점을 감안해본다면 위 조선왕조실록 기록의 행간에 ‘±α’라는 그 무언가가 숨어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참고로 노파심에서 한 말씀하고자 한다. 위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박충후(朴忠後)[1552-1611]라는 인물을 아주 무능한 고을수령으로 묘사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은 다 좋은데 한 가지 맹점이 있다. 바로 승자(勝者)의 입장에서 쓴 기록이라는 점이다. 사실 박충후는 박팽년 선생의 5대 주손(胄孫)으로 무과에 급제한 무인이다.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에 대구 유진장 및 의병장으로 활약하여 선무원종공신에 올랐으며, 동지중추부사 겸 오위도총부부총관에 임명된 인물이다. 한마디로 조선 중기 대구를 대표하는 인물을 꼽을 때 빠지지 않고 늘 언급이 되는 인물이다.
박충후에게는 남동생이 3명 있었다. 박충윤(朴忠胤)[1557-1638]과 박충서(朴忠緖)[1562-1624] 등이다. 박충윤은 선조(先祖)[박팽년]의 음덕(蔭德)으로 제용감주부을 지냈다.
조선왕조실록 선조 36년 4월 21일 정미. 붉은 표시 안에 두 줄로 기록된 부분이 박비(朴斐)와 관련된 부분이다. [忠後, 乃 文廟朝忠臣朴彭年之後也. 世祖盡誅六臣之後, 而彭年之孫斐, 以遺腹得免. 及生, 賴其時哲, 詭稱生女, 名之以斐. 及點罪人, 輒以女奴代之, 以是獨脫, 得不絶祀. 忠後, 乃其曾孫也. 六臣中, 唯彭年有後云]
임진왜란 때는 형인 박충후와 함께 의병활동을 하였는데, 초유사 김성일의 추천으로 하북대장으로 활약했다. 형과 마찬가지로 역시 선무원종공신에 오르고 사후에 통정대부 병조참의에 증직되었다. 박충서는 선조 때 무과에 합격하여 선략장군 훈련원판관을 지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향인 하빈에서 의병을 일으켜 하빈 일대를 왜적으로부터 지켜낸 공로로 역시 선무원종공신에 올랐다. 또한 그는 ‘이괄의 난’ 때도 공을 세워 진무원종공신에도 올랐으며, 사후 정헌대부 병조판서에 증직되었다. 박충서는 박팽년 선생 사당과 관련해서도 아주 흥미로운 일화가 하나 전해지는데 뒤에 다시 다루도록 하자.
참고로 묘골 박씨들은 크게 ‘동한(東閈)’·‘중한(中閈)’·‘서한(西閈)’으로 나뉜다. 이 중 ‘동한’·‘중한’은 박충후의 후손이며, ‘서한’은 박충윤의 후손이다. 박충서의 후손들은 묘골이 아닌 인근 성주지역에 주로 세거하고 있다.
2. 여기저기에 다 나오는 박일산[박비] 스토리
필자는 지금 묘골 육신사의 가장 대표적인 스토리텔링 중의 하나인 ‘박일산[박비] 스토리’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다. 다시 말해 소설이나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이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허구가 아닌 분명한 역사적 사실임을 증명하고 있는 중이다. 그것도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이라는 우리나라 최고(最高)의 정사(正史)를 통해서 말이다. 그런데 정사의 한계라고나 할까. 조선왕조실록은 아무래도 ‘2%’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조선 중·후기의 여러 문헌에 소개된 ‘박일산[박비] 스토리’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해보기로 하자. 여담이지만 ‘박일산[박비] 스토리’는 캐면 캘수록 흥미진진한 것이 정말 매력덩어리이다.
먼저 영·정조 조에 편찬된 것으로 알려진 조선후기 실학자 이긍익의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에 소개된 내용을 한 번 살펴보자. ‘한국고전종합DB’에서 해당 부분만 발췌하여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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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략) 공이 죽을 때에 아들 순(珣)의 아내 이씨(李氏)가 임신 중이었다. 대구(大邱)에 사는 교동(喬桐) 현감 이일근[李軼根·이철근의 오자인 것 같다]의 딸인데, 자청하여 대구로 갔다. 조정에서 명하기를 “아들을 낳거든 죽이라.” 하였다. 박팽년의 여종 또한 임신 중이었는데, 스스로 생각하기를 “주인이 딸을 낳으면 다행이요, 나와 똑같이 아들을 낳더라도 종이 낳은 자식으로 대신 죽게 하리라.” 하였는데, 해산을 하니 주인은 아들을 낳고 종은 딸을 낳았다. 바꾸어 자기 자식을 삼고, 이름을 박비(朴婢)라 하였다.
장성한 뒤 성종 조 때에 박순의 동서 이극균(李克均)이 본 도 감사로 와서 불러 보고 눈물을 씻으며 말하기를 “네가 이미 장성하였는데, 왜 자수하지 않고 끝내 조정에 숨기는가.” 하며, 곧 자수시켰다. 임금이 특별히 용서하고 이름을 일산(壹珊)으로 고쳤다. 지금 동지(同知) 박충후(朴忠後)가 그 자손이다.
연려실기술「제4권」<단종조 고사본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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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적인 스토리가 지금 세상에 알려진 이야기와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 다만 여종이 성주 이씨 부인의 친정집 여종이 아닌 박팽년 선생의 여종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다음 살펴볼 문헌은 육선생유고(六先生遺稿)이다. 이 책은 1658년[효종 9]에 충청도 관찰사 이경억(李慶億)이 간행한 것이다. 참고로 이 책에는 박팽년 선생의 7대 종손이자 사육신 현창사업에 평생을 바친 박숭고 선생의 발문이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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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인수(朴仁叟)[인수는 박팽년의 字]는 세종 조에 급제하였는데 육신(六臣)의 수장(首長)이라 하여 죽임을 당하였다. 그 당시에 자부(子婦)가 마침 임신을 하였는데, 아들을 낳으면 함께 죽이라고 조정에서 명하였다. 박씨의 노비 중에 역시 임신을 한 여비(女婢)가 있었는데, 그가 부인에게 말하기를 “주인께서 딸을 낳으시면 다행이겠거니와, 비록 모두 아들을 낳더라도 마땅히 제가 낳은 아이로 대신 죽게 해야 합니다.” 하였는데, 낳고 보니 주인은 아들이었고, 노비는 딸이었으므로 서로 바꾸어서 자식으로 삼았다. 현재 동지(同知) 박충후(朴忠後)가 바로 그의 후손이다. 장빈호(長貧胡)가 지었다.
○ 병자년(丙子年)의 화란(禍亂)에 집안사람이 모두 죽었다. 오직 나의 6대 조모(祖母) 이씨(李氏)는 임신을 했던 까닭에 부모를 따라 대구(大丘)에 내려가 있었는데, 조정에서 명하기를 “아들을 낳으면 연좌시키고 딸을 낳으면 관노비로 삼으라.”고 하였는데, 아들을 낳았다. 가비(家婢) 중에 마침 같은 달에 딸을 낳은 자가 있어 서로 바꾸어 숨기고 이름을 박비(朴婢)라고 하였다. 성장하자, 마침내 감추지 못하고 드디어 자수하니, 상이 특명으로 사면시켜 주었다. 그가 바로 숭고(崇古)의 오대조(五代祖)이며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증직된 휘 일산(壹珊)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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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선생유고의 서술 역시 현재 알려진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음은 1795년[정조 19]에 간행된 조선 후기 천재 실학자 청장관(靑莊館) 이덕무(李德懋)의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 나오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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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략) 그[박팽년]가 죽을 무렵에 그 자부(子婦)가 임신 중에 있었다. 만일 사내아이를 낳는다면 율법에 의하여 당연히 죽게 되었는데, 마침 그 여종[婢女]도 임신 중이었다. 그 여종이 “다 같이 사내아이를 낳으면 저의 자식으로 대신 죽게 하겠다.”고 하였는데, 분만하기에 이르러 그의 자부는 사내아이를 낳고 비녀는 계집아이를 낳았으므로 여종이 바꿔쳐서 자기 아들로 삼았으니, 그 아들의 이름을 박비(朴婢)라 하였는데, 그 아들이 장성함에 이르러 자신의 신분을 스스로 아뢰자, 세조(世祖)가 특별히 상을 내리고 이름을 일산(壹珊)으로 고쳐 주었다.
참으로 인수(仁叟)[박팽년의 字]의 여종이다. 평소 긴 수염을 늘어뜨리며 높은 관(冠)을 쓰고 대장부로 자처하다가도 어려움에 다다라서는 이 여종만도 못한 자가 그 얼마나 많았던가? 내가 여기에 절실히 느껴지는 바가 있어 그녀의 알려지지 않은 덕을 드러내는 것이다. …(중략)
한국고전종합DB, 청장관전서「제6권 영처잡고2」<관독일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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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비슷한 내용이다. 하지만 박비가 성종(成宗)이 아니라 세조(世祖)에게 자수한 것으로 되어 있고, 여종이 성주 이씨의 친정집 여종이 아닌 박팽년 선생의 여종으로 기록되어 있는 점이 지금의 이야기와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특히 이 글에서는 양반사대부가 아닌 노비의 신분인 한 여종의 덕(德)을 세상에 드러내고자 했던 청장관 이덕무의 독특한 시각이 눈에 띈다.
다음은 정조(正祖) 임금의 개인 문집인 홍재전서(弘齋全書)[1799년]의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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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 아들 생원 헌(憲)·순(珣)·분(奮) 등도 함께 죽었다. 순의 아내 이씨(李氏)는 막 임신을 하였는데, 아들을 낳을 경우 연좌되게 되어 있었다. 여종 역시 임신을 하였는데, 여종이 이씨에게 말하기를 “마님께서 딸을 낳으시면 다행이겠으나, 아들이라면 쇤네가 낳은 아기로 죽음을 대신하겠습니다.” 하였다. 출산을 하니 과연 아들이어서 여종이 맞바꿔 기르며, 이름을 박비(朴婢)라 하였는데, 성장한 뒤 자수하자 성종이 특별히 용서하고 일산(壹珊)으로 이름을 고쳤다. 숙종 신미년[1691, 숙종 17]에 복관되었으며 …(중략)
한국고전종합DB, 홍재전서(弘齋全書)「제60권 잡저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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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역시 현재 알려진 이야기와 그 내용이 거의 같다. 이외 계당 류주목의 계당집과 임천상의 궁오집 등에도 비슷한 텍스트가 전한다. 참고로 조선왕조실록·일성록 등과 함께 오백년 조선왕조의 주요 연대기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도 위 내용과 비슷한 맥락의 기술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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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 그는 나이가 적고 지각이 없는 사람이지만 또한 충정공(忠正公) 박팽년(朴彭年)의 후손입니다. 충정공과 충렬공이 동시에 화를 당했을 때에 젖먹이 어린아이가 겨우 목숨을 보전한 것은 하귀동이 외가에서 양육되었던 것과 비슷합니다. …(중략)’
한국고전종합DB, 승정원일기 1906년(고종 43, 광무 10) 9월 7일 기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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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소개할 글은 앞서 잠깐 언급한 적이 있는 권이진의 유회당집(有懷堂集)에 나오는 칠언절구 한 수이다. 1713년[숙종 39]에 지어진 이 시에서도 역시 ‘박비’가 등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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當年朴婢事如何(당년박비사여하) 그 옛날 박비의 일은 어찌된 것인가
祠屋嵬然起洛阿(사옥괴연기낙아) 사당이 낙동강가에 높이 솟았도다
自是聖朝崇節義(자시성조숭절의) 이는 선대 조정에서 절의를 숭상한 까닭이니
莫言天道佑忠多(막언천도우충다) 하늘이 충신을 도왔다고 말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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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하여 지금까지 ‘박일산[박비] 스토리’의 진실 혹은 거짓에 대해 알아보았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고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이야기가, 그것도 560년 전의 이야기다보니 이런저런 말들이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살펴본 것처럼 이 이야기는 이제 더 이상 허구가 아니다. 정사(正史)인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은 물론이거니와 17-18세기에 편찬된 각종 문헌에도 등장하는 엄연한 역사적 사실인 것이다. 이처럼 묘골은 알면 알수록 묘한 동네이다. 묘한 묘골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보자.
육선생유고 부록 「박선생사실」. 붉은 표시 안이 박일산[박비]에 대한 내용이다.
[자료출처: 한국고전종합DB]
홍재전서 권60 잡저7 정단32인. 붉은 표시 안이 박일산[박비]에 대한 내용이다.
[자료출처: 한국고전종합DB]
청장관전서 제6권 영처잡고2 관독일기. 붉은 표시 안이 박일산[박비]에 대한 내용이다.
[자료출처: 한국고전종합DB]
첫댓글 감사히 보고 갑니다...
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