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규 시에 마음을 앗기다
김도솔
단종에 대하여 유독 애틋한 감정을 품게 된 것은 어릴 적, 아버지께서는 해마다 단종제를 지내려 영월을 다녀오셨다. 나는 영월이 어디에 있는지 그것이 어떤 의식이었는지 알지 못했지만 다녀오시면 언제나 우리를 둘러 앉혀놓고 단종애사에 관해 말씀을 해 주시고는 하셨다. 그럴 때마다 단종이 너무 불쌍해서 울면서 잠이 들곤 했다. 명소 탐방을 위해 행선지를 물색 중에 단종의 유배지인 청령포와 장릉을 알게 되자 먼 시간여행 속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마음이 일시에 부풀어 올랐다.
청령포를 찾아 떠나는 날은 아침부터 들뜬 마음을 알기라도 하는 듯 단풍이 가을의 끝자락을 더욱 화사하게 펼쳐놓고 있었다. 긴 시간을 달려 청령포에 닿았을 때는 햇살이 이마 언저리까지 내려와 있었다. 내 마음과는 달리 강물은 무심한 듯 그저 조용히 흘러가고 있었다. 흘러가는 강물의 품에 감싸여 있는 모습이 마치 어머니의 자궁 속 태아와도 같은 모습을 한 청령포는, 어린 단종의 한이 서린 유배지라기에는 너무나 아름답고, 하늘빛을 닮은 물빛은 더욱 푸르고 고요하기만 하다.
청령포라는 지명은 1763년(영조 39년)에 세워진 단종유지비에 영조가 직접 ‘단묘재본부시유지(端廟在本府時遺址)’라는 글씨를 써서 내렸고, 이것을 화강석 비좌 위에 올려 진 비신에 새겼다. 비(碑)의 뒷면에는 1763년 9월에 원주감영으로 하여금 비를 세우게 하였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고, 지명을 청령포라고 썼다. 이로 보아 청령포라는 지명은 유래가 깊은 것으로 보인다. 자갈밭을 지나 숲에 들어서자 어소가 보인다. 문화해설사가 도착 할 때까지 둘러보니 궁녀와 관노들이 기거하던 작은 초가집이 행랑에 자리 해 있고 장독대에 몇 개의 항아리들이 놓여 있다. 초가를 지나 들어서니 단종이 기거하던 어소로 아담한 기와집이 한 채 있다. 방안에는 선비복 차림의 단종이 책을 들여다보고 있고 누군가 엎드려 왕에 대한 예를 갖추고 있다. 마당에는 어소가 있었던 옛 집터가 있었음을 표시하는 ‘묘재본부유지비’가 있고 그 옆으로 놀랍고도 신기한 소나무가 한 그루 있다. 마치 충신이 살아 돌아온 것일까 노송이 담장을 넘어와 엎드려 예를 갖춰 절을 하고 있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오랜 세월동안 굽혀진 허리를 지탱하느라 지지대를 받쳐준 모습과 주변의 소나무들이 어소를 향해 집결해 있는 듯한 모습이 신기함을 넘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한다. 사전에 예약을 하지 않아 급하게 달려온 문화관광해설사의 설명에 귀를 기울인다. 청령포는 남쪽은 기암절벽으로 막혀있고 동ㆍ북ㆍ서쪽은 남한강 상류의 지류인 서강이 곡류하고 있어 배로 강을 건너지 않으면 밖으로 나갈 수 없는 특수한 지형이라 한다. 또한 이곳은 1457년(세조 3) 세조에 의해 노산군으로 강등된 단종의 유배지로, 그 해 여름 홍수로 서강이 범람하여 처소를 영월 객사인 관풍헌으로 옮기기 전까지 단종이 머물던 곳이라 한다. 문득 강폭이 그리 넓지도 않은데 수영을 좀 할 수 있는 사람이면 헤엄을 쳐서 충분히 건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물어보니 그때의 청령포는 수심도 깊고 수량이 많아 배를 타지 않고는 건널 수 없었던 강이었다 한다. 감입곡류하던 서강이 유로를 변경하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단다.
영월 청령포는 어린 나이에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긴 단종의 유배지로 서쪽은 육육봉의 험준한 암벽이 솟아 있고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섬과 같이 형성된 곳으로 한양을 바라보며 시름에 잠겼다고 전하는 노산대, 망향탑 돌무더기 등 슬픈 역사가 남아 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천연기념물인 ‘관음송’을 비롯하여 단종의 어소 주변에 조성된 크고 오래된 소나무림이 270° 돌아 흐르는 서강과 어우러져 자연 경관이 뛰어난 명승지이다. 문화해설사의 자세한 해설을 들으며 이제 본격적으로 청령포를 돌아본다. 단종의 유배 당시 세운 것으로 알려진 금표비(禁標碑), 영조 때 세운 단묘유적비(端廟遺蹟碑), 2000년 4월 단종문화제 때 세운 단종어소 등이 있으며, 관음송이 있는데 관음송은 단종이 유배 생활을 하면서 둘로 갈라진 이 나무줄기에 걸터앉아 시간을 보내던 소나무라 한다. 관음송이라는 이름은 단종의 비참한 모습을 지켜보았다고 해서 볼 관(觀)자를 단종의 슬픈 목소리와 울음을 들었다 해서 소리 음(音)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라 한다.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마다 나무의 껍질이 검은색으로 변하여 나라의 변고를 알려주었다 하여 마을사람들은 지금도 이 나무를 귀하게 여기고 있다 한다. 단종이 죽자 모시던 시녀와 종인들이 기암절벽으로 올라 강물에 몸을 던졌다는 낙화암으로 오르는 길에는 단종이 꿈에도 잊지 못할 정순왕후를 그리며 하나하나 쌓은 것으로 전해지는 돌탑과 노산대가 있다. 노산대는 단종이 해질 무렵이면 자주 올라 상념에 잠기던 곳이라 한다. 문득 절벽아래 강물을 내려다보며 이 절벽에서 꽃잎처럼 떨어졌을 그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갑자기 온몸이 저려 옴을 느낀다. 그때의 아픔은 역사 속에서 전설처럼 전해올 뿐 절벽 아래 푸르기만 한 강물은 말없이 흘러가고 있을 뿐이었다. 청령포는 수림지로 불리는 소나무 숲이 울창하고, 서강의 물이 맑아 영월팔경의 하나로 손꼽히는 명소이다. 1971년 12월 16일 강원도기념물 제5호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12월 26일 명승 제50호로 변경되었다.
단종이 유배지에서 처음으로 지은 시가 바로 어제시이다. 어제시에는 청령포와 주변의 모습과 단종의 마음 상태가 잘 표현되어 있다.
* 단종 端宗 어제시 御製詩 천추에 원한을 가슴 깊이 품은 채 千秋無限寃 천추무한원 적막한 영월 땅 황량한 산 속에서 寂寧荒山裡 적령황산리 만고에 외로운 혼이 홀로 헤매는데 萬古一孤魂 만고일고혼 푸른 솔은 옛동산을 감싸고 있네 蒼松繞舊園 창송요구원 고개 위 소나무는 하늘 높이 우거졌고 嶺樹三天老 영수삼천로 냇물은 돌에 부딪쳐 소란도 하구나 溪流得石喧 계류득석훤 산이 깊어 맹수도 득실거려 山深多虎豹 산심다호표 저물기 전에 사립문을 닫아 거노라 不夕掩柴門 불석엄시문
1457년 유배되던 해의 여름 홍수로 청령포가 범람하자 단종은 영월 객사인 관풍헌으로 거처를 옮겼다. 관풍헌 바로 옆에 위치한 매죽루에 올라 단종은 소쩍새의 구슬픈 울음소리에 자신의 처지를 견주어 자규사와 자규시를 지어 읊었다고 한다. 단종이 밤이면 이 누각에 올라 읊조리는 자규시가 너무 애절하여 이곳을 지나며 들은 사람들이 이 누각 이름을 자규루라 하였다고 한다. 자규루는 관풍헌 동쪽에 세워진 누각으로 계단을 통하여 자규루로 오를 수 있다. 노산군으로 강등된 자기 자신을 소쩍새에 비유하여 지은 단종의 자규사와 자규시는 애절하고 처절하여 피를 토하는 절규로 들린다. * 자규사 子規詞 달 밝은 밤 소쩍새는 슬피 우는데 月白夜蜀魂啾 월백야촉혼추 수심에 젖어 누각에 기대어 있으려니 含愁情依榴頭 함수정의류두 네가 슬피 울어 듣는 나도 괴롭구나 爾啼悲我聞苦 이제비아문고 네가 울지 않으면 내 시름도 없으련만 無爾聲無我愁 무이성무아수 보시오 세상 근심 많은 이들이여 寄語世上苦勞人 기어세상고노인 부디 춘삼월엔 자규루에 오르지 마소 愼莫登春三月子規樓 신막춘삼월자규루 * 자규 시 子規 詩 원한 맺힌 새 한 마리가 궁중 떠난 뒤로 一自寃禽出帝宮 일자원금출제궁 외로운 몸 짝 없는 그림자가 푸른 산속을 헤맨다 孤身隻影碧山中 고신쌍영벽산중 밤이 가고 밤이 와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假面夜夜眠無假 가면야야면무가 해가 가고 해가 와도 恨은 끝이 없구나 窮恨年年恨不窮 궁한년년한불궁 자규 소리 끊어진 새벽 멧부리에 지새는 달빛만 희고 聲斷曉岑殘月白 성단효잠잔월백 피를 뿌린 듯한 봄 골짜기에 지는 꽃만 붉구나 血流春谷落花紅 혈루춘곡낙화홍 하늘은 귀먹었나 애달픈 하소연 어이 듣지 못하는고 天聾尙未聞哀訴 천롱상미문애소 어찌하여 슬픔 많은 이내 몸의 귀만 홀로 밝은고 何奈愁人耳獨聽 하내수인이독총
[출처]단종 端宗의 자규사 子規詞와 자규시 子規詩 |작성자julypark
단종은 1441년(세종 23)에 문종과 현덕왕후 권씨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홍위(弘暐)이다. 어머니 현덕왕후 권씨는 문종이 세자이던 시절 소실로 들어왔다가 두 명의 세자빈이 폐출된 후 왕비가 되었다. 그러나 단종을 낳고 사흘 만에 죽었고, 후에 추존되었다. 문종이 더 이상 세자빈을 들이지 않은 탓에 단종은 모후 없이 세종의 후궁인 혜빈 양씨의 손에서 자랐다. 형제로는 동복누나인 경혜공주와 이복동생인 경숙옹주가 있다. 단종은 1448년(세종 30) 8세의 나이로 왕세손에 책봉되었는데, 세종은 이때 "원손(元孫) 이홍위는 천자(天資)가 숙성하고 품성(稟性)이 영특하고 밝은데, 지금 나이가 스승에게 나갈 만큼 되었으므로 너를 명해 왕세손을 삼는다."라고 했다. 1450년(문종 즉위)에는 문종의 즉위와 함께 왕세자가 되었으며, 1452년(문종 2) 5월에 문종이 죽으면서 왕위에 올랐다. 이때 단종의 나이 불과 12세였다. 이렇게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단종은 즉위 1년 만에 숙부인 수양대군이 일으킨 정란(靖亂)으로 유명무실한 왕이 되었다. 모든 권력이 수양대군에게 넘어간 상태에서 단종은 1454년(단종 2) 1월에 송현수(宋玹壽)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였다. 단종은 아직 삼년상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혼사를 치를 수 없다며 여러 차례 거절했으나 수양대군은 끝내 이를 관철시켰다. 이름뿐인 왕비가 된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는 당시 15세였다. 단종과 정순왕후 사이에는 후사가 없었다.
왕위에 오른 지 2년 3개월 만에 숨을 거둔 문종은 죽기 전에 김종서, 황보인 등 원로대신에게 어린 세자를 부탁하는 고명(顧命, 왕이 생전에 국사에 관해서 내리는 유언)을 내렸다. 원칙적으로 성년이 되지 않은 왕이 즉위하면 대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단종의 경우에는 모후가 일찍 죽은데다 부왕인 문종이 정비를 두지 않은 채 왕위에 있었기 때문에 대비가 없었다. 당시 왕실의 어른이라면 단종의 계조모인 혜빈 양씨가 있었지만, 세종의 후궁으로 뒤늦게 궁에 들어와 정치적 영향력은 거의 없었다. 사정이 이러하니 고명을 받은 대신들이 의정부를 중심으로 대비의 부재를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고명대신들은 의정부의 의결을 거쳐 정사의 대부분을 처리했고, 어린 왕 단종은 그저 형식적으로 재가만 했다. 그 결과 왕권은 점점 더 약화되고 신권이 득세하게 되었다. 사실 조선 건국 초기에는 정도전이라는 실력자의 구상대로 정국이 운영되어 신권이 강했다. 그는 재상 중심 체제를 선호하여 권력은 재상들의 협의체인 도평의사사에게 몰아주고, 그 정점에 총재(冢宰)를 두고자 했다. 그리고 국왕은 총재 한 사람만 잘 고르면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기서 총재란 의정부의 영의정에 해당되는 직책이지만, 실제로 정도전이 꿈꾸던 총재의 역할은 보다 더 강력했다. 그러나 이러한 꿈은 1차 왕자의 난으로 정도전이 실각하는 바람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이후 왕위에 오른 태종의 노력으로 조선 전기는 왕권이 비교적 강력했다. 그런데 조선 시대 전체를 통틀어 왕권이 강력했던 시기는 그리 많지 않다. 물론 조선은 왕권 국가이고 모든 권력이 국왕에게 집중되어 있기는 했지만, 그 실상을 들여다보면 의제적(擬制的) 국왕이 강력한 신료들의 견제를 받는 군약신강(君弱臣强)의 나라였다. 이러한 현상은 조선 중기 이후 사림이 정권을 잡으면서 더욱 심화되었다. 조선 전기의 강력했던 왕권은 세종 말기와 문종 대를 거치면서 다시 약화되기 시작해, 단종 대에 이르러서는 더더욱 약해졌다. 이 틈에 왕의 상투를 틀어쥔 고명대신들은 황표정사((黃標政事), 단종 때 고명대신들이 정사를 결정하면 왕이 그 위에 황색 표시를 하여 형식적으로 승인하던 형태)를 통해 인사를 전횡할 정도로 막강한 권한을 갖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신들을 견제하는 세력이 등장하였다. 바로 세종의 둘째 아들이자 단종의 숙부인 수양대군으로 대표되는 종친 세력이었다. 이들은 세종 말년 문종이 세자로서 섭정을 시작할 무렵부터 세력이 커지기 시작했다. 힘없는 단종에게는 왕권을 위협하는 가장 두려운 존재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모든 종친 세력이 고명대신 세력과 대립각을 세운 것은 아니었다. 세종의 셋째 아들이자 수양대군의 동생인 안평대군은 오히려 고명대신들과 결탁해 새로운 실력자로 급부상했다. 한편 이런 가운데 인사권을 쥐고 흔드는 대신들 때문에 주요 관직으로 진출하지 못한 신료들, 그중에서도 집현전 학사들의 불만이 커지고 있었다. 이들은 고명대신 세력이 안평대군과 연합해 세를 키우자 수양대군의 편에 서게 되었다. 다분히 정치적 득실을 따진 행보였다. 결국 왕권을 둘러싸고 서로를 견제하던 종친 세력과 신료 세력은 다시 안평대군과 대신 세력, 수양대군과 반 대신 세력의 구도로 나뉘게 되었다. 단종은 두 세력 간 권력 다툼의 틈바구니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처량한 신세가 되고 말았다.
1453년(단종 1) 10월 계유정난(癸酉靖難)이 일어났다. 계유년에 김종서, 황보인 등이 안평대군과 결탁해 반역하고자 한 것을 평정했다는 의미로 계유정난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는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한 쿠데타였다. 수양대군은 어린 왕을 앞세워 권력을 독점하다시피 하는 고명대신들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그들이 자신을 견제할 목적으로 안평대군을 지지하고 나서자 마침내 거사를 결심하였다. 수양대군은 심복인 양정(楊汀), 홍달손(洪達孫) 등의 무사들과 한명회(韓明澮) 같은 모사(謀士)와 함께 일을 도모하였다. 수양대군은 김종서 등을 처단하기에 앞서 자신의 뜻을 밝혔다.
지금 간신 김종서 등이 권세를 희롱하고 정사를 오로지해 군사와 백성을 돌보지 않아서 원망이 하늘에 닿았으며, 군상(君上)을 무시하고 간사함이 날로 자라서 비밀히 이용(李瑢, 안평대군)에게 붙어 장차 불궤(不軌)한 짓을 도모하려 한다. 당원(黨援)이 이미 성하고 화기(禍機)가 정히 임박했으니, 이때야말로 충신열사가 대의를 분발해 죽기를 다할 날이다. 내가 이것들을 베어 없애서 종사를 편안히 하고자 하는데, 어떠한가? - 《단종실록》 권 8, 단종 1년 10월 10일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핑계에 불과했다. 수양대군에게는 왕이 되고자 하는 야망이 있었다. 적장자 계승의 원칙에 따른다면 그에게 왕이 될 기회는 없었다. 결국 그가 왕이 될 수 있는 길은 무력으로 어린 조카를 끌어내리고 그 자리를 차지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비정한 권력의 세계라도 숙부가 어린 조카에게 칼을 겨누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패륜이었다. 따라서 그의 봉기를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왕권을 위협하는 역적 도당이 필요했고, 화살은 바로 김종서를 비롯한 고명대신들 그리고 그들과 결탁한 안평대군에게 향했다. 수양대군과 수하들은 제일 먼저 김종서를 찾아가 격살하고 황보인을 비롯한 나머지 의정부 대신들도 차례로 처단했다. 또한 동생인 안평대군도 유배시켰다가 처형했다. 태종이 일으켰던 왕자의 난 이후 정권을 잡기 위해 혈육을 제거하는 비정한 참상이 또다시 벌어진 것이다. 모든 악명은 자기가 짊어지고 가겠다던 태종의 노력은 불과 3대 만에 무너지고 말았다. 계유정난을 계기로 수양대군은 영의정에 올라 이조판서와 병조판서를 겸임하는 등 조정의 모든 권력을 움켜쥐었다. 어린 단종은 숙부 수양대군이 무력으로 권력을 찬탈하는 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이름뿐인 왕의 자리를 지키며 수양대군의 처분만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결국 1455년(단종 3) 윤6월에 단종은 "내가 나이가 어리고 중외(中外)의 일을 알지 못하는 탓으로 간사한 무리들이 은밀히 발동하고 난(亂)을 도모하는 싹이 종식되지 않으니, 이제 대임(大任)을 영의정에게 전해 주려고 한다."라는 말과 함께 수양대군에게 선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물론 이것은 단종 본인의 뜻이 아닌 수양대군과 그 측근들의 강압에 의한 것이었다. 상왕으로 물러난 단종은 세종의 여섯 째 아들이자 수양대군의 동생인 금성대군의 집에 연금 상태로 있게 되었다. 그러다가 1457년(세조 3) 6월에 성삼문, 박팽년 등의 집현전 학사들이 단종 복위 운동을 펼친 것을 기화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되었다. 이때 단종의 나이 17세였다. 노산군으로 강등됨과 동시에 영월로 유배된 단종은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 계획이 사전에 발각됨에 따라 사약을 받았다. 실록에는 조정 대신들이 노산군을 처형하라고 주장해 세조가 이를 윤허했는데, 사약이 내려지자 노산군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야사에는 노산군의 억울한 죽음이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금부도사 왕방연(王邦衍)이 사약을 받들고 영월에 이르러 감히 들어가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으니, 나장이 시각이 늦어진다고 발을 굴렀다. 도사가 하는 수 없이 들어가 뜰 가운데 엎드려 있으니, 단종이 익선관과 곤룡포를 갖추고 나와서 온 까닭을 물었으나, 도사가 대답을 못했다. 통인(通引) 하나가 항상 노산을 모시고 있었는데, 스스로 할 것을 자청하고 활줄에 긴 노끈을 이어서 앉은 좌석 뒤의 창문으로 그 끈을 잡아당겼다. 그때 단종의 나이 17세였다. 통인이 미처 문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아홉 구멍에서 피가 흘러 즉사했다. 시녀와 시종들이 다투어 고을 동강(東江)에 몸을 던져 죽어서 둥둥 뜬 시체가 강에 가득했고, 이날에 뇌우(雷雨)가 크게 일어나 지척에서도 사람과 물건을 분별할 수 없고 맹렬한 바람이 나무를 쓰러뜨리고 검은 안개가 공중에 가득 깔려 밤이 지나도록 걷히지 않았다. - 《연려실기술》 권 4, 단종 조 고사본말
조선이 아무리 왕조 국가라고는 하지만 힘이 없는 왕의 즉위는 결국 정국의 혼란만 가중시킬 뿐이었다. 단종의 사례는 보호받지 못한 왕권의 말로가 이처럼 비참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 그렇게 그는 권력 다툼의 희생양이 되어 짧은 생을 마감했다. 1457년(세조 3) 10월, 향년 17세였다. 이후 단종은 1681년(숙종 7)에 노산대군으로 복위된 데 이어, 1698년(숙종 24)에 왕의 시호를 받고 추증되었다. 단종이 죽은 지 200년이 훨씬 지난 뒤였다. 묘지는 영월에 위치한 장릉(莊陵)이며, 지금도 영월 지역에는 단종과 관련된 전설과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다음 백과
또한 단종의 역사에서 영월호장 엄흥도를 빼 놓을 수는 없겠다. 엄흥도는 유일하게 청령포를 오갔던 사람이자 단종의 말동무 역할을 하였으며 단종의 어소에 무단으로 출입할 수 없다는 어명에도 불구하고 단종을 생각하며 매일 밤이면 감시중인 군사들의 눈을 피해서 청령포 강을 건너 어소에 있는 단종에게로 찾아와서 말동무가 되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단종은 유배 초기에는 밤이 되면 사람이 없는 외로운 분위기 때문에 슬픔에 잠기게 되었으나 엄흥도가 매일 밤 몰래 어소로 들리면서 그나마 위안을 찾은 것으로 알려졌다. 단종 유배 당시의 청령포는 왕의 어명에 따라 누구도 어소에 출입하지 못하도록 되어있으며 이를 어길 경우 엄벌에 처한다는 어명을 유지하였던 편이었다. 또 단종을 뵈러가는 목적으로 청령포의 강을 건너도 처벌을 받는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에 엄흥도 이외에는 그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였던 곳이었다. 단종의 시신이 강물에 버려진 채 수습하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어명에도 아랑곳 않고 아들들과 급하게 자신들의 선산에 암장을 하여 지금도 장릉에는 엄흥도의 충절을 기리는 정려각이 있다.
청령포에서 나와 장릉보리밥집에서 영월 현지의 나물과 보리밥으로 점심을 맛있게 먹고 장릉으로 향한다. 장릉(사적 제 196호)은 왕위를 잃었던 탓에 노산묘라 불리다가 1698년 숙종 24년에 이르러서야 단종대왕으로 복위되면서 묘소를 능제에 맞게 다시 조성하였다. 숙종의 노력으로 지금의 모습을 갖춘 장릉에 들어서자 노산군 묘를 찾아 제를 올린 영월군수 박충원의 뜻을 기린 낙촌비각과 단종의 시신을 모신 엄흥도의 충절을 기린 정려각,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종친, 충신, 환관, 궁녀, 노비 등 268명의 위패를 모신 장판옥과 이들에게 제를 올리는 제식단이 있다. 제향공간에는 신성한 지역임을 알리는 홍살문을 지나 제를 올리는 정자각으로 가는 참도가 이어진다. 일반적으로 참도는 일직선으로 되어 있으나 이곳은 특이하게도 기억자형으로 꺾여 있다. 참도는 왼쪽은 신의 길이고 오른쪽 낮은 길은 임금이 다니는 어도로 되어 있어 감히 그 길을 밟지 못하고 옆길로 참도를 따라가 본다. 그리고 비각, 수복방, 수라간이 있으며 비각 안에는 ‘조선국 단종대왕 장릉’(朝鮮國 端宗大王 莊陵)이라고 새겨진 표석이 있다. 정자각에서는 급경사의 언덕에 가려 장릉은 보이지 않았다. 급경사의 언덕을 우회해서 오르다 보면 완만한 능선을 따라 능침이 나타난다. 왕릉의 예에 따라 삼면에 곡장(낮은 담장)은 둘렀으나 병풍석도 난관석도 없다 숨죽인 채 살아야 했던 열일곱 짧은 생이 서럽게 잠들어 있는 곳, 그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소박하기만 한 장릉의 모습이었다. 어디선가 이름 모를 새소리가 유난히 청아하게 들려온다. 그 옛날 아버지께서 왜 해마다 그 멀고 험한 길을 찾아 이곳까지 오셨어야 했는지 새삼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가슴 가득 밀려온다.
이정환 시인의 –단종 생각이라는 『청령포』 시조 한수로 오늘 우리들의 아픈 탐방을 마무리하려 한다.
청령포 -단종 생각
이정환
뇌리에 박힌 섬 지워버릴 수가 없듯 그 섬을 지키는 노송 우러를 수밖에 없듯 목선에 실려 온 세월 젖어 더욱 시리다
물 위에 뜬 섬은 꿈쩍도 못하고 만의 닻으로 붙들어 매여 꿈쩍도 못하고 강물은 아랑곳없이 저문 벼랑 푸르게 친다
홀로 떠나는 길 서걱거리는 억새 숲 강물에 죄다 쏟아버릴 수는 없어 그 슬픔 뱃전에 어린 노을로 타오른다
돌 자갈 무수히 바스러져 흩날리듯 온천지 가득히 함박눈 뒤덮던 날 저 홀로 울음 우는 섬 즈믄 산을 넘는다
ㅡ 외솔시조문학상 수상작『시조미학』,2021, 봄호.
ㅡ문예지 『작가 사상』제1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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