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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세계선교와 교회
하나님의 교회는 어떻게 존재하고 전 세계로 퍼져가게 되었는가? 어떻게 그린란드의 얼음산과 인도양의 산호섬으로부터 아프리카의 구석진 마을까지 하나님의 교회가 산재하게 되었을까?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 16:15)라고 하신 예수님의 명령이 온전히 이루어지기까지 어떻게 그 명령이 지난 2천 년간 수행되었으며, 현재에 진행 중이며, 앞으로도 지속될 것인가? 이러한 질문은 우리의 지평선을 넘어 세계선교라는 거대하고 새로운 시야를 우리에게 선사한다. 이 지평선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교회가 가장 교회다운 본질을 유지하고 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선명히 볼 수 있으며, 동시에 교회가 교회 중심을 벗어나지 못할 때 어떤 비극적인 일이 일어났는지 또한 확연히 목도할 수 있다. 우리는 이제 세계선교역사의 높고 낮은 능선을 통과하며, 우리의 현 좌표를 읽고 미래의 방향을 가늠해 보고자 한다.
1. 교회의 본질과 선교에 대한 두 가지 쟁점
1) 대외(사회)적 사명
에밀 브루너(Emil Brunner)는 “불이 탐으로 존재함 같이 교회는 선교함으로 존재한다.”라고 하여 교회의 존재 이유가 생명 구원에 있음을 갈파하였다. 그러나 교회의 현실은 어떤가? 피터 드러커(Peter F. Drucker)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소위 ‘사회 속의 기독교’를 표방한 미국 개신교단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말하면서, 미국 개신교는 전쟁 이후의 혼란한 사회개혁을 추구하고 입법을 촉진하면서 사회 주변부로 밀려나지 않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사회적 기관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고 하였다. 교회는 열심히 봉사하고 섬기며, 약자를 돌보고 정의를 부르짖었다. 그런데 왜 개신교는 점점 영향력을 잃고, 교회는 감소일로에 놓이게 되었는가? 이에 대하여 피터 드러커는 기독교의 사명인 영혼 구원을 놓친 결과라고 일갈한다. 즉 이러한 모든 활동으로 교회의 정치 집단화가 가속된 결과, 교회가 급속히 세계선교역사세계선교역사 115결속력과 매력을 잃으면서 성도들을 잃어버리게 되었다고 하였다.교회는 지금 엄청난 사회적 요구와 필요에 직면해 있다. 그럼에도 교회의 본질, 원형질이 무엇인지를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교회는 세상이 줄 수 없는 것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세상은 세상이 줄 수 있는 것을 교회에 기대하지 않는다. 대체 불가능한 것, 세상이 줄 수 없는 유일한 것-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이야말로 교회의 본질적 사명이요, 세상이 기대하는 가장 위대한 섬김이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행 3:6)라는 선언이야말로 세상을 향한 교회의 선언이 되어야 한다. 교회가 왜 존재하고 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 필요한 것이다.
2) 대내적 전환
우리는 성경에서 예루살렘교회와 수리아 안디옥교회가 보여주는 날카로운 대조를 통해 교회의 존립과 부흥은 결국 교회가 자신을 뛰어넘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음을 알게 되었다. 예루살렘의 제자들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고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 교회의 중심은 교회 자체가 아님을 깨달아야 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가 단순히 이미 믿는 자들의 사귐과 소수의 사람에게 종교적 안식처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발판으로 하나님의 다스림을 선포하고 섬기며 증언하는 공동체가 되는 것임을 알았더라면 세계선교의 주도권을 안디옥교회에 빼앗기지 않았을 것이다. 바꿔 말하면 교회는 영혼 구원의 사역을 위해 부르신 공동체라는 것이다. 선교는 지역교회가 자신과 내부 문제에만 신경 쓰는 것이 아니라 손짓하고 도전하는 세상 속에서 다른 곳을 향하여 다른 사람에게 집중하는 것이다.
II. 세계선교의 진행과 발달
선교역사에 대한 시대구분은 다양한 관점과 시각이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초대와 중세시대 그리고 로마가톨릭 선교와 개신교의 선교, 그리고 현대 선교로 구분하여 기술하기로 한다. 116 세계선교의 길라잡이
1. 제1기(AD 33- AD 500) 초대교회의 선교(로마제국 시대의 선교)
이 시기는 476년 서로마가 멸망하고 사실상 로마제국 내의 선교가 이 시기에 종료된 것으로 보기 때문인데 이 시기는 밀란 칙령(AD 313년)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다.
1) 밀란 칙령 이전 시기(박해 시기)
이 시기는 교회가 극심한 핍박과 박해 속에 있는 시기였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복음은 강력하게 전파되었는데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살펴볼 수 있다.
먼저 오순절 사건이다. 오순절 성령강림은 교회로 하여금 선교에 대한 강력한 동기를 부여한 일대 사건이었다. 자칫하면 교회는 예수님에 대한 기억을 더듬는 ‘추억 공동체’가 될 뻔하였다. 그러나 성령의 강림은 목숨 걸고 예수를 담대히 말하는 ‘증거 공동체’로 거듭나게 하였다.
둘째는 성도들의 흩어짐이다. 처음에 성도들은 교회의 지리적 팽창에 나서지 못하고 예루살렘에 머물렀다. 그런데 핍박으로 인해 그들은 본격적으로 선교의 대열에 들어서게 되었다. 이들은 완전히 복음을 위해 산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복음 하나를 지키기 위하여 무가족, 무주택, 무소유, 무보호의 삶을 자원하였다. 나아가 복음을 위하여서라면 자신의 목숨도 아끼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이것은 보통의 헌신이 아니었다. 사도행전 8:4; 11:19 등을 읽어보면 그들의 헌신을 피부 깊숙이 느끼게 된다. 이 당시는 모든 성도가 선교적 삶을 감당하는 때였다. 물론 사도바울 같은 위대한 선교사가 있었지만, 실제로 사도바울이 전도한 사람은 아주 극소수였다. 실제로 복음은 헌신 된 평신도들의 적극적인 전도사역을 통하여 능력 있게 이루어졌다. 이런 결과로 복음은 남북으로는 북아프리카의 사하라 사막과 동서로는 인도에서 스페인까지 퍼져나가는 놀라운 선교 열매를 거두게 되었다. 오늘날 전 세계의 교회들에게 가장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바로 평신도들에 의한 복음전파다.
셋째, 예루살렘 종교회의(행 15장)다. 예루살렘 종교회의는 기독교가 유대교의 한 종파가 아니라 세계 종교로 나아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 회의였다. 그 많은 율법의 조항들을 간략히 정리하므로 세계적인 신앙으로 나아가는 대로를 닦은 기념비적인 회의였다.
넷째, 기독교에 대한 로마 정부의 핍박이다. 네로 황제로부터 시작된 핍박은 기독교인들의 생명을 위협하며 3세기 중반의 데시우스 황제 시기에서 4세기 초의 디오클레치안 황제 시기까지 조직적인 핍박이 절정에 다다르게 된다. 303년 디오클레치안 황제의 박해 명령에 따른 로마의 마지막 기독교 탄압은 1,500명이 넘는 순교자를 내고 생명을 위협하는 고문 행위로 많은 사람이 신앙을 배반하기도 하였지만 결국 선교 차원에서 보면 이러한 핍박은 기독교의 순수성을 보존하고 신앙의 깊이를 더한 공헌을 한 것이었다. 캘리포니아 대학교 린 화이트 교수(Lynn White)에 의하면 이 당시 로마의 인구 4~5천만 중 약 4~5백만 정도가 기독교인이었는세계선교역사 117데, 비율로는 10%밖에 안 되지만 그 영향력은 대단하였다. 기독교는 하나의 깨뜨릴 수 없는 결속체로 발전되어 있었고, 기독교에 대한 정책을 공식적으로 바꾸는 것이 정치 현실적으로 현명한 처사였다는 것이다.
2) 밀란 칙령 이후 시기(로마 황제 후원 하의 기독교 선교)
이 시기의 선교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황제들의 후원 아래 교회의 조직적인 선교 활동이 등장하였다. 이 시기에 교회의 감독으로서 선교 활동을 한 사람들이 많은데 울필라스, 투어스의 마틴, 밀란의 암부로스, 죤 크리소스톰 등이 있다. 특히 울필라스는 최초의 번역 선교사라고 할 수 있는데 그는 기존 기독교인 지역의 감독으로 임명을 받았지만, 거기에 머물지 않고 고트족(지금의 독일 지역 부근)에게 나아가서 문자와 문법을 만들고 고트족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여 선교하는 일에 30년 이상을 헌신하였다. 둘째, 수도원 중심의 선교 활동이 시작되었다. 교회가 국교로서 점차 제도화되어갈 때 이교 지역을 향한 선교 활동이 활발하게 추진되었는데 이러한 선교 활동의 중심적 역할을 수도원이 차지하였다. 수도원 생활의 근본적인 원리는 영적인 것에 최고의 가치를 두기 위해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가치를 상대적으로 비하시키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처음 수도사들 중에는 문맹자들이 많았으며 광야에서나 움막이나 동굴에서 많이 생활을 하였고, 이들 중에는 작게 농사를 짓는 사람들도 있었다. 또한 간혹 그들을 보기 위해서 온 사람들로부터 도움(선물, 헌금)을 받게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수도원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제도화되어가기 시작했다.
2. 2기(AD 500-AD 1492): 유럽대륙의 선교
이 기간에는 로마를 중심으로 하여 주로 서구 지역이 선교가 되었다. 이 시기에는 교회와 국가가 하나가 되어서 선교 사역을 감당하였다. 그리고 국가의 전적인 지원이 있었기에 이 시기에 외형적으로는 많은 기독교의 발전을 가져왔다. 그러나 동시에 교회는 순례자적 정신을 상실하고, 종말론적 기운이 떨어지고 현세에 정착하려는 의도와 노력이 강해진 것도 사실이다. 교회가 영적 공동체가 아니라 권력을 지닌 기구가 된 경향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복음은 많은 사람의 투철한 헌신을 통하여 이루어졌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1) 중세 전기(AD 500-AD 1000, 유럽 중부지역 선교)와 후기(AD 1000-AD 1492, 북유럽 선교)
중세의 선교는 대략 AD 1000년을 중심으로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전기는 118 세계선교의 길라잡이주로 유럽의 중부지역에 그리고 후기는 유럽의 북부지역에 복음이 전파되었다. 먼저 전기를 간략하게 살펴보면, 500년 이후의 교회는 야만인(이민족)들과 이슬람의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야만인 침략자들은 주로 이교도들이었으며 문화적 경험이 전무한 사람들이었다. 또한, 622년 아라비아에서 시작된 이슬람은 불과 한 세기도 지나기 전에 로마제국 영토의 절반을 점령할 정도로 위협적인 존재로 부상하였다. 그래서 이 시기(AD 500-950)는 기독교가 맞이한 최초의 쇠퇴기라고 할 수 있다. 쇠퇴의 주원인은 로마제국의 내부적인 부패와 야만족의 침입 및 이슬람 세력의 부상으로 말미암은 외적인 것이었다.이와 같이 기독교가 크나큰 어려움에 직면했지만, 기독교의 선교는 그런 중에서도 지속되어졌다. 이 시기에 서로마 교회는 서유럽, 이탈리아, 스페인,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 잉글랜드, 프리지아, 남부 독일 라인강 유역, 스칸디나비아, 중앙 유럽의 동부 동일,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또한, 동로마 교회는 소아시아와 발칸반도 지역과 러시아 등에 확산되었다. 특별히 네스토리우스파 교도들의 활동이 컸는데, 이들은 비록 소수였지만, 신앙을 중국해와 남인도까지 전하는 놀라운 선교적 역할을 감당했다. 이런 일을 감당하는 데는 몇몇 헌신 된 선교사들과 신실한 왕들의 노고가 있었다.이제 중세 후기의 선교를 살펴보자. 이 시기 동안 기독교는 유럽의 서북부 및 중부에 살던 대부분의 사람들을 공식적으로 귀의시켰다. 여기에는 러시아도 포함되었다. 또한, 이베리아반도 대부분을 이슬람으로부터 되찾았다. 북부와 서부에서는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에까지 복음이 심어졌다. 또한, 중부, 동부 및 남부 아시아에 살던 소수민들이 신앙을 고백했다. 1350년까지는 그리스도인들이 북쪽 끝에 있는 그린란드로부터 남쪽의 인도까지 퍼졌고, 서쪽의 이베리아로부터 동쪽의 중국해까지 복음이 들어갔다. 이 시기에 유럽 대부분이 기독교의 영향력 아래 들어왔고, 중국에서는 칭기즈 칸의 몽골족이 일어나서 중앙아시아와 러시아 그리고 페르시아와 메소포타미아의 새로운 지배자로 등장하였다. 또한, 오스만 튀르크의 세력이 강성해져서 비잔틴 제국을 넘보고 근동지역을 점령함으로 십자군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프란시스 수도회의 선교사들은 북아프리카와 근동지역에 흩어져서 복음을 무슬림에게 전하였고 또한 중앙아시아와 중국을 점령한 몽골족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기독교는 심각한 위기에 처하기도 하였다. 특별히 1350~1500년 사이에 기독교는 매우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다. 여기에는 이슬람의 공격, 교황을 위시한 교회 조직의 부패, 흑사병의 만연 등이 주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여기에다가 부분적으로 기독교에서 유래된 문예부흥이 도래하게 되면서 인문주의 등은 기독교 신앙을 여러 면에서 약화시키게 되었다. 결국, 기독교는 새로운 개혁이 요구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있었던 것이다.세계선교역사 1192. 중세 선교의 특징a. 신실한 기독교 신앙을 지닌 왕들이 정책적으로 복음을 전하여 한 지역을 복음화시킨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면 프랑크족의 클로비스왕의 경우 병사 300명과 함께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세례를 받음으로 유럽대륙의 북서부에 복음이 전파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b. 주로 이 시기의 선교는 직접적인 접촉을 통해 이루어졌다. 즉 이방 민족들이 로마로 침공을 하여 같이 살다가 기독교화되거나 혹은 이방 민족들에게 잡혀가 역으로 복음을 전하게 된 예도 있었다. 심지어 바이킹족들에게 잡혀가 오히려 바이킹족들을 감동하게 해 그들을 변화시킨 예도 있다. 비자발적이지만 그리스도를 본받고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고자 했던 사람들 때문에 그들과 접촉했던 이민족들이 그리스도께로 돌아오게 된 경우이다. c. 수도사들을 통한 선교이다. 수도사들은 신앙의 전파뿐 아니라 인근 주민들의 교육과 경제적이며 사회적인 복리를 위한 중심이 된 수도원을 세웠다. 이들은 순종과 독신생활을 통해 개척 선교에 필요한 복종과 기동성을 갖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언제든 어디든 갈 준비가 완료된 이들이었다. 청빈, 순결, 순종의 3대 덕목을 강조하면서 미친 영향은 교회의 갱신 운동과 선교운동으로 나타났다. 이 시기에는 ‘독일의 사도’라 칭호를 받은 보니페이스와 앗시시의 프란시스, 레이몬드 룰과 같은 이들이 종교와 경계를 뛰어넘어 선교에 헌신하였다.
3) 수도사들의 선교 활동들
a. 보니페이스(Boniface): 베네딕트 수도사로서 독일에 복음을 전해준 수도사로서 ‘독일의 사도’라는 칭호를 얻었다. 그는 우상숭배를 제거하고자 가이스말에 있는 소위 신성하다는 나무를 찍어버렸는데, 신의 노여움을 받지 않고 여전히 건재하여 충격을 받은 많은 사람이 기독교로 개종하게 되었다. 그는 탁월한 학자요 행정가요 열렬한 전도자로서 많은 수도원을 세웠고, 후에 마인츠의 대주교가 되었으며 751년에는 프랑크의 왕이 된 피핀의 대관식을 집전하기도 하였다. 그의 위대함은 나이가 들어서도 화란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그 지역의 불신자들에 의해서 살해당함으로써 그 생애를 마감한 사실인데, 죽는 그 순간까지 복음을 위하여 헌신한 그의 열정을 볼 수 있다. b. 앗시시의 프란시스(성 프란체스코): 그의 특징은 철저한 명상의 삶과 복음전파의 삶이 함께 조화를 이루었다는 것이다. 그는 결코 수도원 안에 갇힌 영성을 추구하지 않고 그 영성이 선교로 이어지는 영성이었다. 그리고 그의 선교는 언제나 실천적 삶을 통한 전도였다. 그는 항상 제자들에게 “행함으로 설교하라”라고 가르쳤고, 그 자신은 늘 가르친 대로 살아갔다. 그를 따르던 사람들도 그의 말보다 그의 삶 때문에 더 끌리었고 이것이 결국 하나의 운동이 되었던 것이다. 그는 불신자 지역을 향하여 많은 선교사를 보내었다. 그리고 그 자신이 선교지에 가서 120 세계선교의 길라잡이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는 것을 소망하였다. 타종교에 대하여 최대의 예의를 갖추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이것이 그들의 신앙 자체를 인정하라는 것이 아니라, 평화로운 수단을 통하여 기독교 신앙을 전파하라는 것이었다. 그는 제5차 십자군 전쟁이 한창일 때 엄청난 핍박과 고난을 무릅쓰고 회교도들에게 직접 가서 복음을 전하기도 하였다.c. 레이몬드 룰(Raymond Lull): 그는 나이 30살이 되었을 때 극적인 종교적 체험을 하였고 프란시스 수도사가 되어 이슬람 선교에 열정을 불태웠다. 그는 파리 대학과 몽펠리 대학에서 이슬람과 동방 언어와 선교 방법에 대하여 강의를 하였다. 나이 55살이 되었을 때는 북아프리카 튀니지로 갔고 바로 추방된 후 재차 방문하여 2년여를 머물면서 복음을 전했다. 그는 1351년 80살의 나이에 북아프리카를 다시 방문하여 길가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그의 소원대로 장렬하게 돌에 맞아서 순교하였다.
3. 3기(1492-1793): 가톨릭 선교의 전성기와 개신교 선교의 태동
이 시기에 가톨릭은 놀라운 선교의 열매를 거두면서 선교의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이러한 전성기의 배경에는 강력한 가톨릭 국가였던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활발한 식민지 개척 활동을 벌인 사실과 예수회와 같은 열정적인 선교의식을 가진 교단이 있었다. 반면에 개신교는 이 시기에 처음 태동되었기에 자체의 전열을 정비하기에 바쁜 시기였기에 선교에 그다지 큰 성과는 내지 못하였지만, 선교의 시동을 거는 태동기적 의미를 지닌다.
1) 로마가톨릭의 선교
1500년경부터 1800년경까지 로마가톨릭교회의 확장이 크게 일어났다. 특별히 16세기 초부터 지리상의 발견과 새로운 땅에 대한 식민지화가 진행되면서 교황은 포르투갈과 스페인 왕에게 비기독교 지역을 나누어 주며, 그 땅의 백성들을 복음화하고 교회를 세워 유지하라는 의무를 부과하였다. 이에 따라 선교는 정부의 역할이 되었다. 이 시기에 가톨릭에서 선교에 가장 열정적인 수도회는 예수회였다. 1540년 스페인의 귀족인 이그나티우스 로욜라에 의해 설립된 예수회는 가장 늦게 생겨난 교단이었지만 특별히 선교에 아주 열정적인 교단이었다. 예수회는 특별히 토착화를 통하여 복음을 전하는 데 아주 능했다. 중국에서는 마테오 리치와 그의 후계자들이 선교를 수행하였다. 그들은 중국인들의 생활방식과 기본적인 것들을 그대로 받아들였고, 유교적 개념들을 이용하여 점진적으로 기독교의 원리와 교리를 소개하였다. 또한, 개종자들이 조상 제례나 지방의식에 참여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이러한 것들을 종교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 문화적 특성을 지닌 것으로 간주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후에 교황청은 예수회의 선교 원리를 정리하고 제사의식 같은 것에 참여세계선교역사 121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200년 후에 가톨릭교회는 다시 중국인의 의식을 받아들이는 것을 허용하도록 법을 수정하였다.
2) 개신교 선교의 태동
(1). 개신교 선교의 시작
개신교 선교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윌리엄 캐리(William Carey, 1761~1834)에 의해 영국에서 침례교선교회가 1792년에 세워진 것을 계기로 본격화되었다. 1517년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 선교가 그토록 늦어진 이유는 무엇인가? 먼저, 전술한 바와 같이 개신교회 자체의 생존과 체제 정비를 위해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당시 식민지 경영과 선교의 주도권은 가톨릭교회가 쥐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오해가 있었다. 즉 하나님께서 이교도들을 회심시키고자 한다면 사람이라는 도구를 통하지 않고도 구원하실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렇게 개신교 선교는 구조적인 취약점을 가지고 있었다.그러나 데이빗 보쉬(David Bosch)는 그의 책 『변화하고 있는 선교』에서 종교개혁자들의 선교적 행위가 부족하다고 하여 선교 비전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개혁자들의 신학과 사역의 기본적인 추진력을 오해한 데서 기인한다고 하였다. 그는 “루터를 ‘창의적이고 독창적인 선교 사상가’로 보아야 하며, 우리는 성경을 ‘선교학자 마르틴 루터’의 눈으로 읽어야 하고, 사실 그는 교회의 선교 사역에 분명하고도 중요한 지침과 원리들을 제공했다.”라고 한다. 그에 의하면 ‘종교개혁자 신학의 출발점은 세상의 구원을 위해 사람들이 무엇을 할 수 있고, 해야 하는가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무엇을 하셨는가.’이다. 하나님은 지구상의 사람들을 그의 빛으로 방문하며 자신의 말씀을 보내어 마지막 날이 동터올 때까지 ‘흐르고,’ ‘확산되게’ 하신다는 것이다.
(2) 뉴잉글랜드와 미국 인디언 선교
뉴잉글랜드의 청교도들은 주위에 있는 인디언들을 향하여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는데 두 명의 대표적 선교사 데이빗 브레이너드와 존 엘리엇이다. 이들은 후일에 그들의 생애를 통해 수많은 사람이 선교에 헌신하도록 고무하고 격려하였다. 이들의 생애를 읽고 수많은 선교 지망생들이 선교적 도전을 받고 선교지에 나가게 되었다. 윌리엄 캐리도 그 열매의 하나였다. 또한, 그들은 최초로 해외 선교를 전략적 프로그램을 가지고 시작하였다. 설교를 통한 전도, 교회의 조직, 기독교적 양육을 목표로 하는 교육, 성경 번역, 기독교 문서 출판, 현지 언어의 사용, 원주민 목사와 교사의 양성 등이 포함되었다. 122 세계선교의 길라잡이c. 경건주의와 모라비안 선교운동근대 개신교 선교의 선구자는 경건주의자들이었다. 경건주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 필립 스페너(Philipp J. Spener)는 시작으로 개인의 경건이 없는 한 전도의 열정도 있을 수 없으며 진정한 회심의 체험이 없는 한 개인적 경건 생활이 없다고 강조했다. 특히 모라비안 공동체는 해외 선교를 위해 전 공동체가 혼신의 힘을 다한 공동체였다. 그들은 지구상에서 가장 후미지고 조건이 나쁜 곳을 향해 선교를 떠났다. 그들은 평범한 기술공이나 농부였으며, 그들의 목표는 복음을 실천하며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과 복음을 나누는 것이었다.
4. 4기 개신교 선교의 융성기(AD 1793-1945)
선교학자들은 19세기를 ‘선교의 위대한 세기’라고 부르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이렇게 부르는 이유는 지리적으로 가장 광범위하게 선교 사역이 진행되었기 때문이며 선교를 위해서 위대한 대가를 지불한 시기였고 동시에 위대한 선교사들이 많이 배출되었기 때문이다.
1) 19세기의 중요한 두 선교운동
(1) 건초더미 기도운동(The Haystack Prayer Group Meeting)
미국 매사추세츠주의 윌리암스 칼리지에 다섯 명으로 구성된 기도 그룹이 있었다. 이들이 1806년 8월 2일 기도하는 중에 소나기가 왔다. 이에 이들이 엉겁결에 비를 피하게 된 곳은 건초더미가 있는 창고였다. 그런데 그 속에 들어가서 비를 피하던 중에 한 사람에게 “우리가 하면 되지 않겠는가!(We can do, if we will)”라는 영감이 떠올랐다. 이것은 위대한 각성이었다. 이것을 계기로 이들은 학교를 졸업하고, 엔도버 신학교에 진학하였다. 그들을 중심으로 선교의 열정을 가진 사람들이 모였다. 그리고 선교의 비전을 나누었다.이들은 미국 회중교회의 지도자를 설득하여 1810년에 최초로 해외 선교부가 창립되도록 하였다. 이들은 졸업 후 안수를 받고 1812년 2월 24일 미국을 떠났다. 이것이 미국 회중교회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의 파송이었다. 이들의 뒤를 이어 미국의 교회들이 서서히 선교에 동참하게 되었다. 이 작은 운동을 시작으로 선교의 불이 붙었고, 선교는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 나갔다.
(2) 학생자원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 for Foreign Missions, SVM)학생자원운동(SVM)은 1886년 헐몬산(Mt. Hermon)에서 모였던 학생 수련회에서 발단되었다. 이 수련회에는 미국의 87개 신학교에서 251명이 모였다. 물론 이 컨퍼런스는 사경회를 위한 것이었지, 선교를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주로 선교사로서 안식년 중에 있는 사람들이 세계선교역사 123강사로 왔으며, 주 강사는 디엘 무디(Dwight Lyman Moody), 아서 피어선(Arthur Pierson) 등이었다. 특별히 피어선 선교사가 설교 중에 “모두 갑시다, 모두에게로!(All should go, and go to all!)”이라는 말을 하였는데, 여기에서 학생들은 큰 은혜를 체험했다. 채플 후에 통성기도와 묵도로 예배를 마쳤는데 조용한 가운데 사람들이 돌아갔고, 그날은 기도의 밤이 되었다. 이것이 학생자원운동을 촉발시켰던 분위기였다. 이 수련회 후 100여 명이 선교를 위한 그룹에 동참하게 되었다. 그리고 모임이 끝날 때, 대표를 선출하여 1년 동안 대학을 순회하며 간증을 하고 모임을 계속하기로 결의했다. 4명의 대표가 176개의 대학을 순방하며 간증을 했고, 3000명이 이 모임에 참여하게 되었으며, 1888년에 조직이 결성되었다. 일체성의 붕괴와 열기의 냉각, 다른 단체와의 혼선 등을 막기 위하여 정식으로 Student Volunteer Movement for Foreign Missions(SVM)가 결성된 것이다. 이 운동으로 인하여 1930년까지 50년 동안 파송된 선교사들은 2만 5천 명 정도가 되었다. 아울러 적극적으로 선교를 지원한 사람들이 약 8만 명 정도였다. 참으로 놀라운 성과가 아닐 수 없다.
2) 대표적 선교사들
(1) 윌리엄 캐리(해안 선교 시대)
윌리엄 캐리(William Carey, 1761~1834)는 개신교 선교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물론 이것은 엄밀하게 말하면 잘못된 것이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캐리에 선행하여 모라비안이나 경건주의자들 그리고 미국 인디언 선교 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캐리 이전에 영국에서도 세 개의 선교단체가 있었다.
그런데 왜 캐리를 그렇게 부르는가? 그는 1) 분산된 개신교회를 선교적으로 각성시켰다. 2) 그로부터 시작해서 개신교 선교운동의 주도권이 독일어를 사용하는 교회에서 영어를 쓰는 교회들로 옮겨졌다. 3) 그로 인해서 많은 선교단체가 형성되었다. 4) 경건주의와 모라비안의 선교지역은 국한적이었으나 그로부터 선교지역이 확대되었다. 5) 캐리가 원주민 지도자 양성, 선교기지 건설, 국제적 선교협의, 사회선교, 성서번역 등을 포함한 근대 선교운동의 원칙들을 발전시키는 데 결정적 공헌을 하였다. 6) 캐리는 한 인간으로서 그리고 지도자로서 참 훌륭한 점을 많이 지녔다. 즉 인내, 균형 감각, 성경 지식, 겸손 등의 성품으로 인해 그만한 선교사가 없었다고 평가된다.
그의 선교 원리는 다음과 같다. 1) 가능하면 광범위하게 복음을 전파한다. 지역 제한 없이 길이 열리는 데로 나간다. 2) 원주민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고 성경을 읽도록 함으로 선교한다. 3) 가능하면 빨리 원주민의 교회를 세운다. 4) 지역 사람들의 의식구조 연구해야 한다. 5) 가능하면 빨리 현지 사역자를 양성해야 한다. 124 세계선교의 길라잡이
(2) 허드슨 테일러(내지 선교 시대)
해안 선교 시대에는 복음이 주로 해안에만 머물렀다. 그 당시에는 육로와 육지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않았기에 선교사가 내륙 깊숙이 들어가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선교는 주로 해안 가까이에서 행해졌다. 그런데 이러한 전통을 깨고 과감하게 내지 깊숙이 들어가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이 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or, 1832~1905)였다. 그가 이런 주장을 할 때 사람들의 반응은 대부분 부정적이었다. 사람들은 “해안지역에도 아직 할 일이 많이 있는데 왜 굳이 내륙으로 들어가려 하는가?”라고 물었다. 그러나 그는 엄청난 반대를 무릅쓰고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선한 뜻을 실천에 옮겨 중국내지선교회(China Inland Mission)를 만들었다.
테일러는 선교 현장을 해안에서 내륙으로 옮긴 외에도 당시로써는 생각하기 어려운 파격적인 선교를 다음과 같이 수행하였다. 1) 그는 선교 본부를 선교 현지에 두었다. 2) 현지인과 똑같은 머리 모양과 복장을 하였다. 3) 선교비는 하나님께만 요청하였다. 4) 여성과 평신도를 선교사로 영입하였다.
5. 5기(1945 - 현재, 세계선교 시대)
이 시기의 선교는 크게 두 가지 큰 방향으로 나누어졌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명령을 따라 땅끝까지 이르러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고자 하는 일에 우선순위를 두는 복음주의 진영이며, 다른 하나는 새로운 상황 앞에서 교회의 선교적 사명을 새롭게 인식하면서 샬롬의 추구에 선교의 초점을 두는 에큐메니칼 진영이다. 19세기 선교가 교회의 영역을 전 세계로 확장한 것이었다면 20세기의 선교는 교회가 사회와 세계에 대한 책임을 발견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복음주의 노선과 에큐메니칼 노선은 서로 대립하며 갈등하는 양상을 보였는데 점차로 두 노선은 서로에 대한 필요를 인식하면서 상대에 대한 상호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아울러 이 시기에는 선교운동의 중심이 선교단체에서 교회로 옮겨졌다는 것이다. 과거엔 선교단체가 목사 후보생을 별도로 선교사로서 양성하였지만, 이 시기에 와서는 선교적 사명이 몇몇 선교단체의 일이 아니라 모든 교회의 책임으로 인식되었다. 그리고 서구세계와 비서구 세계의 협력이 구체화되기 시작하였다.
1) 미전도 종족 선교 시대(개신교 선교의 제3 시기)
근대 개신교 선교의 제1기가 해안지대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제2기는 내륙 깊숙한 지역에 대한 선교였다면, 제3기는 ‘숨겨진 사람들’을 찾아 나선 선교라 할 수 있겠다. 이 일에 기초를 놓은 사람은 위클리프 성서번역회의 창시자 카메론 타운젠트(Cameron Townsend)와 교세계선교역사 125회성장학의 대부로 불리는 도날드 맥가브란(Donald McGavran) 박사이다.
타운젠트는 과테말라에서 선교하면서 스페인어로 된 성서를 나누어주었다. 그러나 상당수의 부족들이 스페인어를 사용치 않음을 알게 되었다. 타운젠트는 과테말라가 많이 복음화되었지만 상당수의 부족들은 언어의 장벽 때문에 복음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음을 발견하였다. 그는 세계에 약 500개의 복음이 미치지 못하는 부족 그룹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면서 이들의 복음화를 위한 선교회 즉 위클리프 성서번역회를 조직하였고, 지금까지도 수많은 선교사들이 이들의 복음화를 위하여 일하고 있다. 타운젠트가 동일 언어를 사용하는 부족 그룹을 발견하였다면, 맥가브란은 같은 문화로 묶여 있는 동질집단이라는 것을 발견하였다. 맥가브란은 이러한 동질집단은 대부분 개인적인 회심보다는 핵심 지도자의 지도에 의한 집단 개종이 훨씬 효율적임을 깨달았다. 서구사회는 대부분 개인주의적인 사회이지만, 아직도 복음이 들어가지 못한 대부분의 동질집단들은 집단적인 사고가 강한 지역이므로, 개인으로 접근하면 복음 전도의 열매가 맺혀지기 어려움을 발견하였던 것이다. 타운젠트와 맥가브란의 공헌으로 제3기는 감추어진 혹은 아직 접촉되지 않는 미전도 종족을 찾아 이들 가운데 스스로 서가는 교회를 세우는 선교에 힘쓰게 되었다.
2) 20세기의 선교 변화
첫째는 선교운동의 중심이 선교회에서 교회로 옮겨졌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선교회에서 본국의 목사 후보생과 별도로 선교사를 양성했다. 선교사들은 본국의 교회에서 목회할 권리를 갖지 못하였다.
둘째로 선교가 전통적인 범위를 넘어 교회의 사회에 대한 책임과 더불어 이해되기 시작했으며, 이에 따라 교회의 활동영역 또한 자연스럽게 확대되었다는 점이다. 19세기 선교의 가장 큰 특징이 교회의 영역이 전 세계로 확장된 것이었다면, 20세기 선교의 가장 큰 특징은 교회가 사회 세계에 대한 책임을 발견한 것이며, 이를 효과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전 세계 교회들이 하나 되는 운동을 전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셋째, 서구세계와 비서구 세계의 협력이다. 이 시대는 전통적으로 선교는 서구교회가 비서구 교회로 하는 활동으로 인식되던 시대가 가고, 세계 모든 교회가 세계 모든 교회를 위하여 함께 선교하는 시대로 변하게 되었다(온 교회가 온전한 복음을 온 세계에). 기존의 서구교회들의 약화 현상과 함께 서구교회와 피선교지 교회들의 선교 동역 필요성을 강조하게 되었다. 모든 족속에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에 공통적으로 복종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변화의 배경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1) 두 번의 세계대전(1914~1918, 1939~1945)을 겪으면서 입은 서구 기독교의 도덕적 지도력의 상처를 들 수 있다. 선교국으로 자처하면서 우대를 받아온 서구의 여러 나라들이 전쟁을 126 세계선교의 길라잡이통하여 보여준 집단적 이기심과 부도덕성이 비서방세계의 도전을 받게 되었다.
(2) 서구교회 지도자들의 각성과 반성이다. 서방기독교 국가들의 무자비한 식민지 확충과 제국주의적 통치 그리고 두 번의 세계대전에서 나타난 비도덕적 활동을 방치하거나 동조한 교회의 존재와 역할에 대한 뼈아픈 자기반성이 교회지도자들에게 있었다.
(3) 피선교지역의 민족주의 운동의 결과이다. 1945년 2차 대전이 종식될 때까지 비서방세계의 99.5%가 식민지였다. 그 후 25년간 이 나라들이 대부분 독립하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표출된 민족주의와 전통문화와 종교의 복고운동이 자연히 기독교와 선교 활동을 배척하는 성향을 동반하게 되었다. 이러한 이유를 배경으로 1963년 멕시코 선교대회에서 나온 ‘6대륙의 선교’ 나 ‘교회들의 상호협력’ 등의 말이 1960년대 세계 선교계에 가장 유명한 구호가 되었다. ‘세계의 모든 교회들이 모든 교회들을 위하여’(from and for all the churches) 동서남북으로 왕래하며 협력하는 시대로 탈바꿈한다는 의식변화가 뚜렷하게 되었다.
3) 세계선교운동의 두 흐름
선교운동은 20세기라는 전혀 새로운 상황 앞에서 두 흐름으로 나뉘게 되었다. 그중 하나는 19세기의 전반적인 흐름을 계속 이어간 복음주의 노선이고, 다른 하나는 새로운 상황 앞에서 교회의 선교적 책임을 새롭게 인식한 에큐메니칼 노선이다. 선교의 상황이 변천되면서 선교의 개념, 전략 등에 상당한 변화가 와야 한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다. 이 변화는 에큐메니칼 대회의 효시라 할 수 있는 1910년 에딘버러 세계선교대회에서부터 서서히 일어나기 시작하였고, 1950년 이후로 눈에 띄게 강하게 일어났다. 이 변화란 선교의 목표를 영혼 구원에서 사회구원으로 잡고, 선교의 주체를 교회 중심 선교에서 하나님의 선교로 바꾸고, 선교의 방법도 복음전파에서 해방과 투쟁 그리고 대화로 바뀐 것이다. 이에 대하여 복음주의 계열에서는 다른 것들을 함께 고려하지만, 여전히 복음전파와 교회 설립에 우선순위를 두면서 선교를 수행하고 있는 상황이다.
4) 우리가 직면한 세계선교의 과제
기독교 선교의 역사는 그 주체가 성령이셨다. 기독교 선교는 일시적으로 실패한 것 같은 때도 있었다. 그러나 선교는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는 구원사역이다. 하나님의 선교는 결국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내실 뿐만 아니라 세상의 끝 날까지 계속되어야 한다. 지금으로부터 500년 전만 해도 기독교는 철저하게 유럽에만 국한된 종교였다. 이슬람보다도 오히려 더 교세가 약했었다. 또한, 200년 전만 해도 기독교가 오늘과 같은 세계적인 종교가 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었다. 그런데 지난 200년 동안 수많은 성도들과 선교사들이 목숨을 걸고 세계 각세계선교역사 127지로 나가 복음을 전할 결과로 기독교가 오늘날 이런 세계적인 분포도를 지니게 되었다.지금까지 선교역사에 수만은 도전과 장애가 있었던 것처럼 앞으로의 선교도 그러한 상황은 계속될 것이다. 오늘날에는 세계화 현상과 난민 문제, 경제적인 이유로 국제적인 이주 현상, 포스트모던 시대와 탈종교화 그리고 선교사 추방과 선교의 창의적 접근 등, 다양한 문제들이 우리의 앞을 가로막고 있다. 장래 일을 알 수 없는 이러한 시대일수록 우리는 본질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장래 일을 알려주시고 인도하시는 성령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요 16:13).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가라고 말씀하시면서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라고 말씀하셨다(마 28:20). 우리는 사도행전의 이름 없는 복음 전도자들의 그 순수하고 열정적인 헌신의 정신을 회복해야 하는 것이다.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는 것이야말로 오늘날을 살아가는 모든 교회, 모든 성도들의 지상 과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