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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은 대답 대신 자기도 모르게 고려어로 이렇게 물었다.
“아가씨, 당신은 경교 신자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건 왜 묻습니까?”
“아, 아닙니다. 그냥.”
“공자님, 아직 저의 질문에 답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녀가 부드러운 눈빛으로 조영을 바라보며 역시 부드럽고 아름다운 어조로 말했다.
“아, 죄송합니다. 화살을 살펴보아야 제가 잡은 것인지 아닌지 알 수 있습니다.”
그녀가 고개로 조영에게 감사의 표시인 듯 목례를 한 다음, 백마 위의 백의녀를 쳐다보며 통역한다.
“화살을 살펴보아야 알 수 있답니다.”
백의녀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녀 뒤에 서 있던 사나이에게 꿩을 주며 명한다.
“이 꿩을 저 분에게 가져다 보여드려요.”
사나이가 꿩을 받아들고 형형한 눈빛으로 조영을 쏘아보며 다가왔다. 그가 거만한 태도로 조영을 훑어보더니 다가가 한손으로 꿩을 내밀었다.
조영은 꿩을 받아 새의 몸으로 관통한 화살을 잠시 살펴보다가 꿩을 사나이에게 돌려주면서 고려어로 말했다.
“내가 쏜 화살임에 틀림없소.”
백의녀 곁에 서 있던, 여미아라 불리던 하녀가 그대로 통역하자, 백의녀는 어깨에 매를 올려놓은 사나이에게 분부한다.
“그대의 매가 남의 것을 낚아챘네. 주인에게 그 꿩을 돌려주게.”
사나이는 약간 불만스러운 듯한 표정을 짓다가 거만한 자세로 한 손을 내밀어 조영에게 주려 했다. 그 때다.
“잠깐!”
시종일관 조영의 뒤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조영의 시종이 앞으로 한 걸음 나서며 그 꿩을 대신 받았다.
백의녀의 시종인 비응臂鷹의 사나이는 불쾌한 얼굴로 그를 훑어보다가 이내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이 꿩을 아가씨에게 드리겠습니다. 화살만 돌려받으면 됩니다.”
조영이 꿩의 몸통에서 화살을 힘 있게 뽑아 빼며 백의녀를 향해 말했다.
“제가 화살을 쏘지 않았더라도 저 보라매가 꿩을 잡았을 것입니다.”
여미아라 불린 백의녀의 하녀가 다시 통역했다.
“흠! 공자는 마음씨가 퍽 좋은가 보군요. 괜찮아요. 먼저 잡은 사람이 임자예요. 보라매는 당신의 화살보다 한 걸음 늦었습니다.”
백의녀의 하녀 여미아가 막 통역하려 할 때, 조영이 먼저 흔쾌히 대답했다.
“그렇게 생각하주시니, 고맙소. 아가씨는 아량이 넓은 분이군요.”
조영은 이렇게 말한 후 꿩을 자신의 시종에게 넘기고, 곧바로 백의녀 일행을 지나쳐 내려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발걸음을 돌리다가 조영은 속으로 ‘아차!’했다. 자기도 모르게 마지막에 거란어를 불쑥 토해버린 것이다.
‘그러나, 내가 뭐 특별히 잘못한 것은 없잖아. 내가 거란 말을 모른다고 한 적이 없고. 일부러 하지 않았을 뿐이니.’
조영이 뒤통수가 화끈거림을 느끼며 걷고 있을 때 아니나 다를까, 뒤에서 여인의 높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깐만요!”
조영이 뒤를 돌아보자, 그녀가 말머리를 돌리며 약간 화난 음성으로 물었다.
“당신은 거란 말을 잘 알면서 왜 모른 척 했나요?”
“모른 척 한 적이 없소. 그렇게 느꼈다면 죄송하오.”
조영은 이렇게 말한 후 잠시 목례를 하고 돌아섰다.
“그럼.”
청총마 상의 백의미인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한 채 조영을 쏘아보고 있었다.
조영과 그의 시종은 빠른 걸음으로 달려 내려갔다. 그 때 어디선가 노루피리소리가 들려왔다. 노루새끼의 울음소리를 흉내내 노루를 유인하는 피리소리다.
“아니 저건!”
조영의 시종이 돌연 소리를 질렀다.
“나리, 저기를 보세요.”
그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쪽을 바라보자, 백여 보 밖에서 노루 한 마리가 두 귀를 쫑긋하고 이쪽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저건 사향노루 같은데요?”
말과 동시 조영의 시종은 지체하지 않고 화살을 날렸다. 화살은 예리한 파공음을 내며 날아갔다. 노루는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달려갔는데, 아마도 화살에 중상을 입은 듯했다. 몇 발자국 달려가던 노루가 다시 크게 비명을 지르며 쓰러진다.
조영의 시종이 노루를 향해 다시 살을 날리려 하자, 조영이 제지하며 말했다.
“잠깐! 기다려보게.”
조영은 말에서 내려 시종에게 말을 맡기고 노루가 쓰러진 곳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 때 어디선가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타나더니 노루를 향해 다가가는 것이 조영의 눈에 띄었다.
조영은 그들이 방금 전에 만났던 그 청총마 위의 백의미인 일행임을 곧장 알아차릴 수 있었다.
노루가 쓰러진 곳에 다가가보니, 노루는 아직 살아서 애처로이 신음하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과연 사향노루 암컷임이 분명했다. 조영은 울고 있는 노루가 갑자기 불쌍해 보였다.
노루의 몸에는 두 개의 화살이 박혀 있었다.
조영이 뒤를 돌아보며 따라온 시종에게 말했다.
“이 노루가 너무 불쌍하구나.”
“흥! 그건 당신이 잡은 게 아닐 텐데요?”
앞쪽에서 백의미녀 일행이 다가오더니 누군가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조영은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다가 백의녀의 음성임이 분명한 것 같아, 속으로 깜짝 놀랐다. 조영이 들은 말은 분명 고려어였기 때문이다.
“아가씨께서 방금 고려어로 말씀하신 건가요?”
백의녀는 갑자기 손으로 입을 가리며 킥킥거렸다.
“그래요. 내가 말했어요.”
역시 고려어다.
순간, 조영은 머쓱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다가 물었다.
“방금 전에는 왜 모른 척하고 하녀에게 통역을 시켰습니까?”
“그건 피장파장이에요. 그건 그렇고, 당신은 이 노루를 어떻게 하실 참인가요?”
“살려주었더라면 좋았을 터인데.”
“잡아 놓고 무슨 말씀이에요?”
“아가씨의 것입니다. 처음 한 발은 우리가 쏘았으나, 그것은 별로 큰 상처를 주지 못한 것 같습니다. 노루피리로 노루를 유인한 것도 아가씨 쪽이었고요.”
“그렇게 말씀하시니 고맙군요.”
“하지만 노루가 참 불쌍해 보이는군요.”
“하지만 당신처럼 그렇게 어질고 자비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이 혼란하고 어지러운 세상에서 대사大事를 이루지 못할 거예요.”
백의미녀가 돌연 말을 비약시켰다.
“대사를 이루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그럼, 이만.”
조영이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작별을 고했다. 조영이 시종과 더불어 발걸음을 돌려 몇 보 나아갔을 때, 뒤에서 백의미녀의 소리가 들렸다.
“잠깐만요! 공자님은 뭐가 그리 급한가요?”
그녀의 말투가 갑자기 공손해졌다.
“아가씨, 무슨 가르침이라도?”
조영이 뒤돌아서서 물었다.
백의미녀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으며 대답했다.
“제가 공자님의 존함을 여쭈어 봐도 괜찮을까요?”
조영은 약간 놀란 듯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음, 저의 이름은 고조영이라고 합니다. 높을 고高 임금 조祚 영화 영榮 자를 씁니다.”
“공자님은 고려 사람이신가요?”
“그렇소.”
조영은 대답을 마치자마자 바로 작별을 고하며 발걸음을 돌리려 했다.
“그럼, 이만.”
“잠깐만요. 제 말이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
“공자님은 제 이름이 궁금하시지 않은가요?”
“아, 실례했습니다. 아가씨의 존함을 받잡고 싶습니다.”
겉으로 이렇게 말했으나, 조영은 속으로 떨떠름했다. 비록 자신의 어머니가 거란의 부족 왕녀이긴 했으나, 거란의 귀족 여인인 듯한 이 미인의 이름이나 신상은, 조금도 알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호호호호호!”
갑자기 그녀가 간드러지게 웃었다. 이른 봄의 차가운 바람이 한차례 사람들의 얼굴을 휩쓸고 지나갔다. 그녀의 웃음소리가 산중에 메아리친다.
한바탕 긴 웃음을 터뜨리더니, 그녀가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흥! 공자님은 속에도 없는 말씀을 하시는 군요.”
조영은 속으로 뜨끔했다. 그녀가 계속해서 고려어로 물었다.
“공자님은 진심으로 제 이름을 알고 싶으신가요?”
조영이 말을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을 때 그녀가 말을 이었다.
“공자의 이름만 묻고 제 이름을 말하지 않는다면, 제가 무례한 사람이 될 거예요. 무례한 사람은 되기 싫답니다.제 이름은, 이루하李婁霞라고 해요. 별이름 루에, 노을 하 자예요.”
“참 곱고 아름다운 이름이군요. 그런데 아가씨는 거란 말에 익숙한 것을 보니, 혹시 거란 사람이신가요?”
“네, 그래요.”
“하지만 성은 거란의 성이 아닌 이李씨이고 입고 있는 흰옷은, 꼭 우리 고려 사람의 옷 같습니다.”
“호호! 성씨는 그럴만한 사정이 있답니다. 그리고 제가 고려를 좋아해요. 하지만, 지금은 고려의 정황이 참 안됐어요.”
그녀가 진심으로 애석해하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조영이 하늘을 우러러보다가 대답했다.
“고려가 망한지도 벌써 근 이십년이 다 되었네요. 곳곳에서 의병들이 일어나 고려 부흥운동을 하고 있다곤 하나······.”
조영이 말끝을 맺지 못했다.
“당신은 고구려 땅을 되찾을 생각이 없나요?”
이루하가 조영을 예리한 시선으로 쏘아보았다.
“네?”
조영은 깜짝 놀랐다.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이 당나라 땅에서 누가 들으면 큰일 날 소리였다. 자칭 이루하라는 거란 여인은 조영의 뜻을 떠보는지, 아니면 무슨 속셈인지, 금기사항을 입으로 거침없이 발설하고 있었다.
조영에게 묻는 백의미녀 이루하의 눈빛이 의미심장하게 반짝거렸다.
“당신의 이름은, 높은高 임금의祚 영광榮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데, 누가 지어준 것인가요?”
“저의 조부께서 지어주셨습니다. 그런 건 왜 묻습니까?”
“공자님의 조부는 아직 생존해 계신가요?”
“그렇습니다.”
“제가 공자님의 조부를 만나 뵙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지금 여기 중국 땅에 사시는가요?”
“네. 저하고 같이 살고 계십니다.”
“그럼, 됐어요. 공자님의 조부를 급히 만나 봐야겠어요.”
“네?”
조영은, 초면의 여인이 당돌하게도 자신의 조부를 만나 뵙고 싶다고 하자 속으로 적이 놀랐다.
“공자님의 사시는 곳은 어딘가요?”
여인은 마치 심문하듯 거침없이 조영에게 물었다.
“네? 여기 장성 아래쪽의 계성 밖에 살고 있습니다.”
“아, 마침 잘 됐어요. 저도 계성에 살고 있거든요.”
백의녀 이루하는 팔에 보라매를 앉힌 시종에게 노루를 맡긴 후, 조영에게 재촉했다.
“어서 계성으로 가요.”
“아 참, 저의 조부를 만나 뵙고 싶다면, 계성까지 가실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이곳에 조부께서 저와 함께 사냥을 나오셨습니다.”
백의미인 이루하가 두 눈을 반짝거렸다.
“오, 그래요? 그것 참 잘 됐군요. 어서 조부님께 저를 안내해 주세요.”
조영은 거란 여인의 돌발적이고 당돌한 언행에 속으로 약간 당혹감을 느꼈지만, 어쩔 수없이 앞장서서 걸었다. 조부 일행과 만나기로 약속한 곳에 당도하자, 먼저 와서 조영을 기다리던 조부는 형형한 눈빛으로, 조영의 뒤를 따라 오는 백의미녀 이루하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할아버지, 이 아가씨가 할아버지를 뵙고 싶다고 해서요.”
조영이 다가가 말했다.
“어르신 안녕하세요? 저는 이루하라고 합니다.”
거란 소녀 이루하가 명랑한 목소리로 인사하며 말에서 내렸다.
“아, 그래요? 반가워요. 아가씨는 어느 귀인의 따님이신가요?”
조영의 조부가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다.
“제 부친의 성함은 진盡 자 영榮 자, 이진영입니다.”
조영의 조부는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혹시, 부친이 송막도독松漠都督 이진영 대인이신가요?”
“네, 그렇습니다.”
조영도 속으로 크게 놀랐다.
송막도독 이진영이 누구인가?
중국의 <신당서>와 <자치통감> 등은 이 인물을 이진충李盡忠이라 부르나, 우리 사서들 <규원사화>와 <태백일사/대진국본기>에서는 뒤 글자가 영榮으로 나온다.
만주족이 지은 <흠정 만주원류고>도 <구당서>를 인용하면서 그를 “이진영”이라 적고 있다.
당 조정이 당나라에 충성을 다하라는 의미에서 이름 끝 자를 바꾸었을 것이다.
당 태종 이세민 시대에(648년) 거란의 군장 굴가窟哥는 거란의 부족들을 이끌고 당나라에 항복한다.
당태종은 굴가가 다스리던 지역을 송막도독부松漠都督府라 명명하고, 굴가에게 당나라 이씨 성을 하사하며 그를 송막도독으로 임명한다<신구당서>.
굴가가 죽은 후 그의 손자 이진영이 그를 이어 송막도독이 되었다.
자칭 이루하라는 이 어린 여인이 송막도독 이진영의 딸이라고 자신의 신분을 밝혔으니, 조영과 그의 조부가 놀란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말하자면, 그녀는 당나라에 귀부歸附(자기 땅을 바치며 투항하는 행위)한 거란의 왕녀였던 것이다.
조영의 조부 고승高丞은 아직도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
“아, 이 대인의 금지옥엽이시군요. 대인은 평안하신가요?”
“네. 염려해주신 덕분에요.”
“아가씨는 어쩐 일로 이 촌로를 만나보고 싶어 했습니까?”
“그냥 뵙고 싶었습니다. 영손令孫의 이름이 참 좋은 것 같아요.”
고승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아가씨의 칭찬이 고맙소.”
“그런데 무슨 뜻으로 그런 이름을 지으셨는지 궁금해요.”
이루하가 예리한 눈빛으로 고승을 정시正視한다.
“그렇게 물으시는 아가씨의 의도가 무엇인지 모르겠소.”
고승은 웃음 띤 얼굴이다.
“특별한 의미는 없어요. 그냥 이름이 너무 좋아서 여쭈어본 것뿐이에요.”
이루하 역시 밝게 웃었다.
“조영의 조祚 자는 알다시피 ‘복’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소. 또 ‘임금’이라는 속뜻도 있지요. 나는 이 손자가 임금의 복과 임금의 영광을 얻기를 바랄 뿐이오. 아가씨는 아실지 모르나, 그것은 이 땅의 복과 영광이 아니오.”
“이 땅의 복과 영광이 아니라면, 그럼······?”
고승이 조용히 손을 들어 서쪽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하늘에서 노을이 져야 누성婁星이 뜨지요. 노을과 누성은 동시에 볼 수 없습니다.”
그가 이루하의 이름 뜻을 빗대어 알쏭달쏭하고 의미심장한 대답을 한 후 곧장 뒤로 돌아서서 걷기 시작했다.
“이루하”의 이름에서 “루”는 루성을 가리키고 “하霞”는 노을을 뜻했다. 말하자면, 그녀의 이름에 “노을”과 “누성”이 함께 들어가 있으나, 고승의 말인즉, 그 둘은 동시에 목격할 수 없다는 거였다.
어쩌면 고승의 속뜻은, 이 땅의 영광과 하늘의 복을 동시에 추구할 수 없다는 말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루하가 고승의 뒤를 향해 공손히 인사했다. 그리고 멀어져가는 조영 일행을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지혜문답 같은 고승高丞의 언어에서, 총명한 그녀는 노을과 누성을 동시에 볼 수 없다는, 즉 저녁노을 같이 보기에 황홀하나 허무하게 사라지는 세상의 부귀와, 누성처럼 반짝이는 하늘의 복을 동시에 추구할 수 없다는, 깊은 속뜻을 캐낼 수 있었을까?
‘노을이 져야 누성이 뜬다?’
‘내 이름엔, 왜 하필 노을과 누성이 동시에 들어가 있지?’
거란의 백의미인, 자칭 이진영의 딸이라는 이루하가 그런 사색에 골똘히 잠겨있는 사이, 고조영의 자태는 어느덧 그녀의 시야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이루하 일행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조영의 조부 고승은 조영에게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영아야, 이루하라는 그 소녀가 네 이름의 의미를 내게 물은 까닭이 무엇인지 너는 알겠느냐?”
“······?”
조영이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녀와 무슨 얘기를 나눴느냐?”
“별다른 얘기는 없었습니다. 단지 제게 고구려 땅을 되찾을 생각이 없는지 물어보고, 제 이름을 누가 지었는지도 궁금하게 여겼습니다.”
조부 고승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 소녀는 어리지만 생각이 매우 깊고 치밀한 아이임이 분명하다. 그 여아가 처음 만난 너에게 서슴없이 자기 속마음을 털어놓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틀 후 네가 그것을 알게 될지도 모른다.”
“이틀 후에요?”
“잘 들어라. 모레는 새벽에 일찍 일어나 목욕재계하고 삼신일체三神一體 상제께 삼배를 올린 후, 경건한 마음으로 <삼일신고>를 읽어야 한다. 그리고 준비해라. 모레는 네 인생에 지금까지 없었던 일이 일어날 것이다.”
조부가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삼일신고三一神誥>는 신시神市 환웅임금 때부터 전해 내려온 배달겨레의 신교神敎(우리민족 전통의 하나님 신앙) 경전이다.
“네?”
전에는 이런 일이 거의 없었다. 할아버지는 언제나 온화했고 조영에게 친절했다. 그에게 무예를 가르치고 학문을 전수할 때도 이처럼 심각한 표정을 지은 적은 거의 없었다. 조영은 조부의 얼굴에서, 평소와 다른 기이한 면을 발견하고 매우 조심스런 태도로 물었다.
“모레는 저의 생일인데, 무슨 중대한 일이라도 발생하는 건가요?”
“모레가 되면 자연히 알 터이니, 기다려라. 네가 지금까지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온갖 의문들이 이틀 후 확연히 풀릴 것이다.”
(다음회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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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2023. 6. 2. 초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