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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의 탄식시 : 13편
1. 시편 13편의 특성 : 탄식의 노래
시편에서 ‘탄식의 노래’에 해당하는 시는 150편중에서 13편을 포함하여 무려 36개나 된다.1) 이처럼 탄식의 노래는 시편에서 가장 큰 단일 범주를 구성하고 있다. 시편의 노래들 중 다수는 개개인이 자신의 특별한 필요에 의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면서 드리는 간구들로 되어 있다.2) 그러나 몇몇 탄식의 노래들은 예배 공동체가 공통의 곤경에 처해 있을 때 하나님께 나아갈 때 사용되는 것들로서, 공동체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3) 뿐만 아니라 시편 22편에서도 보았듯이 ‘메시야 예언시’이면서도 내용의 형식에 있어서 ‘탄식시(비탄시)’의 성격을 띠기도 한다. 사실 시편의 시를 어떤 장르로 분류하든지 간에 모든 각 시들은 메시야를 함축하고 있어서 ‘메시야 시’와 무관하지 않다.
구조의 측면에서 볼 경우에 탄식의 노래들은 시편 안에 있는 다양한 장르들 중에서 가장 정형화된 형식을 사용한다. 이 일정한 양식은 여섯 부분으로 이루어진 것으로서, 어느 정도 신경을 쓴 손길이 작용했음을 암시한다. 탄식의 노래는 보통 하나님께 말을 하거나 그를 부르는 표현으로 시작한다. 시인은 “오 주님!” 또는 “오 하나님!”이라고 외침으로써 곧바로 하나님께 도움을 호소한다. 이것은 탄식이 시인에게 우선 정서적인 안정을 제공하기 위해 단순히 자신의 감정을 분출하도록 하는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도리어 그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호소하는 것이요, 따라서 그것은 암묵적인 신앙의 진술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 노래의 중심점은 탄식 내지는 불평에 있다. 이 부분에서 시인은 자신이 겪는 고통에 대해서 규정하거나 하나님의 도움을 호소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위기 상황에 대해서 묘사한다. 시인은 필사적인 태도로 하나님의 행동을 유도하는 한편으로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것을 말로 표현함으로써 마음의 평안을 얻으려고 노력한다.
탄식의 노래에서 ‘나’ 또는 ‘우리’로 대표되는 시인은 원수 또는 대적자의 위협이 요인이 되고 있는 가난이나 궁핍 또는 비천하고 무기력한 신분 때문에 고통을 당함에 하나님을 찾으며, 고통 중에 도움을 주실 것을 구한다. 그러한 시인에게서 토로되는 탄식에 불평이 탄식의 노래를 구성하는 특징적인 요소이기는 하지만, 이 장르는 결코 탄식으로 끝나지 않는다. 시인은 단순히 자신의 감정을 분출하기 보다는 찬양의 맥락에서 자신의 간구를 표현한다. 왜냐하면 “탄식이 관심을 갖는 것은 자신의 고통에 대한 묘사나 자기 연민이 아니라, 고통 자체의 제거이기 때문이다(Westermann). 그러므로 자신의 간구에서 시인은 자신의 탄식을 하나님 앞에 털어놓음으로써 구원 신탁의 메시지를 전달하며, 하나님께 자비를 베풀어 주실 것을 기원한다.
그에 따라서 모든 탄식의 노래에서 발견되는 마지막 요소는 찬양이다. 시인의 실제 상황이 바뀌었다는 본문상의 증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연스럽게 시인의 입에서 찬양이 흘러나온다(Leiter). 시인은 자신을 위한 하나님의 개입을 기대하면서 믿음을 가지고서 하나님을 찬양한다.
이러한 시편 13편은 탄식의 노래가 어떠한 것이지를 간단하게 보여주는 사례에 해당한다. 이 시는 여섯 절로 구성된 짧은 시인데도 탄식시의 전형을 압축적이면서도 선명하게 보여주는 대표적인 시라고 할 수 있다. 탄식시는 일반적으로 고통과 위기에 직면한 이인의 처절와 절규와 탄식, 이러한 상황에도 좌절하지 않고 하나님께 드리는 구원에 대한 간구와 호소, 그리고 자신의 간구가 응답될 것에 확신을 가지고 드리는 기쁨의 찬양 등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시편 13편은 탄식시가 갖는 이러한 삼대 요소를 망라하고 있어 고통스런 현실에 대한 탄식으로만 그치지 않고 그 절망스런 골짜기를 넘어서 하나님께 구원을 호소하며 그분이 구원하실 것이라는 선취적 신앙으로 마무리하고 있다. 이처럼 탄식시의 전형적 모습을 잘 보여주는 시편 13편은 두 구절들로 된 세 개의 짧은 연으로 구성되어 있다.
ㆍ1-2 / 고통에 괴로워하는 시인의 탄식
ㆍ3-4 / 하나님께 구원을 청하는 시인의 기도
ㆍ5-6 /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하는 시인의 신뢰
2. 시편 13편 해설
2-1. 고통에 괴로워하는 시인의 탄식(13:1-2)
1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2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시편 13편은 표제가 나와 있다.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한글성경은 모든 번역 성경이 표제가 1절에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히브리어 성경 원문은 표제가 1절로 되어 있으며, 표제와 함께 하는 구절은 분리하여 2절로 시작한다. 따라서 히브리어 성경 원문의 2절이 한글성경에서는 1절로 되어 있다. 그에 따라서 히브리어 성경 원문의 성경 구절은 한글성경이 6절인 것에 비해 7절로 되어 있어야 한다. 하지만 히브리어 성경 원문의 성경 구절에서는 6절과 7절이 구분되어 있지 않고 한 절로 되어 있어 전체적으로는 6절로, 마지막 6절은 한글성경의 5-6절에 해당한다. 한편, 표제에는 이 시를 지은 저작자가 누구인지를 알 수 있는 이름이 밝혀져 있다. ‘다윗의 시’라고 알려주고 있는데 따라서 시편 13편의 저작자는 이스라엘 왕 다윗이다. 그리고 또한 표제에는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라고 밝히고 있어서, 이 시의 노래가 인도자 – 지휘자 – 의 인도를 받아 연주된 제의 음악임을 불린 것이라는 연주 방식에 대하여 알려 주고 있다.
시인은 1절의 시작을 “여호와여!”라고 부르짖으면서 하나님을 부른다. 메이스(Mays)는 이 이름 부름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기도는 내적인 반성이나 묵상이 아니라 직접 말하는 것이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기 계시를 통하여 자기 백성에게 주신 이름을 사용함으로써 하나님께 말한다. 그 이름은 기도의 가능성과 약속을 시인에게 허락한다. 기도는 이미 응답을 포함하고 있으며, 말씀과 행동을 통하여 주어진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지식에 기초하고 있다. 삶의 온갖 시련들 중 그 어떤 것도 그리고 하나님 부재의 경험조차도 응답의 확신을 가지고서 하나님께 직접 말할 수 있는 믿음의 특권을 없애지 못한다.”
시인(다윗)이 이처럼 긴박하게 신명인 여호와를 부르며 하나님을 찾음에 있는 것은 그가 처한 상황이 매우 급박한 위험의 상태에 처해 있었던 까닭에 기인한다. 히치히(Hitzig, 미국식 발음 히트지그)는 시편 13편이 사울이 다윗을 잡기 위해 곳곳에 파수꾼을 세워 놓았을 때에 쓰인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때에 다윗은 오랫동안 끊임없이 사울에게 박해를 받고 있는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4) 언제든지 해를 당할 수 있는 데 따른 긴장과 몹시 지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여 의존함에서 갖는 인내에 의해 죽음으로부터 벗어날 희망에 있는 것에서 “여호와여!”라고 신명을 부르며 여호와이신 하나님을 찾음에 있었다. 크레이기(Craigi)는 “한쪽에는 원수가 큰소리치며 손을 들고 있으나, 한쪽에는 시인의 탄식을 들어주는 여호와가 있다”고 하였다. 시인이 “여호와여!”라고 부르며 찾음에 있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 기억되고 하나님의 얼굴에 나타나는 광채를 보는 것이다.
그런 시인은 1-2절에서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라고 부르짖는 탄식을 토한다. 여기에서 보는 “어느 때까지니이까 … 영영히 … 언제까지 … ”라고 하는 반복되는 질문은 시인의 영혼이 복잡해져 있다는 것을 반영하는 표현이다. 혹자는 시인의 이 탄식을 “사람이 너무나 고통이 심하고 살 소망이 끊어지면 하나님께서 자기를 버리셨다는 생각에 빠진다. 아마도 다윗은 이러한 영적 위기에 빠져 있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에게 구원을 호소하고 있는 것 같다”라고 본다. 그러나 시인의 탄식이 어떤 성격의 것인지는 루터에 의해서 잘 설명되고 있다. “희망 자체가 절망이며, 그럼에도 절망은 다시금 희망의 시작이 되는 것이다.” 시인의 탄식에서 보는 물음은 육체와 정신 사이의 갈등에서 비롯된 것이었다고 설명할 수 있다. 낙담한 마음은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하나님이 영영 나를 잊으셨다.” 그러나 깨어 있는 정신이 이러한 생각을 밀어내고 이렇게 묻는다. “언제까지나 하나님이 나를 잊으신 것처럼 보이시렵니까?” 신앙은 좌절 뒤에 도사리고 있는 사랑을 감지하게 된다. 절망의 고통은 하나님의 자비로운 모습에 가면이 씌어진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그 자비로운 모습이 드러나지는 가면을 벗어던질 때만을 바란다. “①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②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③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④어느 때까지 하리이까”라고 거듭하여 다윗은 자신의 영혼에 아로새겨진 하나님께 갖는 신념의 외침을 그의 정신 가장 깊숙한 곳에서부터 부르짖었다. 그러므로 본 구절에서다윗이 탄식에 있는 부르짖음은 불신앙에서 솟구쳐 오른 원망과 불평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확신으로 도약해나가는 발판이었다.
이처럼 “어느 때까지니이까?”라는 질문을 네 번 반복하는 구조로 되어 있는 1-2절은 시인이 처한 절박한 심정을 잘 보여준다. 이는 그의 곤경이 한없이 지속될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1) 첫 번째의 거대한 고통은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하면서 하나님께서 얼마나 오랫동안 그를 잊으실 것인지를 묻는다. (2) 두 번째 물음에서 시인은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라며 위기에 처해 있는 자기에게 하나님께서 얼굴을 드러내실 것의 탄식에 있는다. (3) 세 번째 물음에서는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라고 하여 자신이 세운 어떠한 계책으로도 경감시킬 수 없는 고통에 있으므로 언제까지 그 상태에 있지는 않게 하실 것이라는 탄식에 있다. (4) 그러한 시인은 마지막 네 번째 물음에서는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라고 자신을 조롱하며 의기양양해 하는 원수를 눈에 보이지 않게 영원히 치워버리실 날이 언제일 것인지를 알고자 하는 탄식에 있는다. 이러한 시인의 물음에 있는 탄식을 보면 (1)하나님께서 시인의 고통을 잊지 않으실 것에서 (2)하나님께서 얼굴을 시인에게 드러내실 것이며 (3)하나님께서 시인의 번민과 근심을 방치하지 않으시고 (4)하나님께서 시인에게서 그의 원수를 제거하실 것의 희망을 지니고 있다. 이는 루터의 십자가 신학 사상에서 대하는 ‘숨어(은닉해) 계시는 하나님’과 잘 부합한다. 그러므로 1-2절에서의 시인의 탄식은 3-4절에서 하나님께 구원의 탄원으로 진행된다.
2-2. 하나님께 구원을 청하는 시인의 기도(13:3-4)
3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4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그를 이겼다 할까 하오며 내가 흔들릴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
시편 13편의 두 번째 연은 하나님께 구원을 청하는 시인의 기도이다. 3절 상반절인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에서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를 칼빈은 ‘나를 보사 응답하시고’라고 번역하면서 그 의미를 “하나님께서 그의 종들에게 즉각적으로 도움을 베풀지 않을 때에는 육신의 눈에 하나님이 그들의 곤경을 보고 계시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만큼 다윗은 하나님에게 먼저 자기를 보아주시고, 다음으로 자기를 도와주실 것을 요청하고 있다. 만약에 다윗이 하나님의 눈길이 자신에게 향하고 계시다는 점을 확신하지 않았더라면 하나님께 외쳐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었을 것이지만, 그러나 이 확신은 신앙의 결과였다”라고 설명하였다. 이러한 것에서 시인이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라고 구함은 “내가 앞에서 네 번씩이나 ‘어느 때까지니이까?’라고 물은 질문에 대해서 대답해 주소서”라는 의미이다. 이와 같이 구원해 달라는 기도는 탄식의 주제를 이어받고 있다.
시인이 하나님께 응답을 간청하는 기도는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한다”는 것인데, 이를 직역하면 “당신께서는 나의 눈들을 밝히십시오. 내가 죽음으로 잠들지 않도록”이다. 시인이 자신의 눈을 밝혀달라고 구하는 탄원의 목적은 사망의 잠을 자지 않기 위함에 있다. “사망의 잠을 잘까”에서 ‘잠을 잔다’는 것은 성경에서 죽음을 표현하는 완곡어법이다(76:5; 욥 3:13; 14:12; 렘 51:39, 57). 시인은 원수에게 해를 당하여 자신이 죽임을 당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구원하여 주어서 눈이 떠 있게 할 것을 구한 것이다. 시인이 이 탄원에 있은 것은 하나님에게서 생명 얻는 구원의 빛을 보고 있는 것에서 이다.
이러한 사실은 뒤이어지는 4절에서 확인된다. 곧 사망의 잠을 잠에 있게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그를 이겼다 할까 하오며 내가 흔들릴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 이를 직역하면 “나의 원수가 내가 그를 이기었다고 말하지 않도록, 나의 대적들이 내가 비틀거릴 때 기뻐하지 않도록 응답하소서”이다. 이는 시인의 원수들(다윗의 정적들)이 시인을 이기었다고 말하지 못하게 해 주실 것을, 시인의 대적들이 시인이 고통당하며 쓰러지는 것을 보면서 깔깔대며 조소하지 못하게 해 주실 것을 구하는 것이다. 시인의 이 탄원은 다윗의 대적이 여호와 하나님을 진실히 의지하고 있는 자를 이기도록 놔두지 않으실 것을 붙들고 있는 것에서 이다. 한편, 3절과 4절에서 각각 “두렵건대”라고 시인이 심경을 토로하고 있는 표현을 보게 되는데, 이는 히브리어 성경 원문에는 없다. 이처럼 히브리어 원문에는‘두렵건대’라고 하는 말이 없으나, 한글성경에서 이를 번역하여 넣은 것은 원수들이 시인을 이기었다며 시인의 좌절과 낙담을 승리의 징표로 여기며 즐거워함으로 시편 42:3, 10에서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 내 뼈를 찌르는 칼 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늘 내게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도다”(참고. 시 79:10; 115:2; 욜 2:17; 말 2:17)에서 보듯이 “너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네가 찾는 하나님은 너에게 아무런 힘이 되어주지 못하고 있느냐? 네가 믿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어서 와서 너를 구원해 보라!”는 등 온갖 별 소리를 다하며 시인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에게 비웃음과 모욕을 줄 것을 시인이 두려워하고 있을 것으로 의식하고 있기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그러기에 시인은 원수들의 자긍과 거만이 판을 칠 수 없도록 그들의 입을 굳게 닫게 할 것을 탄원하였다.
2-3.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하는 시인의 신뢰(13:5-6)
5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6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
이제 시인의 시는 탄식과 탄원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하는 신뢰에 의한 기쁨의 표현과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덕에 감사함으로 드리는 찬송으로 옮겨진다. 5절인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는 히브리어 성경 원문이 의도하는 의미는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인자하심 중에 신뢰했습니다. 나의 마음이 하나님의 구원을 기뻐할 것입니다”이다. 여기서 원문에 나타나고 있는 ‘그러나’는 번역되어야 하지만, 개역 및 개역개정을 비롯한 일부 한글성경은 번역을 생략하였다. 하지만 새번역성경, 한글킹제임스, 킹제임스흠정역은 ‘그러나’를 번역하여 놓았다. 그리고 우리말성경은 ‘그러면’으로 번역해 놨다. 접속사인 이 '그러나'(또는 그러면)가 번역되어 있어야 하는 것은 앞에서 계속되어온 탄원하던 시인이 본 절에서는 정반대의 상황, 즉 시인이 주의 인자하심을 의뢰하며 주의 구원을 기뻐한다고 고백하고 있어 문맥상의 의미를 잘 살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시련과 고통의 시간에도 시인 자신이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의뢰했음을 강조한다.
이렇듯 탄식과 탄원의 분위기에서 기쁨과 찬송의 분위기로 급변하게 되는 결정적인 요인은 ‘주의 인자하심’때문이다. 시인이 처한 어려운 가운데서도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언약(삼하 7:1-17)에 기인한 자비가 그와 함께 하고 있은 것에서 이다. 그 언약의 이행에 의해서 시인은 언약의 주이신 하나님에 의해 지켜지고 있다. 따라서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은 또한 시인에게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다. 시인은 자신과 맺은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 하나님을 의지했다. 그는 그로 말미암아 기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시인이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고 그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기쁨에 있는다고 해서 자신이 처한 현실은 달라지는 것이 없는 아무 것도 변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자신의 하나님이 되신 확신, 그분의 언약적 사랑, 지속적인 사랑을 기억하고 의뢰했기 때문에 탄식과 탄원에서도 솟는 기쁨은 자신에게 하나님이 하신 은덕, 곧 자신을 후대하신 하나님을 낱낱이 전함에 있는 찬송을 하기에 이른다. 그러므로 시인은 마지막 6절에서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나를 후대하심이로다”라고 찬송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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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편의 장르는 학자들 간의 견해 차이에 의해서 다르게 분류하기도 한다.
2) 시 3-7편, 9-10편, 13-14편, 17편, 22편, 25-26편, 28편, 31편, 35-36편, 39편, 41-43편, 52-59편, 61편, 63-64편, 69-71편, 77편, 86편, 88편, 109편, 20편, 139-142편.
3) 시 12편, 44편, 58편, 60편, 74편, 79-80편, 83편, 85편, 90편, 94편, 123편, 126편, 129편, 137편.
4) 다윗의 고난의 삶은 사무엘상하, 열왕기상 초반부, 역대상에 잘 기록되어 있다. 특히 사무엘상하에는 다윗의 극심한 고난이 잘 묘사되어 있다. 그는 물샐틈없는 원수의 무차별 공격에 전전긍긍하여 살면서 수많은 위기를 당하고, 그때마다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방식을 통하여 위기에서 구출 받았었다. 다윗이 생애 가운데 사면초가의 위기에 처한 적이 여러 번 있었기 때문에 본 시가 정확히 어떤 사건과 관련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원수의 자긍하는 기간이 길었다는 암시에 근거하여 다윗이 사울의 추적을 피하여 근 10년간의 도피 생활을 하던 중에 지은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