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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공 체제:Inside"에 대한 질문(토, 4월 13일까지)
* 교재를 읽고 다음의 Questions에 대한 답해주세요.
각 교재 문헌에 관해 “새롭게 알게 된 점”, “여전히 의문이 남거나 설명을 원하는 점”, “같이 토론해 보고 싶은 점”을 각각 1개 이상 쓸 것.
1. 김문기.(2014).淸米, 癘疫, 大報壇: 강희제의 海運賑濟와 조선의 반응.역사학연구,(53),105-152.
2. 김형종. (2020). 『兩界照會』의 소개 ― 1890년대 조선-청 ‘국경지대’와 ‘국적’의 문제 ―. 동양사학연구, 152, 361-423.
<오천융>
1: 질문: 청나라가 멸망했을 때 만주족의 인구는 약 100만 명이었어요. 청나라가 중국을 통일하려면 한족 군대를 주력 부대로 활용해야 한다는 의미예요. 그런 점에서 보면 많은 명나라 사람들, 특히 북방 한족들은 청나라군이 입관할 때 소위 '화이'의 구분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음을 알 수 있어요. 그렇지 않았다면 청나라군에 합류하지 않았을 것이에요. 그러나 조선에는 백성들의 목숨을 앗아갈 정도로 많은 사대부들이 이 점에 관심을 기울였어요. 그렇게 ‘화이’의 구분을 중시하는 것이 과연 조선에 얼마나 이익이 될까요?.
2 : 조선의 종성도호부사도, 청나라의 길림장군도, 훈춘도통도 등등의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군인이었고 전문적인 외교관료도 아니었어요. 당시 양측 모두 외교에 미숙했다고 할 수밖에 없어요.
<이상민>
1. 김문기.(2014).淸米, 癘疫, 大報壇: 강희제의 海運賑濟와 조선의 반응.역사학연구,(53),105-152.
- 이 논문에는 경신대기근 때 실행되지 않았던 ‘청곡’을 을병대기근 땐 실행한 것에 대하여 을병대기근이 경신대기근보다 더욱 참혹했기 때문이라고 서술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 또한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을병대기근을 겪은 숙종 시기는 경신대기근을 겪은 현종 시기에 비해 병자호란으로부터 더욱 긴 시간적 거리를 확보하고 있다는 점, 현종 시기에는 청조의 중원 통치가 아직 확고히 자리잡지 못하였고(특히 장강 이남지역) 정성공과 남명의 반청복명 운동, 삼번의 난 등 조선 사대부들이 청조 멸망을 기대하게 하는 이슈들이 있었던 것에 비해 숙종 시기에는 강희제가 반청 세력을 진압하고 청이 안정되었다는 점, ‘청곡’ 당시 소론이 집권하고 있었다는 점들로 인한 조선의 대청 외교 변화가 을병대기근 때의 ‘청곡’을 가능하게 하진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이 논문에는 조선이 17세기 소빙기로 인한 기근을 타개하기 위해선 '교역'이 필요했다고 서술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조선은 은의 비축량이 부족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조선 정부와 사대부들이 교역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더라도 조선이 소빙기의 위기를 극복할 정도의 규모있고 지속적인 교역을 할 수 있었을지 의문입니다. 특히 이 논문에도 나와 있는 강희제의 해운진제 당시 곡식값으로 지불할 은을 모으느라 조선이 고생했던 모습을 보면 더욱 그러한 의문이 듭니다.
2. 김형종. (2020). 『兩界照會』의 소개 ― 1890년대 조선-청 ‘국경지대’와 ‘국적’의 문제 ―. 동양사학연구, 152, 361-423.
- 조선인들이 왜 굳이 조선 지역에서 농사를 짓지 않고 청 지역인 강북으로 이주하여 농사를 지었는지 궁금합니다.
- 청 시기 만주 지역은 만주족 외 다른 민족이 출입할 수 없는 봉금(封禁)지역으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많은 조선인들이 만주 지역으로 넘어갈 수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청 또한 이들을 추방하지 않고 이들을 직접 장악, 통제하고 했다는데 이 시기 封禁정책이 폐지되었거나 유명무실해진 것인지 궁금합니다. 또 논문과는 별개로 어째서 청이 만주 지역을 封禁지역으로 만들었는지도 궁금합니다.
- 鄭周之嫌, 鄭周之事가 정확히 무슨 뜻인지 궁금합니다. 또, 연연갑(葉聯甲)은 왜 이를 이전의 縱民過江, 强分民糧, 喝令奪穀 등의 일을 풍자한 것으로 보았는지도 궁금합니다.
<장문혁>
새롭게 알게 된점: 울병 대기근 당시 청에게 도움을 요청해 쌀을 지원받은 사실은 알고 있었으나 청에게 도움 받은 사실과 대보단 설립을 연관 지어 해석하는 시각은 처음 접하였다.
여전히 의문이 남거나 설명을 원하는 점: 분명 청미를 받아들인 것은 백성들을 살리는 것이었지만 송시열계 강경 노론들이 청미를 받아들인 자들을 정치적으로 공격하였다. 그렇다면 당시 혜택을 받은 백성들의 지지가 정치적으로 보호를 해주지는 않았는지 궁금합니다
같이 토론해 보고 싶은 점: 명에 대한 의리를 지켜 사회 질서를 바로 잡는게 중요한가 아니면 실질적으로 청에게 도움을 받아 실리를 챙기는게 중요한가?
<고원>
1. 새롭게 알게 된 점:
조선 시대 말기에 발생한 유복大饥馑에 대한 실학파와 노론(老论派)의 반응이 흥미롭습니다. 노론은 청나라의 구호를 거부하며 자주적인 대응을 시도했던 점, 특히 대보단(大报坛)을 설립하여 명나라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한 점은 당시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동향을 잘 보여준다.또한 대보단 같은 민간 주도의 구호 활동은 조선에서 보기 드문 시도였으며, 이는 노론이 청의 지원을 받는 것을 거부하면서도 실제로 국민의 고통을 완화하기 위해 어떤 조치를 취했는지를 보여준다.
2. 여전히 의문이 남거나 설명을 원하는 점:
노론이 청나라의 구호를 거부한 것은 정치적, 문화적 독립을 지키기 위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실제로 조선 국민에게 최선의 선택이었는지, 그리고 이러한 선택이 국민의 고통을 더 크게 하지 않았는지?
3. 같이 토론해 보고 싶은 점:
대보단과 같은 민간 주도 구호 활동의 실질적인 효과와 한계에 대해 더 깊이 탐구해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자력구제가 정말로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효과적인 대응 방법인지, 어떤 조건에서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지 토론해보고 싶다.
2-1. 새롭게 알게 된 점:
이 사료는 1890년대 조선과 청 사이의 국경지대 상황을 새로운 관점에서 조명한다. 특히, 이 지역의 사회, 문화, 정치적상황과 이에 대한 조선과 청의 반응을 분석함으로써, 당시 국제관계의 복잡성과 동아시아에서의 국경 문제의 중요성을 새롭게 인식하게 해 준다 .
2-2. 여전히 의문이 남거나 설명을 원하는 점:
국경지대가 조선과 청의 국제관계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그리고 이 지역의 사회적, 경제적 상황이 양국 관계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이 필요하다. 특히, 이 지역이 양국 사이의 긴장 완화 또는 증대에 어떻게 기여했는지에 대한 의문이 남아 있다.
2-3. 같이 토론해 보고 싶은 점:
조선과 청 사이의 국경지대 관리가 당시 국제정치, 특히 동아시아 지역의 권력 균형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 더깊이 탐구하고 싶다.
<예진>
1. 김문기.(2014).淸米, 癘疫, 大報壇: 강희제의 海運賑濟와 조선의 반응.역사학연구,(53),105-152.
1) 새롭게 알게 된 점
1690년대 후반에 을병대기근이라는 큰 기근을 겪었다는 사실 자체를 새롭게 알게 되었다. 또한 청곡에 대해 강력하게 비난했던 세력이 송시열계의 강경노론이었다는 것이다.
2) 토론해보고 싶은 점
강희제의 해운진제와 대보단을 둘러싼 논쟁들은 조선사회가 가진 경직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고 논문에서 설명한다. 그렇다면 현재 대한민국 사회가 가지는 경직성은 무엇이며, 이 경직성 때문에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점은 무엇일까?
2. 김형종. (2020). 『兩界照會』의 소개 ― 1890년대 조선-청 ‘국경지대’와 ‘국적’의 문제 ―. 동양사학연구, 152, 361-423.
1) 새롭게 알게 된 점
-종성부사 지방관으로서 윤병관이 규정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종성부의 민심수습에 더 관심을 보였다는 점이다.
-국경지대에서 가장 큰 갈등요인이었던 ’개간민‘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되었다.
<임유태>
1. 김문기.(2014).淸米, 癘疫, 大報壇: 강희제의 海運賑濟와 조선의 반응.역사학연구,(53),105-152.
청 및 강희제와 조선의 강경 노론 사대부들이 강희제의 해운진제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랐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청미에 대한 사대부와 조선의 반응을 통해 조선 사회가 가진 경직성과 대명의리가 가진 무게를 짐작해 볼 수 있었다.
2. 김형종. (2020). 『兩界照會』의 소개 ― 1890년대 조선-청 ‘국경지대’와 ‘국적’의 문제 ―. 동양사학연구, 152, 361-423.
당시 조선 후기 국경과 국가의 개념이 국경지대에서 모호해진 시점에 이중국적자들로 인한 문제가 일어났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김주찬>
1. 궁금한 점: 유독 조선에서 기근의 피해가 더 막심했던 이유가 그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피해를 미처 복구하지 못해서 그런지, 또 다른 이유는 없었는지 궁금합니다. 일본은 조선보다 인구도 많은데 어떻게 기근 피해가 조선보다 적었는지 궁금합니다.
2. 새롭게 알게 된 점: 함경북도 당국이 두만강 국경을 넘어간 조선인들도 통제하려 하는 일종의 식민지적 경영을 시도했다는 점.
궁금한 점: 2만 명이 넘는 조선인을 길림에 의해 잃은 함경북도가 그로 인해 어느 정도의 재정적 손해를 입었는지, 또한 그것이 조선 전체의 재정상황에 어떤 영향을 가져왔는지에 대해 더 알고 싶습니다.
토론하고 싶은 점: 만약 길림 당국이 두만강 북쪽의 공식적인 지배를 확실시하지 못한 채, 함경북도 당국의 비공식적인 지배가 성공하였다면, 후에 국경 협상을 통해 조선의 땅으로 편입될 수 있었을지.
<이유미>
1. 김문기.(2014).淸米, 癘疫, 大報壇: 강희제의 海運賑濟와 조선의 반응.역사학연구,(53),105-152. 中
- 조선의 사대부들은 청의 원조를 ‘은혜를 베푸는 것’이 아닌, ‘이익을 탐하는 것’ 내지는 조선의 ‘치욕’이라 받아들였는데, 이에 강희제의 실제 의도에 대해선 밝혀진 바가 없는지 궁금함.
- 대보단 건립 배경에 이러한 숨겨진 또 하나의 배경 있다는 것을 새롭게 알게 되어 흥미로웠음.
2. 김형종. (2020). 『兩界照會』의 소개 ― 1890년대 조선-청 ‘국경지대’와 ‘국적’의 문제 ―. 동양사학연구, 152, 361-423. 中
형사사건의 당사자가 된 양국 백성들은 본인들의 편의에 따라 국적을 멋대로 선택하는데 그냥 조선과 청 둘 다 국경지대의 백성들을 두 개의 국적을 가진 자국민으로 보고 재판하면 안 됐었나?
<이지연>
1) 청시를 실시할지 말지 의논하던 과정에서, 이에 반대한 관리들은 어떤 방안을 내놓았을지 궁금합니다. 물론, 대명의리와 복수설치라는 명분 면에서 반대하였다는 점은 이해가 가지만 현실적으론 청시가 가장 알맞은 방안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에 반대한 관리들은 실질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면서 반대한 것인지 혹은 명분적인 측면에서만 반대한 것인지 의문이 듭니다.
2) 현대 사회의 국제하천의 분쟁의 경우에는 경제적인 측면이 많이 부각됩니다. 메콩강과 나일강 같은 경우에도 상류 국가의 댐 건설 등으로 인한 농작물 수확량 감소 등으로 인해 분쟁이 발생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상하류로 국경이 구분된 게 아니라 경제적인 면이 적게 언급된 것이겠지만, 논문에서 부각된 측면은 사람과 사람 간의 갈등이 대부분이라 이외의 경제적 측면 등에 대한 분쟁은 없었는지 궁금합니다.
<윤윤상>
1번 논문
사대부들의 청에 대한 적대심이 드러난 상황에서 숙종이 그런 의견을 묵살하고 청의 지원을 적극 지지했다는 점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2번 논문
논문을 읽으면서 조공 체제보다는 국경과 세금에 관련된 논문이라는 인상이 남아서 논문과 조공 체제의 연관성을 더 설명을 듣고 싶다.
월간민들의 지속적인 발생을 막기 위해 조선이 내부적으로 어떤 정책을 취했으며 미흡한 부분은 무엇인지 토론해보고 싶다.
<정선우>
새롭게 알게 된 점: 두 차례의 호란 이후 경신대기근과 을병대기근의 존재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었고 그 당시 조선의 인구의 20~30%가 감소할 정도로의 큰 사건임을 처음 알게 되었다. 또 이러한 대기근이 정치적 목적으로도 이용되었다는 점도 새롭게 알게 되었다.
의문인 점: 1. 양계조회는 주로 종성과 회령, 두만강의 남과 북의 대한 이야기를 다루는데 압록강 근방에서도 조선과 청의 '이중국적'으로 비롯된 비슷한 문제가 있었는지 궁금하고, 있었다면 그와 관련된 사료는 무엇이 있는지 궁금하다.
2. 계갑대기근이 임진왜란의 판도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그리고 을병대기근 당시 왜 일본의 곡물유입을 요청할 생각은 안했는지 의문이다(조선보다 '아래'라고 생각하는 일본에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껄끄러워 그러한 것인지 등)
3. 대보단 설치 후 청의 반응이 궁금하다
토론해 보고 싶은 점: 송시열계의 강경 노론의 입장과 같이 계속해서 의리를 내세우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지 토론해보고 싶다.
<김예인>
강희제는 어떠한 정치적인 의도를 가지고 육운미와 해운미의 운송을 신속하게 추진했는지 에대해 궁금합니다.
통상장정이 근대적 국경의 개념형성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궁금합니다.
<박지수>
1. 김문기.(2014).淸米, 癘疫, 大報壇: 강희제의 海運賑濟와 조선의 반응.역사학연구,(53),105-152.
명나라의 몰락 이후에도 조선은 '대보단'을 세움으로써 명나라의 미덕을 계속해서 기리는 모습을 새롭게 이해했습니다.
강희제는 조선의 해운진제를 일정 부분 완화하여 청나라와의 무역을 촉진하려는 노력을 보였습니다. 청나라의 무역 방침이 바뀌게 되었던 계기에 대해 새로 알고 싶습니다.
2. 김형종. (2020). 『兩界照會』의 소개 ― 1890년대 조선-청 ‘국경지대’와 ‘국적’의 문제 ―. 동양사학연구, 152, 361-423.
청나라는 월간민 편입을 방지하기 위해 수전경운, 안호급지 등의 정책을 시행하는 상황에서, 조선에서는 이에 대한 대응책이 없었는지 궁금증이 생겨 추가적으로 알고 싶습니다.
<도현준>
김문기.(2014).淸米, 癘疫, 大報壇: 강희제의 海運賑濟와 조선의 반응.역사학연구,(53),105-152.
새롭게 알게 된 점: 을병대기근의 피해가 경신대기근의 피해보다 더 컸으며, 강희제가 이례적으로 쌀 5만석의 지원을 해주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전히 의문이 남거나 설명을 원하는 점: 강희제가 빠르게 청곡 요청을 받아들인 이유가 궁금하다.
김형종. (2020). 『兩界照會』의 소개 ― 1890년대 조선-청 ‘국경지대’와 ‘국적’의 문제 ―. 동양사학연구, 152, 361-423.
새롭게 알게 된 점: 조선과 중국이 두만강 부근에서 여러 갈등들이 있었다는 것과 제멋대로 중국 국적과 조선 국적을 선택하는 개간민에 대해 알게 되었다.
<홍지원>
“새롭게 알게 된 점”
[김문기.(2014).淸米, 癘疫, 大報壇: 강희제의 海運賑濟와 조선의 반응]
그 시기 대신들에게는 죽은 400만명의 백성보다 명과 청을 대하는 태도가 더 중요했다는 것이 놀라웠고 아무리 과거라 할지라도 현대와 어떠한 사상적 차이가 있기에 사람이 죽어가는 데도 저런 태도를 내비칠 수 있는지 당황스러웠다.
“여전히 의문이 남거나 설명을 원하는 점”
[김문기.(2014).淸米, 癘疫, 大報壇: 강희제의 海運賑濟와 조선의 반응]
청으로부터 곡식을 빌려오는 걸 비판하는 이들은 실질적인 대안은 가진 채로 비판한 것일까?
<이수아>
1. 김문기.(2014).淸米, 癘疫, 大報壇: 강희제의 海運賑濟와 조선의 반응.역사학연구,(53),105-152.
- 토론해 보고 싶은 점
당시 사대부의 입장이라고 생각했을 때, 오랑캐라고 여기는 청으로부터 온 쌀을 먹으며 생계를 유지할까? 아니면 이를 거부하고 끝까지 청으로부터 온 쌀을 먹지 않을까?
두 가지 입장으로 나누어 토론해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2. 김형종. (2020). 『兩界照會』의 소개 ― 1890년대 조선-청 ‘국경지대’와 ‘국적’의 문제 ―. 동양사학연구, 152, 361-423.
- 새롭게 알게 된 점
『양계조회(兩界照會)』가 지방 정부의 공적, 사적인 기록 내용을 담은 사료이며, 이는 조선과 청의 국경지대의 모습을 잘 나타낸다. 월우 개간민(치민)은 중국와 한국을 오고 가는 이중국적을 가진 사람들로 『양계조회(兩界照會)』에 많이 등장하고, 양국에 골칫거리로 기록되어 있다는 걸 새롭게 알게 되었다.
<이원준>
1번 논문
1. 알게 된 점 : 숙종 시절이 역사교과서에 다루지 않아 잘 모르는 경향이 있는데 그 당시가 청에 대한 복수설치 감정과 청에 쌀을 요청하며 청국에 대한 의존적 면모의 공존을 보여주었기에 매우 과도기적 상황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2. 청시와 청적에 관해 궁금한 점이 남습니다. 청시를 하게 될 경우 부르는 대로 값이 정해질 만큼 불리해 보이는데 청적을 할 만큼 조선이 궁핍했던 것인가요?? 아니면 아직도 역사학계에서 비판받고 있는 선택인가요?
3. 궁금한 점: 지구 기온이 낮아지면 북방한계선이 하락해 조선의 경우는 어업(청어잡이)이 발달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쌀과 수산물을 교류하는 식의 외교는 불가능 했는지?
2번 논문
1. 알게 된 점 :유럽의 경우 우리 하이패스 통과하듯 국경의 개념이 중요하지 않아 국경과 그 사이 주민들의 경우에 갈등이 적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숨은 사연과 문제들을 알 수 있렀다
2. 토론하고 싶은 점 : 조선 입장에서는 국경 문제에 관련하여 강경하게 하기 보다는 회유적으로 조선국민을 다루었어야 하지 않았는가?? 조선국민에 대한 회유 강경 어떤 것이 옳은 선택인가?
3. 여전히 궁금한 점 : 월우와 치민의 경우에는 행정처리적으로 청과 조선 모두에게 피해가 갈 수 있는데 양국 간 국제 협약을 맺는 방안은 왜 채택할 수 없얶는가?
<김민찬>
1. 김문기.(2014).淸米, 癘疫, 大報壇: 강희제의 海運賑濟와 조선의 반응.역사학연구,(53),105-152.
새롭게 알게 된 점 : 숙종이 청곡에 누구보다 적극적이였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여전히 의문이 남거나 설명을 원하는 점 : 조선은 당시에 청에 쌀을 원조를 받는 방법 말고 다른 상품을 수출시켜 곡물을 수입하는 것과 같은 방법은 없었나요? (청의 원조가 경제적으로 가장 나은 방법이었는지 궁금합니다.)
2. 김형종. (2020). 『兩界照會』의 소개 ― 1890년대 조선-청 ‘국경지대’와 ‘국적’의 문제 ―. 동양사학연구, 152, 361-423.
새롭게 알게 된 점 : "아침에는 조선인이었다가 저녁에는 중국인이 되어 문제를 키우는 일이 이번 한 번만이 아니었다"이 말이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이렇게 될 수도 있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이러한 분쟁이 있었다는 사실을 13년 동안 학교에서 역사 교육을 받으면서 처음 알게 되었고, 굉장히 흥미로웠다.
<김찬오>
새롭게 알게 된 점
1. 본래 조선이 농업을 중시하였던 것은 알고 있었지만, 청나라에 10만 석을 보낼 수 있을 정도로 쌀 생산량에 여유가 있었다는 것을 보고, 조선이 농업에 강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2. 두만강 강북 지역으로 넘어간 조선인들은 아예 조선의 통제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는데, 세금을 거둘 수 있을 정도로 통제 가능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전히 의문이 남거나 설명을 원하는 점
3. 동양에서는 중국의 왕조 교체 등 소빙기가 준 영향이 거대했는데, 서양에는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궁금합니다.
<이정렬>
김문기.(2014).淸米, 癘疫, 大報壇: 강희제의 海運賑濟와 조선의 반응.역사학연구,(53),105-152..
-새롭게 알게 된 점
을병대기근과 대보단에 관하여 잘 알게 되어서 좋다. 또한 강희제의 해운진제에 대하여 당시 조선의 양반들이 어떤 반응이었고 그것을 어떻게 정치적으로 활용하려 했는지에 관해 알게 되었다.
-여전히 의문이 남거나 설명이 필요한 점
대보단에 관하여 더욱 자세한 설명을 들어보고 싶다.
-같이 토론해 보고 싶은 점
과연 내가 당시 조선의 사대부였다면 청에 곡물을 요청하는 것에 어떠한 의견을 가졌을 지와 결국 청에서 온 쌀을 먹었을지 안 먹었을 지에 대하여 토론해 보고 싶다.
김형종. (2020). 『兩界照會』의 소개 ― 1890년대 조선-청 ‘국경지대’와 ‘국적’의 문제 ―. 동양사학연구, 152, 361-423.
-새롭게 알게 된 점
양계조회에 관하여 알게 되었다. 이 자료를 통해 조선과 청의 여러 가지 상황들을 이야기 하는 것이 정말 흥미로웠다. 또한 국경지대에 사람들이 편의대로 국적을 선택했다는 것이 굉장히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박성재>
1. 김문기.(2014).淸米, 癘疫, 大報壇: 강희제의 海運賑濟와 조선의 반응.역사학연구,(53),105-152.
여전히 의문이 남거나 설명을 원하는 점 : 청곡미의 구휼 효과의 정도가 궁금합니다. 실제적으로 어느 지방에 쓰였으며, 그 구제 정도가 궁금합니다.
2. 김형종. (2020). 『兩界照會』의 소개 ― 1890년대 조선-청 ‘국경지대’와 ‘국적’의 문제 ―. 동양사학연구, 152, 361-423.
같이 토론해 보고 싶은 점: 인구 감소 시대에 적극적인 동화 정책이 필요할까?'에 대한 토론을 하고 싶습니다.
<정혜원>
淸米, 癘疫, 大報壇: 강희제의 海運賑濟와 조선의 반응
조선시대 대기근의 존재와 당시 존재했던 국가원조에 대해 알게 되었다. 또 숙종 때까지 가서도 대명의리를 지키려는 움직임이 있었다는 점이 놀랍다. 조선시대 평균수명을 생각해보면 세대가 많이 교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유교적 사상이 뚜렷했던 것 같다. 당시 최석정을 반대했단 송시열계의 학자들은 청곡과 청미를 치욕스럽게 생각하였고, 먹지 않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하였다는데, 그렇다면 그들이 먹을 식량은 어디서 구했는지 궁금하다.
『兩界照會』의 소개 ― 1890년대 조선-청 ‘국경지대’와 ‘국적’의 문제
아직 근대적 국가의 개념이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두 국가가 국경 주민이 어떤 문제가 있었고, 또 이를 어떻게 해결하였는지 알게 되었다. 국적을 편의대로 바꾸었던 사람들에 대해서, 당시 호패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잘 쓰이지 않았던 것인지 궁금하다. 속국 또는 조공국이었던 조선이 조선인 국경주민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 국민을 지키는 선택을 하는 게 맞는지, 아니면 사대의 의무를 지키는 게 맞는지 토론해 보고 싶다.
<김다은>
1. 김문기.(2014).淸米, 癘疫, 大報壇: 강희제의 海運賑濟와 조선의 반응.역사학연구,(53),105-152.
-조선이 청에 곡식을 빌리는 것이 불가피했는지에 대해 논의해 보고 싶다.
2. 김형종. (2020). 『兩界照會』의 소개 ― 1890년대 조선-청 ‘국경지대’와 ‘국적’의 문제 ―. 동양사학연구, 152, 361-423.
-'양계조회'의 저자인 윤병관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되었다. 또한 조선과 청 사이 국경지대에 있었던 갈등 양상과 조선과 중국의 수직적 관계에 대한 내용이 흥미로웠다.
<최준영>
1.김문기.(2014).淸米, 癘疫, 大報壇: 강희제의 海運賑濟와 조선의 반응.역사학연구,(53),105-152.
새롭게 알게 된 점: 북벌론을 실행하지 않은 이유에는 청의 강성함뿐인 줄 알았으나 조선의 기근과 여역이라는 영향이 있음을 처음 알 게 되었다.
더 알고 싶은 점: 청미를 반대한 노론계열측은 이와 다른 대비책을 가지고 있었을까?
2. 김형종. (2020). 『兩界照會』의 소개 ― 1890년대 조선-청 ‘국경지대’와 ‘국적’의 문제 ―. 동양사학연구, 152, 361-423.
새롭게 알게 된 점: 양계조회와 같은 국경선에서 일어난 일들이 적힌 사료를 알게 되었으며 국경선에서 청국인과 조선인을 넘나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진짜 있었던 일이구나 알게 되었다.
토론해보고 싶은 점: 명확하지 않은 국경선 문제를 어떻게 정리하면 좋았을까?
<박해주>
새롭게 알게 된 점: 김문기의 논문에서는 강희제의 海運賑濟가 조선에 미친 영향에 대해 자세히 다루고 있다는 점.
여전히 의문이 남거나 설명을 원하는 점: 이 논문에서 강희제의 海運賑濟가 조선 사회에 미친 실제적인 영향에 대해 더 알고 싶다.
토론해 보고 싶은 점: 강희제의 海運賑濟와 조선의 상호작용에 대한 흥미로운 관점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된 점: 김형종의 논문에서는 1890년대 조선과 청의 '국경지대'와 '국적'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고 이것을 통해서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양국 간의 관계를 더 잘 알 수 있었다는 점.
여전히 의문이 남거나 설명을 원하는 점: '국경지대'와 '국적'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양국 간의 관계에 미친 영향과 그 결과에 대한 조금 더 구체적인 두 나라 사이의 긴장 관계가 어떻게 형성되었고,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에 대해.
같이 토론해 보고 싶은 점:없음
<안지우>
1-1. 경신대기근이 가장 최악의 대기근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그에 준하는 을병대기근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1-2. 김간은 기근 상황에서 청으로 원조를 받은 것에 대해 동방예의지국이 오랑캐의 나라가 되었다고 비난했다고 한다. 저자는 이 말을 뜯어보면 청의 원조에 대한 당시 백성들과 사대부들의 다른 시각을 볼 수 있다고 하는데,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2. 조선과 청 사이에서 월간민 관련 분쟁이 심했음을 알 수 있었다.
<신세라>
1. 김문기.(2014).淸米, 癘疫, 大報壇: 강희제의 海運賑濟와 조선의 반응.역사학연구,(53),105-152.
질문1: 일본에 엔보대기근이 발생한 시기에 수만 명이 아사했는데, 이때 중국에도 기근이 있었지만, 대기근으로 발전하지는 않았다고 서술되어 있다. 그 이유에 대해 정확히 밝혀진 게 있는지 궁금하다. (예컨대 조정의 역할이라든가...)
질문 2: 강희제가 조선 진제를 신속하고 흔쾌하게 진행한 다른 이유가 있는지 궁금하다.
질문 3: 청곡과 청시에 대한 거센 비판을 주도했던 사람들은 청에 도움을 요청하는 것 말고는 다른 뾰족한 대안을 내놓은 적이 있는지 궁금하다.
2. 김형종. (2020). 『兩界照會』의 소개 ― 1890년대 조선-청 ‘국경지대’와 ‘국적’의 문제 ―. 동양사학연구, 152, 361-423.
알게 된 점: 19세기 말 근대적 용어로서의 주권, 영토, 국민, 국경 등의 개념이 아직 항간에서 불가침의 영역으로 이해되지 않았을 때 두만강 인근 지역의 양국 사람들이 두만강으로 쉽게 왕래하며 국경을 침범하고, 편의에 따라 국적을 자칭한 사례가 있었다는 것 자체가 새로웠다.
<원서연>
김문기.(2014).淸米, 癘疫, 大報壇: 강희제의 海運賑濟와 조선의 반응.역사학연구,(53),105-152.
새롭게 알게 된 점: 조선시대 대기근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지만 청에서 쌀을 들여왔다는 것은 새롭게 알게 되었다. 또한 이러한 원조는 예상대로, 명분을 중요시하는 조선이라는 나라(정확히는 사대부들)가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김형종. (2020). 『兩界照會』의 소개 ― 1890년대 조선-청 ‘국경지대’와 ‘국적’의 문제 ―. 동양사학연구, 152, 361-423.
새롭게 알게 된 점: 회동관에 관해 배웠을 때, 공간이 주는 의미에 대해 알게 되었던 것처럼, 국경지대 역시도 국가 간 관계나 영향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지표라는 것을 깨달았다.
<박다연>
1. 대명의리 의식과 북벌론이 농후하던 시기에 청에 곡물교역을 요청했는데, 그렇다면 청이 아닌 다른 나라에 식량원조를 요청할 순 없었을까요?
2. 논문 15쪽에 따르면, 1890년대 초반 함북 지역은 월간민 이탈로 인해 지방 행정에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이 부분에서 저는 두만강 주민이 길림으로 편입되지 못하도록 막는 이유를 세금 징수를 못함에 따른 지방 행정의 타격 때문이라고 이해하였습니다. 하지만 이후 조선 정부는 행정 지배를 '중국' 지방관이 관할하되 머리모양과 옷차림은 조선방식으로 유지해줄 것을 제안하였는데(물론 거절당했지만), 이렇게 해서 조선 당국이 얻는 실질적인 이득이 무엇이었기에 지방 행정 관할을 포기하면서까지 월간 조선민을 조선 호적에 예속시키려고 했는지 궁금합니다.
<박건우>
<1번 논문>
1.새롭게 알게 된 점
-17세기에 계속된 이상기후로 인해 발생한 경신대기근, 을병대기근은 알고 있었지만 을병대기근 시기 조선이 청나라에게서 곡식을 받아왔다는 사실은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 과정에서 발생한 '권제의 만서' 사건이 조선에 불러온 여파도 새롭게 알게 되었습니다.
2.여전히 의문이 남거나 설명을 원하는 점
-청나라가 쌀을 조선 중강까지 운송하면서 해상과 육상을 이용한 두 개의 루트로 보낸 구체적인 이유가 궁금합니다.
<2번 논문>
1.새롭게 알게 된 점
-두만강을 넘나들며 아침에는 중국인 저녁에는 조선인으로 행동하는 '치민'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2.여전히 의문이 남거나 설명을 원하는 점
-논문에서는 19세기 후반의 사례만 다루고 있는데 19세기 이전에도 두만강이나 압록강 이북 지역에 조선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공유진>
조선이 강희제로부터 청미를 받았음에도 보낸 대상이 청이라는 이유만으로 혐오의 감정에 휩싸여 단순한 교역의 상황까지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한 것 같다. 조선이 청을 복수설치의 대상으로만 본 것이 이후 18, 19세기에 이르러서까지도 동아시아의 정세를 파악하지 못하게 하는 데에 일조하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성 개간민들이 중국과 조선의 이중국적을 가지고 자신의 이익에 따라 편의를 활용한 것에 대해 윤병관이 변경을 안정시키고 백성을 보호하는 것이 장정의 큰 뜻이라며 주장한 것이 백성의 입장을 깊게 헤아렸다는 점에서 인상 깊었다.
<박준석>
1. 대기근과 여역으로 인해 대동법을 비롯한 내부적인 개혁으로 대처하기에는 역부족인 상황이었고, 교역이 절실한 상황이었지만 사대부(강경한 노론)들이 강희제의 '해운진제'에 대한 대답을 '대보단'을 세우는 것으로 대신하며 실리보다 의리를 우선시하는 경직된 태도를 보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토론해 보고 싶은 점: 이 논문을 보고 뜬금 없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저는 한일 갈등이 생각 났습니다. 물론 일본과의 과거사를 다 묻어두기만 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고, 정리가 안 된 부분은 정리해야 하지만, 아직 한일 양국에서는 과거 모든 것을 다 후벼 파서 감정적 대립 관계로 끌고 가려는 사람들이 많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조선이 청에 보인 태도처럼 과거의 상처만을 생각하며 보이는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태도라고 생각하며, '우리가 과거의 산물이기는 하지만, 과거라는 감옥에 갇혀 있을 필요는 없다' 라는 말처럼 저는 한국과 일본이 과거를 잊으면 안 되지만 앞으로는 첨예하게 대립하기보다 현명하게 협력하는 방법으로 관계를 풀어가는 것이 맞는 방법이라 생각하는데 이에 대해 모두들 어떻게 생각하는지 토론해보고 싶습니다.
2. 전통적 사대-자소 관계에서 근대적 국제법 질서로 전환하는 과도기에 해당되는 시기였지만 양자 비대칭적 위상이 나타나는 것을 다양한 사례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으며, '치민'의 존재를 통해 나치 독일 시대 게토에서 활동한 유대인 경찰이나 일제시대의 앞잡이 같은 기회주의자들이 어느 시대에나 존재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