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질녘의 새 한 쌍
최성길
내 집 거실에는 붉게 물든 황혼의 바다 위를 날아가는 새 한 쌍을 그린 유화 한 점이 자리하고 있다. 유명한 화가의 그림도 아니고, 고가의 그림도 아니다. 그러나 내게 있어 그 그림은 다른 어떤 그림에서도 느낄 수 없는 ‘그 무엇’인가가 있어 너무 좋다.
지난해 여름 무덥던 어느 날, 평소에 가까이 지내고 있는 주치의 선생님에게서 연락이 왔다. 전해줄 것이 있으니 시간 날 때 한 번 들려 달라고 한다. 마침 끝물 코로나19에 걸려 고생을 했던 터라 투병 소식도 전할 겸 한달음에 달려갔다. 진료실 문을 밀고 들어서자마자 10호짜리 그림 한 점을 내밀며,
“인생의 황혼기에 오래토록 함께 날아가시라는 염원으로 그려봤습니다.”
하는 게 아닌가?
남의 그림이 아니고, 우리 내외를 위해 자신이 직접 그린 그림이라는 말이었다. 본업인 의사로서는 말할 것도 없고, 수필가로서도 명성이 자자한 분인데, 나와는 올해로 창립50주년을 맞은 순수봉사단체인 한국HELP클럽에서 만나 오랜 세월 우정을 쌓아온 분이다. 그런 그분이 뜬금없이 우리 내외의 해로를 염원하는 마음을 담아 그림을 그렸다는 말에 깜짝 놀랐다.
수평선 어름에, 지는 해가 구름과 하늘과 바다를 온통 붉게 물들이고 있다. 그 붉게 물든 하늘 저 멀리 새 두 마리가 날아가고 있다. a pair of birds at sunset, ‛해질녘의 새 한 쌍’이라고 번역을 해도 별 무리가 없을 것 같은 영문 화제(畫題)가 이채롭다. 그림 말미에는 여느 그림처럼 서명과 함께 그림을 그린 날짜가 적혀 있다. 2023. 07.이었다. 그 날짜를 보는 순간 또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내외가 끝물 코로나19에 걸려 차례로 고생을 하고 있을 때가 바로 그 7월이었기 때문이다.
지난해 여름은 너무나 힘이 들었었다. 장마가 한 달이나 계속되면서 엄청난 폭우를 몰고 와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과 생활의 터전을 앗아가더니, 뒤미처 몹쓸 폭염이 들이닥쳐 열대야가 한 달 넘게 계속되었다. 더위 먹은 사람이 속출했었다. 이런 와중에서도 인류 최악의 역병 중에 하나로 꼽히는 코로나19가 발병 3년여 만에 지역 풍토병 정도로 약화된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시간이 약이라더니 정말 그랬다. 백신도 치료제도 없는 공포의 시간이 지나고 드디어 백신이 개발되었다. 우리 내외도 백신접종을 했다. 며칠씩 열이 나고 온 몸이 쑤시고 아팠으나 잘 견디어 내었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 드디어 백신에 이어 치료제까지 개발되자 그 몹쓸 역병도 주춤거리더니 그 위세가 한풀 꺾이기 시작했다.
이를 즈음 아내가 덜컥 코로나19에 걸렸다. 그 어려운 시기를 잘 견뎌내어 놓고 끝물 코로나19에 걸린 것이다. 아무리 그 위세가 한풀 꺾였다고는 하나 인류 최악의 역병 중에 하나가 아니던가? 몸에 이상이 있다 싶을 때 진작 병원엘 갔어야 했는데 가벼운 감기 정도로 생각하고 ‘이러다 말겠지’하며 버틴 것이 결국 화근이 되었다. 고열이 나고 목이 아파 말도 못하는 지경이 되어서야 자가진단키드로 검사를 해 보니 2줄이 나왔다. 감기가 아니라 코로나19였다. 고열에다 인후통을 호소하는 아내를 바라보노라니 안타깝다 못해 이러다 큰일 나는 게 아닌가 하는 방정맞은 생각까지 든다. 차라리 내가 아프고 말지 아내의 고통스러워하는 하는 모습은 보기가 너무 힘이 들었다. 비록 늦게 병원엘 가긴 했지만 새로 개발된 치료제 덕분에 병마에서 무사히 해방이 되었다. 그러나 인후통은 꽤나 오랫동안 떠나지 않고 애를 먹였다. 그러구러 아내가 역병을 이겨내고 자리에서 일어나고 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내가 드러눕게 되었다.
저녁밥까지 잘 먹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갑자기 기침이 나오고 열이 나면서 목이 아파 잠에서 깨었다. 해열진통제며 상비약으로 준비해두었던 감기약을 먹었으나 별무효과였다. 자가진단키드로 검사를 해 보니 2줄이 나왔다. 늦은 밤이라 병원에도 갈 수가 없다. 아침까지 견디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억지로 잠을 청해 보았으나 잠은 오지 않고 비몽사몽간에 온갖 헛것들이 다 보여 이리저리 뒤척이느라 잠을 설쳤다. 이튿날 아침 동네의원 앞에서 문 열리기를 기다렸다가 일등으로 들어가 처방전을 받아 약국에 가서 치료제 5일분을 받아왔다. 처방받은 치료제는 약효가 탁월했다. 내 평생에 먹어본 약 중에 그렇게 효과가 뛰어난 약은 처음이었다. 하루를 지나니 정상이 부드러워지는가 싶더니 사흘이 지나니 몸 상태가 정상으로 돌아왔다. 처방받은 약 5일분을 다 먹고 자가진단키드로 검사를 해 보니 1줄이 나왔다. 체력이 다소 떨어지긴 했지만 아내보다 고생은 덜한 것 같아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렇듯 우리 내외가 끝물 코로나19로 고통 받고 있을 때, 인생의 황혼기를 오래토록 함께 하라는 염원을 담아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니 어쩌면 우리 내외가 끝물 코로나19에서 쉬 해방될 수 있었던 것도 그 염원의 덕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그 그림을 보면서 지난날을 추억하기도 하고, 상상의 나래를 펴기도 한다. 그러노라면 왠지 마음이 따뜻해지면서 새로운 힘이 생겨나는 것만 같아 너무 좋다. (2024.3.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