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편 나의 초등학교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어느 날 헬리콥터 한 대가 신작로 변 커다란 논으로 착륙했다.
비행기라면 늘 하늘 높이 날아다니는 것만 보았지 지상으로 착륙하는 걸 본 것은 난생처음이다.
수업 중이었다. 갑자기 밖에서 요란한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선생님과 학생들은 일제히 창밖을 바라보았다. “선생님 저기 헬리콥터가 하늘에서 내려와요” 그 말과 함께 아이들은 선생님이 제지할 겨를도 없이 와하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헬리콥터는 학교에서 약 2km 정도 떨어진 신작로 옆 커다란 논으로 착륙하였다.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아이들은 비포장도로를 뛰다시피 헬리콥터가 착륙한 곳으로 몰려갔다. 나도 그 틈에 끼어 함께 달려갔다. 숨이 턱에 차도록 도착한 그곳엔 정말 크고 멋진 헬리콥터가 멈춰 있었다.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들자 헬리콥터 기장으로 보이는 분과 두세 명의 어른들이 앞을 가로막고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고함을 질러댔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이들의 호기심은 점점 헬리콥터를 향해 다가갔다. 그 모습에 어른들도 백기를 들고는 적당한 간격까지 아이들이 다가오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야말로 구름 떼 같이 몰려든 아이들은 난생처음 헬리콥터를 눈앞에서 보게 되었다.
그날 밤 나는 등잔불 아래에서 낮에 본 헬리콥터를 도화지에 그렸다. 나름 내가 본 기억을 더듬어 최대한 실제처럼 그렸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시던 아버지께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내게 칭찬을 해주셨다. 엄하고 늘 무섭게만 보이셨던 아버지께서 내게 칭찬을 하시다니 난 속으로 얼마나 기뻤는지 말로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 뒤로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다. 성장하여 건축공학을 전공한 것도 어쩌면 그때 아버지의 칭찬에 의한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돌아가진 할아버지께서 생전에 한의사(침술이 뛰어나 사방에서 환자가 끊이질 않았다고 함)를 통해 재산을 꽤나 많이 불려 놓으셨다. 그러나 부자 삼대 못 간다는 말 있듯이 그 많던 재산은 이런저런 일로 증발해 버렸다. 남은 건 겨우 논 두 마지기가 전부였다. 심지어 아버지께서 지은 집터도 마을 지주의 것으로 지상권 없이 여태 것 살았다. 이렇게 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아버지 밑에 남동생 한 분이 계셨는데 내가 세 살 되던 해에 연천 지구에서 군복무를 하고 계셨다. 그러던 중 무장공비 세 명이 철책을 넘어오는 것을 발견하고 두 명은 실탄을 쏴 그 자리에서 사살하였다. 마지막 남은 한 명이 아군을 향해 수류탄을 투척하는 바람에 그 자리에서 몸이 산산이 찢겨 나가는 처참한 죽음을 맞이하였다. 갑자기 날아든 비보에 아버진 거의 실성하다시피 하였고 그 뒤로 매일 술로 세월을 보내셨다. 내 기억으론 고등학교 때까지 그렇게 술로 찌들어 사셨다. 그나마 남아있는 재산은 상경해 싸전사업(곡물 판매업) 한다는 명목으로 날렸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자가발전을 통한 전기 공급 사업에 손을 대셨다가 또 망했다. 그 뒤로 남은 산과 밭은 작은 이모님의 계돈에 몽땅 투자했다가 모두 떼이고 말았다. 계가 망하자 이모님은 가까운 지은들에겐 돈을 돌려주고 정작 언니에겐 한 푼도 안 주고 나 몰라라 했다. 그러니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가 좋을 리가 없었다. 매일 밤마다 우리 집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싸움판이었다. 누님 둘은 초등학교를 졸업하여 일찌감치 돈 벌러 사회로 나갔고 손위 누님과 여동생 둘 그리고 나는 매일 밤마다 공포에 떨어야만 했다. 어느 날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이겠다며 부엌칼을 들고 방 안으로 뛰어들었다. 나중엔 어머니가 자살하겠다고 못 마시는 소주를 벌컥벌컥 들이켜시고 반나절을 졸도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그것도 한 밤중에 벌어졌다. 어렴풋이 그때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졸도한 엄마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을 어르신들이 우리 집으로 몰려왔다. 엄마에게 비눗물을 강제로 먹이게 해서 토하게 했지만 결국 어머닌 의식을 잃은 채 바닥에 쓰러지셨다. 부랴부랴 장독대에 멍석을 깔고 그 가운데에 엄마를 업어와 눕혔다. 빙 둘러 선 아주머니들은 그저 안타까운 눈으로 엄마를 바라보시며 눈물을 찍어 내리셨다. 그 와중에도 아버진 강소주를 벌컥벌컥 들이키며 방 안에서 고래고래 소릴 지르고 계셨다.
이런 환경에서 내가 숨을 곳은 없었다. 동네 창피해서 아이들과도 어울리질 못하였다. 그렇잖아도 숫기 하나 없는 놈이 이 지경이 되고 나니 더욱더 혼자서 지내는 사람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린 마음에 나도 죽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낮을 들고 집에서 오십여 미터 떨어진 개울로 갔다. 그곳엔 ‘용못’이라 이름 하는 폭포가 있다. 그 위에 서서 하얀 포말이 거품처럼 터지는 폭포수 아래로 뛰어들까 생각하였지만 너무 무서웠다. 그럼 낫으로 배를 찌르고 죽을까 했지만 그건 더욱 무서웠다. 소심한 성격 탓에 감히 자살은 실현하지도 못하고서 두어 시간 그곳에 쪼그려 앉아 있다가 밥때가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지금도 아내가 요리를 하느라고 꺼내놓은 부엌칼을 보면 갑자기 가슴이 조이면서 견딜 수 없는 공포감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얼른 싱크대 칼집에 칼을 꽂고 문을 꼭 닫아버린다. 이런 행동은 아마 엄마 죽이겠다며 칼 들고 설치던 아버지의 난동으로 어린 내 가슴에 무시무시한 공포와 함께 깊은 트라우마로 남은 것 같다.
어느 날 젊은 내외분이 우리 집 마당으로 들어오셨다. “우린 저 아랫마을에 교회를 개척한 전도사 부부입니다. 예수 믿으세요.” 그러면서 내게 오시더니 일요일 오전 아홉 시까지 아무개 집 사랑방으로 오라며 사탕 두어 개를 주고 가셨다. 그때까지 우리 집안은 남들이 대개 그러하듯 각종 미신을 섬겼고 돌아가신 분들의 기일이면 꼬박꼬박 제사상을 차려 조상의 혼백을 깍듯이 섬기는 유교적인 가풍 속에 살았다. 무당을 불러 굿을 하거나 바위나 고목나무에 제물을 바치고 절을 하는 등 토속적인 샤머니즘과 유교와 불교가 혼재된 민간신앙을 숭상하였다. 그런데 교회가 마을에 들어오면서 큰 파장이 생겼다. 교회에선 미신과 무당 같은 건 믿으면 안 된다며 오히려 타파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더욱이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건 조상을 하나의 신으로 섬기는 행위에 해당하므로 절대로 절을 하거나 섬겨선 안 된다고 하였다. 이러니 어른들의 입은 거칠게 교회를 핍박하였다. 교회에 나가는 건 더욱더 금기시하였다.
교회가 아직 지어지지 않은 상태여서 먼저 예수님을 영접한 분이 자신의 사랑방을 예배 처소로 제공하셨다. 일요일 아침이면 아이들이 사랑방으로 모여들었다. 성경 속 인물들에 대한 구연동화를 들을 땐 정말이지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릴 듯이 아이들의 동공은 반짝반짝 빛이 났다. 다윗과 골리앗, 솔로몬의 기막힌 재판, 하나님의 천지창조 등등... 그야말로 환상적이며 놀라운 이야기에 빠지다 보면 어느새 예배가 끝나버리곤 하였다. 문 밖에 계신 사모님은 높은 사랑방 문지방을 넘어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의 손에 과자와 사탕을 쥐어주었다. 명절이나 학교 소풍 때나 먹을 수 있었던 과자와 사탕을 매 주일마다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아이들은 하나같이 즐거워했다. 나도 아이들과 함께 예배에 꾸준히 참석을 하였다. 시간이 흘러가면서 어떤 아이들은 예배에 불참하였다. 부모님이 반대해서 나오지 못하기도 하였고 처음과 달리 예배가 재미없다며 시들해진 까닭도 있었다. 그러나 난 집에 있는 것보다 교회에 나오는 게 더 좋았다. 여기라면 난 최고의 대접을 받았다. 선생님은 내 머릴 쓰다듬으며 귀여워해 주었고 전도사님과 사모님은 인자한 얼굴로 내게 말을 걸어오셨다. 쑥스러워하는 나를 향해 뭐라 하지 않고 그저 안아주고 다독여 주고 용기를 주는 교회가 너무 좋았다.
서울에 사시는 외할머니께서 우리 집에 일 년에 한두 번씩 꼭 찾아오셨다. 장모님이 오시면 폭군 같던 아버지도 순한 양이 되셨다. 어머니의 얼굴도 오랜만에 활짝 피었다. 외할머닌 이상한 버릇 하나가 있었다. 밥을 잡숫기 전에 두 눈을 감고 뭐라고 혼자서 중얼거리셨다. 그것도 모자라 방구석에 무릎을 꿇고는 밥상에서 보다 더 길게 뭐라고 중얼중얼하셨다. 나중에 그것이 외할머니의 기도였다는 걸 알았다. 외할머닌 어머니와 아버지께 예수님을 영접하라고 전도를 하셨다. 외할머니의 기도 때문이었을까 우리 집에서 제일 먼저 예수님을 영접한 것이 나였다. 물론 교회에 나간다고 진짜 신도가 된 건 아니다. 간식을 얻어먹는 재미가 더 컸다. 그리고 교회에서라면 마음 놓고 말을 할 수 있었다. 학교에서도 동네에서도 밖에선 제대로 말 한마디 못하던 내가 교회에선 어쩐지 말을 잘할 수가 있었다. 그건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공평한 인격체로 대해주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교회에 있는 동안은 내 마음이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선생님의 질문에도 막힘없이 대답하였다. 그대마다 선생님은 내 머릴 쓰다듬어 주시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사실은 집안이 이런 분위기였어야 하는 건데 아무튼 교회는 내게 신세계였다. 예배시간마다 훌륭한 성경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나도 저 사람처럼 훌륭한 사람으로 자라야지 하고 어린이 었지만 속으로 다짐을 하곤 하였다.
농촌은 주말이 더 바쁘다. 아이들이 학교엘 가지 않으니 부모님 일손을 돕기에 이만한 날이 없다. 그러니 아이들은 일요일이라고 마음대로 놀지를 못하였다. 일요일은 교외에 가는 날과 겹친다. 예배 시작은 오전 아홉 시지만 밭으로 일하러 가는 시간은 오전 7시~8시 사이 이므로 농사일을 돕기 위해선 교회에 나갈 기회조차 없었다. 그런 상황을 잘 알면서도 난 교회 간다고 우기며 부모님을 따라나서질 않았다. 결국 아버지의 불같은 호령에 그만 기가 죽어 교회에 발을 끊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점심을 먹기 위해 밥상을 가운데 두고 대청에 빙 둘러앉아 있을 때였다. 교회 전도사님 내외분이 우리 집엘 찾아오셨다. 내가 교회에 나오지 않으니까 궁금하셨던 모양이다. 막상 전도사님을 보자 아버진 의외로 고분고분하셨다. 어머닌 기왕에 오셨으니 밥 한술 뜨고 가시라며 밥과 수저를 상에 더하셨다. 뜻하지 않게 우리 집 식구와 전도사님 내외분이 한상에서 점심을 먹게 되었다. 일단은 밥부터 먹고 난 다음 하고 싶은 말을 할 작정이란 걸 모르는 건 아니다. 그 말이 듣기 싫든 좋든 간에 밥을 공궤 하는 것이 우리의 전통문화다. 때는 제비가 한창 새끼를 키우고 있을 무렵이었다. 우리 집 대청 천장에도 제비집이 있었다. 사람들이 밥을 먹는 중에도 제 새끼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느라 머리 위로 제비 한 쌍이 교대로 들락거렸다. 몇 숟가락 밥을 뜨고 있을 때 제비가 제 새끼가 낳은 똥을 물고 나가다가 하필이면 전도사님의 밥숟가락 위에 떨어트렸다. 밥을 먹다 말고 일제히 전도사님의 밥숟가락에 눈을 고정하였다. 그런데 전도사님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제비의 똥을 걷어내고 밥을 입속에 넣었다. 그 모습이 보는 이에겐 참으로 기괴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내겐 너무나 감동적이었다. 왜 그랬는지는 나도 잘 모른다. 그저 전도사님이 정말로 위대해 보이셨다. 그 사건 뒤로 아버지는 내가 교회에 나가는 걸 찬성도 반대도 하지 않으셨다. 다만 일손이 너무 바쁠 땐 나도 아버질 따라가 농사일을 거들어 들였다.
종교를 믿는 건 자유다. 대한민국 헌법 제20조는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고 국교를 부정하며 정교분리를 선언하는 대한민국 헌법의 조항이다. 믿든지 안 믿든지 본인 맘이다. 그런 결정 중에 난 믿기로 하였다. 초등학교 육 학년에 처음 예수님을 안 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았다. 인생 살아오면서 견딜 수 없는 어려움들이 왜 없겠나. 그때마다 내가 믿는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그저 참을 인자 새기면서 스스로 참아야 한다는 생각보단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들은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께 맡기고 그분의 도움을 간청하였다. 돌이켜 보면 이때까지 무난하게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다. 세상의 잣대론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하나님의 행하심을 나의 삶 가운데에서 경험하며 내가 믿는 하나님은 실존하시는 분이란 걸 담대히 말할 수 있다. 중략하고...
나의 초등학교는 큰 탈 없이 잘 통과하였다. 성적 같은 건 별로지만 사람들과 함께 살아야 하는 기초적인 자세부터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 등 아직은 어리숙하지만 건강한 어린이로 잘 자랐다. 다만 한 가지 걱정은 작아서 늘 고민이었다. 난 유난히 동무들에 비해 성장이 더디었다. 그래서 더욱 친구들과 잘 어울리질 못하는 성격으로 변했다. 다행히 교회생활을 통해 그런 단점이 많이 보강되었고 앞에 나서서 발표하는 단계까지 이르렀다. 웅변대회에 나가 두 주먹을 불끈 쥐어가며 고래고래 소릴 지르기도 하였으니 내겐 그야말로 천지가 개벽할 변화였다.
누구에게나 초등학교시절은 있었다. 돌아보면 초등학교시절만큼 순수했던 때는 없었던 것 같다. 어른이 되어서도 초등학교 동창생은 아무런 조건 없이 만나는 사이가 된다. 아마 늙어서도 그 마음엔 변화가 없을 것 같다. 순수하고 깨끗했던 그 시절이 참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