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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3:7-19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 찬송: 6, 29, 191장 교독문: 고전 10:1-13
히 3:1-4:13의 세 가지 권면 가운데 본문은 두 번째 권면이다. 지난주에 받은 첫 번째 권면은 3:6의 말씀대로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으라”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모세의 충성보다 훨씬 위대한 예수님의 충성으로 인해 성도가 하나님의 온 집의 구성원으로 부름을 받았기 때문에, 이제 예수님의 재림을 소망하며 받은 바 믿음의 내용을 굳게 잡으라는 권면이 나온 것이다.
이제 두 번째 권면이 주어지는데, 이 권면은 예수님의 충성과 달리 모세의 충성은 그 열매가 백성들의 반역과 배교로 끝났기 때문에, 이 사건을 보고 신약의 성도들은 예수님의 충성을 따라 완성의 자리에 들어가라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결과를 낳을 수 있을까? 여기에서 저자는 시 95:7-11의 말씀을 인용하여 설명하는데, 성도의 삶에서의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이를 통해 가르쳐주고 있다.
히브리서 저자는 시편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저자가 둘이라고 언급한다. 7절에서는 “성령”을 저자로 언급하는데, 또 4:7에서는 “다윗”으로 언급하고 있다. 시편의 표제, 즉 제목에는 성령 하나님이나 다윗이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1세기 회당에서 예배할 때 이 시편은 안식일마다 사용되었기 때문에, 이 당시의 성도들은 저자가 인용한 시 95편을 안식일의 찬송시로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저자는 이 시편의 저자를 성령 하나님으로 소개하고 있으며, 위대한 왕이었던 다윗을 저자로 소개하면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신실하게 순종한 다윗과 같은 마음임을 설명함으로써 이 구절을 인용한 것이 정당한 것임을 의도하고 있다.
그렇다면 저자는 왜 이 시편을 인용하고 있을까? 그것은 바로 과거로부터 배우라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이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권면한 것과 같은 의미이다. 고전 10:6에서 우리는 “이러한 일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악을 즐겨 한 것 같이 즐겨 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고 읽었다. 이것은 과거의 사건이 모범이 되어 우리 신앙의 모습을 돌아보고 바른 길로 가야 한다는 권면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저자가 인용한 시편 95편의 말씀을 통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자리와 예수님을 믿는 자리에 들어온 성도들의 자리가 같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유월절 어린 양으로 죽으신 것이 출애굽기 12장의 유월절 제정과 깊은 관련이 있음과 같은 것이다. 그렇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리에 들어온 것이 사탄의 권세 아래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백성의 자리에 들어온 것임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최종 목적지가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었던 것처럼, 우리 성도에게는 영원한 안식이 주어질 “새 하늘과 새 땅”에 있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될 것이다. 이런 이유로 히브리서 저자는 구약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우리의 신앙에 대한 권면을 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편 95편에서 노래한 내용은 무엇인가? 이는 출애굽한 조상들이 하나님을 반역하고 배반한 것에 대한 역사적 사실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하여 시내 산에서 율법을 받고 성막을 만든 후 가나안 땅을 향해 진군했다. 하지만 12명의 정탐꾼들이 40일 동안 그 땅을 정탐한 후 들어갈 수 없다고,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호소하였으며, 백성들이 이에 동조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였고, 이러한 원망은 광야 생활 40년 내내 이어졌다. 특별히 8절 말씀에서 “시험하던 날에 거역하던 것”으로 인용된 말씀은 시 95:8의 “므리바에서와 같이 또 광야의 맛사에서 지내던 날과 같이”를 번역한 것인데, “므리바”의 의미는 ‘다툼’, ‘거역’의 의미이고, “맛사”의 의미는 ‘시험’이란 의미이다. 그래서 저자는 이 지명들의 의미를 그대로 가져와서 기록하고 있다. 이 두 가지 단어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그들은 광야에서 하나님을 반역하는 완고함의 죄를 범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완고함과 반역의 죄는 한두 번 있었던 것이 아니라 40년 내내 이어졌음을 성경의 증언을 통해 우리는 들을 수 있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왜 그들은 광야에서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고자 했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애굽에서의 열 가지 재앙, 반석에서 물을 내신 것, 만나와 메추라기 등, 여러 이적들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마음은 완고하여 하나님을 향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지금 삶의 현실이 그들이 원하는 대로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애굽에 있을 때는 지금의 환경보다 나았다고 비교하여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도 별반 다를 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여기에 더하여 정탐꾼들이 혹평을 한 것으로 인하여 그들의 마음이 완전히 돌아서서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기를 거절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좋은 땅을 주실 리가 없다는 것으로 그들은 판단을 한 것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러한 상황을 히 3:10b에서 “그들이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라고 평가를 내리셨다. 왜 이런 결과를 낳게 되었는가? 왜 그들은 완고하여 하나님을 반역하고 배교하여 그들을 해방시키신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고 말았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이적을 경험한 그들이 그 이적을 베푸신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상황을 보았기 때문에, 즉 그들에게 인생 자체가 우상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것이었다. 결국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 인생에서 고난이나 박해, 또는 여러 어려움을 만날 수는 있지만, 여기에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바른 믿음과 소망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즉 6절에서 말하는 대로,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굳게 잡은 것이 아니라 눈앞의 현실만 바라보았기 때문에 그들은 반역하고 배교하여 믿음을 저버리게 된 것이다. 이것에 대한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불신앙 때문이다.
그리하여 12-14절에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신앙을 기억하여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지 말 것을 권면한 것이다. 이렇게 믿지 아니하면 그는 하나님에게서 떨어질 뿐이다. 출애굽한 처음 세대가 바로 하나님의 언약에서 떨어진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성도는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13)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잡고”(14) 있어야 한다고 히브리서 저자는 강한 권면을 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과 확신과 소망으로 굳게 붙드는 것을 의미하며, 이렇게 될 때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될 것이다(14b). 여기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다”는 표현은 6절에서 본 “우리는 그의 집”이란 의미이다. 이것은 소망하던 영원한 안식에 우리가 들어가게 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저자는 15-19절에서 시편 95:7-8 말씀을 다시 인용하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확신 가운데 소망할 것을 권면하면서, 그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고 명령하고 있다. 마음이 완고하다는 것은 하나님을 격노하게 하는 것이요, 그 결과는 그들의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지는 것뿐이었다. 저자는 이에 대한 원인을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19)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그렇다. 출애굽한 세대는 40년 내내 하나님을 향한 불신앙으로 마음을 완고하게 하였고, 그들은 결국 광야에서 죽었을 뿐이었다. 하나님의 출애굽을 통해 구속하신 은혜는 사라져버리고, 오직 그들의 마음에 믿지 아니하여 나타나는 불평으로 가득하여 하나님을 배역하고 말았던 것이다.
1세기의 성도들은 히브리서 저자가 인용한 시편 95편의 말씀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들은 안식일마다 이 시편을 찬송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출애굽한 조상들과 달리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견고히 세우고, 그 마음이 완고해지지 않도록 주의해야만 했다. 그러나 히브리서를 받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현재의 삶에서 그들에게 있는 박해와 환난과 어려움들로 인해 이 믿음을 지키지 못하고, 오히려 마음을 완고하게 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 떠나버리고 만 것이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이렇게 기독교에서 유대교로 돌아가는 것은 출애굽한 세대가 하나님을 거부하고 그 마음을 애굽으로 향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이토록 강하게 그들이 잘 알고 있는 시편 95편의 말씀을 인용하여 믿음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이 권면을 우리의 신앙생활에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 첫째,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여 완고한 마음을 내비치는 불신앙을 버려야 한다. 이것은 현실의 삶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잊어버리는 것과 같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약속들을 믿지 아니하고 현실의 삶에 안주하고자 하는 완고한 마음이다. 그래서 두 번째로 우리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 매일 피차 권면하는 것이 필요하다. 성도의 신앙생활은 홀로 할 수 없다. 함께 권면을 주고받는 관계를 통하여 그 믿음을 유지할 수 있으며, 서로 격려하여 완고한 마음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나아갈 수 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이미 시작하였고, 이미 수십 년이 흘렀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믿고 소망하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을 기대하면서 하나님을 믿고 있는가? 현실의 어려움으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처럼 애굽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이 있지는 않은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받은 믿음의 위대함과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소망이 얼마나 확고한 것인가를 생각한다면 우리는 결코 이렇게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신앙을 시작한 이후, 상을 타겠다는 희망을 가진 사람은 주어진 인생을 쉽게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완주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의 삶은 결국 최종 목적지에 도달할 때까지 진행이 될 것이다. 중도에 내가 포기하고 싶다고 해서 포기할 수 있는 경주가 아니다. 이 경주는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시작하게 하셨고, 이제 계속 참여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소망을 약속하시고, 또 우리 주변의 삶을 주장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완고한 마음을 갖지 않도록 과거와 현재의 삶에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계속 보게 하신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권면한 내용이다.
고전 10:11-13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하고도 하나님을 거역한 세대를 본받지 말자. 그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 것은 그들의 불순종 때문이었다. 이 불순종은 현실의 삶을 하나님께서 해결하지 못하실 것이라는 불신앙 때문이었다. 하지만 출애굽의 역사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웠는가? 물이 없어서 불평할 때 물을 반석에서 주셨고, 양식이 없다고 불평할 때 40년 내내 만나를 주셨고, 고기가 먹고 싶다고 할 때 메추라기를 주신 하나님이시다. 그들의 모든 필요를 따라 채워주시는 하나님이셨는데, 그들은 이렇게 능력의 하나님께서 베푸신 능한 일을 목격하고도 불신앙에 빠져 하나님을 배교하고 만 것이다. 이것을 읽으면서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바로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해야 한다(고전 10:12). 그리고 여기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삶을 주관하신다는 것을 확신하고 믿어야 한다. 이것이 고전 10:13의 권면이다.
우리는 이 말씀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인생 가운데에서 만나는 모든 어려움은 사실 어려움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로 그것을 능히 감당하게 하시기 때문이다. 감당하지 못할 것은 언제나 피할 길을 주신다. 그래서 우리는 인생의 모든 상황을 감당할 수 있으며 또 이길 수 있다. 우리가 이기는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이기게 하시기 때문에 이김을 받을 뿐이다. 이것이 우리가 현재 가진 믿음이다.
이런 믿음과 신뢰가 없이 ‘나는 천국 백성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불신앙에 불과할 뿐이다. 이런 잘못된 믿음은 17절의 말씀대로 “광야에 엎드러진 범죄한 자”가 될 뿐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불신앙을 그대로 따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과거에서 배우는 것은 오직 하나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이 신뢰로 인하여 소망을 갖는 것이다. 그래서 6절에서 저자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고 가르쳐준 것이고, 또 7-19절에서 부정적인 표현으로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13)는 권면을 주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믿음을 갖고 있는가? 그 믿음의 근거가 나에게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빨리 이 믿음을 버려야 한다. 우리의 믿음의 대상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고, 성부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계획하시고, 성자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시고, 이제는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고 계신다(롬 8:26). 이 믿음이 있는가? 이 믿음을 가진 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셔서 하나님의 집으로 우리를 세우실 것을 확신하며, 우리로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게 하실 것을 소망한다. 이 안식에 대한 내용이 이제 4:1-13에서 이어지고 있다.
여러분의 믿음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빨리 이 세상을 끝내고 싶은 마음뿐인가?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이 삶이 불편하고 만족이 없기 때문인가? 그것은 내 생각이 아닌가? 나로 하여금 이 자리에 있게 하신 분이 전능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라면, 그리고 예수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집이 되게 하셨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불평과 불만을 통해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14) 해야 한다는 다짐을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가져야 할 신앙의 바른 태도이다. 현실의 삶에서 오늘을 사는 동안,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소망하며 바른 믿음을 견지하여, 흔들림 없이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여러분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여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늘 주의하기 바란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약속으로 주신 안식의 자리를 늘 소망하며 살아가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