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창섭 문장으로 만나는 사람들(6월)
상상도 못 하는 죄 외 4편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죄가 된다지
생각만으로 지은 죄, 너무 많아서
생각하기 싫은 죄, 더 많아서
생각의 깊이만큼 죄는 깊어지고
생각이 없는 만큼 죄는 곁에 있네
전생에 지은 죄는 죽어도 모르는 죄
상상으로 또, 무슨 죄를 짓고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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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결이었어, 깨어날 수 없는 꿈결이었어
참과 거짓을 잔에 부어 따를 수 없을 때
혀는 꼬여서 말은 삐뚤어지고 했던 말을 하고 또 했지
술병이 졸병이라 안주를 하나 더 시켰지
한 번은 단단한 말로 투명한 잔을 깨고 싶었지만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다 거짓이었지
참말은 주머니 속에서 만지작거렸지
아무리 마셔도 줄지 않는 진실한 밤공기에 취해
내 안에서 잠자고 있던 술병이 거짓을 불러모았지
어떻게 돌아왔는지도 모르고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짐승처럼 어둠을 두드리다가 저승 잠을 자던 나는
또 태어나는 끔찍한 꿈을 팔 수가 없었지
꿈결이었어, 눈에 밟히는 꿈길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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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찰방찰방 물빛 소리 듣는다
작약이 피었다가 모란이 피는 사이
눈먼 숭어 뱃머리 튀어 오르고
코끼리 조개가 밀물을 불어내는 저 섬에
돼지꿈을 꾸던 도다리들 눈만 돌아가고
폐선들은 오래된 기침을 삼키는 중
봄바람도 숨이 차서
육지라는 섬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네
연락선 닿지 않은 이 섬과 저 섬 사이
고래가 쌓은 모래성과 문어가 남기고 간 통발 무덤
문어 다리 팔자가 펴이는 꿈을
머구리 잠수부에게 꿈값도 없이 팔았지
갯벌에 밑줄을 긋고 살아온 저 섬에서
오백 년 묵은 해송의 목을 잘라
희나리로 세월을 태우는 갈맷길
목마른 물새들은 둥지를 털고 일어서네
파도의 등을 밟고 가는 녹슨 철조망의 눈망울이
불꽃을 태우는 동백의 뜨거운 손을 오랫동안 잡아
차가운 화상을 입고 몇백 년을 저 섬을 지키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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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는 달리고 싶다
경화역 그곳에 가면 객차는 떠나고
기관차만 발이 묶여 매미처럼 울고 있다
국숫발 햇살이 기관차 이마를 사정없이 내리쳐서
기적소리 반짝, 매미를 깨우고 가는 정오
꽃 멀미에 아직도 서러운 체위를 바꾸지 못해
객차의 몸부림이 따가운 눈길로 맴도는 정거장
사무치는 녹슨 추억은 평행선을 긋고
뜨거운 그림자도 사부자기 벚나무 아래로 발을 묻고
납작 엎드린 그림자도 덜커덩 수평을 잡던 곡선의 눈동자
침목의 간격만큼 기차의 침묵은 깊어만 가는 그곳에 가면
끊어진 시간표 사이 터져버린 매미 목
매미처럼 울고 싶은 날
기차는 달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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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벼의 꿈
방앗간 멀어지고 헛간에 들어앉은 한반도 통일 정미기 녹슨 거미줄에 걸렸습니다. 늦가을 햇귀가 시렁에 걸린 무청 시래기 타고 하늘하늘 시멘트 벽돌에 밑그림을 그립니다.
천수답 나락이 논두렁을 밟고 나락으로 떨어진 지 70년, 올해도 골짝 메뚜기 쌀 한 섬이면 노총각 장가 밑천 탈탈 털고도 남을 씨나락 종자를 매상으로 넘기고 말았습니다.
자급자족의 틈 사이, 밀양 21, 23호 노래를 불렀던 빈농들이 동진, 일미, 영호진미, 새누리로 갈아타고 햅쌀의 짜릿한 찰기로 거북이 등가죽 지도로 여러 해 동안 밥맛 돋우는 햇살은 없었습니다.
발로 밟아 돌리던 탈곡기 새롱새롱 힘들지만 다정하게 볏단을 주고받던 발 박자를 잃어버리고 엇박자로 돌아선 지금, 메뚜기 쌀, 어쩌다 한번 도리깨로 두드린 서리태 반쪽들이 마당귀를 잡고 마당을 쓸어봤자, 소나기가 마당을 훔치고 가는 이상기후에 물고랑만 깊게 파이고 말았습니다.
한반도는 멀리 있고 이밥에 고깃국 먹자던 별똥별은 자꾸만 떨어지는데, 통일벼 심었던 40년 세월의 허기를 외면하고 보릿고개들은 비만의 뱃살을 두드리며 밥맛을 잃은 숟가락을 어느 세월에 다시 만나볼까요?
한반도 통일 정미기에서 달달 떨어지는 희고 고운 쌀알들이 등겨를 뒤로하고 고봉으로 쌓입니다. 쌀 한 바가지로 한 가족이 한솥밥을 먹는 일이, 이렇게 힘들어서 어디 쌀농사를 짓겠습니까? 백두야 천지야 눈 비비고 나오너라. 이 밥이 싹이 나기 전에, 밥 한번 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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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섭|2015년 《월간문학》 시조로 등단하였으며 2019년 계간 《창작21》 시, 2021년에는 계간 《소설미학》 에 소설가로도 등단하여 문학 전반의 왕성한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 성호문학 본상과 아르코 발표지원을 수혜(2022) 받았다. 시집 『내일처럼 비가 내리면』, 『도시락이 돌아오는 시간』과 시조집 『유모차를 타고 가는 아이나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