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노변동(蘆邊洞),
옛날에는 황무지 갈대밭 마을이었는데
개관
노변동은 수성구 고산2동의 법정동이다. 유건산(儒巾山·453m)에서 북쪽으로 뻗어 내린 야트막한 산줄기 아래에 자리한 마을로 유건산 골짜기에서 흘러내린 매호천 지류를 중심으로 형성됐다. 과거에는 마을 남서쪽 대진지 북쪽으로 넓은 노변들(시지들)이 펼쳐져 있었으나 지금은 대구·부산고속도로가 지나고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어 옛 모습을 잃어버렸다.
노변동은 고려시대인 14세기 중엽 의성 김씨가 처음 마을을 개척했다고 한다. 그런데 노변동은 토지가 척박하고 농업용수도 부족해 농사짓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논뿐만 아니라 밭을 일구기도 힘들었으며, 여름에는 갈대가 무성해 ‘갈빙’ 혹은 ‘갈변’이라 부르기도 했다. 얼마나 땅이 척박했던지 ‘메추리 두 마리가 날아오면 한 마리는 반드시 굶어 죽는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대진지, 가전지 등 저수지를 축조하면서 점차 농사짓기 좋은 땅으로 변했다. 이처럼 땅도 척박하고 물도 귀해 농사짓기 힘들었다는 황무지 마을 노변동에는 역설적으로 물·농사와 관련된 특별한 공간이 있다. 조선시대 때는 고을의 평안과 풍년을 기원하며 ‘토지신’과 ‘곡식신’에게 제사를 지냈던 사직단이 있었고, 현대에 와서는 고산정수장과 대구농업마이스터고등학교가 들어섰다.
지명 유래
노변동은 글자 그대로 갈대밭 주변 마을이란 뜻에서 ‘갈변’, ‘갈빈이’, ‘노변’, ‘병변’ 등으로 불렸다.31) 경산현읍지(1785), 경산현읍지(1850년대), 영남읍지(1871)에는 병변리(竝邊里), 「호구총수」(1789)와 조선지지자료(1910년대초)에는 노변리(蘆邊里)로 등재되어 있다.
노변리는 마을 하천 주변에 갈대가 많아 붙은 이름이다. 일부 자료에는 “마을 주위에 금호강 범람으로 인한 습지가 있었기 때문에 갈대가 많이 자라고 있었다.”32)고 하나 지형으로 보면 납득하기 어렵다. 사실 노변동은 유건산에서 뻗어 내려온 선상지(扇狀地)33) 중간에 위치해 습지에 자라는 갈대보다는 마른 땅에 자라는 억새가 많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억새를 한자로 표기하면 망(芒)이 되는데 음이 망(亡)과 같아 좋지 않고, 뜻 역시 ‘억세다’가 연상된다. 그래서 마을 이름을 정할 때 뜻과 음이 좋지 않은 억새를 모양이 비슷한 갈대로 대체해 ‘갈대 노’, 노변리(蘆邊里)로 바꾸었다고 생각된다.
한편 병변리(竝邊里)의 병(竝)은 뜻이 ‘두 개가 서로 나란하다’인데, 두 개의 ‘두’를 ‘병’으로 차자 표기한 것 같다. 여기서 ‘두’는 ‘둑’의 방언인 ‘둘’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병변리는 마을 위치를 고려한 지명으로 ‘둘(둑) 가장자리 마을’, ‘둘 근처 마을’이란 뜻도 된다. 이는 마을이 매호천 지류인 하천 가장자리에 자리했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31) 수성구립 고산도서관, 고산, 비밀의 성산(城山), 2022, 58쪽.
32) 수성구립 고산도서관, 고산(孤山), 2020, 90쪽.
33) 강이 산지에서 평지로 흐를 때, 흐름이 갑자기 느려지면서 물과 함께 쓸려 온 토사가 부채 모양으로 쌓여 생긴 지형.
가전지(家前池·佳田池)·계전지
가전지는 유건산 밑에 있는 못으로 대구농업마이스터고등학교 내에 있다. 가전지란 이름은 ‘집 앞에 있는 못’이란 뜻이다.34) 예전에는 주변에 울창한 숲이 있었으며, 300년 묵은 거목이 있어 마을 사람들의 휴식처, 낚시터로 사랑받던 곳이었다. 또 이곳에는 도득보(道淂洑)라는 물길이 있었다. 욱수골에서 흘러내린 물은 먼저 두리지(斗鯉池)로 들어갔다가 도득보를 통해 가전지로 흘러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도시개발로 두리지와 도득보는 사라졌다.35)
고산지역에는 고대에 조성된 수리시설은 없으나 조선시대 말에는 욱수지, 노변지, 구라지, 장현지, 내연지, 사월지, 구천지, 내곶지, 연지, 이천지 등의 크고 작은 저수지가 많았다.36) 1968년 자료에는 고산지역에 서성지(西城池)(신매우체국 일대), 연호지(蓮湖池), 구천지(狗泉池), 심곡지(心谷池) 같은 4개의 저수지를 비롯해 두리지(斗鯉池), 시지보, 사월지 등이 있어 고산지역 논농사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37) 그러나 지금은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대부분 사라지고 연호지, 구천지, 가전지, 대진지, 원정지 정도가 남아있다. 참고로 경산현읍지(1749)에 “원천제(院泉堤), 구물제(仇勿堤)는 현 서쪽 15리에 있다.”는 기록이 보인다.
34) 1980-90년대 관에서 발행한 지도에는 ‘佳田池’로 표기되어 있다.
35) 대구직할시 교육위원회, 『우리고장대구』, 1988, 341쪽.
36) 조선지지자료 경산편 참조.
37) 수성구립 고산도서관, 「고산(孤山-길 위에 피는 인문의 꽃)」, 2023, 95쪽 참조.
꼬부랑 바위
대구농업마이스터고등학교 남쪽에 유건(儒巾)38) 모양을 닮은 유건산(453m)이 있다. 유건산 기슭에 ‘꼬부랑 바위’라는 묘한 바위가 있었는데, 바위 밑에서 항상 맑은 샘물이 흘러나왔다. 샘물은 추운 겨울에도 얼지 않고, 가뭄에도 마르지 않으며 누구나 마시면 늙지 않는다는 전설이 있어 일명 ‘장수수(長壽水)’라 부른다고 한다.39) 꼬부랑 바위라는 이름은 노인들이 많이 찾아오면서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그 덕분인지 노변동에는 장수하는 노인이 많았고, 유건산 아랫마을에는 선비들이 많이 배출됐다고 한다.
38) 옛날 선비들이 머리에 썼던 검은 베로 만든 예관(禮冠).
39) 대구직할시 교육위원회, 우리고장대구, 1988, 341쪽.
노변동 사직단(社稷壇)
노변동 사직단(노변동 408)은 조선시대 경산현 사직단으로 대구시기념물이다. 경산현읍지(1871·1749)에 “경산현 서쪽 7리에 사직단이 있다.”란 기록이 있으나 한동안 사직단 위치를 알 수 없었다. 1999년 (재)영남문화재연구원 노변동고분군 발굴 조사 때 비로소 사직단 유적이 발견됐다. 사직단 유적은 과거 마을 당집이 있었던 해발 100m 정도 되는 구릉부 정상이다. 노변동 사직단은 현재 우리나라에 복원된 10여 개 지방 사직단 중 원형에 가장 가까운 사직단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발굴 당시 담장과 제단 같은 유구가 인위적 훼손 없이 고스란히 발굴됐기 때문이다. 이는 1908년 일제에 의해 사직제가 폐지되고 난 후, 연이어 사직단 자리에 마을 수호신을 모신 당집이 들어섬으로써 공간이 훼손되지 않고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54년 항공사진에도 정확한 정체는 알 수 없으나 지금의 노변동 사직단처럼 구릉 정상부에 특별한 공간이 있는 것은 확인된다.
정충각(旌忠閣)과 정효각(旌孝閣), 부자(父子) 정려
정충각과 정효각(노변동 148번지)은 충효재 동쪽에 있는 정려각으로 수성구 향토문화유산이다. 정면 3칸 건물로 정면에서 마주 보았을 때 가운데 한 칸은 사당이고, 왼쪽이 정충각, 오른쪽이 정효각이다. 정충각의 주인공은 노암(蘆庵) 정동범(鄭東範·1710-1793)이다. 어려서부터 효와 충으로 이름났던 정동범은 이인좌의 난 때 19세의 나이로 창의해 성주 목사 이보혁 휘하에서 큰 공을 세웠다. 난이 마무리되고 논공행상이 있을 때 정동범은 “선비는 학문으로 이름이 나야지 군공(軍功)으로 나는 것은 옳지 않다”며 모든 상훈을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처사의 삶을 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효각의 주인공은 정동범의 아들 면암(勉庵) 정지언(鄭之彦·1740-1814)이다. 정지언은 하늘이 내린 효자였다. 조부모와 부모가 살아 있을 때 온갖 재롱을 부리며 그들을 즐겁게 했다. 약물 봉양을 소홀히 하지 않았고, 어버이 내의는 반드시 손수 세척했다고 한다. 또한 조부모상에 아버지 정동범이 6년 시묘를 할 때 정지언이 곁에서 시종을 했다고 한다. 그 외 정동범과 정지언의 효행과 관련된 여러 이적이 전한다. 정동범은 1796년(정조 20) 충신으로, 정지언은 1892년(고종 29) 효자로 정려를 받았으며, 지금의 정충각과 정효각은 1892년 건립됐다. 정충각과 정효각은 고산지역에서 유일한 정려각이다.
충효재(忠孝齋)·모운당(慕雲堂)과 노변동 청주 정씨
충효재(노변동 148번지)는 노암(蘆庵) 정동범(鄭東範·1710-1793)을 기리는 청주 정씨 경산종중 노변문중 재실이다. 경내에는 충효재 외에도 모운당·정충각·정효각 등이 있다. 충효재는 1996년 건립된 새 재실이요, 모운당은 약 250년 전에 지어진 옛 재실이다. 본래 이 터에는 모운당·정충각·정효각이 있었고, 가까이 북쪽 언덕에 청주 정씨 노변문중 선영이 있었다. 하지만 1991년 택지개발이 시작되자 선영은 다른 지역으로 옮겨지고 옛 모운당 일원은 지금처럼 충효재를 중심으로 새롭게 정비됐다. 충효재는 정면 5칸 규모의 큰 건물로 겹처마, 팔작지붕 양식이다. 충효재를 마주 보았을 때 좌측에 모운당이 있으며, 우측에 별도 담장을 두른 정충각과 정효각이 있다. 충효재에서는 매년 음력 8월 19일 노암 정동범의 불천위40) 제사를 거행하며, 음력 1월 1일에는 모운당에서 추모제를 거행한다. 모운당에는 13-26대에 이르는 선조의 위패가 한자리에 모두 모셔져 있다. 1954년 항공사진에 옛 노변 마을 북쪽에 마을과 조금 떨어져 있는 모운당·정충각·정효각과 청주 정씨 옛 선영이 보이고, 동쪽 하천변에는 지금도 남아있는 옛 노변동 당산나무도 보인다.
40) 不遷位. 4대봉제사 기간이 지났어도 후손이 있는 한 계속 제사를 받는 신위. 국가에 큰 공훈이 있거나 학덕으로 지역에 널리 알려진 경우인데, 불천위로 인정받는 일은 매우 드물고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