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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 수련에 뜻을 두었던 옹정제는 고승과 교류를 자주 가졌다. |
| 한 진인이 있어 옹주에 나타나니, 할미새는 언덕에서 구슬프게 하는구나. (有一真人出雍州,鶺鴒原上使人愁)
비범한 법의 심오함을 알아야 하니, 백호가 일세에 그침을 탄식하누나. (須知深刻非常法,白虎嗟逢一歲周)
- 당나라 고승 황벽(黃檗)
[대기원] 현재 역사학자들은 여진족의 선조에 얽힌 이야기에서 건륭제가 문수보살의 화신이라는 것에 이르기까지, 모두 정치적 목적으로 만든 허황된 이야기라고 말한다. 통치자들은 흔히 스스로를 인왕(人王)이나 법왕(法王)으로 칭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관점에 머무르기 때문에 현대인은 깊이 없는 종교신앙을 가지거나 무신론자나 회의론자가 되기 쉽다. 그리고 역사인물과 신앙과 관련된 이야기에 대해 색안경을 끼고 보게 된다.
사람을 평가하는데 있어서 하늘을 공경하고(敬天) 신을 믿는 이 부분을 무조건 제외하고 다른 시각만으로 바라본다면 어찌 그 사람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겠는가? 하물며 역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고대의 제왕이라면 더욱 전모를 파악하기 힘들 것이다.
이러한 역사관에 따른다면 역사는 단지 건축 유적지, 왕릉, 공예발전 등 역사의 일부분만 보게 될 것이다. 살아 움직이고, 사상이 있고, 눈물이 있고, 피가 흐르는 사람들이 만들어 낸 이 장엄한 역사는 딱딱하고, 차갑고, 천박한 것으로 변해 버릴 것이다.
대강의 줄거리에 양념을 버무려 만든 현대판 극(劇)들은 마치 허공에 발을 디딘 것처럼 공허하다. 옛사람들의 ‘마음을 평안히 하고 천명에 따름(安身立命)’을 부정하고, 그 대신 격정적인 욕망과 애증, 권력 다툼을 부각시켰다. 역사의 진실과 교훈을 모호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최근 중공 당국의 지원을 받고 만들어진 ‘진송(秦頌)’, ‘영웅(英雄)’, ‘황후화(滿城盡帶黃金甲)’와 같은 블록버스터 영화가 모두 역사를 왜곡한 사례들이다.
이런 영화를 보면 볼수록 역사에 대한 인식은 본질에서 멀어지고, ‘선조들은 그저 그런 사람이었어’라고 속단하기 쉽다.
이런 현상은 청나라를 배경으로 한 역사극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단지 ‘사랑에 빠진 옛사람’, ‘권력다툼을 벌이는 옛사람’만 있을 뿐 ‘하늘에 따라 하늘에 부합하는(以天合天)’ 선조의 모습은 온데 간데 없다.
중공의 지원으로 만들었거나 중공 당국이 직접 제작한 예술작품은 역사 인물을 크게 왜곡했다. 중공이 지배하고 있는 현재 중국의 상황과 세계관을 투사(投射)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거짓말에 가깝다.
본론에 앞서 장황하게 서론을 말한 것은 우리가 지금 다시 살펴보고자 하는 옹정제에 대해서도 현대인들은 같은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다. 옹정제와 불교의 관계에 대해서 먼저 충분히 알아본 후에 통치자로서 옹정제를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옹정제의 또다른 이름 ‘원명거사’
청나라가 중원으로 진입한(入關) 이후 10대 황제가 있었다. 3대 황제(태조 누르하치를 1대로 볼 경우 5대 황제에 해당) 옹정제의 재위 기간은 1723년부터 1735년으로 모두 13년이다. 옹정제의 이름은 ‘애신각라 윤진(愛新覺羅 胤禛)’으로 강희 17년 10월 30일(서기 1678년 12월 30일) 태어났다. 서출(庶出)로서 네 번째 황자(皇子)였지만 강희제의 황후가 친자식처럼 키웠다.
옹정제의 자(字)인 윤(胤)은 황자들이 함께 쓰는 돌림자로, 옹정제가 즉위한 이후 다른 형제들은 ‘윤(允)’으로 자를 바꿨다. 강희제는 황자들에게 이름을 하사할 때 부수를 ‘시(示)’로 정했다. 示는 복(福)을 뜻한다. 옹정제의 이름인 진(禛)의 부수가 示인 것은 이 때문이다. 설문해자(說文解字)에는 진(禛)을 ‘진으로써 복을 받는다(以真受福)’고 설명한다.
강희제는 옹정제가 황위에 오르기 전인 1709년에 이화원(頤和園) 동쪽에 ‘원명원(圓明園)’이라는 별장을 지어준다. 옹정제의 즉위 후 황궁의 정원으로 바뀌었지만, 1900년 8국연합군의 습격으로 불타 버렸다. 원명원의 원명이라는 이 두 글자는 강희제가 지은 것으로 ‘원만하니 입신이요 밝으니 널리 비추도다(圓而入神,明而普照)’의 뜻이다. 군자는 스스로를 닦아 제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극히 높은 경지에 이르러야 함을 알린 것이다. 후에 옹정제가 된 윤진은 이 두 글자를 자신의 호로 삼고, ‘원명거사’ 혹은 ‘파진거사(破塵居士)’로 스스로를 칭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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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제가 훗날 옹정제가 된 윤진(胤禛)에게 하사한 별장인 원명원(圓明園). 옹정제는 이후 스스로를 ‘원명거사’라 칭했다. |
| 전대를 이어 후대를 열다
강희성세는 중국 역사에서도 손꼽히는 성세다. 하지만 후기에 태자 문제로 순탄치 못한 길을 걸어야 했다. 강희제는 1676년 두 살에 불과한 2황자인 적장자(황후의 장자) 윤잉(胤礽)을 태자로 삼았다. 1황자인 윤지(胤禔)는 황후의 소생이 아닌 혜비(惠妃)의 소생으로 서장자(庶長子)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윤잉이 문제를 일으키자 1708년 폐위했다. 태자의 자리를 두고 잡음이 일자 이를 막기 위해 폐위시킨 윤잉을 다시 태자로 책봉한다. 하지만 또다른 문제로 2차 폐위하고 한동안 태자를 책봉하지 않았다. 이 공백 기간에 황위를 두고 황자들을 중심으로 각자의 분당과 파벌이 생기는 등 다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중 8황자인 윤사(胤祀)의 활동이 가장 활발했다. 하지만 윤진은 이와 달리 승려들과 교류하며 조용히 지냈다.
누가 태자가 될지 추측이 난무한 가운데, 강희제는 늘 친히 올리던 공자에 대한 제사를 말년에 윤진에게 대신 올리게 했다.
사실 강희제의 선택은 어찌 보면 미리 짐작할 수 있었던 일이다. 서자이지만 황후의 부양으로 자란 윤진은 어릴 때부터 강희제의 옆에서 시정을 지켜 봤기에 행정경험이 풍부하고 관리를 다스리는 것도 잘 알았다. 또 황자 중에서 비교적 나이가 많고 성숙했으며, 성격이 근면하고 신중하면서도 사심이 없었다. 너그럽고 후덕한 성품이었던 강희제는 윤진에게 황위를 계승하고, ‘너그러우면, 엄하게 제도되리라’는 치국의 도를 내렸다. 역사적으로 옹정제는 각각 60여 년에 이르는 강희제와 건륭제의 성세 사이에 비교적 짧은 13년간 집정했다.
즉 선대 강희제의 업적을 계승해 후대 건륭제의 성세를 여는 중대한 역할을 한 것이다. 옹정제는 재위 기간 중 부단히 관치를 혁신하고 당쟁을 진정시켰으며, 국고를 충실하게 채웠다. 강희제가 4황자인 윤진에게 황위를 계승할 당시, 청나라의 국고는 은(銀) 8백만냥 정도였지만, 옹정 6년에 이르러 별다르게 세금을 더 걷지 않고서도 4천만냥까지 국고를 불렸다. 옹정제는 중기에 서북지역을 토벌하는 데 국고를 투입하면서도 건륭제에게 은 2천만냥을 물려줬다.
건륭제는 옹정제가 물려 준 충실한 국고와 청렴한 관리제도를 바탕으로 단숨에 은 5천만 냥으로 국고를 확충할 수 있었다. 건륭제가 이후 타이완, 미얀마, 베트남, 네팔을 평정하는 등 10회의 무공을 세워 스스로 십전노인(十全老人)이라 칭할 수 있었던 것은 옹정제의 공이 크다.
예언 속의 옹정제
당나라 고승 황벽(黃檗)은 14수의 ‘선사시(禪師詩)’를 지었다. 선사시는 명나라의 멸망, 청나라의 각대, 8년항전, 국공내전, 국민당이 대만으로 퇴각하는 것을 정확하게 예언했다. 이 글의 첫 부분에 소개한 시는 그 중 3번째 시로, 옹정제에 관한 예언이 담겨 있다. 첫 번째 구절, ‘유일진인출옹주(有一真人出雍州)’는 옹정제가 즉위하는 것을 예언한 것으로 옹(雍)은 옹정제의 연호를 지칭하는 것이다.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것을 이미 깨달음을 얻은(開悟) 진인으로 표현했다.
두 번째 구절, ‘척령원상사인수(鶺鴒原上使人愁)’의 척령(鶺鴒)에 관해 시경(詩經)에서는 ‘할미새는 날면서 울고, 걸으며 몸을 흔드니 위급함을 구해주려는 것이구나(鶺鴒,飛則鳴,行則搖,有急難之意)’라고 했고, 한나라 모형(亨傳)의 주해에는 ‘척령은 할미새를 뜻한다. 형제에게 위급함을 알려 서로 구하자는 것’이라고 나온다.
이를 바탕으로 구절을 해석해 보면 ‘위기 속에서 형제가 서로 구해준다’는 것이다. 사실 옹정제는 형제 문제에서 슬픔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옹정제는 황위에 오르기 전에 형제간의 다툼을 말없이 지켜봐야 했고, 황위에 오르고서는 자신을 정성스럽게 받들었던 동생 13황자 윤상(允祥)을 잃는 아픔을 느꼈다. 옹정제는 크게 슬퍼하여 윤상의 윤(允)을 자신만이 쓰는 윤(胤)으로 바꾸게 하고 크게 애도했다.
세 번째 구절, ‘수지심각비상법(須知深刻非常法)’은 옹정제의 업적은 후대에 물려주기 위함으로 범상치 않은 깊은 함의가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네 번째 구절, ‘백호차봉일세주(白虎嗟逢一歲周)’는 옹정제의 연호가 단지 한 바퀴(12년)에 그친 것이 애석하다는 뜻이다.
* 淸朝 역대 황제 입관(入關-중원 진출) 이전 1대 태조(누르하치) 1616~1626, 2대 태종(홍타이지) 1626~1643
입관(入關-중원 진출)이후 3대 세조(순치제) 1643~1661, 4대 성조(강희제) 1661~1722, 5대 세종(옹정제) 1722~1735, 6대 고종(건륭제) 1735~1795, 7대 인종(가경제) 1795~1820, 8대 선종(도광제) 1820~1850, 9대 문종(함풍제) 1850~1861, 10대 목종(동치제) 1861~1874, 11대 덕종(광서제) 1874~1908, 12대 선통제(부의) 1908~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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