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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道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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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유형문화제 제367-2호 지정됨
나) 1586년 대학자 회재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건립함
다) 글은 손엽선생의 글이다.
라) 전체 높이는 3미터 이며, 비석높이는 185센티 이다.
1. 용(龍)에 대해 살펴보면
*강원도 백두대간이 이어져 내려와 청옥산, 두타산, 응봉산, 백암산, 주왕산, 내연산, 비학산, 두륙
봉, 용산, 도음산(384m)을 주산으로 하여 강동면 유금리로 진행하는 행룡이 달전리에서 횡룡으로
자리를 혈을 맺으며, 청룡, 백호를 이루어지며 그 가운데 혈을 맺고 있다.
도음산(384m) 을 주산으로 하며 백호 능선으로 뻗어 내려오다가 다시 횡룡(橫龍)으로 입수한 형
태이다.
형기론적인 방법으로 본다면 용맥(龍脈)은 건해(乾亥)입수(入首)는 임자(壬子)배합절로 내려오며
좌선용(左旋龍), 우선수(右旋水)의 형태를 갖추었다.
전체적인 혈의 위치는 인혈(人穴)에 위치하며 유혈(乳穴)을 이루고 있다.
입수지점에는 부인의 묘소가 있어 입수의 모습을 보기는 어렵다.
부인의 墓所가 뒤에 있으니 역장(逆葬)인데 그 시대의 유교적인 사상에서는 보기 드문 일이다. 요
즘 시대에도 역장(逆葬)이라고 시비가 일어나는 것을 많이 보는데 무척이나 부인을 아끼고 사랑
하셨나 보다. 다시 한번 회재(晦)선생의 인품을 생각하게 된다.
<行崇政大夫 議政府 左贊成 贈大匡輔國 崇祿大夫 議政府 領議政 謚文元公晦齋 先生之墓>
<墓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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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혈에 대해 살펴보면
이곳에는 여러 묘소가 있는데 회재선생의 혈장의 크기는 대략 60-70평 정도이다.
혈장은 약간 높였으나 전순쪽에는 5단의 계단으로 축대가 조성되어 있으며, 혈장 좌우의 계곡은
청룡쪽은 깨끗하나 백호쪽은 조금 산만한 느낌이다.
선익(蟬翼)을 살펴보면 미약한 것 같다.
혈장은 혈심을 중심으로 좌우 균형이 잘되어 있으며, 혈장 주변의 나무들은 대력 13m 정도 떨어
져 있다.
전순(氈脣)은 계단으로 축대를 쌓아서 정확하게 파악하기가 불분명하다.
혈심에서 엘로드로 측정하여 보니 기맥(氣脈)은 강하게 내려오며 수맥파(水脈波)는 측정되질 않
는다.
<入首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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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주변 사격을 살펴보면
현무봉은 안정된 금성체(金星體)의 모양이며 청룡과 백호가 잘 관쇄되어있으며 특히 청룡은 일자
문성(一字文星)으로 향(向)을 지나 완전히 감아 있는 모습이 특징이다. 그러나 청룡 끝자락이 보
기에 따라 약간 비주(飛走)하는 모습으로 보이는 것은 왜일까?
안산(案山)과 조산(朝山)은 서로 조응(照應)하며 읍(揖)하는 모습이 신하가 임금에게 예(禮)를 올
리는 형세로 겹겹이 환포하고 있다.
규봉(窺峰)은 보이지 않으며 청룡, 백호가 상투(相鬪)되지 않고, 청룡. 백호가 절비(折譬)되지 않
으며, 배반(背反)하지도 않고, 단축(短縮)되지도 않으니 주변 사격이 길한 모습이다.
<靑龍. 白虎 잘 관세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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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수(水)의 길흉을 살펴보면
묘소 앞의 물은 구곡수(九曲水)로 흐르며 충(冲)하거나 반궁(反弓)하거나, 직거(直去)하지 않으며
흉방(凶方)에서 오고가는 물이 보이지 않고 혈 앞을잘 환포(環抱)하여 흐르니 묘소에 좋은 도움을
주며 혈의 기를 보호하는 형상이다. 따라서 물의 도움이 크다고 본다.
형기론으로 본다면 좌선룡(左旋龍)에 우선수(右旋水)로 득수(得水)는 신술(辛戌) 부근에서 출발
하여 향(向)앞을 지나는 길수(吉水)이다.
이기론에서 포태법(胞胎法)으로 본다면 수국(水局)으로 병오(丙午)로 물이 나가니 태(胎)파구이
다. 좌(坐는) 생(生)이 되어 길한 좌(坐)가 되고, 득수(得水)는 관대(官帶)가 되니 왕(旺), 관(冠),
대(帶), 욕(浴), 생(生), 양(養)방향의 길수(吉水)를 얻어 태(胎)로 파구되니 득수(得水)는 길수(吉
水)를 얻어야 되고 파구(破口)는 흉수(凶水)로 나가야 하니 포태법으로도 좋은 모양을 갖춘다.
88향법으로 본다면 외파구로 본다면 수국(水局)에 병파(丙破)로 보며. 태향태류(胎向胎流)가 되며
우수도좌(右水倒左)가 되니 용진혈적(龍眞穴的)에 태향태류는 주로 대부대귀(大富大貴)에 인정흥
왕(人丁興旺)한다고 한다. 그러나 용약비혈(龍弱非穴)이 되거나 수범지지자(水犯地支字)이면 비
패즉절(非敗卽絶)하므로 불가경용(不可輕用)이다. 또한좌수도우(左水倒右)하여 당면직거(當面直
去)하면 견동토우(牽動土牛)라 하여 패산적빈(敗産赤貧)이 우려된다.
내파구로 본다면 木局에 丁未파구이며 自旺向에 물은 左水倒右가 되니 부귀정재(富貴丁財)가 왕
성한 매우 길한 향이다.
5. 향(向)을 살펴보면
향(向)은 임좌(壬坐) 병향(丙向)으로 안산(案山)과 조산(朝山)은 조응(照應)하는 모습이고, 황천살
(黃泉殺)은 피했는가?
패철1층을 보면 임자(壬子) 배합절(配合節)에는 진(辰), 술(戌) 방향이 황천살인데 그 방위에는 물
의 증거가 없어 水(黃泉水)의 피해는 없다.
팔요풍(八曜風)은 패철2층으로 판단하는데, 임자(壬子) 배합절(配合節)에는 건(乾)이 되는데 이방
향이 허약해서 바람이 들면 팔요풍(八曜風)이라 흉하게 보는데 팔요풍(八曜風)을 맞으면 시신이
새카맣게 탄다고 한다. 그러나 이곳은 바람의 염려가 없다.
길사(吉沙를 고려하여 입향(入向)했다고 본다.
<案山과 朝山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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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達田祭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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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전제사(達田祭祀)는 <경북문화재 제202호. 지정일: 1987년 12월 29일>
조선 태종(太宗) 2년(1402)경에 창건한 건물이라고 구전될 뿐 확실한 근거자료는 없으며, 현재는
조선조 성리학자로 동방 오현(五賢) 중의 한분인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선생의 묘소를 관리하
기 위한 재실로 쓰고 있다
그는 24세 때 문과에 급제한 뒤 이조정랑, 밀양부사를 거쳐 중종 25년(1530) 사간이 되었다. 그러
나 김안로의 등용을 반대하며 벼슬을 버리고 산으로 들어가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김안로가
물러난 뒤 홍문관교리, 직제학이 되었고 전주부윤으로 재임하면서 선정을 베풀어 그의 송덕비를
세우기도 하였다. 그 뒤 명종 2년(1547) 양재역 벽서사건에 무고하게 연루되어 강계로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많은 저술을 남기며 생을 마쳤다. 그는 조광조·김굉필·정여창과 함께 동방 4현 중 한 분
으로 손꼽히며 조선초 성리학의 성격과 방향을 정립한 선구자이다. 건물은 조선 태종 2년(1402)에
세운 건물이라고 하나 근거가 될 만한 자료는 없다.
달전재사는 ㅁ자형 팔작지붕의 와가(瓦家)로 정면 6칸, 측면 6칸이며, 건물배치에 있어서 배면(背
面)에 누(樓)마루를 위치시키고 좌측 협문으로 통해 정침으로 출입하도록 고려되어 다른 재사 건
축에 보기드문 특이한 배치수법으로 되어 있다.구전(口傳)에 따르면 원래는 승려들이 거주하였다
고 전하는 건물이지만 현재는 이언적선생의 묘소를 관리하기 위한 재실로 쓰고 있다. 이 건물은
약 80여년전 까지만 해도 불상(佛像)은 없지만 승도(僧徒)들이 거주하며 묘소를 수호하였다고 한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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