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에페소 공의회(431)
에페소 공의회는 이 공의회 임전에 열렸던 니케아 공의회와 제 1 차 콘스탄티노플공의회 이후 발생한 문제들 가운데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지닐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교회의 첫 번째 공식적인 응답이었다.
- 에페소 공의회의 역사적인 배경
325년 제 1 차 니체아 공의회를 즈음해서 이미 교회에는 여러 학파가 있었다. 그 가운데, 가장 큰 두 학파가 알렉산드리아학파와 안티오키아학파였다. 두 학파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신성과 인성) 에 대한 논의에 있어 그 주장한 바가 상반되었다. 알렉산드리아학파는 지난 제 1 차 니체아 공의회에서 단죄되었던 아리우스 이단을 염려하여 주로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하면서 그리스도 안에 신성과 인성이 서로 구분되지만 분리될 수는 없다면서 하나의 본성을 강조했다. 그러므로, 알렉산드리아학파에 따르면, 예수께서 이 세상에서 행하신 모든 행적은 하느님의 것이 된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안티오키아학파에 따르면, 그의 행적도 결국은 신성과 인성에 따라 철저히 구분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를 들면, 그리스도께서 수난을 받으실 때에, 하느님으로서의 예수는 고통도 수난도 받지 않고, 단지, 인간 예수가 받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은 후일 극으로 치달아, 완전한 분리에로 나아가면서, 그리스도의 한 위격 안에 불가분의 합일(신성과 인성의 합일)을 인정치 않는 이원론에 빠지게 된다.
안티오키아 학파에 속했던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네스토리우스(381년 출생, 428년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로 임명. 451년경 사망)는 428년에 이르러 ‘마리아는 인간 예수만을 낳은 분(Christo-tokos)이지 결코 하느님이신 예수의 어머니(Thèo-tokos)는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을 강조한 말이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주장은 즉시 심한 반발을 불러 일으켰고, 특히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치릴로는 네스토리우스의 주장이 이단의 가능성이 있음을 경고했다. 이에 대해 네스토리우스가 치릴로에 반발하여, 당시 로마 제국의 황제였던 테오도시우스 2세에게 문제해결을 위한 공의회 소집을 요구하게 되었다.
-공의회 과정
공의회는 소란스럽게도 진행되었다. 네스토리우스가 관구 소속 주교 26명과 함께 먼저 도착했고 이어 치릴로가 50명의 관구 소속 주교들과 함께 도착했다. 반면 안티오카아의 요한 총대주교 일행과 로마 교황사절단은 미처 도작하지 못했다. 그러나 치릴로는 교황의 대리인임을 자처하며 많은 주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공의회 개막을 서둘렀고 이 때문에 숫적 열세를 감안한 네스토리우스는 에페소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또 세 번이나 참석요구를 받고도 공의회 참석을 거부했다.
치릴로는 첫 회기에서 이미 작성해 놓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신성과 인성의 위격적 결합에 대한 신앙선언문을 작성하고 198명의 참석 주교들의 인준을 받아내 믿을 교리로 선포했다. 이로써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칭호가 채택되었다.
그러나 5일후 안티오키아의 요한 총대주교가 44명의 관구 소속 주교들과 함께 도착하자 네스토리우스는 회의에 들어가지 않고 별도의 회의를 개최해 에페소 공의회 결정을 반대하고 치릴로와 에페소의 주교 멤논을 파문했다. 이로써 공의회는 2개의 회의로 갈려 서로 비난과 공격을 퍼붓게 되었다. 쌍방의 비방이 계속되자 난처해진 테오도시우스 2세는 두 지도자인 네스토리우스와 치릴로를 체포했다. 후에 치릴로는 자신의 임지로 되돌아 갈 수 있었지만 네스토리우스는 북부 이집트로 추방되었고 451년경에 사망했다.
이로써 공의회는 일단락 되었지만 동방교회 주교단의 분열은 계속됐다. 새 교황 식스토 3세에 이르러 네스토리우스 사건으로 분열된 교회의 질서와 평화를 회복하기 위해 일치의 길을 모색하다 433년 4월에 안티오키아 측에서는 네스토리우스 사상의 단죄를 승인하고 알렉산드리아는 치릴로가 안티오키아 측에서 작성한 신조를 받아들임으로써 합의가 이루어졌다.
네스토리우스의 이단 사상에 대해서는 오늘날까지 의견이 분분했다. 에페소 공의회 이후 네스토리우스의 지지자들은 페르시아로 피신하여 교회를 세웠고 성실한 수도생활과 열성적인 포교활동으로 인도, 티벳, 중국까지 전파됐다. 중국에서는 위대한 종교, 빛나는 종교라는 뜻으로 경교(景敎)라는 이름으로 한동안 융성했었다.
-에페소 공의회의 의의
에페소 공의회의 가장 큰 업적은 마리아에 대한 호칭인 하느님의 어머니(Thè0 tokos)를 공식화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칭호 속에서도 예수의 신성에 관해서만 주로 언급이 되었고, 그의 인간성에 관해서는 거의 언급이 없었다. 인간 예수의 면모는 예수의 신성의 지나친 강조로 말미암아 밀려날 위험에 처해 있었다. 이렇게 되자, 교회는 이제 예수에 대한 산앙고백에 있어서 그의 인간차원을 간과해서는 안 될 중요성을 절감하기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