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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해괴망측한 논설
ㅡ‘{중앙일보} 이철호 논설위원 <참 이상한 투표>’를 비평함ㅡ
사계四季 (2011.08.29.19:00)
{중앙일보} 이철호 논설위원 <참 이상한 투표>
https://news.joins.com/article/6046275
‘{중앙일보} 이철호 논설위원 <참 이상한 투표>’를 수박 겉핥기로 읽으며 제가 받은 인상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이 논설은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 특징 하나로서 매카시즘 특징을 잘 드러낸 논설이다.’는 인상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이 논설은 말장난으로 이뤄진 논설이다.’는 인상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논설은 빨갱이 덧칠을 위한 숨은 의도를 가지고 말장난을 친 논설로서 조, 중, 동 극우 이념, 매카시즘 특징을 잘 드러낸 논설이다.’는 게 제가 이 논설을 대충 읽으며 느낀 전체 인상이었습니다.
말장난 예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말을 더럽히고 있는 <참 이상한 투표> 한 부분을 먼저 살펴봅니다. ㅡ이 점을 살펴보면서 ‘내가 복지에 대한 여당 정책(주장)과 야당들 정책(주장)을 잘 모르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이번 투표에서 여당 주장과 야당들 주장’이나 ‘여당 복지 정책에 필요한 예산과 야당들 복지 정책에 필요한 예산’ 같은, 이런 수치까지 안다면, 이 글을 써 나가는 일이 더욱 쉬울 텐데, 말입니다. 그러므로 많은 부분 제 상상력을 동원할 수밖에 없음을 미리 밝힙니다.ㅡ
한마디로 부자 동네들은 “돈 내고 아이들 밥 먹이겠다.”고 하고, 저소득층이 많은 지역에선 “있는 집 아이들도 공짜로 먹여라.”는 의사를 표시한 셈이다. 일부 인터넷 매체들은 “철저한 계급 투표”라 비난하지만, 역사에서 이렇게 상대 계급을 배려하는 아름다운 장면을 본 적 있는가. 부자 동네는 모처럼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선보였고, 저소득층은 “있는 사람도 돈 내지 말라.”며 사양하는 구도가 됐다.
<참 이상한 투표> 한 부분을 인용한 위 논설이 옳은가를 알려면, ‘이번 투표에서 오세훈 서울시장을 지지했던 이른바 “부자 동네”들 주장이 “돈 내고 아이들 밥 먹이겠다.”는 뜻이었는가?’를 살펴봐야 합니다. 저는 전면 무상급식을 반대했던 부자들 주장을 ‘자기 자식들은 돈 내고 밥을 먹이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설령 그들이 그런 말을 했을지라도 말입니다. 그 까닭은, 저는 ‘한나라당 복지 정책을 떠받든 오세훈 서울시장이 이번 투표에서 진 나머지, 이 여파로 차후 전국적으로 전면 무상급식을 하게 된다면, 전면 무상급식에 따른 부족한 급식비를 위한 예산(세금)을 어디에서 마련해야 할지를 그들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세금을 내야할 사람들은 부자, 그들 자신입니다.
다시 말하면, 저는 ‘그들은 자기 자식들 급식비만 내면 한 집 두 자녀 기준 한 해에 대략 80만 원이라는 돈이면 될 일이, 재산이나 소득이 많은 곳에 세금을 더 물리는 구조 때문에 전국적으로 전면 무상 급식이 실시된다면, 전면 무상급식을 위한 세금으로 자기들이 내야 할 돈이 한 해에 160만 원이나 240만 원으로 더 늘어나는 가능성을 염려했기 때문이다.’고 생각합니다. ㅡ물론, 학교를 다니는 자식이 없는 부자 경우 ‘80만 원도 내지 않는 셈법’을 모를 리 없습니다.ㅡ 정확히는, 저는 ‘내 자식들 밥값 80만 원 정도는 낼 테니, 우리들 각 개인 재산이나 소득에 따라 한 해에 수백만 원에서 수억 원이 되는 부자감세를 철회하지 마라는 게 부자들이 전면 무상 학교급식을 반대한 까닭이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있는 집 아이들도 공짜로 먹여라.” 역시 말장난을 친 말입니다. 즉, 저는 ‘이 말은 이철호 논설위원이 지어낸 말이나 마찬가지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 말은 이번 투표 때 오세훈 서울시장을 지지하지 않았던 서울 서민들 주장을 “의사를 표시한 셈”이라는 말로 말장난을 친 뒤, 서울 서민들 주장을 “있는 집 아이들도 공짜로 먹여라.”는 말장난으로 비틀어 버린 말, 추잡한 말장난을 친 말입니다. 그 까닭은, 저는 ‘자기 자식들이 상처 받을까 염려한 서울 서민들 주장은, 이명박 정부 부자감세 혜택으로 부를 더한 부자들로 하여금 세금을 더 내게 해서 전면 무상급식을 실시하자.’는 속뜻ㅡ속뜻이 아닌, 민주당 같은 야당들 실제 주장일 것입니다.ㅡ을 가진 주장으로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제 이 판단이 옳다면, 이번 투표는 부자들 측에서 보자면 계급 갈등을 드러낸 투표였습니다. 이 점에서는 “철저한 계급투표”라는 말은 옳습니다. 그리고 서민들 측에서 보자면, 이번 투표는 이명박 정권에서 더욱 심해진 빈부격차를 줄이기 위한 투표, 사회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투표였습니다. 또한 ‘신앙의 자유나 사상의 자유나 언론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제 관점에서는, ‘유럽에서 맑스주의를 태어나게 만든 씨앗인 빈부격차’를 줄이기 위한 참 “아름다운” 투표였습니다. 참된 반공을 위해 서울 서민들이 반대한 투표···. 참된 반공 투표!!!
그런데 서울 서민들 “있는 집 아이들도 공짜로 먹여라.”라는 말이 실제로 있었다면, 이 말은 다음과 같은 앞뒤 말이 있는 주장이었을 것입니다.
“이명박 대통령을 받들어 복지가 아닌 삽질 표퓰리즘에 눈먼 오세훈 서울시장은 삽질 예산을 전면 무상급식 예산으로 돌려, 서울시 학교급식에서 부자들 자식에게도 공짜로 밥을 먹이는 보편복지를 실시해라.”
위 말은 학생을 둔 서울 부자에게도 득이 되는 말입니다. 그러함에도 그들은 왜 이 주장을 반기지 않았을까요? 그 까닭 하나는 “야당들 보편복지 정책은 부자를 탄압하는 좌파 이념, 빨갱이 이념에서 나온 정책이다.”는 한나라당이나 조, 중, 동 세뇌 때문은 아니었을까요? 제가 광주학살을 겪은 세대로서 “조선일보”나 “조갑제”라는 말을 들으면 경끼(경기驚氣)를 일으키듯이, “반공”을 부르짖는 조, 중, 동 매카시즘 논조는 한국전쟁을 겪은 세대들 경끼를 일으켜 그들을 결집하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계산에 똑똑한 부자들이, 부자감세를 베푼 이명박 대통령을 떠받든 오세훈 서울시장이 ㅡ비록 부자들에게는 한 해에 ‘수백만 원에서 수천만 원’ 정도와 얽힌 서울시 학교급식 복지에만 제한된 문제이긴 하지만ㅡ 이번 투표에서 지게 된다면, 이 여파는 도미노처럼 다른 복지 문제까지 건드려 자기들이 더 내야 할 세금이 한 해에 수천만 원에서 수억 원까지 확대될 수 있음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위에서 언급했지만, “한 해에 내 자식들 밥값 80만 원 정도는 직접 낼 테니, 부자감세 철회하지 마라.”는, 이것이 그들 주장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제가 위에서 지적한 말장난은 그래도 양호한 편입니다. <참 이상한 투표>에 적힌 이철호 논설위원 정말 추잡한 말장난질을 살펴봅니다. 다음은 이 논설 서두입니다.
어제 서울시 무상급식 주민투표를 하기 위해 평소대로 동사무소로 갔다. 그런데 아니란다. 투표 장소가 처음 듣는 아파트 단지, 그것도 노인정으로 바뀌어 있었다. 얼핏 ‘야당 구청장 농간인가’라는 수상한 생각이 스쳤다. 하지만 이내 ‘평일에는 학교를 못 빌리니 투표장을 바꿨겠지’라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하는 수 없이 휴대전화 내비게이션까지 켜고 겨우 투표장을 찾았다.
“평소대로 동사무소로 갔다.”??????? 제가 만약 지난해 4월까지 살았던, 이른바 “서울 강남 제4구”라는, 서울 강북에 있는 중랑구에서 아직도 살고 있었다면, 저는 투표를 하려면 평소대로 제가 사는 아파트 단지 노인정으로 갔을 것입니다. 물론, 아파트 단지와 좀 먼 초등학교에서 투표를 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초등학교에서 아파트 단지 노인정으로 투표장이 바뀐 때는 수년 전 중랑구청장이 한나라당 후보가 됐을 때부터인 것 같습니다. 이명박 서울시장 때인 것 같기도 합니다.
저는 이 일을 두고 ‘한나라당 지지 세력인 노인들 투표를 쉽게 하려고 투표장소를 아파트 단지와 좀 먼 초등학교에서 아파트 단지 내 노인정으로 바꾼 것이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투표장소를 아파트 주민들이 가까이하기 쉬운 곳에 둠으로써 낮은 투표율을 개선하기 위한 선관위 노력’으로 생각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철호 논설위원은 투표장소가 바뀐 것을 두고 “얼핏 ‘야당 구청장의 농간인가’라는 수상한 생각이 스쳤다.”고 씁니다. 또한 “농간”, “수상”이라는 말까지 쓴 이철호 논설위원은 곧바로 “하지만 이내 ‘평일에는 학교를 못 빌리니 투표장을 바꿨겠지’라고 마음을 고쳐먹었다.”고 씁니다. 헷갈립니다. 헷갈려서 “평일에는 학교를 못 빌리니”를 ‘평일에는 동사무소를 못 빌리니’ 오타로 생각하고 싶습니다.
오타로 생각할지라도, 생각해 봐야 할 점은 있습니다. 그 하나는 ‘이번 서울시 투표에서 투표장소를 정하는 사람이나 지자체는 각 구청장이나 각 구청인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리고 ‘이번 서울시 투표에서 투표를 주관하며 투표장소를 정하는 기관은 서울시 선거관리위원회인가, 각 구청 선거관리위원회인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또한 이런 문제를 생각하면서 ‘서울시 구청 선거관리위원회는 중립기관이 아닌, 구청장 마음대로 “농간”을 부릴 수 있는 기관인가?’도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쉬운 점은 ‘저는 이런 문제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면서 지금 이런 문제를 거론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이철호 논설위원 ‘민주당 정치인이 구청장인 구청에 소속된 선거관리위원회는 민주당 구청장이 마음대로 “농간”을 부릴 수 있는 기관이다.’는 주장을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이 주장을 받아들일지라도, 그러면 이철호 논설위원 태도, 민주 시민으로서 태도에는 문제가 없을까요?
“평소대로 동사무소로” 가면, 도대체 어쩌자는 겁니까? “평소대로 동사무소로” 갔던 행위가 민주 시민으로서 태도입니까? 또한 이 태도는 “우리나라 1등 신문으로서 우리나라 여론을 이끌어간다.”는 {중앙일보}, 이른바 “우리나라 1등 신문” {중앙일보} 논설위원으로서 태도, ‘우리나라 최고 지식인’으로서 태도입니까?
저는 지난해 지방선거 때 선거 우편물에서 몇몇 후보 공약집이 없는 것을 발견하고 담당 선거관리위원회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리고 빠진 우편물을 보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논설은 다음과 같이 쓰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제 서울시 무상급식 주민투표를 하기 위해 평소대로 동사무소로 갔다. 그런데 아니란다. 투표 장소가 처음 듣는 아파트 단지, 그것도 노인정으로 바뀌어 있었다. 나는 투표장소를 확인하지 않고 온 내 불찰을 후회했다.
물론, 이철호 논설위원이 이렇게 글을 쓰려고 했다면, 아예 쓰지를 않았을 것입니다. 숨은 의도가 있기 때문에 <참 이상한 투표> 서두를 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숨은 의도를 알려면, <참 이상한 투표> 서두에서 눈여겨봐야 할 말이 있습니다. 그 말은 “처음 듣는”입니다. 어느 구 구청장인지는 모르겠지만, “농간”이 참 대단한 야당 구청장입니다. 정확히는 민주당 구청장입니다.
“평소대로”라는 말을 보면, ‘이철호 논설위원은 그 동네에서 오래 살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야당 구청장은 그 동네에서 오래 산 사람도 잘 모르는 아파트 단지 노인정을 투표장소로 정해, 그 장소를 “겨우” 찾도록 만들었으니, 그 민주당 구청장은 참 대단한 인물입니다. 그것도 “우리나라 1등 신문”을 자랑하는 신문사 논설위원으로서 ‘우리나라 최고 지식인’이 내비게이션 안내를 받았는데도 투표장을 “겨우” 찾게 만들었으니, 말입니다. 물론, 이 아파트 이름을 “처음 듣는” 할머니 할아버지께서는 내비게이션이 없어서 그 아파트 단지 노인정을 찾지 못해 투표를 못하셨겠지요. 아무튼 “농간”이 참 대단한 민주당 구청장입니다.
그러나 수박 겉핥기로 읽더라도 곧바로 말장난을 눈치 챈 제게는 ‘“농간”이 참 대단한 {중앙일보} 이철호 논설위원’입니다. {중앙일보}를 욕 먹이는 논설, 누워서 침 뱉는 논설위원···. 제게는 이런 “농간”에 능수능란한 신문이 “우리나라 여론을 이끌어가는 1등 신문”이라고 자랑하는 {중앙일보}라는 점에서 우리나라 앞날이 참 암담하기만 합니다.
그런데 제 생각이 ‘아무튼 “농간”(권모술수)이 능수능란한 민주당 구청장’에 이르니, 그 옛날 극우ㅡ그들 스스로는 “보수”나 “우파”라고 말하지만, 저에게는 극우ㅡ 신문 기사가 생각납니다.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 야당 시절, 김대중 씨가 동교동 자택에서 만발한 장미꽃을 손질ㅡ원예사나 정원사가 전정剪定가위를 들고 ‘과수나 꽃의 생육과 결실을 균일하게 하고 고른 미관’을 위해 가지 일부를 자르고 가지치기를 하는 전정剪定ㅡ하면서 장미 한 송이를 가위로 잘라내는 모습을 찍은 사진을 “잔인한 DJ”라는 제목으로 올린 기사가 떠오릅니다.
“잔인한 DJ”라는 말에서 이른바 “권모술수”가 김대중 씨 잔인하고 과격한 이미지ㅡ물론, 극우 언론들이 세뇌한 이미지입니다. 권모술수가라는 이미지도 마찬가지입니다.ㅡ를 강조하기 위해 이 말을 두꺼운 글씨에 빨간색을 덧칠합니다. 글씨도 키웁니다.
“잔인한 DJ”
그런데 이 빨간 덧칠이 김대중 씨나 민주당에게만 끝나면, 큰 문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빨간 덧칠이 타 지역민에게는 김대중 씨나 민주당을 지지하는 지역민, 전라도 사람들 이미지가 돼 버린다는 점에서 큰 문제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타 지역민에게서 전라도민은 “빨갱이들”, 또는 “전라도 깽깽이들”이 돼 버립니다.
저는 마흔살을 몇 해 앞둔 1998년부터 맞선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작은아버지 둘째 딸, 경기도 하남시에 사는 제 사촌여동생’ 동네 분이 소개해준 여자 분을 만나게 됐습니다. 대학교를 졸업한, 경기도 이천이 고향으로 고향에서 사는 분이었습니다.
제가 이천으로 가, 찻집에서 만남을 갖게 됐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 여자 분은 표정이 굳은 채 제게 “혹시 고향이 남도세요?” 물었습니다. 제가 15 년 다 돼 가는 서울생활을 하면서 쉽게 고치지 못한 그 놈에 ‘거시기’와 ‘불어(버려)’라는 말 때문이었습니다.
“남도라면 경상남도도 있고 전라남도도 있는데, 전라남도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예. 전라남도나 전라북도···.”
“예. 전라남도 목포입니다.”
“예!? 중매하신 분은 전라도 사람이라는 말을 안 해 주고, 서울 사람이라고만 하셨는데···.”
여자 분은 깜짝 놀라며 말했습니다. 말줄임표는 “그것도 빨갱이 김대중 대통령을 키운 전라도 목포라고요?”라는 말일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말했습니다.
“만약에 제 고향이 전라도라는 것을 아셨다면, 오늘 이 자리에 안 나오셨을 겁니까?”
“예.”
“전라도 사람들 때문에 인형(가명) 씨 집안이나 인형 씨가 직접 피해 입은 일은 없을 것 같고, 왜 안 나오셨을 겁니까?”
“······.”
“혹시 전라도 사람들 빨갱이 이미지 때문입니까?”
“예에?!”
“놀라실 필요 없습니다. 그냥 편하게, 솔직하게 말씀 하시면 됩니다.”
“예. 제가 사는 고향 분들은 전라도 사람들을 빨갱이로 말하거든요.”
“예.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근데 혹시 고향 분들이 애독하는 신문이 {조선일보}입니까?”
“예에?! 그걸 어떻게 아세요?”
“그러면 혹시 인형 씨도 지금 {조선일보} 봅니까?”
“예.”
1985년에 서울에 올라와 서울 생활을 하면서, ‘전라도 말을 쓰는 나를 이상한 눈초리와 함께 멀리하려는 서울 사람들 행동’을 알고, 곧바로 서울 말씨를 배우는 일에 힘을 썼던 아픔, 슬픔이 생각나는 만남이었습니다. 또한 전문대를 졸업하자마자 4 녀 3 남을 둔 경상도 집안 장남과 결혼해, 시댁 식구들 “시집올 때 혼수 하나 해 오지 않는 전라도 거지새끼”라는 말이 듣기 싫어 젖소 농장에서 밤낮으로 노예처럼 일하고, 시어머니 “전라도 깽깽이 자식이라서 저런다.”는 말이 듣기 싫어 시어머니 말씀에 순종하고 살다가, 결국에는 1994년 스물일곱이라는 꽃다운 나이에 아들 삼 형제를 남겨두고 이 세상을 떠난 ‘작은 아버지 셋째 딸, 제 사촌여동생’이 생각나는 만남이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대학교까지 나왔다는 이 여자 분이 결혼을 해서 자식을 낳아 자식에게 전라도 사람들에 관한 교육을 한다면, 어떤 교육이 시작될까요? 이른바 “밥상머리 교육”이 시작될 것입니다.
밥상머리 교육···. 제가 활동했던 사진 동호회 사이트에서 알게 된 청년이 있습니다. 고향이 경상북도 영주로 전라도 광주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청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명박 정권 들어서자, 이 청년은 이 사이트 {자유게시판}에서 정치 이야기만 나오면, 자기가 부모에게 받았던 밥상머리 교육을 거론하며 극우 이념을 가진 사진 동호회 회원들을 공격했습니다. 이 청년 이야기를 적자면, 대략 아래와 같습니다.
저는 경상북도 영주가 고향으로 광주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발령이 광주로 나자, 경상도민으로서 저는 전라도민 지역감정을 생각하며 광주에서 생활할 일이 암담하기만 했습니다. 제 어머니는 “전라도는 경상도 사람이 살 곳이 절대 못됨으로 직장을 포기하라.”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애써 합격한 직장이라서 쉽게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광주에서 살면서 저는 부모님 밥상머리 교육에 세뇌돼 있었음을 알게 됐습니다. 광주 사람들이 참 정이 많음을 알게 됐기 때문입니다. 특히, 광주 사람들은 타지에서 온 사람들을 따뜻하게 배려해 줍니다. 물론, 광주 사람들 가운데는 타 지역민에게 배타적인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직장에서나 동네에서 겪은 광주 분들은 저를 무척 배려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곳 광주에서 경상도 말을 그대로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제 어머니께 해 드리며 광주에 여행 오시라고 말씀드렸지만, 제가 광주에서 생활한 지가 5 년이 다 돼 가는데, “광주 사람들이 무섭다.”며 광주에 단 한 번도 오시지 않았습니다. 자식이 홀로 자취방에서 어떻게 사나 궁금하실 법도 한데···.
저는 이 청년이 기독교인임을 알고 난 뒤 이 청년과 쪽지를 주고받게 됐습니다. 이 청년 쪽지 중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었습니다.
고향을 갈 때면 이런 잘못된 밥상머리 교육, 전라도민에 대한 편견을 놓고 교회 친구나 학교 친구들에게도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친구들은 무조건 듣기 싫어합니다. 교회 친구에게는 “전라도에서 몇 년간 살다보니 전라도 빨갱이들한테 세뇌를 당했구나.” 하는 말까지 들었습니다.
빨간 덧칠에 이철호 논설위원 식, 즉 “인민 재판대에 오르”거나 “정신병원에 실려가”는 공포심까지 세뇌하는 여론조작, 즉 말장난···. 극우 파쇼 언론들 이런 세뇌로 인한 밥상머리 교육을 받았으니, 이 청년 친구들 생각이나 태도는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ㅡ전라도 자식들이 빨갱이라면, 군대를 간 전라도 자식들은 절대 휴전선과 가까운 최전방에 배치하면 안 됩니다. 전쟁이 터지면 이 빨갱이들 때문에 최전선이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빨갱이 자식들은 후방에 배치해야 합니다. 그런데 전쟁이 터지면 이 빨갱이들 때문에 후방 전선이 무너집니다. 진퇴양난입니다. 이 진퇴양난을 해결하는 방법은···? ‘이 빨갱이 자식들은 아예 총을 가질 수 있는 군에 입대하지 못하도록 법을 제정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적화통일을 막으려면, 제발 이렇게 좀 해 줬으면 좋겠습니다. 이 일에 빨갱이 사냥에 열심인 조, 중, 동이 적극 나서면 더욱 좋겠지요. ㅡ
자녀가 어릴 때부터 전라도 사람들에 대한 공포심을 심어주는 이 밥상머리 교육을 두고 제가 1991, 2년 광주대학교 영어과 3, 4학년을 다닐 때 부산에서 온 급우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를 적고 싶습니다. 그러나 글이 길어지니까 그만둡니다. <참 이상한 투표>를 또 살펴봅니다.
이제 오세훈 서울시장은 깨끗하게 물러나는 뒷모습이 중요할 듯싶다. 표퓰리즘 쓰나미에 맞서 당당하게 한판 승부를 펼친 것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 시드니 해리스는 “비겁한 자는 계산만 하다 출발도 못 하지만, 용감한 자는 도착한 뒤에도 계산하지 않는다.”고 했다. 말을 삼가면서 퇴장할수록 깊은 여운을 남기게 된다. 말로써 변명하는 것은 패자를 더욱 비겁하게 만들 뿐이다.
저에게는 ‘오세훈 서울시장 오기 정치’로 보였던 이번 일···. 그런데 이철호 논설위원에게 “오세훈 서울시장” 이번 행위가 복지 “표퓰리즘 쓰나미에 맞서 당당하게 한판 승부를 펼친 것으로 충분한 가치가 있”는 일이라면, 저는 ‘“한판 승부”사師 오세훈 서울시장을 반대한 서울 시민 행위는 이명박 대통령과 오세훈 서울시장 삽질 표퓰리즘 폭우에 한판 승부를 펼친 가치 있는 일’로 생각합니다. 물론, 저에게는 가치 있는 일로서 서울 시민 행위에 “당당하게”라는 말도 쓰고 싶습니다. 그러나 쓰지 않겠습니다. 그럴지라도, 빨간 덧칠이라는 “농간”에 능수능란한 권모술수가 이철호 논설위원에게 이런 말은 해 주고 싶습니다.
“불도저처럼 용감한 자는 계산을 않고 출발하지만, 도착한 뒤에는 계산하지 않는 결과로 생긴 하늘의 뜻 때문에 고개를 숙이고, 악어의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어야만 한다.”
물론, 제 이 말에, 이 글을 읽는 분들께서는 오세훈 서울시장을 떠올리시겠지요. 우면산 산사태 참사 책임을 국방부나 산림청에 떠넘기려는 자세를 보임으로써 “비겁한 자”였던 오세훈 서울시장을···.
이런 비겁했던 오세훈 서울시장을 두고 “정치판의 거목”이라뇨? 물론, 저는 ‘오세훈 서울시장이 이번 패배와 서울시장 시절 실책을 반면교사로 삼는다면 “정치판의 거목”이 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합니다.
“서울 강남 제4구”라는 서울 중랑구···. 서울 중랑천 옆에 있는 중랑구는, 중랑천 둑이 약간 무너져 중랑천 바로 옆 동네들, 묵 2동, 중화 2동이 물에 잠긴 적은 있어도, 중랑천과 먼 곳으로 지대가 높은 동네 도로는 여태껏ㅡ제가 중랑구에서 살았던 동안ㅡ 물에 잠긴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폭우 때 신내동 쪽 도로가 물에 잠겼다는 뉴스를 봤습니다. ㅡ신내동은 지대가 높은 곳으로, 제가 이곳으로 이사 오기 전 살았던 동네입니다.ㅡ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정치판의 거목”으로 크기 위해 이 뜨거운 상징을 깨달을 수 있다면···.
제 글이 거의 마지막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다음과 같은 이철호 논설위원 글은 참 마음에 드는 글입니다.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 명언은,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말을 욕 먹이는 이철호 논설위원 같은 우리나라 지식인들과 부자들에게 제가 해 주고 싶은 말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존 F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이 와도 먹혀들 분위기가 아니다. “국가가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묻지 말고, 당신이 국가를 위해 무얼 할지 물어보라”고 했다간 정신병원에 실려 가기 십상이다.
“정신병원”이라는 말을 굵은 글씨로 씁니다. 또한 빨간 덧칠을 합니다. 느낌표도 칩니다.
“정신병원”!!!
그런데 미국인 대다수는 ‘정부는 곧 국가다.’는 생각이 강합니다. 그리고 프랑스인 대다수는 ‘정부가 곧 국가는 아니다.’는 생각이 강합니다. ⇐ 제 이 평가는 수 년 전 ‘홍세화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를 읽고 제가 내린 결론입니다.
그러므로 프랑스인 대다수는 소수 의견일지라도 그 의견이 옳을 때는, 즉 사회정의를 위한 의견일 때는 이를 존중합니다. 이때 대다수 프랑스인에게서 국가는 그 소수입니다. ‘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까?’ 고민하는 대다수 프랑스인 각 개인은 이 국가를 위해 적극 지원합니다. 알베르 카뮈 “사회정의가 질서에 우선한다.”는 말을 명언으로, 프랑스의 긍지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 프랑스인들 긍지는 1995년 11월 12월에 있었던 프랑스 공공부문 노동자들 총파업에서 잘 드러납니다. 또한 1996년 11월에 있었던 프랑스 트럭운전사들 파업에서 잘 드러납니다.
철도, 지하철, 버스, 공공부문 노동자들 총파업은 3 주라는 기간 동안 프랑스 전역 대중교통을 멈추게 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같으면 난리가 날 일입니다. 그러나 이때 대중교통의 고마움을 깨달은 프랑스인 대다수는, 프랑스 정부가 아닌, 공공부문 노동자들 손을 들어 줬다고 합니다.
트럭운전사들 파업은, 파업 1 주일을 넘기자 프랑스 주요 도로들은 마비가 돼 물류를 막히게 함으로써, 일부 학교는 난방을 할 수 없어서 휴교를 하거나 조업을 중단하는 공장들이 속출하는, 이런 여러 불편이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같으면 난리가 날 일입니다. 그러나 이때도 프랑스인 대다수는, 정부가 아닌, 트럭운전사들 손을 들어 줬다고 합니다. 물론, 그들 파업을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일로 봤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제 평가로는, 트럭운전사들이 소수일지라도 그들 의견이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일일 때는 대다수 프랑스인들은 그들을 국가로 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때 프랑스 땅에서 발이 묶인, 프랑스인처럼 시민(Citoyen: 능동 시민)이 아닌, 영국 신민(수동 백성)으로서 영국 트럭운전사가 했던 말이 있다고 합니다.
“프랑스 경찰은 도대체 뭐하고 있는가? 우리나라였다면 바로 첫날에 경찰이 출동했을 것이다.”
또 되풀이하는 말입니다만, “{중앙일보}는 {조선일보}와 우리나라에서 1등을 다투는 신문이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여론을 1등으로 이끌어간다.”는 {중앙일보}, 그 신문사 논설위원이 이런 ‘해괴망측한 논설’로, ‘말장난을 친 없는 말’로 여론을 왜곡해 많은 사람들을 오도誤導하는 일의 천재라는 점에서 저는 ‘우리나라 앞날이 참 캄캄하기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ㅡ그러므로 저는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지난 일을 반면교사로 삼아서 “정치판의 거목”으로 크게 자라나려고 한다면, 말장난을 친 없는 말로 여론을 왜곡해 사람들을 오도함으로써 우리나라 앞날을 어둡게 하는 이런 농간자, 이런 농간 언론들을 멀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ㅡ
특히나 ‘조, 중, 동이라는 극우 파쇼 언론들이 이명박 정부 미디어법 통과로 텔레비전 종합편성 채널에 참여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앞날이 더욱 암담하기만 합니다. 이 미디어법 통과를 위해 서울 중랑구에 있는 ‘김홍도 목사(?) 금란교회’는 철야기도까지 했습니다.
ㅡ프란시스 쉐퍼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조작과 새로운 권위주의(New Elite)]에서 매스미디어 문제를 다룹니다. ‘이명박 정부 미디어 법 통과가 가져올 수 있는 결과는 무엇일까?’를 살펴보기를 바라는 분께서는 이 책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ㅡ
하나님은 부자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물론, 빈자의 하나님도 아니십니다. 그러나 부자들에게 빈자들을 살피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하나님은 부자들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부자들은 서울 제자교회 정삼지 목사(?) “내가 개척한 교회 (예산) 내가 마음대로 하는데”라는 식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아닌지···. 우리는 ‘우리나라 부자들은 “내 영혼아, 편히 쉬고 즐거워하자.”는 사람들이 아닌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이 점을 생각하면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거지 나사로와 부자 비유>를 곁들어서 생각하면 좋을 것입니다. 이 점을 생각하면서 사회정의를 교훈하는 성경 [아모스]서 주제 하나도 생각하면 좋을 것입니다.
이 글을 쓰면서 지역감정 때문에 이 세상을 떠난 제 사촌여동생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사촌여동생 남편, 제 매제를 떠올렸습니다.
한 달 보름 전이었습니다. 매제가 서울에 있는 제 큰형님 가게에 왔다고 합니다. 제 사촌여동생 장례식 뒤 첫 방문이었습니다. 때마침 목포에서 오신 제 어머니께서 가게 사무실로 들어오시자, 매제는 사무실 바닥에서 큰절을 올린 뒤, 큰절 자세 그대로 펑펑 울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그 자리에 있었던 제 막내 남동생 친구, 저와 함께 일을 하는 일꾼에게 들으며 ‘그동안 얼마나 한 많은 세월을 보냈을까?’ 하는 생각으로 눈물을 흘렸습니다.
매제는 큰형님 가게를 오자마자 저를 찾았다고 합니다. 한 많은 세월을 살았을 매제를 위로해 주고 싶기도 하고, 이제 청년이 돼 “엄마가 어떤 분이셨는가 알고 싶어 한다.”는 세 조카도 만나고 싶은 마음으로 매제에게 연락을 하고 싶지만, 매제를 만나거나 조카들을 만나면 저 역시 펑펑 울 것 같아서, 연락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사촌여동생 장례식 뒤 조카들이 잘 크기만 바라며 가슴에 묻어 버렸던 일이었기 때문에···.
다음은 이 글 결론입니다.
인류 역사 시작 이후 맨 처음 말장난을 했던 존재는 누구였습니까? 사탄이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비트는 말장난으로 없는(無 거짓) 말을 만들어 하와를 시험(오도)함으로써 인류의 역사, 땅의 역사를 허무(거짓) 역사로 만든 사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말장난을 누가 이어받았습니까? 물론, 사탄의 말장난, 없는 말에 속아 넘어간 아담, 그의 후손들입니다. 그러므로 ‘저 역시 이런 나쁜 말장난을 이어받은 사람이며 이런 말장난에 쉽게 속아 넘어갈 수 있는 사람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그 속성상 이철호 논설위원 류 나쁜 말장난, 농간에 쉽게 속아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빨간 농간에 넘어간 결과 하나는 제 사촌여동생 같은 죽음을 낳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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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마치면서, ‘한겨레신문사’에서 1999년에 펴낸 ‘홍세화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에 적힌 글들을 이 글 <부록>으로 인용합니다. 프랑스 민주주의에 관심이 없는 분들께서는 이 인용글을 읽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분들께서는 ‘“이방인에게도 주신 하나님의 은사를 감사치 않는 죄를 범해서는 안 된다.” 하신 칼빈 선생님 관점’과 ‘하나님의 일반 은총을 결코 필요 이상으로 격상하지는 않으셨던 칼빈 선생님 관점’에서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부록
한국에서 아이엠에프 이후 어려운 시기였는데도 1 년 동안 고위관료 83%와 국회의원 62%의 재산이 오히려 늘었다. 국민들이 고통 받고 있는 동안에 이른바 국민의 공복(고위관료)과 국민의 대표들은 부富를 늘렸던 것이다. 이것이 한국에서 주장하고 있는 “고통분담” 실상이다.
프랑스에서 ‘고통분담’이라는 말 따위는 나오지 않는다. 그런 말을 꺼냈다가는 당장 “누구의 고통을 누구에게 분담시키자는 말인가?”라는 반발을 들어야 하기 때문에 위정자가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애당초 그런 말을 꺼내지 않는다. 반면에 ‘사회정의’라는 말은 끊임없이 나온다. 정치인들이 벌이는 토론에서 안보나 질서라는 듣기 어렵지만 사회정의라는 말은 빠지는 일이 없다.
{르 몽드}의 도쿄 특파원인 필립 퐁스는 {르 몽드} 1999년 2월 26일자 판에서 김대중 정부 ‘시장경제와 민주주의 병행 발전’에 대해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은 시장경제와 민주주의가 함께 나아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란 시장경제가 실현할 수 없는 사회정의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프랑스인 눈이 곧바로 “민주주의는 사회정의를 전제로 하는 것”이라고 말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 사회에서 부정부패, 정경유착, 권언유착, 각계각층 비위는 한국에 비해 그 정도도 미미하거니와 그런 것들은 사회정의 문제가 아니라 당연한 법 적용 대상이 될 뿐이다.
프랑스 젊은이들에게 법이 담고 있는 의미란 ‘이미 획득된’ 사회정의일 뿐이어서 결국 기존체제를 유지하는 장치가 된다고 파악하고 있다. 한마디로 법은 사회정의 편이 아니라, 기존질서 편인 것이다.
프랑스에서 얘기되는 사회정의는 논의 범위가 넓은 만큼 그 개념 규정을 간단히 말하기 어렵다. 내 능력을 벗어나기도 하거니와 이 글에 적합하지도 않다. 여기에서는 다만 “사회 안에서 사유권이 중요하다면 사회구성원들이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는 더 중요하다.”는 주장이 그 핵심이며 공통분모라는 것만 말하고 넘어가기로 한다. 실제로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는 거의 모든 나라의 헌법에 ‘사유권 보장’보다 더 중요하게 취급하고 있다. 대한민국 헌법도 예외가 아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한국 법률종사자들은 이 헌법 정신조차 제대로 천착하지 않았다는 얘기가 되는 것이다.
한국 사회나 프랑스 사회나 기득권층과 비 기득권층이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두 사회가 이처럼 서로 다른 까닭은 프랑스 기득권층에는 정치적 신념으로 자신의 계급적· 계층적 이해관계를 떠나 사회정의를 택하는 사람들이 많은 반면에, 한국에서는 거꾸로 비 기득권층 중에서 질서(안보)를 택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1981년에 프랑수아 미테랑이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사회정의가 없는 곳엔 질서도 안보도 없다”고 말한 것도 이런 프랑스 사회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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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um} 카페 {양무리 마을}에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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