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씨의 원조(元祖)는 신라의 전신인 사로(斯盧:서라벌)의 6촌(村) 중의 돌산고허촌 사량부(突山高墟村 沙梁郡)의 촌장 소벌도리(蘇伐都利)시고. 《삼국유사》에 6부(部) 촌장들은 모두 천강인(天降人)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 6촌에 6성(李 崔 孫 鄭 裵 薛)을 각각 사성(賜姓)한 것이 32년(신라 유리왕 9)의 일로 기록되어 있다.
실질적인 시조(始祖)는 신라 말기의 대 문장가인 최치원(崔致遠 : 24세손)이시다.
오늘날 거의 모든 최씨의 관향(貫鄕) 분파가 최치원을 1세로 하는 경주최씨에 그 연원을 두고 있다. 동성이관(同姓異貫)을 보면 42관향(貫鄕)있다. (가나다 순)
강릉(江陵)-필달(必達), 강화(江華)-익후(益厚), 개성(開城)-우달(佑達), 경주(慶州)-치원(致遠), 계림(鷄林)-윤순(允順), 고죽(孤竹)-치(峙), 광양(光陽)-산두(山斗), 괴산(槐山)-세진(世珍), 대영(大寧)-자염(子廉), 동주(東州)-준옹(俊邕), 등주(登州)-기열(基烈), 삭영(朔寧)-유가(愈嘉), 상원(祥原)-무철(武哲), 수원(水原)-상저(尙翥), 수성(隋城)-영규(永奎), 신풍(新豊)-만강(萬江), 안동(安東)-광윤(光胤), 양주(楊州)-정안(井安), 양천(陽川)-관(灌), 영암(靈岩)-홍의(洪儀), 영천(永川)-한(漢), 영흥(永興)-천보(天甫), 용주(龍州)-광(光), 우봉(牛峯)-원호(元浩), 전주(全州)-균(均), 정주(貞州)-인조(仁祖), 죽주(竹州)-서(湑), 직산(稷山)-홍재(弘宰), 진산(珍山)-개(漑), 천영(川寧)-흥(興), 철원(鐵原)-석(奭), 충주(忠州)-우청(遇淸), 탐진(耽津)-사전(思全), 태인(泰仁)-인길(仁吉), 통천(通川)-록(祿), 풍천(豊川)-언영(彦英), 하양(河陽)-흥윤(興潤), 하음(河陰)-자창(自暢), 한남(漢南)-홍연(洪衍), 해주(海州)-온(溫), 화순(和順)-언(堰), 흥해(興海)-호본(湖本)을 각각 시조로 모시고있다. 그러나 모든 최씨가 소벌도리와 최치원을 잇는 신라인의 후예가 된다는 데에는 이론이 없는 것 같다. 신라 말기의 치원(致遠), 승우(承祐), 언위(彦僞) 등 3인이 똑같이 당(唐)나라에 유학, 과거에 급제하고 돌아와 문명(文名)을 날려 ‘일대 삼최(一代三崔)’라 불리었다. 1995년 통계청의 자료에 의하면 최씨는 45만 4696가구에 김(金), 이(李), 박(朴)씨 다음으로 인구가 많은 191만 3,322명이 있다는 통계가 나왔다.
강릉최씨(江陵崔氏)
고려초에 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 삼한벽상개국찬화공신(三韓壁上開國贊化功臣)에 책록되어 영첨의좌정승(領僉議左政丞)을 역임한 후 914년 경흥부원군(慶興府院君)<당시 강릉지명이 경흥(慶興)>에 봉해졌던 충무공(忠武公) 최필달(崔必達)을 시조로 하고 있다.
경주최씨의 시조 치원의 후손인 승로(承老)의 증손이시다.
1,100여년의 역사를 갖은 강릉최씨의 가문의 대표적인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충무공(忠武公) 필달(必達)의 증손이신 숭언(崇彦)이 고려 때 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 명주부원군(溟州府院君)에 봉해졌으며, 13세손이신 한주(漢柱)는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 대중대부(大中大夫)로 종정경(宗正卿)과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내고 명주군(溟州君)에 봉해졌으므로 필달(必達), 숭언(崇彦), 한주(漢柱) 이 세분을 강릉 최씨가 자랑하는<삼군(三君)>이시다.
황산사(篁山祠) 시조 휘 필자달자(必達)사당
강릉시 운정동 전440-2 다례 3월 중정(仲丁)일
고려 말에 정선군수(旌善郡守)를 지내고 중정대부(中正大夫)로 삼사좌윤(三司左尹)을 역임했던 동강(東崗) 원량(元亮)의 손자이고 국자생원 안린(安麟)의 아들 치운(致雲)은 조선 전기의 명신(名臣)으로 세종(世宗) 때 훌륭한 치적(治績)을 남기셨다. 고려의 국운이 기울어가는 1390년(공양왕2) 6월 19일 강릉에서 태어나신 조은(釣隱) 치운(致雲)은 조선 태종(太宗)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세종(世宗) 원년(元年)에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를 시작으로 벼슬길에 올라 여러 주요관직을 두루 역임하며 덕망(德望)과 식견(識見)을 인정받아 국정(國政)을 논할 때마다 왕(王)의 자문에 응했고, 다섯 차례나 명(明)나라를 다녀오면서 많은 외교적인 업적을 남기셨다. 특히 조은(釣隱)은 왕명(王命)을 받아 [대명률(大明律)]을 참고로 [무원록(無寃錄)]을 주해(註解)해서 위로는 형조(刑曹)로부터 아래로 군옥(軍獄)에 이르기까지 억울한 옥사(獄事)가 없도록 하였고, 천성이 청백하여 왕이 내려준 전답(田畓)과 노비를 일곱 번이나 사양 하셨다고 한다.
평소에 술을 좋아하셨는데, 세종이 그의 건강을 걱정하여 친필(親筆)로 계주(戒酒)의 어찰(御札)을 내려 주었다.
조은은 그 어찰을 벽에다 붙여 두고 출입할 때마다 경계하였는데, 어쩌다가 바깥에서 폭음(暴飮)을 하고 오는 경우, 부인이 머리를 들어 주면서 어찰이 붙은 벽을 가리켜 보이면 취중에도 번번이 사죄(謝罪)하는 모습을 지었다고 하며, 술이 깨면 "내 임금의 은혜에 감읍하여 술을 경계할 것을 늘 마음속에 두었으나 다만 술을 만나면 전날의 경계를 갑자기 잊어버리고는 취하기에 이른다."고 하였다 한다.
치운(致雲)의 둘째 아들 응현(應賢)[수헌공파조(睡軒公派祖)]은 단종(端宗) 때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에 임명되었으나 고향에 계신 노모(老母)의 봉양을 위하여 강릉 훈도(江陵訓導)에 머무르다가 세조(世祖) 때 강원도 도사(江原道都事)직을 억지로 받게 되자 6년의 의무기간 동안 고향 근방의 수령(守令)직을 주청(奏請)하여 영월(寧越)과 고성(高城)을 맡아 목민관(牧民官)의 임무를 다했다.
삼현비각(三賢碑閣)
(17세 조은 휘致雲, 18세 수헌 휘應賢, 20세 원정 휘壽峸)
강릉시 대전동 산108
1480년(성종11) 모친상을 당하자 여막(廬幕)을 짓고 3년 동안 시묘(侍墓)하면서 한번도 집에 내려오지 않았으며 3년상을 마치자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 승정원 부승지(承政院副承旨), 예조 참의(禮曹參議), 충청도 관찰사, 대사헌(大司憲), 경주부윤(慶州府尹),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 등을 역임했다.
17세 釣隱公 諱致雲 配貞敬夫人江陵咸氏墓
강릉시 대전동 산121 향사 3월15일
한편 응현(應賢)의 셋째 아들로 1504년(연산군10)에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했던 세절(世節)[매창공파조(梅窓公派祖)]은 당시 폭군의 난정이 극심하였던 시대라 억울하게도 그 해에 등과(登科)한 이들의 발표가 보류된 채 중종반정(中宗反正)을 맞았다. 중종(中宗)이 즉위하자 그는 성균관 유생이 중심이 되어 <신(臣) 등은 등과(登科) 출신으로서, 비록 얼마 안 되는 효(效)도 남기지 못했다 하더라도 문반(文班)의 일원(一員)으로서 갖출 바를 갖추고 그 이력(履歷)을 쌓은 지는 오래입니다. 오늘날 방(榜)을 파(罷)하고 직(職)을 거두어 한 포의지사(布衣之士)가 되었으니 새삼스레 유관(儒冠)을 쓰고 성균관에 나가려 하여도 후배들의 비웃음거리가 될 것이고 물러나서 밭이랑에 엎드리려 하여도 평화로운 세상에 버린 물건이 될 것이 뻔하온데…….>로 시작되는 장문(長文)의 상소(上疏)를 올려 왕으로부터 인정을 받아 장원급제를 추인(追認)받게 되었다. 그 후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을 시작으로 벼슬에 올라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을 거쳐 호당(湖當)에 뽑혔으며 이조 정랑(吏曹正郞)과 지제교(知制敎), 좌우부승지(左右副承旨), 황해(黃海)와 경상도 관찰사 등을 역임한 후 대사헌(大司憲),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 형, 호조(刑戶曺)의 판서(判書)를 지내셨다.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의 고제(高弟)로 학문이 뛰어났고 문장과 서예, 미술, 음악 등에 출중하여 <사절(四絶)>이라 불리웠던 휘 수성(壽성)[문정공파(文正公派)]은 어려서부터 의지와 기개가 남달리 고매하고 지혜가 뛰어나서 19세 때 이미 문예(文藝)에 일가(一家)를 이루었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다. 일찍이 기묘사화(己卯士禍)의 원흉(元兇)이었던 남곤(南袞)이 산수도 한 폭을 김정(金淨)에게 보내어 화제를 요구해왔다. 마침 수성이 김정의 집을 방문했다가 이를 보고 그 위에 쓰기를 <떨어지는 해는 서산으로 내리고 외로운 연기는 먼 나무에서 나온다(落日下西山 孤烟生遠樹), 복건 쓴 서너 사람 망천의 주인은 누구인고(幅巾三四人 誰是輞川主>라고 하였다가 남곤의 원한을 사게 되었다. 기묘사화가 일어난 후 수성은 시국 형편에 강개하여 승지(承旨)로 있던 숙부(叔父) 세절(世節)[매창공파(梅窓公派)]에게 "세사가 이같이 되어 가는데 굳이 벼슬하여 무엇을 구하고 져 하시오. 안전하게 산수간(山水間)에서 여생을 보전하는 것만 못할 겁니다."하며 다음과 같은 시(詩)를 보냈다.
<해 저문 창강 위에 날은 차고 물결이 절로 이네(日暮蒼江上 天寒水自波), 외로운 저 배 일찌감치 대여라 밤이 오면 풍랑이 높아지리(孤舟宣早伯 風浪夜應多)> 1519년(중종14) 안처겸(安處謙) 일당이 일으킨 신사무옥(辛巳誣獄) 때 수성은 간신들의 모함을 받아 끝내 극형에 처해졌다. 1521년(중종16) 10월 21일 진시(辰時)에 처형되니 이 때 수성의 나이는 35세였다. 수성의 제자 이달형(李達亨)이 발(簾)로 시체를 염습하여 산골에 임시로 가매장하고 밤에 그 옆을 지키고 있었는데 꿈에 수성이 나타나 <적막한 내 무덤을 뉘라서 찾아오리, 처절한 원숭이 소리나 벗하련다, 발에 싸여 온 후, 멀리 시체 덮어준 그 사람을 생각하노라>하는 시(詩)를 읊었다고 한다.
猿亭公 휘壽성 親筆
임진왜란 때 28세로 백의창의(白衣倡義)하여 전공을 세웠던 배천(配天)[경성파(鏡城派)]은 선조(宣祖)로부터 어의(御衣)와 망건(網巾)을 하사받고 회령 교수(會寧敎授)와 사복시 첨정(司僕寺僉正)을 역임했다. 세절(世節)의 증손이며 수성(壽성)의 손자인 기벽(基벽)[매창공파(梅窓公派)]은 광해군(光海君) 때 박사(博士)로서 태학(太學)인 성균관에서 교수(敎授)하고 있을 때 영창대군(永昌大君:선조의 아들, 인목대비의 소생)을 서인(庶人)으로 만들어 강화도에 위리 안치시키고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대궐에 나아가 "삼강(三綱)이 끊어지고 구법(九法)이 무너졌나이다." 하며 극간(極諫)을 하였고, 조카 문한(文漢)으로 하여금 당시 전횡을 일삼던 이이첨(李爾瞻) 일당의 목을 베라는 항소문(抗疏文)을 올리도록 하였다가 동생 기백(基백)과 함께 성균관에서 퇴관당하여 향리인 원주로 내려갔다가 인조반정(仁祖反正) 후에 억울함이 풀렸다. 그의 아들 4형제가 모두 현달하여 강릉 최씨를 더욱 빛냈는데, 맏아들 문오(文澳)는 군수(郡守)를 거쳐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을 역임했고, 차남 문활(文活)은 군수를 지내고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으며, 셋째 문발(文潑)은 세속의 명리(名利)를 초탈하고 시주(詩酒)와 더불어 보내며 595수(首)의 주옥같은 시(詩) 3권 2책에 담은 [취석시집(醉石詩集)]을 남겼다. 막내 문식(文湜)은 1630년(인조8) 중형인 문활(文活)과 함께 문과에 급제하여 지평(持平)을 거쳐 헌종(憲宗) 때 장령(掌令)과 헌납(獻納)을 지내고 숙종조(肅宗朝)에 황해도 관찰사, 승지(承旨), 대사간(大司諫), 예조참판, 도승지(都承旨)등을 역임했다. 이밖에 문과(文科) 37, 무과(武科) 99, 호당(湖堂) 2, 책훈(策勳) 16, 원사(院祠) 11, 효행(孝行) 34, 열행(烈行) 31, 연원(淵源) 19등 화려한 업적을 남기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