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에 들어간 김지회 부대의 12연대 공격
여수에 있던 반란군은 진압군과 아무런 충돌 없이 광양을 거쳐 백운산에서 지리산 화엄사 옆 문수골로 들어갔다. 지리산으로 들어간 김지회 부대는 12연대를 공격했다. 12연대의 김두열 소위 중대 90여 명이 반란군에 의해 생포되었다. 탈출한 성찬호 상사의 보고에 의하면, 김지회와 내통한 이장과 마을 사람들이 환영식을 해 준다는 명목으로 소를 잡고 12연대원들에게 술을 잔뜩 먹여 취하게 되자, 단 5분 만에 그들을 생포했다는 것이다.
이 일로 제 12연대는 병력 보충을 요청했고, 김희준 대위가 지휘하는 제 2대대가 11월 4일 새벽 다시 출동하였으나, 반란군 주력의 행방은 묘연했다. 이날(11월 4일), 북부지구 전투사령부 원용덕 대령은 지휘관 회의를 개최하기로 하고 각 부대장을 남원에 집합시켰다. 명령 전달은 경찰 전화로 했고, 제 12연대장 백인기 중령에게는 구례 경찰서를 통하여 전달되었다. 그런데 구례 경찰서 관내 산동 지서를 점령한 반란군이 경찰 전화를 도청하였기 때문에, 백인기 중령 일행이 남원으로 가다가 반란군에게 기습을 받게 되었다.
12연대장 백인기 중령의 자결
1948년 11월 4일 오후 3시 30분, 12연대장 백인기 중령이 헌병 1개 분대의 경호를 받으며 산동면 지서를 지나 고개를 넘으려 할 때(오후 4시경), 매복해 있던 반란군 100여 명의 갑작스러운 집중 사격을 받았다.
도망쳐 온 헌병의 진술에 의하면, 백인기 연대장은 자동차를 방패삼아 권총으로 응전했으나, 헌병 분대장이 먼저 도망치기 시작했고 백 중령은 근처 산에서 구원을 기다리려고 했으나, 헌병들이 연대장을 버린 채 뿔뿔이 도망쳤다. 6명이 사살 당하고 몇 사람은 탈출했다.
혼자 남은 백 중령은 후퇴했으나, 반란군 약 1개 소대가 계속 그를 추격했다. 탈출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백 중령은, 부근에 있는 농가에 들어가 자신의 신분을 밝힌 후 시신을 국군이 오면 인도하여 달라고 유언을 하고 권총으로 자결했다. 백인기 중령의 자결 시간이 오후 5시경이므로, 백인기 중령은 약 1시간 가까이 혼자서 버틴 것이다. 반란군은 백 중령을 생포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백인기 중령이 오후 5시가 되어도 소식이 없자, 구례에서 1개 중대가 연대장의 진로를 따랐고, 4일 밤 남원에 무사히 도착했다. 11월 5일, 연대장을 찾기 위해 구례에서 남원으로 가던 첨병중대 제 5중대의 선두차가 불의의 집중사격을 받았다. 제 5중대 대원 대부분과 작전주임이 포로로 잡혔다. 뒤따라오던 대대장 김희준 대위는 팔에 관통상을 입었으나 대대주력에게 구출되었다. 반란군은 제 5중대원 70-80명을 잡아 산 속으로 숨었다. 이 전투에서 전사자 50여 명, 부상자 50여 명 등이 발생했다.
백인기 중령의 자결 장소는 구례군 산동면 시상리 대나무 숲이었으며, 그때 나이 25세였다.
그는 위국감사(爲國敢死: 나라를 위하여 용맹스럽게 목숨을 바침)를 통솔이념으로 삼았다고 하니, 평소 자신의 지론을 실천한 것이다. 대나무 숲 옆에 그의 현충비가 세워져 있다.
반란군의 구례 기습
11월 4일, 12연대가 대패하고 백인기 연대장이 자결한 사건은 대한민국이 곧 전복되는 것이 아닌가 할 정도로 국군에게 위기감을 주는 큰 사건이었다. 당시 제주도에서는 11월 2일에 9연대의 6중대가 남로당 폭도들의 공격을 받은 상태였다.
백인엽 부연대장은 김지회가 오면 덮치기로 하고 구례초등학교에 집결해 있었다. 그런데 김지회 또한 머리를 써서 1948년 11월 7일, 반란군 90명에게 400원씩 여비를 주면서 중대장 김두열 소위를 앞장세워 보냈는데, 12연대가 해이해질 때 공격하려고 한 것이다.
백인엽은 김지회가 보낸 반란군 90명을 잡아 조사를 마친 후, 군법 처벌과 진압군으로 복귀 중 선택의 기회를 주었고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진압군으로서 명예를 회복하겠다고 하였다. 8일 새벽 4시, 김지회 부대가 구례 읍내로 침투하여 백인엽 부대를 기습 공격하였다.
공격을 받자 부연대장 백인엽 소령은 부대를 진두지휘하여 송호림 중위와 함께 직접 박격포(81m) 8문을 가지고 봉성산을 사격을 가했고 각 중대도 김지회 부대를 역습하였다. 김지회 부대는 박격포의 집중사격으로 혼란에 빠졌고, 각 중대의 과감한 공격으로 역포위되자 일제히 퇴각하였다. 백인엽 소령은 포로 되었다가 돌아온 김두열 소위 이하 90명 대원들에게 돌격을 명령하였고, 이들은 과감한 돌격전을 감행하여 적의 퇴로를 차단했고, 각 중대와 협동하여 포위망을 압축하여 섬멸하였다. 결국 김지회 부대는 30여 명의 사상자를 내었고 20여 명은 포로로 잡혔으며 나머지는 도망쳤다. 김지회는 대패한 후 지리산 속 아지트로 숨어 버렸다.
1948년 10월 27일 진압군이 여수를 탈환함으로써 사건 8일 만에 반란은 일단 진압되었지만, 상당수의 반란군 잔여 병력이 지리산 일대로 도주하였다. 진압군에 쫓긴 반란군은 게릴라 부대 곧 빨치산으로 변모하였다. 진압군의 작전은 여수 순천의 신속한 탈환이란 점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지만, 여수 순천 탈환 속도에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반란군들이 산속으로 스며들 퇴로를 열어주게 되어, 이후로 정부의 오랜 골칫거리였던 지리산 빨치산이 만들어지게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