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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대에만 쓰는 영주권
변호사로부터 잠적하는 것밖에 별 뾰족한 수가 없다는 얘기를 들은 뒤 나는 은행으로 갔다. 우선 타지방으로 떠나려면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은행에도 이미 이민국의 손이 뻗혀 있었는지 정부지시로 출금이 안된다는 것이었다.
집에 들어가기도 불안해진 나는 낭패한 마음으로 며칠을 모텔에서 지냈다. 다시 은행을 찾아가 이번엔 5백불만 출금신청을 했더니 어쩐 일인지 돈을 주는 것이었다.
다음날 나는 나머지 돈을 마저 찾은 뒤 로스앤젤레스행 비행기를 탔다. 떠나기 전에 타고 다니던 밴은 아직 융자금을 덜 갚은 터라 융자를 받았던 저지시티 은행의 주차장에 세워두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스운 짓이었지만 미국생활을 잘 몰랐던 당시에는 그 차를 어떻게 처분해야 할지 묘안이 떠오르지도 않았고 그럴 여유도 없었다. 뒤에 알게 된 얘기로는 그 동안 꼬박꼬박 불입되던 모기지가 안 들어오자 은행이 차를 압류하기 위해 추적을 했는데 며칠만에 문제의 차가 바로 자기 은행 주차장에서 발견되어 그 은행의 관계자들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고 한다. 뒤에 얘기가 나오지만 그런 일 하나하나가 미국에선 훗날에 좋든 나쁘든 작용을 한다. 그게 아마 신용사회라는 게 아닌가 싶다.
나는 때때로 어려운 상황을 빠져나가기 위해 거짓말도 하고 옳지 않은 일도 한 적이 있다. 그러나 내 이득을 위해 다른 개인에게 피해를 입히는 일은 삼가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내가 할 수 있는 성의를 다했다. 미국사회는 그것을 대부분 사주는 것 같다.
내가 로스앤젤레스로 떠났던 것은 일단 뉴욕에 더 이상 남아 있을 수 없었기 때문에 로스앤젤레스에 가서 어떻게 해볼 방도를 찾아보다가 여의치 않으면 한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었다.
고생 끝에 좋은 시절을 만났나 싶자 곧 이 지경이 되자 내 운명이란 것이 결국 이런 것이구나, 하는 실의에 잠시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좌절이란 단어와는 생리적으로 거리가 먼 나로서는 실의란 정말 잠시 뿐, 곧 다시 혈로를 찾을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살아오는 동안 별의별 인생을 다 겪어본 나는 항상 최악의 상황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에 예상한 것보다 나쁜 상황이란 있을 수가 없었다.
무작정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한 나는 우선 다운타운의 허름한 모텔에 짐을 풀었다. 로스앤젤레스는 초행길이었기 때문에 지금도 어디쯤이었는지 기억이 안 나지만 한인 가게가 많이 보였던 걸로 봐서 지금은 커다란 코리아타운이 되어있는 올림픽가 근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나는 몇몇 그럴만한 한인업소들을 찾아다니며 그곳의 분위기를 우선 살펴 보았는데 별로 애착이 가는 도시는 아니었다.
그런데 신은 항상 엉뚱한 방향으로 나의 삶을 바꿔놓고는 했다. 어느 날 점심을 먹기 위해 식당에 들렀을 때였다. 주문을 해놓고 기다리는데 바로 옆 테이블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이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미군에 입대할 수 있는 영주권이 있다는 얘기였다. 물론 가짜 영주권을 두고 하는 이야기다. 나는 귀가 솔깃해서 당장 그쪽으로 돌아앉았다.
"언뜻 듣기에 영주권 얘긴 것 같은데 그런 게 있으면 나도 이야기 좀 들어봅시다."
"왜, 미군에 입대할 생각이 있어요?"
"한국으로 돌아갈까 해서 여길 왔는데 기왕 여기까지 와서 길만 있다면야 못 할 것도 없지요."
"그럼 합시다. 2천불 가지고 있어요?"
즉석에서 아주 간단한 흥정이 오갔다. 당장 1천불을 내면 나머지 천불을 영주권과 맞바꾸겠다는 것이었다. 생판 처음 보는 브로커에게 적지 않은 돈을 아무 담보도 없이 맡기는 게 걸렸다.
"못 믿으면 할 수 없는 거지 그게 무슨 증거를 내보일 수도 없는 일이고 어쩌겠수?"
그는 허허 웃으며 배짱을 부렸다.
"꼭 하시려면 믿고 하세요. 그 분은 저희도 아는 분이니까 어디로 사라질 분은 아니에요." 하고 식당 여주인이 거든 것이 결정적인 담보가 된 것은 아니지만 마지막 수단이니 별 도리가 없었다. 일단 5백불을 먼저 주었다. 그는 증명사진과 선금을 받아 넣고 사라졌다.
캘리포니아의 강렬한 태양이 활활 타오르는 대낮. 약속한 거리에 나가 차 속에서 기다리려니 간첩이라도 접선하는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뉴욕과 달리 로스앤젤레스는 대낮인데도 거리가 한산했다. 도시가 펑퍼짐하게 퍼져있어선지 행인들이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이윽고 벽돌 색의 허름한 폰티악이 내차 뒤에 와서 멎었다. 식당에서 헤어진지 두 시간도 채 안 된 시간이었다. 그는 영주권을 건네주었다. 진짜를 본 적이 없으니 얼마나 제대로 만들었는지 아니면 이민국 직원과 짜고 진짜를 만들어온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어쨌든 나는 진짜영주권이나 받은 것처럼 마음이 놓였다. 이제 마음놓고 미국에서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영주권을 받아 쥔 나는 곧바로 모병소를 찾아 나섰다. 미국대륙에 발붙일 데 없는 혈혈단신인 나로서는 다른 데로 딱히 갈만한 곳도 없었지만 무슨 일이든지 마음먹으면 단숨에 해치워야 직성이 풀리는 것이 워낙에 내 성격이기도 했다. 지니고 있던 돈은 아직 넉넉했으므로 렌터카를 타고 시내를 돌아다녔다. 얼른 눈에 띄는 모병소를 다짜고짜 들어갔다. 30대 중반쯤 된 듯한 남미계 남자가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 아침 편리한 시간에 와서 시험을 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난생 처음 치러 본 필기시험에서 나는 보기 좋게 낙방했다. 영주권만 받아 쥐면 저절로 입대하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다. 게다가 다시 시험을 보려면 두 달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다시 렌터카를 몰고 캘리포니아의 주도(州都)라는 새크라멘토를 향해 떠났다. 다른 지역에서는 언제든지 다시 시험에 응시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새크라멘토는 샌프란시스코 서북쪽에 있는 도시로 로스앤젤레스에서는 7-8시간이나 걸리는 먼 곳이었지만 하루가 급한 내게는 지척이나 다름없이 생각되었다. 바다 저쪽에 고국이 맞닿아있을 태평양을 끼고 달리는 해안도로를 달리며 외롭고 서글픈 생각이 문득문득 스쳐갔다. 내게 아무것도 준 것이 없는 고국이지만 태양이 마지막 광채를 길게 적시고 있는 붉은 바다를 바라보니 잊어버리고 있던 한국 땅이 그리웠다.
그날그날 생활에 바빠 고향 생각을 하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날이 저물자 나는 한적한 곳을 찾아 차를 세워놓고 그 속에서 새우잠을 잤다. 지금 같으면 위험천만한 노릇이었다. 더구나 거액이라면 거액인 현금까지 지니고 있었잖은가. 당시만 해도 두려움을 몰랐다. 또 지금처럼 세상이 험악하지만도 않았다.
다음날 나는 오클랜드에서 운 좋게 모병소를 만났다. 구경 삼아 길거리를 드라이브하고 다니던 길이었다. 그러나 거기서도 보기 좋게 낙방했다. 그도 그럴 것이 문제를 읽지도 못하고 치르는 시험이었다. 새크라멘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덕분에 미국 곳곳을 구경은 잘하는구나, 하는 생각으로 나 자신을 위로했다. 시험을 여러 차례 보다보니 내용은 모르지만 대개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는 알 것도 같았다.
빌어먹을. 중학교만 다녔어도 첫 방에 거뜬히 합격할 것을 가지고! 나는 새삼 부아가 치밀어 올랐지만 돌이킬 수도 없고 내 힘으로 어쩔 수도 없었던 것을 가지고 오래 마음에 품지는 않았다.
나는 다시 차를 돌려 서쪽으로 떠났다. 광활한 미국대륙을 다 거쳐가면서 문제를 하나하나 외우는 한이 있어도 반드시 미군에 입대하고야 말겠다고 이를 악물었다.
다시 두어 도시를 거쳐 세인트루이스에 이르렀다. 이젠 이 일도 숙련이 되어서 모병소를 찾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40대의 모병관은 대뜸 “당신 한국인 아니오?”하고 묻더니 장황하게 자신이 한국에서 보냈던 군대생활얘기를 시작했다. 일이 되려니까 그것도 동두천에서 근무했다는 것이었다. 꽤나 심심했던지 아니면 한국생활이 정말 그토록 기억에 남아선지 그는 한참동안이나 얘기를 계속했다. 마치 오랜만에 만난 친구처럼.
나는 동두천이 고향이기도 했지만 미군부대는 한때 내가 소위 '하우스 보이'로서 드나들기도 했고 또 6.25 때는 미군트럭을 씻어주고 돈벌이를 하는 등 이래저래 인연을 많이 맺어온 터라 그의 얘기가 낯설지 않았다.
한참 만에야 우리는 본래의 용건으로 돌아갔다.
“한국군대와 달라. 여긴 군에 입대하는데도 시험을 치러야 되는데....”
나는 국민학교밖에 안 다녔지만 중졸로 학력을 속였는데도 그는 내가 붙을 수 있겠느냐고 의문을 제기했다. 나는 이미 시험도 치러봤고 공부를 해서 붙으면 될 게 아니냐고 버텼다. 그는 나의 굳은 결의를 꺾을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안타까운 눈으로 한참동안 쳐다보며 생각에 잠긴 듯 하더니, 오케이, 하고 책상을 뒤적거렸다. 그가 꺼낸 것은 책이었다.
“자, 이걸 가져가서 자신 있다고 생각될 때 응시를 하라구. 시험은 아무 때나 있으니까.”
나는 신바람이 나서 모텔로 곧장 돌아갔다. 막상 책을 펼치니 당연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영어로만 되어 있었다. 국민학교밖에 못나온 나로서는 그걸 읽을 수조차 없으니 뒤적거릴 수밖에 없었다. “옛스!”하고 휘파람을 불며 책을 받아온 기쁨도 물거품처럼 사그라져 버렸다.
그림도 없는 책을 침대에 누워 하릴없이 이리 넘기고 저리 넘기던 나는 눈이 번쩍 띄어 후닥닥 일어나 앉았다. 궁하면 통한다더니 책 뒷부분에는 숫자와 알파벳이 나란히 인쇄되어 있었다. 정답표임이 틀림없었다. 큰글씨로 a,b,c,d 네 가지의 문제지 타입도 윗머리에 찍혀있었다. 부정행위를 막기 위해 앞뒤 그리고 옆 사람에게 각각 다른 문제지를 나눠준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정답을 깨알같이 쪽지에다 옮겨 적었다. a형 답안은 왼쪽소매, b형은 오른쪽, 하는 식으로 감춰두고 시험장으로 갔다. 내가 받은 시험지는 b타입이었다.
몇 개는 일부러 틀리게 답안을 적어 넣었다. 답안을 제출하고 의자에 앉아 기다리는 동안 채점관은 구멍이 뻥뻥 뚫린 채점지를 그 위에 덮더니 정답이 없는 부분을 표시했다. 물론 합격이었다.
채점관은 뉴욕에서 왔다니까 모텔을 지정해주며 가서 기다리라고 했다.
다음날 아침. 식사후 호텔 방에서 편지를 쓰고 있으려니 신체검사장으로 가는 버스가 왔다는 전갈이 왔다. 커닝이긴 하지만 합격은 하고 볼 것이, 그날부터 호텔비는 물론 밥값 등 일체를 군에서 부담했다. 나는 부지런히 싸인만 해주면 됐다.신체검사가 끝나자 언제 입대하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당장 갈곳도 없는 터라 내일이라도 좋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내 병과는 공병이지만 병과와 근무지중 한가지는 내 뜻대로 선택하라는 것이었다. 별난 군대도 있다 싶었다. 나는 근무지를 골랐다. 물론 한국 근무를 희망했다. 한국에는 공병 병과가 배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대신 탱크병과로 떨어졌다. 드디어 나는 미국육군이 되어 미조리주에 있는 신병훈련소로 실려갔다. 77년 7월 20일이었다.
<27> m-16을 장진해 와!
훈련자체는 이미 한국군으로서 3년 근무를 마친, 그야말로 '베테랑'이라 어려울 게 없었다. 나이는 서른 아홉 살이나 됐지만 (영주권을 낼 때부터 입대허용 연령인 35세로 속였다) 동양인은 어려보이는데다 체력도 아직 남만한 때라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사실 그런 것들이야 모두 마음가짐에 달려있는 게 아닌가 싶다.
문제는 말이었다. 모든 것이 영어였으니 이만저만 애로가 아니었다. 점호 때는 한국군으로 치면 '보초수칙'이니 '군인 정신'이니 하는 잡다한 것들을 수없이 외우고 읊어야 하는데 의미도 모르거니와 읽을 줄도 몰랐다. 직속상관 관등성명조차도 쉬운 것이 아니었다.
“캉(kang), 넌 벌써 다 외었냐?”
부지런히 외우던 동료들이 멍하니 앉아있는 내게 걱정스런 얼굴로 묻곤 했다.
“어...? 으응... 나, 좀 있다가 외워야지.”
나는 이놈들이 무시하지나 않을까 해서 곤혹스러웠다. 나는 별 수 없이 친구가 별로 없는 녀석을 골라 일과 후 피엑스로 불러냈다. 맥주나 먹을 것을 사주고 녀석을 꼬드겼다. 돈은 가져간 게 있어서 풍부했다.
“너희가 써놓은 영어는 읽기가 어려우니까 천천히 좀 읽어봐라”
나는 그걸 한글로 발음 나는 대로 받아 적어 놓고는 불침번을 서는 동안 죽어라고 외었다. 뜻도 모르면서 외우는 것이 여간 어렵지 않아 점호 때는 작은 종이쪽지에 적어 손바닥에 쥐고 위기를 넘겼다. 여차하면 몰래 훔쳐보기 위해서였다.
훈련소에서는 웃지 못할 뒷얘기가 참 많았다. 말이 안 통하는 것도 그렇지만 그때까지 40년 가까이 살아온 것과는 모든 것이 생판 낯선 일 뿐이었으니까 당연하기도 했다.
어느 날 아침이었다. 무더운 날씨라 해이해져 있는 훈련병 군기를 잡는다면서 중대부관이 관물검사를 시작했다. 그게 한바탕 소동의 시작이었다.
뉴욕을 떠나올 때 나는 목수 일을 해서 저축했던 돈을 찾아 줄곧 지니고 다녔다. 그 동안 쓴 돈을 빼고도 2만여 불 됐으니 당시로서는 꽤 큰 액수였다. 더구나 현금이었다. 나는 서울에서 받은 편지봉투에 백 불짜리를 몇 장씩 나눠 넣은 후 소위 007백에다 고이 모시고 다녔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은행에 예금해두면 되는 걸 그랬지만 당시에는 모든 것이 불확실했기 때문인지 그럴 생각을 못했다. 그래서 나는 현금가방을 베고 자거나 침대 속에 넣어두고 낮에는 관물 캐비넷에 깊이 넣어두고 기회 있을 때마다 몰래 확인을 하곤 했다.
내 차례가 되자 부관은 관물 캐비닛을 열어보라고 명령했다. 역시 여군 중위라선지 부관은 까다롭게 굴었다. 그러나 나도 왕년의 실력이 있는지라 내 관물은 두부를 잘라놓은 것처럼 반듯반듯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문제는 옷 뒤에 숨겨놓은 돈 가방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지휘봉으로 가리키며 “그게 무슨 백인가?”하고 물었다. 나는 고향에서 보내온 가족들의 편지를 모아놓은 것이라고 둘러댔다. 여군장교는 내용물을 꺼내보라고 지시했다. 나는 어쩔 수 없다 싶어 가방을 열어 보였다. 위장을 위해 넣어둔 잡다한 물건들과 함께 봉투들이 빼곡이 차있었다.
그녀는 그대로 지나가지 않고 허리를 숙여 직접 그것들을 뒤져보다가 얼굴 색이 변했다. 봉투 속의 현금을 발견한 것이다.
그녀는 가까스로 정신을 가다듬어, “다른 봉투도?”하고 묻더니 내가 “예스”라고 답하기가 바쁘게 가방을 도로 덮고 한 발짝 물러서며 권총을 빼들었다. 그녀는 권총 노리쇠를 철컥 소리가 나게 후퇴시키며 머리높이쯤으로 들고는 “전체, 차렷!”하고 벽력같이 소리쳤다. 온 내무반이 바짝 긴장해서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장진된 m-16을 가져와!”
영문을 모르는 내무반장이 그야말로 눈썹이 휘날리게 중대본부로 뛰어가 총을 들고 왔다. 선임하사가 황소 눈방울 만한 눈을 더욱 크게 뜨고 헐레벌떡 뒤따라 들어섰다.
“내무반장을 제외한 전원 현재복장으로 연병장에 집합!”
부관은 권총을 치켜든 채 여자 특유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혼비백산한 훈련병들이 밖으로 뛰어나가자 그녀는 내무반장에게 헌병대에 연락하라고 지시했다. 모두가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도대체 그게 무슨 돈인가?”
그녀는 손을 내리긴 했지만 여전히 권총을 빼든 채 물었다. 나는 미국에 온 후 4년 동안 번 돈을 꼬박꼬박 모은 것이라고 설명하고 미국 천지에 아는 사람이라곤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가지고 있노라고 말했다.
“그걸 입증할 수 있나?”
“넷! 수표책이 있습니다.”
“그럼 왜 은행에 넣어두지 않았나?”
“몰랐습니다!”
부관과 선임하사는 어이가 없는 모양이었다. 10분이 채 못되어 요란스럽게 불을 빤짝거리는 헌병 차가 도착했다. 언제 연락을 취했는지 은행직원도 동행해 있었다. 그 은행은 졸지에 거액의 예금고를 올린 셈이다. 사실 미국에서 개인이 일시에 2만 불을 예금하는 경우는 지금도 흔하지 않은 일이라고 알고 있다.
통장을 중대본부 금고에 보관시키고 난 부관은, "자, 이 보관증을 잘 가지고 있다가 훈련 끝날 때 찾아가라. 그러고 보니 당신은 부자네. 더 숨겨놓은 돈은 없겠지, 설마?" 하고 물었다. 나는 가슴이 뜨끔했다.
"정말 그게 다야? 또 있을 것 같은데?"
부관은 역시 여자라 내 표정의 변화를 세밀하게 관찰한 모양인지 다시 한번 추궁했다. 나는 기왕에 이렇게 밝혀진 김에 모두 맡겨두는 게 오히려 마음 편하다는 생각이었다. 고개를 끄덕거리자 그녀는, "중사!" 하고 선임하사부터 큰 소리로 불렀다.
"이번에는 얼마를 어디에다 감춰뒀다는 게야?"
"돈이 아니라 시계가 있습니다. 8천불 짜립니다."
"8천불 짜리 시계.....?"
부관은 믿어지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렇게 비싼 시계가 어디 있느냐는 표정이었다. 나이가 지긋한 선임하사가 빙긋이 웃으며, "롤렉스 쯤 되는 모양이지요. 가봅시다." 하고 내무반 쪽으로 앞서자 부관도 권총을 빼어 들고 뒤를 따랐다.
그래서 그 동안 정복 주머니에 숨겨두고 혹시 누가 알기나 하면 어쩌나 불안해하던 시계도 중대본부 금고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나중에 소문을 들으니 부관은 언젠가 내가 그 가방을 몰래 열어보는 것을 목격한 모양이었다. 관물검사도 그 돈가방을 조사하기 위한 것이었다. 마약이라도 되는 줄 알았던 모양이었다. 그날의 소동 덕분에 훈련병들은 연병장에서 한참동안 기합 아닌 기합을 받았지만 그날 이후 나는 돈 가방이나 시계 걱정 없이 편히 지낼 수 있었다.
훈련소의 일과는 새벽 5시반에 기상을 해서 구보를 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한바탕 땀을 흘리고 돌아오면 샤워를 한 후 각자 식사를 한 뒤 7시45분까지 집합해서 8시 정각에는 어김없이 훈련이 시작됐다. 그러나 다른 훈련장에 갈 때는 8시까지 해당 훈련장의 조교들에게 병력이 인계돼야 하기 때문에 단체로 식사를 할 경우도 있었다. 한국군과 대부분은 비슷했다. 역시 민주군대라 우리시대의 한국군처럼 구타가 없다는 게 달랐다. 대신 기합은 많았다. 집합 때는 한 명이 늦어도 전원이 모일 때까지 엎드려 뻗쳐를 하기가 일쑤였다.
그날 아침에도 우리중대는 몇 명의 굼뜬 훈련병 때문에 끙끙거리며 기합을 받고 있었다. 중대 인사계는 노병인 내가 기합을 받고 있는 게 안쓰러웠던지 내 엉덩이를 툭툭 차서 일으켜 세웠다.
“마, 넌 먼저 식당에 가서 밥 먹고 있어!”
그가 대충 그런 지시를 했는데 내 귀에는 '식당'이란 말밖엔 들어오질 않았다. 미국사람들도 그런 걸 보면 인정은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막상 혼자서만 먼저 식사를 하자니 다른 훈련병들에게 미안한 생각도 들었다.
때마침 구보 끝이라 나는 한창 입맛을 돋구며 식사에 열중하고 있었다.
“헤이 미스터 캉! 너 지금 뭣하고 있는 거냐!”
인사계가 한심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런 빌어먹을...우리중대 배식 시간을 알아 오랬더니, 원, 저 혼자 신나게 먹고 있구먼...”
함흥차사가 된 나를 기다리다 뭔가 잘 못됐음을 눈치 챈 그가 식당까지 찾아온 것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이미 우리중대의 배식 시간은 끝나있었다. 한국군 같았으면 몽둥이께나 맞을 일이었다. 인사계는 어이가 없었는지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실 미국식으로 따지자면 말을 잘 못 알아듣는 내게 시킨 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어쨌든 그래서 우리중대는 그날 아침을 훈련장에 나가서 씨-레이션으로 아침을 떼웠다.
그래도 나는 전반기 훈련을 무사히 마쳤다. 엄격히 말하면 무사히 마친 건 아니다. 필기시험이 빵점이었던 것이다. 말도 제대로 못하는 주제에 문제를 읽기나 해야 해답을 쓰고 그래야 맞든지 틀리든지 할 터였다.
덕분에 나는 후반기 병과교육으로 넘어가지 못하고 3개월 과정의 어학코스로 투입되었다. 한데 뜻밖에도 나 같은 군인들이 많았다. 남미계와 동양인이 대부분이고 흑인들도 더러 섞여 있었다. 어릴 때 그렇게도 중학교를 가고 싶어했는데 그때 배웠을 영어를 나이 40이 다되어 본고장인 미국에서 제대로 배우다니 팔자란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기초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그림책을 갖다놓고 담배니 우유니 성냥이니 하는 말들을 배웠다. “c,i,g,a,r,e,t,t,e”하고 스펠링도 외었다. 단어야 어른들이 사용하는 것들이었지만 그림을 보고 하나하나 말을 배우는 것이 초등학교 일 학년부터 새로 시작하는 것이었다. 매일 숙제를 내줬기 때문에 그때 배운 알량한 ⌈영어실력⌋이 후에도 나의 미국생활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28> 포트 베닝에서 생긴 일
후반기 훈련은 조지아주에 있는 ⌈포트 베닝⌋이란 데로 가서 받았다. 미주리에서 그레이 하운드 버스를 타고 꼬박 사흘만에 도착했으니 미국이 크긴 큰 나라였다. 그런가 하면 세상이란 게 또 그렇게 좁을 수가 있는 건지! 도착해보니 소대 선임하사가 아는 얼굴이었다. 내가 월남에 있을 때 보급소에서 근무하던 일등병이 9년만에 중사가 돼서 그 훈련소에 와있었던 것이다.
월남에서 나는 민간인이었지만 미군 보급소에서 보급품을 타오는 트럭을 운전해서 헤일 일병과는 일주일에 몇 차례씩 얼굴을 대했었다. 미국사람들은 공사구별이 확실해선지 구면이라고 해서 선임하사가 내게 특별히 봐주는 일은 물론 없었다.
내무반장은 '르네'라는 흑인이었는데 이 녀석이 나를 몹시 괴롭혔다. 그는 대학을 나왔기 때문에 같은 훈련병이지만 막바로 일등병을 달고 있었다.
막사와 변소청소, 그리고 불침번을 돌아가며 분담했는데 그게 문제였다. 우리분대가 아홉 명이니 계산해보면 분명히 일주일에 하루는 내가 빠져야 되는데 매일저녁 보초명단에 내가 들어가 있었다. 내무반장 녀석이 말도 제대로 못하는 동양인인 나를 깔보고 그렇게 짜는 것이었다. 그것도 밤마다 자정 아니면 1시에 집어넣었다.
군대생활을 해본 사람이면 누구나 알겠지만 보초란 초번과 말번이 제일 좋은 것이다. 조금 늦게 자고 조금 일찍 기상하면 되기 때문이다. 반면에 겨우 깊은 잠이 들 무렵인 12시나 1시에 기상해야 하는 것처럼 힘든 게 없는 법이다. 나는 한달 가량 아침마다 지난밤의 보초명단을 뜯어서 모아뒀다.
어느 날 저녁. 나는 점호가 끝난 후 르네에게로 가서 “너 오늘밤에도 날 불침번명단에 집어넣으면 안 설 테니 그렇게 알아둬!”라고 다짐했다.
“야, 불침번 순서는 내무반장인 내가 알아서 짜는 거고 그걸 어기면 넌 명령불복종이야.”
나는 울화가 치밀어 오르는걸 꾹 참고 “좌우지간 오늘밤엔 안 설 테니 알아서 해!”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분을 삭이느라 좀처럼 잠이 안 와 한참을 뒤척이다가 겨우 잠이 들었는데 어느 녀석이 나를 흔들어 깨웠다. 나는 그대로 잠을 청했다. 얼마간이 지났는지 다시 불침번이 나를 흔들었다. 2층 벙크베드에서 내무반을 내려다보니 한쪽에서 내무반장과 다른 두 녀석이 의자를 가운데로 끌어다 놓고 둘러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군화끈을 단단히 묶고 그쪽으로 걸어갔다.
“야, 너 왜 오늘도 날 보초에 집어넣었어?”
나는 인원이 몇 명이고 매일 몇 명이 보초를 서는데 나는 매일 명단에 들어있느냐고 따졌다. 녀석은 눈 하나 깜짝 않고 나를 쳐다보며 “지휘자는 나야. 영창에 가는 게 더 좋으면 마음대로 해, 이 차이니즈야!”하고는 더 이상 상대를 않겠다는 태도로 나로서는 알아듣지도 못하는 잡담을 옆엣 녀석들과 시작하는 것이었다.
나는 가운데 놓인 의자를 걷어차 엎어버리면서 녀석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그러고는 눈 깜짝할 사이에 멱살 쥔 손을 잡아당기며 멋지게 박치기로 들이받았다. 마흔이 다된 내가 한창때인 흑인녀석과 정상적인 방법으로 맞붙을 상대는 안되기 때문이었다. 얼마나 세게 받았던지 녀석은 제자리에 그대로 고꾸라졌다. 나는 군화발로 쓰러지는 녀석을 한번 더 걷어찼다.
다 집어치우고 한국으로 돌아가면 그뿐이지 하는 심사였다. 세상을 참을성으로 버티어온 나였지만 더 이상 수모를 참을 수가 없었다. 같이 맥주를 마시던 녀석들은 질겁을 하고 도망쳤다. 그 바람에 잠자던 소대원들이 모두 일어나고 르네녀석은 피투성이가 되어 내무반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곧이어 주번사관이 뛰어오고 금세 헌병 차와 앰뷸런스가 나타났다. 나는 헌병대로 연행됐다. 내무반장은 병원으로 실려갔다.
“왜 그랬나?”
헌병이 물었지만 나는 묵비권을 행사했다. 한밤중에 중대장과 인사계까지 헌병대로 부랴부랴 달려왔다. 나는 나중에 선임하사에게 얘기를 하겠다고 말했다. 날이 새자 선임하사가 나타났다.
“너희 소대의 그 코리안 친구가 밤중에 소동을 일으켜 헌병대에 연행돼 있는데 당신에게만 이유를 말하겠다고 버틴다”는 전갈을 받았다는 것이다.
“맞다. 너는 내 말을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아 그랬다.”
나는 그에게 얘기를 좀 하고 싶다고 말했다.
헤일중사는 담당헌병에게 “저 친구는 내가 베트남에 있을 때부터 알던 아인데 아주 착실하다. 나와 얘길 하겠다니 다른 방으로 좀 데려가게 해달라”고 말했다.
아무도 없는 다른 방으로 가자 나는 자초지종을 다 얘기했다. 그 동안 모아둔 불침번 명단도 건네줬다. 말없이 내 얘기를 모두 들은 선임하사는 “하지만 너, 사람을 때리면 어떻게 되는지 아느냐? 그것도 르네는 너보다 상급잔데...” 하고 말했다. 측은하게 생각됐는지 말투는 부드러웠다.
“안다. 영창 간다. 제대된다. 그리고 한국가면 그뿐이다.”
나는 각오가 다 되어있다고 말했다. 헤일중사는 나를 앉혀둔 채 전화로 중대장에게 내 얘기를 전했다. 얘기를 듣고 보니 중대장도 내가 측은했던지 아니면 사건화되면 자신에게도 지휘책임이 있어선지 헌병에게 이 문제는 자기에게 맡겨달라고 말한 모양이었다. 얼마간인가 헌병대에 앉아있으려니 헌병이 나를 불러 중사를 따라가라고 말했다.
중대본부에 돌아가 무슨 징계가 떨어지려나 생각하며 앉아서 대기했다. 분위기가 돌아가는 걸로 봐서 한국으로 돌려보내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때 머리에 붕대를 칭칭 동여맨 내무반장이 나타났다. 선임하사는 그를 본부 한쪽 구석으로 데려가더니 큰 소리로 꾸짖기 시작했다.
“야, 저 친구는 영어를 잘못할 뿐이지 네가 동네에서 뛰어 놀고 있을 때 벌써 한국군을 나온 베테란이야! 때문에 군대에 대해서는 나보다도 더 잘 안다. 전쟁터까지 다녀왔단 말야! 네가 그에게 한 짓을 넌 알기나 하나? 넌 뭐하는 놈이야, 임마! 어째서 보초명단을 그토록 부당하게 짜나? 또 ‘갓뎀 차이니즈’란 말은 왜 했으며 취침시간에 불을 켜놓고 맥주를 마신 건 뭐야? 영창은 바로 네가 가야돼! 알겠나?”
내무반장은 아무말도 못하고 피가 배어나온 붕대를 감은 머리통을 숙였다. 온통 검은 머리통에 흰 붕대를 감은 모습이 유별나게 눈에 띄었다.
“영창 가기 싫으면 지금 강 이병에게 가서 사과해!”
중대장이 거들자 그는 대뜸 내게로 와서 손을 내밀며 사과했다. 나도 그 땐 이미 분이 풀렸으므로 “나도 널 때려서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래서 한밤중의 소동은 일단락이 됐고 그후로는 아무도 나를 넘보지 않았다.
그런 저런 곡절을 겪으면서 하루하루의 생활에 익숙해져 가는 동안에 계절은 바뀌어 훈련소 주변의 울창한 나무들이 온갖 색깔의 단풍으로 흐드러져 있었다. 미국 군대라는 게 역시 한국군과는 다른 데가 있었다. 말하자면 제 나라를 지키는 국방이라기 보다는 훈련의 내용이란 게 주로 해외생활에 관한 것이 많았다.
“미군은 세계 어느 나라에도 파견될 수 있기 때문에 주둔지의 음식을 뭐든 먹어야 할 때가 있다. 굶기 싫으면 말이다. 이를테면 한국에선 개도 먹는다.”
조교는 각국의 특이한 음식을 예로 들면서 보신탕을 들먹였다. 훈련병들이 와르르 웃으며 시선을 내게로 모았다.
“여기 코리언이 있습니다!”
어느 짓궂은 녀석이 나를 가리켰다. 설마 그럴 리가 있느냐, 한번 확인해봐라, 그런 말투였다. 나는 한국에는 식용으로 쓰는 개가 따로 있다고 둘러댔다.
“아무튼 그들은 개도 먹는다.”
조교는 다소 자신을 잃은 표정이었지만 그렇게 버텼다. 그밖에도 세계각국의 풍습을 소개했지만 나는 내무교육시간이면 으레 한국으로 보낼 편지를 쓰는데 열중했다. 아무도 시비를 거는 사람은 없었다. 영어를 모르니까 한글로 강의내용을 열심히 메모하고 있으려니 하고 짐작하니까 거칠 것이 없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전후반기 두어 달과 어학교육 석달, 총 5개월의 훈련기간을 마쳤다. 그게 77년 12월말이었으니 그해 여름에 입대해서 한겨울에야 수료한 것이었다. 어느덧 울긋불긋하던 주위 풍경은 하얀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29> 밀입국 4년만에 미 육군이 되어
나는 국민학교 졸업이후 처음으로 세 장의 수료증을 손에 쥐고 훈련소를 나섰다. 4년만에 의젓한 모습으로 고국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설레었다. 그것도 미합중국 정부가 여비까지 대주는 게 아닌가. 미군은 전출시에 대개 개인 출발로 배속지에 가게 되어 있었다. 나는 희망한대로 용산에 있는 8군 보충대로 도착하라는 명령지를 들고 있었다. 말미는 10일이었다.
나는 빚쟁이처럼 도망쳐 나왔던 뉴욕을 거쳐 노스웨스트 항공기를 타고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공항 대합실에 앉아 있으려니 만감이 교차했다.
가짜 취업증을 들고 미국 땅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던 바로 그 비행장에 어엿한 이 나라 군복을 입고 돌아오다니! 나는 어떤 위기를 맞아도 좌절하거나 당황하지 않고 그것을 극복하는 힘과 여유를 허락한 하나님께 감사했다.
“한국으로 전출 가십니까?”
대합실 의자에 앉아 생각에 잠겨있노라니 40대쯤의 한국인남자가 다가왔다. 5백불을 내면 좋은 곳에 배치받게 해주겠다는 것이었다. 용산 근무를 시켜주겠다는 것이다.
“일 없어요. 어딜 떨어지든지 복불복이지 뭐.”
나는 전차병과를 받았으니 2사단으로 갈 것이 틀림없었다. 동두천이 고향이니까 내게 '좋은 곳'이란 바로 거기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가보시면 후회하실 겁니다.”
미국 땅에까지 이런 사람들의 발길이 뻗어 있다니. 우리 한국인들은 확실히 유별난 데가 있었다.
비행기에선 줄곧 잠을 잤다. 요즈음 같으면 미국비행길 타도 한인 승객이 태반인데 옆자리에서부터 그 옆자리까지 온통 외국인들 뿐이라 잠자는 일밖에 할 일이 없었다. 스튜어데스가 먹을 것을 갖다주면 그걸 먹고 나선 잠이 들고 다시 마실걸 갖다주면 그걸 마시곤 눈을 감고....그러다가 비행기 안을 다 돌아보아도 한국사람은 3명 정도 뿐인 것 같았다.
그렇게 자고 깨기를 되풀이하다 보니 이윽고 저만치 내려다보이는 경치가 온통 크고 작은 산들로 뒤덮인 고국이었다. 사방에 산이라곤 볼 수 없는 광활한 땅, 미국의 풍광에 익숙해진 탓인지 내 눈에는 국토가 온통 산비탈뿐인 것처럼 보였다.
김포공항에 도착하니 미국 군인이라고 일반승객들과는 다른 문으로 세관검사도 없이 나가게 되어 있었다.
미군은 전출증이니 뭐니 하는 것도 필요 없고 단지 군인 신분증 한 장이면 여권도 없이 미국에서 한국까지도 자유롭게 오갈 수 있었다. 민간인으로 월남도 가보고 더구나 처음 미국에 밀입국할 때는 종이 한 장에까지도 운을 맡겨보고 했지만 미군이라는 신분증 한 장이 이렇게 입장을 바꿔주다니! 입국 서류도 아주 간단한 것을 써넣으면 끝이고 짐은 아예 통관검사도 않으니 격세지감이란 말은 바로 이럴 때를 두고 쓰는 말일 것이다.
나는 마음 한구석에 철없이 우쭐대는 마음도 없지 않았지만 남의 나라 힘에 기대고 사는 나라는 이렇구나, 하는 생각도 들어 기분이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나는 대기하고 있는 8군 버스로 곧장 올라타지 않고 미적댔다. 사실은 뉴욕에 있는 동안 이것저것 돈이 될만한 물건들을 가방이 불룩하게 사 넣고 왔기 때문이었다. 버스를 탔다가는 혹시 헌병들이 짐 수색을 할까 겁이 났던 것이다.
한국군처럼 인원파악을 하는 일도 없이 버스는 후딱 떠나버렸다. 나는 밖으로 걸어나와 택시를 집어탔다. 나쁜 짓을 한다는 죄책감도 있었지만 상계동 달동네에서 궁색하게 살고있을 가족생각을 하면 어쩔 수가 없었다.
지나고 나서야 뒤늦게 깨달은 사실이지만 부정한 방법으로 번 돈은 수중에 오래 남아있는 법이 없다. 이제는 기억해내기도 싫은 일이지만 내가 그렇게 마련한 돈은 결국 써보지도 못하고 모래처럼 손가락 사이로 스르르 흘러내려 없어져버렸다. 내 집안의 어느 누가 어떻게 해서 그걸 탕진했다고 여기서 밝히고 싶진 않다.
지금은 귀국할 때마다 서울의 모습이 알아보기도 어렵게 발전하는데 놀라곤 하지만 그 때는 4년 전과 별로 다를 게 없었다. 오히려 택시에서 내다보이는 도로며 거리풍광이 모두 조막조막해 보이고 공기까지도 답답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상계동에 이르자 길이 좁아지면서 택시가 더 들어갈 수 없는 달동네 입구에 다다랐다. 나는 차에서 내려 더플백을 둘러메고 비탈길을 헉헉거리며 올랐다. 도망가듯 이곳을 떠나 미국이라는 신천지에서 새로운 삶을 설계하다가 좌절하고 다시 미국군대라는 피난처로 숨어들어 여기까지 온 것은 모두 한낱 꿈이었고 이제 현실로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기분 좋은 꿈속에서 깨어난 것처럼 입맛이 찜찜했다.
"어, 이게 누구야! 혹시 강씨..., 아뇨?"
군복을 입은 내 모습을 용케도 알아본 것은 주씨였다. 미국으로 가기 전까지 자가용으로 택시 영업을 할 때 알고 지내던 운전사로 말하자면 동료였다. 그날이 쉬는 날이었던지 운동복을 걸치고 담배라도 사러 나왔는지 허름한 모습이었다.
엉뚱하게 미군복을 입은 내 모습과 여전히 궁핍한 냄새가 배어 있는 그의 모습을 대비하며 순간 서글픈 연민의 정이 스쳐갔다. 또 상계 약국의 '뚱뚱이' 주인도 깜짝 놀라 뛰어나오고 만나는 동네 사람들의 반응도 가지가지였다. 대부분 가난에 찌들고 폭폭한 심정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라 이렇게 거짓말처럼 변신한 모습으로 돌아온 나를 부러워하는 눈치들이었고 한편으로는 내가 미군이 되었다는 소문이야 손바닥만한 동네에 하루아침에 퍼져 있었을 테니까 다들 알고는 있었겠지만 막상 미군복장을 하고 나타난 내 모습을 진짜로 보는 것은 또 다른 미묘한 감정을 갖게 하는 것 같기도 했다.
수십 가구가 같이 쓰는 공동변소앞을 지나려니 향기롭지 못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솔직히 이것이 원래 내가 속해있는 사회라는 걸 바락바락 부인하고 싶었다. 아이들을 만날 때까지는 그런 기분에서 좀처럼 벗어날 수 없었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들이 반갑고 신기한 눈으로 미군이 되어 돌아온 나를 쳐다보며 저녁 때가 되도록 내 주위에서 맴돌았다.
4년만에 돌아온 집에서 하루 밤도 못 자고 나는 집을 나섰다.
용산에 도착하니 보충대 부임 시간인 자정까지는 두어 시간이 남아있었으므로 미8군 후문 근처의 다방으로 들어갔다.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 만난 사람이 “생각이 달라지면 찾아가보라”던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모자를 벗고 앉아있으려니 중년남자가 다가와 은밀한 투로 말을 붙였다.
“보충대로 들어가시는군요? 용산에 남고싶지 않으십니까?”
그 사이에 값은 8백불로 올라 있었다. 막상 와서보니 서울에 남고싶은 생각이 없지도 않았지만 애당초 각오가 되어있던 터라 그쯤에서 나는 대화를 끝냈다.
다음날 아침 나는 예상대로 2사단으로 배속 받아 동두천으로 떠났다. 캠프 케이시에 있는 2사단 보충대에 도착하니를 거기서도 잘못하면 판문점이나 비무장지대 경계 부대, 혹은 전곡 북쪽 최전방의 산꼭대기에 있는 미사일부대 초소로 갈 수도 있다는 얘기가 나돌았다.
차에서 내린 후 더플백을 들고 대오 속에 서 있으면서 부대 안에 오가는 한국인들을 살피고 있자니 오가는 민간인들 가운데는 낯익은 얼굴들도 제법 보였다. 그 중에는 박무한이란 초등학교 친구도 있어서 나는 반가운 마음에 "무한아!" 하고 불렀다.
그는 설마 줄을 서 있는 미군들 가운데 내가 서 있으리라고는 생각을 못하고 두리번거리다가 나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며 반가워했다. 나는 간단히 내가 미군에 입대한 경위를 설명하고 전방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는 얘기가 있는데 어떻게 여기 본부 안에 근무하는 길이 없겠느냐고 의논을 했다. 그는 자기가 바로 보충대 중대장의 하우스 보이를 하고 있다며 한번 알아보겠노라고 약속을 했다. 그 친구가 도와 준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캠프 케이시 안에 있는 72전차부대로 배속을 받았다. 미군이지만 한국에 있는 한 아무래도 한국적인 풍토에 물이 들게 마련이니까.
<30> "자동차가 네 방인 줄 아나?"
내가 도착했을 때는 하필 '팀 스피리트78' 기동 훈련 중이어서 나는 부대를 따라 전곡, 연천, 신망리 등 전방 지역으로 탱크를 타고 새삼스레 노병생활을 시작했다. 낯익은 산하를 누비려니 어릴 때 탄피를 줏으러 다니던 기억이 새로웠다.
훈련이 끝나자 한국군과 마찬가지로 'i.g. 인스펙션'이라고 하는 장비검사가 뒤따랐다. 지독하게도 추운 날씨에 쇳덩에 달라붙어 닦아내고 기름을 칠하자니 때늦은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기름걸레를 수령하러 중대본부엘 갔더니 벌겋게 타오르는 난로 곁을 떠나기가 싫었다. 중대본부에는 사병 두 명이 서툰 솜씨로 액자를 만들고 있었다. 각종 수칙이니 직속 상관 사진 같은 것들을 끼워서 걸어놓기 위한 것이었다. 나는 직업이 직업인지라, 이봐, 그건 이렇게 하면 쉽잖아, 어쩌고 하면서 보다못해 간섭을 했던 모양이다.
“어이, 너 그런 것 좀 만질 줄 아는 모양이구나. 입대 전 직업이 뭐였나?”
언제 들어왔는지 인사계가 뒤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던지 나를 붙잡고 이것저것 물었다. 다 듣고 난 인사계는 그 때까지 일하고 있던 두 명중 하나를 가리키며 “네가 가서 저 친구 탱크를 닦아라”하고 내보내는 것이었다. 나는 내친 김이라 나머지 한 명도 필요 없다고 말하고 나무를 집어들었다. 졸지에 두 녀석과 나는 처지가 뒤바뀌어 버렸다.
그까짓 네모반듯한 액자 만들기 쯤이야 식은 죽먹기보다 쉬운 일이라 하루만에 나는 수십 개를 거뜬히 해치웠다. 그걸 본 인사계는 고개를 좌우로 가볍게 흔들었다. 미국사람들이 기가 막힌다는 뜻을 나타낼 때 하는 몸짓이었다.
“믿을 수가 없구먼...네가 혼자서 이걸 다 만들었단 말이지?”
그는 다음날도 나를 붙들고 다니면서 종일토록 중대막사 주변의 검열준비를 이것저것 시켰다.
내가 부임한지 한 달쯤 된 날이었다. 인사계가 부르더니 중대장의 차를 운전하라는 것이었다. 마침 운전병이 근무를 마치고 귀국하게 되자 나를 추천한 모양이었다. 인사계로서는 나머지 시간에 나를 부려먹을 심사였을 것이다.
탱크 병에서 일약 중대장 운전병으로 발탁된 지 두어 달쯤 되는 때였다. 미8군 참모회의에 참석한 주블러 대위를 태우고 서울에서 부대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미군은 이따금 도로를 막아놓고 차량검사를 하는 일이 있다. 그 때도 의정부를 막 지난 지점에서 검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중대장과 나를 차에서 내리게 하더니 검사관이 직접 차에 올라 한 바퀴 몰아본 후 보네트를 열어 젖히고 이것저것 점검을 했다. 거기서 한 가지라도 불합격하면 내가 처벌을 받는 것은 물론이고 차 주인인 중대장도 경고 레터를 받게되어 있었다.
검사를 끝낸 병기단 준위가 주블러 대위에게 오더니 나를 가리키며 “저 병사가 이 차를 운전한지 얼마나 됐습니까?”하고 물었다. 중대장은 내게 “얼마나 됐나?”하고 묻고는 “뭐가 잘못 되었소?” 하고 병기관을 바라보았다.
병기관은 “잘못되었냐구요? 천만에요. 다음 달이면 제 병기단 근무가 만12년이 됩니다만, 이런 차는 처음 봅니다. 아주 새 차 같지 않습니까.”
그도 그럴 것이, 겉은 물론이거니와 엔진부위까지 정비는 말할 것도 없고 먼지 한 톨 없을 만큼 청결하게 수입이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차를 그토록 유지할 수 있었던데는 또 그만한 까닭이 있다.
동두천이 바로 고향인 나로서는 부대내의 세차장이나 정비공장, 어디를 가든지 어릴 때 알던 얼굴들이 숱했다. 탱크부대는 연료가 흔하기 때문에 나는 주유소에 붙어있는 세차장엘 갈 때마다 지프차의 스패어 연료 통에까지 기름을 잔뜩 채워갔다. 부정한 짓이긴 하지만 물자가 넉넉한 미국 물건을 가난한 고향사람 좀 나눠준들 그리 큰 죄는 아니지. 뭐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더구나 내 손으로 그 댓가를 엽전 한 닢 받은 적이 없다.
나는 “여보게 석남이, 사무실 돌아갈 만큼만 남겨놓고 죄다 빼도 돼.” 라면서 소위 '기마이'를 썼다. 그러니 그들이 내 차를 얼마나 윤기 나게 닦아놓았겠나는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아침에 주블러 대위를 출근시키고 나면 퇴근시간까지는 대개 별 일이 없으므로 선임하사나 부관이 시키는 일이 없으면 그들에게 “필요하면 세차장으로 전화하십시오”하고 연료고를 거쳐 세차장으로 가곤 했던 것이다.
그걸 내가 직접 닦는 줄 아는 부관은 티 하나 없이 광택이 반짝거리는 자동차를 보며 “넌 이게 네 방인 줄 알지?”하며 놀리곤 했다.
어쨌든 내차는 각종 검사 때마다 시범차량으로 뽑혔고 그 때문에 결국 중대장의 상신으로 일계급 특진까지 되었다. 당시 봉급이 5백불 정도 되었는데 진급으로 봉급도 월50불을 더 받게 되었다.
특진 얘기가 나왔으니 또 다른 특진 얘기까지 해야겠다.
79년 4월말쯤으로 기억된다. 팀 스피리트 훈련이 막 끝날 때였다. 요즈막의 세상은 우리 같은 사람이 따라잡을 수도 없는 속도로 변해서 남북관계도 그 때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이 달라진 덕분에 이 한미 합동 기동 훈련도 없어진 모양이다.
나로서는 고향인 철원이 휴전선으로 동강났으니 미군이 되어 고향근처를 돌아다니며 전쟁 연습을 하는 감회가 남달랐다.
어머니 손을 잡고 부모님의 고향인 동두천과 철원 사이를 수도 없이 오갔으니까 훈련 지역은 바로 내 어릴 때의 체취가 구석구석 배어 있는 곳이었다. 다만 그 때는 어렵사리 오갈 수는 있었전 곳이 지금은 휴전선으로 막혀 양쪽이 삼엄하게 경계하고 있는 것이 차이일 뿐이다.
어쨌든 그 한미합동훈련에 참가했던 우리 '강철기갑부대'가 신망리 근처에서 철수하고 있었다. 나는 인디언 마크와 '천하제일'(second to none)이란 부대 구호가 휘날리는 주블러 대위 차를 운전하고 있었는데 뒤돌아보니 탱크 한 대가 따라오지 않는 것이었다.
“저 탱크가 안 따라오는데요?”
나는 중대장에게 질문 겸해서 보고했다.
“음, 그놈 고장이 났다는 구만.”
“어디가 고장이 났습니까?”
나는 주제넘게 꼬치꼬치 물었다. 물론 나대로 생각하는 바가 있어서였다. 웬만하면 “넌 알 것 없어!” 하고 귀찮아할 상황이었지만 주블러 대위는 내가 밉보인 일이 없으니 “응, 토신 바가 부러졌다는 구만.” 하고 고분고분 알려줬다.
“갈아 끼우면 되잖습니까?”
나는 내친걸음이라 또 물었다. 사실은 여차하면 내가 갈아 끼우려는 생각이었다.
“이 사람아, 부품이 있어야 갈아 끼우지.”
하와이에서 그게 도착하려면 빨라도 한 주일은 걸릴 텐데 그 때문에 보초설 병사들이 꽤 여러 명 남아있다는 것이었다. 그뿐 아니라 사단장이 아침저녁으로 헬기를 타고 남겨둔 탱크가 안전하게 있는지를 확인한다는 것이었다.
일과 후에 나는 동두천 시내로 나갔다. 군용품을 취급하는 블랙마켓을 뒤져보기 위해서였다. 없는 게 없다는 암시장이었다.
하지만 부러진 전차 부품인 둥근 쇠 지레 같은 것을 들고 이곳저곳을 뒤지는 나를 수상하게 여긴 한국군 범죄수사대 요원이 나를 미행하고 있다는 것은 꿈에도 몰랐다.
“탱크 언더캐리지를 잡아주는 철 막대긴데 이런 것 없습니까?”
수사요원이 내 허리춤을 잡아챈 것은 네 번째 가게인가를 뒤적일 때였다. 사복을 하고 있었으니 의심을 받는 건 당연했다. 두 명의 cid요원에게 끌려간 나는 신분증을 내보이고 사정을 설명했다. 그들은 “제길...여보슈, 우리가 거길 언제부터 따라다닌 줄이나 아슈? 한 건 올리는 줄 알았잖아.” 하며 “우리가 그걸 구해줄 테니 맥주나 한 박스 사오실 테요?” 하고 나를 놓아줬다.
나는 저녁때가 되어 맥주를 사들고 남산머루에 있는 육군 방첩대 파견대로 다시 찾아갔다.
“어, 이 양반 진짜 왔네.”
그중 준위 계급장을 단 친구가 “공짜로 맥줄 얻어먹을 수도 없잖아, 제길헐.” 하고 혀를 차면서 어딘 가로 전화를 했다.
그는 “오늘은 너무 늦었고 내일 양주나 한 병 들고 여길 찾아가보슈.” 하며 한국군부대를 소개시켜주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한국군에도 월남전 덕분에 미군 장비와 같은 모델의 철수장비가 꽤 있었다.
다음날 아침. 나는 주블러 대위에게 내가 문제의 토신 바를 구해 올 테니 차량 운행증을 끊어달라고 말했다. 부대에서 50마일 반경을 벗어나려면 사단사령부의 승인을 받게 되어 있었다. 중대장은 자기 차는 지휘 차량이라 규정상 곤란하니 부관차를 타고 가라고 허락했다. 피엑스에서 조니 워커 두 병을 사들고 나는 부대를 나섰다. 실로 오랜만에 한가한 전방의 지방도로를 신나게 달렸다. 경찰은 물론 헌병도 미군 지프차를 잡고 시비를 거는 법이 없었다. 서울에서 지척인데도 왕복 2차선인 길은 꼬불꼬불했다.
한창 파릇파릇하게 물이 오르고 있는 주위의 초목들이 싱그럽게 보였다. 부대는 90킬로미터 정도나 떨어진 곳에 있었다. 먼지가 풀석이는 비포장도로를 꺽어들어가 위장막을 짊어진 위병소를 지나 산등성이를 오르니 땅바닥이 기름에 절은 병기중대 막사가 숨어있었다. 병기관인듯 싶은 준위가 별로 반갑지는 않은 표정으로 미리 준비해둔 막대모양의 부품을 내줬다.
“미국서 신품 오면 반납하시오, 잊지 말고.”
준위는 술병과 부러진 토신 바를 받아 넣으며 당부했다.
부대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밤이었다. 장교클럽에 들어서니 중대장이 얼마나 반가웠던지 벌떡 일어나서 나를 맞았다. 그러잖아도 장교들과 함께 내 얘기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어디 가서 자동차 뺏기고 매라도 맞고 있나 걱정했잖아! 얼마나 멀리 갔었나?”
나를 보내놓고 몹시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었다. 그는 같이 있던 수송관에게 다음날 날이 밝는 대로 탱크를 몰고오라고 지시했다.
다음날 피엑스에서 콜라를 시켜놓고 쉬고 있으려니 중대장이 급히 찾는다는 전화가 왔다. 허겁지겁 중대장실로 뛰어갔더니 주블러 대위는 문 앞에서 날 기다리고 있다가 “자네, 나하고 갈 데가 있어” 하면서 사단사령부로 가자는 것이었다.
“아침에 탱크가 없어졌다고 난리가 났었어. 사단장께서 헬기를 타고 순찰을 갔었다지 뭔가. 미처 보고를 못 드렸었거든.”
중대장은 지금 생각해도 아침의 소동이 재미있다는 듯 껄껄 웃으며 특유의 손짓, 몸짓을 섞어가며 말했다. 그는 기분이 좋아서 나를 마치 친구처럼 대했다.
“그래서 자초지종을 말씀드렸더니 자넬 데려 와보라는 거잖아.”
나는 그래서 또 한번 특진을 했다. 불과 일년만에 2계급이 뛴 것은 아마 미군사상 흔치않은 일일 것이라고 생각된다. 전쟁중이 아닌 평시에 말이다.
<31> 20년만에 만난 친구
중대장 운전병을 하다보면 운전할 일이 없을 때는 다른 잡일을 시킬 때도 있었다. 주블러 대위가 2주일간 휴가를 갔을 때도 그런 경우였다. 인사계가 나를 부르더니 중장비를 실어 나르는 트레일러인 '로우 보이' 있는 데로 데려갔다. 그 위에는 구형 탱크가 한 대 실려 있었다.
"캉, 너 이거 운전할 수 있나?"
"물론입니다."
'로우 보이'는 내가 월남에 있을 때 한동안 운전을 했던 것이니까 문제가 없었다. 인사계는 "내, 그럴 줄 알았다. 네가 못하는 게 있을라구. 그럼 저걸 여기로 좀 끌고 가라." 하며 지도를 한 장 내밀었다. 전곡 북쪽 신망리 일대의 지도였다.
"거기 가면 한국군 포병이 신호를 해줄 테니까 그 사람들 원하는 대로 해주면 된다."
나는 탱크를 실은 '로우 보이'를 몰고 북쪽으로 달렸다. 휴전선이 가까워지면서 산이 점점 깊어갔지만 어릴 때도 드나들었고 커서도 친구들과 놀러 다녔던 곳이니까 지형에 대해서는 훤히 기억하고 있는 곳이었다.
한 시간이 넘었을까, 연천과 신망리를 지나자 한국군이 깃발을 들고 안내를 해주었다. 모퉁이마다 사병들이 서서 빨간색 깃발로 신호해주는 대로 산길을 꼬불거리며 중턱쯤 올라가니 장교 두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나는 지휘관인 듯 하고 다른 한 명은 통역장교인 모양이었다. 그들은 미국인이 올 줄 알았다가 내가 나타나자 반가워하는 기색이었다. 그들은 조금 더 올라가면 다른 장교가 다시 기다리고 있을 텐데 그가 가리키는 지점에 탱크를 부려놓으면 된다는 얘기였다.
거기서부터는 경사가 심했기 때문에 아주 천천히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몇 구비를 더 돌아 올라가니 포병장교가 기다리고 있다가 미군 차가 오는 것을 보고 다가오더니 내가 한국말로 인사를 하자 그도 아주 반가워했다.
"미국 분이 오실 줄 알았는데 한국 분이군요. 반갑습니다. 이 근처 아무 데나 평평한 지점을 적당히 택해서 탱크를 버리고 돌아가시면 됩니다."
나는 아주 느린 속도로 산길을 조금 더 올라갔다. 그런데 백미러를 보니 민간인이 삼십여명이나 헐떡거리며 따라오는 모습이 보였다. 손에는 망치니 삽이니 하는 별의별 연장을 들고 있는 것이 무슨 반란이라도 일으키는 행렬 같이 보여 마음이 찜찜했지만 나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니까, 하는 생각으로 앞만 보고 운전을 했다.
이윽고 길 옆에 조금 편편한 지형이 보여 거기다 차를 세우고 나는 차에서 내려 탱크를 묶은 래싱을 풀었다. 그러자니 어느 새 거기까지 따라온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나를 에워싸는 것이었다. 나는 일손을 멈추고 의아한 표정으로 그들을 둘러보았다. 불안한 생각이 잠시 스쳐갔지만 그 중에도 낯이 익은 얼굴들이 섞여 있는 게 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인지 마음은 담담했다.
"야, 근재 아냐, 너?"
헤어진지 20여년이 되는 친구였는데 그는 군복을 입은 내 모습을 얼른 알아보지 못한 모양인지 어물거리더니, "혹시, 신목이....?" 하고 다가왔다.
"그래, 나야. 근데 너, 여기서 뭘 하는 거냐?"
나는 반갑기도 하고 마음이 놓이기도 하면서 그에게 영문을 물었다. 그는 탱크를 부려놓으면 한국군 포병들이 그걸 과녁으로 포격 훈련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자기들은 탱크를 내려놓은 미군이 그 지역을 벗어나는 동안은 포사격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사이에 탱크에 기어올라 돈이 될만한 것들을 뜯어내기 위해 따라온 것이라고 했다. 이를테면 탱크 안 조종실 바닥에는 알루미늄재들이 많이 있는데 그런 것들은 제법 돈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 사람들 속에 친구 한 명이 더 있어서 나는 탱크 속에 있는 주요 부품들을 뜯어서 두 친구에게 나눠주고 함께 차에 태워서 내려와 개울가에서 라면을 안주로 소주를 나눠 마시고 헤어졌다.
그 후에도 몇 차례 더 고물 탱크를 갖다 버리러 갔는데 그 때는 아예 부대 안에서 값나가는 것은 뜯어서 차에다 따로 싣고 가서 친구들에게 주곤 했다. 나로서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지만 그들은 몹시 고마워했다. 그렇잖으면 내가 떠난 뒤 더 좋은 것을 뜯어내려고 머리가 터져라고 경쟁을 해야할 터이니까 다른 사람들도 부러워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앞에서 잠깐 등장했던 언급된 세차장 주인 고석남은 동두천 초등학교 31회로 같은 동기동창이지만 나와는 특별한 인연을 가진 친구였다.
그때 우리 동기생은 120명쯤 졸업을 한 것으로 기억되는데 그중 석남이와 나만 중학교 진학을 못했다. 나는 졸업하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목수 일을 배우러 서울로 올라갔고 고아원에 있던 석남이는 거기서 뛰쳐나와서 그야말로 거지와 같은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그후 용하게도 어려움을 이겨내고 세차장을 꾸리게 되었던 모양인지 그렇게 다시 만나게 된 것이었다.
다같이 지독히 어려운 환경에서 태어나 같이 초등학교를 다닐 때는 때로 부당한 대우를 함께 겪기도 했기 때문에 그를 만나자 울적한 기분도 살아나고 마음 깊은 데서 솟아나는 연대감 같은 것도 있어서 나는 각별히 그에게 마음이 씌었고 그래서 내가 베풀어줄 수 있는 것이면 망설이지 않았다.
<32> 101 공수부대로 복귀
캠프 케이시에서 근무한 지도 어느덧 10여 개월이 흐른 어느 따뜻한 날 낮이었다. 건너다 보이는 산에는 그 유명한 소요산 단풍이 훨훨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타오르고 저만치 멀어진 하늘은 그냥 푸르다는 말로는 어딘가 속이 차지 않는 그런 빛이었다.
나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중대장 차를 주차하고 나서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식당으로 향하는 참이었다. 내무반 막사에서 식당까지는 꼬불꼬불 언덕길을 내려가면서 몇 동의 건물을 지나가야 했다. 어느 건물 모퉁이를 지나는데, "잠깐만, 형!" 하고 강 상병이 나를 불러 세웠다. 그는 로스앤젤레스에서 온 젊은이로서 같은 한인이라 아무래도 서로 가까웠고 열살 쯤 나이가 많은 나를 늘 '형'이라고 불렀다.
"어, 강 상병. 밥 먹으러 안가?"
"지금 밥 먹으러 가면 안 돼요, 형. 일루 와요."
그는 제법 심각한 얼굴을 하고 손짓을 했다. 그는 아직도 소문을 못 들었느냐고 답답하다는 투로 말했다. 나는, "야, 너같이 보급품 만지는 에스디(sd) 사람들이야 보급품이나 팔아먹으니까 잡혀 들어가지 나같이 중대장 차나 운전하는 사람이야 뭘 조사할 거라도 있겠냐. 난 밥이나 먹으러 갈랜다."
"어허, 참. 그게 아니라니까 그러네. 지금 에프비아이(fbi)에서부터 이민국, 육군 범죄 수사대(cid)가 합동으로 나와서 식당 앞에서 한국계 지아이(g.i.군인)들을 샅샅이 검사하고 있다구요. 가짜 군인을 색출하느라구요, 형."나는 속이 뜨끔했지만 시치미를 떼고, "야, 나하곤 상관없는 일이잖아." 하고는 그대로 식당을 향해 내려가다가 도중에서 다른 길로 빠져 내무반으로 돌아갔다. 점심도 굶고 오후 집합 시간이 되자 나는 운전병이니까 중대원들이 집합하는 데로 가지 않고 중대본부로 들어갔다.
"어이, 강 상병. 너 왔구나."
인사계는 나를 보더니 기다리고 있었던 듯, 반갑게 맞으며 물었다. "우리 중대에 공문도 내려왔지만 오늘 식당에 연방 이민국과 씨아이디가 나와서 조사를 했다는데 넌 괜찮은 거냐? 주블러 대위도 널 걱정하던데.... "
"아니오. 아무 일없었는데요."
인사계는 아무래도 마음이 안 놓인다는 표정으로 다시 한번 물었다. "너, 정말 아무 일도 없었어? 가짜 군인을 색출한다는데."
"전 아닙니다."
나는 산수갑산을 가는 한이 있더라도 일단은 부인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아니라면 다행인데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캡틴도 왠지 불안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뉴욕에서 공사 도급을 맡아서 일했다면서 그 나이에 군에 들어왔다는 게 쉽게 이해될 일이 아니잖아? 우리하고 같은 나이란 말이야, 자넨."
"염려 마십시오, 인사계님."
"하긴, 강 일병이 가짜라면 부인이 미국에서 여기까지 따라 나올 수도 없지. 맞아. 우리가 괜한 걱정을 한 거구만."
인사계는 아내와 세 살 짜리 진호가 미국에서 나와 부대 앞에서 나와 함께 생활하고 있는 것을 생각해내더니 안심이 되는 모양이었다. 그날 저녁이었다. 집에 돌아와서 다소 불안한 마음으로 식사를 막 끝내고 쉬는 참인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인사계였다. 그는 이따금 중대장과 함께 우리 집에 들렀다 가곤 했는데 그날은 혼자서 위스키를 한 병 달름 들고 나타난 것이 어딘가 심상치 않았다.
"혼자서 웬 일입니까? 중대장님이 같이 오시잖고."
방으로 들어와서 자리를 잡은 후에 나는 그의 의중을 떠보았다.
"나 혼자 가보라고 해서....같이 저녁식사를 했는데 아무래도 중대장님 마음이 찜찜한 모양이야."
낮에 나와 나눈 얘기를 주블러 대위에게 보고했더니 그래도 미심쩍으니까 저녁에 다시 한번 확인해보라고 했다는 것이다.
아내가 술상을 차려서 내오자 우리는 주거니 받거니 하며 같은 화제를 맴돌았다. 인사계는 그 동안 연방 이민국과 미제8군 사령부에서도 공문으로 소위 '서류미비자'들이 가짜 영주권을 이용해서 미군에 지원, 군대를 도피처로 삼고 있음이 영주권을 만들어 준 일당이 체포됨에 따라 드러나세 되어 한바탕 회오리를 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을 통보 받았으며 이 일이 결코 흐지부지 끝날 문제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나는 취기도 약간 오른 김에 그 기운을 빌어 운을 뗐다. "제가 사실대로 말씀을 드리죠."
차라리 이런 기회에 다 털어놓고 도움을 구하는 것이 어쩌면 현명한 판단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안 된다면 이대로 한국에서 눌러 앉아도 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싶었다.
지금까지 내가 살아오면서 터득한 가장 큰 힘이 있다면 그것은 이미 최악의 순간들을 충분히 겪어냈다는 사실이다. 어릴 때부터 바닥중의 바닥을 살아낸 경험이 있기 때문에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남들처럼 당황하는 법이 없이 당당하게 정공법으로 맞부딪쳐 나갈 수 있는 힘이 내겐 있었다.
자초지종을 다 듣고 난 인사계는 아주 무거운 표정으로, "역시 우리 짐작이 맞았구먼. 오우케이, 알았으니까 딴 사람들한테 얘기할 것은 없고 일단은 우리끼리만 알고 있자고." 하면서 술도 깨는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 날 부대로 출근을 했더니 중대장이 이미 내 얘기를 다 전해 들었는지, "강 일병, 일단 집에 가 있도록! 지금 당장 말이야." 하고 나를 내보냈다. 나는 그의 말대로 곧장 집으로 돌아갔다.
안방에 드러누워 이제 앞날이 어떻게 전개되려는가, 잠시 생각에 잠기려는데 차 소리가 났다. 중대장이 다른 사병을 운전시켜서 찾아온 것이다.
"자네, 한국 근무 기한이 얼마나 남았나?" 묻더니 두어 달 남짓 남았다고 하자, "그럼 당장 귀국하라구. 전출증은 내가 집으로 보내줄 테니까 일단 집에 가 있어. 아무래도 여기 있다가는 문제가 심각해질 것 같으니까 말이야."
중대장은 미국으로 일단 돌아가라고 지시했다. 나는 "알겠습니다. 중대장님. 말씀대로 즉시 떠나겠습니다." 하고 답한 후 이틀 뒤에 미국으로 돌아갔다. 뉴저지주의 베이욘시에 있는 아파트에 돌아가 있으려니까 열흘쯤이 지났을까, 주블러 대위가 만들어 보낸 전출증이 날아왔다. 전출 특명은 켄터키주 포트 캠블에 있는 101 공수특전대였다. 그런데 특명지에는 두 가지 특이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첫째는 사단급 보충대가 아니라 대대단위까지 발령이 나 있었으며 두 번째는 도착 신고일자가 79년 1월 중순으로 되어 있는 점이었다. 물론 그것은 내가 주어진 한국 근무기간 1년을 다 채우게 하려는 중대장의 배려였다.
그 바람에 내게는 두 달간의 뜻하지 않은 휴가가 주어졌다. 이제는 대강 내 성격의 일단이 독자들에게도 엿보일 때가 되지 않았을까 싶은데 나는 두 달이란 기간을 가만히 손맺고 앉아 있을 성격은 아니다. 잠시라도 돈을 벌어야 겠다는 생각에서 과거 일을 해주었던 뉴욕의 브로드웨이에 있는 한인 사업가들을 찾아 다녔다. 그중 서모씨가 마침 잘 되었다며 부탁을 하나만 하자고 했다. 알고 보니 그의 부탁이라는 게 목공일이 아니라 돈 심부름이었다.
당시에는 한국의 외환관리법이 까다로워서 달러를 국내에 반입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서모씨는 내가 미군이라는 신분이기 때문에 통관을 하지 않는다는 점을 착안, 3만 달러를 한국에 있는 거래선에게 전달해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왕복 항공권은 물론 수고비로 그리 적지 않은 돈을 받고 서울 나들이를 하게 되었다. 나는 달러만 가져갈 게 아니라 기왕이면 돈벌이를 좀 해야 겠다는 생각에서 '게브랄 t'라는 당시 한국에서 유행했던 비타민제를 몇 상자 사 가지고 갔다. 그걸 그대로 가져갔다가는 달러 심부름까지 지장이 있을 수도 있으므로 나는 비타민제를 주블러 대위에게 우편으로 부쳤다.
물론 미리 찾아가서 우편물이 오면 받아달라고 부탁을 해두었다. 사병들은 우편물도 영내 우체국에 가서 내용물을 점검받고 찾았지만 장교는 통관도 없이 숙소로 직접 배달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재미를 붙여 두 차례나 서울과 뉴욕을 왕복하며 임시 보따리 장수를 하고 나니 어느 새 전출 부대 부임일이었다. 나는 털털거리는 자동차에 식구들을 태우고 켄터키로 향했다. 테네시주의 내쉬빌을 지나 주 경계선을 넘으면 곧 포트 캠블이었다.
대대에 도착해서 더플 백을 내려놓고 대기하고 있는데 대대장이 들어왔다. 그는 한국계인 나를 금세 알아보고, "자네가 한국 근무를 마치고 전속 온 친구구먼." 하면서 자기 방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대대장실로 들어가자 그는 나를 세워둔 채 서랍을 열더니 편지 한 장을 꺼냈다. 주블러 대위와는 잘 아는 사이인지 편지 내용에는 내가 자기 운전병으로서 아주 근무를 잘 했으니 이 부대에서도 대대장의 운전병으로 써주었으면 좋겠다는 추천의 말 뿐 아니라 내게 좀 어려운 애로사항이 있으니 직접 물어 보아서 잘 처리해주었으면 좋겠다는 개인적인 부탁까지 써 있노라 는 것이었다.
"운전병은 지금 보직되어 있는 사병이 별 문제가 없으니 교체할 수가 없어 곤란하지만 자네 정도면 소대에 배속되어도 분대장 급이니까 지내는데 어려움은 없을 거야. 그런데 개인 사정이란 게 뭔가?"
나는 가짜 영주권으로 입대한 사실을 털어놓고 캠프 케이시에서 한창 색출작업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얘기했다. 그는 별로 놀라는 기색이 없이 미국 본토에 있는 부대에서도 똑같은 색출작업이 대대적으로 있었다고 하며 그 자리에서 법무장교를 호출했다. 그는 법무관에게 내가 한 얘기를 그대로 전하더니 "이 사병을 도와줄 수 있는 길이 있는지 좀 알아봐 주시오." 하고 나를 딸려 보냈다.
법무관은 벌써 한 다리를 더 건넌 처지라선지 미국식으로 합법적인 테두리 안에서 처리하자는 것인지 어쨌든 자세한 얘기를 들으려 하지도 않고 곧장 루즈벨트 이민국에 시민권 신청을 해버렸다.
일주일쯤 지나 이민국에서 장교 인솔하에 이민국에 출두하라는 통지가 왔다. 대대 인사장교의 인솔로 내쉬빌에 있는 이민국에 가니 이민국 관리는 영주권을 내놔보라고 했다. 그는 환등기처럼 생긴 기계 밑 불빛 아래 영주권을 비춰보더니 내게 직접 한번 보라고 했다. 네모난 렌즈에는 시커멓게 그림자만 나타날 뿐이었다.
"자, 이걸 한번 보시지."
그가 다른 영주권을 비추자 환하게 글씨가 드러났다.
"누구에게 얼마를 주고 만들었어요?"
"오래 되어서 기억이 분명하진 않지만 5백 달러를 주었던 것 같아요."
"다른 사람들은 최저 1천 달러에서 3천 달러까지 줬다는데 당신은 무슨 특별한 관계라도 되는 모양이구먼."
"그게 아니라 식당에서 우연히 만나서 거래가 되었기 때문에 말씀드린 대로 기억이 확실치 않습니다. 1천 달러를 요구했는데 그렇게는 돈이 없다고 하며 깎았던 것 같습니다."
"미국에 입국은 언제 했오?"
"74년입니다."
"그 때 무슨 비자로 들어왔어요?"
나는 선원으로 배를 갈아타기 위한 경유 비자로 들어왔노라고 답변했다.
"어디 좀 봅시다."
나는 이민국에 가면 어차피 요구하지 싶어 미리 준비를 하고 갔던 선원 수첩을 내어놓았다. 이민국 관리는 서울에 있는 미국 영사관에서 찍은 입국사증 스탬프를 조금 전에 영주권을 비춰 보던 기계로 다시 비춰 보더니 혀를 끌끌 차며 고개를 좌우로 천천히 흔들었다.
"전부 가짜군. 이 선원 패스포트는 진짠지 모르겠오. 그건 당신네 나라에 가야 진짠지 가짠지 알아낼 수 있으니까."
취업 계약서등 서류가 가짜인 것은 서울을 떠날 때 이미 귀띔을 받았지만 미국 비자까지 가짜일 줄은 정말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래도 군에 입대할 때 시험까지 엉터리로 치르고 들어간 것까지는 알 턱이 없으니 그중 다행이었다.
나는 혹시 즉석에서 이민국 수용소에 집어넣는 것은 아닌가 염려했는데 다행히 인솔장교를 부르더니 데려가라고 하는 것이었다. 장교는 이민국에서 어떻게 처리가 되었는지는 관심이 없는지 묻지도 않았기 때문에 나도 굳이 말을 하진 않았다.
부대에 돌아와서 대대장에게는 사실대로 보고하고 특별한 지시가 없었으므로 그대로 근무를 했다.
그러나 미국은 그렇게 간단한 나라는 아니었다. 가짜 군인임이 드러난 이상 그대로 넘어갈 리는 만무했다. 우선 2주만에 한번씩 나오는 봉급이 내게는 나오지 않았다. 나는 한 주간을 더 기다린 끝에 대대장을 찾아가 보고했다. 그는 상부에 알아보더니 이민국에서 육군성에 통보해서 봉급 지급대상에서 내 이름이 제외되었다고 말해 주었다. 봉급이 안 나오니까 군 복무를 계속할 필요가 없으니 알아서 하라고 했다.
나는 별 수 없이 부대 밖에서 목수 일을 찾아 나섰다. 아파트는 그대로 부대 안에 있는 아파트에 머물러 있었지만 식구를 먹여 살려야 했다. 켄터키는 연초 제조업이 발달한 곳이니까 담배 잎을 따서 말리는 품을 팔기도 했다.
보름쯤 지났을까. 드디어 영내에 있던 아파트마저 더 사용할 수 없다는 통지서가 배달되었다. 아파트마저 빼앗길 판에야 이젠 그곳에 더 이상 머물 이유가 없었다. 뉴욕으로 돌아가서 본격적으로 목수 일을 하는 것이 상책이라 생각되었다.
나는 대대장에게 찾아가서 뉴욕으로 돌아가겠다는 뜻을 밝혔더니 알아서 결정하라고 했다. 기왕 얘기가 나온 김에 누군가 만기 제대증을 받아가서 뉴욕에서 변호사를 써서 영주권을 신청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하던 것이 생각났다. 미국은 사단장 권한으로 제대증을 발급한다는 얘기였다. 나는 그 말대로 대대장에게 부탁했더니 방법을 알아보자고 일단은 긍정적으로 나왔다.
영내 아파트를 내어주려면 어차피 청소를 말끔히 해주어야 하기 때문에 나는 이틀간 청소를 하며 제대증을 기다렸다. 이틀째 청소를 하고 있던 중이었는데 아파트 앞쪽으로 내다보이는 제2연병장에 사병들이 꾸역꾸역 집합하고 있는 게 보였다. 그런가 하고 내다보고 있는데 지프가 한대 우리 아파트 앞에 와서 섰다. 중사가 뛰어 내리더니 우리 집 초인종을 눌렀다.
"강 상병이지요?"
"네."
"빨리 정복으로 갈아입고 나오시오."
영문도 모르고 따라 나서려고 했지만 그러고 보니 정복은 이미 부대에 반납한 뒤였다. 미군은 제대할 때 작업복만 제외하고는 모두 반납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작업복이라도 깨끗이 입어야지 별 수 없잖소? 좌우간 빨리 타시오."
연병장에는 부대원들이 이미 도열해 있었다. 나는 작전처 사무실로 가서 간단히 예행연습을 한 후 줄의 뒤쪽으로 가서 섰다.
"당신 이름을 부르면 앞으로 나오시오. 알겠오?"
중사는 간략하지만 분명하게 지시를 하고는 대열의 앞줄 가장자리 쪽으로 사라졌다. 잠시 동안 국기에 대한 맹세, 성조기여 영원 하라, 등 순서가 있고 곧 이어 "스페셜리스트 포오 캉..."하고 내 이름이 호명되었다. 나는 앞으로 나갔다.
"미합중국 육군성 장관은 미육군 4등 기술병 강신목에게...."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주블러 대위가 상신한 훈장이 통과되어 101 공수특전단에게 전달되고 그래서 갑작스럽게 훈장 수여식이 거행되고 있는 것이었다. 사단장 킹스턴 소장의 부관이 훈장증을 계속 읽어 내려갔다.
"귀관은 1978년 1월 9일부터 1979년 1월9일까지 보병 제2사단 72기갑연대 제1대대 전투지원중대 중대장 운전병으로 근무하는 중 항상 차량의 전투준비 태세를 완비하였으며 또한 지휘관의 충실한 통역병으로서 이중언어 구사능력을 발휘하고....." 졸지에 사단장으로부터 훈장을 받아들고 나는 아파트로 돌아왔다. 하던 청소를 마저 끝내야 하는데 마음이 싱숭생숭해서 손에 일이 잡히질 않았다.
그러고 있으려니 다음날 부대에서 대대장이 찾고 있다는 전갈이 왔다. 나는 대대장실로 찾아갔다. 그는 그 동안 밀린 봉급이 모두 소급해서 나왔으니 경리부에 가서 타가라는 반가운 소식부터 전해 주었다. 어제 받은 훈장이 당장 효과를 발휘한 것이다.
효과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대대장은 어제 받은 훈장을 보자고 하더니 이민국에다 전화를 걸어서 내가 훈장을 받았다는 설명을 하고 "이 훈장이 이 사람의 신분을 해결하는데 도움이 안되겠느냐"고 물었다. 수화기 저쪽에서 반응이 괜찮은지 얘기가 길어졌다.
"내일 아침에 이민국에 가보라고, 다시. 내가 장교 두 명을 붙여줄 테니까."
다음날 이민국에 가서 같이 간 장교가 관리와 한참동안 뭔가 얘기를 하더니 열흘 뒤에 법원 청문회에 참석하라는 통지를 받아 가지고 나왔다. 그 때는 장교가 2명 대대장은 남은 군대생활이 얼마나 남았느냐고 물었다. 이제 한 석달 밖에 남지 않았다고 했더니 그는 남은 기간을 다 채워도 좋지만 이대로 귀가하겠다면 석달이 지난 후 제대증을 우송해 주겠다고 했다.
당신은 미국에 입국할 때도 가짜 서류를 가지고 숨어 들어왔고 군대에까지 불법으로 속여서 입대하여 미합중국 정부의 재산을 소모시켰다. 그러나 당신이 받은 훈장은 미합중국 군대의 장성 투명이 서명한 것으로서 그들이 인정한 당신의 충성을 감안하여 시민권을 부여하니 앞으로는 절대 그와 같은 불법적인 행위를 하지 말고 선량한 시민이 되시오.
<33> 드디어 미국시민이 되다
제대 후 뉴욕에 돌아오니 교포사회도 3년전과 판이하게 달라져 있었다. 우선 목수들이 엄청나게 늘어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3년전 나와 일하다가 이민국에 붙잡혀 잠적했던 사람들이 한 명도 빼지 않고 죄다 뉴욕에 돌아와 있었다.
나는 수중에 돈이라고는 한푼도 없었으므로 그사이에 미국에 와있던 동서에게서 천 달러를 빌었다.
목공소를 차리자면 다른 건 몰라도 타고 다닐 밴 트럭은 한 대 사야겠기 때문이었다. 나는 천불을 가지고 포드 자동차 딜러를 찾아가 할부로 밴을 사겠다고 신청했다. 그러나 할부신청은 곧 거절되었다. 신용조회서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뉴욕을 떠날 때 은행주차장에 버리고 갔던 밴에 대한 할부금을 덜 갚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내가 이민국에 체포된 후 뉴욕을 떠날 당시 가지고 있던 밴 트럭은 아직 갚아야 할 할부금이 남아있었다. 나는 그걸 처분할 시간도 없었고 또 빚이 남아있어 차를 처분할 수도 없었으므로 모기지를 받았던 저지은행 주차장에 갖다놓았었다. 말하자면 주인인 은행에 돌려준 셈이었다.
그게 내 신용기록에 덜 갚은 빚으로 남아있는 것이었다.
나는 궁리 끝에 목수 일을 하면서 단골로 거래했던 저지시티의 m목재공장을 찾아가서 사정을 얘기했다. 그들이 누구보다 내 신용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사정이 급박했던 당시로서는 미국 물정에도 어두웠고 그 방법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공장 매니저는 여기저기 전화를 걸더니 나를 데리고 은행으로 갔다.
그는 대부담당 책임자를 만나 사정을 얘기하고 “이 사람들 기준으로 보면 빚 대신 물건을 돌려줬으니 신용을 어긴 건 아니지 않느냐”고 설득했다. 자신이 수년간 거래를 해왔지만 단 한번도 약속을 어긴 적이 없다는 얘기도 잊지 않고 덧붙였다. 얘기를 듣고 난 대출 담당은 나의 과거 기록을 찾아왔다. 미국은 역시 신용에 관한 기록이 철저해서 당시 내 차를 은행 주차장에서 찾아낸 뒤 그걸 처분해서 당시 남아 있던 빚을 청산한 내용이 상세하게 남아있었다.
은행원은 그러나 그런 기록만으로는 대출이 곤란하니 그걸 근거로 내 신용기록을 정정해보라고 일러줬다. 미국은 개개인의 신용 정보를 기록해서 보관하는 기관이 있어서 자동차를 할부로 사서 상환한 기록에서부터 전기세, 수도 요금을 제때에 내고 있는지, 신용카드는 무엇을 가지고 있으며 상환 실적은 어떤지, 또 장기 주택융자 상환은 어떻게 하고 있는지, 빚은 모두 얼마인지까지 미주알 고주알 기록을 보관하고 있다. 이런 기관이 두 군데 있어서 돈을 빌리거나 외상을 얻으려면 사회보장번호와 함께 신용 기록을 조회해 볼 수 있다.
은행원은 대출을 해주려면 이 기록에 근거해야 하는데 과거 그런 사정이 있었다면 증빙할 만한 자료를 붙여서 그 신용조회기관에 있는 기록을 정정하라는 것이다.
결국 나는 목재공장의 도움으로 신용기록을 보관하는 trw회사에 연락, 기록을 정정하고 나서야 은행으로 다시 가서 할부승인을 받을 수 있었다. 미국은 역시 경우에만 맞으면 모든 게 통하는 사회란 사실을 그 때 깨달았다. 한국으로 아주 돌아가게 될 지도 몰랐던 그때 행여나 흑심이 생겨 밴 트럭을 처분했더라면 두고두고 내 신용에 문제가 될 뻔했던 것이다.
목공일을 다시 시작한지 6개월쯤이 되었을 때쯤이었다. 어느 날 아침 일나갈 채비를 하고 있는데 전화 벨이 울렸다. 뜻밖에도 주블러 대위였다. 며칠째 뉴욕 근처의 전화국을 샅샅이 뒤진 끝에 내 번호를 찾아냈다는 것이었다.
“그래 시민권은 받았나?”
중대장은 그게 궁금했다는 것이다. 나는 제대 후 새로 자리잡기에 급급해 시민권 관계는 사실 잊어버리고 있던 참이었다.
“왜 아직까지 못 받았지? 무슨 문제가 있는가?”
나는 이민국에서 아무 연락이 없었다고 말했다. 주블러 대위는 자신이 웨스트 포인트에 있는 육군사관학교 교관으로 전속되었노라고 말했다. 웨스트 포인트는 뉴욕에서 두어 시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였다. 주블러 대위는 별일 없으면 주말에 나를 찾아오겠다고 말했다.
주말을 베이욘의 우리 집에서 지낸 그는 다음날 아침 나를 데리고 뉴왁에 있는 이민국으로 가서 내 시민권이 어떻게 되었느냐고 따졌다. 이민국 직원은 안으로 들어가 내 서류를 찾아왔다.
“이 사람은 신분을 증명할만한 서류라곤 제대증밖에 없군요. 영주권은 물론 여권도 없으니까요. 그래서 한국 정부에 조회중입니다. 도대체 북한출신인지 남한출신인지도 확인이 안 되니까요.”
“그 조회란 게 언제나 되는 겁니까? 이민법정에서 엄연히 시민권부여를 결정한지가 반년이 다 되어 가는데...”
“사실은 2차조회가 됐어요. 그러나 마지막으로 한번 더 조회할 일이 남았어요. 한국에서 공산주의활동이나 범죄기록이 있는지를 알아야 하거든요.”
이민국 직원은 안경너머로 커다란 눈을 굴리며 설명했다. 조회결과가 나오는 대로 연락하겠으니 주소가 정확한지 확인을 해주고 가서 기다리라고 덧붙였다.
중대장 덕분인지 그후 한 달이 채 못되어 이민국에서 출두하라는 통지서가 날아왔다. 뉴왁에 있는 이민국에 가서 통지서를 내밀고 나서 10여분을 기다리니 스피커에서 내 이름을 불렀다.
이민국 직원은 백지 한 장을 내어놓더니 '나는 학교에 간다'라고 영어로 써보라고 했다. 나는 자신이 없었지만 훈련소에서 배운 실력으로 대강 그려냈다. 'i go to...'까지는 무난히 썼는데 그 다음이 문제였다. 그녀는 얼굴에 주름을 잔뜩 잡으며 빙그레 웃더니 ⌈s,c,h,o,o,l⌋ 하고 바른 스펠링을 불러주며 받아쓰라고 했다. 단어 몇 개를 더 받아쓰게 한 뒤 그 여자는 집에 가서 기다리면 시민권을 받아가라는 연락이 갈 거라고 일러줬다.
그리고 나서 두어 달이 더 지나서 나는 드디어 시민권선서를 하러 오란 통지를 받았다. 이번엔 이민국이 아니고 역시 뉴왁에 있는 그럴듯한 석조건물이었는데 2층에 가니 나말고도 새로 미합중국 시민이 될 사람이 100여명 기다리고 있었다.
얼굴에 주름이 조갈조갈한 법무부 직원은 영주권을 내놓으라고 말했다. 없다고 하자 “그럼 여권을 내놔요”라고 말했다. 나는 그것도 없다고 말했다.
“그럼 어떻게 미국에 들어왔어요?”
나는 내 서류철에 설명이 있을 거라고 말했다. 늙은 직원은 서류를 들고 뒷자리에 앉아있는 수퍼바이저일 듯 싶은 흑인남자에게로 가서 뭔가를 의논했다. 그는 내용을 미리 알고 있었는지 '군에서 특별사면을 어쩌고...'.하며 설명해줬다. 판결문등 서류를 검토한 여직원은 그래도 이해가 안된다는 표정으로 “나 원, 영주권도 안 받고 시민권 받는 사람을 보긴 처음이네”하고 고개를 보일 듯 말듯 가로 저으며 “이름과 소셜 시큐리티번호가 맞나 확인한 후 서명해요”하며 서류를 내줬다.
그리고 나서 얼마 뒤 검은 법복을 입은 판사가 엄숙한 표정으로 뭐라고 연설을 하고 나서 다같이 손을 들어 선서를 한 뒤 우리는 한 명씩 호명되어 시민권을 받았다.
시민권을 받고 나서 한국에 있는 아이들을 초청하니 곧바로 이주가 허락되었다. 그게 80년 1월이었으니 샌프란시스코를 통해 밀입국한지 7년만이었다. 코흘리개였던 맏딸은 그 사이에 어엿한 처녀로 성장해 있었다. <다음 회는 강목수의 어린시절이 연재됩니다>
**** 강목수의 미국 이민수기 더 보기 / 브레이크뉴스 미국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