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한국에서는 역사 교육에 대한 필요성이 재논의 되고 있지요.
늦었지만 좋고 필요한 논의라고 본인은 생각합니다.
역사는 보는 시각에 따라 달라지는 주관적 사고의 결과이기도 하거니와 그렇기때문에
지배적이고 군림하고 있었던 자들이나 조직들이나 국가들 위주의 시각과 주관적 해석에 의해
기록 되어졌으리라고 보는 것이지요.
쟤가 중국 서안을 방문한 것은 1995년 홍콩을 부임했던 기간동안이었읍니다.
병마용 등 대단한 중국의 유적지도 보았지만 서안 역사 박물관을 들렀던 기억을
얘기 하려합니다. 여느 박물관처럼 거기도 시대별로 방이 만들어져있었고
아마 한나라때의 지도를 그려 놓은 것으로 기억하는데 분명히 그 지도에는 한사군의
위치가 요동반도 왼쪽에 위치해 있었지요.
그런데 그 후 15년여가 지난 2011년에 서안을 방문하여 서안 박물관을 가 보았을때
예상한대로 치밀한 동북공정의 결과물들만 가득차 있었지요.
과연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한 민족의 현실이
고조선과 한사군 시절의 우리 선조들의 역사를
당과 신라가 협력하여 백제 고구려를 제압하였지만
중국의 동북공정지도에는 백제 고구려가 당으로 표기가 되어있는 그러한 역사를
되풀이 하고 있지는 않은지를 .....
아래는 어느 사이트에서 퍼온 글이고 내용이 많아 저도 아직 다보지를 못하였습니다.
객관적 시각을 가지고 좀 검토들 해보시지요.
============================================================================아래 퍼온 글
나라를 다스리는 지도자를 옛날에는 왕, 황제, 혹은 아우구스투스, 카이저 등 여러 호칭으로 불렀다.
동양권에서 군주의 호칭을 황제 혹은 왕이라 칭한 경우가 많다.
황제라는 표현은 진시황이 처음 만든 용어로 전국시대를 통일한 그는 자신의 덕이 삼황보다 높고,
공이 오제보다 뛰어나니 삼황과 오제에서 각각 한 글자씩 떼어 황제라는 호칭을 만들었다.
그래서 동양권에서는 지상 최고의 절대권력자를 황제라고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몇 몇 사람들은
고구려, 백제, 신라 임금들에게도 황제라는 칭호를 붙여야 한다고 주장을 한다. 물론 발해, 고려에서
스스로를 황제라 칭한 기록이 몇 보이지만, 고구려와 백제, 신라에서 자국의 군주를 황제라 칭한 기록이 없다.
고구려인이 남긴 당대 기록물인 광개토태왕릉비와 신라인들이 남긴 진흥왕 순수비에는 자국의 군주를
일컬어 태왕(太王) 혹은 왕(王)이라 일컬었다. 이 기록물들은 당대인들이 남긴 기록이기 때문에
그 어떤 사료들보다 가치가 뛰어나다. 이를 통해 고구려와 신라는 자국의 임금을 스스로
태왕이라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흔히 왕이라는 칭호를 제후국의 군주명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인식이다. 우리가 황제를 최고라 여기고, 우리의 옛 임금에게 황제라는 칭호를 갖다바치는 것은
중화사상에 물든 것과 다름이 없다. 황제라는 칭호를 써야 자주국이고, 왕이라는 칭호를 쓰면
제후국인가? 그런 흑백논리는 누가 정한 것인가?
고려 경종은 비록 대외문서에 스스로를 왕이라 정했지만, 내부적으로는 태평이라는 연호를
사용한 바 있다. 게다가 고려왕은 스스로를 짐이라 부른 기록이 있으며, 봉작제를 실시한 바 있다.
이를 통해 우리의 선현들은 비록 자신들의 임금을 왕이라 불렀지만 그 왕이라는 칭호가 저 오만한
중국의 황제와 동격이라 여겼던 것은 아닐까?
또한 백제인들이 당대에 남긴 유물 무령왕릉에는 지석이 발견되었다. 지석이란 토지신에게
토지를 매입한다는 매지권으로 무령왕릉 지석은 삼국시대 능에서 발견된 유일한 매지권으로 당시
사람들의 매장풍습을 알려주는 귀중한 유물이다. 여기에 백제 무령왕을 왕이라 칭하고 있지만,
그 임금의 죽음을 제후국 왕의 죽임인 훙薨이 아닌 붕崩으로 적고 있다.
더군다나 백제의 임금은 스스로를 대왕이라 부르며, 일본왕을 후왕으로 삼았고, 북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사법명, 찬수류를 왕으로, 해례곤, 목간나를 후로 봉하였다.
즉 이를 통해 당시 백제인들이 자국의 임금을 왕이라 불렀지만, 그 위치를 중국의 황제와 동격으로
본 것을 의미한다. 이를 통해 우리의 선현들이 자국의 임금을 왕이라 불렀다고 해서 그것이
사대주의의 발로가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왕은 고대 동이족들이 그들의 군장을 부르는 최고의 호칭, 즉 최고 통치자를 뜻하는 말이다.
王이란 글자를 잘 보라. 하늘과 땅을 매개하는 사람, 즉 무격의 의미가 들어있지 않는가?
고대에는 임금이 지금처럼 정치에서의 최고 통수권자가 아니었다. 고대에는 정치보다는 종교,
즉 하늘과 땅을 매개하는 무당의 역할, 다시 말하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제사장의 권한이
임금의 자질이요, 상징이었다. 지금도 부리아트 족에서는 제사장이 가장 높은 어른으로 대접받고 있다.
고대에는 자연현상을 하늘의 뜻이라 여겼다. 그런만큼 하늘의 기후를 잘 살피고, 하늘의 뜻을
헤아리는 제사장이 그 시대의 지도자였다. 한인(桓因)과 한웅(桓雄), 단군(檀君) 역시 정치적 권한보다는
제사장의 권한이 강한 기능을 가진 지도자였다.
천자가 하늘에 제사 지내는 봉선의식이 있다. 이는 동이족에서 비롯된 고유 전통이다. 그런데 하늘에
제사지낸다는 것은 천자임을 인정받는 것이다. 즉 한인, 한웅, 단군은 천자였다.
그리고 한인, 한웅, 단군은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무격 지도자 즉 王인 것이다.
우리는 중국과 다른 독자적 호칭이 있었다. 단군, 한, 천왕, 태왕, 성왕, 신왕, 명왕 등 우리 고유의
황제식 표현이 있었다. 일부 사람들은 고구려 임금의 명칭에 모두 황제라 붙여야 한다며 추모성왕 대신
추모성제, 광개토태왕 대신 광개토대제 이런 식으로 부르기도 한다. 그렇지만 고구려사를
연구하는 서길수 교수의 고증에 의하면 고구려 임금의 호칭은 태왕이며, 이 태왕의 의미는
왕 중의 왕, 즉 황제를 뜻한다고 한다. 즉 왕이라는 호칭이 들어간다고 해서 그것이 사대는 아닌것이다.
왕 앞의 太나 大, 聖 등은 왕을 꾸미는 미사어구지, 사실 태왕이든 대왕이든 다 왕인 것이다.
아무튼 서길수 교수 고증에 이어 김용만 선생은 태왕이야 말로 군주에게 부여하는
최고의 호칭이라고 한다. 태왕은 인간에서 가장 존귀한 존재에게 붙이는 호칭이라 한다.
사기 봉선서, 회남자 등에 보면 天一, 地一, 太一이란 말이 흔하다. 하늘과 땅과 인간을 세상을
구성하는 3가지 요소로 보았고,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태일이라는 사고를 갖고 있다.
그렇기에 고구려나 신라 임금들은 자국의 군주들을 태왕이라 부른 것이다.
태왕에 대해 조금 더 부연 설명하겠다. 앞서 천일, 지일, 태일이라는 말을 언급했다. 천일,
즉 하늘을 뜻한다. 그런 하늘을 다스리는 지도자는 당연히 천왕이다. 천왕은 곧 신이요,
태일을 낳게 해주는 존재다. 고구려 사람들은 천왕을 바로 해모수라고 생각하였다.
해모수가 곧 천왕랑이다. 그리고 땅은 지왕이 아닌 地神이라고 보았다. 천왕과 지신.
이것이 바로 천왕지신총 벽화무덤에서 정확히 드러난다. 그렇다면 이제 천왕의 아들인
인간의 왕은 곧 태왕, 즉 온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자는 누구인가. 바로 고구려의 태왕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구려는 중원식의 황제라는 짜집기 말이 아니라, 고대 동아시아 우주관에서
나온 태일의 왕, 즉 인간 세상에 최고 존귀자라는 태왕이란 말은 쓴 것이다.
원래 왕(王)은 동이군장들의 호칭이었다. 이는 중국고대사를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다.
칭제를 마치 무슨 독립국의 행세나 자부심의 상징으로 생각하면 안된다.동이군장들에게는
'황제'란 호칭이 없었다. 공식칭호가 '왕'이었다. 王이란 말자체가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사람이란 동이족의 한자인데... 더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원래 帝는 산사람이 아닌 우주조화를 주관하는 신격이다.오제신앙의 동 청제, 서 백제, 남 적제,
북 흑제, 중앙 황제...원래 이승의 개념이 아닌 帝를 가지고 와서 어거지로 붙인 것은마치
산사람에게 고사지내듯 두번반, 세번 절하는 것과 같다.
칭제는 원래 의미가 없는 열등의식의 표출이다.
황제 칭호를 붙이면 그것이 자주요, 최고라는 의식도 어떻게 보면 중국의 문화를 사모한
옛 조선시대 서인 및 노론 위정자들과 다를바 없다.
하늘과 땅과 사람을 이어주는 존재, 신은 아니지만 신과 인간을 이어주는 존재,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고 존귀한 존재 이런 존재를 당시 사람들은 천자라 불렀다. 그리고 이러한 천자를
잘 표현하는 말은 바로 王이다. 왕이야 말로 최고의 호칭이다.
중국 요서에서 '임둔(臨屯)' 봉니 출토
연합뉴스 / 기사입력 2002-04-11 08:30 | 최종수정 2002-04-11 08:30
한사군(漢四郡) 위치 재검토 필요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기원전 108년 한(漢)나라가 위만조선을 무너뜨리고 그곳에
설치했다는 낙랑.임둔.현도.진번의 이른바 한사군(漢四郡) 가운데 '臨屯(임둔)'이라는 글자가
적힌 봉니(封泥) 유물이 중국 요서 지역에서 출토됐다.
이는 한사군이 설치됐던 장소, 즉 위만조선의 통치강역이 평양을 중심으로 한한반도 북부 및
만주 요동지역 일부이며 이 중에서도 임둔군은 한반도 북부에 자리잡았다는 학계 통설을 전면
재검토하게 하고 있다.
중국 지린대(吉林大)에서 중국 요서지역 청동기시대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복기대
단국대박물관 연구원은 최근 발간된 학술지 「백산학보」 61집에 기고한 논문
<'임둔태수장'(臨屯太守章) 봉니를 통해 본 한사군의 위치>에서 문제의 봉니 출토사실을 소개했다.
봉니란 고대 중국이나 메소포타미아 등지에서 공문서 등을 봉할 때 사용한 진흙덩이로,
예외없이 직인이 찍혀 있다.
이 논문에 따르면 '임둔태수장'이라는 글씨가 전서체로 음각된 봉니는 중국 랴오닝성(遼寧省)의
해안도시인 진시시(錦西市) 소황띠(小荒地)라는 고대 성곽에서 지난 93-94년
지린대박물관과 랴오닝성 고고문물연구소 조사팀에 의해 발굴됐다.
해안에서 30㎞ 남짓 내륙으로 들어간 곳에 자리잡은 이 유적에서는 기원전 20세기까지
올라가는 하가점(夏家店) 상층문화를 비롯해 후대의 요나라 시대에 이르기까지 크게 4개로
구분되는 문화층이 확인됐다.
이 중 '임둔태수장' 봉니(3 x 3㎝)는 중심 연대가 서한(西漢)인 제3문화층에서'丞'(승)이라는
글씨가 적힌 또 다른 봉니 등과 함께 출토됐다.
'임둔' 봉니는 문헌이나 다른 지역 출토 봉니 연구성과를 검토할 때 규격과 서체, 문장 등이
서한의 규정과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한나라) 중앙에서 임둔군 태수(군 우두머리)에게 보낸 것이
확실하다고 논문은 말했다.
따라서 이 봉니가 발견된 곳이 한사군 중에서도 임둔군에 속했을 가능성이 매우커졌다고
복기대씨는 평가했다.
한국상고사 최대 논쟁거리였던 한사군 위치 문제는 단재 신채호와 위당 정인보로 대표되는
만주설과 제국주의시대 일본 학계 및 해방 이후 남한.일본학계의 평양중심설이
팽팽히 맞서다가 최근에는 적어도 강단사학계만큼은 평양 중심설로 완전히굳어진 형국이었다.
이런 흐름과 함께 학계 일부에서는 한사군 중에서도 낙랑군과 현도군을 제외한임둔군과
진번군의 경우 존속 시기가 대단히 짧고 그 흔적이 기록이나 고고학적 유물로도 뚜렷이
확인되지 않는 점을 근거로 '가상의 군(郡)'이라는 주장까지 대두되고 있다.
하지만 이번 '임둔' 봉니 출토로 적어도 임둔군이 실재하지 않았다는 학설은 결정적인
타격을 받게 됐으며, 임둔을 비롯한 한사군의 위치 문제 또한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논문은 덧붙였다.
임둔군은 사마천의 「사기」와 반고의 「한서」 등 기록에 따르면 한 무제 건봉(建封)
4년(기원전 108)에 설치됐다가 20여년만인 기원전 85년에 폐지됐다.
한사군에 대해서는 간략히 알아보겠습니다. 현재까지 학계에 남아있는 한사군의 설치문제,
도대체 한사군의 설치연대가 언제입니까? 서기전 108년이요. 좋아요. 그러면 서기전 108년에
설치된 낙랑·현도·진번·임둔이라는 4군 가운데 가장 오래 존속된 것은 무슨 군이죠? 낙랑군입니다.
낙랑군의 멸망연대는 언제입니까, 그럼? 313년! 전부 박사들만 모였네! 설치에서
멸망까지 도합 421년입니다. 중국의 역대왕조 가운데 하나의 왕조가 400년 이상 존속한 것이
몇개나 됩니까? 단 한개도 없습니다. 그럼 300년 이상 존속한 왕조는 몇개나 될까요?
그것도 없습니다. 한국에는 500년 이하의 왕조가 거의 없습니다. 없는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우리는 이하가 없고 중국은 이상이 없습니다. 여기서부터 우선 역사의 질(質)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200년에서 250년 사이의 왕조가 4개 있었는데, 즉 한(漢)·당(唐)·송(宋)·명(明)나라입니다.
그런데 한사군의 종주국가는 한나라입니다. 한나라는 서기 8년에 망합니다. 그러면 종주국인
한나라가 망해 버린 때부터 305년동안 종주국이 없는 식민지가 과연 존재할 수 있었겠습니까?
도저히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낙랑군이 평양에 실존했었다는 것은 실사(實史)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건 동화 같은 얘기입니다. 아니 초등학교 학생한테 물어보아도
알 수 있는 얘기를 해야 하는 저도 참 바보 같군요.
(+허구의 종족 짱골라 왕조는 한, 송, 명 3왕조 뿐입니다. 이를 제외한 나머지 왕조들은
모두 이민족들이 세운 것이죠. 수나라와 당나라는 흉노계 선비족 왕조이며 진시황의
진나라마저도 서융계 국가입니다. 청나라 역시 고구려와 발해 후예인 여진족 왕조입니다.)
여기서 저는 학문을 논하자는 것이 아니라 상식을 말하는 겁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종주국가가 서기 8년에 망했는데, 그 식민지는 313년까지 존속했다는 것이 동화입니까,
역사입니까? 역사도 동화도 모두 아닙니다. 동화는 논리가 없어도 되는 겁니까? 오히려
동화야말로 어린애들이 알아듣기 쉽게 논리가 정연해야 됩니다.
사기(史記)라는 사서는 한무제(漢武帝)의 신하였던 사마천이 쓴 목격기입니다. 사기가
완성된 때가 서기전 100년입니다. 사마천의 그 때 나이 27살이었습니다. 약관의 27세 때
한사군 전쟁을 직접 보고 적은 기록이 조선열전(朝鮮列傳)입니다. 사기 조선열전에는
낙랑, 현도, 진번, 임둔이라는 4군이 없습니다. 사학에서는 이런 자료를 1차사료라고 합니다.
1차사료인 목격담 속에 낙랑현도진번임둔이 없는데, 우리는 뭐가 아쉬워서 자꾸 그 이름들을
외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사기 다음에 쓰여진 중국정사가 한서(漢書)입니다. 한서는 서기 80년 경에 쓰여졌는데,
한사군 사건으로부터 말하면 200년이 채 안되는 180년 이후에 쓰여진 기록입니다.
그런데 한서는 사기의 조선열전을 복사기로 복사를 해 놓은듯 똑같이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한서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사기 조선열전의 '수정조선위사군(遂定朝鮮爲四群)'이라는
기록을 '수멸조선위낙랑현도진번임둔(遂滅朝鮮爲樂浪玄兎眞番臨屯)'으로
바꾸어놓았다는 점입니다. 어떤 사람(반고)이 8글자를 가필을 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한서에서부터 '낙랑현도진번임둔'이라는 8글자가 나온 것입니다.
남대문을 구경한 사람이 서울얘기를 하는 것과 남대문 구경도 못한 사람이 서울
얘기하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정확하겠습니까? 그러니까 한사군 전쟁이 일어난 시절에
태어나지도 않았던 반고(班固)가 적은 한서(漢書)가 정확하겠어요, 아니면 한사군 전쟁이
났을 때 한무제의 신하였던 약관 27세의 사마천이 적은 기록이 정확하겠습니까? 게다가
사기 조선열전의 기록을 볼 것 같으면, 우리가 상상하는 한사군과는 완전히 정반대의 기록이
나옵니다.
한국사람의 마음 속에는 '한국은 외국과 싸우면 의례히 진다'라는 패배의식이 한국사관에
의해 알게모르게 드리워져 있습니다. 중고등학교나 대학에 와서 배운 역사라는 것이 전부
싸움에서 지는 것이었습니다. 한무제의 육해양군(兩軍)과 위만조선의 군대가 싸웠으니까,
보나마나 또 졌겠지 하는 생각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싸움에 진 결과로 이긴 자가
설치한 것이 낙랑현도진번임둔이라는 식민지였다는 것입니다. 이병도는 그렇게 생각했겠지만,
그게 그렇지 않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한무제의 군대와 위만조선의 군대가 싸웠는데, 우리의 예상을 뒤엎고 한무제의 군대가
졌습니다. 그러나 사마천의 사기에는 '조선이 이겼다'는 얘기는 없습니다. 전쟁이 일년동안
지속되다가 끝나고 난 뒤, 한무제는 논공행상을 합니다. 육군사령관 순체, 해군사령관 양복(楊僕),
천자의 사신인 공손수(公孫遂)와 위산(衛山) 등 네사람을 앞에 대령시켰습니다.
만약 이들이 전쟁에 이긴 개선장군이라면 계급을 높여주거나 황금으로 상을 주었을 겁니다.
그런데 상은 커녕 벌을 내립니다. 벌 가운데에서도 최고의 벌인 사형을 내립니다.
사형 중에서도 최고의 사형을 내립니다. 제일 악랄한 사형, 조선조 같으면 능지처참에 해당되는,
사람을 죽여 사지를 찢어서 중국의 장안 사대문에 걸어놓는 사형[棄市]을 내려 죽입니다.
네사람 중 천운(天運)이 기시(其時)한 사람도 살아남질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논공행상
하나만 보더라도 한나라가 전쟁에 진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마천은 이렇게 자기 한나라가
졌다고 했는데, 우리 한국인은 오히려 우리가 졌다라고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분통터질 일입니다.
그리고 한사군이 아니라 조선사군이 생겼습니다. 평주·날양·추저·홰청이라는 네군의
책임자(최, 참, 음, 협)가 전부 조선사람입니다. 우리는 역사를 거꾸로만 알고 세상을 살아왔니다.
'한사군 사건'이야말로 우스꽝스런 사건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제일 마지막에 가서 '태사공 왈(太史公 曰)'이라고 한 부분이 있는데,
아주 중요한 대목입니다. 뭐라고 했는가 하면, '한나라의 육해양군은 모두 졌다'라고 했습니다.
사마천이 자기의 한나라가 싸움에 졌다고 했는데, 이병도가 나와서 '아니다,
우리가 졌다'라고 하니까 지금까지 우리가 진 걸로 생각해 왔던 것입니다. 전쟁에 직접
참여한 사마천 자신이 '육해양군이 모두 졌다(兩軍俱辱 將率莫侯矣)'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세상만사 본은 무상하다라고 탄식하며 조선열전의 붓 끝을 놓았습니다. 이런 기록을 보면서도
한사군얘기를 하는 사람은 도저히 정상인으로 볼 수 없는, 장님과 하등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서울대학에서 한사군을 얘기하는 사람이 또 한 사람 있습니다. 분통이 터집니다.
발해연안에서 산동반도에 걸쳐 평주, 추저, 날양, 홰청이라는 사군이 설치되었는데,
바로 이땅이야말로 위만조선의 땅입니다. 위만조선이 무너지면서 그 땅이 조선사람 네사람이
통치하는 조선사군으로 바뀐 것입니다. 위만조선 이전에는 그 곳이 기자조선의 땅이었습니다.
한국사를 논하면서 한반도는 언급하지 않고 왜 만주쪽을 가리키느냐 할 지 모르겠지만,
한국사의 본질은 반도사관이 아니라 이처럼 대륙사관입니다. 일본사람들이 반도사관에
역점을 두어 반도라는 것이 우리의 운명적인 강역인 것처럼 강의했습니다.
지금 국회의원들도 하등 다를 바 없습니다. 헌법개정하면서 반도 얘기하지 말라고 그렇게
강의했는데, 지금의 헌법3조를 보면 우리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로
되어있습니다.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 이것이 우리의 숙명적인 강역인 것처럼 알고있는
것입니다. 한반도는 왜인들이 우리의 머리 속에 심어놓은 강역일 뿐입니다. 한반도라는
것은 우리 민족사의 가호적입니다. 고려 이전에는 모두가 대륙에서 생겨난 역사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가호적이 본호적으로 둔갑되어있는 것입니다. 이제 한국사는 반도사관이
아닌 대륙사관으로 보아야 합니다. 고구려나 백제, 신라도 그 건국의 땅이 모두 대륙입니다.
고조선의 유물 중 대표적인 것은 청동검입니다. 그 청동검으로 미루어 볼 때 고조선은 아주 뛰어나
합금기술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현대과학으로 확인하면 주석은 13%~19%였을 때
가장 단단하다고 하지요. 그런데 고조선의 청동검에는 주석이 정확하게 13%~19%가 들어
있다고 합니다. 고조선보다 후대인 진시황의 무덤에서 발굴된 청동검은 주석비율이 21%가
넘는다는 걸 생각하면 대단한 합금기술을 가지고 있었던 게지요.
그뿐만 아니라 고조선의 청동검에는 6% 정도의 아연이 들어 있습니다. 구리와 주석의 합금인
충격이나 휨에도 견딜 수 있는 새로운 청동검을 만들 수 있었지요.
우리나라에는 전세계 고인돌의 40%가 분포돼 있을 정도로 고인돌 문화가 가장 풍부하고
다양했다. 또한 비파형 동검으로 대표되는 청동기 문화는 중국 황하 유역보다 시대적으로
임재해 안동대 교수는 밝혔다.
뼈갑옷·가죽갑옷·청동갑옷·철갑옷을 동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독자적으로 생산한 나라임을 밝혔다.
고대 우리 민족 갑옷의 전형을 이뤘다”고 강조했다.
사실을 알 수 있다는 것. 수록문에서 고조선의 갑옷 양식을 세밀하게 고찰한 박 교수는
“한마디로 고대 갑옷은 모두 고조선 문화에서 확산된 것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주장했다.
자생적·토착적 공연예술이었다는 것. 전경욱 고려대 교수는 보다 구체적으로
있었던 고대 한류로는 일본의 무악(舞樂) 가운데 우방악인 고구려악 24곡을 꼽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노예종족 허구의 짱골라
한나라를 세운 의심 많고 욕심 많은 '유방' - 유협(깡패,불량배를 순화시킨 낱말)출신
(+자격지심으로 자신을 도운 공신들 토사구팽)
명나라를 세운 역시 의심 많고 욕심 많은 '주원장' - 가난하고 무식한 농사꾼출신
(+역시 자격지심으로 자신을 도운 공신들 토사구팽)
쥐나공산국을 세운 또 역시 무식하고 탐욕스러운 '모택동' -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여러 인민들을 학살한 놈 (+쥐나의 스탈린)
이런 무식하고 탐욕스러우며 토사구팽을 밥 먹듯이 하는 비천한 출신의 조상을 둔
짱골라이다 보니 상식이 안 통하지!
지금도 짱골라들은 무조건 우기면 다 되는 줄 안다.
한국 전쟁으로 간도와 북한을 말아먹은 못된똥!
겉으로는 아닌 척 하며 뒤에서는 뒤통수 치는 것을 좋아하는 등소평!
쥐나공산국이 동북, 서북, 서남, 몽골 탐원공정을 벌이고 있는 이 때에
등소평이 남긴 말 중 다음의 말이 우리를 소름끼치게 한다.
등소평왈 "3000번을 거짓말하면 진실이 될 것이다!"
등소평의 이 말이 짱골라의 억지를 크게 대변하고 있군....
티베트를 가혹하게 압제한 공로로 쥐나의 지도자가 되어 역사 공정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후진타오!
http://blog.naver.com/xxxod/70071717538
13억 중국인 가운데 92%를 차지하고 있다는 한족(漢族)이 실제 조사 결과 '유전학적으론
현존하지 않는 제3의 혈통'으로 나타났다.
'한족은 혈통 개념이 아니라 문화적인 개념'이라는 통설이 학술연구로 밝혀졌다는 점에서
이목을 끈다. 중국 간쑤(甘肅)성 란저우(蘭州)대학 생명과학학원 셰샤오둥(謝小東) 교수는
"순수한 혈통의 한족은 현재 없다"는 연구 결과를 최근 발표했다고 중국 언론들이 15일
보도했다. 그의 연구 결과는 중국 서북지역의 소수민족 DNA 연구 등을 통해 나온 것이다.
셰 교수는 "DNA 조사 결과 현대 중국인은 다양한 민족의 특질이 고루 합쳐진 것으로
어떤 특정 민족의 특질이 도드라지게 나타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그는 "오래전부터 '한족은 중원(中原)에 살고 있다'고 생각돼 왔으나 이는 특정 시기의
한족을 주변의 다른 종족과 구별하기 위해 만든 지역적 구분일 뿐"이라면서 "이젠 한족을 그
렇게 지역적으로 따져 정의할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 예를 들어 춘추전국시대 현재의
산시(陝西)성 시안(西安)에 세워진 진(秦)은 소수민족인 '서융(西戎:서쪽 오랑캐)'이
주류였다는 것이다.
또 중국 역사에 나타나는 중원의 범위는 주로 현재의 산시(山西) 남부와 장쑤(江蘇) 서부
및 안후이(安徽) 서북부 등의 소수 지방을 포함한 허난(河南)성 일대였으나, 이곳에 거주한
사람들을 한족이라고 규정하는 것도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중국인들은 또 자신들이 "염제(炎帝)와 황제(黃帝)의 자손(炎黃子孫)"이라고 주장하지만
연구 결과 황제와 염제의 발원지도 중국인들이 오랑캐로 치부해 왔던 '북적(北狄)'
지역이었던 것으로 연구 결과 드러났다. 황제와 염제의 발원지는 모두 현재의 간쑤성과
산시(陝西)성에 걸쳐 있는 황토 고원지역으로 이 두 곳 모두 한족의 본거지가 아닌 것은
물론 주요 거주지역도 아니라는 얘기다.
셰 교수는 "연구 결과 오히려 중국 북부에서 남부로 이주한 소수민족 객가족(客家族)이 고대
중원인의 문화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밝혀졌다"면서 "이들의 고어(古語), 풍속 및 습관에서
나타나는 역사의 흔적을 보면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중원인"이라고 강조했다.
유전자로 밝혀보는 뿌리
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04/11/09/200411090500015/200411090500015_1.html
중국의 역사는 철저한 이민족에게 지배당한 역사였습니다.
한나라가 망하고, 삼국시대 이후, 사마씨에 의해서 진나라가 성립하게 됩니다.
하지만 진나라는 곧 이민족들에게
패퇴하여 남부지역에 자리잡게 됩니다. 이 시기를 일컬어서 동진이라고 하지요.
하지만 동진은 곧 망하고 이민족들에 의해서 5호 16국 시대가 개막됩니다.
동진이 망한 420년부터 오랑케 출신이 세운 수나라가 창건,된 후, 망한 618년까지 이민족의
지배를 받고, 당나라가 들어섰으나, 당나라를 세운 이연도 이민족인 선비족 출신입니다.
즉, 중국역사 420년부터 당나라가 망하는 907년간 총 487년간 한^족은 이민족의
노예였습니다. (420년~907년 487년간)
그러나 여기에서 중국의 노예역사는 그치지 않습니다.
당나라가 망하자 5대10국 시대가 도래하게 되는데 5대 10국의 주축세력은 돌궐족이었습니다.
다시 907년에서 960년 송나라가 세워지기전까지 53년의 노예 역사가
추가 됩니다. (907년~960년 53년간)
지금까지 총 540년이 중국역사 중 노예역사로 들어가게 됩니다.
하지만 중국인들은 540년간의 노예역사를 거치면서 그들의 정신세계에는
"나는 노예이다"라는 정신이 깊숙히 박혀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중국 송나라가 세워진 후에도 요나라와 금나라에 조공을 받치면서
스스로 노예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거란족인 요나라가 907년에서 1125년까지, 여진족인 금나라가 1115년에서 1234까지 존재했으니,
총 327년의 역사가 노예역사로 중국사에 편입되게 됩니다. (907년~1234년 327년간)
이런 오랜 노예근성을 버리고자 송나라는 새로이 세력을 확장하던 몽골과 연합하여
금나라를 멸망시켰으나,
노예근성에 찌들어버린 그들은, 마침내 나라까지 이민족 몽골이 세운 원나라에게 내
어주게 됩니다.
1234년에서 1368년까지 천한 농민의 자식이 세운 명나라가 나타나기 전까지
몽골 이민족의 노예로써
총 1001년간 이민족의 노예로써, 충실하게 살아오게 됩니다. (1234년~1368년 134년간)
곧이어 명나라가 나타나지만 명나라 1368년에서 1644년까지 276년간은
노예들에게는 과분한 기간이었습니다.
여진족은 이들 노예들이 자신들의 나라를 갖는것을 용서치 못하여 곧바로 이들
노예들을 응징하러 갑니다.
이로 인해서 또다시 이민족 여진족에 의해서 명나라는 멸망하고, 중국에는 청나라가
세워지게 되어 그후,
1644년에서 1911년까지 267년간을 노예로 살게 됩니다. 여기까지 총 1268년간
노예들의 역사가 이어져 오게 됩니다.
하지만 이걸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청일전쟁에서 패퇴하고난 뒤 (1644년~1911년 267년간)
20세기초부터 중국의 동북지역에서 홍콩,까지 중국의 동부지역과 내륙일부 지역이
일본에게 정렴당하고 1931년에는
일본에 의해서 만주국이 세워지기까지 합니다. 1945년 일본세력이 물러나기까지
34년간의 노예역사가 추가됩니다.
물론 여기서 노예역사가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홍콩은 영국에 의해서 156년간, 마카오는
1999년까지 포르투갈에 의해서
통치되었습니다.
참고로 진시황의 진나라 역시 허구의 종족 짱골라가 아닌 서융계 왕조입니다.
몽골학을 전공한 박원길 교수는 이 맥족의 원래 이름은 ‘코리’라고 합니다. 즉 ‘위략(魏略)’이나
[위략에는 고리(?離 : 중국식 발음으로 읽으면 [까오리])] ‘몽골비사’의 기록처럼,
맥족의 원래 명칭은 모두 코리(Khori)를 음역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특히 몽골은
‘몽골비사’에서 몽골의 기원이 이 코리족의 일부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사실 몽골 문화 가운데 한국인들과 유사한 것이 많고 외모나 체격 등도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닮았습니다.
윤내현 교수(단국대)도 이와 유사한 견해를 피력했습니다. 현재의 몽골인들의 주류 종족은
보르치긴족이라고 합니다. 칭기스칸을 배출한 종족이죠. 윤내현 교수는 이 보르치긴족이
몽골로 이주해 가기 전 북만주 어르구나하 유역에 거주했던 종족이었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 고대 북만주 지역은 고조선의 영토였다는 점에 주목하면 이들은 결국 고조선을 구성한
종족이라는 말이 된다는 것이죠. 이 후 고조선이 붕괴된 후 이 지역은 동부여 영토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보르치긴족은 한민족의 한 갈래이거나 아주 가까운 지역에 거주했던 사람들로
한민족에서 갈라져 나갔을 수도 있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몽골과 코리족들은 형제,
또는 자매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지요.
흉노는 중국어로는 슝누[xiongnu]인데 몽골어의 훙(XYH)에서 나온 말로 문어(文語)에서는
훙누로 들립니다. 이 말의 뜻은 몽골어로 그저'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음차(音借 : 음을 빌려 표현)하여 한족(漢族)들은 흉노(匈奴)로 불렀지요. 그런데
이 흉(匈)자가 '입심이 좋은(시끄러운)' 이라는 의미이고 노(奴)자는
노예(奴隸)를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그저 '사람'이 그 민족의 명칭이 된다는 것도
거북스러운데 이것을 아예 '시끄러운 노예'라고 표기했다는 것이죠.
생각해보세요. 한국인의 명칭을 한족(중국인)이 '사기 사(詐)'와 '누더기 람(襤)'을
사용하여 詐襤(사람 : 성품은 사기를 잘치고 몸은 거지 꼬락서니)이라고 한다고 생각해보세요.
얼마나 모욕적인가 말입니다.
몽골의 원류인 동호계는 주로 해(奚 : 현재의 내몽골 지역), 습(?)
실위(室韋 : 현재의 몽골 지역) 등 입니다(『新五代史』74 契丹 ; 『北史』94 奚).
해(奚 - 여자노예라는 의미), 습(? - 큰바람), 실위(室韋 - 집에서 잘 다듬은 가죽) 등
말들이 이상하죠? 대부분 욕설에 가깝고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요? 그 이유는 이 말들이
음차(音借 : 발음을 빌림)를 한 말이기 때문입니다. 한족(漢族)들은 여전히 이들을
욕설로 부르고 있습니다. 아무리 한족을 잘 봐주려고 해도 신성한 민족이름이 이게 뭡니까?
이렇게 함부로 불러도 됩니까?
이 한자말들은 서로 다르게 보여도 발음은 모두 [쉬], 또는 [쇠]에 가깝게 나타납니다.
즉 해(奚 [x?]), 습(? [x?]), 실위(室韋 [sh?we?]) 등으로 똥고양이라 지칭하는 예(濊),
또는 예맥(濊貊)도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발음으로만 보면 이들은 예맥과는 구별이 잘 안 되지요.
결국은 철과 관련된 민족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 가운데서 해는 거란이 되고
실위가 바로 몽골이 되었다고들 합니다.
『신오대사(新五代史)』에서는 거란과 동류인 "해(奚)는 본래 흉노의 별종
(『新五代史』74 契丹)"이라고 합니다. 『북사(北史)』에 따르면, "해는 거란과 이종동류로
본래 고막해(庫莫奚)라 하였는데 그 선조가 동호의 우문(宇文)의 별종
(『北史』94 奚)"이라고 합니다. 요나라 태조가 해(奚)를 정벌하면서
"거란과 해(奚)는 언어가 서로 통하니 하나의 나라이다(『遼史』72 宗室列傳)."라고 합니다.
요나라는 자신의 발상지인 현재 내몽골 자치구 빠린줘치(巴林左旗)를 상경(上京)으로
하였습니다(『契丹國志』22 四京本末).
『북사(北史)』에 따르면 "실위는 대체로 거란의 부류로서 남쪽에 있는 것은 거란이 되고
북쪽에 있는 것은 실위라고 불렀다.(『北史』94 室韋)"고 합니다. 실위는 발음이 예맥과
다르지 않기 때문에 사실상 예맥이나 숙신과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북사(北史)』에서도
"실위는 풍속이 말갈(靺鞨)과 같다(『北史』94 室韋)."라고 합니다. 이 실위는 바로
이전의 오환·선비이며 그 후 거란·해·실위가 되고 후일 몽골이 되지요.
선비·거란·오환·해·실위·말갈·숙신·동호 등등으로 불러왔던 민족들이 실제로는
별로 다르지 않는데 한족(漢族)들이 지방의 특색 정도에 불과한 것을 완전 별개인 듯이 묘사를
한 것이지요.
선진시대에는 발(發)을 맥(貊)과 대신하여 사용하였고 한나라 때에는 조선(朝鮮 : 고조선)을
맥(貊)과 동일시합니다.
후한대(後漢代)에서는 이르러서는 고구려를 맥(貊)과 동일시하기도 하고
(『후한서』4 「和帝紀」) “부여(夫餘)는 본래 예(濊)의 땅”이라고 하기도 하고
(『후한서』85 「東夷傳」), 동예(東濊)를 가리켜서 예맥으로 칭하기도 합니다(『삼국지』「동이전」)
『후한서(後漢書)』에서는 “예(濊)·옥저(沃沮)·고구려가 본래 조선 땅에
위치해있다”고 합니다(『後漢書』「東夷列傳」: 濊及沃沮句麗本皆朝鮮之地也).
예맥은 중국의 한나라 이전에는 마치 맥과 예가 요동을 동과 서로 나누어 차지하는 것처럼
서술이 되다가 한나라 이후에는 예맥이라는 말을 보편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한서(漢書)』에는 예맥조선(濊貊朝鮮)이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漢書』24 「식화지」). 앞서 본대로 예와 맥은 하나의 범주로 봐야합니다.
예맥이라는 종족은 『관자(管子)』에서 처음으로 나타나는데 그것은 허뻬이(河北)
동북 지역에 거주하는 종족을 의미하였습니다. 따라서 지리적으로 보면 당연히 선비나
동호 등도 모두 이들로 볼 수 있습니다. 『한서(漢書)』(「소제기(紹帝紀)」)에 따르면,
예맥은 오환(烏桓)ㆍ선비(鮮卑)라는 이름으로 등장하여 중원에 위협을 주는 존재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오환ㆍ선비는 동호의 대표적인 민족이 아닙니까? 결국 동호나
예맥을 구별하기 어렵다는 말이죠.
맥(貊)은 중국의 고대 전적에서 야만족의 대표적인 종족으로 묘사되어왔습니다.
그 동안 많은 연구로 몽골 - 만주 - 한반도에 거주했던 여러 종족들이 동일한 민족, 또는
동일한 기원을 가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많은 연구와 증거들이 발굴되고 있습니다.
이제 이 점들을 구체적으로 살펴봅시다.
유 엠 부찐은 “맥족의 분포 지역은 오늘날의 랴오시(遼西 : 요하 서쪽) 지역(그 이전
시대에는 산둥반도의 일부 지역 포함), 요하(遼河) 중상류의 계곡, 랴오뚱(遼東) 반도
한국의 서북부 해안 지대를 포함한다. 그리고 예족은 지린(吉林)의 남부 및 동북만주
지역이다.”라고 정리하고 있습니다[유 엠 부찐 『고조선』(소나무 : 1990)].
북한학자 리준영은 맥족은 고대 중국 사서(史書)에 나타나는 고리국(?離國)의 구성원이며
이 고리국이 바로 북부여이고, 북한의 탁월한 사가인 리지린 선생은 이들이 동호(東胡)라고
합니다. 이 말은 맥족이 지역적인 분포나 문화적인 특성이 동호와는 구별하기 어렵다는
말이지요. 간단히 말하면 ‘동호 = 맥(예맥)’이라는 것입니다.
리지린 선생의 연구에 따르면 황해 연안과 발해만 한반도에 거주했던 종족인
조이족(鳥夷族)과 예맥족이 융합하여 기원전 2천년 경에 숙신(肅愼)이 나타났다고
하고 있습니다(리지린『고조선연구』1963). 여기서 리지린 선생이 지적하는 시기는
의문스럽지만 예맥족과 숙신족도 구분이 대단히 어렵다는 점을 분명히 지적한 것입니다.
http://weekly.hankooki.com/lpage/nation/200703/wk2007030614592237070.htm
실제로 숙신은 한(漢)나라 이전에는 허뻬이(河北) 지역과 남만주지역에서 나타나고 있고,
한(漢)나라 이후에는 흑룡강과 연해주를 중심으로 나타나고 있죠. 그런데 한(漢)나라 이전
숙신의 영역은 고조선의 영역과 대부분 겹치고 있으며, 조선(朝鮮)과 숙신이 같이 나오는
기록이 없어 숙신(肅愼)은 조선(朝鮮)의 다른 표현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동호에서 거란(契丹)이 나온 것으로 말하는데 사실 따지고 보면 이들과 몽골(蒙兀)은
민족적으로 다르지 않고 거란 또한 고구려를 구성한 민족과 다르지 않죠.
같은 주거문화, 유사한 장례문화, 같은 토템, 같은 무속(巫俗)에 언어도 같은 계열이고
생물학적 체질과 체격조건도 같은데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자연환경 변화에 따른 생활양식이
다른 것뿐인데 말입니다.
예를 들면 버드나무를 신목(新木)으로 숭배하는 사상은 흉노·몽골·거란·선비·여진·고구려 등
모두에서 공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江上波夫 「匈奴の祭祀」『ユウラシア古代北方文化』
東京 1948 227-231쪽). 참고로 선비·오환 등도 동쪽과 푸른색을 숭상합니다. 실제로
『삼국지』(「위서」), 『요사(遼史)』 등에 나타나는 오환ㆍ선비(동호)의 습속은 현대
한국인과도 매우 유사할 정도입니다.
그리고 예맥이 단순히 만주 중부에서 대동강 지역에 이르는 곳에서만 살아온 것이 아니죠.
예맥의 신화(단군신화)로 파악해 보더라도 중국의 베이징 부근으로 이동한 예ㆍ맥족들이
요동 - 만주 - 연해주 지역의 곰토템 민족들과 융합하면서 한민족이 형성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죠.
곰토템 지역으로만 보더라도 ① 유라시아 아메리카 형(시베리아 산림지대에서
광범위하게 나타남 : 야생의 곰을 종족의 수호령, 또는 수렵신으로 간주)과 ② 아이누형
(연해주에서 북해도에 걸쳐 나타남 : 곰을 사육하여 의례적으로 죽여서 나눠 먹지만 곰을
조상으로 간주) 등이니 이 지역들은 사실상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서 북해도에 이르는
태평양 주변의 전 지역을 의미하고 있지요.
http://media.daum.net/culture/art/view.html?cateid=1003&newsid=20080327042013010&p=seoul
http://www.kookje.co.kr/news2006/asp/center.asp?gbn=v&code=2505&clss_cd=150810&key=20090102.22018193124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07072401032430065004
『요사(遼史)』에서는 “(거란 수도인 중경의 동부 관문인) 동경요양부는 본래 조선의
땅이라(『遼史』「地理志二」 東京遼陽府本朝鮮之地)”고 합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바와는 다르게 “요나라는 조선의 옛 땅에서 유래했으며, 고조선과 같이 팔조금법
(八條禁法) 관습과 전통을 보존하고 있다(『遼史』卷四十九 : 遼本朝鮮故壤 箕子八條之敎
流風遺俗 蓋有存者).”고 하고 있지요.
고구려나 몽골은 기원적으로 타브가치(Tabgachi : 拓跋鮮卑), 즉 선비족(鮮卑族)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이 때 사용된 ‘치(chi)’는 몽골계 언어의 인칭대명사입니다. 예를 들면
장사치·벼슬아치 등의 치와 같은 것이죠]. 이 점은 몽골이나 북방 유목민들을 연구하는
전문가들이 지적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타브가치는 흔히 탁발선비(拓跋鮮卑)라고 기록된 민족으로 북위(北魏)를 건설한
민족인데 고구려ㆍ몽골과는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습니다. 이들의 원주지가 맥족이나
몽골과 겹치고(같거나 인근지역) 있을 뿐만 아니라 언어나 풍속이 거의 같다고 합니다
[박원길 『유라시아 초원제국의 샤머니즘』(민속원 : 2001) 82쪽, 94~95쪽].
북위의 역사서인 『위서(魏書)』에는 사신이 와서 북위의 세조(世祖)에게 민족 발상지를
설명해주자 세조가 그 곳에 사람을 파견하여 축문을 새겼다는 기록이 있습니다(『魏書』「烏洛侯傳」).
그런데 내몽골 자치구 후룬뷔일멍(呼倫貝爾盟) 어룬춘(鄂倫春) 자치기(自治旗) 아리하(阿里河)
진 서북 10km 지점에 있는 천연동굴에서 이 축문 비석이 1980년 7월 30일에 발견되었다는
것이지요[박원길 『유라시아 초원제국의 샤머니즘』97쪽]. 이 비석은 아리하, 즉
아리수(阿利水) 인근에서 발견되었는데 바로 이 강 이름이 고구려의 시조가 건너간 강과
같은 이름이죠.
신석기 때 요서지역에 주로 나타나는 홍산(紅山)문화(4000~3000 B. C.)는 중국 문명인
황하(黃河) 유역의 앙소(仰韶)문화 및 용산(龍山)문화와는 성격이 확실히 다릅니다(흔히
중국인들을 앙소문화의 후예라고 합니다). 홍산 문화에서 나타난 토기는 우리 한국의 것과
유사한 반면, 중국본토의 신석기 토기 형태와는 상당히 다릅니다. 이 홍산문화는 청동을
사용하는 형태로 발전하여 하가점[夏家店 : 내몽골 적봉(赤峰) 하가점촌] 하층(下層)문화
(2000~1500 B. C.)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같은 지역에서 나타나는 하가점 상층(上層) 문화(1000~300 B. C.)는 이전과는 다르게
유목문화의 특징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죠. 즉 이전과는 달리 스키타이 동물문양들이
나타나는 등 유라시아 초원지대와의 교류를 보여주는 많은 유물들이 나타난다는 겁니다.
우리가 앞서 이미 본 비파형 동검은 바로 이 하가점 상층문화에서 나타나죠.
여기서 잠시 봅시다. 일반적으로 하가점 상층문화의 시기와 지역은 동호의 존속기간과
지역이 거의 일치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중국인들은 인심을 써서(?) 요동지역은
고조선(古朝鮮)의 문화로 요서지역은 동호(東胡)의 문화로 생각해오기는 합니다만,
요서와 요동의 문화적 차이가 무엇이 있는지 알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애초에 동호
= 예맥인 것이죠. 구체적으로 봅시다.
그 동안의 발굴된 과정에서 나타나는 주요 현상은 돌무덤에서 출토되는 것은 청동검
(靑銅劍)과 청동거울 등이 마치 하나의 조를 이루고 있고, 그 합금비율(合金比率)이
한반도·요서·요동 지역 등이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비파형 동검은 동일한 세력의
기술정보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이들은 결국 하나라는 것이죠.
그리고 한반도 중남부지역에 비파형 동검의 발달된 형태인 세형동검이 나타날 즈음
일본 열도에서는 야요이 문화가 시작됩니다. [조진선, 『세형동검문화의 전개과정 연구』
전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 2004) 참고].
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3346996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11031740465&code=960201
나아가 홍산문화 - 하가점 상하층 문화의 특성들(빗살무늬 토기·민무늬 토기·고인돌·비파형동검)은
요서 - 요동 - 만주 - 한반도 - 일본 열도에도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숙신은 만리장성 이북의 지역에서 동북아시아에 걸쳐서 거주했던 민족들을 부르는 일반적인
명칭이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숙신은 카멜레온의 몸 색깔처럼 물길(勿吉)·말갈(靺鞨)·
읍루(?婁) 등으로 불리었으며, 후일에는 여진·만주족으로 불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름들이 거의 욕설로 바뀌어졌습니다.
한족(漢族)의 사가(史家)들에 의해 재단된 것이죠. 그러나 이 숙신이야말로 우리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주체 중 하나였습니다.
중국인들은 북방 유목민들을 서융(흉노, 강), 북적(흉노, 선비), 동이(갈, 예맥) 등으로 나눕니다.
그런데 흉노·선비·갈·예맥이니 하는 명칭들은 이들 부족들이 스스로 부르는 명칭이 아니라
중국인들이 자기들이 분류하기 편리한 대로 임의로 부여한 명칭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은
인간 이하를 지칭하는 욕들입니다.
예컨대 일반적으로 우리 민족을 지칭하는 것으로 알려진 ‘예맥(濊貊)’이란 ‘똥오줌이 묻은
더러운 (승냥이 같은) 짐승’라는 뜻인데 간단히 얘기하면 ‘똥고양이’이죠. 세상의 어느
부족이 자기 부족 그렇게 부르겠습니까? 그리고 선비(鮮卑)란 동물무늬가 있는 허리띠[세르베]
(에가미 나미오 교수의 고증), 흉노(匈奴)란 ‘입심 좋은 노예’라는 뜻입니다.
물길(勿吉)은 ‘기분 나쁜 놈(재수 더러운 놈)’입니다.
http://www.sciencetimes.co.kr/search.do?query=한국인의%20고향,%20‘신비의%20왕국’%20찾았다
('찾았다'까지 복사해서 주소창에 붙여야~~)
http://news.khan.co.kr/kh_news/khan_serial_list.html?s_code=af061&page=&page=1
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04/11/09/200411090500015/200411090500015_1.html
중국인들은 사방의 오랑캐들을 이렇게 나누지만 실제로는 북적(北狄)이나 동이(東夷)는 구분하기가 어렵습니다.
세계몽골반점 동족지도자 국제평화회의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22&aid=0000053814
당시의 사정으로 보면 발해 - 통일신라사이에는 하나의 민족으로 보는 정신적 흐름이 분명히
발견된다. 통일신라(統一新羅)는 발해를 북조(北朝), 또는 북국(北國)이라고 명백히 지칭하고
있다(『삼국사기』권 10 「신라본기」; 권37 지리지). 이 당시에도 상당한 공통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통일신라가 발해에 대하여 북조(北朝)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우리가 한반도 북쪽을 북한
(北韓)이라고 부르는 것과도 다르지 않다. 즉 통일신라는 발해와 현재는 대립하고 있지만 결국은
통일이 되어야할 동족(同族) 전체의 일부라는 의식이 있었다.
참고로 인구학적으로 범위를 최대로 좁혀서 따진다면 남한은 신라의 후예라기 보다는 부여의
후예가 더 정확할 것입니다. 고구려와 백제 및 발해는 모두 부여에서 갈라져 나온 국가들이죠.
뿐만 아니라 현재 대한민국의 국명은 코리아로 불립니다. 이 역시 거슬러 올라가자면 고구려에서
유래된 말이죠.
인구 비율로 따져도 신라의 인구보다는 고구려와 백제 계통의 인구가 훨씬 더 우세했습니다.
실제로 삼국시대 신라의 인구는 백제의 인구 절반도 채 안 되었습니다. 다만 당나라의 개입으로
반도를 차지할 수 있어서 그렇지. 당나라의 개입이 없었다면 신라는 오히려 고구려-백제 연맹에게
복속되었을 겁니다. 그러니 남북국시대 신라의 인구에서 신라계는 적었습니다. 오히려 신라에
병합된 한반도 이북과 이남에 있던 고구려-백제계 백성들이 훨씬 더 많았죠.
이것이 나중에 중세고려가 일어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http://blog.naver.com/xxxod/70071717538
민족(民族),민권(民權),민생(民生)의 삼민주의(三民主義)는 쑨원(孫文, 1866~1925)이 제창한
쥐나 근대 혁명과 건국의 기본 정치 이념입니다. 그것이 공표된 것은 1905년 일본에서
쥐나혁명동맹회(中國革沒盟會)를 결성했을 때입니다. 동맹회는 창립 선언에서 ‘만주족
축출(?虜驅除), 중화의 회복(中華恢復), 공화국 건립(民國建立), 토지 소유의 균등(地權平均)’의
4대 강령을 발표하였고 동맹회가 발간한 <민보(民報)>의 발간사에서 이 4대 강령을 3대 주의로
통합해 이론 체계를 확립하였으며, 1906년부터 3대 주의를 삼민주의라는 표현으로 나타내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멸만흥한(滅滿興漢), 곧 만주족의 청(淸) 왕조를 타도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고, 민권주의는 유럽식의 공화정의 확립, 민생주의는 지주의 불로 소득을 억제하는 것을
과제로 했습니다.
다른 소수민족으로는 어떨까... 쥐나공산국이 탄생할때 모택동이 약속한게 바로
소수민족독립이었습니다.
국민당과 전쟁중에는 쥐나가 한개성 단위로 쪼개져도 좋다고 말한 사람이 바로 모택동입니다.
그래서 쥐나공의 성립후 자치구가 등장하죠.
쥐나에 55개 이상의 민족들이 있습니다. 쥐나정부가 크게 나눈 민족이 55개이고, 자잘한
민족은 훨씬 많습니다.
쥐나인민공화국 탄생시 짱골라 한족 비율은 50% 미만이었습니다. 50년만에 나머지 소수
민족들 4~50%가 우주로 이민갔습니까? 아니죠. 무늬만 한족입니다.
짱골라 한족은 어떨까? 후진타오가 공식석상에서 이런 말을 했죠.
" 현재 삼민주의가 대세니 뭐니하고, 자치권을 요구하는 무리가 많다. 이런 분열주의를
조심해야 한다. "
삼민주의, 자치권을 소수민족만이 부르짖을까? 아니죠. 저기 상해, 절강성같은 잘 사는
연해 동네에서도 부르짖는 겁니다.
자신들을 상해인이니 홍콩인이니 하면서 타지역과 다르다고 주장하죠~
순수 짱골라들도 이러는 판국입니다. 쥐나가 제일 처음 분열하는 곳은 소수민족자치구가
아니라 홍콩, 상해, 심천, 광주 같은 잘사는 지역부터 떨어져 나간다고 하죠.
짱골라들이 원나라, 청나라 때부터 티벳을 차지했다고 새빨간 저짓말을 하는데 정말 어이 없습니다.
원나라는 흉노계 몽골족의 역사이고,
금나라와 청나라(후금)은 고구려발해 후예 예맥-부여계 말갈(=여진=만주)족의 역사입니다.
하나로 통제된 쥐나의 신화가 균열 조짐을 보이고 있습니다. 쥐나가 추구하는 조화로운 사회의
저류에는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심각한 민족 갈등이 내재하고 있죠.
최근 신장 위구르에서 수많은 사상자를 낳은 소요 사태가 쥐나의 위기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주류를 형성하는 한족과 55개의 소수민족으로 이뤄진 쥐나는 문화적 지리적 언어적 다양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죠.
현재 명목적으로, 한족으로 분류되는 남부의 광둥(廣東)과 푸젠(福建)성, 하카(客家)족을 위시해
쥐나는 최근 들어 소수계들의 인종과 문화가 부각되고 있으며 정치적 환경과 경기침체로 분열이
가속화하고 있습니다.
2009년 6월 광둥의 장난감 공장에서 두 명의 위구르 노동자가 사망한 것을 계기로 조성된
신장 위구르의 불안은 7월 5일 156명이 사망하고 수천 명이 부상당하는 최악의 소요 사태로
확대됐죠.
쥐나 당국은 무슬림계를 비롯, 소수 민족이 외부의 지원을 받아 분리되는 소위 ‘코소보 효과’를
경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 쥐나의 민족갈등은 ‘공식적인’ 소수민족들만이 아닌 문제로
심화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죠. 쓰촨(四川)성과 광둥성, 상하이, 후난(湖南)성 사람들이 문화적
민족주의를 내세우면서 중앙정부의 통제에 반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주류 언론들은 요즘 쥐나의 분열 양상을 예의주시하고 있습니다. 2009년 7월 뉴욕타임스는
1면에 신장 위구르 소요 사태로 아들을 잃고 슬퍼하는 한족 부부의 사진을 싣고 쥐나 정부가
정책적으로 이 지역에 이주시킨 한족의 비율이 지난 수십 년간 40%대가 됐다며 토박이
위구르인들과의 갈등이 깊어지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월 스트리트 저널(WSJ)은 ‘쥐나의 인종 분열’이라는 제목의 특집기사를 실어 눈길을
끌었습니다. 구소련이 인종적 민족적 차이로 인해 분리됐듯이 쥐나도 같은 전철을 밟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후진타오(胡錦濤) 주석이 G8정상회의 도중 급거 귀국한데서 드러났듯 이번 충돌로 인해
쥐나 공산당은 오는 2009년 10월 야심차게 준비한 60년의 ‘조화로운 리더십’ 행사가
차질을 빚는 것은 물론, 향후 민족 분열로 이어지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죠.
2000년 인구센서스에 따르면 쥐나의 55개 소수민족은 총 1억400만 명으로 전체의 9%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92%의 점유율을 보이는 한(漢)족은 베이징 북쪽 일대부터 남쪽의
광둥성에 이르는 지역에 대부분 거주합니다. 사실 92% 한족이란 것도 실제로는 허구라는
것이 유전분석으로 밝혀졌죠.
쥐나는 그동안 중앙정부 차원에서 겉으로는 소수계의 문화와 경제 개발을 지원해 왔습니다.
청나라 말기인 1911년 국민당 지도자 쑨원(孫文)은 쥐나가 국가적 민족으로 통합되지 않아
강성대국이 되지 않았다면서 ‘삼민주의’를 주창했죠. 그는 한족과 만주족, 몽골족, 티베트족,
그리고 위구르와 카자흐가 포함된 후이족 등 이른바 ‘중국의 다섯 사람들’을 내세웠습니다.
쥐나는 역사적으로 남북으로 나뉘어 통치됐고 5개의 왕국으로 분리됐습니다. 몽골과 돌궐,
티베트는 쥐나 한족의 마지막 왕조인 명나라가 멸망한 1644년만 해도 지금보다 영토가
3배나 넓었습니다. 강력한 중앙정부가 소수계들의 언어적, 경제적, 정치적 통합을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같은 민족인 허구의 한족만 해도 만다린과 우, 웨, 시앙, 하카, 간, 남부
민, 북부 민 등 8개의 서로 다른 언어를 쓰고 있습니다.
가령 웨(越)족 사람들의 대화를 광둥 사람들은 극히 일부만 이해할 수 있고 광저우와
창저우, 샤먼 방언끼리는 대화하기가 힘들 정도입니다. 쥐나 언어학자인 Y.R. 차오 씨는 “
광둥어와 만다린어는 영어와 화란어 혹은 불어와 이탈리아어만큼 다르다”고 비유했습니다.
만다린어는 20세기 초에 쥐나의 표준어 지위를 획득했고 국제어 대접을 받지만 아프리카의
스와힐리어처럼 쥐나 내 학교에서 만다린어 교육을 시켜야 하고 아직도 많은 지역에서 다른
언어들이 쓰이고 있죠.
쥐나의 소수계는 인구 비율은 낮지만 영토 비율은 근 60%에 이르며 소수계 인구의 90% 이상이
신장과 티베트, 내몽고, 윈난(雲南) 성 지역에 몰려 있습니다. 신장은 쥐나의 6분의 1에 달하고
티베트는 다음으로 넓은 영토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지난 수십 년간 한족을 이주시키는 정책에 따라 이들 지역의 한족 비율은 1982년
10%(6700만 명)에서 불과 8년 만에 35%(9100만 명)로 높아졌습니다. 3개의 자치구를 갖고
있지만 한족의 소수계로 편입시킨 만주족은 같은 기간 430만 명에서 128% 증가한 980만 명이
됐습니다.
구이저우(貴州)성의 거라오족은 8년 만에 714%라는 믿기 힘든 증가율을 기록했습니다.
이는 높은 출산율 외에도 출신 민족을 한족에서 바꾼 결과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다른 종족
간 결혼을 할 경우 이들 자녀의 등록민족 신고는 만 18세에 결정할 수 있죠.
이 같은 증가는 형식상일 지라도 소수계에 대한 상대적인 특혜 덕분이라 할 수도 있겠죠(?).
쥐나 당국이 인구 억제를 위해 강력 추진한 한 자녀 정책을 소수계는 도시 지역을 제외하면
적용받지 않고 세제 혜택과 이중언어 사용을 통한 공직 기회의 확대, 토착 종교, 문화 활동
보장 등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물론 형식적이라 할 지라도...
이런 이유로 쥐나에서 몽골족의 양고기 스프와 무슬림의 국수, 조선족의 바비큐가 쥐나
어느 도시에서나 맛볼 수 있을 만큼 퍼져 있죠. 또한 소수계의 의복과 문화 예술이 쥐나
일반 가정에까지 확산되고 있?니다. 현재 베이징에서 가장 인기 있는 식당 중의 하나는
티베트식 체인점 ‘마케-아미’죠. 이곳에 가면 부유층이 티베트의 전통 음악과 공연을 감상하면서
미모의 여종업원의 시중을 받으며 양고기 바비큐인 ‘야크 카봅’을 즐기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상하이를 중심으로 경제 발전을 이룬 남부 사람들은 문화적 정치적 차별성을 내세우고 있죠.
코미디언들은 상하이 말투와 스타일로 교양과 사업 안목이 부족한 북부 사람들을 조롱하는
장면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베이징 사람이 상하이에서 물건을 살 때 만다린어로 말하면 값을 깎기도 어려울 뿐더러
바가지를 쓰기 일쑤입니다. 날로 높아지는 광둥성 사람들의 자각은 하카족과 남부 푸젠민,
산터우 등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 지역의 경제 발전과 북쪽 사람들로부터 당한 오랜
구속에 대한 반감은 공통적인 현상이죠.
이들 남부 사람들은 자신들을 전통적으로 한족이 아니라 남부를 기반으로 한 당나라(
A.D. 618~907)의 후예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북미와 유럽, 동남아시아의 차이나타운
대부분은 바로 이들 남부 출신 이민자들이 세운 것들이죠.
전문가들은 향후 10년 내에 경제력을 바탕으로 한 남부의 ‘당 민족주의’가 북부의 ‘허구의 한족
민족주의’에 대항하게 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국영 미디어들이 신장 자치구의 소요를
일방적인 시각으로 전달하고 티베트의 뉴스들을 은폐하는 것이 ‘허구의 짱골라 한족 민족주의’를
내세우기 위한 의도로 파악하는 시각도 있습니다.
쥐나의 경제적 역동성은 소수민족의 인종적 언어적 분화를 자극하고 있습니다. 특히
남부와 항구 등 중부와 북서부보다 경제발전이 앞선 지역들에서는 이 같은 경향이 더욱 확대되고 있죠.
지속적으로 탈중심화하는 쥐나는 내부 갈등과 인플레이션, 경제 발전의 불평등이 문화적
언어적 분화를 부채질하고 있습니다. 그 위협은 과거 중원 왕조를 종식시킨 적도 있는 남부 지방
사람들로부터 비롯될 수도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우월하고 외국에서 교육받았으며 화교의
지원을 받는 그들이....
현재 한족과 소수민족 간의 결혼으로 인해 태어난 후손 중 절대 다수가 소수민족을 포기하고
사회생활에 유리한 한족을 택한 것도 한족 양산의 주요인으로 꼽힙니다. 현재 쥐나에서
부모의 출신 민족이 서로 다르면 자녀에게 선택 권한이 주어지지만, 소수민족을 택하는
자녀는 거의 없는 실정이죠. 민족차별에 의한 압력이 사회에 암묵적으로 만연되어 있죠.
결국 한족은 ‘가짜 한족’에 대한 묵인과 ‘민족 선택제’라는 소수민족 통치 기술로 그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습니다.
쥐나 소장파 역사학자들은 소수민족을 한족의 수로 압도하려는 쥐나 정부의 ‘인해전술식’
인구정책의 결과물이 바로 허구의 한족92%라는 통계수치라고 비웃습니다.
2010-06-23 21:30 | 출처 :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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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고요. 그 시대 최고의 권력자면 칭혹 어떻든 같은 위치입니다. 황제가 없던 시절에는 왕이 최고의 지위로 후에 황제가 생긴 후에 왕이 황제의 밑으로 가지만 시대적으로 본다면 왕만있던 시절만큼은 황제와 동등한 지위라고 봐야 합니다. 즉 단군이 있던 시절은 황제라는 칭호는 물론 왕이란 칭호조차 없던 시절이니 결국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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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24 01:46 | 출처 : 본인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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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바라볼때 식민사관도 문제지만 지나친 민족주의 사관도 지양해야 합니다.
밑에분의 말처럼 상위계급이란것은 없구요.
시대별로 호칭의 차이는 있습니다.
신라도 이사금, 마립간, 이런식으로 불렸지요.. 다 그 의미가 있는 것이구요
왕이라는 호칭이 중국에서 들어온후 역시 고구려에서는 대왕이라는 표현을 합니다.
이는 여타 왕들과는 한차원 높은 왕이란 뜻이구요
중국의 경우는 황제란 표현을 쓰죠 밑에 엄청난 분량의 설명을 해주신 분의 말처럼 삼황오제에서 따온거구요
이후 고려에 들어와서는 중국문화의 영향으로 황제란 표현을 쓰게 됩니다. 이는 중국의 사대주의 사관에 대항하는 개념인데요 중국이 제후국의 개념을 가지고 있기에 우리나라는 이와 다르다는 의지였던것 같습니다. 하지만 대외적으로는 제후국으로 행동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사대정책이 강했던 조선에서 조차 시호와 묘호(황제만 사용합니다)를 사용했던것을 보면 우리민족은 중국의 제후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 같내요
호칭은 상위개념이라기 보다 시대에 따른 호칭의 결과입니다.
그나마 알수 있는 것은 호칭으로 당시 권력구조를 알수 있을 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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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28 15:57 | 출처 : 본인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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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모두(ks***) | 답변 135 | 채택률 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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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한반도의 전체 왕족을 정리하자면,
고조선시대
단군조선 : 성씨 없음
기자조선 : 행주기씨 (41대, 기준왕 : 위만에게 뺏김 / 남하, 마한건국 )
위만조선 : 성씨소멸 (장흥위씨: 당나라에서 신라로 온 사신/ 위만조선: 3대왕, 86년간 존속 )
삼한시대
마한 : 행주기씨, 청주한씨, 북원선우씨. (마한 원왕때, 백제 근초고왕에게 멸망) 부여 : 해씨 (소멸) (고씨, 부여씨로 이어짐) 진한 : (육촌)
알평 : 경주이씨, 합천이씨, 가평이씨, 평창이씨, 원주이씨, 아산이씨, 재령이씨,우봉이씨,
우계이씨, 성주이씨, 금구이씨, 차성이씨, 진주이씨,덕은이씨, 흥양이씨, 영천이씨, 진위이씨
소벌도리 : (경주, 개성, 삭녕, 동주, 전주, 함양, 청주, 충주, 영흥, 용강, 수원, 부안, 강릉,
강화, 화순, 통천, 양천, 원주, 해주, 진주, 탐진)최씨, 진주소씨, 정씨(?)
구례마 : 일직손씨를 제외한 모든 손씨
지백호 : 낭야정씨, 서산정씨를 제외한 모든 정씨, 최씨(?)
지타 : 분성 배씨, 성산 배씨, 달성 배씨, 흥해 배씨, 협계 배씨, 화순 배씨, 함흥 배씨
등 모든 배씨
호진 : 순창설씨
변한 : (6가야에서 자세히)
삼국시대
고구려 : 고씨(소멸) - 현재 남아있는 고씨는 제주도 3성 중 하나. 발해, 고려의 왕실이
고구려 왕실의 후손이라는 설이 있음.
백제 : 부여서씨 (불확실)
신라 : 경주김씨, *참고
금관가야 : 김해김씨, 김해허씨, 하양허씨, 양천허씨 (등 모든 허씨), 인천이씨,
진주김씨, ·수원김씨, 영동김씨, 무장김씨, 함창김씨
고령가야 : 함창김씨
소가야 : 고성김씨
* 6가야(금관가야, 대가야, 소가야, 아라가야, 고령가야, 성산가야 or 비화가야)의
왕족들은 신라 진골로 많이 편입되었다.
후삼국시대
태봉 : 궁예, 광산이씨
후백제 : 황간견씨, 상주견씨
고려시대 : 개성왕씨, 개성내씨
* 해주왕씨같은 하사받은 사성도 있다.
* 고려 멸망 이후 살아남은 왕씨들이 전씨, 옥씨, 용씨 등으로 성을 바꿨다고 하는데, 불명확하다.
조선시대 : 전주이씨
* 참고 : 신라 왕실에서 분적된 성씨들
광산김씨, 금녕김씨, 강릉김씨, 의성김씨, 청도김씨, 상산김씨, 언양김씨, 서흥김씨,
울산김씨, 나주김씨, 원주김씨, 부안김씨, 안산김씨, 영광김씨, 도강김씨, 개성김씨,
청주김씨, 삼척김씨, 수원김씨, 희천김씨, 영천김씨, 금산김씨, 수안김씨, 우봉김씨,
광주김씨, 강화김씨, 진천김씨, 안로김씨, 교하김씨, 밀양김씨, 월성김씨, 함안김씨 등등....
참고가 되실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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