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아버지 경성부(京城府)(서울시청)에 취직(就職)
1941년 12월 8일 태평양전쟁(太平洋戰爭)이 나자 처음에는 승리할 것 같더니 점점 불리하자 창씨(創氏)를 강요하고 징병(徵兵) 징용(徵用) 위안부(慰安婦)로 한국 사람들을 마구 뽑아가고 배급제가 실시되니 양조장도 대마도(對馬島)로 철수하여 직장을 일게 되자 아버지는 성씨를 홍중(弘中)(히로 나가)로 창씨하고서야 시청에 취직을 하시었다, 아버지께서는 일주일에 한번정도 집에 오시는데 우리 집문 앞에서 언덕에 철길이 보이여 기차가 지나가면 손 흔들고 놀다가 보면 아버지가 오시는 날은 기차에서 손을 흔들고 하시었다.
어는 날 우리들은 평상시와 같이 기차가 지나가면 손 흔들고 놀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기차에서 손 흔들어서 순영이하고 나하고 누가 먼저가나 하면서 배다리를 지나서 아버지를 마중하였는데 잠시 후 순남이가 빨가벗고 울면서 따라 오는 것을 아버지가 보시고 호되게 야단맞던 생각이 난다, 전쟁은 더욱 심하여 생필품이 모자라고 식량을 구하기 위해 배급을 탄 비누 신발을 가지고 시골로 내려가 쌀을 바뀌어 가지고 오고하는 시대였다 우리 집은 시골의 친족이라고 없고 부평에 먼 친족이 아버지와 6촌 되는 고모 한분이 계시어 어머니하고 같이 기차를 타고 부평역에서 내려 약 5리쯤 가서 개천을 건너 시골길을 따라 친족 집에 찾아가 비누와 고무신을 주고 식량을 바뀌어 왔던 생각이 난다,
♣ ☞서울로 다시 이사 오다
우리 식구는 아버지 직장 따라 서울 안암동 5가 103번지 할머니 게신 근처 92번지 일명 일곱 가구 집(* 7가구가 산다하여)으로 이사를 하여 순창이가 그 집에서 출생하였다, 나는 창영공립국민학교(昌榮公立國民學校) 2학년에 재학중이였다, 그때에는 공립학교에 입학하기가 어려울 때라 나는 계명학원(啓明學院)에 1년을 다니고 시험을 보고 창영공립학교에 입학하니 공립학교라 그런지 1학년 담임선생(擔任先生)님이 할머니 같은 일본 여선생님이시었다, 선생님은 처음부터 일본 말로만 가리키시고 한국말을 하지 아니 하였다, 등록금도 학교에서 받지를 않고 인천역 옆 우체국(郵遞局)에다 납부하였다, 등록금은 한 달의 1원50전이였다, 대동아전쟁(大東亞戰爭)시 일본군이 신카폴을 점령한 기념으로 남자는 테니스공 여자는 좀 큰 공을 주었다,
공립학교라 전학을 고려하고 소사(素砂)에 큰 외삼촌 집에서 (그 때 와삼촌은 부천역 근처 요정(料亭) 요리사로 계셨고) 나는 얼마 동안 소사역(지금은 부천역)에서 인천으로 통학하였다, 외숙모집은 부천역에서 2Km 떨어진 농촌(農村)이 였다, 봄이 되면 외숙모님께서는 복숭화 밭에서 일을 하시고 날 복숭화(복숭화 열매를 속은 것)을 가지고 오시였다, 소사에는 스미도 복숭화가 유명하여 외삼촌은 1년에 1번씩 스미도를 큰 가고에다 가지고 오시오 온 식구가 맛있게 먹은 기억도 있다,
(1) 서울 흥인국민학교로 전학
나는 어린 나이에 소사역에서 인천으로 통학하는 것이 힘이 들어 2학년 때에 서울 동대문에 있는 흥인초등하교(興仁初等學校)로 전학하였다(지금은 이대부속병원옆 동대문 교회)학교 아래가 청구여상(靑丘女商)이고 여학교와 학교 사이가 옛 성(城)터라 성이 무너져 돌이 흩어져 있는데 그늘이 저서 축축하여 지네가 많이 있는 것을 보았다, 어른들은 지네를 잡는다고 항아리에다 닭 뼈다귀를 넣어 구멍을 뚫어 놓으면 은 지내가 항아리 속으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동대문에는 청량리에서 오는 전차(電車) 뚝섬에서 오는 기동차(機動車)(전차와 같으나 설로 넓이가 좁다) 동대문에서 노량진(鷺粱津)으로 가는 전차 마포(麻浦)로 가는 전차가 모두 동대문이 종점이라 전차를 갈아타는 곳이라 복잡(複雜)한 곳이다, 그 때 전차표 한 장에 5전이고 갈아탈 댄 갈아타는 표를(노리가이 표에 다 행선지를 구멍을 뚫는다,) 받아 가지고 갈아탄다 한국 학교는 동대문에, 일본 학교는 동대문운동장 앞에, 화교(華僑)학교는 명동(明洞)에 있어 학생들이 많이 모여드는 곳이다, 그래서 학생들 사이 싸움을 많이 하는 곳이다, 화교 학생은 인원이 적어 슬슬 피해 다니고 일본 학생은 단체로 다니었다, 우리들은 동대문에 올라가서 놀기도 하고 동대문 전망대에 올라가 청량리 쪽으로 쭉 뻗은 신장 로를 바라보기도 하면 놀았다,
1945년경 대동아정쟁이 한참이라 미국 B-29 비행기(飛行機)가 이상하게도 매주 수요일이면 남쪽에서 북쪽으로 높이 떠서 하얀 연기를 뿌리면 지나가고 일본군은 고사포(高射砲)를 쏘아도 중간쯤 올라가다 터지고 하였다 우리들은 수요일 이면 공습경보(空襲警報) 싸이렝이 날줄 알고 미리 준비하기도 하였다, 어느 날 B-29 비행기가 북쪽으로 날아가면서 을지로 4가에 1개 종로4가 전매청 쪽에 1개를 비행기 휘발유(揮發油) 빈 통을 떨어트리고 지나갔다, 나는 비행기에서 떨어트린 것을 보기 위하여 전매청 창고를 가보니 큰 창고가 두 동강이 나있고 일본 헌병(憲兵)이 질서를 정리하고 알늄 같이 생긴 빈 통을 우마차에 실리는데 통이 커서 마차 뒤 바퀴를 빼서 뒤로 물려서 실고 가는 것을 보았다,
전쟁 막바지에는 초등학생까지도 동원 되여 창신동(昌信洞) 돌산에서 비행장에 깔돌을 깨면 갓난아기 주먹만 한 빵을 두 개를 주었으며 학교에서는 학생 일인당 쌀 2작(勺)식을 계산하여 1개월분 6홉짜리 전표를 주었으며 동네에서는 배급 쌀은 1인당 하루 2홉씩을 주었다, 하루의 2홉 가지고는 식량이 모자라 부모님께서는 여러 방면으로 식량을 구하러 다니시었다, 전쟁종말이라 물가는 오르고 쇠붙이는 전부 가지고 가고 가정집에서는 놋그릇이며 쇠로 된 것은 모두 받치라 하고, 물가는 오르고 공무원 봉급 약 100원인데 야미쌀(비공식거래) 한말에 30원이었다, 아버지 봉급 가지고는 도저히 살수는 없고 동네에서는 모든 것이 배급제이며 심지어 파까지도 서길용(徐吉用)가게에서 배급 카-드로 사는 시대였다, 어머니께서 미아리(彌阿里)에서 콩 께묵을 배급을 타 가지고 오셔서 물에다 담그고 몇 칠 동안 울 겼다가 먹기 도하고 그래도 모자라 호박 감자로 끼니를 잇기 도하고 아침에 밥 한 사발을 주면 남겼다가 점심을 먹던지 마음대로 하라 하시니 순택이는 남겼다가 점심을 먹는데 순효는 꼭 순택이 옆에 앉자 시치미를 뚝 때고 수저로 순택이 밥그릇에서 푹 떠서 먹으면 남몰라 하고 울던 일도 있었다,
어머니 몰래 장독에 올라가 김치만 먹던 생각이 나며 호박 감자에 물려 아직까지도 좋아하지를 않는다, 일정 때는 동태가 많아 20마리 한 궤씩 꿰여 가마에다 담아서 팔구 하였다 우리는 식구가 많아 동태 한 궤를 배급을 받아 쌀이 없어 저녁을 동대만 끓여먹었다가 채여서 30년 동안 동태를 먹지를 못하였다, 한번은 고래 고기가 배급이 나와 먹었는데 하도 맛있어 잊지를 않고 있든 차 덕표가 부산 병기학교에 있다는 연락을 받고 면회 갔다가 자갈치 시장에서 고래 고기를 파는 데가 있어 고래 고기를 사가지 고와 형제들과 같이 먹었는데 그 때 그 맛이 나지를 않고 고래 고기를 먹던 기억은 순택이가 생각이 난다고 하였다,
일정말년에는 소개령(疏槪令)(뜻;강재이주령)이 내려 가족전부가 만주(滿洲)로 가면 하루 쌀 5홉을 주고 1등 국민대우(待遇)를 한다하여 만주로 이민을 간 집이 더러 있었고 아버지도 만주로 갈려고 생각중이였다, 7 가구에서 세 살던 집도 만주로 가려고 이사 집을 마당에다 내다 놓았다가 8, 15 해방(解放)이 되어 취소하는 집도 있었다,